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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보덕전을 통해 본 7세기 고구려 사회 평가A+최고예요
    보덕전을 통해 본 7세기 고구려 사회I. 서론II. 본론1. 삼국유사1) 제3권 제3 흥법편2) 제3권 제4 탑상편2. 고구려의 시대상황1) 연개소문의 집권과정2) 고구려와 당의 전쟁 - 여당전쟁3) 고구려의 대당관계3. 도교가 들어오기 전 고구려의 불교4. 도교 도입 과정과 성행시기1) 연개소문이 도교를 도입한 이유2) 도교의 도입과정3) 도교의 성행5. 도교 성행에 대한 보덕의 대응과 망명 후의 삶‘1) 보덕의 대응2) 망명 후 보덕의 삶III. 결론I. 서론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가 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 민족에게 종교는 매우 중요하다. 귀족들이나 하층민들이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한 시대에 하나의 종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종교가 성행하고 쇠퇴하며 융합되고 분리되면서 우리 나라에는 많은 종교나 교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들간에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종교가 생긴 이래 인류는 늘 종교 전쟁을 해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종교간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이같이 종교가 가진 힘은 무엇일까? 물론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안식처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사상이나 민중들의 힘을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구려 말기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고구려 말기 당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옹립한 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 도교를 받아들인 연개소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도교 진흥책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난하다가 결국은 백제로 망명하게 된 보덕 화상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보덕 화상이 망명하고 난 후 얼마 후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오늘 우리가 보덕전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한 인물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고구려 말기에 도교 수용과정과 불교의 쇠퇴, 그리고 그것이 당시 시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 도교의 입장과 불교의 입장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II.; 624)이었다. 이듬해에 고구려에서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배울 것을 청하자 당나라 황제(皇帝; 고조高祖를 말함)는 이를 허락했다.그 뒤에 보장왕(寶藏王)이 즉위하자(정관貞觀 16년 임인壬寅; 642) 또한 유(儒)?불(佛)?도(道)의 세 교(敎)를 모두 일으키려 했다. 이때 왕의 사랑을 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아뢰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같이 성하게 일어나지만 도교는 그렇지 못하오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이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도교가 불교와 맞서서 나라의 운수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해 여러 번 간했지만 왕은 듣지 않으므로 이에 신력(神力)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에 있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全州)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 가서 살았으니 곧 영휘(英徽) 원년(元年) 경술(庚戌; 650) 6월이었다(또 본전本傳에는, 건봉乾封 2년年 정묘丁卯(667) 3월月 3일日의 일이라 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나라가 망했다(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668)에 나라가 망했으니 그 사이를 따지면 경술년(庚戌年)의 19년 후가 된다). 지금의 경복사(景福寺)에 날아온 방장(方丈)이 바로 이것이라 한다(이상은 에 있는말 이다). 진락공(眞樂公)은 그를 위해 시(詩)를 지어 당(唐)에 남겨 두었고, 문렬공(文烈公)은 그의 전기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했다.또 당서(唐書)를 상고하면 이보다 앞서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이란 자가 있어서 전쟁에 불리하여 장차 죽게 되었을 때 맹세했다. "내 반드시 고구려의 총신(寵臣)이 되어 저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개씨(蓋氏)가 정권(政權)을 마음대로 하게 되자 개(蓋)로 성씨를 삼았으니 곧 양명의 응(應)함이었다.또 에 이렇게 말한다.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대업(大業) 8년 임신(壬申; 612)에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왔으며,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 대장군(大將軍) 이적(李勣)과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고구려를 쳐서 나라를 멸망시켜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庶子)가 4,000여 가구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다(와 조금 다르기에 여기에 모두 싣는다). 대안(大安) 8년 신미(辛未; 1092)에 고려의 우세승통(祐世僧統)이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의 비래방장(飛來方丈)에 가서 보덕성사(普德聖師)의 영정(影幀)에 예를 갖추고 시(詩)를 지었다.열반(涅槃)의 평등한 가르침은,우리 스승에게서 전해졌다고 하네.애석하게도 승방(僧房)에 날아온 뒤에,동명왕(東明王)의 옛 나라 위태로웠네.그 발문(跋文)에는 이렇게 썼다.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혹해서 불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보덕법사(普德法師)는 이에 승방(僧房)을 날려서 남쪽 이산으로 옮겨 놓았다. 그 후에 신인(神人)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가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이런 것은 모두 와 같고, 그 나머지는 본전(本傳)과 에 모두 기록되어있다. 보덕법사에게는 11명의 높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고, 적멸(寂滅)?의융(義融) 두 법사는 진구사(珍丘寺)를 세웠고,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세웠고,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세웠고,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세웠고, 개원화상(開原和尙)은 개원사(開原寺)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역시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本傳)과 같다.찬(讚)해 말한다.불교는 넓어서 바다와 같이 끝이 없어서,백천(百川)의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를 모두 받아들이네.가소롭다. 저 여왕(麗王)은 웅덩이를 되어 국정을 장악하였다. 막리지는 당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중서령(中書令)직에 해당한다고 한다. (『新唐書』高麗傳 )그는 영류왕 14년(631)부터 당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동북으로 부여성에서 남으로는 방해에 이르기까지의 1천 여리에 이르는 장성을 쌓아 국방 시설에 분방하였으며 이로부터 그는 점점 두각을 나타내며 독재적 지반을 쌓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흉계를 통하여 왕이하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왕의 조카인 보장을 왕으로 내세우는 한편 자기는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잡았다. 그는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실권자가 되어 국사를 도맡게 되었다. 즉, 대막리지는 지금의 수상과 같은 것으로 그의 우세한 권력은 병마권을 총통하는데 있었다. 중앙에 있어서는 부병(府兵)을 모두 모아 검열 할 수 있음은 물론 전국에 펼쳐진 대소 여러 제국의 도독 등을 장악하여 그들을 순찰, 독려할 수 있었다. 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한편 백제와 힘을 합쳐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실권에다 천품적인 호일한 성품에서 오는 그의 위풍과 동작이 어떠했는지는 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수염이 길고 몸집이 크며 칼을 다섯 개나 차고 좌우 사람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했다. 항상 그 속관에게 엎드리라고 하여 그 등을 밟고 말에 올랐으며 말에서 내릴 때도 역시 그러하였다.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병졸들을 길에 벌이고 도자(導者)가 시리게 불러 행인을 물리치면 백성이 두려워 피하고 다 겁결에 구덩이로 빠지더라.위의 글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당대의 권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2) 고구려의 대당관계고구려는 당 이전 대제국이었던 수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그러나 수가 멸망하고 당이 들어선 후로 고구려의 대당정책은 평화 정책이었다. 고구려 영류왕(營留王)은 려?수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사실을 인식하고 중국과의 전쟁을 회피하고 당(唐)과 평화외교(平和外交)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당(唐)에 사신을 파견(派세민 너의 인륜은 어긴 행위를 벌주려고 별러 왔다. 또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두 나라의 문제인데 너희가 무슨 이유로 따지느냐. 너희는 신라마저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숨기고 있는 놈들이 아니냐. 내가 너희를 혼내주겠노라.”그 후, 연개소문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 올 경우 주된 방어선이 될 요동 지방을 우선 점검했다. 그리고 요하를 건너 요서지역에서 당나라의 거점이 될만한 곳을 공격하여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도중에 식량을 얻지 못하도록 했다.그리고 보장왕 4년 4월 당나라 대군이 요수(遼水)를 건너 고구려를 침입하여 신성(新城)을 포위하고 개모성(盖牟城)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 당나라군이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고구려 군사 1만여 명과 주민 4만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고구려 보장왕 4년, 안시성(安市城)싸움이 시작되었다. 중국 당(唐)나라의 고구려 침입[여?당전쟁(麗唐戰爭)]에서 고구려가 큰 승리를 거둔 안시성전투가 시작되었다. 당나라 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한다며 안시성 점령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안시성은 당시 인구 약 10만에 이르던 고구려의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643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차후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불응하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류왕(榮留王) 살해 및 대신(大臣) 학살사건의 문책을 표방하고 644년 11월 태종이 직접 10만 원정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다.645년 4월부터 개모성(蓋牟城:瀋陽 동남쪽)?비사성(卑沙城)?랴오양(遼陽)?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점령한 당나라군은 6월에는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을 대장으로 한 15만의 군사를 안시성에 보냈으나 패하여 두 사람은 3만 6800명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이세적(李世勣)을 시켜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 장수 도종(道宗)이 먼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었다.)
    인문/어학| 2005.10.21| 13페이지| 1,000원| 조회(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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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상과 4,5세기의 국제정세 평가A좋아요
    제목 - 박제상과 4, 5세기의 국제정세서론보통의 인문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박제상’이라는 이 석자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보통의 교육을 받아온, 즉 ‘대학수학평가’를 위해 학습한 여느 학생들이 그러해 왔듯이 어느 지식이든 상식이든 깊이 헤아리려 하지 않고 그 결과 - 소위 ‘답’ 이라 하는 짤막한 단어 - 만을 외워왔던 것이 사실이다.이른 바 '대학'이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그저 작은 얕은 지식 몇 가지 안다고 '지식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회에 나가 뽐내며 잘난 체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가 청강하고 있는 강의의 목적마저도 잊고 아직도 무작정 외우기식의 학습을 해가는 현실을 반성하며 상식으로 굳혀진 관점을 재탐구할 수 있게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과 단합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일깨워 주신 노중국교수님께 짧게나마 감사드리며 이 시간 ‘박제상 열전’을 근거로 한 조사 내용을 발표하도록 하겠다.박제상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곧 ‘충’으로 연결되어진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의 덕목에 연결되어지는 인물은 흔치 않을뿐더러 그 인물은 매우 훌륭한 성인으로 평가되어 지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기록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보다 다른 시각으로 되짚어 보고, 의문을 제기해 봄으로서 상식으로 굳혀진 박제상의 평가를 재탐구해 보고자 한다.먼저 우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특히 박제상의 출자는 신빙성이 있는 것인가 에 대해 의문을 제시해 보고, 그에 대해 살펴본다.볼모의 파견과 구출을 통해 당시의 국제정세를 살펴보고, 신라의 인질외교는 국내외정세에 어떤 영향을 주였고, 볼모의 파견에 어떤 정치적 배경이 있었는지 살펴본다.마지막으로 그 당시나 오늘날 높이 평가 받고있는 박제상의 충을 참된 충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 아니면 시대가 만들어낸 충신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본론설화소개박제상 열전 -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박제언 어시제상권미사흔잠귀본국 미사흔왈 복봉장군여부 기가독귀 제상왈 약이인구발 칙공모불성 미사흔포제상항 읍사이귀 제상독면실내안기 욕사미사흔원행 제인문 장군하기지만 답왈 전일 행주로곤 불득숙흥 급출 지미사흔지도 수박제상 행강추지 적연무회명 망불급언 귀제상어왕소 칙류어목도 미기사인이신화소란지체 연후참지 대왕문지애통 추증대아 후사기가 사미사흔 취기제상지제이녀위처 이보지 초 미사흔지래야 명六부원영지 급견악수상읍 회형제치주극오 왕자작가무 이선기의 금향악우식곡 시야해석박제상(朴堤上) - 또는 모말(毛末)이라고도 하였다. - 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 이사금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阿道) 갈문왕(葛文王)이고, 아버지는 파진찬 물품(勿品)이다. 제상은 벼슬길에 나가 삽량주간(良州干)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실성왕 원년 임인(402)에 왜국과 강화하였는데, 왜왕이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은 일찍이 나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그 아들에게 유감을 풀고자 하였음으로 거절하지 않고 보냈다. 또 11년 임자(412)에는 고구려가 역시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볼모로 삼고자 하였으므로 대왕은 또 그를 보냈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말을 잘하는 사람을 구하여 가서 [두 아우를] 맞이해 올 것을 생각하고 있던 바,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과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세 사람이 현명하고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물었다.나의 동생 두 사람이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가 되어 여러 해가 되었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의 정이라서 그리운 생각을 억제할 수 없소. 제발 살아서 돌아오게 하여 야겠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세 사람이 똑같이 대답하였다.신들은 삽량주간 제상이 성격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전하 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이에 제상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세 신하의 말을 하며 가 주기를 청하였다. 제상이 대답하기를木島)로 유배보냈다가 곧 사람을 시켜, 섶에 불을 질러 전신을 불태운 후에 목 베었다.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고, 대아찬을 추증하였으며, 그 가족에게 후히 물품을 내리었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맞아 아내로 삼게 하여 보답하였다. 이전에 미사흔이 돌아올 때 [왕은] 6부(六部)에 명하여 멀리까지 나가 맞이하게 하였고,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마침 형제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길 때 왕은 노래와 춤을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 향악의 우식곡(憂息曲)이 그것이다.박제상의 출자에 대하여▷박제상은 “왕경인”인가 “지방세력가”인가?朴堤上 始祖赫居世之後 婆娑이師今五世孫 祖阿道葛文王 父勿品波珍逸聖이師今 15年 封朴阿道爲葛文王박제상 시조혁거세지후 파사이사금오세손 조아도갈문왕 부물품파진찬일성이사금 15년 봉박아도위갈문왕위 사료에 따르면, 박제상은 파사왕의 5세손으로 박씨 왕실의 후예로 되어있다. 그의 父는 물품이고 祖父는 아도이다. 그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로 엇갈려 있다. 하나는 왕경인(王京人)으로 지방에 파견되었다고 보는 입장과, 왕경인이 아닌 지방세력가로 보는 입장이다.박제상의 출자를 왕경인으로 주장하는 견해는 기본적으로 사료에 밝혀진 그의 세계를 중시한다. 이러한 견해는 박제상이 왕경인으로서 교통상의 요지나 전략상의 요충지인 삽량(良) 즉 양산지방을 통제,감찰 할 목적이나, 또는 군사지휘관으로 파견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오래도록 통설화 되었다.그러나 박제상을 지방세력가로 보는 새로운 견해는 그의 조부 박아도가 일성이사금 15년(148년)에 갈문왕에 책봉된 것으로부터 이끌어져 나온것인데, 이 사실은 박제상이 생존한 5C초와 지나치게 시간적 격차가 난다는 것이다. 박제상의 관등은 나마라서 그를 진골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김세장이라고 하였는데 성씨의 사용은 6C 이후이므로 그의 세계도 결국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우리는 아도갈문왕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이 문국제전의 양상을 띄게 된다.이 전쟁을 시작하게 된 고구려의 동기는 남진정책으로부터 비롯된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안정된 농업생산지의 획득과 백제에 대한 복수, 그리고 한반도 남부 전역에 대한 지배체제의 구축이라는 원대한 통일구상의 성격을 띈다. 고구려의 남방에 대한 관심은 4c 초 낙랑 대방 2군을 몰아낸 후, 저진기지로서 고국원왕4년(334) 평양성을 증축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백제의 정복군주 근초고왕에 이어 근수수왕대 마저도 북침에 의하여 고구려는 굴욕적인 패배(고국원왕 전사. 371)를 맛보게 된다. 이런 두 나라의 군사적 우열관계는 광개토왕대에 들어와 반전되어 백제에 대한 대규모의 보복전이 시작된다.광개토왕의 즉위년(391)으로부터 시작된 백제정토전은 영락6년(396)에 그 절정을 맞이하여 백제의 북방영토의 대부분을 점거하고(58성 700촌) 백제와의 복속의 맹약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백제는 이를 계리고 하여 아산왕6년(397)에 와자전지를 왜에 파견해 군사적 협력체제를 구축하게 된다.그러나 고구려의 남방경영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북방에서의 후연의 침입이 개시된다. 광개토왕의 왕성한 정복활동에 의해 배양되기 시작한 고구려의 중화의식이 후연과의 의제(意制)적인 면에서 마찰을 일으켜 국제전쟁을 발발시켰다.해마다 계속되는 북방에서의 전쟁은 남방에서의 백제의 재기를 유도하고, 마침내 백제는 영락14년(404)에 왜군과 연합하여 수군선단을 이끌고 북진하여 대방계(황해도)를 침공하게 된다. 그러나 백제, 왜 연합군은 대방계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왜국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고구려와 군사적 대결을 피하게 되고, 백제는 영락 17년(407)에 다시 고구려와 교전하지만 고구려의 공격력을 감당하지 못한 채 영락6년에 이어 6개의 성을 공략당하는 등 영토상실과 굴욕감을 맛보게 된다.수차에 걸친 출정에 의해 남방에 대한 지배질서를 구축한 고구려는 주변 여러 나라에 대한 중화의식을 가지게 된다. 신라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구원을 받은 보호국으로 간주하고 신라에의 파병을 계기로로 왜의 침공이 계속되자 외교적 수단으로 왜의 침공을 막아보기 위해 인질을 파견하였던 것이다.왜에 볼모파견함에 대하여 고구려는 어떻게 반응하였는가?고구려는 신라의 왜에 대한 접근에 무감각했다. 이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근본적인 위협세력이 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신라가 왜와 화친을 맺는 정도가 골치 아픈 존재를 무마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또 신라와 왜가 접근함으로서 백제와 왜 사이에 소원해지는 효과를 노릴 수도 있다. 실제로 신라의 볼모가 왜에 간 다음해 백제의 신라침공이 있었다.당시 신라는 왜에 대한 볼모정책의 실패와 상관없이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추진해 왔었다. 그 결실이 눌지왕18년(433) 백제와의 화친관계, 즉 나제동맹 성립에서부터 맺어진다. 고구려에서는 이를 보고서도 나제동맹이 처음부터 군사동맹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신라의 움직임을 방관하였던 것이다.왜가 신라를 계속해서 침공하는 상황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를 위협할 만한 세력이 될 수도 없었고, 백제, 신라 관계가 개선되는 만큼 백제, 왜 관계는 소원해지고 있었다.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고구려는 백제, 신라, 왜 사이의 외교적 분쟁의 골이 깊어지도록 방조하려 하였다.신라는 백제와의 우호관계 성립으로 큰 위협이 사라지자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가야세력도 참여하고 있었다.소지왕3년(481) 고구려의 침공에 백제와 가야가 원군을 파견하였다. 이는 가야가 광개토왕 정벌의 충격에서 벗어나 재기하였음을 보여준다.이 세력들이 연합한 결과 고구려군은 백제, 신라의 상호원조에 의해 여러번 격퇴당했고,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6C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의 영향력도 크게 퇴조하기 시작한다.왜(倭) - 왜에 볼모를 보낼 정도였다면 당시 왜의 세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본은 중앙집권국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 군사를 출병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국가였다. 따라서 삼국시대에 일다.
    사회과학| 2003.10.26| 15페이지| 1,000원| 조회(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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