演義小說명대 소설1. 발달 원인(1) 백화문의 성숙과 표현 기교의 진보:백화문의 사용은 당대의 변문(變文)과 송대의 화본(話本) 가운데서 이미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대부분 반문반백(半文半白)의 상태였는데, 명대에는 의식적으로 백화로 소설을 지음.기교면에 있어서도, 명대 작가들은 당대의 전기소설과 송.원 작가의 경험을 이어받아 표현기교나 구성에 있어서 큰 발전을 보임(2) 소설에 대한 관념 변화:역대로 유교사상의 지배를 받아온 지식계급들은 소설을 매우 경시하였는데 명대에는 이지(李贄), 원굉도(袁宏道), 풍몽룡(馮夢龍) 등이 소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소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자 소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함.(3) 시대적인 환경:도시경제의 발전에 따른 시민계급의 등장으로 소설의 독자ㆍ작자층이 확대되었으며, 당시의 다양한 시대상황과 사회의식을 소설에 반영하여 널리 유행함2. 장편소설)(1) 역사소설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1) 작자 : 나관중(羅貫中). 이름은 본(本), 호는 호해산인(湖海山人)2) 연원 : 이미 당대의 변문, 송대의 화본, 원대의 잡극등에서 삼국의 고사가 널리 유행하였는데 , 직접적인 모태가 된 것은 원대 지치연간에 신안(新安)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3권임.3) 판본①홍치본(弘治本) : 최초본, 24권, 240절②만력본(萬曆本) : 이탁오 비평본, 120회③모본(毛本) : 오늘날 보통 읽고 있는 것으로 청대 모종강(毛宗崗)이 비평ㆍ개작함. 120회4) 내용 : 중국이 위ㆍ촉ㆍ오의 3국으로 분열하여 패권을 다투던 시기의 사건을 근간으로 함5) 특징: 생동감있고 개성적인 인물의 전형을 창출/ 과장, 대비, 심리묘사 등 묘사기교가 뛰어남/ 언어가 정련됨/ 문체상 문언과 백화가 섞여 있어 아속(雅俗)을 함께 감상할 수 있음.6) 속작 :『개벽연역통속지전(開闢演繹通俗志傳)』,『유하지전(有夏誌傳)』,『열국지전(列國志傳)』,『전한지전(全漢志傳)』등.(2) 영웅소설 : 『수호전(水滸傳)』1) 작자 : 시내암(施耐庵)이라는 설, 나관중이라는 설, 시내암이 짓고 나관중이 개편했다는 설 등이 있는데 시내암이라는 설이 유력함.2) 연원 : 송강(宋江)의 반란사건을 간략히 기록한 『송사』를 바탕으로 하여 송말의 화본과 원초의 잡극 등에서 수호 고사가 널리 유행되었는데, 직접적인 모태가 된 것은 송말원초에 나온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임.3) 판본『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100회본,『충의수호전서(忠義水滸全書)』120회본,『수호전』70회본4) 특징 : 세련된 백화문의 운용으로 백화문학의 최고봉에 오름/ 등장 인물의 개성을 생생하게 묘사/ ‘관핍민반(官逼民反))’의 민중 의지를 잘 반영하여 주제표현의 성공을 거둠5) 속작 : 『정사구(征四寇)』(일명 『後水滸傳』),『수호후전(水滸後傳)』,『탕구지(蕩寇志)』(일명 『結水滸全傳』) 등.(3) 신마소설 : 『서유기(西遊記)』1) 작자 : 오승은(吳承恩). 자는 여충(汝忠), 호는 사양산인(射陽山人).2) 연원 : 초당의 고승 현장(玄?)이 인도로 불경을 가지러 가는 동안에 겪은 여러 고난을 기록한 『대자은삼장법사전(大慈恩三藏法師傳)』과 기타 각종의 현장전 및 현장 자신이 지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12권을 바탕으로 하여 송대의 화본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금대의 원본 『당삼장(唐三藏)』,원ㆍ명대의 잡극 『서유기』등과 민간에 퍼져있던 ‘서천취경(西天取經)’고사를 새롭게 창작하여 『서유기』를 지음.3) 판본명대 판본으로는 『화양동천주인교본(華陽洞天主人校本)』100회본,『이탁오비평본(李卓吾批評本)』100회본,『당삼장서유석액전(唐參藏西遊釋厄傳)』10권 등이 있으며, 청 판본은 대부분 100회본 계통임.4) 특징 : 기이한 환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낭만주의의 예술특색을 발휘함/ 인물묘사상 각각의 개성이 뚜렷함/ 선의의 조소, 신랄한 풍자, 엄중한 비평을 예술적으로 결합시킴/ 산문과 운문 및 민간의 방언과 구어를 잘 운용함/ 고사의 구성과 인물의 배치기 치밀함.5) 속작 : 『속서유기』,『후서유기』,『서유보(西遊補)』,『사유기(四遊記)』등.(4) 인정소설 : 『금병매(金甁梅)』1) 작자 : 난릉(蘭陵)의 소소생(笑笑生)이라고만 전할뿐, 누구인지는 알 수 없음.2) 연원 : 『수호전』의 제23회~27회에 나오는 ‘무송살수(武松殺嫂))’고사를 바탕으로 함.3) 판본① 사화본(詞話本) : 『금병매사화』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산동지방의 방언과 시중의 은어를 많이 사용함② 개정본(改訂本) : 第一奇書本이라고도 함. 문장이 잘 정련되어 있고 방언을 삭제함4)내용 : 서문경과 그의 첩 반금련과 이병아, 방춘매가 펼치는 음탕하고 방탕스런 가정생활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조명함.5) 특징 : 인물의 성격묘사와 전형성이 뛰어남/ 일상의 언어를 잘 운용하여 생동감이 넘침/ 암암리에 현실을 폭로한 비판정신이 담겨있음/ 대담한 색정 묘사를 통하여 예술적인 성공을 거둠6) 평가 : 이제까지의 역사ㆍ영웅고사나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실제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중국 통속소설사상 새로운 장을 엶3. 단편소설의화본(擬話本))소설인 『삼언(三言)』『이박(二拍)』『금고기관(今古奇觀)』이 있음『삼언』-풍몽룡이 간행한 『喩世明言』『警世通言』『醒世恒言』의 3종으로 전래된 단편 화본을 수집, 정리, 각색하고 새롭게 창작함『이박』-능몽초(凌蒙初)이 간행한 『初刻拍案驚寄』,『二刻拍案驚寄』.전래하는 화본을 수록하거나 자신이 창작한 것 등이 있음.『금고기관』-포옹노인(抱甕老人)이란 사람이 『삼언』과『이박』에서 대표적인 작품 40편을 골라 간행. 가장 널리 유행됨청대 소설청대는 장편소설의 황금시대. 소설의 양도 많았고 내용도 다양했음. 일부 문언소설이 창작되기도 했지만 그 주류는 역시 장편 백화소설이었음.1.발달원인1) 소설에 대한 인식 제고 : 김성탄(金聖嘆), 이어(李漁), 원매(袁枚) 등의 문인들이 소설의 가치를 높이 선양함. 특히 김성탄은 『수호전』과 『서상기』를 『이소』『장자』『사기』『두시(杜詩)』와 함께 ‘6재자서(六才子書)’라고 하여 소설을 정통문학과 동렬에 놓음.2) 독자층의 확대: 일반 민중 가운데 소설을 감상할 만한 소양과 여유를 갖춘 사람이 늘어남3) 인쇄ㆍ제지술의 발달 : 인쇄술의 발달로 일반서적과 함께 소설책이 널리 보급됨4) 지식인들의 불만 토로 수단 : 만주족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족 지식인들이 자신의 불만을 소설 창작을 통하여 토로하고 해소함.2.백화장편소설(1) 풍자소설1) 오경재(吳敬梓)의『유림외사(儒林外史)』① 내용 : 과거제도의 폐단과 부패를 폭로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봉건 사대부들의 추악한 면모와 당시인들의 악습을 풍자함② 특징 : 중국 고대 풍자예술의 전통을 계승하여 중국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장편풍자소설을 이룸 / 생동감 넘치는 인물묘사와 통속적인 북방 구어의 운용이 뛰어남/ 소설 전체가 단편 일화들로 엮어지고 전체적으로 중심인물이나 통일된 줄거리가 없는 독특한 구성을 갖춤.2) 이여진(李汝珍)의 『경화연(鏡花緣)』① 내용 : 천계에서 쫓겨난 화신들이 인간계로 내려와 100명의 재녀(才女)가 되어 기예를 자랑하는 내용. 중간에 기이한 환상이 많이 삽입되어 있음② 특징 : 풍부한 환상과 해학 및 박학을 이용하여 남존여비의 사상과 사회의 폐단 비판3) 영향 : 청말 견책소설에 영향을 미침(2) 인정소설1)『홍루몽(紅樓夢)』(원명은 석두기(石頭紀))① 작자 : 앞 80회는 조점(曹霑)이 썼고, 뒤 40회는 고악(高?)이 썼음② 내용 : 봉건 대지주 집안인 가부의 몰락과정을 통하여 주인공 가보옥(賈寶玉)과 그를 둘러싼 12미녀들의 사랑과 비극을 묘사함.
청대의 사(詞) 연구들어가면서 ...청대는 복고의 시대여서, 사의 새로운 경지의 개척보다도 지난 시대 작가들의 작품의 정리와 연구 면에 있어 굉장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사에 관한 총집과 선집 및 사에 관한 평론서와 사보 및 운서의 대부분이 청대에 편찬된 것이다. 또 청대의 작가들이 명대에 비하여 사의 음률이나 수사에 대단한 정력과 마음을 쏟으면서 성실히 사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시나 마찬가지로 사의 여러 가지 고전적인 방향이 다시 한 번 검토 확인되어 화려한 파벌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청대 문학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1. 청초의 사와 그 발전청대의 도학적인 문학 이론을 주장하던 학자들의 문집에는 사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청초부터 오위업(吳偉業),왕사정(王士幀)같은 사람들은 소사(小詞)로 이름이 알려졌고, 누구보다도 청 일대를 통하여 영향을 끼친 작가로는 절서파(浙西派)의 개조인 주이존(朱彛尊)과 양선파(陽羨派)의 개조인 진유숭(陳維崧)이 있다. 그 밖에 아름답고 처완한 사를 지어 청대 사의 유행을 자극한 이로 납란성덕(納蘭成德)이 있다.? 절서파(浙西派)절서파는 주이존이 창도하였다. 주이존(朱彛尊, 1629~1709)은 자가 석창(錫?), 호는 죽택(竹宅)이고, 절강 수수사람이다. 그는 『?강호재주집(江湖載酒集)』3권, 『정지거금취(靜志居琴趣)』1권, 『다연각체물집(茶煙閣體物集)』1권 등의 사집이 있다. 그는 사에 있어 남송의 강기(姜夔)와 장염(張炎)을 떠받들며 아정하고 음률이 잘 맞는 작품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학식이 많은데다 성실히 노력을 쌓아 이론뿐만 아니라, 작품에 있어서도 청려하고 아정한 사를 써서 절서파의 개조가 된 것이다. 그는 당(唐)?오대(五代) 이하 송원(宋元)에 이르는 여러 작가들의 사를 모아 사종(詞綜)을 지어 절서파 사의 의취를 밝히고 있다. 절서파란 명칭은 절서지방에 사가 유행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겼다. 주이존의 이론에 호응하여 같은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사를 지었는데 공상린(?翔麟), 이부(李符), 이양년(李良年), 심호일(沈?日), 심안등(沈岸登), 같은 이들이 있어 주이존을 합쳐 절서육가(浙西六家)라 부른다.? 양선파(陽羨派)양선파는 진유숭(陳維崧, 1625~1682)이 창도하였다. 진유숭은 자가 기년(其年), 호가 가릉(迦陵)이며 강소 의홍 사람이다. 그의 사집인 『가릉사(迦陵詞)』에는 도합 416종의 사조에 1600여수의 사가 실려 있으니, 양에 있어 남이 따르기 어려운 정도이다. 그는 소식과 신기질의 사를 떠받들며, 오대와 북송의 사를 목표로 작품을 썼다. 특히 장조에 있어서는 『만강홍(滿江紅)』, 『금루곡(金縷曲)』 등 일백여 수로 한 작품이 이루어진 것들이 있다. 그밖에 오기(吳綺), 손지울(孫枝蔚), 조양무(曹亮武) 같은 이들도 호방한 사를 지었으나 양선파의 말류는 거칠기만 한 작품들을 보여줄 따름이다.? 납란성덕(納蘭成德, 1654~1685)납란성덕은 절서파나 양선파와도 달리 화려한 귀족 생활 속에서 느끼는 슬픔과 실의 같은 것을 처절하리 만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본래 이름이 성덕(成德)이고, 자는 용약(容若)이며, 만주 사람이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통지당경해(通志堂經解)』 1800여 권의 대 편찬 사업을 완성시켰고, 『통지당시문집(通志堂詩文集), 『음수사(飮水詞) 또는 『측모집(側帽集)』이라 부르는 작품집을 남기고 있다. 아직 세상 물정에 때묻지 않은 다정다감한 귀족 청년의 슬픔과 고뇌가 담긴 그의 사는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의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청대에 사가 크게 유행하였던 가장 큰 원인의 하나가 납란성덕의 사의 영향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추천색(秋千索)藥蘭?手銷魂侶, 爭不記看承人處. 약란휴수소혼려, 쟁불기간승인처除向東風訴此情, 奈竟日, 春無語. 제향동소차정, 나경일, 충무어悠揚撲盡風前絮, 又百五韶光難住. 유양박진풍전서, 우백오소광난주滿地梨花似去年, ?多了, 廉纖雨. 만지이화사거년, 극다료, 렴섬우울타리 가를 그리운 님 손잡고 거닐던, 즐거웠던 일 어찌 잊으리?봄바람에 이내 마음 호소할까? 종일토록 봄날은 말 없는 것을..바람에 날리는 버들 솜 마구 얼굴에 와 부딪치는데 청명 좋은 계절은 붙잡아 둘 수 없네.땅 가득한 배꽃 잎은 지난해나 같은데, 한 가지 많아진 건 부슬비로구나.§2. 상주사파(常州詞派)절서파의 사인들은 날이 갈수록 의고적인 경향으로만 빠져들고 격조가 더욱 더 연약해졌다. 양선파는 이에 앞서 쇠미해있었다. 이런 중 장혜언(張蕙言), 장기(張琦) 형제가 절서파의 사풍을 반대하고 일어났다. 그들은 온유돈후한 사풍을 주장하고, 당송의 사인 44명의 작품을 골라 사선 (詞選) 2권을 편찬함으로써 그 귀취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많은 작가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상주사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장혜언은 북송 사인 중에서도 특히 주방언의 심미하고 굉약한 사풍을 내세웠다. 상주는 그의 고향 땅 이름이다.
한대의 유교와 당대 유학 부흥운동§1. 시대적 배경1. 한무제의 전제 중앙집권의 강화한경제(漢景帝) 후원(後元) 3년(기원전 141년) 정월, 16세의 나이로 한무제 유철(劉徹)이 즉위하였다. 이때의 서한(西漢) 왕조는 경제가 번영되고 나라가 부유했다. 그러나 번영한 국면 국면 배후에는 3가지 문제가 존재하였다.첫째로, 지방의 제후국은 아직도 일정한 정치, 사회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불안정 요소가 되었다. 둘째로 토지병합이 격렬하였기 때문에 계급 모순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셋째로, 흉노가 끊임없이 침략해 왔고 동월(東越)과 남월(南越)이 끊임없이 사단을 일으켜 변경이 안정되지 못했다. 이에 한무제는 중앙집권을 한층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중앙집권을 강화하고 황권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무제는 승상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한조 초기에 승상은 모두 공을 세운 여러 제후들이 맡았는데 급이 높고 권세가 커서 황제와 승상 사이의 모순이 잠복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승상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황권을 강화하는 절박한 문제로 나타났다. 이에 무제는 모든 정사를 친히 관여하였으며, 9경들에게 영을 내려 승상을 거치지 말고 직접 자기에게 상주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또 학문이 깊고 간언을 잘 하는 사람들을 뽑아 자기의 고급 시종과 조수로 삼고, 이를 중조(中朝)라 하여 승상 중심의 외조(外朝)를 견제하도록 했다.2. 동중서의 건의동중서(董重舒)는 한무제때 현량(賢良)의 신분으로 벼슬길에 올라 황제의 책문에 대답하여 인정을 받고, 전한의 새로운 문교정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그 책문에서 제자백가를 배척하고 유학을 독존해야 한다는 건의를 제출하게 된다.“····· 지금 선생들이 말하는 도리는 서로 다르고 사람들이 의논하는 것도 서로 다르며 제자백가가 연구하는 방향이 다르고 종지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사람들이 통일적인 표준을 장악할 수 없고 법령제도가 여러번 고쳐져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 어느 것을 집행하면 좋을지 모릅니다. 나는 6예에 속하지 않는 과목과 학설을 모두 금지시키고 그들이 발전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릇된 학설이 손실되면 학술 체계를 통일할 수 있고 법률과 제도가 명백해져 백성들이 복종할 대상이 있게 됩니다. ····”이는 왕권강화와 강력한 독재적 중앙집권을 원하던 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결국 무제는 이를 받아들여 이후 유교는 한나라의 유일한 기본 통치이념으로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또한 동중서는 유가는 명분이나 귀족, 백성들의 호응은 받는 장점이 있는 반면, 황제는 권위약화를 두려워하여 미온적이고 국가통치의 실무적인 수단으로서 측면에서의 문제점이 있다는 점과 법가는 국가통치의 실무적인 수단으로서 우수한 기능을 가지는 점과 황제의 권위강화로 인하여 황제가 원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진에 의하여 이미 실패하였고, 귀족과 백성의 반감을 사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이에 동중서는 ‘정통사상’이라는 것을 확립하는데, 주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통치이념으로 유가와 법가를 병용할 것을 주장한다. 둘째는 유가와 법가를 병용하되 유가를 주로 하고 법가는 보조로 한다(德主刑輔)는 점이다. 법가의 방식대로 국가를 통치하되 유가의 기본원리에 어긋나는 부분은 유가의 방식을 따른다는 점이다. 셋째는 성문법을 기반으로 하되 판례에 의하여 수정하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즉, 동중서는 한나라 무제 때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정립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그의 유가 사상은 이미 원시유교와는 성격이 많이 달라진 통치적 법가 이념과 혼합되어 개조를 거친 유가 사상이었던 것이다.§2. 한대 유학 발전의 양상유가가 통치이념으로 채택된 이후, 동중서는 태학을 꾸리고 제자들을 받아들여 통치 계급을 위해 인재를 키우고, 또한 태학에 고명한 스승을 청하여 유가 경전으로 교육을 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한무제는 이에 5경에 박사관을 설정하였다. 박사관이란 고대 학관(學官)을 칭하는 것으로, 문제 때까지만 해도 제자백가의 박사까지 인정이 되었다. 그러나 한무제는 제자백가를 배척하고 유가 학설만 독존하는 기초 위에서 정식으로 시경·서경·예·역·춘추 5가지 서적을 경전으로 정하고 박사관을 설정하였으며 5경에 정통하여 박사가 된 사람들을 제외한 기타 박사들을 면직시켰다. 그때부터 박사의 직은 유가가 독점하였다.이들은 각각 자기가 대표하는 경을 연구하는 것을 전문직업으로 삼았고, 경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권위적인 해석으로 되었다. 또한 태학에서 박사들은 직책이 고금을 통달하는 것이 아니라 경서의 스승이 되는 것이었으며, 태학의 전문 교관으로서 경학 전수를 위주로 하고 때로는 조정에서 정치를 논하고 예를 제정하고 학술을 토론하는데 참여하거나 지방의 정치·교육상테를 순찰하였다. 그리하여 박사는 벼슬을 하고 현달하는 계단이 되었고, 이로 봐서는 한대 많은 사람들은 박사가 되는 것을 최종 정치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박사로 임명되는 것을 통해 더 높은 벼슬과 관록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결과 한대 사람들은 박사가 되려고 무척 애를 쓰게 되었고, 그를 위해서는 경전의 해석에 능통해야 했기에 한대의 유학은 경학화 되어 갈수록 상세해 지고 세밀해 지게 되었다.이런 정형을 반고(班固) 크게 비판하여, “ 고대의 학자들은 농사를 지어 살면서 3년에 한가지 경을 통달했는데 대체로 기억하고 경문을 숙독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며 30세가 되면 5경을 다 배웠다. 후세에 경의 전수는 원문과 해설이 맞지 않았다. 박식한 사람들은 문장의 뜻을 쪼개고, 화려한 말로써 꾸며 형체를 파괴하고, 5자로 된 말을 2~3만 어로 해석하며 후세 사람들은 또 그것을 가일층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한 가지 경을 전문적으로 배운다 해도 백발이 되어서야 그 뜻을 알게 된다. ··· 이것이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재난이다.” 하였다.이의 비판처럼, 지나지게 경학의 양상을 띄게 된 한대의 유학은 흥성에서 쇠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3. 당조 중기의 유학 부흥 운동유학은 경학의 속박하에 배회하면서 “글귀를 암기하는데만 그칠 뿐 새로운 의의의 발명이란 아무것도 없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고, 이리하여 고종, 무측전 이후로 점차 사회, 정치상에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유학의 전도를 꾀하고 사회 정치 교화를 꿈꾸는 유생들의 불만을 야기시키게 되었다.결국 유생들은 현실적인 사회 정치 분야에서의 유학의 영도적 지위를 회복하려 하였고, 이에 당조 중기에 고문(古文) 운동의 활발한 발전과 동반하여 유학도 생기를 띄고 부흥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주요한 대표 인물로는 한유(韓愈), 이고(李?), 유종원(柳宗元)이 있다.1. 한유의 유학 사상 및 불교·도교를 배척하는 이론한유는 당조의 저명한 문학가이고 고문 운동의 영도자인 동시에 송명(宋明) 유학의 흥기에 대하여 심원한 영향을 일으킨 사상가이기도 하다.그가 유학의 부흥에 힘쓰게 된것은, 당시 사회 문화의 영향하에 생성된 것이다.첫째, 안록산의 난 이후, 일부 유행들은 정치가 혼란하고 풍속이 희박해짐을 목격하고, 이의 근본적 원인을 탐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 원인을 “선왕의 도가 소실되고, 유도(儒道)가 전파되지 못한‘ 데 있다고 인정하였다. 곧, 유도의 재흥을 위하여 그들은 경학을 반대하고 유학의 전통을 제창하였다. 둘째로, 당현종 이후로 불교·도교 세력은 날이 갈수록 만연되었다. 서민은 물론, 사대부들도 분분히 불문에 귀속하게 되고, 이런 불교 숭배 활동 가운데서 국가의 정치 구조와 사회 경제는 엄중한 파괴를 당하였다.
詩 經§1. 시경이란시경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으로써 흔히 중국 문학의 비조라고 불려진다. 황하유역의 여러 나라와 왕궁에서 부른 시가(詩歌)를 채시(采詩) 헌시(獻詩) 산시(刪詩) 등의 세 과정을 통하여 수집되었으며 전체의 편수는 311수이지만, 가사가 없는 시를 뺀다면 총 305수만이 수록되어 있다. 본래 3,000여 편이었던 것을 공자가 산정(刪定)했다는 말이 있으나 믿기 어렵고 민간 가요와 사대부들의 노래 및 왕실의 연회?의식이나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 부르던 노래의 가사들을 후세 사람이 정리하여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시경에 수록된 시들의 정확한 저작 연대, 시경의 정확한 편찬 연대, 시들이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서경(書經)?역경(易經)?춘추(春秋)?예기(禮記)와 함께 유교의 경전인 오경(五經)의 하나이며 서주(西周) 초기(BC 11세기)에서 동주(東周) 중기(BC 6세기)에 이르는 약 500년간의 작품들로 추측되고 있다. 내용은 주왕조의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대에 걸 맞는 밝은 서정시로부터 혼란기를 반영하는 어두운 서사시까지 다채로우나, 숫자상으로 가장 많은 것은 연애시로써 혼인시를 포함해서 전체의 약 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시경은 유교 이전의 고대가요의 황금시대에 꽃핀 중국문학사상 희귀한 연애문학 또는 여류문학의 일면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에게 신라 시대의 향가(鄕歌) 와 같이 중국 대륙에는 시경이 있으며, 이 시경이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2. 시경의 명칭과거에는 ‘시삼백’ ‘시’라고 했다. 공자가 ‘시’를 육경(六經)에 포함시키고 후대의 유학자들이 경전의 하나로 생각하여 점차 시경(詩經)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시경이란 명칭은 한대에 처음 보이고 명대 이후에야 유행되었다.§3. 시경의 내용시경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여 통치자의 전쟁?사냥, 귀족계층의 부패상, 백성들의 애정?일상생활 등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시경이 비록 305편이지만 그 소재는 하늘과 신(神), 그리고 복잡하고 다난한 인간사에 이르기까지 유미적(唯美的)이며 낭만적이고, 경천적(敬天的)이며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모든 면에 관계되어 있으며, 제왕에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애환이 그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4. 시경의 구성30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국풍 160편 소아 74편 대아 31편 송 40편이다. 이외에 본문은 없고 제목만 있는 시가 6편 있는데, 이것은 가사가 없어졌다는 설과 원래 가사가 없는 생가라는 설이 있다.1)풍(風)풍은 15개의 제후국(주남, 소남, 패, 용, 위, 왕, 정, 제, 위, 당, 진, 진, 회, 조, 빈)의 민간가요를 주로 하고, 총 160수가 전한다. 또 풍은 여러 나라의 노래가 모여 있다 해서 국풍(國風)이라고도 한다. 그 테마는 연애?결혼?생활?전쟁 등이라고 하는 노래의 장(場)을 세로축으로, 열정?기쁨?슬픔?희롱 등의 감정을 가로축으로 교차시켜 표시하면, 대개 이 좌표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 중에서 80수는 연애?결혼의 기쁨?슬픔을 표현한 것이고 나머지는 현실의 풍자와 풍간, 풍요를 표현 한 것이다.2)아(雅)아는 잔치하고 즐길 때 쓰이던 소아(小雅) 74수와 회조(會朝)에 쓰이던 음악과 제사지내고 난 고기를 받고 훈계를 늘어놓을 때의 가사인 대아(大雅) 31수가 전한다. 아는 궁정?사회?전장?역사가 주무대이다. 귀족의 향연에서의 축복과 환영, 병사의 망향과 장군의 무훈, 망국의 한(恨)과 사회악에 대한 분노 등을 테마로 한 시와 주(周)나라의 기원과 건국을 노래한 서사시가 있으며, 그 밖에 소아(小雅)에는 국풍적인 연애?결혼의 노래도 포함되어 있다. 즉 아는 궁중에서 쓰이던 사대부들의 작품이며 풍에 비해 다소 형식적이고 교훈적이다.3)송(頌)송은 무왕 성왕 강왕 소왕의 주초의 작품들로 신과 조상에게 제사지낼 때 부르던 노래들이며 분장하지 않고 길이가 짧고 문장이 질박하고 거친 주송(周頌) 31수와 노나라 희공 때의 시로써 조상에게 무공을 아뢰는 제사를 지내는 노래와 무공을 과장하는 내용의 노송(魯頌) 4수가 있다. 그리고 주송과 비슷한 제가와 임금의 무공을 찬양한 것도 있는 상송(商頌) 5수가 전한다. 송은 제장(祭場)이 무대이며, 주로 조상에 대한 송가나 구복(求福)을 테마로 삼았다.§5. 시경의 형식시경의 글자수에서 살펴보면 시경은 매구 四言이 정격, 중간에 二, 三, 五, 六, 七 八言의 句들을 잡용하고 있으나 전편이 四言이외의 구절이거나 완전한 자유형의 장단구는 드물다. 서술방법으로는 직서법을 주로 사용하여 표현한 賦(부)와 비유법을 사용한 比(비), 그리고 의견은 구구하지만 일종의 비유와 비슷한 은유적인 성격이 강한 興(흥)이 있다. 그리고 수사법으로는 그 첫째로 압운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운을 바꾸는 환운(換韻)과 한쪽은 건너뛰며 운을 담는 등의 격운(隔韻)을 통해 변화를 마니 시도하였고, 음악적인 수사기교로 첩자(疊字), 첩운(疊韻), 쌍성(雙聲) 등을 마니 사용하였다. 또 시각적인 수사법으로 비슷한 모양의 글자들을 이어서 사용했으며, 또, 관저편(關雎篇)의 二, 四, 五章등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대구(對句)를 시도하기도 하였다.§6. 시경의 체제시경의 체제는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체제와 성질상의 분류에 따라 風, 雅, 頌의 세 가지로 나누고 作詩의 수단과 방법에 따라 賦, 比, 興로 나눌 수 있다. 風은 풍속이나 풍교를 담은 것, 雅는 왕정의 득실을 말하여 후세에 법도로 삼은 것, 그리고 頌은 성덕을 찬미하여 종조에 알리는 것이며, 賦는 사상을 사실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직서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고, 比는 저것으로써 이것을 비유하는 것으로 비유법을 강조한 것이며 끝으로 먼저 다른 사람의 사실을 말하여 감회를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興이 있다.§7. 시경의 전래「사기」에는 공자가 311편을 추렸다고 되어 있으나, 6편은 제목만 전하고 현재는 305편만 전한다. 그런데 그것도 확실하지 않으며 구도로 전승된 작품들을 어느 시기에 문자언어로 옮겨서 편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 설을 근거로 만들어진 시경도 최초의 뜻은 차츰 잊혀지고 진(秦)나라의 분서(焚書)를 통해 유실되고 난 후 4가지 텍스트가 출현하였다. 노시(魯詩)?제시(齊詩)?한시(韓詩)?모시(毛詩)가 출현하여 시경의 해석과 연구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그 중에서 후한 정현(鄭玄)의 주석에 의하여 해석의 체계성이 갖추어진 모시만이 살아남아서 현재에 전하고 있다.
巴金의 1. 작자의 생애巴金의 본명은 이요당(李堯堂)이며, 필명인 파금은 그가 젊은 시절 심취했던 무정부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바쿠닌(bakunin)과 크로포트킨(kropotkin)의 이름 가운데 한 글자씩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는 1904년 四川省의 봉건관료지주 집안에 태어나 생활하면서, 봉건대가족의 어른들의 전횡과 모함, 방탕하고 음란한 생활, 예교라는 제도 아래 질식하는 형제자매들을 목도하면서 가슴에 반항의 싹을 키워 나갔다. 5~4운동 후 진보적인 간행물과 무정부주의자의 저술을 접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1927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갔을 때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여 그 저서를 탐독하는 한편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1931년부터 1940년에는 격류삼부작(激流三部曲) 이라 불리는 연작 장편소설 ,,을 발표했고, 항일 전쟁이 벌어진 이후에는 항전의 대열에 합류하여 1938년~1944년에 인 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그도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노동 개조를 강요당하고 아내마저 잃었다. 문화대혁명 이후에는 그간의 경험을 소재로 하여 을 집필하였는데, 여기서 파금은 나는 가해자 라고 고백하며 문화대혁명의 발동을 용인한 지식인의 책임 문제를 제기하였다.2. 작품소개격류(激流)3부작 이라는 불리는 ,,는 그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은 5?4 시기를 전후로, 한 봉건 가정이 거대한 사회변화의 조류에 휩쓸려 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한 집안의 변화 속에 중국사회 전체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투영하여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뛰어난 현실주의적 가치를 지닌다.1) 가정소설 : 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는 생활에 대한 심도 있는 묘사, 봉건제도에 대한 강렬한 고발, 인물형상에 대한 성공적인 묘사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은 가정문학으로서의 특징을 지닌 생활소설이라 할 수 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이며 또한 그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사회이다. 가정의 모순은 사회 모순의 반영이며, 가정에서 파생된 윤리, 도덕은 가정관계를 유지하고 나아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이용되었다. 파금은 바로 가정 모순에 대한 폭로를 통하여 전체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반영하면서 봉건제도가 반드시 멸망하는 역사적인 추세를 드러냈다.2) 시대적 배경 : 중국 현대사의 대각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20년~1921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해혁명 시기와 5?4 신문화 운동을 작품의 중요한 시대적 상황으로 보고 있다.① 辛亥革命 : 청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건국을 가져온 신해혁명은 봉건적 정치체제의 붕괴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전면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사실 신해혁명은 새로운 비전도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군벌통치시대라는 또 하나의 암흑기를 초래하게 되었지만,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예교제도와 봉건전제통치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이들이 차츰 무너지게 됨으로써 5?4 운동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② 5?4 신문화 운동 : 중국을 유교적 전통주의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해방시키는데 그 목표를 둔 구체적인 신사상 운동이다. 이는 윤리혁명과 문화혁명으로 나누어 일어났고 진독수(陳獨秀)를 주로 하는 新靑年이 그 주역이 되었다. 진독수는 자주적, 진보적, 진취적, 세계적, 실리적, 과학적 이 5가지 각성을 청년들에게 호소했고, 신청년에서는 여성문제도 거론하며 구예교를 비판했다. 백화문으로 된 창작 작품들, 백화체 신문, 잡지가 쏟아져 나와 청년들의 각성을 촉진했는데, 파금과 覺慧 형제들 모두 5.4신문화의 산물이다1). 이들은 과 을 읽고는 과학과 민주를 제창하며 구도덕과 구문화를 반대하고 신도덕과 신문학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근대화의 첫걸음이 된 5?4 시기에도 농민, 노동자들은 군벌, 제국주의, 대지주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3. 인물 유형1) 기성 봉건 통치 계층 : 高 노인覺慧의 조부인 高노인은 청조 때 큰 벼슬을 했고,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봉건 군주로 이 대가정의 통치자이며 봉건예교를 수호하는 인물이다. 그는 상업, 工事의 대량의 주권과 소작농들을 착취하여 얻은 財富에 근거하여 기생충 생활을 하고 봉건 가정의 절대적 권위를 내세워 대가정을 다스린다. 그는 봉건적인 종법제도를 옹호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언제까지나 유지하기를 바란다. 그는 늘 도덕과 인의를 강조하면서도 과거에는 기녀들과 방탕한 생활을 했고, 늙어서도 젊은 첩들만 찾는 등 허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馮樂山, 克定, 克安도 입으로는 도를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주색과 쾌락에 빠져 있는 등 봉건지배계급의 도덕적 추락과 부패한 생활을 대표한다.2) 舊?新사상에서 갈등하는 인물 : 覺新각신은 신사상의 영향을 받아 각성하여 가정의 위기를 발견하지만, 여전히 봉건적 전통 관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중간세력을 대표한다. 그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라는 두 가지 모순과 갈등 속에서, 정신적 고통과 방황 가운데 어쩌지 못하는 유약성을 지닌다. 그는 진학의 희망이 좌절되고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되지만,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참고 복종할 뿐이다. 각신의 무조건적인 복종은 중국 가족제도의 근본 윤리원칙인 孝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죽이고 통치자의 생각에 순종하여 낡은 세력과 타협하는 것으로 충돌을 해소시킨다. 그러나 신사상을 접하고, 覺民, 覺慧의 엄격한 비판, 梅, 瑞珏의 죽음 가운데 각신은 마침내 순종주의, 무저항주의가 그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결국 봉건세력에 반항하게 된다.3) 반항과 비판의 신청년 계층 : 覺慧覺慧는 봉건기성세력에 대항하는 신청년 계층을 대표한다. 5?4 민주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 각성한 그는 천박하고 부패한 봉건대가정의 죄악을 경험하면서 그에 대해 격렬히 반항하고 비판을 가한다. 진취적이면서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그는 동료들과 학생시위에 참여하여 새로운 활동을 쟁취하고자 했고, 하녀 봉명을 사랑하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봉명과의 사랑이 계급적 지위의 차이라는 한계에 부딪치자 봉건관념의 잔재를 철저히 벗지 못하고 고민하기도 한다. 봉건제도에 격렬히 투쟁하던 覺慧는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끝내 집을 나가는데, 이는 희망에 대한 추구와 투쟁신념, 그리고 헌신 정신을 띤다. 覺慧는 중국의 20년대 자각해 가는 민주적인 청년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개성해방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진실 되게 반영하였다. 이는 부조리한 제도 속에서 고통받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각성과 희망을 제시해주었다.이 외 覺民, 琴은 봉건주의에 분연히 반항하면서도 그런 대로 절제를 발휘하며, 비교적 온화한 방법과 냉정한 태도로 이상을 시행하고자 한다. 혼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한정된 반항을 한다. 한편 琴은 적극적으로 남녀평등의 쟁취를 주장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영위해 가는 신여성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4) 봉건제도의 희생자 계층봉건사회의 하위계층에 속하는 여성과 노비들은 지배계층에게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희망은커녕, 저항할 몸부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① 여성 희생자梅는 봉건제도의 억압에 의한 혼인으로 인간의 기본권리를 침해당하며, 여자라는 운명으로 어떤 저항할 능력도, 다시 일어설 힘도 찾지 못한다. 瑞珏은 해산을 앞두고 血光의 災殃 이 생긴다는 미신 때문에 성외로 쫓겨나지만 어른들과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다 난산으로 죽고 만다. 張太太를 비롯하여 周氏와 錢太太는 과부로서, 재가가 허용되지 않는 당시 봉건사회제도 때문에 평생 비구니로 살아가야 한다. 이렇듯, 봉건제도하 여성들은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며 무력하고 답답한 삶을 살아간다.② 봉건제도에서 하인군에 속하는 노비들은 자유로운 표현과 행동이 결코 용납되지 않았고 포악한 요구에 굴복해야만 했다. 高家의 여종 鳳鳴은 17년간 노예처럼 일하다가 나중에는 高노인의 명령에 의해 풍악산의 첩으로 보내진다. 여종 婉兒는 鳳鳴 대신 억지로 풍악산의 첩으로 보내져 학대를 당하지만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4. 신구세대의 대립과 해체 과정① 봉건가정의 독재적 횡포경제권을 장악한 家長의 말은 곧 법이었고, 자손의 혼인과 장래도 좌지우지하였다. 高노인은 신사상을 극구 반대하고, 포악한 전제주의를 실시하였다. 그는 과학을 사악한 학설, 민주사상을 반역이라고 하며 용납하지 않았고, 覺慧의 학생운동을 질책하고, 집에 연금하기도 하였다.⇒5?4 신문화운동은 거대한 기세로 과학과 민주, 신도덕과 신문학을 제창하였다. 覺慧 형제들은 등 각종 신사상의 서적과 잡지를 통해 신세계를 접하며, 직접 봉건대가정의 추악함을 경험하면서 각성한다. 覺慧는 학생시위 이후 나날이 더 각성하며, 그의 반항행위도 점점 구체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