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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음식문화의 계급차이
    중국음식문화의 계급차이중국에는 광동 요리 전문 고급음식 체인점인 ‘순펑’이 대도시인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을 중심으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전체요리에서 애피타이저까지 코스 요리로 다 먹으면 3만 위안 정도의 돈이 듭니다. 이곳의 손님 비율은 가족단위가 30%, 비즈니스 손님이 70% 정도라고 하는데요, 중국인들은 중요한 비즈니스는 반드시 고급식당에서 하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순펑에 가서 밥을 먹는 것은 중국인들에게는 자기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순펑은 대접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체면을 세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3만위안이나 한 끼 식사비로 쓰고 먹는 것입니다. 예컨대 천만 위안짜리 비즈니스를 하면서 3만 위안을 때어 고급 요리를 함께 먹으면 다 같이 체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중국에 이러한 고급 음식점이 늘어가는 것은 사영기업가의 증가로 인한 신흥 부유층이 늘어감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영기업가는 크고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신 부유층으로 90년대 이후 중국의 발전을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빠르게 발전해가는 중국의 창업기회를 포착하여 신흥 부유층으로 떠오른 것인데요, 개혁개방 이후 폭발적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하여 ‘폭발호’라고 부른다고 합니다.성공한 사영사업가들은 돈이 없을 때는 작은 식당에서 맥주 한 병만 마셔도 족했으나, 지금은 돈이 있기에 그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중국인들은 자기 실력을 보여주길 좋아하며, 허영심도 많고, 체면에도 신경을 많이 씁니다. 설령 돈이 없어도 대접을 할 때에는 좋은 식당으로 가곤 합니다.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언제든지 좋은 식당에 가서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먹는 것은 부자가 되어야 누릴 수 있는 첫 번째로 꼽히는 것으로, 중국인에게 먹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여러분은 베이징의 특산품 카오야를 아시나요? 카오야는 북경오리 구이 요리로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국민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카오야는 어떤 오리를 사용했느냐, 어떻게 구웠나에 따라 등급이 나뉘며 껍질이 얼마나 바삭하게 구워졌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친다고 합니다.이러한 카오야의 종류는 많지만 어디서 파는 카오야인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카오야를 파는 유명한 고급 식당인 ‘전취덕’에서는 카오야 한 마리에 168위안에 팔리고 세트로 먹으면 약 280위안 이상이 나옵니다. 일반 식당에서 파는 카오야는 38위안으로 전취덕 가격의 5분의 1수준입니다. 베이징 시내 어디에서든 카오야 가판점을 쉽게 볼 수 있는데요, 이곳의 카오야 중에서 제일 싼 것은 13위안입니다. 즉 가장 싼 카오야 12마리를 사는 돈으로 전취덕의 카오야 한 마리를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전취덕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가격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값 싼 카오야 조차도 일 년에 한두 번도 먹기 힘든 하층민도 존재합니다. 하층민들은 춘절에나 먹을 수 있는 카오야를 먹을 때면 힘든 것도 잊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힘들게 번 돈으로 누리는 작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카오야는 고급과 저급이 뚜렷하게 구분되어있고, 등급에 따라 소비하는 사람들도 다릅니다. 중국인들은 그 차등을 인정합니다. 중국인들은 이를 사람마다 등급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돈 있는 사람도 있고, 돈 없는 사람도 있으니 당연히 먹는 것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층민들은 고급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낭비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급이 다르니까 당연히 누리는 수준도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베이징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도시 노동자인 민공이 있습니다. 이들은 폭발적인 건설 경기로 인한 건설 수요에 농촌의 노동력이 이주해온 임시 노동자들입니다. 베이징의 민공 수는 약 3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들은 식사를 회사에서 주는 배급으로 해결하는데요, 메뉴는 밀가루 빵 4개와 흰 쌀죽 한 그릇, 그리고 무짠지가 전부입니다. 열악하고 형편없는 음식이지만 이들은 음식을 따질 처지가 못 됩니다. 이들은 같은 식사를 매일, 심지어 10년을 넘게 먹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자신들의 생활인데 별 수 있냐며 체념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 음식을 지겨워 하지만 그들이 한 달에 받는 돈 50위안으론 식당가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이 음식만 아니면 좋겠다고 합니다. 또 그들 자신들은 고급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을 위장이 아니라며 체념합니다.계층에 따른 가는 식당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민공들은 그들이 일하는 공사현장 근처의 작은 식당조차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작은 식당의 음식 가격은 8위안이지만 이 식당은 공사 현장의 간부들이 주된 손님입니다. 하지만 민공들이 이 작은 식당에 가지 않는 것처럼 현장 간부들도 근처 아파트촌의 식당에 가지 않습니다. 그 곳은 작은 식당과 메뉴는 거의 비슷하지만 가격은 2배인 16위안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식당의 고객은 근처의 사무노동자, 즉 화이트칼라가 대부분입니다. 이렇듯 베이징의 식당은 계급에 따라 뚜렷하게 나눠집니다.
    인문/어학| 2009.02.16| 2페이지| 1,000원| 조회(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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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송미술관 답사기 - 보화각 70주년 서화대전을 다녀와서
    보화각 70주년 서화대전간송미술관에 도착하였을때 사람이 많아 깜작 놀랐다. 최근 메스컴에 의해 조선의 화원 신윤복에 대해서관심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1시간반을 기다린 끝에야 겨우 미술관에 들어가 그림을 구경할수 있었다. 미술관에는 조선시대17~18세기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혜원의 그림뿐 아니라 김정희, 심사정, 이엄등의 그림 또한 볼 수 있었다. 예술사를 한번 들었지만 아직 그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관람을 하는데 상당히 고생하였다. 2층부터관람하였는데 여러 가지 모르는 그림이 많아 힘들었다. 혜경궁 홍씨의 글씨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수업시간에 본적이 있어 반가운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었던 그림은 1층에 전시되어 있었던 신윤복의 미인도였다. 어찌나 사람들이 그 그림에서 떠나지 않았는지 그 그림을 보느라고 정말 힘들었다. 미인도를 가까이에서 구경하지 못하고 먼 발취에서 보았지만 머릿결하나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참으로 놀랐다. 그당시 조선의 여인을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 같다.이시기 작품의 특징은 조선시대 회화의 완성이라 할 수있다. 조선중기 퇴계이황과 율곡이이에 의하여 완성된 조선의 성리학이 완성되면서 그림에서도 또한 조선의 색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를 시작하여 추사에 이르기까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개인적으로 추사의 글씨가 상당히 맘에 들었다. 1층 전시실에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그림인지 글씨인지 모르는 추사의 독특한 개성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 마지막 예술가 라고 할 수있을 만큼 글씨에 나오는 독특함이 상당히 개성있는 추사의성격을 보여주는 듯하였다.정조의 글씨와 혜경궁 홍씨의 글씨도 볼수 있었는데 단아한 궁체로 써져있는 혜경궁 홍씨의 글씨는 그 당시 조선의 여인의 모습을 보는 듯 하였다. 하지만 김홍도의 그림을 한 점밖에 볼 수 없어서 상당히 아쉬웠다.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그림에서 중국을 벗어나 조선에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중 신윤복은 기생과 사대부간의 사랑을 소재로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월하정인’을 보면서 사대부와 기생들 사이에 은근한 정을 엿볼 수 있었다. 달밤에 이상한 분위기와 눈으로 이야기하는 야릇한 상황을 참으로 정감 있게 표현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당대에 최고의 예술가라 할 수 있겠다.‘심사정’과 ‘의 그림도 눈에 보였다. 사람들의 관심이 신윤복의 그림에만 쏠려있어서 제데로 본 그림은 신사정의 그림이었다. 초충도와 산수화를 잘 그렸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정선의 그림이 훨씬 잘 그린것 같았다.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은 단오풍경이었다. 가장 익숙한 그림이어서 그 그림이 기억에 오래 남는거 같다. 바위 뒤에 숨어있는 동자승들의 웬지 모를 짓궂은 웃음과 그네를 타는 여인네들의 모습 그리고 머리를 감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깊었다. 그들을 표현한 섬세한 솜씨를 실제로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그림들은 눈에 잘 안들어와도 단오풍경의 섬세한 신윤복의 솜씨는 눈에 잘 들어왔다.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에서 조선의 완성된 그림을 볼 수있다고 한다. 김홍도의 서민을그린 담백한 그림과 신윤복의 사대부와 여인들의 사랑을 그린 섬세하고 화려한 그림들은 그 당시 조선의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많은 화가들중 이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체능| 2009.02.16| 2페이지| 1,000원| 조회(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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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신체제의 성립 배경과 특징
    유신체제의성립 배경과 특징Ⅰ.머리말Ⅱ.유신체제 성립의 배경Ⅲ.유신체제의 선포와 성립Ⅳ.유신체제의 특징Ⅴ.맺음말Ⅰ.머리말유신체제란 1971년 12월 6일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에서 1972년 말 유신헌법의 제안 및 선포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조치들을 통해 성립되었으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서거까지 지속되었던 국가의 제도 변형 및 강압적인 지배체제를 일컫는다. 즉 5?16에서 3선 개헌까지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대내외적 명분 때문에 할 수 없이 유지해왔던 선거방식과 관제 동원에 의존하여 재집권을 확보해 온 권위주의적 지배의 제도적 골격, 그리고 그때까지 유지되어 온 권력 중심부가 더 이상 자신의 지배를 지탱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박정희와 그의 측근 세력에 의해 감행된 ‘궁정 쿠데타’였다.여기에서는 이러한 유신체제를 박정희 정권은 어떤 이유에서 국민들에게 강요하였고 그것이 그의 끝없는 권력욕 때문인가 아니면 정권구조의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난 것인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70년대의 한국정치를 대변하는 유신체제에 대해, 유신조치가 취해질 당시의 배경과 그 특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유신체제 성립의 배경유신선포 직전 박정희 정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원의 중대한 대내외적 도전과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첫째, 내부적으로 박 대통령의 권위와 집권세력의 헤게모니가 1971년의 양대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보듯이 야당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둘째, 외부적으로는 닉슨 독트린과 미국의 불투명한 안보제공 등 국제 정치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 심각한 한반도 안보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 두 영역의 위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1) 국제적 요인먼저 당시의 국제적 상황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한국을 둘러싼 4강 관계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미국, 소련, 일본, 중국의 4강 체제가 양극화가 아닌 다극화로 변화?발전하여 평화공존을 모색하는 이른바 해빙시대로 접어들었다모니가 약화됨으로써 미국은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였다. 그 결과 미국이 과거처럼 세계경찰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겠다는 닉슨 독트린의 선언(1969. 2. 7)과 미?중간의 수교는 냉전체제의 이완과 데탕트 체제로의 이전을 가져왔다.두 번째는 미국의 전략변화이다. 미국은 달러 위기로 해외기지 축소와 방위비 감축을 계획하게 된다. 이를 위해 동맹국에 방위비 부담을 전가하고, 핵무기를 중심으로 해군과 공군력의 현실적 전쟁 억지력을 증대시킨다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미국은 한반도 미군철수계획(2만 명 감축)을 발표하고 즉각적인 남북대화를 종요하였다. 이런 미국의 권유에 의해 1970년 8?15선언, 1971년 적십자사 중심의 남북이산가족 찾기 운동,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에 이른다.그러나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한 또 다른 이유는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긴장된 국내정치상황과 병행되고 있었던 주한미군의 부분 철수에 있었다. 이런 미국의 전략변화에 따라 당시 한국 내에는 주한미군의 부분 철수가 전면 철수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다.특히 북한과 군사적으로 정면 대치하고 있던 한국에서 주한미군 제 7사단의 철수에 이어 잔여 주한미군이 휴전선 이남으로 이동한 새로운 병력 배치는 급박한 군사적 위기감마저 초래하였다. 또한 미?중화해로 대변되는 새로운 강대국간 데탕트에 적응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 남북대화였지만 남북대화 역시 박정희 체제의 외부적 안보위협을 완화시켜주거나 감소시켜 주지는 못했다는 점이다.결국 박정희 정권은 미군의 부분철수를 받아들이되 한국의 안보가 보장되는 선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미군 철수로 약화되는 전력을 보완할 수 있도록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지원, 그리고 유사시 한국방위를 위해 미군이 재투입된다는 문서상의 약속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미간의 협상은 단지 한국군의 현대화 계획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약 10억 달러의 추가지원을 제공한다는 선에서 끝나고 말았다.2) 국내적 요인국내이데올로기를 강화하여 집권 유지에 대한 모색이 필요했던 것이다.두 번째는 1970년대 초반이 박정희 정권에게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상당히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국제수지의 지속적 악화, 경기침체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우선 박정희 정권의 물질적 기반을 동요시켰고, 또한 자본축적의 조건들을 보장받지 못함으로써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본연의 역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은 8?3조치라는 초헌법적 방안을 통해 파탄에 빠진 경제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마지막으로는 위와 같은 경제적 위기가 사회적 구조를 현재화 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하여 민중들의 생활기반을 약화시켰고 여러 민중운동이 고양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즉 1969년 이후의 경제 위기는 잠재된 계급 갈등을 분출시키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고, 도시의 근로 대중들은 1970년대 초에 이르러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와 정치참여를 위해 상당히 적극적인 방식으로 투쟁하기 시작했다.먼저 노동운동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인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같은 해 11월 25일 조선호텔 이상찬 분신시도사건, 1971년 2월 2일 한국회관 김차호의 분신기도사건, 8월 16일 신진자동차 노조원 900여명과 가족 1천여 명의 대규모 파업농성, 9월 15일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 빌딩 농성사태 등이 연속해서 일어나면서 급격히 고양되었다.또한 도시 빈민의 생존권 투쟁도 활성화 되어 1971년 6월 28일 시민아파트 주민 3천여명의 시청 앞 대규모 시위, 8월 26일 동대문 시장 상인 400여명의 철거반대 시위, 8월 31일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 등 1천여 점포상인의 철거반대 시위, 9월 27일 대구 서문시장 50여 상인의 세무서 앞 시위 등이 일어났다. 이상과 같은 노동운동, 도시 빈민운동의 활성화는 군사정권에게는 상당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을 가속화하게 되는데 이는 대선에서 김대중이 예상을 초월한 득표를 기록하게 되고 이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야당이 약진을 하여 당시 민심이 얼마나 박정희 정권과 이반되어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장기집권을 꿈꾸던 박정희에겐 실질적인 위기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고 일반 민중에겐 시련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던 셈이다.Ⅲ.유신체제의 선포와 성립10월 유신의 내용을 이루는 비상조치는 1971년 12월 6일 ‘국가 비상사태 선언’에서 나타난다.나는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자유를 수호할 대통령의 책임으로써 최근의 국제 정세와 북괴의 동향을 면밀히 분석?검토한 결과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되어 오늘 전 국민에게 이를 알리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합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백기 북쪽에 공산 마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태평무드에 젖어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의 단면을 눈 여겨 볼 때 나는 6?25사변의 전야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 내용의 핵심은 안보 제일주의였다. 그래서 ① 정부의 시책은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태세를 확립 한다 ②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만은 용납하지 않으며 또 불안요소를 배제한다 ③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야 한다 ④ 모든 국민은 안보상 책임수행에 자진 성실해야 한다 ⑤ 모든 국민은 안보위주의 새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 ⑥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정권의 안위를 위해 국가 안보라는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이어 12월 27일 여당 단독으로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박정희에게 부여하였다. 이법은 노동운동, 사회운동세력, 정치적 반대세력, 언론탄압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그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이후, 5개월이 지난 1972년 5월초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박정희 1인에게 입법 되었다. 1971년 12월의 비상사태 선언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 제정과 준비과정을 거쳐 1972년 10월 17일 비로서 박정희는 급박하나 내외 상황변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한다는 명목‘하에 ‘비상조치’를 단행하게 된다.이후부터 열흘 후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10?17 대통령 특별선언’을 ‘10월 유신’이라 부르기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1972년 10월 27일 유신체제를 뒷받침 할 헌법 개정안을 비상국무회의에 회부하여 가결시킨 후 이를 공고하였고, 이 유신개헌안은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부쳐 91.9%의 찬성을 얻고 유신헌법으로 확정되었다. 이어서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행하여졌고, 12월 23일에는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박정희가 단독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선된 박정희는 12월 27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 4공화국이 열리게 되었다. 3선 개헌 직후 유세에서 그가 ‘다시는 여러분 앞에서 표를 찍어 달라고 나서지 않겠습니다’라고 공약한 말은 거짓이 되었고,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됨으로써 국민에게 더 이상 표를 구걸할 필요도 없어진 셈이다.Ⅳ.유신체제의 특징유신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제도적 장치는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즉 3권위에 군림하는 지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쿠데타를 통해 도입한 유신헌법을 비롯한 정치제도는 기존의 의회 민주정치제도의 형식적인 기구가 부과했던 구조적인 제약을 말끔히 제거하고 자신의 개인통치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비경쟁적인 대통령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박정희의 영구집권이 가능해졌다. 이를 위해 유신 이전의 대통령 직선제를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형식적인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체했고, 또한 국민회의 대의원은 정당의 참여 없이 국민이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대통령 선거에 정당이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임기도 6년으로 연장되었고, 중임제한은 아예 철폐되었다.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선출된 대통였다.
    사회과학| 2009.02.16| 6페이지| 1,500원| 조회(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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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초기의 토지제도
    중세초기의 토지제도1. 新羅統一其 토지제도의 개편1) 전후의 토지, 농업재건과 녹읍제의 폐지6세기 초엽 집권체제가 확장되고 귀족간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사회모순 또한 증가하고 있었다. 삼국모두 사정이 비슷하였는데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영역의 확장, 인구의 확보였다. 이것은 삼국간의 전쟁을 야기했고, 이러한 가운데 통일된 신라의 당면한 문제는 인구의 감소와 유이, 농토의 방대한 황폐였다.신라의 두 가지 과제는 첫째, 인구의 감소와 농업의 황폐화를 재건하고 복구하는 작업이며 두 번째는 왕조통합 및 영역확장과 백성의 증대에 따라 국가가구 및 제도 그리고 신분질서를 적절히 재편하는 것이었다. 산업의 재건은 각종 권농책으로 추진되었는데 이것은 장기간 대전란이 삼국의 영역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나라를 재조직하고 구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민심수습과 민인안정은 신라가 당군과의 전투에서 고구려, 백제유민들의 힘에 의존하고 당군격퇴 후 재건사업에서는 이들의 노력이 필요하였다는 것에 의한다.신라는 이러한 이유에서 안도책의 골자로써 고구려, 백제의 유민을 그대로 신라의 민인으로 삼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농지의 개척, 개간과 농업의 개량은 농업을 증진시키고자 하는데 목적이 같지만 전자는 물력과 인력이 다수 투하되어야 하기에 국가기구 및 귀족층에 의해 주로 추진되었고 농민은 단순히 노동력의 일환으로 참여하였을 것이다. 후자는 생산자인 농민에 직접 의거하였을 것이다. 신라는 통일 후 영토에 대한 제도정비에 나섰고 9주 5소경 제도는 지방제도 정비와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신라의 토지개척, 개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방제도정비와 더불어 여러 주에 민을 이주시켰다. 이것 또한 토지개간에 필요한 노동력의 확보가 주된 이유였다. 이러한 정책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성과가 나타나게 된다. 또한 저수지의 보수, 신축 및 하천의 제방 공사 또한 신라조정이 지속하여 추진하던 사업이었다. 이것은 신라가 농업생산 가운데서도 미곡생산에 각별히 노력하였다는 증거이다. 즉 수전과 저수지의 토지 소유이다. 귀족의 토지소유는 삼국간의 전쟁 시에는 불균등이 심하였다. 녹읍은 통일 전쟁기로 다가갈수록 관료제와 병행하여 그 수수, 환급, 수취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전쟁 후에는 여러 폐단이 있었을 것이다.귀족관료사이의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격차는 심각하였고 통일국가의 운영과 재편성에서는 해결해야 될 문제였다. 687년 신라는 문무관료 전체를 대상으로 해서 차등을 두어 田土를 지급하였다. 689년에는 녹읍을 폐지하고 귀족관료에 대한 공무대우를 녹봉으로 단일화 하였다.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관료에 대한 대우를 일원화 하여 녹봉관료로 있게 하였고 이는 귀족세력들을 문무관의 관료로써 대우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2) 양전사업과 수취제도신라는 농업과 농지가 개간되자 이것에 대한 적절한 파악에 들어가게 된다. 각 주군에 대한 양전의 거행과 量田帳籍의 구비 및 중앙정부의 세원파악과 조세안의 책정 그리고 그 배정의 균등성에 좌우되는 것이었다. 신문왕 5년 9주 5소경 제도의 완비와 이를 기틀로 한 군현제의 정비, 재편은 단지 행정구역의 분간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양전은 군현을 단위로 시행하되 군현 안에서는 촌락별로 시행하고 田品은 이를 전제로 토질의 비척을 상중하로 나누어 총 9등급으로 작정하여 배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전은 현실상 수세가 여전히 고을의 토호 및 토착성을 지닌 귀족, 세가의 힘을 승인하고 이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형편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신라의 조세제도는 組, 調, 役으로서 삼국시기와 기본내역이 같았다. 組의 수취는 1결당 30두가 기준이었다. 그리고 실제 수조는 量田尺을 기준으로 하되 지역차를 전제하고 상중하로 설정한 전품에 따라 차등을 두어 집행하였을 것이다. 調는 호를 대상으로 하되 布를 징세물로 하는 세였다. 이는 포를 기본납부물로 하였지만 지방특산물인 諸貢物도 포함되었다. 역은 다른 것과는 달리 인신을 직접 부과대산으로 하는 부세였다. 역에는 직역과 요역이 있으며 직역은 군역등이 속하며 요역은 각종 역력에 무상 동원되는 것이었다. 녹읍제의 복건을 들 수 있는데 먼저 정전제를 살펴보면 농민의 토지소유를 안정시켜 주어야 하는 일은 어느 시기에나 국사의 중대한 과제 중에 하나였다. 신분제 사회에서 토지소유에서 탈락하고 소외되는 무전농민, 빈농의 증대는 대토지 소유가 신분, 권력과 비례하여 발달하는데 수반하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신라가 이것을 막고 민들을 안정적으로 안착시키려 하려면 경작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신라에서 택한 정책은 이들로 하여금 황무지나 진황지를 개간하여 그 토지의 소유자가 되거나 대개간사업을 수립하고 이들을 모집하거나 신 개척지에 기거하여 개간사업을 추진하거나 하되 그 방식은 둔전식 개발에 정전, 균전의 형식을 띤 균등한 농지 배분을 함으로써 자영소농으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자영소농과 이들의 신소유농지에 세역을 책정하여 부여함으로써 농민을 토지와 한데 묶어 그 안착을 강제하고 징세의 원활을 꾀하는 방도를 취하는 것이었다. 성덕왕 21년 실시된 정전제는 이러한 사업으로 추진된 것이다. 정전제 아래에서 토지는 정전이고 농민은 정전농민이었다. 정전이란 호칭은 국가가 농민소유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표준으로 하여 세역을 부과하고 이 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는 토지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표시였다. 신라는 이 정전을 가지고 각종 용도별로 토지를 배정하고 문무관료에게 운영비용 내지 봉록의 대가로 분급함으로써 토지, 농민에 대한 지배와 수취를 수조상에서 보장하였다.정전제의 실시를 통해 신라는 세역 특히 직역, 역역의 담당자를 토지에 긴박시켜 그 확보 및 조달의 안정과 지속을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세의 징수에서 국가권력이 정전을 통해 직접파악의 계기와 작용이 한층 깊어지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그 강도도 증대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소유지가 토지겸병에 휩쓸리는 것을 모면하고 감소시킬 수 있었다.정전제의 시행에 수반하여 다른 토지 문제가 부상하였는데 그것은 녹읍제에 관한 것이었다. 신문왕대에 폐지한 녹읍제도는 귀족관료의 기본의사에 반하는 시책이었다. 녹관료에 대한 그 봉건으로서의 세가의 처지를 부정한 조치였다. 귀족관료들의 반발에 의해 결국 경덕왕16년 인 757년 3월 녹읍제는 다시 설치 되게 된다. 하지만 폐지되기 전과 복설된 이후의 녹읍에는 차이가 있다. 녹읍이 혁파되었던 기간인 근 70여년 사이에 토지제도 내지 토지소유에서 발행하던 여러 문제나 분쟁도 정리, 수습되었을 것이다. 또한 과거의 녹읍에서 있었던 지배대상이나 수취관계상의 연고나 관습도 소멸되고 청산되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양전제가 조정되고 관품 또한 재조정 되었으며 정전제의 실시로 토지와 농민과 세역이 일제히 연계된 토지조세체계가 수립되었다. 이것은 녹읍제가 복구된 그해 12월 신라는 주군현의 명칭을 개정하고 소속 소경 군현을 재배정 하는 한편 1년 뒤 각급 중앙관제를 다시 정비하고 있다.녹읍의 지급은 중앙, 지방관이 소지한 관등과 골품을 참작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차등있게 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점유기간은 본인당대에 한하고 사망이나 중대범죄의 경우 국가에서 회수 또는 몰수함이 원칙이었을 것이다. 녹읍의 시행과 혁파 그리고 복설은 소유권과 수조권의 병존, 조화, 대립의 형성과정이며 진전과정이었다. 녹읍제가 소유지, 소유권의 성장에 입각한 지주전호제의 보급과 병행하고 있었음과 상관하여 전재되는 양상이었다.2. 신라하대의 토지문제와 집권체제의 파국1) 전장의 발달과 지주전호제의 확산통일 후 신라의 토지와 인구의 확대는 삼국기의 신라를 기준으로 하면 비할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국유지나 관유지는 신라의 국유지로 귀속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왕실소유지의 증가를 말한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귀족소유지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는 통일이전부터 서서히 나타나고 있던 중앙귀족의 낙향이나 지방 진출이 통일이후에도 더욱 급속히 증가하는 데 따른 것이었다. 귀족관료의 지방 진출은 지방행정이 안정되어가고 물자유종이 원활해지면서 대토지 소유를 조성함에 따라 현저해졌다. 대귀족으로써 지방에 웅거하고 있는 이들은 상당하였다. 이들의 토지소유규모 역시 전국 여러 고을 여러 촌락에 산재 하였다. 전장의 운영에 대해서는 노비농민이나 부곡농민의 노동에 의존하거나 借耕농민의 사역에 의거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통일 후에 전쟁이 종식되면서 대량의 노비공급이 두절되었고 새로운 농토의 개척과 개간은 활발해지고 토지매득 또한 성행하고 있어서 전장주는 자기 농지에 빈농, 무전농을 모집, 안착시키는 상태에서 이들에게 借耕시켜 현물지대를 징수하는 방식이 전장경영에 유리하였다. 이러한 지주전호제의 확산은 신라하대에 한층 성행하여 전장경영의 주요 형태로 자리 잡았다. 전장경영을 주도하던 층은 주로 왕실, 귀족관료, 사원들이었지만 이 경영형태를 차경에 의한 전호경영으로 전환하게끔 생산력을 증대시켜 그 기반을 형성한 것은 농민층의 노력과 성장이었다.하지만 대토지의 소유, 토지겸병은 원리상 토지의 사적 소유에 입각하여 진행되는 사태 였다. 신라하대로 넘어 오면서 그리고 그 말기로 가면서 귀족관료적 토지소유, 지주적 토지소유는 팽창하고 이는 갈수록 농민의 토지소유를 감소시키고 축소시켜 나갔다. 농민의 몰락과 빈민의 증가는 각 지역에서 성장하는 지주층의 독립적인 정치적 세력화와 맞물려 집권왕조국가의 체제를 동요시켜 갔다.2) 녹읍.정전의 退毁와 조세제도의 마비전장의 발달과 지주전호제의 확산은 지주의 부상과 소농민의 빈농, 무전농으로의 몰락을 심화시킴으로써 토지의 소유, 경영문제를 증대시키고 그 모순을 확장시켰다. 이로 인해 녹읍제, 정전제등 신라의 토지제도 운영에 차질이 생기고 조세제도가 마비되고 혼란이 야기되었다. 녹읍제와 정전제는 수조권의 발급, 세역의 책정 등 조세제도에 입각하여 농민 및 그 소우 경각지를 수취하고 파악하는 제도였다. 녹읍은 관직이 승급함에 따라 절급양이 증가하는 것이어서 여기에 차질이 없어야 하고 사망한 관료의 녹읍은 그때그때 회수하고 새로 들어오는 관료에 대해서 새로 절급하여야 운영이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귀족관료제에 커다란 동요는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신라하대로 넘어오면서 진골귀족간의 왕위를 둘러싼 대규모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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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고대 토지제도사
    1.삼국기 토지제도의 발달1)농업증진과 신분제의 재편삼국기 국가체제의 정비는 크게 두 방향에서 추진되어 나갔다. 하나는 중앙권력조직을 연맹제적 전통에서 더 진전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추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방통치조직을 후국적인 전통과 기반에서 군현제적으로 전화시켜 나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가의 통주하에 있던 읍락 및 읍락민을 국왕·국가의 군현 및 민인으로 파악하여 갈 수 있었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수습하면서 이 방향 위에서 국가의 집권력을 강화해 가려면 생산과 농민을 민생안정의 차원에서 보호하며 제가층·귀족층을 관료제하의 신료로 전환시키는 절차가 뒤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가체제의 정비는 영토확장과 인구확대를 추구하면서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대내적으로 끊임없는 전쟁을 동반하고 이 장기화하는 전쟁에서 패퇴하지 않고 승리하려면 물력과 인력의 원활한 공급과 육성 또한 절대적이었다. 삼국기 토지제도는 이와 같이 농업생산의 증진, 관료제와 신분제의 조정과 긴밀히 상관하여 성립된 것이었다. 삼국기의 토지소유의 구성과 토지제도의 특징·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농업증진이 도모되고 신분제가 조정되는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열국기 삼국이 등장하면서 철제 생산용구의 사용확대는 농경지의 개척, 개간 등 경영규모와 소유규모의 확장을 계속 촉진하고 농업생산의 증가를 동반하였다. 이 시기의 이러한 농업발전을 특징짓는 대표적 사항은 쟁기의 개량과 그 사용법의 발달이었다. 삼국 모두 일찍부터 우경이 시행되고 있었으며 완전한 철제 쟁기에 경우를 이용하여 이루어지는 우여경은 기존 농지의 심경작업을 한층 더 발전시키고 개간을 통한 농경지의 조성과 확대를 훨씬 수월하게 하였고, 이를 이용하는 농민가족들은 농업경영에서 개별화 독립화를 더욱 현저히 촉진시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생산자 농민층의 사회적 성장도 크게 진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여경은 쇠스랑·낫의 보급이 가져오는 농작업의 효율성·능률성과 결부되어 치전법과 수확법에 획기적 발전을 가져왔다. 수전과 육전으로 두기구 차원에서 조직적이고 권농적인 수전개발을 착수하여 나가고 있었다.수전의 개발과 조성은 철제 농구와 우경의 사용과 더불어 생산효율을 높였고, 농지를 일반 평지나 산지에서 벗어나 저습지로까지 확대함으로써 일정 수준의 노동력이 취득할 수 있는 가경지의 범위가 규제를 받지 않고 그 외곽에서 새로 창설되는 토지로서 그만큼 토지의 경영과 소유가 개간자의 독립성과 개별성을 고양시키는 것이었고 아울러 대토지소유 및 그 경영관계의 기초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소유와 경영의 불균등은 우경 사용능력의 여부와 수전개발의 여하에 따라 더욱 심해져 갔을 것이다.수전개발을 독려하고 보급하자면 그리고 반드시 수도재배만이 아니라 간전작물의 재배를 위해서도 관계와 치수는 뒤따라야 할 조처였다. 수리정비 자체는 고래로 있어 오고 연맹국가 단계, 열국 초기에는 주로 읍락사회의 힘으로 곳곳에 제언과 보가 수축되었던 것이 삼국기 초에 이르러는 농지 개발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의 왕조권력의 주도 아래 그 행정조직을 근거로 삼아 직접 혹은 간접으로 국가사업으로 착수하고 있었다.농지개발과 관개·치수추진은 농지의 확장이나 농업생산의 증대에 그치지 않았다. 이것은 정치·사회·경제상의 변동을 야기하며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농지개발과 수리작업은 중앙정부 및 고을의 행정조직이 민인을 동원하여 담당·수행하여 나가는 만큼, 이러한 사업은 종래 읍락의 호민이나 거수·제가 등이 소지하고 주관하는 농지개간이나 수리조성, 그리고 이에 따른 농지배분과 개관배정 등의 전능을 국가권력이 흡수하여 직접 파악·장악하고 이 체계 내에서 그 권한의 일부를 공적으로 새롭게 지방관리의 자격과 결부하여 부여하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그간 이들의 전능 아래 망라되어 있던 읍락민의 예속성 또한 그만큼 약화시키고 쇠퇴시킴으로써 민인과 국가의 공적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국가와 농민 사이의 공적 관계의 확산은 소농민이 농업경영에서 그 개별적 독립적 처지를 부각하도록 하였고, 이와 함께 국가의 대민시책을 국왕을 정점으로 인정의 명의하에 지주·대농들이었을 것이다. 계보상 구래의 호민층에 해당하는 이들로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에서도 고을의 호민·호족으로 자리하고 주현의 ‘이(吏)’층을 형성하기도 하였다.인적 배치의 새로운 진행은 읍락사회의 민·하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 시기 신분제 변동과 개편의 커다란 특징은 여기에 집약되어 나타났다. 읍락의 민·하호는 국왕의 민, 국가의 백성으로 새롭게 위치를 부상시켜나갔다. 이들은 제민으로서의 처지로 신분상 법제상 왕조국가의 자유민이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상으로는 층이 다양하였다. 농민상층이 있고 자영소농은 여전히 농민층의 대다수였다. 그러나 과거 빈민으로서의 하호처럼 토지가 없거나 부족하고 가족 노동력 또한 이와 같은 형편이던 이들이 타인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거나 품팔이를 하는 차경농민 또는 용작농민으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즉 농민층이 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분계급상 변동이 없는 층은 노비층이었다. 이전의 노비층은 그대로 노비층이었고, 정복전쟁을 통해 점령한 읍락의 민인을 포로로 삼아 천민화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교환경제가 한층 전진하면서 매매, 범죄, 헌납, 기층, 투탁 등 여러 사정에서 발생하고 수가 증가하였다.신분제가 이와 같이 재편성되어 가는 속에서 몰락농민은 증가하고 노비층 또한 확산되어, 삼국기 중엽으로 넘어가면서는 국가가 생산자층의 안정과 확대를 도모하고 그들에 대한 보호시책을 시급하게 그리고 장기적으로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조처는 두 방면에서 취해졌다. 하나는 순장인원수의 축소와 폐지 시책이었고, 또 하나는 노예를 그 소유주가 방량하여 양인전호로서 지배하고 사역하는 형태였다.신분제 편성의 이러한 방향은 이 시기의 신분제가 법제적으로만은 한정할 수 없는 사안이고 실제 현실이 그러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국가는 계급적 다양성을 사회적으로 승인하고 현실로서 긍정하면서도, 그 출자와 관련하여 인격적으로는 상호 대비적으로 두 계열로만 단순화시키는 선상에서 신분제를 수정해 나가고 있었다. 한 개인 혹은 일 내부의 계급분화 소유분화의 일환으로서 발생하고 토지의 사적 소유의 원리 속에서 진전하지만 이 시기에는 좀더 커다란 직접적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군사력으로 정복한 피정복 읍락·소국의 토지를 귀족관료에게 분급하였고, 공로가 큰 특정 개인에게는 일부를 예속지로 삼게 하였다. 이는 후대에 농장·장원의 형태로 바뀌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대토지를 소유·집적하는 방법은 재력과 인력으로 신개척지에 나가서 새로 종지를 개간함으로써, 혹은 매득을 통해서, 또는 계책이나 권력으로 남의 토지를 자기 것으로 탈취함으로써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토지취득은 정복전쟁이 수그러들면서 더욱 대토지소유의 일반적 방법이 되었다.규모상 가장 거대한 토지의 소유자는 국가였다. 국가의 소유지중 중심이 되는 것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군사기관의 소유지인 국유지와 관유지였다. 국가는 각급 각종 기관의 운영에 따르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여러 국유지와 관유지를 배정하여 나가야 했다.하지만 사적 소유지로서 가장 거대한 대토지 소유자는 왕실이었고 그 다음은 귀족관료와 사찰 순이었다. 귀족관료들은 권세와 직위를 이용하거나, 공훈자에 대한 포상으로 종종 사전을 받아 일시에 토지규모를 확장할 수 있었다. 불교의 사회적 정신적 그리고 정치적 위치는 사원의 물적 기반을 융성하게 함으로써 지지될 수 있었다. 각 사찰은 불교의 지지자인 국가, 국왕, 왕실, 귀족관료의 급여·기부 등의 방법에 의해 막대한 토지와 재화를 소유하였다. 사원전의 비대는 국가로서도 문제였고, 결국 신라는 문무왕4년에 개인이 임의로 사사롭게 재화와 전지를 사찰에 시납하는 행위를 금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사적소유원칙상 그럴 수는 없었고, 다만 임의로운 시납을 금지한 것이었다.국가, 왕실 및 귀족관료, 사찰 등의 관전이나 전장 등 대토지 경작에서 경작민 하나하나는 여러 신분층으로 구성되었겠지만, 절대 다수는 노비와 평민 중 차경농민·용작농민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대토지소유는 토지겸병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필여 지급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새로 농지를 개척하여 일정한 기준과 원칙하에 절급하여 주는 방법을 시행하였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얻은 정복지에 새로운 개척지를 조성하고 국경지대 변경지역에는 요충처를 개척하여야 했다. 각국은 이 국내의 황무지 및 정복지·변경지대의 황무지를 군인 노동이나 민인의 노동으로 개간하고 개척한 뒤 이 공사에 참여한 이들에게 토지를 분급할 수 있었다.물론 삼국기의 농민문제가 토지제도 차원에서 이러한 방식으로써 근본적으로 해결될 성질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생산자 농민 그 중에서도 빈농층은 여러 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적으로도 처지가 차츰 개선되어 가고 있었다. 또, 그간 제가·호민의 통주와 지배하에 있던 노예적 상태의 하호농민이 하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도로 작용하였다.토지소유의 구성은 이상과 같이 집권왕조국가의 체제원리로서 편성되고 또 이를 구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원리는 토지소유관계와 토지문제의 처리방향에서만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농민문제의 안정, 신분계급상의 균등성에서만 본다면 이보다 더 시급하고 철저히 할 부면이 있었으니 이는 조세제도였다.3)조세제도의 제민성과 결부제의 조정물적 인적 토대의 마련에서 중심이 되고 목표가 되는 것은 조세제도의 조정이었다. 이전 시기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읍락사회 혹은 소국별로 가지고 내려오고 있는 조세의 배정?징수상의 관습과 전통에 근거하고 참작하면서 집행하여야 했다. 조세는 지배권력 혹은 국가권력이 그 토지와 민인의 생산물을 무상으로 강제로 징수하는 것으로서 그 공적 통치의 실현체였다. 국가는 공적 명분과 강제에서 수취를 정당화하고, 이에 입각하여 각종 각급의 기관과 귀족관료에게 세수를 분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배정과정이나 징수과정에서 구래의 관례를 일시에 대규모로 배제하고 변경할 경우 커다란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를 적절히 이용하고 타협하여야만 조세제도의 실질은 갖추어질 수 있었다.형성?발전기의 삼국
    인문/어학| 2009.02.16| 8페이지| 1,500원| 조회(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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