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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기념관을 다녀와서 평가A좋아요
    독립 기념관을 다녀와서...어렸을 적부터 소풍이나 단체관람 형식으로 다녀오곤 했던 박물관을 과제를 빌미 삼아 다녀오게 되었다. 지난 시절 다녀온 박물관을 되새겨 보면 그냥 막연히 “ 아... 이런 것들이 있구나... ” 하는 정도 였다면 이번 박물관 기행은 과제라는 부담(?)이 작용한 탓인지 조금 더 유심히 보는 관찰력과 조금 더 생각하게 되는 사고를 주었다.독립기념관은 일전에도 한번 다녀간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로 기억 되는데 솔직히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도시락으로 싸간 김밥에 체해 심하게 멀미를 한 것 말고는 별다른 기억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가까운 박물관도 많은데 굳이 ‘독립기념관’을 택하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한번쯤 다녀온 기억이 있는 곳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과 “ 바람두 쐴겸...” 이라는 생각, 그리고 얼마전 벌어진 이라크전을 지켜본 뒤 생겨난 연상작용(?) 탓이라 해두겠다.1전시관민족전통관2전시관근대민족 운동관3전시관일제침략관4전시관3?1운동관5전시관독립전쟁관6전시관사회문화 운동관7전시관대한민국 임시정부관원형극장35mm 영사기 9대와 24대의 스피커를 동시에 사용하여 원형으로 구성된 9면의 대형스크린의 원형 영상(Circle Vision)을 상영하는 곳야외전시어찌됐든 과거의 아련한 추억을 더듬으며 찾아간 독립 기념관은 나로 하여금 “이렇게 볼것들이 많았던가...?” 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 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독립기념관의 구조와 전반적인 전시물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 구조가. 제1전시관(민족 전통관)우리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오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 동안 수많은 외침이 있었으나 단결된 힘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 전시관에는 선사시대 이래 조선시대 후기까지 우리 겨레의 문화유산과 국난극복에 관계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이 전시관 중앙에는 광개토 대왕릉비가 세워져 있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속칭 통구(通溝) 또는 동구(洞溝)에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일명 호태왕비)이다. 각력응회암(角礫凝灰巖)의 자연암주(自然巖柱)를 사용한 이 호태왕비(好太王碑: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는 4면에 도합 1,800여 자가 새겨져 있으며 그 내용은 고구려의 건국, 광개토대왕의 즉위와 대외정복 업적, 능묘의 관리문제 등 세 부분으로 요약된다. 이 중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은 일제에 의해 비문의 조작설, 비문 해석상의 차이 때문에 한?중?일 삼국간에 계속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이 비석은 고구려의 팽창기 동아시아 역사에 관한 귀중한 사료일 뿐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하는 웅장하고 당당한 비석으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념물이다.이외에도 신?구석기 시대의 토기나 돌도끼 청동기 시대의 청동거울 등과 같은 선사시대의 유물과 삼국 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의 유물등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전통 유물들을 볼 수 가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워 왔던 삼국시대의 국가별 문화적 특성의 차이를 지금까지는 막연히 그렇다고만 생각해 와고 알아왔는데 전시된 유물들을 한번에 보면서 새삼스럽고도 확실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가슴깊이 남고 있다. 백제의 소박함과 고구려의 강인함, 신라의 귀족적인 아름다움... 막연한 들음이 아닌 확실하고도 적나라한 보게됨이었다.나. 제 2 전시관(근대민족 운동관)조선후기부터 근대화의 역사가 태동하였는데, 그때 열강들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과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청일전쟁(1894)이후에는 의병전쟁과 더불어 계몽운동이 구국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전시관에는 1860년대부터 1910년 국권상실 때까지의 근대 민족운동과 구국운동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민영환 유서, 서재필 유품, 안중근 의사의 거사 현장 재현등 일제 탄압과 당시 구국운동을 벌인 이들과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있는데 하나같이 깊게, 아니 보다더 재미있게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당시 암담했던 상황을 재미있게 라는 표현을 써가며 당시 느낀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는 그만큼 현실감있게 전시가 잘 되어있다는 뜻이다. 게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았고 눈에 띄었던 것은 실물보다 작게 제작된 큰 독립문이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西大門區) 현저동(峴底洞)에 있는 조선말기의 석조문인 독립문(獨立門)은 갑오경장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고자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의 표상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한 기념물이다. 1896년(고종 33) 독립협회의 발의로 국왕의 동의와 거족적인 호응을 얻어, 같은 해 11월 21일 정초식을 갖고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했다. 서재필(徐載弼)의 자서전에는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하고 한국인 목수가 시공했다고 되어 있으나,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러시아인 사바린의 설계로 되어 있다.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이전이 불가피해져서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7.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겨진 기념동판을 그 자리에 묻고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독립문에서 느낄 수 있는 민족의 자주성에 난 독립운동 당시의 함성이들리는 듯 했으며 감히 전율이라할 법한 느낌을 갖기에 충분했다.- 제 3 전시관(일제 침략관)고대이래 우리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던 일본은 19세기 중엽부터 무력을 앞세워 우리 나라를 침략해왔다. 일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종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1910년에는 우리 나라를 강제로 병탄하여 경제적 수탈과 독립운동에 대한 비인도적인 탄압을 감행하다 끝내는 우리민족을 말살하고자 하였다. 이 전시관에는 이러한 일제의 침략과 만행의 실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견학도중 가장 울분이 넘쳤고 분노로 가득했던 부분이었다. 경부전선 설치공사 통고문, 경부전선 설치공사 정지요구서, 일본군 불법침입 관련 공문, 정한론 선전도, 조일통상장정, 조일무역규칙, 마산포 일본 거류지 협정서등과 같은 일제의 강제적이고 일방적이며 탄압적인 협정이나 조약과 관련된 문서가 전시되어 있고 당시 상황을 제현해 주는 밀랍 인형 들도 있었다. 애국지사들이 연행되는 장면이나 당시의 고문 현장을 보여주는 전시물은 울분과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 고문장면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데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당시 애국지사들이 체포되어 당한 고문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일제는 1936년 서울 서대문경찰서 신축 당시 독립투사 고문도구로 벽관을 설치하였는데, 사람이 들어가면 움직일 수 없어 전신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문의 위쪽에 가로, 세로 20cm의 구멍을 통하여 심문하였으며, 내부 위쪽에는 전기고문 기구까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전시관에서는 계속 분노와 울분으로 일관 했다.외세(外勢)를 배격(排擊)하고 민족(民族)의 자주(自主)?자존(自尊)?자위(自衛)의 독립정신(獨立精神)으로 온 겨레가 거족적(擧族的)으로 힘을 합쳐 일어난 3?1정신(三一精神)의 영원성(永遠性)을 표현(表現)한 작품이다.- 제 4 전시관(3?1운동관)우리민족은 1919년 3월 1일 총궐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해외 동포까지 참여하여 민족의 독립역량을 온 세계에 과시하였다. 그리고 중국, 인도 등의 약소 민족에게도 영향을 주어 5?4운동 등의 투쟁이 일어나게 하였다. 이 전시관에는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과 3?1운동 관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눈길을 끌었던 것은 나무로 되어 있는 커 다란 기둥이었는데 그 나무 기둥에 지역별 독립운동의 일시와 장소 참가 인원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또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유물은 3?1운동 당시 독립운동가 문용기의 피가 묻은 저고리와 두루마기이다. 문용기(文鏞祺)는 1919년 4월 4일 이리(현 익산)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 만세시위에서 그는 일본 헌병의 칼에 두 팔이 잘리고 난자당하여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다.(문용기 두루마기)- 제 5 전시관(독립전쟁관)우리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은 1900년을 전후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만주촵러시아의 연해주 등지에 근거를 구소 일제와 여러차례의 독립전쟁을 수행한 독립군단들은 1920년 10월 봉오동과 청산리 지역에서 독립운동사상 전무후무한 대첩을 거두었다. 제5전시관에는 만주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미주 등지에서 전개된 무장항일투쟁 관련자료, 한국광복군과 의열투쟁에 관련된 각 자료와 모형물, 영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각종 전쟁의 기록화가 많이 전시 되어있는데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기록화가 눈길을 끌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 역시 안동 김씨 집안의 후손이기에 직계 선조의 공덕이 빛나는 것이기에 더욱 더 마음이 갔던 것이 사실이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사회과학| 2005.06.13| 6페이지| 1,000원| 조회(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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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사원 평가A좋아요
    한국의 사원◎ 절의 어원 및 기원절의 기원은 1)죽림정사(竹林精舍)가 최초의 절이며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기거하면서 수행하고 설법하여 중생을 교화시키는 곳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절의 어원은 상가람마(sangharama)로써 교단을 구성하는 출가한 남자와 출가한 여자, 재가(在家)의 남자신도와 여자 신도의 사중(四衆)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표기하여 승가람마라 하였으며 줄여서 가람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불교 수용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 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 수용시기 및 배경이 각기 다른데 한번 알아 보도록 하자.?고구려 : 372년 소수림왕 공인. 전진(前秦)으로부터 불상, 불경을 전파받음으로써 수용 됨?백 제 : 고구려 보다 12년 후인 384년(침류왕)에 동진(東晉)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받아 들임.불교 공인 시기부터 중국의 양(梁)과 활발하게 문화교류를 하고 또한 부여로의 천도가 실시되면서 문화적 절정기를 맞이하게 됨. 이 시기 불교 미술, 학문사상 등도 부흥함 → 불교문화를 일본으로 이식함.※ 한반도 임에도 백제가 고구려를 경유하지 않고 불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당시 양국간의정치적/군사적 대립 및 충돌이 극심한데서 비롯됨.?신 라 : 삼국 중 가장 늦은 528년(법흥왕) 공인. 고구려로부터 전파 받음. 처음 불교가 고구려로부터 전파 받았을 당시에는 큰 호응도 없었고 별 다른 발전을 하지 못 함. 다시 고구려의 아도가 불교를 전파하여 신도 수가 급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신라 왕실은 불교 국가 공인을 위해 노력 함. 그러나 당시 씨족 중심의 귀족세 력의 반대로 실패.법흥왕 즉위 후 씨족적 기반 억제로 인한 중앙 집권적 국가체 제를 확립하려는 세력이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불교 공인1)중인도의 마가다국에 있었던 최초의 불교 정사(精舍), 즉 지금의 사찰-1-?통일 신라 : 삼국의 문화가 고전적 불교문화 였다고 하면, 이러한 고전적 불교문화가 전형 적인 불교문화로 진전되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사치성의 불교 문화가 풍미하여 국가적 쇠퇴를 불러 오게됨.?조 선 : 유교문화라는 문화적 충격으로 인해 1000여년간 우리 문화를 주도했던 불교문화를 급속도로 쇠퇴시킴. 성종과 연산군 재임시기에 사상 유례없는 박해를 받음.그러나 장구한 세월 동안 뿌리깊이 박힌 불교문화가 국가적인 시책으로 말미암아 금새 사라지지는 않았다. 전대와 같은 찬란한 불교문화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샤머니즘 적인 것과 결합하여 민중 속에 파고들던가 설화소설 같은 것을 통해 대중에게 불교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전달할 뿐이었다.◎ 절의 건물구조절의 건물 구조는 크게 법당(法堂), 탑(塔), 요사(寮舍), 문루(門樓) 4가지로 나눌 수 있다.?법당 : 가장 중심부, 당호는 ‘전’을 씀. 어느 부처님 혹은 어느 보살님을 모셨느냐에 따라 다름- 대웅전 : 석가모니를 모신 법당(대웅은 석가모니의 다른 호칭)- 비로전 : 법신불인 비로자나 불을 모신 법당- 극락전 : 서방정토의 주불이신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 미륵전 : 미륵불(미래에서 오신 부처님)을 보안한 법당- 약사전 : 중생의 재난과 질병을 없에고 고난에서 중생을 구해주는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 관음전 : 관세음 보살을 모신 법당. 자비전이라고도 함- 지장전 : 지상보살을 모신 법당- 팔상전 : 부처 생애를 8부분으로 나눠 여덟 폭의 그림으로 모시고 중앙에 석가모니불상을 모신 법당그외에도 화엄전,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을 모신 나한전, 산신, 칠성을 모신 산신각(민간시앙 흡수), 칠성각, 불경을 보관하는 장소로 장경각이 있다.?탑 : 불교 신앙의 원류를 고찰해 볼 때 법당보다 탑이 먼저임. 법당은 부처상이 조성된 이후 생성됨. 따라서 탑은 불상 전부터 불교신앙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탑의 원시적 기원 : 부처의 제자가 떠날 때 마음으로나마 계속 모실 수 있는 법을 묻자-2-머리카락을 잘라주며 탑안에 넣어두고 항상 예불을 드리며 가까이 하면 될 것이라 했다함에 유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은 백제의 것임(익산의 미륵사지 석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이 창건되었다. 또한 498년(문자왕)에 금강사(金剛寺)가, 영류왕 때는 영탑사(靈塔寺) ?육왕사(育王寺) 등 많은 절이 건립되었다. 1937년 평양 청암동의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발굴 조사한 결과 5세기에 창건된 금강사지에는 남향으로 중문(中門) 안에 팔각목탑이 배치되고 동서(東西)에 2개의 건물터가 있으며 북쪽에 3개의 건물터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또 1975년 평양 왕릉동 정릉사지(定陵寺址)를 발굴한 결과 5세기 창건으로 추정되는 정릉사에는 남향으로 중문 안에 팔각목탑이 배치되고 동서에 2개의 건물터가 있으며 북쪽은 회랑으로 막혔고, 회랑 안에 3개의 건물터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백제백제의 한성시대 절터는 아직 한 곳도 발견되지 않았다.공주에 있는 대통사지(大通寺址)는 527년(성왕 5)에 창건된 절이다. 기록상으로는 왕흥사(王興寺)?칠악사(漆岳寺)?오합사(烏合寺)?천왕사(天王寺)?도양사(道讓寺)?미륵사(彌勒寺) 보광사(普光寺)?호암사(虎灸寺)?백석사(白石寺)?오금사(五金寺)?사자사(獅子寺)?북부수덕사(北部修德寺)등이 있었다. 그리고 1936년에 부여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1938년에 부여 동남리사지(東南里寺址), 1966년에 부여 은산면 금강사지(金剛寺址), 1980년에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1982년 익산 미륵사지 등이 있다.2)한국 삼국시대 신라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법이다. 쌍탑일당식(雙塔一堂式), 양탑일금당식(兩塔一金堂式)이라고도 한다. 일탑일당식과 마찬가지로 남중선상(南中線上)에 중문(中門)과 금당?강당을 순차적으로 배치하고 중문에서 강당을 잇는 회랑(回廊)을 설치하되, 금당 앞에 동서로 불탑을 두 기 세우는 배치법이다3)불탑 중심의 가람 배치법이다. 블탑 한 기와 금당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는 형태로 일탑식 가람 배치라고도 한다. 백제칠당가람(百濟七堂伽藍)도 이 양식이다. 남북조시대 중국에서 전래하여 한국에서는 사비 천도 후의 백제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고대 불교의 흔적인 사리 존숭의 전통을이하다. 금강사지는 동향으로 중문?탑?금당?강당이 동서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다. 정림사지는 남향으로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다. 익산미륵사지는 남향으로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이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가 많은데 익산 미륵사지는 새로운 가람배치로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신라신라는 법흥왕(法興王) 이후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534년에 흥륜사(興輪寺)가 착공되어 544년에 준공되었고, 535년에 영흥사(永興寺), 566년에 기원사(祇園寺), 597년에 삼랑사(三郞寺), 553년에 기공하여 645년에 완공한 황룡사(皇龍寺),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 영묘사(靈廟寺) 등이 창건되었다. 이 중에 확실한 가람배치를 알 수 있는 것은 황룡사지이다. 황룡사지는 남향으로 남북 일직선상에 남문(南門) ?중문(中門)?탑?금당?강당이 서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는데, 중문과 탑 사이 좌우에 경루(經樓)나종루(鐘樓) 같은 건물이 대칭으로 배치되었고 금당 좌우에도 2채의 불전이 병렬(竝列)로 배치되어 있다. 황룡사지는 일탑삼금당병렬식(一塔三金堂竝列式)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절은 모두 평지(平地)에 있는 점이 특색이며 절의 중심 건물은 탑이다.?통일 신라통일신라 때는 수많은 가람이 있었다. 이 중에 대표적인 것이 1959년에 발굴, 조사된 감은사지(感恩寺址)와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천군리사지(千軍里寺址), 단편적으로 조사된 망덕사지(望德寺址)?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및 1969년에 발굴, 조사된 불국사(佛國寺) 등이다. 감은사지는 남향으로 중문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금당 앞 좌우에 쌍탑(雙塔)이 있으며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다. 또한 절이 산기슭에 자리잡았다. 천군리사지는 남향으로 중문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금당 앞 좌우에 쌍탑이 있으며,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無塔) 절이 생겼다.?고려/조선고려는 통일신라의 가람배치를 계승하였다. 초기에는 탑에 대한 배려가 높았으나 후기로 오면서 탑이 없는 절이 많이 생겼다. 고려의 가람은 산지 일탑일금당병렬식(山地一塔一金堂竝列式)과 산지 쌍탑병렬식(山地雙塔竝列式), 산지 무탑식(山地無塔式)이 혼재한다. 조선시대는 고려 가람배치의 계승과 모방에 그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유명 사원《해인사》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 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 및 석조(石造)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있다.
    사회과학| 2005.06.13| 7페이지| 1,000원| 조회(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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