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麻谷寺)1. 마곡사의 배치2. 마곡사(麻谷寺)마곡사란...마곡사는 길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고찰이다. 마곡사는 643년 자장스님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840년 보조체징 스님이 창건했다고도 전한다.창건 이후에는 847년 사굴산문의 개창자인 범일국사, 고려의 도선, 보조국사 지눌, 조선시대 각순 스님 등에 의해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마곡사 창건 이후 가람은 그 사역이 있어 희지천을 사이에 두고 교화(敎化) 가람 지역과 수행(修行) 가람 지역, 즉 북원(北元)과 남원(南原)으로 양분화 된 특징을 가지며, 선교 양종 대본산으로서의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마곡사의 창건연대나 사력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지리지나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나 사찰내의 유적과 유물을 고려하면, 적어도 고려시대에 이 사찰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적기나 창건기는 살펴보기 어렵다.다만, 사찰에 대한 기록은 1851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필자미상의 태화산 마곡사 사적입안이 있을 뿐이다.이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당정관 17년(643)에 신라의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서론_ 17~18?19세기의 불교계의 흐름유명 대찰의 복구와 함께 17세기 이후 불교계에 나타난 또 다른 모습은 산간 싶은 곳에 작은 사찰들이 새롭게 지어진 점이다. 이런 절들은 수행과 은둔을 목적으로 자급자족(自給自足)적인 수도 생활을 원칙으로 지어졌다. 산간에 지어지는 작은 사찰들은 장대한 불전이나 화려한 전각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이어져 온 자연에 대한 적응력과 건축적인 지혜가 결집되어 있어 하나의 완성도 높은 건축 공간을 구현해 낼 수 있었다. 그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가운데 네모난 마당을 두고 사방에 건물을 배치시키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산간에 작은 사찰들이 들어서는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 활기를 찾기 시작해서 18세기에 그 절정에 달했다. 신라시대 이래로 절이 자리 잡고 있다가 한동안 폐허가 되었던 곳에 다시 법당을 짓는상으로 남아 있었다.조선후기 불교 사찰의 주 신도층은 서민이었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은 힘들고 거친 것이었다. 서민들이 입는 옷은 때 묻은 흰옷이었고 이들이 사는 집은 낮고 어두운 초가집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사회의 전반적인 역량은 향상되었다. 서민들도 때로는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이러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대상 중의 하나가 인근의 절을 찾는 일이었다. 초파일이나 가족의 기일을 당해서 찾아가는 절은 하나의 위안처였으며 절은 일상의 고통과 고달픔을 잊을 수 있는 피안의 세계였다고 생각된다. 이런 곳에 일상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하고 요란한 장식은 잊을 수 없는 자극이 되고 즐거움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전 건물에 꾸며진 용머리 조각이나 꽃살 무늬 장식은 결국 서민들의 꿈을 대신해 주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특히 이런 화려한 장식은 충청도나 전라도 해안 가까이 있는 사찰에서 두드러졌다. 부안의 내소사 대웅전은 화려한 꽃살 무늬 창살이 유명하고 인근 개암사는 공포 세부까지 꽃잎 무늬를 새긴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이름이 높은 절이다.주제 가운데는 일반 서민들이 좋아하는 장수와 화복을 기리는 대상들이 많다. 이것은 건물의 장식 의도가 절에 찾아오는 서민 신도층의 즐거움을 자아내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케 해준다.본론_ 유래와 위치1) 마곡사의 유래① 사찰의 유래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2년)에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창건하여 고려보조국사가 중수하고 그 후 범일, 도선, 각순대사가 중수한 내용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행행하여 ‘영실전’이란 3자를 특별히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 사찰은 임진, 병자의 양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목조건축물이 풍부하다.② 이름의 유래마곡사 이름의 유래에는 3가지가 있다.마곡사란 이름은 자장율사가 절을 짓고 법을 설할 때 이를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삼대처럼 골짜기를 빽빽하게 채워서 붙여졌다는 설과 신라 말 성주산문을 개창한 무염선사가 마곡 보철화상을 사모하안 변산, 성주 만수동이 꼽혔다.이 지역들은 한결 같이 산이 깊고 물이 풍부하여 세상을 등지고 숨어살기에 좋은 곳으로 병화와 수탈로 피폐한 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의 이상향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준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는 고난의 세파를 피해 떠돌던 유랑민들이 삶을 의탁하던 안식처였던 것이다.유구와 마곡은 금강 이북지방의 산맥인 금북정맥이 시작하는 곳으로 충남의 여느 지역과는 달리 산이 높고 깊은 곳이다. 일찍이 조선의 의적 홍길동이 웅거했다는 전설이 있고, 마씨 성을 가진 도적의 산채가 있어 마곡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인연 탓인지 탈옥하여 방랑의 길을 떠돌던 백범 김구도 이 골짜기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또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들이 넓어 먹을거리가 넉넉하고 유구천의 수구가 막혀 있어 풍수적으로도 능히 1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길지로 꼽혔다.마곡사가 자리 잡은 터는 금북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태화산의 산세와 물길이 태극의 문양처럼 맞물려 흐르는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이다. 삼재팔난불입지지라 하여 일찍이 구도자의 발길이 머물렀던 곳이다.2) 마곡사의 건축물① 해탈문(解脫門)[문화재자료 제 66호]마곡사의 정문으로 이 문을 통과하면 속세에서 벗어나 법계에 들게 되고 해탈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갖 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 이라한다.두 번째 문인 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62)이 박공지붕 집인데 비하여, 해탈문은 추녀 밑에 처마의 하중을 받 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맞춘 도구를 여러 개 배치 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 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판장벽으로 막았다. 공포(拱包)는 3제공 형식으로 제공 상부에 조두형(鳥 頭形) 돋을새김을 하고 제공에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 편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보현(普賢) 및 문수 동자상(文殊童子像)을 봉안하고 있다.② 천왕문(天王門)[문화재자료 제 62호]입구에서 해탈문을 거쳐 두 번 통과하는 문이다. 정면 3칸, 옥개는 전각의 지붕과 중첩된다. 마곡사의 5층 석탑을 보아도 탑 뒤로 주불전 두 채가 줄지어 서 있다.이 오층석탑의 최정상부에는 라부식 보탑과 유사한 청동 제의 장식물로 된 상륜부가 있어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탑 이다. 2층 탑신부 4면에는 4방불인 아촉불?보상불?아미타불? 묘성불이 조각되어 있다. 원나라 영향을 받은 고려 말의 작품으로 임진왜란 때 무너져 그 속의 귀중품은 이미 없어 졌다. 기단부터 상륜 아랫부분까지는 고려 탑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④ 대광보전(大光寶殿) [보물 제 7802호]오층석탑 뒤로 대광보전(大光寶殿, 보물 제802호) 이 있다. 조선 정조 12년에 세워진 팔작지붕 건물로 고풍스런 안정감을 지녀, 뒤에 대웅보전이 따로 있지만 이 대광보전이 마곡사의 무게중심처럼 느껴 진다. 대광보전 안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있다. 비로자나르는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뜻을 가지며 이 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대광명전 또는 대적 광전 등으로도 부른다. 이 비로자나불은 인도에서 가져온 향단목으로 조성했다고 하는데, 대광보전의 정면 중앙에 봉안되어 있지 않고, 보전 왼쪽인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봉안되어 있다. 이는 중생이 비로자나불을 보기 위해 서쪽을 바라보며 서방정토의 극 락세계를 바라본다는 의미라 한다.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13년(1813)에 다시 지은 덧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기 둥 위 추녀 밑으로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또 장식 도 겸해 짜 맞춘 포가 많이 배치된다. 지붕 형식 은 팔작지붕)이다. 내부에는 불단을 서쪽에 배치 시켜 비로자나불을 동향으로 모셔져있다. 불상 위 의 섬세한 조작 단집과 기둥 위의 용머리 조각, 천장의 연화봉과 문학문 단청 등 장식적 특성을 잘 살린 조선후기 건축의 걸작품 가운데 하나이 다.지붕은 지붕과 만난다. 지붕이 지붕을 만나 협곡을 파고 세상을 이루고 얘기를 만든다. 여럿이 어울리면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자연이요 광활한 우주 자연에 대한 압축적 유추이다. 지붕의 군집은 건축의 큰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에서는 중첩을 통해 경계부를 나누어 갖는 방식으로 불이 사상을 구현한다.⑤ 응진전(應眞殿)[문화재자료 제 65호]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신 전각을 응진 전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조선 철종3년 (1852)에 중수하였다.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사용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를 추녀 밑에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 도 겸해 나무쪽을 짜 맞춘 도구를 여러 개 배치한 다포계의 팔작집이다. 이 건물은 석가 모니를 주불로 봉안하고 좌우 불단에는 석가 의 제자인 나한상을 봉안하였다.⑥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제 801호]대광보전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 라가면 2층으로 이루어져 지붕이 하늘 높이 솟 아 있는 대웅보전이 나온다. 화엄사 각황전, 무량사 극락전과 함께 백제계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중층 구조의 건축으로 웅장한 내부 구 조가 거룩한 법전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아미타여래, 약 사여래 를 봉안하였다. 법당 내부에서 유난히 반들반들하게 윤이 난 기둥이 눈길을 끄는데 싸 리나무로 만든 기둥이라고 한다. 싸리나무가 어 떻게 저처럼 굵게 자라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나무기둥에는 영험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고 왔느냐?”하고 물어 본다는 것이다. 이 때 많이 돌았을수록 극락으로 가는 길이 가깝다고 하여 지금도 사람들이 이 기둥을 붙들고 돌기 때문에 윤이 나 있다.‘법화경’에 석가 부처님을 큰 영웅 즉 대웅이라 한 것에서 유래한 석가 부처님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현재 전각 안에는 석가?약사?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집이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쌓기이며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 처마 밑으로는 처마 하중을 받으며 장식도 겸해 누무쪽을 짜 맞춘 포를 여러 개 설치한 다포식으로 조선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⑦ 영산전(靈山殿)[보물 제 800호]영산전은 마곡
12장 크리에이티브 전략건축공학과 9985110 최수호목 차1. 크리에이티브의 이해 1) 크리에이티브란? 2) 창의성이란? 3) 크리에이티브 과정 4) 빅아이디어를 얻는 전략 2. 크리에이티브 전략 크리에이티브 전략 광고의 소구양식 광고모델을 사용하는 광고 성적 소구 광고 비교 광고 전략 3. 크리에이티브 평가와 광고상 크리에이티브 전략의 평가 광고상1. 크리에이티브의 이해1) 크리에이티브란? 광고는 궁극적으로 수요를 자극해서 상품을 팔기 위한 목표와 소비자의 이해를 구하는 의도성을 지닌 설득 커뮤니케이션이다. 광고에 있어서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란 아이디어의 개발과 광고물 제작에 직접 관련되는 활동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광고 크리에이티브란 광고목표를 실제적인 메시지로 변형시킨 것을 말하며, 특정 소구대상에게 자사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최종적인 산물인 광고작품의 기본적인 사고를 밝혀주는 나침반에 해당된다.2) 창의성이란? : 기존의 아이디어를 새롭게 보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능력창의적 사고의 방법1. 위험부담을 받아들임 창조란 기존의 것을 탈피하는 것 단순히 새로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잘못된 것을 잇지 말아야함 -피터드러커(Peter drucker)2. 다양한 사고 문제해결을 위해 한 방향으로의 해결이 아닌 여러방면으로 분석 종합 판단 해야함3. 유머 감각 마음을 개방시켜 새로운 연결 가능성에 노출하기 위함 권위 또는 체면에 얽매이면 자유로운 생각 X 웃음은 긴장을 이완시키고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빅아이디어: 창의성이 뛰어나고 광고 전략인 판매 소구를 극적으로 만든 생각크리에이티브 과정 제임스 웹 영의 광고 아이디어 얻기 위한 절차 ㉠ 원자료 수집 ㉡ 소화를 위해음식물을 씹듯이 수집한 자료 이해 ㉢ 무의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상태에서 새로운 조합이나 의미창조 ㉣ 아이디어의 탄생 ㉤ 떠오른 아이디어 가공하기창의적 아이디어의 도출 단계적응: 광고를 통해 해결하려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힘 준비: 문제에위해 자유 연상을 퍼붓는 머리 맞대고 해결책찾기 - 소비자와의 잡담 인터뷰 - 상품이나 서비스의 선택에 주요한 속성 리스트를 작성 - 두 개념의 결합 (데이비드 번스타인) : 두개의 사상이 부딪쳐서 합쳐질 때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방안 - 측면사고 (에드워드 드 보노) • 현재 상화의 대안을 내놓을 것 • 현재 조건을 뒤바꿔 볼 것 • 혁신적일 것 • 잠시 판단을 유보할 것 • 일상적인 접근을 뒤바꿔 볼 것 • 해당 상황과 상응하는 유사 상황르 모색 할 것 • 논리적으로 점프를 시도할 것 • 가장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모색 할 것 - 은유와 유추에 기초한 창의적 사고 (고든 Gordon) • 직접 유추 direct analogy: 문제 상황의 주요 요소와 새로운 상황에서의 유사한 개념 사이의 은유적 비교 • 사적 유추 personal analogy: 해당 문제에 감정 이입을 함 • 압축된 갈등 compressed conflict: 서로 대조적인 두 단어를 합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2. 크리에이티브 전략1) 크리에이티브 전략 - 크리에이티브 기획시 내용 • 카피라이터나 디자이너를 위한 깆본 정보인 카피 강령 • 광고의 오디오와 시각적 요소를 결정짓는 제작 기획 • 광고의 디자인을 결정하는 아트 기획 ※ 카피 강령에 포함되어있는 내용 - 광고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 광고 목표는? - 소비자의 프로파일(태도, 동기 등)은? - 소비자가 이 상품 범주에서 원하는 바는? - 소비자가 자사 또는 경쟁상게 호의를 보이는 까닭은? - 우리 브랜드에 대하여 소비자가 궁극적으로 지녀야할 생각과 느낌은?광고의 소구 양식이성적 소구: 상품의 성능이나 속성, 문제 해결능력에 기초하여 상품을 판매 감성적 소구: 소비자가 상품을 소유하거나 소비하면서 발생하는 느낌에 기초하여 상품 판매광고 모델을 사용한 광고광고 모델의 중요성 - 일반적으로 대면없이 의사 전달을 하는 것보다 얼굴을 보면서 눈을 마주치면서 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광고에서도 내용전달이 단순히 흘명인 모델의 영향과 부작용 * 유명인을 사용하는 까닭 1. 유명인은 유명하다. 2. 유명인은 매력적이고 호감을 가질 만한 자질을 지니고 있다. 3. 유명인은 소비자가 갈방하는 집단이다.(특히 청소년….) ⇒ 유명인을 사용함으로써 상품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므로 현재 각종 대기업의 상품광고등은 유명 연애인들을 캐스팅한다. 고로 그 상품의 판매는 다른 기업의 그것보다는 훨씬 높다• 부작용 - 잘못된 상황(스캔들, 갑작스러운 사고) 이 발생했을시 혹은 해당 상품이 캐스팅된 연예인과 어울리지 않을경우, 캐스팅된 연애인이 일부 고객들에게만 인지도가 높을 때 그 상품에 대해 소비자들이 부정적으로 인식스타출신 부부로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최진실-조성민 커플이 불화 끝에 이혼을 했다. 이혼을 하게된 것도 상당한 정신적 충격이었을 텐데 최씨에게 더 큰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한 건축회사가 최진실씨에게 광고계약 위약에서 발생한 손해배상으로 30억원을 청구한 것이다. -출처: 인터넷 마당 대자보4) 모델 선정 전략 조화 가설 match-up hypothesis : 모델에 대한 감성적 반응도전이될 가능성이 있지만 모델에 대한 평가적 반응도 중요한 요인 된다는 가설. 즉, 광고되는 상품 내용과 유명인의 이미지가 서로 연관성이 있어야 광고효과 발생성적 소구 양식1) Idea : 아이디어 2) Immediate impact : 직접적인 충격 3) Incessant interest : 연속적인 흥미 4) Information : 정보 5) Impulsion : 충동[1]신체부위의 노출을 이용한 광고 성적 소구 광고[2]심볼을 이용한 암시적, 상징적 표현다가오는 것 / 쫓아오는 것 / 뻗는 것 / 찢는 것 / 뚫는 것 / 흔들어대는 것 / 멀어지는 것 문지르는 것 / 만지는 것 / 여는 것 / 빨아들이는 것 / 벗겨지는 것 / 찧는 것 / 뒤척이는 것 휘감겨지는 것 / 어두워지는 것 / 숨기는 것 / 돌아보는 것 / 마주하는 것 / 눈을 감는 것 풀어지는 것 / 흐려지는 것 / 와 직접적표현 및 불안전한 성을 이용한 광고성이라는 것은 정신의 반영이라고 할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광고에 있어서 성적 표현도 조심스럽게 세련된 감각으로 시각적인 증명이 될 때만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다.[2] 성적 소구 광고 카피대우 봉세탁기- “커지고 세지고, 대우 봉세탁기 구석구석 빨아줘요. 봉이니까” 농심 양파링- “벗겨도 벗겨도 변함없고, 먹어도 먹어도 깊은 그 맛” 리나참치- (장재근과 친구들의 율동) “고추가 들어 있어 고추참치”, (전인화와 친구들의 율동) “조개즙이 들어 있어 순참치”, (다함께) “따 먹고 합시다!” 그린소주- “허리는 부드러울수록 방망이는 단단할수록 좋다” 롯데제과 칙촉- “으음, 기분까지 촉촉해요” 태평양 라네즈- (이나영이 화장기 없는 순수한 얼굴로) “오늘도 촉촉하게 젖었습니다” KT국제전화-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최진실) “펴엉생, 눌러 줄 거지~잉” 농심 너구리- (이제니 출연 광고) “사람들이 저보고 너구리래요. 너구리가 뭐가 어때? 통통하고 맛만 좋은데…” 대우자동차 누비라- “누비라로 힘있게 왕복할 것인가, ×××로 힘없이 왕복할 것인가” 삼성카드- (고소영이 남자 엉덩이를 때리며) “줄 때 받자”ㅁ 성적 소구를 하는 까닭은? 효과가 있다 하지만 기업 이미지와 브랜드의 품질에 대해서는 위험 부담을 감수5) 비교 광고 전략 ㅁ 비교 광고의 현황 - 자 회사와 경쟁하는 타사 제품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tv광고나 혹은 신문 광고를 보고 있으면 다른 회사의 제품보다 x이 더 낫다. 더 싸다 라는 문구가 많이 나온다. 상대 회사를 비방 혹은 왜곡 등을 제외한다면 이것은 가능하다. 이는 1971년 미국 FTC에서 허용한 이후 1988년 상표 수정법의 조항에서 허용경계를 보다 명확하게 정했다.비교 광고의 사용에 관한 논란역효과가 있다. 혼동을 조장한다. 인지도를 제고하지 않는다 기만적일 수 있다. 경쟁을 막는다. 상도의가 좋지 않다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혼동을 줄인다. 높은 회상소비자는 그 정보를 기존의 지식 구조에 의거하여 적절히 분류하려고 한다. 이 때 정보를 분류하는 방법으로는 차별화와 유사화가 있다. • 차별화 : 주어진 정보를 이용하여 대상을 상이한 분류체계에 소속시킴 • 유사화 : 동이한 지각적 범주로 분류하는 것 - 비교광고시 주의 해야할 점 • 다양한 조절 변인(비교주체와 대상)이 개입하므로 이들을 밝힐 필요가 있다 • 효과의 여러 측면이 거론되므로 효과에 대한 조작적 정의가 가 명확해야 한다유머광고* 유머에만 관심을 두고 정작 메시지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 광고의 이해나 회상에 장애 요인이 된다* 소비자의 주목을 끈다 * 즐거움과 같은 긍정적 감성을 유발한다 * 반대하는 주장의 인지 반응을 억제한다부정적 효과긍정적 효과3. 크리에이티브 평가와 광고상크리에이티브 전략의 평가 • 평가 기준 - 메시지가 광고 젼략에 적합한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가 다른 이야기로 귀착되지 않았는지 확인 - 목표 시장에 호소력이 있는지? danfl 메시지가 좋을지라도 해당 소비자에게 호소력이 없다면 쓸모가 없다 - 당신이 소비자 소비자에게 그 같은 메시지를 직접 말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는지검증 - 이 광고가 과연 소비자의 결정이나 행동에 도움을 주는지? 창의성이 잇어도 결국은 상품이나 서비스 판매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잊으면 안된다 - 메시지가 명백하고 간결하고 완결성이 뒤어나고, 설득력이 있는지? 제작팀은 광고하려는 상품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많이 아는 반면에 소비자는 그렇지 못다. 따라서 그 같은 소비자의 입장을 고려했는지 점검 - 메시지의 제작 요소가 메시지를 압도하지는 않았는지? 음악이나 등장한 모델에 초점이 맞춰지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광고 제작 요소는 메시지 저달 수단이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곤란 ※ DDM 니담 광고 대행사에서의 크리에이티브 전략의 세 요인 (R.I.O) - 관련성 relavancy : 소비자에게 중요한 메시지여야 함 - 창의성 originality: 아무도 그 같은 생각을w}
Vitra MuseumFrank .O . Ghery건축은 본질적으로 3차원의 오브제(object)인 까닭에 조각이어야 한다 (프랭크 게리 1929- ) 나는 그저 세계를 다루고 그에 대응할 뿐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 1929-현재)는 이론에 치중하여 작품을 만드는 다른 건축가들의 경우와는 달리 자신의 건축이념을 작품에 가장 잘 나타내면서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찻잔에서부터 의자에 이르는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건축가이다 - 피터 아이젠만 As soon as I understand the scale of the building and the relationship to the site and the relationship to the client, as it becomes more and more clear to me, I start doing sketches . FOG게리의 성장 배경* 1909년 캐나다 토론토 출생 ( 1909 ~ 1994) * 유대교집안의 조부모의 영향이 큼 재료의 본성을 일찍이 깨달음 * 조모의 취미 물고기란 이미지를 나중에 건축에 접목시킴 * 1950년 그루엔과의 만남 도시계획에 관심 * 20세쯤 트럭운전 일을 하며 야간학교에 다님 당시 사물에 대해 깊이 사고함== 이때의 경험과 사고가 그의 건축방향을 결정지음 * 1956년에 하버드대학의 디자인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공부게리의 건축관건축 디자인에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자연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 시도 규칙과 질서에 얽매어 있는 기존의 사고 형식을 깨뜨리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형태를 선호 순간적인 동적 변화 속에 나타나는 우연적 형태의 창출Vitra MuseumVitra Museum1989년 완공된 비트라 뮤지엄은 과거 비트라 가구공장이 그동안 모아온 가구 1600 여점의 작품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지붕은 메탈구조이며 8,000 m2 에 2층 규모로 비교적 작은 스케일이다. 이곳에는 수 많은 의자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디자인 및 교육적 프로그램을 함께 실시하고 있다. 독특한 건축적인 형태와 그러한 아이디어들이 바일 암 라인이라는 도시적 스케일에 맞게 조절되었으며, 건축자체가 도시공간의 조각품으로 자리잡게 한다. 충돌과 변화 무질서로 다가오는 비트라 뮤지엄은 입체파와 표현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근대 건축과 이어지는 과정에서 명백하게 변모됨을 보여주는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물 외관의 칼라는 하얀색이며 연속되면서 변화하는 형태의 회오리가 또 다른 형태와 관계를 맺고 박물관 내부는 역동적이면서 강한 느낌을 주는 전시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방문자로 하여금 내외부가 동시에 둘둘 말려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후 비트라 뮤지엄과 같은 디자인은 1990년 파리에서 American Center 로 제안되기도 한다. 프랑크 게리는 비트라에 모두 3개의 건축물을 짓게 된다. 하나는 비트라 뮤지엄과 또 하나는 사무소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게이트 하우스 이다. 나머지 하나는 그림쇼의 공장과 나란히 마주보며 서 있는 공장이다. 모두 1989년에 지어졌으며, 이 세 작품들은 프랑크 게리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한 작품이다.많은 이들이 비트라를 독일건축으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길 하나를 두고 독일과 스위스로 나뉘어진 까닭일 것입니다. 비트라는 스위스 바젤의 바일 암 라인 (Weil am Rhein)에 있던 오래된 비트라 가구공장(1940년)을 새롭게 변신시킨 대대적인 문화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nameOfApplication=Show}
담당교수 : 김홍자 교수님학과 : 건축공학과 2년학번 : 9985110이름 : 최 수 호제출일 : 2003년 12월 3일목 차Ⅰ 서(序)1. 전후 세계와 전후 처리? 전쟁결과와 책임추궁? 양극 체제와 평화조약2. 두개의 독일? 분단? 분단의 고착화3. 독일의 통일(진정한 제 2차 세계대전의 종결)Ⅱ 본(本)1. 독일 통일의 과정2. 독일 통일의 문제점과 후유증?재산 문제?언어 문제?직업 문제?대통령 문제?물가 문제?정치적 문제3. 통일 독일의 교훈4. 우리 나라의 통일 비용Ⅲ 결(結)Ⅳ 참고문헌 및 사이트Ⅰ 서(序)1. 전후세계와 전후처리? 전쟁결과와 책임추궁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다. 참가국은 연합국측이 49개국, 동맹국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에 불과하였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독 ?소 양국의 희생이 가장 많아 소련의 전사자 1,360만 명, 민간인을포함하여 사망자 2,000만 명, 전인구의 약 1/10, 독일의 전사자 500만 명, 민간인을포함하여 사망자 550만 명, 전인구의 약 1/10이라고 알려졌다. 일본의 전사자는 185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50만 명, 전인구의 약 1/40이라고 한다. 이 개수(槪數)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원병력수는 약 2배, 전사자는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이다.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의 희생자가 현저히 많다. 이것은 나치스의 인종론적 절멸(絶滅)정책에 유래한다. 민간인의 희생자 가운데 약 500만 명은 유대인인데 이것은나치스 지배하의 유대인 총수의 약 70%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나치스뿐만의문제가 아니라 나라를 잃고 유럽의 경제계에 깊숙이 침투해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전체의 불만을 나치스가 건드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의 전쟁이민간인을 제외하지 않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헝가리의 국경은 거의 1938년의 국경으로 되었고, 불가리아는 도브루자 남부지방의 영유가 인정되어 41년의 국경을 거의유지하였다. 핀란드에 대하여는 1939년의 소련-핀란드전쟁에 의한 소련에의 영토할양이인정되었다.독일처리방침은 19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에서 명확히 되었으나 그 해석을 에워싸고 미 ?소는 매사에 대립하여, 1947년 말의 런던 4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다. 1949년에는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고, 미 ?영 ?프는 1952년 5월서독과 ?평화확정조약?을 맺었으며 19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사실상의 단독강화를 체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19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주었고, 1955년 9월 동독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이리하여 두 개의 독일은 고정화되었다.1945년 7월 26일의 대일 포츠담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 강화문제에서도 미 ?소는일치되지 않았으며, 또 일본 여론도 분열하였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다. 중국은초청되지 않고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중화민국 ?인도 ?미얀마와는 별도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2. 두 개의 독일? 분단1949년 서독과 동독에 각각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독일은 분단되었다. 서쪽의 독일연방공화국은 정치적으로 안장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자본주의적민주 국가로 발전했다. 동쪽에서는 독일민주공화국이 공산주의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생산력이 높은 국가로 성장했고, 1980년대 말에 고르바초프가 등장할때까지 소련의 가장확고한 동맹국의 자리를 지켰다.처음에 승전국들은 독일의 장래를 확신할 수 없어고 입장도 서로 달랐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서로의 견해차이를 얼버무린채, 바람직한 정책의 큰줄기, 즉 독일의 탈나치화, 탈군사화,민주화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만 합러나 양초와 경고문 및 평화를 위한 기도로 이루어진 폭력이 없는 시위이다. 동베를린과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는 젊은이들이 “우리가 인민이다”를 외친다. 이후 공산 독재에대한 저항이 계속되자, 1989년 10월 18일 에리히 호네커 수상이 결국 퇴임한다.1992년 메를린에서 호네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나 건강의 악화로 재판이 중단되고칠레행이 허용된다. 그는 1994년 칠레에서 사망한다.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 백만명의 동독 주민이 모여 의사표현의 자유와 국경개방을 위해 시위를 벌인다. 1989년 11월 8일 동독사회주의통일당의 정치국이 퇴진한다. 이튿날 국경의 문이 열리고, 수만명의 동독 주민이 서베를린으로 환호하며 물 밀 듯이쏟아져 나온다. 28년 동안 숱한 목숨을 앗아가며 영원히 무심하게 서 있을듯한 브란덴부르크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믿기지가 않아요!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1989년 11월 9일 밤, 독일의 곳곳에서 터져 나온 목멘 소리이다. 동서독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였다. 이날 밤 28년 동안 철통같이 버티고서있던 장벽이 무너지고 40년 동안의 분단이 끝났다. 이제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것이다.Ⅱ 본(本)1. 독일 통일의 과정-1949년 아데나위정권(-63년); 힘의 우위견지, 單獨代表權과 할슈타인원칙고수하고全獨省(현 內獨관계성)을 발족시켜 분단을 정책적으로 연구-1963년 에르하르트정권(-66년); 동독의 고립화와 평화공세-1966년 키징거 대연정(-69년); 동구와 관계개선 추진, 할슈타인원칙 배제, 소련의동구권영향력을 인식하고 소련과 관계개선을 모색-1969년 사민당 브란트정권(-74년); 적극적 東方政策을 추진함, 1민족 2국가론,先평화, 後통일정책-1970년 두차례의 동서독 정상회담과 8월 독소조약 체결로 유럽의 현국경선 인정과무력사용포기-1972년 11월 동서독기본법조인으로 동서독인들의 왕래가 점차 빈번해 짐.-1973년 9월 동서독 유엔동시가입-1974년 본과 베를린에 상음으로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의 시장을 가지고 있는 서독과의 무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서독은 내독교역을통해 동독이 독자적으로 경제개발을 하고 경제자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미국의 수출규제 정책은 동독의 경제발전을 지체하게 하였으며 동?서독 국민간의 생활격차는 동독주민들로 하여금 서독으로 탈출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결과적으로 무역규제는 동독의 경제를 소련에 의지하게 만들고 사회주의 진영간의수출입만을 허용하게 됨으로써 동동사회의 사회주의 국가로의 통합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② 제 2시기 : (화해기의 접근을 통한 변화와 내독교역)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자 서독의 정치가들은 과거에 가졌던 통일의 환상에서 깨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독일민족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즉 독일의 통일이 무력이나 고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간의 화해가 이루어져야만 그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인식이 싹 텄다. 또한 전세계적인 자원 및 원자재 부족현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동서독 쌍방 공동 협력 확대는 양측에 모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일기 시작했다.구체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은 일반 무역 규제조치 폐지와 대규모 경제개발 계획에 대한 지원 등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방측은 일차적으로 실제 물품거래의 간소화를 허용키로 하였다.이와 함께 “체제변화는 외부로부터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보다는 내부로부터의 점진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정치적 인식도 자리잡기 시작했다.1966년 대연정의 출범과 함께 동독의 고립에 의한 통일달성이란 목표를 우선시 하기보다는 동서독간의 긴장완화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통일에 관련한 이와 같은 서독측의 태도변화는 1967년 독일통일의 날인 6월 17일날 있었던 키징어 수상의 기념연설에서 잘드러난다. 키징어는 이 연설을 통해 독일통일은 동서유럽의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의일환으로 진행되어져야 함을 천명하고 동독의 승인문제를 부각시키지 않으면서도동서독간의 접촉을 강화할 것임을 선언하였다.반면에 동독은 6의 언어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통일이후 언어에 그렇게 골치를썪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느정도의 지역차이는 있었으므로 지금도 동쪽과 서쪽의 언어는차이가 난다고 한다.? 직업 문제동독 - 비록 공산국가 이기는 하나 동도이치에서도 없는것 찾아보기 힘들만큼 자본주의에서있을 만한것은 다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자본주의는 미우나 돈은 좋았던 것이다.그러나 나이트나 호텔등의 시설은 당 고의 간부나 서도이치나 자본주의에서 온손님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서독 -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직업들이 있다.동독에는 서독보다 일자리가 적다.물론 동독에도 식당이 있고 나이트도, 호텔도 있고 다 있지만 금융업이나 경제업이나그런것을 시작하여서 자본주의의 여러직업에 비해서는 터무니 없이 적다.그리고 통일을 해서도 만약 동독에서 서독으로 온다고 해도 바탕상식의 차이 때문에동독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는 정말 어렵다. 또 서독사람이 동독으로 간다고 해도 일자리구하기가 어려웠다.이처럼 통일 직후의 독일의 실업난은 상당히 심하였다.허나 10년이 지금 지난 독일은 실업난을 이미 옛날에 이겨내었고 지금은 당당한경제대국으로 일어섰다.? 대통령 문제동독 - 강력한 힘을 가진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여러 당 간부들이 정부를 이끌어갔다.서독 - 자본주의는 수상 또한 대통령을 뽑아 나라를 이끌어갔다.그래서 독일 또한 브란트를 수상으로 뽑았고 브란트는 슬기롭게 통일의 과정을밟아가면서 결국 통일을 이루었다.일단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조금만이라도 해석해 볼때, 공산주의는 대통령 자리를계속 물려 받지만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뽑는다.통일이 되었을때 누가 대통령이 되나 그건 많이 생각해야 한다.왜냐하면 통일직후에는 공산지역 사람들은 아직도 공산주의가 더 친근하고 익숙하니까아무리 공산주의를 싫어하던 그쪽 주민들도 통일 직후에는 공산정권의 후보를 뽑기일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공산정권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런현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가 문제동독의 월급은 당시 300마르크(15만원) 서독은 3000마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