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연혁1. 덕수궁의 건립덕수궁은 본시 정릉동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으로 건립되었다. 월산대군은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의 형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대신 풍부한 재산과 큰 저택을 소유하게 된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신의주로 피신갔다 돌아온 선조가 이 저택을 임시 행궁으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가 광해군 때 경운궁이라 명명하였다. 금세기 들어 조선 왕조가 열강들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 러시아 공관에 잠시 피신해 있던 고종이 이 곳으로 옮겨 오고부터 경운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623년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다음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부터 270년간 별궁으로 사용되었다.2, 구한말의 덕수궁1897년 고종이 왕궁으로 사용하였으며 1907년에 고종은 일제의 압력으로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태상왕이 된 고종은 계속 이 궁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고쳤다. 순종이 왕위에 오른지 두해 만에 왕실의 실권이 거의 일본에 넘어 갔고, 고종이 기미년(1919) 1월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덕수궁은 임금이 없는 완전한 궁궐이 되고 말았다.1896년 고종은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을 할 때 태후, 태자비를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경복궁에서 시해된 민비의 빈전과 열성조의 어진(御眞)도 함께 옮겨오면서 경운궁은 궁궐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종은 아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에 전각 짓는 일을 지휘하였고 1896년에 경운궁의 준공을 보게 되었고 이듬해인 1897년 비로소 아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실질적인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로도 공사가 계속되어 선원전, 함녕전, 보문각, 사성당 등이 건립되었고 이 해에 고종은 즉조당에서 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광무 4년(1900)에 궁성(宮城)을 쌓는 일이 모두 끝났고 같은 해봄에 발전 시설이 되어 궁내에 전등을 밝히게 되었다. 광무 9년(1905)에는 경희궁으이 산만하게 남아 있다. 1922년에 일제는 본격적으로 궁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서쪽 선원전 터를 통과하는 도로를 뚫어 덕수궁을 동서로 두 동강 내었는데, 그 길이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덕수궁 돌담길’이 되었다. 일제는 새 길로 잘려 나간 덕수궁터를 미국대사관을 비롯한 외국 공사관이나 학교터 등으로 마구 불하하여 덕수궁은 만신창이가 돼버렸고, 그 결과 덕수궁은 지금의 모습처럼 규모가 엄청나게 줄어 들고 말았다. 현재 법원에서 고려병원으로 통하는 도로 북쪽 넓은 지역에 듬성듬성 보이는 큰 고목들만이 과거 덕수궁의 범위가 어디까지 였다는가를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1933년 경에는 궁내에 있던 대부분의 건물들이 훼철되었는데, 그 때 다행히 화를 면해 현존하고 있는 전각은 중화문, 중화전, 덕홍전, 함녕전, 즉조당, 준명당, 석어당, 광명문 등이다.4. 해방 후의 덕수궁1960년 대 들어서 덕수궁은 또다시 수난을 당한다. 태평로 일대의 개발로 인해 담장이 허물어져 나갔고 대한문으로부터 태평로 파출소까지 6m 안쪽으로 도로를 넓히면서 담장을 허물고 돌담 대신 철책으로 다시 담장을 친 것이다. 이 철책은 당시 관리들의 과오를 바로 잡는데까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됬다. 당시 서울시는 덕수궁을 도시민의 공원, 놀이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궁내에 스케이트 장을 만들고, 벤치를 놓는가 하면은 상점과 음식점을 지었다. 그 이후 담장은 원래의 사고석 담장으로 복원되고 궁 내부도 어느 정도는 정화되었으나, 선조 이래 갖추고 있었던 궁궐의 면모를 지금으로선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덕수궁 답사집 근처의 문화유적을 답사하라는 과제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역시 집에서 가깝고 서울에 있는 고궁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갈 친구와 의견을 나누었다. 서로 경복궁은 자주 가보았고 창덕궁은 작년에 가본적이 있어서 우리는 덕수궁으로 가기로 했다. 학교 시험과 바쁜 일정으로 쌓인 피로도 풀 겸 시험이 완전히 끝난 주 주말인 10월 30일 토요일문도 1904년 대화재 이전에는 중층으로 더 화려했었다고 한다. 중화문 해태 난간은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철제 보호대가 있었다. 아마도 내가 어렸다면, 나도 올라타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중화문 건너에는 중화전이 위엄 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덕수궁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중화전(中和殿)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종이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만 해도 중화전은 없었다고 한다. 그 후 1902년에 중층규모의 중화전을 법전으로 건립했으나 대화재로 소실되고 대한제국의 쇠락기에 세우진 지금의 중화전은 단층에 모습을 하게 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법전의 용도에 맞게 의전행사를 할 수 있도록 품계석과 조정마당에 삼도, 두단의 월대가 있었다. 중화전 천장에는 두 마리의 황금용이 서로 돌고 있는 듯 조각되어 있었고 꽃무늬 우물정자 천장으로 화려하게 되어있었다. 원래 중화전의 조정 마당은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행각으로 둘러 쌓여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잘려 나가고, 중화문의 남동쪽에 그 행각 일부가 덩그라니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중화전 조정 마당의 월대 옆으로 물을 담아 두어 화마를 물리치는 드무가 보였고 월대 양옆으로 화로도 보였다. 특이한 점은 계단의 답도의 판석에 새겨진 것이 봉황이 아닌 용이란 것이다. 우리나라 궁궐 중 대부분은 답도에 봉황이 새겨져 있으나 덕수궁만은 대한제국에 고종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더 이상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이 황제의 격식을 갖추기 위해서 봉황대신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을 새겨 넣은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중국의 직접 지배하에 있진 않았지만 조공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다했던 조선의 왕은 중국의 황제가 사용하는 용을 공식적인 상징이나 답도에서 조차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나라의 힘이 새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가로이 쉬고 있었는데 참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서 우리들도 해가 살짝 내리쬐는 자리에 않아서 잠깐 쉬었다. 쉬면서 주하거나 규모가 크지 않았고 그냥 일반 저택보다는 궁궐건물로서 기단이 높고 계단이 있다는 점 그리고 준명당과 통로로 연결돼있었다는 점이 특이한 점이었다. 즉조당의 현재 현판과 안쪽에 경운궁이라는 현판이 고종의 어필이라는 점도 이 건물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준명당 역시 분위기가 소박해 보였으며 고종의 침전으로 주로 쓰였고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으로도 잠시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석어전을 돌아 뒤로 좀 더 들어가니 우리나라 전통 건축양식이 아닌 특이한 양식의 건물인 정관헌이 눈에 들어왔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 몇 채의 서양식 건물을 궁내에 지었는데, 정관헌은 그 당시 건립된 초기 서양식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이곳 정관헌의 용도는 고종의 연유처(宴遊處)로 외빈을 초대해 연회를 열거나, 고종황제가 다과를 들며 음악을 감상하던 휴식처로 쓰였다고 한다. 용도에 걸맞게 약간 화려하면서 테라스 같은 분위기가 나게끔 기둥 사이가 뚫려있었다. 중국식 같으면서도 서양식 같은 혼합된 양식이란 느낌이 들었는데 자료를 보니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이 설계했다고 한다. 사바틴은 1897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경복궁에 머물던 중,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목격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인물이라고 한다. 안쪽 기둥은 인조석의 둔중한 로마네스크 양식 주두를, 바깥쪽 기둥은 목재로 화려한 코린트 양식 주두를 얹고 있었다. 또한 바깥 기둥과 난간에 각종 동식물 무늬들을 투각해 놓아서 더욱 화려하고 정교하게 보였다. 약간 아쉬운 점은 안쪽에 마루바닥이 깔린 부분 중에 비가 들이치는 것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장판을 깔아 놓은 것이 어색하게 보였다. 해방 이후 한때 덕수궁을 찾는 관광객을 위해 잠시 카페로도 쓰였다는 점이 재미있는 역사였다.정관헌을 지나면 덕홍전이 있었다. 덕홍전 옆으로는 함녕전이 있었는데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새로 지은 건물처럼 단청 색깔이나 건물 색깔이 선명해서 좀 어색하고 옛 건물이란 생각이 명문도 지금은 중화문 앞쪽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다시 한번 힘없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듯해서 가슴 아픈 과거의 상징물로 느껴졌다. 함녕전에서 다시 정관헌 쪽으로 다시 올라와 즉조당 뒤편에서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마시면서 앉아서 쉬었다.준명당 옆으로는 전통 궁궐 양식이 아닌 서양식 건물 두채가 있고 서양식 정원과 분수대가 있어서 중화전을 기준으로 서양과 동양이 나뉘어 있는 듯 했다. 분수대를 지나 석조전 궁중유물전시관을 관람하러 들어갔다. 각종 현판과 가마, 궁중 의복들, 자기들, 옥쇄와 왕조 연혁을 관람하면서 궁중 생활상과 임금이 쓰던 물건들을 알 수 있었다. 서양식 석조 건물이란 뜻에 석조전은 대한제국 재정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발의에 의해서 하딩의 설계로 세워지게 되었으나 그 뒤 재정고문이 일본인 메가다가 되면서 공사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시공을 오쿠라 토목회사에서 하였다는데 오쿠라는 경복궁에서 1905년 개최된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전후로 궁궐을 해체하고 빼돌리는 일에 앞장 섰고 경복궁의 자선당을 일본으로 빼돌린 인물이라 한다. 건축양식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유행한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의 일종으로 미국에서 유행하였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건축양식에 대해선 자세히 몰라도 그냥 일제시대 때 많이 지어진 서양식 건축양식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 더욱 이질적이고 얄밉게 보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로는 1946년 1월 16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첫 예비회담이 열렸던 장소라는 점이다. 석조전과 더불어 일제시대때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다가 이왕가 미술관으로 쓰이기도 했고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별관으로 쓰이고 있었다.석조전 별관의 정원을 지나서 조금 걸어가니 지금은 문의 기능을 상실한 광명문이 서있었다. 광명문에는 화살로켓 발사 틀인 신기전기화차와 흥천사 동종, 물시계인 자격루를 전시해 놓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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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적 배경도마 안중근 의사가 태어나기 전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의 채결로 많은 경제적 수탈을 겪게 되었고, 계속되는 일본의 식민지화의 시련의 시작을 예고하는 시기였다. 안중근이 태어난 이후인 1879년 이후의 우리나라 정부는 우리나라는 통리기무아문의 주관으로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을 파견해서 일본의 신문화를 배우고자 했고, 영선사를 파견하여 청의 무기제조기술을 배운다.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유포를 통해 일본과 미국, 중국과의 교류를 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만손과 홍재학이 의정척사를 주장하며 개화 반대를 주장한다. 안중근이 태어난 얼마 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청과 일본의 간섭이 더욱 강화되었다. 1889년에는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응하고자 함경감사 조병식이 방곡령을 발하지만 통상장정에 근거해 배상금만 지불하게 된다. 그 후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갑오개혁을 하게 되고, 1895년에는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민족의 시련도 겪게 된다. 또한 을미개혁에 의한 단발령등으로 여기저기에서 의병이 일게 된다. 1896년에는 애국개몽단체인 독립협회가 활동을 시작하고 정부에서는 대한제국으로 광무개혁을 추진하지만 성과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한편 국외에서는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발 빠르게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룩하여 막강한 군사력과 군대를 갖췄다. 다른 한편으로 조선처럼 근대화에 한발 늦은 청나라는 독일, 프랑스, 러시아로 인해 내정이 흔들리고 있었고, 조선에게는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청나라와 일본이 부딪히고,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노골적으로 ask주를 침탈할 준비를 한다. 기세등등한 일본은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3국이 관여하는 이른바 3국간섭을 받게되자,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고,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다.당시 대국이었던 러시아마저 일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제 일본 제국주의를 막을 나라초대 통감으로 부임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외교를 책임지고, 서구 열강들속에서 한국을 보호하겠다고 했으나, 그것은 명분뿐이었으며, 발 빠르게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에게 저격당한다. 이렇듯 안중근이 활동하던 한말의 우리나라는 많은 외세의 침탈로 인해 나라를 잃는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 참혹한 시기였다.2. 안중근의 생애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해주 동부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의 3남 1녀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배와 등에 검은 점이 7개 있어, 응기칠성이라하여 아명을 응칠이라 불렀는데 응칠은 자이고 보명은 중근이다. 해외 생활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여 자가 되었다고 한다. 1884년 6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여 소년생활을 보냈다. 이 곳에서는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와 사기류를 읽었고,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을 나서기도 하고 활쏘기나 말타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며 호연지기를 길러 나갔다. 15세에 이르러서는 발군의 명사수로 이름을 떨칠 정도가 되었다.1894년 16세 때에 김홍섭의 딸 김아려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둔다. 그 해에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의 진압에 나서자 여기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다. 이때 동학군의 접장이었던 김구와 교분을 맺는다.1895년 동학군에게 포획한 군량의 반환요구를 거절하여 반역자로 오인받아 프랑스인의 천주교당으로 도피한다. 이때부터 온 가족이 천주교 신자가 되고 전도에 힘썼으며 프랑스인 홍요셉 신부에게 영세를 받는데 영세명이 도마이다.1905년 그의 나이 27세 때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아버지와 상의하여 집안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으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중국으로 떠난다. 그 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다.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의장대를 사열하고 돌아서는 순간, 권총을 발사하여 이토에게 세 발을 명중시키고, 가와카미 하얼빈 총영사, 모리 궁내 대신 비서관, 다나카 만철이사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에 인도된 후 뤼쑨 감옥에 투옥된다.1910년 2월 7일 첫 공판을 시작으로 2월 14일 6번째 공판에 사형을 선고받는다. 옥중에서 해박한 역사 지식으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분석한 동양평화론 (미완)을 저술한다.3월 26일 오전 10시 뤼쑨 감옥에서 나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내가 죽은 위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주기를 바란다. 는 말을 남기고 천주께 기도를 드린 후 10시 15분에 순국하신다.3. 안중근의 업적Ⅰ. 안중근의 업적 그 첫 번째 - 교육 계몽 운동에의 투신 -(1) 중국 상해로의 이주와 국권 회복운동의 무산안중근이 민족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된 직후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 그는 전 가족과 함께 중국 상해로 이주하여 민영익, 서상근 등의 여러 동포 등을 만나면서 국권 회복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려 하였으나 협조 세력이 없어 어려움을 겪던 차에 프랑스의 곽신부를 만나서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교육의 발달과 사회의 확장, 단합과 실력의 양성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던 차에 아버지 안태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귀국하였다.(2) 전남포로의 이주와 교육운동상해에서 돌아온 안중근은 본격적으로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육 운동은 일찍부터 안중근이 품어 본뜻이기는 하였으나 곽신부의 권유와 영향력도 강하게 작용하였다.안중근의 첫 번째 사업은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토흥(土興), 민흥(民興), 국흥(國興)의 뜻을 가진 학교의 이름에서 잘 나타나듯이 안중근은 이 학교를 통해 나라를 일으킨다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뜻에 따라 모든 열심과 재원을 쏟아 부어 삼흥학교는 점차 번창하여 갔고 이 학교를 통하여 구국운동의 역군을 배출한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고 계몽운동에 앞장섰다.(3) 국채보상운동에의 적극 참여안중근이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에 열중하던 1907년 초 국내외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제로부터 들여온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제창되고 있었다.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제기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대한제국정부에 1천 3백여만원의 차관을 미끼로 한국 침략의 마수를 뻗치자 국민의 의연금으로 이를 상환해서 재정적 독립을 강화하자는 운동이었다.안중근 역시 이 운동에 적극 호응하고 참가하였다. 그는 국채보상기성회의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몸소 그 실천에 앞장섰다. 또한 국채보상금의 헌납에도 앞서 실천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일반인의 많은 귀감을 사고 주위 민중들을 크게 일깨워 관서지방 각 가정이 앞다투어 국채보상금을 헌납하는 미거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Ⅱ. 안중근의 업적 그 두 번째 - 의병 투쟁에의 투신 -(1) 블라디보스토크로의 망명과 의병부대 창설1906년 2월,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전국을 헌병대가 행정관할 하면서 끝내는 한국을 강점하려고 국민을 탄압하고 있었다. 그 해 3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하자 홍주에서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그 부당함에 항의하고 6월에는 최익현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 군대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안중근은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국내에서의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에서 군대를 길러서 고국을 구할 길을 찾기 위해 북간도로 떠났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일본 군대가 막 주둔하기 시작한 때여서 발붙일 곳 없이 3개월을 머물다 이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게 되었다.이 곳에서 안중근은 간도관리사를 지낸 이범윤을 만나서 의병부대 창설을 제의하였다. 상당한 규모의 재정과 무기의 필요 때문에 이범윤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안중근의 거듭된 제의와 진심이 우러나는 충정에 감동하여 마침내 동의하였다. 이범윤의 동의를 받은 안중근은 이후 의병 모집과 자금 마련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또한 노령지역의 거물 최재형으로부터 전격 지원을은 가시화되어 갔다.마침내 1908년, 상당수의 의병과 의연금을 모은 후에 의병부대가 조직되었고 이것이 보통 이범윤 부대 로 잘 알려진 의병부대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이 부대는 사실상 안중근의 의병부대와 다름없었다. 계획뿐만 아니라 의병모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안중근의 활약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 부대가 국외에서 조직된 최초의 의병 부대라는 점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2) 국내 진입 작전의 성공1908년 안중근의 지휘 아래 두만강을 건넌 의병 부대는 국내 진입 작전을 시도하였다. 작전은 두만강 최하단의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안중근 부대는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일본군 수비대의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일본군을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규모의 전투는 아니었으나 치밀한 작전에 의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개가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이로써 부대원의 사기가 더없이 충천하게 되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3) 단지동맹(斷指同盟)의 결성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일본군의 응원 부대가 가세하여 의병 부대는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의병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안중근은 실의에 찬 부하들에게 그들의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등의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치열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기는 했지만 많은 부하를 잃었으며 심한 굶주림과 어려움을 겪던 중 1908년 믿을 수 있는 지도층 인사와 단지동맹을 맺게 되었다. 점차 어려워져 가는 시국에서 자기의 굳건한 신념을 증명하는 11명의 동지와 손가락을 잘라 증거를 보이며 자신의 의지를 재천명한 것이다. 동요되기 쉬운 세상 속에 몸과 마음을 바쳐 온 국민의 염원인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헌신적인 중심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11명의 동지들 앞에서 안중근은 무명지 끝마디를 자르고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 이라고 썼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부지주지몽위호접, 호접지몽위주여)모르겠구나,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나로 변한 것인가?이 구절은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구절로, 제가 장자의 책을 뒤적이다가 찾은 부분입니다. 책에는 이 이야기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라고 합니다.어느 날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자신이 장자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불현듯 꿈에서 깨었다. 깨고 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가 아닌가? 장자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 꿈에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나는 내가 장자인지 몰랐다. 지금 꿈에서 깨고 보니 나는 분명 장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인가? 나는 나고 나비는 나비인데 어찌 된 일인가? 이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꿈인가?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진짜 나인가 하는 것을 되묻는 것입니다. 현재의 내가 언제까지 나 일수 있을까, 그리고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내가 지금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반대로 이렇게 나의 존재의미와 주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제물론에 나오는 비슷한 꿈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어젯밤 꿈속에서 술 마시며 그리 즐겁다가도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싸그리 까먹고 통곡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어젯밤 꿈속에서 괴로워 통곡하다가도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즐겁게 사냥터로 가기도 한다. 막상 꿈을 꿀 때는 꿈인지 모른다. 그런데 꿈속에서 또 꿈을 꾸었다고 했을 때, 한 번 깨고 나서 그게 꿈인 줄 안다. 그런데 소인배들은 꿈에서 한번 깬 것으로 완전히 깨어났다고 생각하며 허영심에 들뜨는데, 사실 알고 보면 한심한 일이다. 너희들은 모두 꿈꾸는 것이다. 너희들이 꿈꾸고 있다고 말하는 내 말도 혹시 잠꼬대일지 모르겠다. 먼 훗날 내 말을 이해하는 메시아가 나타난다면 천 년, 만년을 기다릴지라도 짧은 기다림이리라.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저도 한가지 생각한 것은,정말 지금의 내가 꿈을 꾸고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꿈을 꾸고 그 꿈이 실제인줄로 착각한 기억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죽게 되면 지금 살아가는 세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만약 그렇다면 내가 사는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게 되니까 대충 살거나 흥청망청 즐기며 살아도 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지금 이렇게 레포트를 쓰는 현재도 또한 꿈속일 수도 있다고 하면 재밌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이런 이야기는 허무주의나 쾌락주의에 빠지라고 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