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문제에 대한우리나라의 입장과 일본 입장과 목 명: 정보사회와 뉴미디어학 과:학 번: 2이 름:제 출 일: 2005년 6월 19일담당교수: 교수님[ 목 차 ]1. 서론1) 왜 독도인가?2) 독도의 역사3) 독도의 가치2. 본론1) 일본의 입장2) 한국의 입장3. 결론1) 우리의 대응 방향1. 서론1) 왜 독도인가?경상북도 울진의 도계로부터 해상 12km 부근에는 울릉도가, 그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92km 떨어진 곳에 독도(獨島)가 있다. 일본의 오키로부터는 160km 떨어져 있는 독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라는 2개의 주섬과 그 주위를 32개의 암초가 감싸고 있는 바위섬으로, 현재 경상북도 울릉군(鬱陵郡) 남면(南面) 도동(道洞) 산 42번지에서 76번지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항만청이 관리하고 있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미 일본과의 사이에 몇 차례에 걸친 독도에 대한 영속(領屬) 시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는 망언을 되풀이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이해가 날카롭게 대립되고 있다. 일찍이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平和線) 선언을 계기로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외교적 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해저자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리고 1990년대에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설정시 기점 설정을 둘러싸고 일본이 다시 독도 영유를 주장하고 있다.현재 일본은 독도 문제 이외에도 두 개의 영토 문제를 더 안고 있다. 러시아와의 북방도서 문제, 중국(대만)과의 첨각열도(조어도) 문제가 그것으로 일본인들의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독도에 대한 관심도가 가장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소수의 우익단체들은 시마네(島根)현의 일부 어민들을 선동하여 소위 '독도반환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1997년 현재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정권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고 있다. 독도 문제는 자칫 한일간에 민족감정을 악화시키기 쉬운 부분인 만큼,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전개를 위해 릉도 근해에서 왜인을 발견하고 퇴거하는 활약을 보였다.1697년부터는 3년마다 정기적인 치안을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1881년(고종18년)에는 울릉도 개척령 반포하였고 일본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하게 항의를 하였다. 1900년 10월 27일에는(대한제국 광무4년) 관보 제 716호의 칙령 제41호 울릉도, 즉도 석도(독도)를 울릉군수가 관할토록 하였다. 1905년 2월 22일 독도의 일본령 편입결의에 따라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편입 발표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907년에는 독도가 경삼남도 울도군으로 편제되었고, 1910년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되었다. 1914년에 독도는 경상북도 울도군으로 편제되었다. 1946년 1월 29일 SCAPIN 제677호 즉,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되었다. 1948년 6월 30일 미공군 폭격연습중 독도출어중인 어민 30명이 희생되었고 한국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 2,27자 미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되었다.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가 건립되었으며, 1952년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사에서 독도를 기점으로 평화선을 선포한 바 있다. 1953년 일본이 미국기를 게양하고, 조난어민 의령비 제거하고, 일본영유 표지 설치하며, 한국 어민 독도근해조업에 대한 항의가 있었으며,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항의각서를 발송했다. 그리고 그해 8월 5일 영토비 건립하고, 해양경비대 파견을 협의하게 되었다. 1953년 4월 27일 울릉도 주민(33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가 창설되었으며, 1956년 4월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인수가 결정되었다. 그 후 1981년에 헬리콥터 이착륙 시설 설치되고 1993년에는 레이더 기지가 설치되고, 1997년에는 울릉읍 독도리에 독도 박물관이 건립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그리고 2000년 독도의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독도 근해는 북측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한류계수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동한난류가 서로 만나는 해역으로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천혜의 어장을 형성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겨울철에는 한류계수에 서식하는 연어, 송어 등의 어족이 독도근해를 찾으며, 여름철에는 난류계수가 우세하여 독도주변에는 오징어,꽁치,방어 등의 온대성 어족과 참다랭이,개복치 등 아열대 어족이 많아진다. 독도근해의 어획대상은 약95%이상이 오징어이며, 어획량은 1995년 약9천톤, 1996년 1만1천톤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어류외에도 독도연안에서는 1m급 대형혹돔을 비롯하여 돌돔, 벵어돔, 개볼락 등 어종과 소라,전복, 해삼, 홍합 등을 만날수 있다. 독도어장은 현재 울릉도 도동어촌계 소속의 1종 공동어장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어장에서 어민들은 전복,소라,해삼,문어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1997년의 경우 9.4톤의 생산으로 약1억원 정도의 어민소득을 올린 바 있다. 즉, 지정학적 가치에서 중요한 점은 천혜의 어장과 풍부한 수산자원 그리고 독도가 EEZ경계 기점이 될 경우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영토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해양학적 가치이다. 이는 해양수산부가 이어도 해양과학기지(2000-2002), 백령도 해양과학기지(2003-2005) 구축이후에 오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50억의 예산을 들여 독도해양과학기지를 구축.운영할 계획에 있으며 총371억의 국가예산을 투자하여, 해양과학기지를 구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생활과 밀접한 기상업무와 경제활동의 중요한 무대인 해양산업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함이며, 독도 등은 그 위치상 기상예보, 해양예보, 어장예보, 지구환경연구, 해양-대기 상호작용 연구 등을 위한 국내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독도해양과학기지 건설계획은 21세기 국가 경쟁력 확보의 원천인 해양자원 개발의 전진기지로서 독도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또한 지질학적인 측면에서 독도는 그 자체적으로 세계적인 지질유적독일, 캐나다 등은 오는 2001년에 캐나다연안 1200m 지점에서 공동채굴실험을 하기로 하는 등 자원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가운데 독도에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부존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러시아과학원 소속 무기화학연구소로부터 동해의 하이드브레이트 분포추정 지도를 건네받은 경상대 화학과 백우현 교수는 석유, 천연가스층 위에는 일종의 뚜껑 역할을 하는 하이드레이트(Hydrates)란 물질의 분포도를 보면 인도에서 대만, 동해를 지나 미국, 남미 서해안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벨트를 형성하고 있죠. 이 연결고리 중에 끊긴 곳이 독도 부근이라고 하며, 이미 울산 남동쪽, 독도 아래쪽의 일본 서해안 지역에서는 천연가스와 석유가 나오고 있고 일본도 통산성 주도로 민.관 합작기구를 만든 점으로 미뤄 우리도 빨리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말하며 독도부근 해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것이 일본이 특히 독도를 노리고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독도에 대해 다소 일본과의 과거사와 연계하여 다소 민족적인 입장에서 접근하지만, 일본의 독도접근을 관심있게 따져보면 구체적인 경제적인 이익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1905년 1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불법편입할때는 내부의 반대에도 비롯하고 당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감시하기 위한 군사기지로서 독도의 가치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으며, 최근에는 정계지도자들의 가장 강력한 선거표밭중의 하나인 일본어민들의 요구 혹은 러시와 및 중국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북방4도 및 조어도의 영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독도문제를 따지고 있는 실정이다.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가 독도근해에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을것으로 추정되는 해저광물자원에 대한 경제적 가치때문이라는 지적이 매우 신빙성있게 제기되고 있다. 즉, 독도가 일본영토로 되었을 경우 거의 대부분의 해저광물 자원 매장추정지역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 본론1) 일본의 입장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것은 예로서 언급된 것이며, 따라서 울릉도에 딸린 섬인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일본은 이 세 섬은 한국 영토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외곽선을 표시하는 섬들이며, 따라서 독도는 한국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하고 있다.외무성 관료 출신의 관변학자 가와카미 겐조(川上 健三)를 중심으로 다수파를 이루고 있는「고유영토=실효. 메이지(明治)시대에 와서도 오키 도민(島民)들은 울릉도로 가는 길에 죽도(竹島)에서 전복 등 해산물채취에 종사했다. 1898년께 부터는 오로지 강치(물개 비슷한 바다동물)잡이에 전념하게 됐다.그러자 「강치적 경영론」은 1966년 가와카미가 펴낸 「다케시마(竹島)의 역사지리학적 연구」에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저자가 외무성조사관이었을 때 쓴 이 책은 일본측이 독도영유권을 정당화하는데 인용되는 가장 유력한 문건이다. 독도의 실효적 경영에 관한 가와카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죽도(竹島)의 개발?경영에 관해서는 1618년에 오타니(大谷)?무라카와(村川) 양인이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로 가는 도항권을 얻어 이 섬의 개발에 종사했고 울릉도를 오가는 길에 지금의 竹島에 들러 어획을 했다.이에 관한 고문서는 많다. 또한 이 섬의 경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1696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확한 지도」도 있다. 강치잡이에 나서는 사람이 급속히 늘어나 강치가 절멸위기에 처하게 됐기 때문에 1904년 9월 나카이(中井 養三郞)가 독도의 영토편입?임대를 요청하게 됐다』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제9권「죽도(竹島)」항; 길천홍문관(吉川弘文館) 1988년간) 이는 그 자신이 집필한 독도연구서의 핵심적 내용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일본측은 울릉도가 조선조의「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4백50년 동안 무인화해 있는 사이에 오타니(大谷)등이 울릉도를 「발견」, 그곳에서 벌목에 종사하면서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한 것을 중시한다. 가와카미와 같은 「실효적 경영론자」들은 수 백년 동안 비어있던 울릉도로 본토의 한국인들이
(정보화 사회와 뉴미디어)‘독도’ 그 진실과 일본의 망언학과 : 도 시 공 학 과학번 :이름 :제출일 :2005/6/19교수님 : 교수님* 목차#서론#본론1. 독도2. 독도분쟁의 역사3. 일본의 주장4. 우리나라의 주장5.일본 영유권 주장의 부당성#결론1. 외교통상부의 대응방안2. 남북 공동의 대응방안3. 우리정부의 바람직한 대응자세4. 나의 견해Ⅰ. 서론시간만 허락되면 떠오르는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왜곡과 더불어 독도 영유권에 대한 잦은 일본 골통보수들의 행태를 볼라치면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접근하기를 포기하고 힘 대 힘으로 한번 예맥의 힘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지금의 심정이다.철되면 부르짖는 극 보수정치인과 극우익의 일본 내 국수주의자들은 엄연한 국제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도 허무맹랑한 주장을 일삼고 있는 것은 아직도 패전이전의 대동아 공영권의 허황된 제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아적이고 변태적인 민족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글의 모두에서 지나치게 감성적인 측면으로 접근을 시도하지만 결코 일본의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독도 영유권분쟁은 감정적으로 접근해서는 되지 않을 성격이다. 독도 영유권 분쟁에 대한 체계적이고 다양한 경로의 접근법이 요구되지 않는다면 제2의 제3의 독도문제는 지속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독도라는 무인 섬의 경제학적, 지리학적, 환경생태학적 등등 무수한 가치를 차지하고라도 자칫 방심하거나 안이한 분쟁에 대한 접근은 금전적인 가치들을 상실하는 것 못지않게 또 다른 분쟁들을 야기할 수 있기에 논리적이면서 범정부적이고 일회성이 아닌 체계적인 대응이 요구되어져야 할 것이다.일본의 경우는 섬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수면 위에 보일 듯 말 듯 한 암초도 인공 섬을 구축하여 그로 인한 배타적 경제수역을 획정하는 참으로 치밀한 경제동물근성을 보이는 민족인 만큼 이에 대한 대응은 신중하고도 범 민족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Ⅱ. 본론1. 독도란?우리의 섬 독도는 면적 0.186㎢이며. 독섬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90 총선공약으로 독도. 조어도. 쿠릴열도 확보를 내세움1998. 01일본, 독도주변해역에 해저 광케이블 설치공사1999.12일본인 독도로 호적이전 사실 확인. 6가구 7명2000.05일본 외무성, 2000년판 외교청서 독도 고유 영토설 주장"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도 국제법상으로도 명확히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일본의 입장은 일관돼 있으며 앞으로도 양국 간에 끈기 있게 대화를 거듭해나갈 방침"이라고 서술2000.07데루스케 주한일본대사,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독도는 일본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함 : "다께시마는 역사적으로는 물론 국제법 관점에서도 명백히 일본고유의 영토이며, 이것은 일본정부의 명확하고도 일관된 입장이다"2000.09일본 총리 모리 요시로 방송국 취재진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도, 국제법상으로도 명확하게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일관된 입장입니다"라고 밝힘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임3. 일본의 주장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것은 1905년 1월28일. 그로부터 4주 뒤인 2월22일 시마네 현은 현 고시40호로 우리의 독도를 「다케시마 」죽도로 명명,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둔다고 공시했다. 그 후 독도는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규정하는 해양 경계선은 한˙일 두 나라 사이의 평화가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평화선'을 규정하였고, 그 뒤 51∼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협상과정에서 두 나라간의 외교문제로 논쟁대상이 되었으나 그 해결이 뒤로 미뤄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집권 자민당은 최근 선거공약과 정책지침에까지 공공연히 독도 영유권주장을 포함시키는 등 독도문제를 수면 하의 영토문제」에서 「수면 위의 영토분쟁」으로 부상시키고 있다. 일본이 독도 영토편입을 주장하는 근거는 첫 번째로, 근세초기 이래 독도는 일본영토였고 영토편입 직전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우리나라에 포함되어야 한다.* 역사적 근거1. 독도는 신라시대에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을 형성하였으며,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13년 (512년) 신라에 귀순하여 왔다. 그 이후 계속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관리 하에 있다.2. 일본이 1905년 도근현시 40호 행정조치를 취한 것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님을 실증하는 것이다.* 국제법상 근거1. 그 지역이 주인이 없어야 한다.2. 영역취득의 국가의사가 있고, 그 의사를 대외적으로 공표 하여야 한다.3. 그 지역의 실효적인 점유가 있어야 한다.* 국제 사회 상황에 따른 우리의 입장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그러나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올 경우 우리도 같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맞대응 하면 국제적으로 독도가 분쟁 수역이라는 인식을 심으려고 하는 일본 측의 의도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 따라서 소리 나지 않게 독도에 대한 실질적 점유를 강화함으로써 일본이 제풀에 지쳐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현재 독도에 접안시설 공사를 벌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탈환」하기 위해 당분간 실력행사에 나설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는 한·일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만들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제제기는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기록용」인 셈이다. 그러나 정부의 「무대응」전략에도 한계는 있다. 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서 전 세계가 바다의 경계선을 긋기 위한 작업(EEZ)에 들어갔고 한·일양국도 그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흔히 말하는 배타적 경제수역은 그 수역의 주인이 되는 연안국이 그 수역 안에서 돈벌이가 될 만한 모든 경제적인 활동을 배타적으로 할 수 있는 수역을 가리킨다. 이 수역은 영해와 공해의 중간에 자리 잡는 '제3의 수역' 이다. 이 수역의 성격은 경제 활동 면에서는 영해와 위하여 특히 중시된다. 국내사회와는 달리 국제사회는 중앙집권성이 없다. 따라서 배타적 영역주권은 항상 실효적 점유에 의하여 유지될 필요가 있다. 선점의 주체는 국가이다. 선점의 주관적 요소로서 영유의사는 영유선언, 입법·행정상의 조치, 타국에 대한 통고 등에 의하여 표시된다. 다만, 통고에 관하여는 그것이 선점의 요건이 아니라는 다수설과 선점의 필수요건이라는 소수설이 있다.이러한 국제법적 선점이론에 비추어 볼 때, 위의 일본 측의 1905년 선점 주장은 다음과 같이 모순이 있다. 첫째, 이해관계국인 한국에 통고가 없었다는 점이다. 1905년 독도편입을 일본은 한국에 전혀 통고하지 않았다. 국제법상 무인도 독도는 이해관계국인 한국에 대한 통고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둘째, 선점의 의사는 대외적으로 표시됨을 요한다. 1905년 일본의 선점의사표시는 단순히 국내 지방자치단체의 고시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고시조차도 실제로 하였는지 불확실하다. 또 선점의 주체는 국가이지, 시마네현과 같은 지방자치단체는 될 수 없다. 셋째, 일본은 1905년 2월 22일에 『도근현고시』로써 이것을 그 현에 편입 선점을 완료하였고, 그 후 한국의 항의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1905년 당시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독도의 일본열도 편입에 대해 한국은 정식 항의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넷째, 선점의 대상은 무주지인데, 1905년 독도는 역사적으로 무주지가 아니고, 한국의 실효적 지배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선점의 대상이 아닌 점 등을 들 수 있다. 무주지라는 것은 어느 국가의 영역에도 귀속되지 않은 지역, 국가영역으로서의 통치를 떠나 유기된 지역이다. 영역유기 또는 포기에는 포기의 의사라는 주관적 요소와 포기의 사실이라는 객관적 요소가 필요하다. 국가정책상 어느 영역을 일시적으로 사실상 포기하였을지라도 포기의 의사가 명시적·대외적으로 없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경우에는 이것을 포기로 보지 않는다. 조선은 15세기 초 이래 빈번한 왜구도, 거문도, 울릉도에 한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아 명백하다. 여섯째, 대일강화조약의 초안작성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해볼 때, SCAPIN 제677호에 독도의 한국영토소속의 명문규정이 대일강화조약에서 빠진 사실로만 독도가 일본 영토인정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의 시볼드라는 일본정부고문이 일본 측의 로비를 받고 대일강화조약 제1차-5차 초안까지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명문으로 기록했던 것을 삭제하고 일본영토라는 기록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가, 영국·뉴질랜드·오스트랄리아 등 다른 연합국들의 동의를 받지 못하자, 미국자신도 일본 로비를 따르지 않고 결국은 1946년 1월 29일의 SCAPIN 제677호의 효력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즉 미국의 7,8.9차 초안과 영국과 미국의 합동초안에서는 독도를 한국영토와 일본영토의 어느 조항에도 넣지 않고, 결국 독도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조약문을 성안하여 서명한 것이다.일곱째, 국제법으로도 일본이 대일강화조약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하는데 실패하고, SCAPIN 제677호 효력이 여전히 유지됨으로써 독도는 여전히 한국영토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한국은 SCAPIN 제677호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미군정으로부터 독도를 포함한 모든 영토를 인계받았다. 반면에 일본은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 발효로 한국보다 4년 늦게 재 독립하게 되었으므로 설사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명문을 대일강화조약에 명기하는데 성공하는 경우에도 한국정부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대일강화조약이 제3자인 한국에게 효력을 미치려면 제3자인 대한민국의 동의를 반드시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2년 대일강화조약에서는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기록을 명문으로 조약문에 기록조차 하지 않았으니, 일본이 독도를 승인받았다고 주장 할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Ⅲ. 결론1. 외교통상부의 대응방안외교통상부 이규형 대변인은 5일 오후 5시 성명을 발표하고 "일부 교과서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대해
독도에 관한 한국ㆍ일본의 입장 비교 분석과 목 : 뉴미디어와정보화사회교수님 : 교수님소 속 : 경영학부 3학년학 번 :이 름 :제출일 : 2005.06.19목 차1. 서론- 독도의 정의, 자연환경, 역사, 문제발생2. 본론- 일본의 독도에 대한 입장 발언과그에 대한 우리나라의 입장3. 결론1. 서론독도는 한국 동해 최동단에 있는 섬으로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鬱陵郡) 울릉읍(鬱陵邑) 도동(道洞).인구 5(1999).동경 131˚51′21˝~131˚52′30˝, 북위 37˚14′~37˚15′.과거에는 삼봉도(三峰島)?우산도(于山島)?가지도(可支島)라고 불렀으며, 1881년(고종 18)부터 독도라 부르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다케시마[竹島]?마쓰시마[松島]라 불렀고, 서양에서는 섬을 발견한 선박의 이름을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리앙쿠르(Liancourt), 영국에서는 호넷(Hornet)이란 이름으로 해도에 기입하고 있다.독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를 주도(主島)로 가제바위 등 36개의 암도(巖島)와 암초로 구성된 소규모의 군도(群島)이다. 동도는 면적 6만 4800㎡, 최고높이 99.4m의 섬으로 꼭대기의 비교적 평탄한 부분에 등대?경비초소 등이 설치되어 있다. 서도는 면적 9만 5400m㎡ 최고높이 174m로, 가장 크고 높은 섬이나 산정이 뾰족하고 사면 경사가 급하여 장비 없이는 오를 수 없다.주민으로는 서도에 김성도(56세)외 그의 가족 1명이 전입해 살고 있고, 동도에는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대원들이 근무하고 있다.1). 독도의 자연 환경(1) 지질?지형?기후수심 2000m가 넘는 동해 해중에서 분출한 화산성해산(火山性海山)이다. 울릉도와 함께 산정이 해면상에 노출되어 있지만, 산정이 해면하에 있는 해산도 울릉도 동방 38㎞ 지점에 1개, 독도 동남방 45~50㎞ 지점에 각 1개씩 있어 이들 5개의 해산이 동서로 일련의 해산열(海山列)을 형성하고 대마해분(對馬海盆)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독도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의 하부는 현무암질집괴암(玄武巖도 근해에는 조목이 발달해 있고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회유성 어족이 풍부하기 때문에 울릉도 및 동해안 어민들에게 중요한 어장이 되고 있다. 주요어종은 오징어?명태?대구?상어?북낙?고래?연어?송어 등이 있으며, 연간 출어어선 수는 1천여 척, 어획고는 약 2만 t 에 이른다. 주변의 파식대지 및 암초에는 미역?다시마 등 해초류와 전복?소라 등 패류가 무진장으로 서식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전복?소라를 양식하기도 한다.2). 역사독도와 울릉도는 모자(母子) 관계에 있는 섬이고, 오랫동안 무인도로 있었으므로 그 역사를 살피기 위해서는 울릉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울릉도가 고려 현종 이후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관원이 여러 차례 파견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자주 관원이 파견되어, 동해상에 울릉과 우산(독도) 2섬이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한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한동안 주목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가, 17세기말 일본에 피랍된 동래(東萊)의 어부 안용복(安龍福)의 울릉도 영유권 주장을 계기로 다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안용복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697년 대마도주가 일본 어민의 울릉도 어로활동을 금지한다는 일본 바쿠후[幕府]의 결정을 알려오면서 울릉도 영유권 분규는 일단 매듭지어졌다. 그러다가 1881년 일본인이 다시 울릉도를 왕래하자 조선은 일본에 항의하는 한편,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여 이듬해 4월에 16가구 54명을 울릉도에 이주시켰다. 1901년(고종 38)에는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울도군의 관할구역에 석도(石島)를 포함시켰다. 석도를 훈독하면 독섬 또는 돌섬이 되는데, 지금도 울릉도주민들은 독도를 이렇게 부른다. 1905년 2월 일본은 시마네현[島根縣] 고시 제40호로써 독도를 죽도로 명명하고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에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지령을 통해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명백히 했으나 당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접수된 상태였으므로 독도 영유권과 관련한 외교교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관찬지도와 지지 등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로 다루고 있는 점, 1905년 시마네현 고시가 공포된 뒤 독도가 일본의 관유지로 토지대장에 등재된 사실 등으로 보아 일본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일본의 불법적 침략으로 약탈당한 독도가 제 2 차세계대전의 전후 처리과정을 통해 한국의 독립 및 주권의 회복과 동시에 법적으로도 원상회복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편, 96년 들어 독도에 안전하게 물자를 공급하고 일본의 침략자적 야욕이 지속적으로 촉발하려는 독도영유권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해 독도 접안시설을 설치, 장기적으로는 울릉도 주민이 독도에 터전을 잡도록 하였다.2. 본론1) 일본의 주장일본이 이 바위섬을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1905년 2월22일자 시마네현의 고시다. 일본정부는 [다케시마 (죽도)]를 본현의 소관 아래 편입한다]는 이 고시를 1906년 4월 대한제국정부에 통보했다.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자신들이 선점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여기서 출발한다.당시는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 있었기에 아무 대항도 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17세기 말 조선조의 안용복이 독도에서 불법 어로를 하던 왜선단을 쫓아내고 국토 침입 사실을 시인 받았으나,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시대 부터 자신들이 독도를 경영해 왔다며 안용복이 자신들을 강제 퇴거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일본은 우익단체 등에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해왔으나 7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총리와 외무장관 등 당국자가 나서 공식?비공식 발언을 통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77년에는 후쿠다 다케오 총리가, 84년엔 아베 신타로 외무장관이 각각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망언을 했고 93년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는 일본의 무토 장관이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일본 영토임에도 한국이 점령하고 있어 극히 유감" 이라고 말해 외교 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96년2월에는 이케다 일외무장관이 「독도는 국제법상 일본영토이며 한국정부가 이곳에 접안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주권침해」라고 망언을 계지로 썼는데 1696년 울릉도를 포기한 뒤에도 독도는 계속 내왕 영유했으며1905년 시마네현고시로 현역에 편입, 토지대장에도 게재했고 어로도 하고 토지사용료도 징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점을 했다면서 이해 관계국에 통고한 사실이 없고, 선고의사의 표시가 단순히 국내적인 지방행정구역내의 것이고, 또 1905년 당시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때이므로 한국의 무항의를 일본측에만 유리하게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1905년 이전 실효적 지배에서도 그렇고 1905년 이후의 선점주장에서도 그렇고, 일본주장의 근거는 매우 희박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참고로 선점취득에 관한 국제법상 요건은 통상 자국이 무주(無主)의 지역을 자국령으로 취득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해당지역을 실효적 지배하에 두면서 이해관계국에 통고하는 것이다.(2) 독도는 원래부터 일본 땅이었다.- 일본은 1618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오오다니와 무라카와 두 가문에게 울릉도 연해에서 조업해도 좋다는 도해면허를 허가하였으며, 그로부터 약 80년동안 울릉도 주변 어장에서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근거로 원래부터 독도는 일본 땅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주인(朱印)을 하사하면서 이것을 가진 어민들로 하여금 다케시마(울릉도) 지역에 출어하게 했다"고 일본측 자료는 언급하고 있는 데, 여기서 '주인'은 외국 무역을 공인하는 증명서이므로 일본이 다케시마를 외국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으며, 만일 국내에서의 항해라면 굳이 '도해면허'를 허락 받을 이유가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3) 1905년에 국제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였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를 국제법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으므로 독도에 대한 한국점령을 '독도강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1904년 8월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부서에 일본인 재정고문과 외국인 외교 고문관을 두게하는 것을 내용으로하는 일본독도편입을 고시하였으며, 이해 당사국인 한국에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906년 3월에 문서가 아닌 서면으로 당시 울릉군수 심흥택에게 별일 아닌 듯이 알렸다는 것이다. 이를 접한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독도편입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지만, 대한제국의 외교권의 박탈로 인해 당시 일본정부에게 효과적인 항의가 불가능하였다.(3)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다- 일본은 세종실록지리지 등 한국의 고문헌에 명기 된 우산도가 독도가 아닌 울릉도임을 주장한다. 즉, 고문헌에서 독도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측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우산과 무릉(울릉도) 二島가 울진현 正東의 바다 가운데 있으며,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는 기록"이 현재의 독도를 의미하고 있으며, 함께 울릉도에서 독도를 육안관측이 가능하지만 일본의 오키島로부터는 불가능함을 제시하고 있다. 문헌상으로보면 독도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성종실록, 숙종실록등의 고문헌에 의하면 조선 초기 그 이전부터 우산도 또는 삼봉도로 불리면서 울릉도와 함께 한국측에 소속되어 있었다.(4) 조선시대에 한국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포기했다.- 일본은 한국이 울릉도, 독도에 대한 空島(섬을 비게 함)정책을 실시함으로서 사실상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포기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선의 공도정책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의 포기가 아닌 통치 방법의 하나임은 명백하다.고려시대에는 동북여진 해적들의 노략질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뭍으로 도망 나왔으며, 조선시대에는 왜구들의 침입으로 인해 사람이 거의 살 수 없 을 정도였다한다.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조선 세종 때(1419)에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거주로 인한 왜구들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조선 태종때부터 공도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종때의 '우산무릉등처안무사'라는 직함과 3년에 한차례씩 '수토관'이란 관리를 파견했던 것은 실효적 지배의 포기가 아닌 통치방법의 하나임이 명백하다. 있다.
트로이조원:.트로이란,트로야 ·트로이아라고도 한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는 '일리오스'라고 불렸다.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근대에 와서는 히살리크라고 불리었다)에 있다. 바다에서 6 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海)와 흑해(黑海)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려 왔다.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이곳의 발굴에 착수하면서 유적이 밝혀졌다. 도시의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하층은 BC 4000년기(年紀) 말의 것으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제2층에는 메가론식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이 층에서 많은 금 ·은 제품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이 층을 호메로스시대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슐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 1881년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다.인물 소개아킬레우스=테티스와 펠레우스의 아들, 프티아의 왕자로 그리스군 최고의 용장.불사신의 몸과 엄청난 무공. 타고난 전사인 그는 적국 트로이에겐 최고의 공포이다.얼굴도 잘생겼으며 키도 매우 컸고 화내기 쉬운 성격이었지만 정이 많으며 트로이 전쟁에서 가장 고결한 영웅으로 알려졌있다. 발이 대단히 빨라 준족의 대표자로도 알려지고 있다. 아이아스=살라미스의 왕자로 헤라클레스의 친구였던 텔라몬의 아들이다. 아킬레스와도 친한 친구였으며 키가크고 아킬레스 다음가는 그리스군 최고의 용장이다.아가멤논=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국가였던 미케네의 왕. 메넬라오스의 형. 그리스군 총사령관. 좀 못나게 묘사되고 있다. 메넬라오스=스파르타의 왕. 헬레네의 전남편 디오메데스=칼리돈의 왕 오이네우스의 손자인 아르고스의 왕.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스,아이아스, 디오메데스 3이 가장 대표적인 용장이다.인물 소개 트로이군헥토르(Hector or Hektor)=트로이군 최고의 용장. 프리아모스왕의 맏아들. 아킬레스와 대항할수 있는 유일한 장수였다. 그리스군의 2인자 아이아스와 대결해 용호상박을 이루고 그후에도 많은 활약을한 트로이 최고의 영웅. 그러나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은 아킬레스를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은 죽고 말았다. 용맹 뿐만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고 가족애가 깊으며 따뜻한 마음씨 이면서도 전장에서는 누구보다도 대단한 용력을 발휘하는 장수였다.줄거리고대 그리스 시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올란도 블룸)와 스파르타의 여왕 '헬레네'(다이앤 크루거)의 사랑은 한 문명을 파괴시켰을 만큼 거대한 전쟁을 일으켰다. 파리스가 메넬라오스 왕(브렌단 그리슨)의 아내, '헬레네'를 유혹해 달아난 것이 화근이었다. 이로 인해 메넬라오스 왕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미케네의 강력한 왕인 형 '아가멤논'(브라이언 콕스)은 동생의 명예를 지켜주고 트로이로부터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사실 명예를 지키려던 데서 시작된 아가멤논 대왕의 야심은 자신이 지배하는 거대한 왕국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지나친 탐욕에 더 가까웠다.'프리아모스' 왕(피터 오툴)이 통치하고 용맹스러운 '헥토르' 왕자(에릭 바나)가 지키고 있는 도시 트로이는 이전에 그 어떤 군대도 정복한 적이 없는 철통 요새였다. 과연 아가멤논 왕의 군대는 트로이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트로이 정복의 결정적인 키를 쥐고 있는 건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전사로 칭송받고 있던 '아킬레스' (브래드 피트). 오만하기 그지없고 전투에선 당할자가 없을만큼 강한 아킬레스는 자신의 명예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순종할 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가 아가멤논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트로이 공격에 나선 것도 그의 그칠 줄 모르는 명예욕때문이었지만, 결국 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건 명예가 아닌 사랑이었다.{nameOfApplication=Show}
현대사회와 스포츠 동맥경화-비만탈피조-동맥경화란?-동맥경화는 부드러운 혈관벽에 지방이 침착이 되면서 탄력성을 잃고 간격이 좁아지는 현상이다.동맥경화 x-ray 사진동맥경화의 원인동맥경화의 정확한 원인은 불명확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위험인자 1) 조절 될 수 없는 것 2) 조절 될 수 있는 것동맥경화의 종류1) 협의의 동맥경화 2) 죽상 경화증 3) 죽막 경화증 4) 세 동맥경화증동맥경화의 증상1) 협십증,심근경색 등으로 가슴,등,어깨, 팔에 심한통증 2) 뇌에 폐쇄가 생기면 의식,언어,시력 장애,편마비가 나타남 3) 말초동맥이 폐쇄가 되면 보행 중에나 휴식 중 심하면 근육통,피부 창백·건조,피부에 궤양이생기고 발톱이 약해짐동맥경화 예방법1) 고혈압은 동맥경화증의 과정을 촉진 시킨다. 2) 흡연은 관상 심장 질환의 사망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 고지혈증·당뇨병을 치료해야 한다. 4) 비만은 식사요법과 운동요법을 적극적 으로 시행해야 한다. 5) 스트레스를 최소화해야 한다.동맥경화에 좋은음식고 섬유식 - 야채 : 매일 300g 이상 섭취 - 과일 : 단맛이 적은 종류 - 해초류 콜레스테롤이 적은 음식 - 식물성 기름 : 옥수수기름, 참기름 등 - 담백한 생선류 각종 콩류동맥경화에 나쁜음식기름류 - 버터, 마요네즈, 생크림 등 육류 - 쇠간, 베이컨 등 어패류 중 오징어, 문어, 새우, 굴 등 난류 - 계란 노른자 등 기타 동물성 지방이 많은 음식민간요법1) 감: 땡감을 갈아서 무즙과 섞어 매일 한 잔씩 마신다. 감잎차를 마시거나 생감을 먹어 도 감이 가진 청열 작용으로 동맥경화의 진행이 억제되고 뇌졸증 예방 2) 사과: 매일 2개씩 먹으면 콜레스테롤의 굳는 것을 막고 사과 성분인 펙틴의 역할로 동맥경화 증상이 개선 3) 메밀: 메밀에 포함된 루틴이라는 성분의 역할로 모세혈관이 강화되어 동맥경화 예방, 진행억제{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