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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NS 떠오르는 강자 핀터레스트(Pinterest) 심층 분석
    핀터레스트의 성공 분석 보고서부 서 명뉴미디어실작 성 자강 지 용일 자2014년 6월 23 (월)개 요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이미지 기반 소셜미디어핀터레스트의 성공 요인? 본론√ 핀터레스트 돌풍○ SNS 사상 가장 빠른 사용자 증가세: 2년만에 1100만명, 現 5000만명 이상○ 2012년 3월 핀터레스트 온라인 방문건수 페이스북, 트위터에 이어 3위○ 1개월 평균 89분 소비, 페이스북·텀블러에 이어 3위 기록(2012년)○ 최근 2억 2500만 달러 투자 유치 성공, 기업가치 8조원 이상(포브스)√ 핀터레스트란?○ Pin과 Interest의 합성어, 흥미로운 이미지를 핀으로 보드에 꽂아둔단 의미○ 검색 중 관심이 있는 이미지가 있으면 클릭 한번으로 북마크(Pin It)○ 관심사가 비슷한 사용자를 팔로우하면 그가 올린 이미지가 내 보드에 올라옴○ 이미지 기반, 스크랩북 스타일 SNS로 텍스트 위주 트위터, 페이스북과 차별화√ 핀터레스트의 특장점○ 이미지 방식으로 직관적으로 빠르게 관심과 느낌을 공유하고 소통함○ 예쁜 이미지가 시선을 사로잡고 호기심을 유발하고 공유본능을 일깨움○ 많은 데이터 속 관심있는 정보를 골라 볼 수 있는 큐레이팅 기능이 장점○ 음식, 패션, 디자인, 여행지 등 주제별 이미지 분류 쉽게 관심사 찾기 가능○ 구글 사진검색, 인스타그램과 달리 큐레이션으로 새롭게 콘텐츠 생성○ 찍은 사진을 올려 공유하는 걸 좋아하는 여성들의 취향을 만족○ 여성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를 다뤄 여성들이 주사용자(약 70% 비중)? 본론√ 핀터레스트 당면과제: 저작권○ 수익사업이 되면 이미지 주인들이 저작권 권리를 주장할 가능성 높음○ 2012년 플리커가 저작권 보호를 이유로 핀터레스트를 통한 접속을 막음○ 핀터레스트 저작권 약관 변경, 저작권 침해시 해당 게시물 차단○ 수없이 올라오는 모든 게시물 관리 불가능, 저작권 문제 해결 어려움√ 핀터레스트 전망○ 사진공유는 SNS의 뉴트렌드: 페이스북의 인스타그램, 카카오의 카카오스토리○ 핀터레스트는 사진공유를 넘어 사진을 골라 보는 큐레이팅 기능으로 경쟁력○ 수익모델 못찾는 트위터와 달리 핀터레스트는 광고와 쇼핑몰 활용 가능성 높음○ 현재 쇼핑몰 링크만 제공하지만 향후 쇼핑몰 운영시 수익 파급력 상상 이상○ 구매력이 있는 3040 여성이 주 이용자층이어서 광고 타케팅에도 매우 매력적○ 이미지 기반 SNS는 쇼핑몰과의 접목을 통해 쇼셜쇼핑으로 진화할 전망√ 한국에서의 핀터레스트○ 한국어 서비스를 2014년에야 시작해 아직 사용자는 미미○ 활용방법 등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응기간 거치면 빠른 성장 예상○ 한국인은 카카오스토리 등에 이미 많은 시간 투자, 미국만큼의 성장 어려움○ 디자이너, 패션, 마케터 등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큰 인기 끌 가능성 높음√ 직접활용한 핀터레스트
    경영/경제| 2014.06.30| 3페이지| 1,500원| 조회(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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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학]중국 동북공정은 북한 점령 의도 (상세 분석 논문)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정식 명칭은 ‘중국 동북 변강지구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연속 연구 프로젝트’)은 중국의 민족관·영토관·국가관이 응축된 산물이다.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 중국 동북지구(만주)에 새롭게 적용되면서 파생된 중국의 만주관(滿洲觀)이기도 하다.중국에서 민족학 연구는 문화대혁명 시기만 해도 정체상태를 면치 못했다. 1958년 ‘반우파(反右派) 투쟁’과 ‘민족정풍운동’ 시기에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가 기승을 부리면서 소수민족의 발전을 위한 요구는 ‘지역민족주의 경향’으로 비판받았다.이 과정에서 소수민족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탄압당했으며 조선족도 갖가지 고초를 겪었다. 실제로 연변 조선족 관련 사건은 3만5000여건으로, 사망자 2000여명, 불구자 3000여명에 달했다. 희생자는 대부분 ‘반역자’ ‘외국특무’ ‘지하 노동당 당원’ ‘지하 국민당 당원’ 등의 누명을 쓴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족 다수가 북한으로 도망쳤다.그러나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회의를 갖는 사람이 늘어났고, 또 선진적인 동남연해(東南沿海)지역과 낙후된 내륙지역(주로 소수민족의 집단거주 지역이 분포해 있음)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내륙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중국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게다가 그때까지 금기시되었던 민족문제가 다시 거론되면서 일부 소수민족(신장 위구르족, 티베트족) 사이에서 분리독립운동도 일어나게 되었다.▼심각한 만주의 ‘한국 동화’ 현상▼중국이 동북공정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은 이런 내부의 위기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동북공정의 직접적 대상지인 조선족자치주의 경우 그 절박감은 더 크다 하겠다. ‘옌볜(延邊)’이라고 불리는 조선족자치주는 남한의 3분의 2에 달하는 면적에 조선족이 자치주장, 자치주 내 각 도시의 시장으로 임명되어 일정정도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행정구역이다. 자치주 내에선 조선어와 중국어가 공용어로 인정받고 있다. 자치주 내 인구의 40~50%가 조선족이며 조선족이 정치, 경제, 선 한국의 대중문화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중국보다 한 차원 높은 한국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조선족자치주에 빠르게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다.자치주 내에선 요즘 한족들 사이에서도 한국어 배우기 열기가 뜨겁다.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조선족자치주에선 같은 민족 국가인 한국에 ‘동화(同化)’되는 현상이 뚜렷한 것이다. 이는 ‘중국인’으로서의 조선족의 정체성에 혼돈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족의 한국 국적 회복운동이 중국정부를 자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중국 동북지구에서는 매년 탈북자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들도 조선족 사회에 은거·접촉하면서 조선족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인뿐 아니라 탈북자도 ‘고구려사는 한민족의 역사이며 만주의 조선족, 연해주의 고려인, 북한인, 한국인은 모두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라고 교육받아왔다.최근 미국 의회에서 탈북자 지원 법률이 통과되었는데, 법이 발효되면 탈북자 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따라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상하이박람회의 성공적 개최에 국운을 걸고 있는 중국으로선 인권문제를 외면한 채 마음대로 탈북자문제를 다루기도 어려운 상황이다.사정이 이렇게 되자 위기를 느낀 중국 정부는 인민군을 북한과의 접경지역에 집중 배치했다. 이와함께 대내적으로 조선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중국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대외적으로 중국정부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구의 역사적 상관성을 부정함으로써 동북지구와 한반도를 영구히 단절시킬 필요성도 깨닫게 됐다. 그리하여 고구려사가 중국역사의 일부라는 동북공정에 나서게 된 것이다.▼중화민족론의 前근대성▼한편 중국에서는 경제건설을 위주로 한 개혁·개방정책과 아울러 시장경제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에 접목되면서 자본주의 가치관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종래의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입각한 계급투쟁 위주의 역사관은 점차 빛을 잃고 그 대신 ‘각 민족의 단결과 인민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신중화주의(新中華主義)적 민족주국민족인 셈이고 이들의 역사도 중국사에 속하게 된다. 이때 중국민족은 ‘복합민족’으로 중국에서는 이를 ‘중화민족’으로 지칭한다. 동북공정은 이러한 중국판 ‘역사 바로 세우기’ 움직임에서 파생된 것이다.‘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중국내 민족적·지역적 모순을 해소하려는 방법으로 제시됐다. 다시 말해 중국민족으로의 ‘융화’를 강조함으로써 최근 일부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운동으로 야기된 국정불안을 극복하고 ‘국민통합’과 ‘영토통합’을 굳건히 하려는 의도다.그러나 엄연히 다른 여러 민족을 단일민족화해서 국가통합을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고육책이다. 우선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같은 민족이다’라는 설정 자체가 다분히 작위적이다. 미국 등 서구가 자국민의 인종적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국가 통합의 수단으로 삼는 것과 비교하면 중국의 전략은 전근대적일 뿐 아니라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중국은 ‘특정민족(한족)에 절대적 기반을 둔 일당 독재체제’이기 때문이다.중국정부는 분리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신장 위구르족과 티베트족을 비롯한 서부지구 거주민에 대해서는 이미 ‘서부대개발(西部大開發)’ 정책을 펴고 있고, 조선족이 집단거주하고 있는 동북지구에 대해서는 ‘동북공정’의 깃발을 치켜들었다.전자가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소외된 서부지구를 개발해 해당지구 주민의 경제적 박탈감을 해소하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중국의 동북지구와 한반도의 역사적 상관성을 부정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전자는 경제논리, 후자는 정치논리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결국 ‘중화민족관’이나 ‘동북공정’은 현재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이고위금(以古爲今)’의 전형적인 사례이자 비민주적 독재권력의 쇼비니즘적 선전선동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60년대까지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중국은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하고 그 사실을 세계사 교과서에 기술했다. 중국이 입장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브레인 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의 연구 기구와 학자들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역사 연구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몇몇 정객(政客)이 정치적 목적으로 여러 가지 그릇된 논리를 공개적으로 펼치면서 혼란을 초래함으로써, 동북 변강의 역사와 현상의 관계에 관한 연구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이 홈페이지는 ‘동북공정’의 중요한 임무가 “기존의 연구 성과를 총결하고 역량을 집중시켜 역사상의 의문점이나 문제점, 현실 속의 논쟁이나 이론상의 어려운 점 등을 적극적으로 대비·극복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동북공정’은 남북통일 등 한반도 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은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당대중국변강계열연구과제조(當代中國邊疆系列硏究課題組)가 1998년 9월에 작성한 ‘한반도 형세의 변화가 동북지구의 안정에 미칠 충격’이라는 내부자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중국 당국은 한반도 형세 변화시 대응책 마련 차원에서 1997년 하반기부터 중국 공안국변방부(公安局邊防部) 등의 지지하에 지린(吉林)성 내 북한 접경지역에 대한 조사 연구에 착수했음은 물론 청나라 때 중국-조선관계 자료를 수집·정리했다. 관련기관의 실무자들은 1998년 중국의 중앙기관에 보고서를 연달아 제출했고 결국 중국 중앙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이때 중점 업무로 제기된 것은 한반도 형세변화의 추이 조사연구, 중국과 남북한 사이의 역사상 논쟁점(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발해, 중국-조선 국경 형성,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인의 만주 이민, 조선족의 형성 등) 연구, 동북지구의 아편·종교·민족관계 문제 등의 논쟁점에 대한 조사 연구, 대규모 북한 탈출자의 출현 가능성과 그 대책 등이었다.동북공정의 본질은 정치문제, 영토문제에 있으며 학술문제는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 혹은 논리개발의 성격을 띤다. 동북공정이 단순히 학술적인 문제였다면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자 반열에 있는 정치국 위원을 비롯하여 재정부 부장, 동북3성의 부성장(副省長)과 공산당위원회 부서기(副書記) 들이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中생될 수 있고 그로 인해 중국 동북지구가 ‘한민족의 근거지’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셋째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구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조선족 사회 및 중국 동북지구에 대한 한반도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다. 아울러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야기될 영토분쟁(주로 간도문제)의 씨앗을 없애버리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중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 유사시 현재의 북한 영토인 한반도 북부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여지를 남겨두려는 것 같다. 중국측 논리대로라면 ‘고구려사=중국사’이므로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북한지역에 대해서도 중국이 영유권을 내세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최근의 외신 보도에 따르면 북한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은 UN 등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 한국과 북한은 별개의 국가로서 UN에 동시가입한 상태다. 동북공정은 ‘유사시 중국이 한반도 북부지역을 선점하는’ 시나리오까지 상정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몽골, 위구르, 티베트의 미묘한 동향▼넷째 중국정부는 남북한이 고조선사·고구려사·발해사 등을 자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것을 방치할 경우 몽골이 원사(元史)를, 위구르족이나 중앙아시아 일부 국가가 서역사(西域史)를, 베트남이 진한(秦漢) 시기 백월(百越)과 남월(南越)의 역사를 각각 자국사로 공공연히 주장하는 상황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 경우 중국역사는 여기저기 찢겨 나가고 다민족국가인 중국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가 있었던 중국 랴오닝성 환런(桓仁)시에서는 장군묘가 그동안 소재지가 알려지지 않았던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묘(墓)’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늘고 있다. 이는 고구려 시조의 묘가 중국에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려 ‘고구려의 뿌리는 중국’이라는 논리를 굳히려는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결과이다.동북공정은 한반도 통일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현재의 국제정세를 고려해볼 때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은 미국과 중국의 동의를 얻지 않는 한 이다.
    인문/어학| 2006.05.13| 9페이지| 1,500원| 조회(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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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학]姜邯贊 장군은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
    姜邯贊 장군은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강감찬은 우리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로 구주대첩에서 10만의 거란군을 수장시킨 민족의 영웅이다. 최근에는 ‘강감찬함’이라고 이름 붙여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구축함까지 만들어졌다. 이처럼 강감찬 장군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며, 지금도 살아있는 영웅임에 틀림없다.그런데, 이 위대한 영웅의 이름을 읽는 방법에 문제가 있어서 이 글을 쓴다. 왜냐하면 姜邯贊은 ‘강감찬’으로 발음하는 것은 틀린 것이며, ‘강한찬’으로 발음하는 것이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잘못 읽어온 것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틀린 것이라는 사실은 최소한 알고 있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邯’이라는 글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글자는 ‘감’으로 발음할 수 없는 글자라는 사실이다. 이 글자는 ‘한’으로 발음하는 것이 정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함’ 정도의 발음은 가능하다. 이제 이 ‘邯’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먼저 중국의 자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어느 사전을 찾아봐도 모두 ‘한’으로 발음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이를 위해 ‘說文解字’, ‘辭源’, ‘中文大辭典’을 비롯하여 최근 중국에서 발간된 ‘漢語大詞典’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찾아보았다.그러나 어디에도 ‘邯’이란 글자는 ‘감’으로 발음되는 곳이 없었다. 이 글자는 중국의 모든 사전에 ‘han' 혹은 'harn'으로 발음 표기가 되어 있었다. 중국어 사전을 보면 이 글자는 땅이름, 사람의 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어떤 경우에도 발음이 ’한‘이었다.이 글자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地名 중에 ‘邯鄲之步’, ‘邯鄲之夢’ 같은 고사성어 등을 통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곳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전국시대 조나라의 도읍지였던 ‘邯鄲’이다.교역의 중심지였던 이 지명을 읽는 발음은 ‘감단’이 아니라 ‘한단’이라는 사실은 가장 기초적인 상식 정도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邯鄲之步’이나 ‘邯鄲之夢’이라는 사자성어를 배울 때 ‘감단지보’나 ‘감단지몽’으로 읽은 적이 없다. 아마 학교 시험에서 그렇게 썼다면 오답이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중국의 발음과 우리나라의 발음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중국의 사전만으로는 ‘邯’을 반드시 ‘한’으로 읽어야 한다는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나라의 한자사전까지 조사해 보았다.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자전 중에는 ‘邯’을 ‘감’으로 표기하면서 ‘사람이름 감’이라고 한 책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한문을 정통으로 배운 사람이 짓거나 감수한 자전에는 반드시 ‘한’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 중 대표적인 자전으로 ‘동아한한대사전’을 들 수 있는데, 사전은 이가원, 유창돈, 임창순 등이 감수한 것인데, 이 세분은 흔히 일컬어지기를 정통으로 한문을 배운 마지막 세대라고 한다.이 사전을 보면 ‘邯’에 대한 음으로는 ‘한’만이 있음을 분명히 밝혀 놓고 있었다. 이처럼 ‘邯’은 ‘한’으로 발음될 수밖에 없는 글자인데, 왜 역사적 영웅인 ‘姜邯贊’에서만 ‘감’으로 발음된 것일까?그것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왜냐하면 ‘邯’에 대한 일본어의 발음이 ‘감’인데다가, ‘邯’의 앞에 있는 것이 ‘甘’이기 때문에 그 음 역시 당연히 ‘감’으로 읽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자를 제대로 공부했던 분들이 만들거나 감수한 자전에서는 ‘감’이란 발음 자체가 없는데 반해 다른 사전을 많이 참조했거나 한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약한 분들이 만든 자전에서는 ‘사람 이름 감’으로 표기해 놓은 것이 상당히 있었다.이 점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일본어 사전을 살펴보도록 하자. 한자어에 대한 일본어 발음을 보면 우리말에서 ‘한’으로 발음 되는 것은 모두 ‘강,간,감’을 합친 발음인 ‘かん’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예를 들면 ‘한국’은 ‘칸(간)코구’로 발음되고, ‘한파(寒波)’는 ‘칸(간)파’ 등이 있다. 한편 일본어에서 ‘한’으로 발음되는 것은 우리말에서는 ‘반’으로 발음된다. 우리말의 ‘반대’는 ‘한타이’로, 반분(半分)은 ‘한분’으로 발음되고 있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일본어는 문장의 순서나 표현 등에서 우리말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발음에 있어서는 남방으로부터 들어온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어 발음을 대폭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일본어의 발음에 맞도록 한자음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한’을 ‘감’으로 발음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근대식 서술이 체계화되었는데, 이 때 정리된 우리 역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사관에 기초를 둔 왜곡된 역사였고,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것을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이처럼 역사가 왜곡되는 과정에서 ‘姜邯贊’의 발음 역시 일본어의 발음을 따라가게 되었을 것이고, 그 후에는 일부 자전에서 ‘사람 이름 감’이라는 훈과 음을 그대로 싣게 된 것이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邯’을 ‘감’으로 발음하는 것은 일본어 발음에서 온 것이 거의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정책과 그것을 맹종하는 사람들의 친일적인 행동과 무식으로 인하여 지금과 같은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인문/어학| 2006.04.17| 4페이지| 1,500원| 조회(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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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문학]주홍글씨 A+ 완벽분석 감상문 (호손) 평가A좋아요
    The Scarlet Letter서론호손(Nathaniel Hawthone,1804-64)은 매서추세츠 세일럼(Salem)의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났다. 선장인 남편이 항해 중 질병으로 죽자 28세에 과부가 된 호손의 모친은 세 아이를 데리고 청교도 시댁을 떠나 유복한 중산층인 친정으로 돌아갔다. 호손이 어려서 견실한 교육을 받고 대학교육까지 거친 것은 외가 덕택이었다.호손은 오랜 뉴 잉글랜드 가문 출신이며, 그 사실은 그의 작품에 나타난 호손 자신의 조상의 과거와 뉴 잉글랜드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설명해 준다. 호손은 그의 청교도 조상들의 업적에 긍지를 느끼면서도, 그의 작품에서는 퀘이커 교도들에 대한 박해와 세일럼 마녀재판에 관여한 사실들의 포함한 그의 조상들의 과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주홍글씨는 미국 문학의 대표적인 로맨스 소설로서 여러 가지 주제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즉, “(1) 선과 악의 역설적 관계, 또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격정과 도덕적 발전 (2)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3)기독교적 죄-고립-고통-재결합 과정의 변형 (4)신성한 인간적 유대관계의 상실 (5)상반된 도덕관념의 비극적 불화 (6)청교주의의 매정함” 등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여러 가지를 주제로 설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이 작품에서 보이는 작가의 청교도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로맨스적 관점에서 본 사물의 새로운 의미, 주홍글씨(A자에 대한)에 대한 이중적이 해석 가능성과 이 소설에 나타난 인물의 대립, imagination과 intellect의 대립, 사회와 개인의 대립을 이야기하고 그 대립의 결과물로서의 이상적이고 조화로운 인간상에 대해서 논의하겠다.본론1. 주홍글씨에 나타난 작가의 헤스터와 청교도 사회에 대한 시각 비교우선 청교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겠다. “16~17세기 영국 및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칼뱅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일컫는 말. 퓨리턴이라고도 한다. 1559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에 순종하지 않고려진다."At the very least, they should have put the brand of a hot iron on Hester Prynne's forehead."(127)이러한 청교도 사회의 소속된 여인의 말은 그녀가 얼마나 잔인하고 동정심이 없는지를 보여준다. 헤스터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그녀의 죄목이고, 그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상황 즉, 그녀를 먼저 보낸 남편에게서 소식이 없고 거의 죽은 줄 알았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임을 감안하여 생각한다면 같은 여자로서 이해가 갈 법도 하지만 청교도의 여인들은 동정은커녕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잔인한 방법으로 헤스터에게 고통을 주길 원하고 있다.헤스터가 단상위에서 치욕을 겪은 후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는 많이 바뀌어 그녀는 멸시와 죄의 본보기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청교도 사회는 그녀의 바느질 솜씨를 인정해서 그녀의 바느질을 이용한다. 그녀의 바느질이 사용되는 곳은 다양해서 총독의 주름깃, 군인의 손수건, 목사, 아이의 모자, 그리고 장례식에까지 사람들이 그녀의 바느질 솜씨를 이용하지만 오직 순결한 신부에게만은 그녀의 바느질을 사용할 수 없게 한다But it is not recorded that, in a single instance, her skill was called in aid to embroider the white veil which was to cover the pure blushes of a bride.(171)이런 청교도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은 그들의 위선과 가식을 보여준다. 헤스터를 이방인 대하듯이 멸시하지만 그녀의 능력만을 이용하며, 그녀의 죄가 순결한 신부에게만 전달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안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경직과 잔인성에 위선과 가식이 첨가되어 점점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게 한다. 반면, Imaginative한 면이 강한 헤스터는 자신의 바느질에서 얻은 수익은 자신의 딸인 펄을 꾸며 주는데에자신의 부인인 Faith(여기서 부인의 이름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마저 악마의 집회에 참여한 사실을 안 후 Faith(믿음)을 찾으며 절규하는 장면이다.'Faith!' shouted Goodman Brown, in a voice of agony and desperation; and the echoes of the forest mocked him, crying,-'Faith! Faith!' as if bewildered wretches were seeking her all through the wilderness)호손은 꿈 혹은 환상의 장치를 이용해 그때까지 자랑스럽게만 여겨온 선조들의 ‘사악함’을 처음 접한 브라운의 불안한 심리를 파헤친다. 브라운이 들어가는 숲은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반청교도적 의미가 덧씌워져 악마가 출몰하고 마녀집회가 벌어지는 공간이다. 호손은 그 숲의 공간에 청교도 사회의 신실한 구성원들 전체를 고스란히 옮겨놓고 그 숲의 이미지에 인디언을 학살하고 마녀를 재판한 선조들의 과오를 겹쳐놓는다. 이러한 장면을 멜빌은 ‘in itself, such a strong positive illustration of that blackness in Hawthorne'(210)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호손이 ’blackness'를 사용함에 있어서 얼마나 탁월했는가를 나타낸다.호손의 이런 어둠을 파헤치는 기교는 그의 젊은 시절에서 온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이래 쎄일럼 도서관의 거의 모든 역사책들을 대출해가며 청교도 선조들의 저작은 물론 밴드크로프트나 허치슨등이 기술한 뉴잉글랜드에 관한 주요 역사서들 까지 두루 탐독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된 신문, 잡지, 연대기, 재판기록 등 과거의 일상적인 기록들까지 꼼꼼하게 읽고 작품의 재료로 활용하곤 했다. 이런 호손이 보기에 초기 식민지 정착기부터 원주민은 물론이고 메리마운트 주민들이나 퀘이커 같은 ‘남’에게 집단적으로 행패를 부린 앵글로쌕슨 청교도가 중심이 된 ‘우리’의 행적은 거의 ‘원죄’에 가까운 죄악이며 dly magistrates, and make a pride out of what they, worthy gentlemen, meant for a punishment? (131)위의 글처럼 헤스터가 아름답게 수놓은 그 표시는 그녀를 청교도 사회와는 다른 사람임을 보여준다. 또한 죄인의 표시로서 그녀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만든 표시가 헤스터에게는 그것을 예쁘게 수놓음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다른 이와 다르게 보이게 하여 개인을 중시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녀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이는 “A"의 표시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치욕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서도 해석이 가능함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또, 그녀가 그 표시를 달고 마을에 내려올 때면 아이들이 놀리고, 교회에 가서도 죄에 대해 자신이 예가 되어 설교 듣기가 예사이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헤스터를 비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그녀에게 가혹하였다. 그들이 헤스터의 “A"자에 생각하는 것은 죄와 치욕이다. 하지만 헤스터는 그녀가 달고 있는 글자로 인하여 새로운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죄이다.She felt or fancied, then, that the scarlet letter had endowed her with a new sense. She shuddered to believe, yet could not help believing, that it gave her a sympathetic knowledge of the hidden sim in other hearts.(176)죄의 상징인 주홍글씨로 인해 헤스터는 주위 사람들의 숨겨진 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자기들은 헤스터를 비난할 만큼 깨끗하다는 마을 사람들 안에 숨겨진 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하는데 이를 통해 겉으로 보이는 선함 밑에 어두운 면이 있을 지도 모름을 나타내고 주홍글씨를 통해 그러한 능력을 얻은 헤스터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홍글씨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죄의 상징인 동시에것으로 생각하는 그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태도가 좋은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노인의 이러한 방법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암시를 한다.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작가는 그의 천성이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친절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순수했으며 꼿꼿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딤즈데일의 내면을 광부가 금을 찾으려는 듯이 파헤치면서 조사를 시작하여 점점 악마와 같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Sometimes a light glimmered out of the physician's eyes, burning blue and ominous... like one of those gleams of ghastly fire that darted form Bunyan's awful doorway in the hill-side(246)이러한 그의 악마적인 모습은 그가 하는 행동이 파괴만 남길 수 있다는 것을 타나내고 그러한 행동이 노인의 겉모습에도 영향을 미쳐 악마처럼 변하게 된다.Had a man seen old Roger Chilling worth, at that moment of his ecstasy, he would have a precious human soul is lost to heaven, and won into his kingdom.(261)딤즈데일이 자고 있을 때 몰래 그의 가슴을 훔쳐본 후 의사의 모습을 거의 악마의 모습처럼 그리고 있다 이는 그가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려는 그의 시도, 특히 그의 논리적 과학적인 동정심의 여지가 사라지는 그의 시도는 결국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다음으로 헤스터를 볼 수 있다. 그녀는 imaginative와 passion이 풍부한 여인이다. 그것은 그가 수놓은 그녀의 죄의 상징인 주홍글씨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자신에게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오직 펄만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그녀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She had in her natur12)
    인문/어학| 2005.12.18| 17페이지| 3,000원| 조회(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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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사보고서]답사보고서 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위례성 `서울의 백제 유적(몽촌토성, 풍납 토성 등)을 답사하고 나서` 평가A좋아요
    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위례성(함께 답사한 이 : 인하대학교 강지용, 김정관, 신은실){{학교 :인하대학교학과 :영어영문학과학번 :ih11994192이름 :강 지 용-목차-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위례성1. 서론본론 : 2 . 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위례성은 어디인가?3 . 몽촌토성4 . 풍납토성5 . 석촌동 고분군6 . 방이동 고분군7 . 결론1 . 서론{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백제{) 온조왕(溫祚王)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현재의 한강 북쪽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한 고대 삼국 중의 하나(BC 18∼AD 660)는 미지(未知)의 왕국이다. 우리가 백제에 대해 아는 것은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의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적은 내용들로 인해 아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문화적으로는 금동대향로{) 국보 제 287호라는 유물, 무령왕릉{) 충남 공주시 금성동(錦城洞)에 있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라는 무령왕{)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523)의 무덤과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국가라는 사실로 인해 생긴 문화가 매우 발달한 국가라는 인식뿐이다. 그래서 나는 고구려나 신라에 밀려 관심밖에 있었던 백제 초기의 숨결을 느껴보기 위해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을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하남위례성은 백제가 처음으로 도읍한 곳이라고 일연의 와 김부식의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고찰해 본 결과 정약용, 이병도, 천관우, 윤무병, 김용국 등은 광주 고읍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김정학, 이형구 등은 풍납토성으로 보고, 이기백, 김원룡, 성주탁, 최몽룡 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비정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전북 익산, 충남 직산이 하남위례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의 결과 몽촌토성은 3세기에서 5세기의 백제 성으로, 광주 고읍에 있는 이성산성은 신라의 성으로 판정함으로써 학계에서는 몽촌토성설이 우세하게 되었다. 또 삼국사기에 나오는 하남 위례성의 지리적인 면은 몽촌토성과 풍로 이 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했다.{) 일연 [삼국유사] 1997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왕력표 백제 온조왕조에는 위례성을 다른말로 사천이라 하는데 지금의 직산{) 현재의 직산은 아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김부식의 지리지 에는 위례성에 대해 미상지명(未詳地名)으로 분류해 놓아서 그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와 의 하남의 지형에 대한 기록은 위례성이 어디였는지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하남위례성이란 강 남쪽에 있는 위례성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강은 한수(漢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한강(漢江)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고 북쪽에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다고 했으므로 바로 붙어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강 남쪽에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은 서울의 강남구 일대와 광주 평야 일대이다. 그리고 위의 기록에서 하남위례성이 산성이 아니라 평지나 적어도 여기에 가까운 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북쪽에 한강이 흐르고 있고, 남쪽으로 비옥한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는 반면,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다는 기록은 하남위례성은 평야 지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이다.왕성의 위치를 찾을 때에는 문헌 기록말고 하나를 더 주목해야 하는데, 이는 바로 고분군이다. 그냥 고분이 아니라 누가 봐도 이 정도면 왕릉급이다 할 만한 대규모 고분이,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떼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현대 한국인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죽은 이를 안장하지만, 삼국 시대에는 모두 왕성 아주 가까운 곳에다가 왕릉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확실한 한성 백제의 왕릉급 무덤은 풍납토성에서 한강 하류쪽으로 3 킬로미터 가량 내려간 지점에 밀집해 있는 석촌동 고분군이다. 일제가 1916년 조사한 바상실한 지도 오래되어 그 옛날 성안엔 민가들이 모여 촌락을 이루고 성벽과 언덕에는 여기저기 무덤들이 들어선 야산으로 변해 있었고, 단지 꿈마을 즉 몽촌이라는 이름만이 전해져왔을 뿐이다.그래서 서울대 박물관이 3년여에 걸쳐 발굴·복원한 결과 몽촌토성의 총면적은 6만 7천 평, 성의 모양새는 자연구릉을 최대한 이용하여 불규칙하지만 대체로 타원형 또는 마름모꼴 형상으로 남북 최장 730 미터, 동서 최장 540 미터이며 성벽의 총 길이는 약 2.3 킬로미터인 것으로 드러났다. 토성의 높이는 대개 30 미터이나 높게는 43 미터나 되는 곳도 있으며, 동쪽의 외곽 경사면에는 생토를 깎아내어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게다가 경주의 반월성처럼 도랑을 깊게 판 해자(垓字){)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까지 설치하였으니 토성으로서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더욱이 동북쪽 외곽에 약 300 미터 길이의 바깥 성을 일직선으로 쌓아서 보강하고, 성의 북쪽 외곽 경사면에는 목책(木柵){)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을 설치했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방의 침입을 대비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또 몽촌토성을 발굴하면서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여러 개의 저장구덩이와 여러 기의 움집터 같은 생활 유구와 무덤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출토유물을 유형별로 나누면 다양한 종류의 백제 토기류, 갑옷 파편과 철제 무기 및 마구류, 그물추, 낚시바늘, 가락바퀴, 거푸집, 돌절구, 신앙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목제오리 조각품 같은 일상생활 유물류, 백제 기와가 대부분이며 그 외에 중국제의 유물이 몇 점 들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유물을 백제토기인데, 주로 백제 초기의 회백색에 연질계통의 토기가 많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3세기 중국 서진(西晉)시대{)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에서 나온 사마 염(司馬炎:武帝)이 세운 나라(265∼316)의 회유도기(灰釉陶器) 파편도 발견되어 이 토성이 3세기 이전에 축조되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많은 결국 이 모든 것들을 근거로의 거대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성벽 약 3만 6천 평을 포함한 전체 토성의 면적은 총 26만 평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는 토성의 동벽, 동북쪽 모서리, 그리고 북벽과 남벽의 일부가 비교적 잘 남아 있을 뿐 한강에 면한 서벽은 1925년{을축년 대홍수 때 대부분 허물어져 없어졌다. 현재 토성의 동벽이 약 1500 미터, 북벽이 약 300 미터, 남벽이 약 200 미터, 서북벽 250 미터 가량 남아 있어 남아 있는 토성의 길이는 모두 2250 미터 가량이다. 또 동벽에는 거의 같은 간격으로 4군데가 크게 뚫려 바깥과 통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원래의 성문자리가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된다.풍납토성 성벽중에서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북벽을 근거로 삼아 풍납토성의 축조과정을 고찰해 볼 수 있다. 성벽은 다져 쌓기법을 이용하여 돌이 섞이지 않은 고운 모래로 엷게 한층 한층씩 다져서 쌓아 올렸으며 경사면에는 2단으로 축조한 흔적이 남아 있다. 외벽은 정상에서 약 2m 내려간 위치에서 1단의 넓은 단을 만들고 거기서부터 기울기를 줄여서 토성의 기초를 만들었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는 않으나 북벽이 약 8m 정도이다. 토성의 기초인 밑부분의 너비는 약 30m 가량 된다. 토성의 내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성벽 중에서 동벽의 외부가 패이고 물구덩이 생긴 것은 축성 당시 축성용으로 모래를 채취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풍납토성 내에서는 적지 않은 생활유물을 찾은 바 있다. 우선 1925년 대홍수 때 청동제에서 자루솥 2개를 찾았고, 1966년에 토성 안의 일부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는데, 풍납리식 무문토기, 조질유문토기, 김해식 토기, 신라식 토기, 풍납리 흑도 동의 토기와 도제 그물추, 물레가락바퀴, 기와 , 숫돌, 철제 꺾쇠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초기(백제 초기)에 축성되었음이 밝혀졌고, 그 당시 이 토성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 토성이 그곳에 올라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행위가 피장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여 아이들에게 내려오라고 호통을 쳤다. 물론 아이들은 바로 내려왔지만, 사람들의 문화유산을 놀이터로 보는 시각이 매우 아쉬웠다.석촌동 일대는 백제시대엔 지배층의 공동묘역으로 흙무덤과 함께 적석총이 떼를 이룬 것이 특색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흙무덤들은 다 농지로 변해버렸고, 돌무지가 가득한 들판에 인가가 모여 돌마을 또는 돌마리라고 불렀었다. 일제시대 당시만 해도 80기 이상의 고분이 남아있는{것으로 조사되었으나 74년 최초 발굴조사시에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3호·4호·5호분 뿐이었다. 적석총인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결합된 쌍분으로서, 남분은 적석총이며 잔존 석축 내부에서 석곽 4기가 조사되었다. 4호분 남쪽에 위치한 2호분은 석축을 축조하면서 점토를 채운 내부에서 목관 1기가 조사되었다. 3호분은 기단식(基壇式) 적석총으로 제 1단의 규모가 동서 50.8 미터, 남북 48.4 미터로 중국 집안의 최대 적석총인 태왕릉(太王陵)과 거의 비슷한 규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 3호분은 그곳에서 나온 유물들이 대개 4세기의 것이므로 고고학자들이 백제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던 근초고왕(374년 사망)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3호분의 남쪽에 위치한 4호분은 점토입방체(粘土立方體)로서 사방을 석축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다시 2단의 석축을 돌린 3단의 적석총 형태를 띄고 있다. 한편 5호분은 봉토로 덮은 형태인데,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석촌동 적석총의 상한연대는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공주로 도음을 옮긴 이후 적석총은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이 석촌동 고분공원의 적석총들이 갖고 있는 의미는 백제와 고구려의 연계성을 증명하는 자료라는 것이다. 적석총은 고구려가 많이 사용한 무덤 형식으로, 대표적으로 장군총(將軍塚) ·태왕릉(太王陵){)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기단식 돌무지무덤92
    인문/어학| 2004.03.18| 12페이지| 3,000원| 조회(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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