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우리가 흔히 포클랜드전쟁(The Forklands War)이라 부르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전쟁은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전쟁(The Malvinas War)이라 부른다. 아르헨티나에서 남동쪽으로 500여 km 떨어져 있고 영국으로부터 약 13000km 떨어진, 영국이 점유하고 있는 약200여개의 군도를 영국에서는 포클랜드 제도라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제도라고 부른다. 전쟁은 흔히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 전쟁을 필사적으로 막은 승자인 영국의 입장에서 대부분 이 전쟁을 포클랜드 전쟁이라 부른다. 1982년 3월부터 6월까지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두고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싸운 이 전쟁의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의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다.포클랜드 군도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로만 살펴보면 아르헨티나의 영토일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국이 어떻게 이 군도를 점유하게 되었는지, 아르헨티나는 왜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까지 일으켰는지, 그리고 영국은 필사적으로 왜 이 섬을 지키려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문제가 영국의 제국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 분쟁을 통해서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발생한 독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아울러 생각해 보기로 한다.Ⅱ이 포클랜드 섬을 어느 나라 사람이 발견했는가는 논란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6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으로 구성된 마젤란 탐험대가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서는 또 자기들 나름대로 16세기 말 영국의 항해사 John Davis가 최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영국에서 만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는 John Davis가 최초 발견자로 올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둘 다 문서로 확인된 기록은 아니다. 그러니 누구 말이 맞는지 알 길이 없고 어쨌든 각자 자기 나라 역사 시간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 섬에 정착해서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아이러 사람이이라고 한다. 1764년에 Port Louis에 프랑스 사람 Antoine de Bougainville 이 정착하면서 프랑스 식민지로 주장하는데, 스페인의 거센 반발을 초래한다. 그 후 프랑스의 생 말로 항에서 떠난 어부들이 주로 정착하게 된다. 다음해인 1765년, 영국인 존 바이런은 북쪽 해안을 탐험하며 서포클랜드의 Saunders Island에 상륙한다. 그리고는 바로 Port Egmont로 명명하고 영국 섬이라고 주장한다. 1766년에는 영국인 존 맥브리드가 그곳에 정착하며 식민지를 건설하고 Port Louis에 있던 프랑스 사람들을 몰아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Bougainville은 스페인에게 그 소유권을 팔아버린 후였다. ) 당시 남미의 여러 지역에서 그러하듯이 이 군도를 두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다툼이 치열한 양상을 보이게 될 가능성이 나타난다. 어쨌든 프랑스로부터 소유권을 산 스페인이 이 제도를 식민지화한다. 당시 식민지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관리관을 파견해서 19세기 초까지 약 50여년정도 이 섬을 통치한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 이 군도의 향방을 다시 한 번 바꿔놓게 된다. 19세기 초 유럽은 나폴레옹이 패권을 장악하던 시기였다. 스페인도 또한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하고 그 힘을 크게 잃어버린다. 이 시기를 틈타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한 것이다.1816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제도가 스페인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 지역을 계승하기 위해 1820년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공식 선포한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828년, 아르헨티나는 최초의 아르헨티나 정착민들을 섬에 이주시키고, 도지사에 해당되는 정부관료 그리고 주둔군을 파견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수순(手順)을 밟은 것으로 큰 문제가 없다. 독립국으로서 자국의 영토를 확보하는 당연한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이 군도를 소유했었던 스페인도 아닌 영국이 갑자기 이에 반발하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다.아르헨티나인들이 포클랜드에년, 영국은 섬을 군사력으로 빼앗아 아르헨티나 거주민들과 관료들을 모두 강제로 아르헨티나로 되돌려 보낸다. 양국 최초의 충돌이다. 이후, 영국은 천 명 이상의 자국민들을 이주시킨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아르헨티나로서는, 당연히 스페인으로부터 승계했다고 생각했던 자기들 앞 바다의 섬을 졸지에 영국에 빼앗긴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초 정착자였던 프랑스인들로부터 섬의 소유권을 샀던 스페인을 계승한 아르헨티나가 이 섬의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당시 스페인에게 아무 말 없이 돌아섰던 영국이 갑자기 이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제국주의, 패권주의의 발로(發露)이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아르헨티나는 자신의 영토를 빼앗아간 영국에 왜 대항하지 못했을까? 이제 갓 독립한 신생국가가 해가 지지 않는 빅토리아 여왕 시기의 대영제국에 정면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힘이 약해서 영국에게 아르헨티나로서는 힘이 약해 자신의 땅을 빼앗겼다 생각했으니 상당히 억울했을 것이다. 이 작은 섬이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외세에 저항하는 국가 자주성의 상징이 된 역사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게 포클랜드는, 일본우익들이 독도 소유를 주장해 가끔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격정적이고 극단적 감정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섬이다. 독도는 우리가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지만, 포클랜드는 아직도 영국이 차지하고 있으니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영국은 본격적으로 포클랜드를 개발하기 시작하고 1842년, 영국령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1845년 Port Stanley 가 건설되고 이때부터 영국은 오랜 기간의 실효적 지배를 주장하게 된다. ) 아르헨티나는 그 이후로 150여년을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게 되는데, 2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국가들의 독립과 영토 반환이란 세계적 추세에 힘을 얻어 1964년 UN의 탈식민지 위원회에 이 포클랜드 반환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게 되고 1965년 UN으로부터 양국은 평 그 이후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양국은 17년간 계속해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그렇다면 영국은 왜 이렇게 자국과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의 작은 섬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첫째로, 앞으로 반드시 터지게 될 남극대륙의 영유권 문제와 근처에 매장되어 있는 해저 유전 때문이다. 19세기 영국 제국주의와 식민정책에 경제적인 이유가 많이 작용했듯이 현대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 지역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둘째로, 영국은 이미 식민지로 독립한 여러 영연방 국가들 말고도 직접 통치하는 여러 속령들이 있다. 그 중에서 스페인 최남단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한 지브롤터와 같은 곳은 스페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만약 이 포클랜드를 아르헨티나에게 내어주게 된다면 영국 외교의 취약성을 드러내어서 지브롤터에 대한 스페인의 영유권 주장뿐만 아니라 다른 속령들까지 독립을 선언하고 나설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당시 대처 총리의 보수당 정부는 낡은 영광의 유산인 포클랜드 탈환을 국위를 높이고 보수정권에 힘을 보탤 호기로 보았다. 이에 따라 여러 중재안을 뿌리치고 대규모 원정함대를 띄웠다. 국민의 55%도 여론조사에서 “필요하다면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섬을 수복해야 한다.” 고 답했다. ) 정부와 국민 모두 이 섬을 아르헨티나에게 내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이는 아직도 영국이 제국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강하게 주는 것이다.Ⅲ일본의 보수 우익들은 줄기차게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오고 있다. 포클랜드 분쟁을 통해서 우리가 이들에 대해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일본과 영국은 19세기부터 20세기 까지 영토를 확장하려는 제국주의적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포클랜드 분쟁과 독도 문제도 이러한 유사점을 바탕으로 한번 생각해보자. 먼저 왜 아르헨티나가 1982년이라는 시기에 이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는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이 포클랜드 군도가 영국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 바로 1833년이다. 50년간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150년이란 세월은 국제적 관례로 볼 때 지금의 통치자(영국)가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받는 하나의 기준으로 인정받게 되므로 꼭 저지해야 했다는 것이다. ) 아르헨티나가 그동안 이 섬을 탈환하기 위해 꾸준히 외교적 노력을 벌여왔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군사적 행동을 통해서라도 막아야만 했던 것이다.사실, 포클랜드가 아르헨티나의 영토이어야 하는 지리적, 역사적 근거는 충분했고 지금도 충분하다. 또 자신들 스스로가 설득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명분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외교적, 군사적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현재 이 섬은 영국 점유상태이다. 물론 아직도 아르헨티나는 이 지역을 포기할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영국은 아르헨티나가 요구하는 회담자체를 무시하고 있으므로 다시 분쟁이 이러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결국, 아르헨티나가 이 지역을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군사력과 외교력이 영국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이 이 지역을 150년이상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독도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한다는 것이다.만약에 일본이 종전 후 계속해서 독도를 일본이 차지하면서 일본인들을 거주시키고 자위대를 배치하고 실효적으로 지금까지 점유하고 있다면 우리가 삼국사기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했다고 분노한다고 해서 우리영토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도 나름대로 자신들이 실효적으로 점유했다고 주장할 것이고, 1905년 국제법이 요구하는 절차에 따라 '다케시마'라 고시했다고 할 것이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일본영토를 되찾았는데 독도도 그때 찾았어야 했던 영토라고 떠들 것이다. ) 그리고 전 세계의 유명 지도에 동해를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하도록 만들고 있는 일본은 향후 국제 사법재판소로 이 문제를 끌고 가서 정치적, 외교적 쟁점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보다 외교적, 경제적, 군사적 능것이다.
20세기 미국소설 개관20세기 미국소설은 자연주의(Naturalism)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자연주의란 비관적 결정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자연계가 중력의 법칙과 같은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듯이 인간도 유전과 환경의 산물이며 인간사도 의학이나 과학 연구처럼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의이다. 자연주의의 사상적 기초는 Herbert Spencer(1820-1903)의 Social Darwinism이다. Spencer는 Lamarck와 Darwin의 생물학에서 배운 바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여 광범한 종합적 사상 체계를 수립했다. 그는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생물처럼 사회도 단일ㆍ동질적 상태에서 복잡ㆍ이질적 상태로 진보하며. 끝내는 완전한 상태까지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사회관의 토대를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 두었다. 미국문학의 황금기인 20세기 미국의 자연주의 문학은 Stephen Crane, Frank Norris, Jack London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Theodore Dreiser가 완성하게 된다. Theodore Dreiser(1871-1945)는 인간의 행동이 `화학작용'이나 `화학적 필연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고서 작중인물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나 사건에 압도당하는 과정을 그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생존경쟁의 승자가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약자를 정복하는 과정을 예시하려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Sister Carrie(1900)와 An American Tragedy(1925)가 있다.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Henry James의 소설 기법을 답습하는 일군의 여류작가들이 자연주의 작가들과 대조적인 문학을 내놓았는데 이를 Genteel Realism이라 부른다. 그들은 자연주의 작가와 달리 노골적인 묘사나 음산한 비관주의를 지양하고 인생을 아담하게 그리고자 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들은 문화의 오랜 전통을 존중하고, 과격한 것과 조잡한 것을 기피하며, 이지와 교양을 지키며, 작품에 있어서는 섬세한 예술적 완성을 목들은 또한 `점잖은 전통'을 지키고, 사회의 추악한 면의 폭로, 노골적인 성적 묘사, 종교에 대한 비난, 비관주의적 태도 등을 삼가했다. 이 경향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가로는 Edith Wharton(1862-1937), Anne Douglas Edgwick(1873-1935) 등이 있다.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되자 미국의 많은 청년들이 자진하여 참전하였는데, Ernest Hemingway는 야전위생대에 들어가 유럽으로 건너갔고, F. Scott Fitzgerald는 미국 내의 군부대에 잔류하고 있었고, William Faulkner는 캐나다에 있었다. 그들은 유럽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경험과 모험을 찾아서 유럽의 전장터로 갔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살육(殺戮)이요, 죽음이며, 중상(中傷)이며, 인류 문화의 파괴였다. 심신양면으로 타격을 받은 그들은 전쟁이 끝나자 환멸과 절망 속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미국의 1920년대는 전쟁에서 풀린 시대로 호경기의 시대이며, "Jazz Age"라고 불리는 향락적인 기분의 시대였다.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대부분의 문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유럽문화에 집착하여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소위 국외추방자(expatriate) 생활을 했다. 이 가운데 프랑스 파리에 모여 Gertrude Stein 여사의 살롱에 출입한 자들을 일컬어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한다. 그들은 전쟁에 의하여 종교도, 도덕도, 인간적 사랑도 모두 빼앗긴 사람들이며, 그러한 환멸 속에 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작가로는 Fitzgerald, Hemingway, 그리고 Faulkner를 꼽을 수 있다. F. S. Fitzerald(1896-1940의 주요 작품으로는 This Side of Paradise(1920), The Beautiful and the Damned(1921), The Grey(1925), Tender Is the Night(1934), The Last Typoon(1941) 등이 있다. 또한 E. Hemingway(1899-1961)의 주요 작품으로는 The Sun Also Rises(1926), A Farewell to Arms(1929), To Have and Have Not(1937), For Whom the Bell Tolls(1940), 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1950), The Old Man and the Sea(1952) 등이 있다. 그리고 Hemingway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는 William Faulkner(1897-1962)의 주요 작품으로는 The Sound and the Fury(1929), The Sanctuary(1931), Light in August(1932), Intruder in the Dust(1948), Requiem for a Nun(1951), A Fable(1954), The Town(1957) 등이 있다.1930년대는 1929년의 경제대공황 파동과 더불어 진행된다. 그리고 문학사적인 면에서는 1920년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 나타나게 된다. 경제공황으로 인한 생활의 불안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제도의 반성과 새로운 사회건설의 요구를 초래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문학은 한층 사회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다. 1930년대의 미국 문학은 사회성을 가진 행동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회성은 국민의 생활 불안에서 생기는 사회주의의 요구와 휴머니즘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일찍이 없었던 활력을 띠어 가면서 선전ㆍ실천의 문학으로 전락됨이 없이 문학의 참된 생명력을 지니고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작가는 Thomas Wolfe(1900-1938), John Steinbeck(1902-1968), Pearl Buck(1892-1973), Magaret Mitchell(1900-1949) 등이다. Steinbeck의 주요 작품으로는 The Cup of Go Tortilla Flat(1935), In Dubious Battle(1936), Of Mice and Men(1937), The Grapes of Wrath(1939), The Wayward Bus(1947), The Pearl(1948), East of Eden(1953) 등이 있다.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문단에 보도문학을 꽃피웠다. 그것은 전선으로부터의 잡지ㆍ신문의 특파원 보도이며, 기록문학으로서 특색을 발휘했다. 또한 저절로 기자의 개인적인 명성과 독자와의 친밀감을 얻어 하나의 문학적인 존재를 얻게 된 것이다. 후에 보도문학은 전쟁문학으로 성장하게 된다. 결국 대전 후의 미국문학은 전쟁문학을 선봉으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다. 전쟁문학의 특징은 기록성이며, 논픽션의 유행을 촉진했다. 전쟁문학으로 압도적인 인기를 모은 작품으로는 Norman Mailer(1923- )의 The Naked and the Dead와 James Jones(1921-78)의 From Here to Eternity를 들 수 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문단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은 으로 알려진 유태계 작가들과 흑인 작가들의 문단 진출이다.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민족적인 불안정한 위치는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현대인 모두의 문제로 승화된다. 뿌리깊은 인종적 편견에 의해 그들이 직면하게 되는 소외감이나 공포가 순응 속에 녹아들면서 밑바닥에서는 심한 고독을 느끼고 있는 많은 대중, "고독한 군중"의 그것과 쉽게 직결되는 것이다.대표적인 유태계 작가로는 Saul Bellow(1915- ), Bernard Malamud(1914- ), J. D. Salinger(1919- ), John Updike(1932- ), Philip Roth (1933- ) 등을 꼽을 수 있다. Saul Bellow의 주요 작품으로는 Dangling Man(1944), The Victim(1947), The Adventures of Augie March(1953), Seize the ), Henderson the Rain King(1959), Herzog(1964), Mr. Sammler's Planet(1970) 등이 있다. Bernard Malamud의 주요 작품으로는 The Natural(1952), The Assistant(1957), The Magic Barrel(1958), Idiots First(1963), A New Life(1961), The Fixer(1966), Pictures of Fidelman(1969), The Tenants(1971) 등이 있다. 그리고 J. D. Salinger의 대표작은 Catcher in the Rye(1951)이고, Updike의 대표작은 삼부작 Rabit, Run; Rabit Redux; Rabbit Is Rich(1960)이며, Philip Roth의 대표작은 Goodbye, Columbus(1959)이다.한편, 대표적인 흑인 작가로는 Ralph Ellison(1914-1994)과 James Baldwin(1924- ) 등을 꼽을 수 있다. Ellison의 대표작은 Invisible Man(1952)이고, Baldwin의 대표작은 Another Country(1962)이다.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에 걸쳐 New York의 Greenwich Village 및 San Francisco의 Northbeach에 등장한 일군의 작가ㆍ시인들을 이라 불렀으며, Allen Ginsberg의 Howl and Other Poems(1956)와 Jack Kerouac의 On The Road(1957)의 출판과 함께 이들의 활동이 문학운동으로 대두되었다. 들은 경쟁과 관리를 으뜸으로 하는 사회에 견디지 못해 방종한 생활과 활동으로 해방감을 얻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선(禪), 마약, Jazz 등을 사용한 Beat Movement는 미국사회에 대한 항의와 그곳으로부터의 이탈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이기도 했다. 문학표현으로서는 당시 지배적이던 모더니즘의 억제와 질서지향에 반발하고 내재한 자아를 무제한으로 다.
Ⅰ과학이 성서를 대신할 수 있는가? 만일 성서가 사실이라면 왜 거기에는 공룡들에 대한 언급이 없을까? 이 물음은 성서가 담고 있는 어려운 문제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리의 궁극적인 원천으로 믿고 있는 성서를 과학이 대신할 수 있을까?종교와 과학이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최근의 여러 조사결과들을 보면 기독교를 믿고 있는 서양각국의 70% 이상의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진화론을 믿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자 하나님을 동시에 믿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 속에서조차 종교와 과학은 이원성이 아니라 이분된 상태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한편에는 과학적 진리가,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적 진리가 각각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진리들이 본래적으로 다른 근원에서 나온다고 보고 있다. 즉, 지식은 과학적 진리를, 신앙은 영적인 진리의 근거를 제시한다.이 글에서는 종교와 과학을 둘러싼 대립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Ⅱ많은 세월동안 성서의 여러 문장이 지닌 의미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어떤 해석들은 과학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가 하면 다른 해석들은 성서 본문 자체에 대하여 적대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와 같이 성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우리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고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50%에 달하는 이혼율과 극도로 흉악해진 범죄들을 들 수 있다.나는 성서나 과학 둘 중 하나가 우리 삶의 목적과 그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성서와 과학이 서로 다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의 동일한 자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보편적인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본다.우주의 창조나 생명의 시작 그리고 인간의 기원과 같은 문제들을 성서와 과학은 상당히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동일한 것을 상당히 다른 관점, 혹은 다른 각도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그들의 관점이 무엇인지 파악한다면, 정밀한 과학 과 전통의 신앙은 무리 없이 공존할 수 있을 것이며, 어느 쪽이라도 그 양자를 자신의 주장 속에 무리 없이 화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중세 철학자 모세 마이모니데스에 따르면 과학과 성서사이의 갈등은 과학적 지식의 결여나 혹은 성서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생긴다. 이것은 계속 분쟁의 불씨가 된다. 과학 전문가들은 과학연구에는 성실한 지적 노력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서적 지혜는 단순히 본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획득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에 수십 년간 성서 속에 담긴 지혜를 캐는데 주력해왔던 신학자들은 대중매체에 게재된 몇 편의 기사들을통해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이면서 자신들이 과학적 발견의 타당성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가졌다고 자만한다.과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서의 생명에 대해 검토할 수 있는 바로서의 생명을 검토할 수 있는 강력함을 제공해 주고 있다. 과학자들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들을 검증하고, 그를 통해 자신들이 이론들이 지닌 착오를 교정한다. 일상적으로 과학자들의 발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창조의 장엄함을 훼손시킨다는 발상은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건전하지 못한 일이다.그러나 과학은 그것의 한계를 갖고 있고, 그러기에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역시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과학은 결코 생명의 목적, 즉, '왜(why)'에 대해서는 말해 줄 수 없다. 하지만 과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서를 이러한 생명의 목적을 탐구하기 위해 읽을 수 있다.17세기의 “과학기술혁명”이후 Technokrat라 불리는 새로운 “과학기술 엘리트 집단”의 등장과 제품생산위주의 사회로부터 정보와 지식사회로의 구조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소위 후기 산업사회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과학기술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의 “발전”이라고 불리며 나타난 결과들은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며, 오히려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이룩된 현대문명에 대하여 위기의식을 갖는 것이 20세기말 우리 인류가 처해있는 현실, 특히 자연현실에 대한 솔직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실제로 과학기술의 발전은 “성장”이라는 사회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줄곧 자연을 파괴하는데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최근에는 Gentechnik 또는 Biotechnologie라는 유전공학분야의 기술개발로 인하여 생명체 안에 있는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은 물론, 심지어는 인간의 기술로 단백질 합성을 시도하면서, 생명형성과정에 있어서 인위적인 간섭을 가능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피조물인 인간 스스로 어지럽히고 있는 실정에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핵물리학 분야의 기술개발은 곧바로 무기제조기술(Waffentechnik)로 이어져, 원자탄, 수소폭탄, 중성자탄 등 순식간에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생명체를 몰살시킬 수 있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갖는 대량 살상용 무기를 등장시켰다.이와 같은 엄청난 생태학적 재난이 예고되어지는 오늘날의 현실상황은 지난날의 과학기술에 대한 소박한 낙관적 시각이나 맹신적 시각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함께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 수정을 요청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한계와 책임”의 문제가 지구적 차원의 문제로서 윤리적 관점에서 신학과 과학을 비롯한 광범위한 영역들로 하여금 학문 간의 대화로 불러내고 있다.더욱이 과학기술의 진보가 수반하는 생명 파괴적 또는 반생명적 현실은,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생명의 거대한 연관성”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하고 있으며, 아울러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전환할 것과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의 모습 자체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이러한 맥락에서 Juergen Moltmann은 생태학적 위기를 오늘날 우리 인류가 직면해 있는 위기상황에 대한 총체적 개념으로 규정지으며, 소위 “생태학적 창조론”이란 자신의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이웃사랑의 지평을 확대하여, 인간과 인간사이의 연대를 넘어선,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와도 같은 피조물로서 같은 생명적 차원에의 연대를 이루는 소위 “창조의 사귐”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Hans Kueng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위기상황을 극복할 윤리로서 “세계윤리”를 제시하면서 과거에 있어서 “발전”이라고 불려지며 나타났던 것들이란 본질적으로는 “가치파괴”였다고 규정지으며, 앞으로의 개혁이나 성장이나 발전은 “가치파괴”가 아닌 “가치전환”을 지향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Ⅰ지난 7월 1일 북한과 중국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는 것을 전후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인한 한중간에 첨예한 대립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중국의 언론은 일제히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나섰고 나아가 고조선사와 발해사까지도 한국의 역사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을 통해 그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우한 작업을 진행한 것은 1996년부터라고 알려졌다.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동북문제를 국가의 핵심연구과제로 지정하여 개발연구 작업을 준비한 중국은 2002년 국책프로젝트 동북공정 선포식을 통해 5년간 약 3조원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고구려를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또 고조선을 부정하고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평양도 원래부터 중국영토였다는 식의 주장까지 기존에 한반도 역사를 통째로 뒤집는 주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한 고구려 유적이 집중된 지안등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작업도 이미 완료한 상태이다.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것인가? 학계 일각에서는 첫째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로써 중국내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에 대한 동요를 막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를 위해 중국은 동북공정 이전에 서북공정을 통해 티벳, 위구르, 신장자치구에 대한 다른 소수민족과 관련된 여사문제는 이미 해결한 상태라는 것이다. 둘째로, 지금의 조선족 자치구인 간도지역등 한반도 통일 이후 생길 수 있는 분쟁에 대비한 포석이라는 주장이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 지역에 대한 영유권 확보를 염두에 둔 한반도에 대한 패권주의적 전략이 드러난 것으로 단순히 역사문제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현재 우리 외교부에서는 강력한 대응 방침을 밝힌 상황이다.이 글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한 고구려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역사인식에 대한 문제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중국측의 주장을 조목조목라고 생각한다.Ⅱ중국측은 고구려 역사는 물론 고조선사도 중국역사에 포함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단군신화는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문화의 반영이며, 기자조선은 상주사(商周史)의 일부로서 은(殷)나라의 후예가 조선반도에 세운 지방정권이다. 위만조선 역시 전한의 외신(外臣)으로 속국이었다.” 즉 고조선사도 중국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고조선은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독자적 문화권이다. 계통과 문화가 다른 고대종족을 ‘고민족(古民族)’이란 개념으로 모두 중국사에 포함하는 것은 문제가 크다. 단군신화 중 곰 숭배신앙은 중국신화와의 상관성을 찾을 수 없다. ‘기자동래설’은 이미 한국학계의 연구노력을 통해 허구라는 것이 입증됐다. 위만정권이 ‘외신’이라 하더라도 이는 중국의 내적통치질서에 편입된 것이 아니었다. 고고학적으로도 지석묘와 비파형 동검문화로 대표되는 고조선 지역의 독자적 문화내용은 중국의 청동기문화와는 확연히 구별된다.중국이 주장하는 역사인식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고구려가 중국에서 발생한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민족의 원류는 서한(西漢=전한)시대 현도군 고구려현 경내의 변강 민족인 부여족 일파를 기반으로 예맥족(濊貊族)·한족(漢族)·선비족(鮮卑族)·숙신인(肅愼人) 등이 흘러들어 이들 민족이 점차 융합된 것이다.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지배는 그 연원이 오래됐는데 ‘일주서(逸周書)’ 왕회해편(王會解篇)에 나오는 고이(高夷)라는 인물은 고구려의 선조였고, 이는 서주(西周) 때부터 중국과 신속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그러나 예맥족은 본래 한반도·만주 일대 거주하였다. ‘예맥’이란 명칭은 선진(先秦) 시기부터 요하 동쪽에 거주하며 농경을 영위하던 예족(濊族) 일반에 대한 범칭이다. ‘예’와 결부되지 않은 ‘맥(貊)’은 중국 북방의 족속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들과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집단을 직접 연결시킬 수 없다. 고구려를 이룬 주민집단은 본래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예맥족의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2세기 후반부가 본래부터 중국의 고유영토였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일주서’의 ‘고이’라는 인물을 고구려의 조상으로 설정하지만 이는 엄정한 사료비판조차 결여된 허구에 불과하다. 주(周)나라의 역사를 서술했다는 ‘일주서’는 대부분 전국시대 이후에 씌어진 믿을 수 없는 사료이고, 고구려의 ‘고(高)’자는 본래의 족속 명칭엔 없다가 나중에 첨가된 글자이기 때문이다.중국측의 패권주의적 입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평양천도 이후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중국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중국 강역 내부에 있던 고구려사의 정치·문화 중심이 이동된 것일 뿐 민족의 속성이나 정권의 성격이 바뀐 것은 아니므로 결국 중국사의 지방정권으로 해석해야 한다.”이는 중국이 현재의 정치적 목적 위해 자의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학계는 1980년대 이후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의해 ‘중국의 현재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여기고 있다. 이 논리에 의하면 평양 천도(서기 427) 이후의 고구려사는 한국사가 돼야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양도 과거에는 고대 중국의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로 포함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이댔다. 이는 결국 현재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근거를 스스로 폐기한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현재 중국 영토에서 활동했던 모든 민족이 중국 민족’이라는 중국측의 논리는 근대 이후 형성된 ‘국경’ 개념을 전근대 시기까지 소급해 현재의 영토 내의 모든 민족의 귀속권을 일방적으로 강탈한 영토지상주의 역사관이며, 역사적 사실이나 논리적 정합성에 근거한 역사관이라기보다는 고대민족의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배타적 통할권을 매개로 국가적 힘의 논리를 앞세운 문화패권주의다.고조선이 중국 역대 왕조에 ‘신하’로 자처했다는 주장도 중국측은 하고 있다.“고구려는 줄곧 중국 역대 왕조와 신속(臣屬)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그 관계를 끊고 중국 밖있었다.”그러나 책봉·조공은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형식일 뿐이다. 고구려왕이 ‘책봉’을 받았다는 것을 중원 정권을 대신해 통치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아선 곤란하다. 남북조시대에 중국 세력이 분열돼 주변 국가에 대한 규제력이 약화된 상황에선 책봉·조공은 실질적으로 종속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여러 왕조가 주변국과 갖는 외교관계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고구려와 중국 왕조들은 정치적 정세에 의해 여러 차례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고구려가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더 이상 현도군 치소(治所)에 오지 않았다’는 내용은 고구려가 전한의 예속관계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남제서(南齊書)’ 고려전에도 “고구려는 강성하여 명을 따르지 않는다.”라고 기록돼 ‘신속’과는 거리가 멀었던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고구려는 여러 차례 북위 황제의 조서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남조의 송(宋)과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기도 했다.‘광개토대왕비’나 ‘중원 고구려비’ 등엔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天下觀)이 보이는데, 고구려왕은 ‘대왕(大王)’ ‘태왕(太王) ‘성왕(聖王)’ 등을 자처했고,‘영락(永樂)’과 같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신라를 ‘동이(東夷)’라 칭하며 속민(屬民)으로 설정했다.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중국 및 유목민 세계와 대등하면서도 그와 다른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했던 것이다.중국측은 또한 고구려 유민들이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고구려 멸망 후 대다수의 유민들이 한족(漢族)에 흡수·융화됐다. 당시 고구려 인구는 70여만 명이었는데 당 태종과 고종 때 30만이 중원으로 이주됐다.”그러나 고구려의 자의식은 신라·발해가 계승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나라로 이주한 고구려인은 강제로 끌려간 것이었고, 당은 시종일관 고구려 유민들을 전쟁포로로 인식하면서 그에 대한 지배도 복속민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로 간 유민의 경우엔 모두 자의적인 선 이후 고구려의 자의식은 신라와 발해를 계승한 고려에서 이어졌다.중국은 고구려와 수·당 간의 70년 전쟁은 내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한다.‘고구려가 본래 한사군의 땅’이라는 당 태종의 언급은 수·당이 고구려에 대해 영토의식과 수복의식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반면 백제·신라에는 이런 영토의식이 없었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중원 통일정권이 변강 소수민족 할거세력을 통제하며 전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그러나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당사국의 국익 추구에서 비롯된 ‘국제전으로 보는 것이 옳다. ‘구당서(舊唐書)’는 당의 창업주인 고조(高祖)가 622년 고구려 영류왕에게 보낸 공문편지에 ‘이제 두 나라(고구려와 당)가 서로 화평을 통하게 되었으니(今二國通和)’라고 쓰고,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잡힌 수나라 군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한 기록을 수록했다. 고구려가 당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당한 외국 독립국가였다는 의미다.중국측이 제시하는 사료에서 드러나는 수·당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인식은 고구려·백제·신라를 모두 ‘이(夷)’로 파악하고 있어 유독 고구려만 중국의 ‘대내정책’의 관철 대상이라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고구려는 국세의 팽창 과정에서 말갈·거란·실위(室韋) 등 이민족에 대한 지배권의 관철을 꾀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독자적인 생존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5세기 중국 남북조의 북위(北魏) 정권조차 고구려가 만주와 동몽골 일대의 구이(九夷)를 제압한 독자적 세력권을 확보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결국 고구려의 대수·대당전은 고구려가 국초 이래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대륙정책’이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지배질서를 확립하려는 ‘세계정책’과 충돌한 동아시아 국제전쟁 이었다.중국측은 고려와 조선이 고구려와 상관없다는 주장도 한다. 중국측 주장은 “고구려는 멸망한 지 250년 후에 등장한 ‘왕씨고려’와 하등 계승관계가 없고, ‘왕씨고려’의 활동범위는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종교는 매우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종교를 믿고, 종교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도 종교는 어떤 문화에서든지 어떤 형태로 존재해왔다. 인류에 있어서 종교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면 개인적인 삶 속에서 종교에 대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왜 ‘종교’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을까?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고, 삶의 문제와 씨름할 수밖에 없는 근심과 걱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삶이 온갖 문제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기독교 교리의 ‘원죄론’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한’ 상태에 있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래의 상태대로 행동할 수 없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고뇌를 체험하는 것에서 사람이 깨달음으로 인도된다고 보았다. 즉 인간은 기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거나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위와 같이 어는 특정 종교에 대해 말하지 언급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우울함, 공포, 외로움, 긴장감등과 같이 원치 않는 감정에 괴로워한. 또한 전쟁, 죽음, 질병과 같은 상황을 가까이에 두고 있다. 또한 이 문제에 개인적인 힘으로 쉽게 대처하기 힘들다. 이러한 것 말고도 현실적으로 현재 나를 포함한 대학생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괴로움은 취업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자신이 전쟁터에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적의 포탄이 내 참호 안으로 마구 떨어져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종교에 대해 믿지 않고 회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재 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 상황에서 종교에 귀의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한계에 부딪혔을 때 어떤 종교를 가지려는 경향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그렇다면 실제 처음 종교는 어떻게 기원하게 되었을까? 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포와 욕구 혹은 어떤 경외감에 의해 종교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한계와 많은 관련이 있다.지금과 같이 과학 기술이 발달되기 전에 인간은 자연 현상에 대해 많은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자.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공포를 경험하고 나서 그러한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대상에 대해 의지하고, 믿으려 했을 것이다. 그들이 신이라고 믿는 대상에 대해 종교적의식도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발전하여 종교가 된 것으로 보인다.또한,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갖게 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에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과학이란 것이 없었던 선사시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이런 신비한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대상을 경외하고, 믿고 따르며, 이것이 신에 대한 숭배로까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이는 단지 하나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 종교가 나타난 것이 역사를 기록하기 전인 선사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현재 믿고 있는 대표적인 종교중의 하나인 기독교의 원죄설을 중심으로 종교의 근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나는 기독교를 믿고 있지는 않지만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어서 청교도문학에 대해 배우다가 기독교의 원죄설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기독교에서 예수의 관심사는 개인이 죽은 후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현세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둔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고뇌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원인을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 자유의지를 준 신을 배신하고, 에덴동산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낙원인 그 곳에서 추방되어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설명하는 인간과 항상 함께하는 고뇌의 원인이 되는 원죄이다.아담은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는데 악을 선택하여 신에게 등을 돌린다. 그 이후로 인간은 죄를 범하도록 신에 의해 예정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예정설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원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 신의 은총이나 은혜에 의해서 만이다. 바로 이 원죄로 인한 고통을 신의 구원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고, 세례를 받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도 기독교와 유사하게 현실에서의 고통해결을 위해 신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그렇다면 이성은 종교의 기원과 관계가 있는가? 이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가하고 있듯이 종교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다음은 인터넷 사이트인 네이버에서 인용한 이성의 정의 중에 네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성은 계시나 신앙과 대조되는 중립적 지식 능력이다. 이성은 사실에 근거한 과학적인 것이며 계시나 신앙의 초자연적, 특수적, 미신적인 것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성이 과연 종교의 기원과 관련을 맺고 있을까?우리는 성경을 읽어 보았을 때 그 안에 신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이 믿게끔 노력하려는 어떤 문구도 보이지 않는다. 즉, 성경을 지은 사람들은 신의 존재유무와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을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다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썼으며 성경을 읽고 있다.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이성에 의한 행동, 즉 합리적인 것인가? 어떤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사진을 찍거나 그 것을 실제로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와 같은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서 하나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믿고 있는 사실이 바로 증명 될 수 없다고 해서 비이성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