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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근대화론을 읽고
    라이샤워『일본 근대화론』을 읽고사학과 4학년 19810174 김정현정병준 교수님『일본 근대화론』『일본 근대화론』의 저자 라이샤워는 일본 근대화에 대한 극찬론자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일본과 다른 아시아국가 - 특히, 중국 -와의 근대화 움직임을 비교하면서 비서구국가인 일본이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 내에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로 잘 설명하고 있다. 라이샤워는 일본과 근대화에 성공한 서구 사이에는 “봉건제도”라는 공통 분모가 있음에 주목하여 이 봉건제도야 말로 근대화의 촉매화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봉건제도하의 법률적인 권리와 의무가 중시되는 풍조는 근대적 법률 개념 확립에 일조 하였고 봉건제도하에서의 뚜렷한 신분 차이는 신분 지향적인 윤리관보다는 목표 지향적인 윤리관의 발달을 조장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진취적인 활동력과 기업 정신을 낳은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근대화 움직임이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열강이 겪은 것처럼 전체주의냐 민주주의냐의 갈림길에서 전체주의를 선택하게 되고 이는 2차대전 패망이라는 쓰디쓴 상처로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일본의 근대화는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하였으며 이는 경제적 정치적 분야 뿐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예술과 문화면에서도 세계에서 유수한 예술적인 창작력과 영향력을 갖는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라이샤워가 이 책을 쓴 연도는 대략 1960년대였었는데 그 당시 아시아에서 근대화되었다고 할수 있는 나라는 일본 뿐이었다. 이렇게 비서구 국가중에서 유독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라이샤워는 대표적 비교대상으로 중국을 들었다. 두 나라는 여러면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우선 일본은 중국보다 해외 유학생들의 활발한 활동이 가능했고 이는 곧 근대화의 힘이 되었다. 또한 일본의 목표지향적인 윤리관은 근대화의 경제력이 밑받침이 되는 재벌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에 반해 중국의 전통적인 신분 지향적인 윤리관에서는 일본과 같이 관료가 관직을 벗어 던지고 경제활동에 종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또한 정치형태로써 두 나라를 비교했다. 일본의 봉건제도는 위에서 상술하였다시피 근대화의 촉매작용을 하였는데 비해 중국의 전통적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는 일면 일본의 봉건제도보다 진보적인 체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중국이 필요로 했던 큰 변혁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였다. 물론 중국은 당시 인구나 영토 천연자원에서 일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풍족하였지만 결국 이것들이 근대화 미친 영향은 미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전까지 연구되었던 일본 근대화에 대한 여러 설들이 별로 소용없음을 의미하는것이고 한나라의 급속한 근대화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조나 가치관 등의 내면적인 영역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되다고 하였다. 중국은 오랫동안 문명의 중심국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해 외부 선진 문물의 수입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일본은 별 무리 없이 서양의 우수한 병기와 훌륭한 경제력을 구비한 서양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일본의 란가쿠를 들수 있다. 물론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케이스가 있다. 명말에 활약한 마테오 리치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머물면서 서양과 중국 사이에 대폭적인 학술적 접촉을 추진하였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사후 그의 흔적은 사라졌으며 이후 19세기까지 계속하여 서구와 접촉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은 중국의 중앙 집권적인 체제와 달리 각 한마다 어느정도의 독립성이 인정되었다. 이는 일본이 서양의 학문과 힘에 대해서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배타적인 계급 분화와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목표지향적인 윤리관은 많은 이상주의자와 다양한 비판을 하는 여론을 형성하여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또한 일본의 근대화가 급속히 행해진 다른 이유는 19세기 중엽의 일본은 중국에 존재했던 것보다도 발달한 경제적 여러 기관을 이미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경제력은 17세기까지만 해도 중국에 뒤져있었으나 18세기 중반이후부터는 경제적 여러 제도가 급속히 발전하였고 중국의 그것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렀다.이상 살펴 본 것처럼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차이는 대부분 봉건제도의 유무에서 결정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와 아울러 근대화를 이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외형적 제도 뿐 만 아니라 내면적 가치관과 사회 풍토도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외부 원조나 지하자원만으로 근대화를 이루기란 요원한 것이다.결론적으로 19세기 후반의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고찰할 때 사회구조나 가치관이나 윤리관 등의 요소가 근대화와 경제 성장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더욱 그 중요성이 천연자원이나 나아가 외부의 자극 등의 물리적 요소를 능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비평』이 책을 읽기 전에는 봉건제도라 함은 전근대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중앙 집권국가에 비해 정치형태가 훨씬 낙후적인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봉건제도는 중앙 집권 국가에 비해서 장점이라고는 전무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오랜 시간 정치체제가 봉건제도에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로 발전하지 못한 일본의 역사를 우습게 여겼고 메이지 시대 이전은 볼 것도 없는 역사 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 봉건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상황(-외부로부터의 침입 없음, 분할되어 있는 지리적여건)등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던 본인의 짧은 식견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비슷한 봉건제도가 근대화 성공의 요인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이론 중 편입이전차이론 과 관련된 것으로 특히 이 이론을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다.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했다는 사실에서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과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을 비유적으로 제시하고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서구 자본주의를 수용할 만한 경제적 발전을 달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이에 반대되는 실증적 연구들이 나오면서 일찌감치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조선사 및 조선경제사, 중국사 및 중국경제사 연구의 발전에 따라 일본이 동아시아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결코 앞서지 않았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트림버거는 히긴스나 기어츠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며 편입 이전의 자본주의 발전론을 부인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850년대 중국은 일본보다 곡물 생산량이 많았으며 중국의 도시 상인들이 일본의 상인들보다 훨씬 혁신적이었다. 또한 1850년대의 일본의 쌀 수익량은 자바와 유사했음을 지적하며 최종적으로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도쿠가와 체제하의 일본경제는 자생적으로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발생시킬 수 없었다 고 결론 짓는다.조선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편입 이전 일본의 자본주의가 인근 국가보다 월등히 발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역시 상품화폐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개국 직전에는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가 존재했음이 보고 되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이 자본주의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차이점은 모두 간과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의 근대화 성공 요인에 경제보다는 정치구조, 국제관계 구조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일본 봉건 정치구조의 위기는 19세기 중반 서구열강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가속화됐다. 상품경제의 발전에서 비롯된 지배계급내 갈등, 즉 바쿠후와 한 또는 쇼군과 다이묘간의 갈등이 결국 수세기 동안 권력의 음지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던 천황의 존재를 급부상 시켰다. 외압의 증가, 바쿠후의 권위약화를 계기로 19세기 초부터 서서히 발언권을 높이기 시작한 천황은 존왕양이파가 등장하자 더욱 국내정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는 분명 절대 강자였던 쇼군과 바쿠후를 대체할 수 있던 천황 과 조정 이라는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천황과 조정은 현실안주적인 바쿠후의 반대 세력이 결집할 수 있었던 훌륭한 양지였으며 천황, 조정의 권위를 등에 업은 이들이 최종적으로 바쿠후를 몰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권력다툼은 무력을 수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반대 세력의 제압은 완전하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일본은 사회개혁을 원하는 지도자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정열적으로 사회개혁을 통한 부국강병에 매진할 수 있었다. 조선의 경우 사회개혁을 원하는 선각자들이 실권을 장악하는데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그리고 임란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왕권이 교체됐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바쿠후시대가 개막됐으며 조선은 이전과는 분명 다른 사회구조로 이행했다. 그러나 일본의 변화는 단순한 왕권의 교체로 끝나지 않았다. 그 하나는 16세기 일본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가간 체계에서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16세기 중반 일본이 한창 내란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일본은 중국에 마지막 조공사절을 보냈으며 이를 끝으로 중국과의 정식관계는 성립되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은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중국 통제로부터 벗어난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관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일본은 편견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국가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공체계에서 이탈했다는 것은 위기의 순간에 집착하거나 의지할만한 대상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다른 한편 이는 중국을 비롯한 어느 국가에도 통제받을 일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인문/어학| 2006.11.29| 4페이지| 1,000원| 조회(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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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근대화론
    일본 근대화론목록서론1. 책을 읽게된 동기본론2. 근대화란 무엇인가3. 근대화를 향한 준비(고대와 봉건 시대)4. 과거 100년의 급속한 근대화5. 19세기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비교6. 메이지유신의 성공결론7. 정리 및 나의 각오서론1. 책을 읽게된 동기 및, 근대화란 무엇인가지구상에는 많은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수 많은 나라들 중 우리는 잘사는 나라, 못 사는 나라를 구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잘사는 나라(선진국)와 못사는 나라(후진국)는 도대체 무슨 차이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제 막 선진국을 향하여 발돋움하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로서 과연 어떻게 하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그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어떠한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한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은 해결의 실마리라고 본다. 흔히 일본을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 이라고 말한다. 세계 대전의 참패 후, 최근 백년도 안 되는 사이에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많은 학자들, 경제인들은 그 이유를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어떠한 것 이였기 작은 섬나라,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본인은 라이샤워의 일본 근대화론 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과제를 떠나 우리나라와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의 근대화 역사를 살펴보고, 평가해보기로 하자.본론2. 근대화란 무엇인가일본 근대화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근대화란 무엇인지 확실히 규명 지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 근대화라는 말은 널리 사용되고 있고, 여러 곳에서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 개념 규정이나 내용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그래서 근대화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서구화 ?공업화 ?민주화 ?합리화 ?도시화 등 다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개혁 또는 발전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근대화의 개념- 두산 세계 대 백과 참조오늘날 근대화라는 말은 널리 사용되고의 근대화 개념은 근대화를 단순히 서유럽화로 보지 않는다. 이는 세계 모든 사회의 사회적 변동의 보편적인 지향목표이자, 사회적 변화의 요구이며, 보편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규범적 가치라고 보는 입장이다. 즉, 세계의 지역적 차원을 넘어서, 모든 사회가 그의 사회적 변화에 있어서 도달해야 할 보편적인 사회과정이라고 보는 견해다. 흔히 말하는 전근대적인 상태로부터 근대적인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후진적 상태에서 선진적 상태로 발전해 가는 과정 이라는 근대화의 정의(定義)는 이러한 입장에 선 것이다.이렇게 보면 넓은 의미에서의 근대화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치관 등의 모든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구조적인 변화(structural change)가 진행되어 후진적인 상태에서 보다 향상된 생활조건을 조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경우 전근대적 ?후진적이 하는 것을 전통적이라고 보고, 선진적 또는 향상된 것을 근대적이라고 본다면, 근대화는 전통적 사회가 근대적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이와 같은 근대화 과정을 밟고 있는 사회를 과도사회(過渡社會:transitional society) 또는 근대화 사회(modernizing society)라고 한다. 또 구조적인 변화 란 그 체제 내에서 점진적인 진화의 과정(evolutionary process)으로 일어나는 것이나, 그 체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변화(revolutionary change)로 일어나는 것을 다같이 포함한다. 그런데 이 구조적 변화라는 성격을 가진 근대화는 전통적 사회 내부에서 스스로 발전을 지향하는 내재적 자각(內在的自覺)과, 근대적 사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외재적 자극(外在的刺戟)이 일치함으로써 추진되는 것이다.그러나 근대화가 추진되는 데 외재적 자극이 필요하다고 해서, 근대화가 단순히 모방의 과정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근대화가 전통적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전통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외재적인 근대적 요소를 이에 대치 ?이전시키는 것이 아니, 보편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규범적 가치라고 보는 입장이다. 즉, 세계의 지역적 차원을 넘어서, 모든 사회가 그의 사회적 변화에 있어서 도달해야 할 보편적인 사회과정이라고 보는 견해다. 흔히 말하는 전근대적인 상태로부터 근대적인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후진적 상태에서 선진적 상태로 발전해 가는 과정 이라는 근대화의 정의는 이러한 입장에 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넓은 의미에서의 근대화란 정치?경제?사회 ?문화?가치관 등의 모든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구조적인 변화가 진행되어 후진적인 상태에서 보다 향상된 생활조건을 조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경우 전근대적?후진적이 하는 것을 전통적이라고 보고, 선진적 또는 향상된 것을 근대적이라고 본다면, 근대화는 전통적 사회가 근대적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화가 전통적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전통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외재적인 근대적 요소를 이에 대치 ?이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바탕 위에서 외재적인 요소를 가지고 변질 또는 변형시키는 과정이며, 전통적인 문화와 외래적인 문화의 이른바 문화적 종합화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이상의 근대화 개념을 가지고 일본 근대화의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일본의 개항(1854)-미국의 강요로 문호 개방-미?일 수호 통상조약 → 서양 열강과 조약 체결2) 메이지 유신(1868)-막부 타도 → 국왕 중심의 신 정부 수립(중앙 집권 체제, 입헌 군주제)-근대적 개혁 단행 : 외국 문물 수입, 봉건제도 타파3. 근대화를 향한 준비(고대와 봉건 시대)적극적이었던 고대 일본의 문명 섭취 자세일본은 외국의 정복을 받은 일이 없었으며 또 대륙으로부터의 왕래는 극희 소수 상인 등에게 국한되고 있었다. 일본의 지리적 고립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당시 문명국들의 문화 및 문명에대한 적극적 섭취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또한, 고대의 중국 문명이 일본에 전래된 주요한 이유로서는 우선 당시의 일본 지도자에게는 중국 문화를 섭취하려는 결의가 강하였다. 수 있었던 전제 제도에 비하면, 봉건제도는 법률적인 권리와 의무가 중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의 법적 개념에 보다 쉽게 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덧붙여, 당시의 봉건 영주는 토지의 소유와 지조의 징수에 전념하고 있었으므로 상인과 제조업자는 전제적인 정권하에서 보다는 대폭적인 활동 범위와 보장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경제 활동과 앞서 이야기한 법적 개념이 함께 하여 더욱 진보된 경제 제도를 낳았으며, 근대적인 형태의 경제기구를 향하여 첫걸음을내디딜 수가 있었다.당시의 봉건 영주 이외의 계급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뚜렷하게 제외되고 있었으므로, 신분의 영달을 꾀하려는 이른바 신분 지향적인 윤리관보다는 목표 지향적인 윤리관의 발달이 조장되었다. 이 목표 지향적인 윤리관과 봉건 제도에 의하여 배양된, 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이 함께 하여, 진취적 기상이 풍부한 활동력과 기업 정신을 낳은 것이다.4. 과거 100년의 급속한 근대화일본의 국가 의식19세기의 일본은 갖추고 있었지만 다른 비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없었던 요인들을 살펴보면 그것은다름 아닌 일본의 강한 국가 의식이다. 일본은 19세기 강한 국가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하여 비 서양 여러 나라는 모두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높은 국가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강한 국가 의식은 일본을 발전시키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교육의 보급과 공업화의 과정근대화가 이루어질 당시에 일본에는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았으며, 교육에 대한 강한 일반적인 의욕이 있었다. 사실, 에도 시대 일본의 읽기, 쓰기의 능력은 아시아의 어떤 지역보다도 우수하였다. 더욱이 메이지 정부는 학교 교육과 읽기, 쓰기의 능력의 보급에 큰 노력을 하였다.이와 같이 하여 교육제도는 메이지의 중반까지에는 확고한 기초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조가 없었다면 교육 이외의 분야에서 일본의 근대화가 과연 그와 같이 급속하고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일본의 경험에서 다른 비 서양 여러 나라가 배워야할 하나의 요인이 업의 태반은 실로 민간의 적극적인 역할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은 다른 비 서양 여러 나라가 신중히 연구하여야 할 하나의 역사적 교훈이라고 생각한다.5. 19세기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비교동아시아에서 유독 일본만이 이토록 급속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주변국과의 비교, 대조를 통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얼핏, 중국과 일본을 놓고 생각해보면, 자연적 환경이라던가, 지난 역사 속에서의 문명의 발달 정도를 놓고 볼 때 중국이 보다 빠르게 발전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해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과연어디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양국의 국민성의 차이우선 가장 돋보이는 차이점은 양국의 전통적인 대외관의 차이이다. 큰 국토와 오랜 역사를 지니며 일찍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유일한 고도의 문명국으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더욱 다른 문명권으로부터 먼 땅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국민은 그들이야말로 고도의 문명을 구축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다. 문명과 중국은 동의어라는 사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외부 세계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전무하다는 생각이 중국인의 마음속에 경고한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일본인의 태도는 이와는 전혀 달랐다. 일본은 보다 작은 나라였으며 그들의 문화는 대륙 문명의 지류로서 발달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언제나 다른 문명국을 의식하고 있었다. 일본인은 자기 나라의 역사 속에서 외국의 문명유입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19세기 중기의 일본인이 우수한 병기와 훌륭한 경제력을 구비한 서양으로부터 배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였다.발달하고 있었던 일본인의 기업 정신19세기 중엽의 일본은 중국에 존재했던 것 보다 발달한 경제적 여러 기관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18세기와 19세기 초기의 일본은 금융기관이나 교역기관 그리고 아마도 발전 도상의 제조업에서조차 경제적 규모에 있어서 중국을 앞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확실히 17세기 초기에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뒤지고 있었다. 당시의 일본은 볼 수
    인문/어학| 2006.11.29| 10페이지| 1,500원| 조회(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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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라스무스와 루터--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자유의지 논쟁을 중심으로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왜 결별했는가?-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자유의지 논쟁을 중심으로 -1. 머리말2. 에라스무스는 누구인가?3.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4. 루터는 누구인가?5. 루터의 노예의지론6. 맺은말1. 머리말전 중세를 통해 서구 유럽 사회를 사상적, 문화적으로 지배해온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이 시기에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 파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전쟁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등 많은 개혁적 신학자 들이 있었다.이중 에라스무스와 루터는 단연 주목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에라스무스와 루터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시기의 유럽을 대표하는 인문학자요, 종교개혁가이기 때문이며 이들은 당시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이끌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둘다 로마 카톨릭의 타락, 부패에 심한 염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에 대해 개혁할려고 하는 마음은 동일하다고 할수 있겠지만, 자세히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 성격이 약간 판이함을 알 수 있다. 본 과제에서는 두 인물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고 그들의 종교적 사상과 그 차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2. 에라스무스는 누구인가?에라스무스는 15세기 말엽부터 16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서 어릴때부터 수도원에서 양육되어 20세경에 수도사가 되고 그 후에는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등 종교적 부문에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1499년 영국에서 모어와 콜렛과 같은 인문학자들을 알게 되었고 특히 콜렛의 연구에 자극을 받고 성서연구에 몰두하다 1511년 써낸 것이 유명한 이다. 이 내용은 ‘어리석음의 여신’이 세상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 많은가를 열거하며 자랑을 늘어놓는 형식을 취하여, 철학자 ?신학자의 공허한 논의, 성직자의 위선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서술되어 있다. 1461년는 그리스도교 군주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적인 평화가 체결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한 을 간행하였다. 또 그리스어 의 최초의 인쇄 교정본을 간행하고, 을 간행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여 인문주의자의 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은 고국에 돌아가서 바젤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3.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라스무스는 인간 구원의 문제에 대해 평소 자신의 저서를 통해 설명하곤 했다. 이것을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라고 한다. 이 자유의지에 관한 기본적 주장은 다음과 같다.에라스무스는 사람을 비범한 동물로 보고 있다. 그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영 혹은 심(마음)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신성한 본성과 동물적인 본성, 이 두가지 본성이 한사람 안에 공존하며 특히 이 영혼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지성과 선하거나 덕스러운 것이라고 판단된 것을 수행하려는 의지를 모두 포함하는 이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인간의 이성이 저급한 욕심에서 나오는 사악을 반항하기에 충분한만큼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에 써 넣으신 법 덕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본성의 긍정적인 측면들은 (즉, 이성 혹은 지성과 의지) 부정적인 측면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또 극복하기에 자유롭다는 것이다.에라스무스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혼과 육체 이원론적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이원론 위에 혼을 다시 영과 이성적 혼으로 나누는데에서 에라스무스가 인간본성의 삼분설, 즉 영 (혹은 마음) 과 이성적 혼, 육체를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4. 루터는 누구인가?1483년 작센안할트주 아이스레벤에서 출생한 루터는 1507년에 사제가 되었으며,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 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 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5. 루터의 노예의지론루터에게 있어서 자연적 인간은 그의 이성으로써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이며 이성의 능력은 철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가장 훌륭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구원과 같은 차원 높은 문제들과 관련시켜서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말은 자유의지는 오직 신에만 속한 것이며 하느님만이 인간을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스콜라주의나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 속에 존재하는 바” 를 행함으로서 은총을 얻기 위한 공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의 선택, 의지 행위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과정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전적 타락과 무능력을 완전히 깨닫게 되어 인간의 무기력에 절망함으로써 겸손케 되며 이로써 구원의 필요성과 구원의 능력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의하여 값없이 주어진다는 복음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의는 인간이 성취하여 얻은 것도 아니요 하느님의 심판하시는 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는 의요 우리를 힘있게 하는 구원의 능력이다. 곧 이는 복음의 능력이다. 루터는 에수 그리스도의 의가 곧 우리의 의라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루터의 노예의지론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통해서는 죄인이 선행이나 신앙을 위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은총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반대하는 모든 논리들은 와전히 제거하였다는 점에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문/어학| 2006.11.29| 4페이지| 1,000원| 조회(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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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청대의 자본주의 맹아론
    明?淸대의 資本主義 萌芽論Ⅰ. ‘자본주의 맹아’ 연구의 배경1) 인식론적 배경중국에서의 자본주의 맹아 논쟁은 이른바 ‘동양사회정체론)’에 대한 실천적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정화의 남해원정과 나침반 화약 인쇄술과 같은 근대서양의 과학발전을 가능케 한 발명들이 중국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자본주의열강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의하여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 또한 ‘중국사회 정체론’을 비판, 극복하고 중국사에도 세계사의 법칙성이 존재함을 증명함으로써 중국공산당정권 성립의 역사적 당위성을 드러내기 위함2) 모택동의 언명에 자극모택동은 “중국봉건사회의 상품경제의 발전은 이미 자본주의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었다. 설령 외국자본주의의 영향이 없었다 하더라도 중국은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해 갔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아편전쟁이전의 중국사 내부에도 주체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계기가 있었음을 주장하였다.3) 문화혁명이후 최근까지의 중국자본주의 맹아에 대한 새로운 연구경향)① 과거 주로 “홍루몽”의 시대배경과 관련시켜 논하던 것과는 달리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학술문제로 다루고 있음② 195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에 의거하여 종합적이고 일반적인 논술이 많았던 반면 최근에는 특정지역, 전문업종의 자본주의 맹아를 보다 깊이 연구하고 있음③ 새로운 문제, 새로운 관점,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연구가 출현하고 있음④ 사료운용의 범위가 날로 확대되어 관찬자료, 개인저술 이외에도 ?案, 契約文書, 碑刻資料, 社會調査資料 등의 이용이 활발함⑤ 1950년대에는 지명도가 높은 대가의 글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청장년 역사연구자의 연구가 왕성하다.⑥ 1950년대에는 자본주의 맹아출현의 시기나 발전수준에 대한 평가가 주요한 토론의 중심과제였으나 최근에는 자본주의 맹아의 발전이 완만하고 지체된 원인 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중국에서 발전할 수 없었던 원인 등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Ⅱ 맹아의 개념1) 맹아의 개념① ‘자본주의 맹아’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발생과정을 말하며, 그것은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변화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新質과 舊質이 함께 존재하고, 신질 요소는 부단히 생성 증가하고 구질요소는 부단히 쇠퇴해 가는 완만성을 지닌다.② 맹아는 일종의 생산관계이며 사회관계이다. 즉 하나의 공장, 하나의 점포는 아니다.③ 맹아는 계승성, 연속성, 발전단계성을 갖추고 있다.2) 맹아 형성의 배경 내지는 전제조건으로서 고려되어야 할 것① 상품경제가 발전하여 상품생산자가 이윤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② 노동력의 상품화(고용노동의 출현)가 보여야 한다.③ 소상품생산자가 분화하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이루어져야 한다.Ⅲ. 明末 淸初의 경제상의 변화1)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품작물의 재배자본주의가 나타나게된 기본적 원인으로 농업생산력이 일정한 발전을 가져와야 한다. 명청시대에 나타난 상업의 번성은 사회생산력의 증가에 근거한 것으로 명초 주원장의 농업안정책의 성공과 생산도구나 생산기술의 진보에 의하여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농업분야에 있어서 생산도구의 발전은 농업생산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아울러 상품생산과 공업에 필요한 원료를 제공해줄 수 있는 농업분야의 또 다른 변화는 상품작물의 재배이다. 상품작물의 재배는 지역적 특산품을 고정시키면서 지역적 분업을 축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지역간의 교환으로서 상품유통이 활발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작물의 발전은 농업의 기초를 확대시키고 경제효과를 제고시키며 국민의 축적을 증가시켜 자본주의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중요한 작용을 한 분야로서 이에 대한 정확한 정량적 분석이 있어야 한다.2) 수공업이 발달수공업의 발달은 수공업자들에 의한 專業的 鄕村의 번성을 가져와 지역적 특산물이 생기도록 하였는고 내부적으로는 수공업작업장에 상당수의 고용노동자(傭工)를 고용하여 생산하는 이른바 공장제수공업의 형태가 나타나고 상인이 직접생산자인 수공업자들에게 원료를 공급하고 그 생산물을 독점 취급하는 선대제적 형태도 존재하였다. 특히 선대제적 형태의 경우는 상인 곧 상업자본가가 생산과정과 운송판매 과정을 장악하는 것으로서 산업자본가로의 이행단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3) 상업시장의 발달농업생산력의 증가와 상품작물의 재배는 지주계급의 이익을 확대시키는 결과가 되고 이 과정을 통하여 지주는 농촌의 토지를 겸병하게 되며 극심한 지주의 집중현상이 생긴다.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농촌내의 雇農者層을 형성하거나 유랑하여 도시로 유입되었다. 농촌내의 광범하게 존재하던 고농자층이나 도시의 雇工들의 신분이 엄격한 의미에서 자유고용자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임금노동자의 전신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증가한 城市의 인구는 상공업 발달의 직접적인 반영이고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맹아가 표출된 한 가지 실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4) 화폐지대의 확산명초에는 金銀을 교환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자연적인 추세로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물론 상품경제의 전반적 발전의 표현이다. 銀의 유통이 일반화되면서 부역의 부과체제도 조금씩 변화하게 되어 초기에는 일부 지역에서 代納의 형태로 부분적으로 인정되던 銀納이 전면화되어 一條鞭法, 地丁銀制의 시행을 있게 하였다. 이것은 상공업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단계인 일반 인민들의 신분적 제약이 소멸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상품경제 발전의 결과이면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Ⅳ. 맹아 토론의 사례1) 綿織物業홍무제가 상, 마, 면의 재배를 백성에게 강제한 이후, 면포는 서민의 의료로서 보편화되어 전국에 걸쳐서 자가소비를 위한 농가부업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중부지역이었던 강남지방에서는 15세기 이래로 영세농민의 가계보충을 위한 농가부업으로서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강남의 농민의 면직업에 참여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농가경영의 위기상황하에서 상품생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은 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생산한 면화는 일단 상인에게 팔고, 다음 단계의 가공을 하기 위해서는 상인으로부터 그 원료를 다시 구입하는 일종의 사회적 분업화, 즉 면화의 재배, 알핵(씨 빼기), 방적, 직포 등 각각 공정이 분화되어 있고 영세농민이나 수공업자는 이중에서 어느 부분을 담당하여 전업화한 것이다. 이것은 각각의 공정을 어떤 하나의 대상업자본이 일관해서 포괄적으로 장악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자본가인 객상은 오히려 생산현장의 밖에서 유통기구를 통해서만 영리를 추구한 형태였다.2) 絹織物業강남지방의 견직물업은 중국역사학계에서 ‘명?청 자본주의의 맹아’ 토론 중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일찍부터 지적되어 온 분야로서 명대에는 남경, 소주, 항주, 호주 등 대도시에서 먼저 발달하였다.① 관영생산체제북경과 남경에 내직염국, 소주?항주 등 전국 24개 중요 도시에 외직염국을 설치하여, 이들 내?외직염국의 노동력은 장역제에 따라 匠戶(匠籍에 등록된 민간수공업자)를 동원하고 관이 감독하는 생산체제이다.그러나 이러한 관영공장체제는 관리의 노동착취, 불안정한 급여, 중간 착복 등이 심하였고, 그 때문에 15세기 중엽부터는 장호의 도망, 태공등의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동원된 장호의 기술수준도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이러한 관영공장 생산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장호의 私經營을 인정해 주고, 그 대신 장역을 은으로 대납하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다. 이것이 班匠銀制이다.이 제도의 실시로 사적 경영의 합법성과 안정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독립수공업자로서 상품생산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장호가 가졌던 고도의 기술이 해방되었으므로, 이들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아 농촌의 견직물업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② 민간 機戶의 성장1436년부터 관료의 봉급을 은으로 지급하게 되자 관료들이 비단의 소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 명 중기 이후 농업을 비롯한 각종 산업의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평민들 사이에도 견직물을 착용하는 풍습이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광대한 판로를 배경으로 반장은제의 실시로 자유로운 경영이 가능해진 민간 機戶가 관용이나 관리를 상대로 하는 고급 견직물뿐 아니라, 널리 평민을 위한 물품이나 혹은 국외시장을 상대로 한 보급품도 생산하였다.機戶는 자력으로 경영하는 자 이외에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아무런 생산수단도 가지지 못한 기공을 고용하여 상품생산을 하는 작방주 혹은 공장주도 있었는데, 이들은 바로 기공들의 노동력을 구매함으로써 이들을 수탈하기도 하였다.※ 명말, 청초에 강남에 존재한 이러한 계약관계와 고용노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세계학계에서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에 대한 역사적 성격을 ‘자유로운 노동시장의 성립’ 혹은 ‘자본주의 맹아’로 보려는 측과, 이를 부정하려는 측으로 맞서고 있다.3) 농업 부문의 맹아 출현 논리의 근거가 되는 현상- 상품작물의 재배확대- 고용노동의 출현- 경영지주 출현- 지대의 화폐지대로의 변천- 지주, 농민사이의 모순심화 (항조운동))Ⅴ. 明?淸시대 商業資本의 성격과 장기 지체 원인)1) 明?淸시대 상업이 발달한 지역은 경작면적이 좁고 척박한 곳으로 농민가계의 보충수단으로 등장한 수공업 생산품이 상업의 기반이 되었던 곳과, 광대한 농업에서 축적된 자본으로 점차 지방상인으로 성장하는 경우에 해당되는 곳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상업의 발달은 前者의 경우가 우세했는데 즉 거의 대부분의 상업은 토지가 좁고 인구가 많으며 지세나 부역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큰 지역에서 봉건지주의 착취에 대응하고 호구를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이러한 상업활동은 봉건경제체제를 붕괴시킬 만한 세력이 되지는 못했다.
    인문/어학| 2006.11.29| 6페이지| 1,000원| 조회(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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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의식
    민족주의 역사의식1910년 을사조약 이후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일본은 다양한 측면에서 그들의 한반도 강점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을 보인다. 그 중 역사학적 측면에서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 식민사학의 정립이였다. 이는 타율성론, 반도적 성격론, 정체성론을 그 골자로 하는 것으로, 일본은 이를 마탕으로 미개한 한국의 역사적 구원자인 양 자처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학과 세계사적 보편성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중 민족주의 사학의 흐름을 정리해보고자 한다.1. 민족주의사학의 역사학으로써의 규명민족주의사학을 사학사적 입장에서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 성격과 시기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의 개념은 시기마다 그 내용을 다양하게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시기 역사학의 일각을 이루는 민족주의사학은 먼저 근대역사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하며, 다음으로는 한국사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을 부인하고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안출된 식민사관을 부정하는 역사의식을 담은 역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이런 측면에서 볼 때 민족주의사학은 실학자의 역사학적 전통과 개항기 역사학의 전통을 비판, 계승하면서 1920년대에는 근대역사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민족주의사학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측면을 고양시켜 독립을 달성해보려는 목적을 가진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사를 연구함으로써, 식민사관에 강력히 대응하는 반식민사학의 성격을 띠었다. 즉, 민족주의 사학은 민족의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려는 의도를 갖는 정신사관에 기초한 역사학이라 하겠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비록 국가라는 외형은 잃었더라도 정신만 살아있으면 민족은 살아 있고, 따라서 언젠가 반드시 독립을 찾을 수 있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박은식의 ‘혼’, 정인보의 ‘얼’, 신채호의 ‘낭가사상’, 최남선의 ‘조선정신’, 1920년)을 내놓았다. 이 책은 문자 그대로 독립쟁취를 위한 혈투의 역사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박은식의 가 국민들에게 아픔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구국주의 정신을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공급하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씌어진 것이라면, 는 지통심(知痛心)을 혈투로 전화시켜 실전(實戰)과 행동을 직접적으로 고취하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씌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박은식의 는 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박은식은 에서도 국혼의 개념에 입각한 역사관을 계속하여 피력하였다. 즉 “대개 나라가 서로 경쟁하는 세상에서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병합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 인종의 자격이 동등하고 종교, 역사, 언문, 풍속에 국혼이 존재한다면, 한때 병합당했다하더라도 끝내 분리하여 독립하는 것을 세계사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이어서 그는 “우리 민족은 단군의 신성한 후예로서 충의와 도덕의 근원이 깊은 4.300년의 역사가 있으며, 종교와 문학도 뛰어나서 일찍이 일본에게 큰 영향을 미쳐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요소를 종합하여 우리의 국혼을 생성시키고 그것을 강고하게 하면 반드시 광복의 날을 맞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박은식의 역사관과 역사서술은, 민족의 종교, 언어와 풍속 속에 불멸의 국혼이 존재한다면 비록 한때 다른 민족의 병탄을 당한 민족이리라도 마침내 분리하여 독립하게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이른바 국혼유지(國魂維持)의 사학이었다.한편 는 에 비해 발전적인 역사의식을 보여주었다. 즉 에서는 난(亂>으로 평가되거나 소극적으로 평가되던 운동들이 에서는 혁명으로 높이 평가되어 서술되었다. 는 갑신정변을 혁당(革黨)이라 하여 기본적으로 난으로 다루었으나, 는 근대독립운동의 기점으로서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에서 갑오동학당의 난은 이후 갑오동학당의 대풍운으로서 혁명의 기치를 들었다고 평가되었다.나아가 는 역사발전에 있어 민중의 역할과 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의병을 민군으로 규정한 것이라든지, 3.1본사상이자 자주성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민족의 전통적인 낭가사상이 수두교에서 발생하여 부족국가 열국(列國)의 민족제전(영고?동맹?무천)→고구려의 선배제도→신라의 화랑제도로 발전되어 나말려초를 거치면서 쇠퇴하다가, 묘청(妙淸)의 서경전역(西京戰役)을 계기로 전통적인 국풍파가 사대적인 유학파에게 패하여 몰락하면서 그 맥이 끊어진 것으로 인식하였다.이라는 글에서 그는 ‘묘청의 난’에서 묘청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한 것은 곧 낭가사상이 패한 것이며, 김부식의 승리는 곧 한국사가 사대주의로 기울기 시작한 계기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사대주의가 만연하게 되여 결국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다시 전통적인 민족 사상인 ’낭가사상‘으로 무장한다면 조선은 독립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신채호의 낭가사상은 그것이 본래 우리의 사상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것이 해명되지 않을 때 이 개념 역시 박은식의 ‘혼’처럼 ‘정신사관’이라는 비판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④ 한계와 의의신채호의 역사인식과 서술은 연구방법론을 통해 합리적인 주장을 내세운 만큼 그것을 역사서술에 차분히 적용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가 주장한 역사서술의 체계성?종합성?객관성은 교조성과 당위성에 가리는 일면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신채호의 역사인식과 서술은 식민사관에 맞선 강력한 반식민사론으로서 유교적 역사학을 청산하고 근대사학을 성립시킨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의의요컨대 이 시기에는 신채호나 백남운의 예에서 보듯이 한국사의 연구영역을 문화사 전반으로 확대하여 역사의 주체세력을 민중으로 보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역사서술도 과학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서술하였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즉 실용지향의 학문적 태도를 견지하고 역사연구의 고증성을 높였던 것이다.3. 1930 - 40년대 : 민족주의사학의 발전국내 민족주의 세력은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타협적 세력과 비타협적 세력으로 나뉘어져 갔다. 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안재홍은 사회경제사학의 입장이나 방법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사회경제사학의 한 계열이 계급사관을 강조하고, 우리의 역사를 공식론으로서 처리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계급사관에서 제기한 문제가 우리 역사의 일부를 이루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나 우리 민족의 역사는 보다 넓은 안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조선적?민족적인 것의 추구는 반동적 보수나 감상적 복고주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보적?약진적 그리고 세계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안재홍은 이것을 신민족주의라는 이론으로 전개하였다. 그의 신민족주의 이론은 내적으로는 민족주의를 성취하여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고 외적으로는 타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것으로, 역사학은 이같은 민족 전체의 성장?발전과정에 대한 학문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안재홍의 역사인식과 연구방법론이 투영되어 일가를 이룬 분야는 한국 고대사연구였다. 1930년 에 연재한 (朝鮮上古史管見)을 기초로 하여 그의 고대사연구는 1957-58년의 으로 총괄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우선 단군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의 우리 역사의 대계를 고조선사회의 발전과정이라는 논리로써 정리했다는 점이다. 특히 안재홍은 기자조선의 문제를 그의 독특한 기?지?치이론에 의해 설명하였다. 즉 상고사(上古史)의 발전과정을 모건의 이론에 따라 여계사회(女系社會)로부터 남계 중심의 부족사회 → 부족연합국가(단군조선) → 봉건귀족국가(삼국시대)로 변화 발전한다고 설정하였다. 도한 그 단계에 따라 수장(首長)?대인(大人)을 의미하는 우리말 기?지?치계급이 수장?대인의 지위에서 족장의 지위로, 혹은 지방제후나 군장으로, 혹은 고대국가의 공경(公卿)으로 발전 변화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입각하여 안재홍은 이른바 기자조선의 정체를 크치조선 혹은 크치한국의 와전으로 보았다. 크치와 기자는 중국식 발음으로 서로 비슷한 까닭에 뒷날 낙랑 문헌고증사학 계열의 역사학자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1950년대의 남한 사학계는 냉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역사학의 이념이나 사관을 결여한 채 문헌고증의 아카데미즘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본적으로는 문헌고증사학이 학계의 주류를 형성했기 때문에 일제하에서 형성된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비판과 극복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주 미미하지만 그 발전의 가능성으로 보아 간과할 수 없는 신민족주의사학의 유풍은 남아 있었다. 전자는 ‘진단학회’의 활동, 후자는 ‘역사학회’의 창립으로 설명할 수 있다. 1950년대의 분위기에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들 학회는 모두 미국의 재정적인 지원에 힘입어 성장하였다.(1) 역사학회문헌고증사학을 비판하는 신민족주의사학의 유풍은 해방공간에서 교육을 받았던 소장학자들에 의해 일부 간직되었다. 그들은 문헉고증사학의 문제점을 인식하고는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학계에서의 위치가 미약했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하나의 학풍으로 결집된 것은 한국전쟁의 와중인 1952년 3월 부산에서 창립된 ‘역사학회’였다. 이는 홍이섭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여기에는 이후 사학계를 주도할 소장학자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들은 ‘학문에의 불타는 정열과 과학적인 냉철한 방법’으로 ‘한국을 위한 역사학의 재건’을 추구하였다. 홍이섭은 실증사학의 범람 속에서도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을 확립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면서 이 방면에 기념비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과학사, 해양사, 실학사, 사상사, 민족운동사 등에 전념하여 이 분야에서 개척적인 공헌을 하였다.역사학회 역시 미국의 재정적 지원에 의해 성장하였다. 그 기관지인 는 미국공보원과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미국공보원에서는 학보의 성격이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국사중심의 계몽적 잡지이기를 원했지만, 역사학회에서는 를 순수한 학술잡지도 발간하였다. 또한 역사학회는 옌칭연구소의 연구비 지원에 힘입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끼친 중국의 영향’이라는 주제로 공동연구(.
    인문/어학| 2006.11.29| 22페이지| 1,500원| 조회(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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