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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비스마르크 평가B괜찮아요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독일은 여러 세기동안 통일된 국가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한 독일의 첫 통일의 기쁨을 안겨준 것에 대해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비스마르크’라고 생각한다. 그 통일 비록 민족주의의 성공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그가 이룬 거대한 업적임은 틀림없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비스마르크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그의 살아온 과정을 먼저 알아보고 난 뒤 그의 업적을 살려볼 것이다.비스마르크의 정식 이름은 Otto Eduard Leopold, Fu-rst von Bismarck, Graf von Bismarck-Schonhausen, Herzog von Lauenburg.이고 1815. 4. 1 프로이센 알트마르크 쇤하우젠에서 출생하였다.비스마르크는 어리석고, 진취적이지 않은 프로이센 융커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는 당당한 체구와 엄청난 힘을 물려받았다. 중산층 출신의 그의 어머니는 개혁을 지원함으로써 자코뱅주의자라는 명성을 얻은 프로이센 시 공무원의 딸이었다. 멍청한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예민하고, 때로는 성마르고, 침착하지 못하며, 호기심이 많았다. 비스마르크의 성질과 두뇌는 그의 어머니로 부로 물려받은 것이다. 당당한 체구, 국가에 대한 헌신, 왕성한 식욕을 지녔던 비스마르크는 외모와 스스로도 인정한 기호면에서는 순수한 융커였다. 그러나 정신·감정 면에서는 놀랄 만큼 섬세하고 날카로운 지성과 표현의 재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를 독일 제일의 저술가로 꼽기도 한다.어린 비스마르크는 학교에서는 뛰어나지 않았다. 대학에서 그는 당시의 저항적인 낭만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잠깐동안은 급진적인 브르센샤프트 운동에 참가하였고, 열정적인 살을 하고, 술과 결투에 빠졌었다. 그러나, 그의 학업을 경멸하는 데 반해, 그는 역사와 독일 고전을 방대하게 읽었다. 법학을 이수한 후, 그는 프로이센 관청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관료직의 권태로움과 기강에 분개했고, 곧 사임하였다. 여전히 지루한 그는 방종한 생교에는 무관심한 이신론자(理神論者)였지만 요하나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했다.한가지 재미있는 비스마르크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친구와 사냥을 나갔는데 그만 친구가 늪에 빠지고 말았다. 늪에 빠진 친구는 움직일 때마다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고, 비스마르크가 총대를 내밀어도 닿지 않았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친구는 더 이상 빠져나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포기하려 했다. 그 때다. 비스마르크가 총알을 장전한 총구를 친구에게 들이대더니 방아쇠를 잡아당기려고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친구는 자신을 조준한 비스마르크의 총대를 피해 허우적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친구는 늪 가장자리까지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말했다. “오해하지 마. 난 자네에게 총을 겨눈 게 아니었어. 바로 좌절하고 체념하는 자네의 나약함에 총을 겨눈 거라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건 그것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이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았다면 비스마르크의 친구는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을 거다.비스마르크는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였을 때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최초의 하원(下院)에서의 의회연설에서 “현하의 대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鐵)과 피(血),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한 말. 이 연설은 프로이센 의회의 자유주의자에 대항하여 군비를 확장하고 무력을 통한 독일 통일을 수행한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특징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탈리아의 카부르 수상이 이와 비슷한 표현을 이미 사용한 바 있다. 이 연설로 인하여 비스마르크를 철혈재상이라고 불렀다. 1864년, 1866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결성하였고, 나아가 1870-1871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1871년 독일제국 총리가 되어 1890년까지 이 지위를 독점하였다. 1888년 빌헬름Ⅰ 이후 황 사실이다. 비스마르크는 정치의 책략자였으며 그의 정책은 결코 고정된 규칙과 전제 조건에 의해 묶여 있지 않았다. 장기적 안목을 지닌 동시에 그는 그 순간의 긴박함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계획은 탄력적이어서, 불가항력적인 실수와 오보, 사고를 다 수용하였다. 그는 적들의 눈에 띠는 행동만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있을법한 모든 행동을 처리할 준비를 했다. 그가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은 참을성과 타이밍이었다.비스마르크를 가장 훌륭한 정치가로 평가되어지도록 한 것은 그의 위험이 가장 적은 최선의 정책을 선택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정치는 끊임없는 선택상황의 연속이며, 어떤 정치적 문제에 대한 뾰족한 해답이 없기 때문에 최종선택을 위해서 광범위한 가능성을 동시에 탐색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최종선택을 했을 때조차도-그것이 전쟁일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많은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자주 저지 당했지만, 비스마르크는 항상 실패할 것 같은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고, 정치적 독창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책에 착수하였다.비스마르크는 경제면에서 보호관세정책을 써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정치면에서는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그는 통일 후 외교면에서 유럽의 평화유지에 진력하였으며, ‘3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동맹’, ‘3국동맹’, ‘이중보호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투르크전쟁(1877) 후에는, 베를린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는데, 특히 남독일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하여 1872년 이후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여 왔으나 실패하였고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진압법(1878)’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講壇)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목적으로 이들 여러 산업의 생산품과 동일한 외국수입품에 대하여 고율의 관세를 부과시키는 제도. 비스마르크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하여 뒤떨어진 공업화를 촉진하고 군비확충을 위하여 자국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이 정책을 실시하였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산업혁명의 물결을 탈 수 있었으며 산업혁명의 원조국가인 영국 보다 강한 산업국가가 된다.▷ 3제 동맹1873년 10월 비스마르크 중재로 체결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3제국의 동맹. 프랑스-프로이센전쟁 후 비스마르크는 유럽 평화유지라는 명목하에 신(新) 독일제국의 안정과 프랑스 고립을 목적으로, 1872년 9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가 베를린회의 참석을 위해 방문한 것을 기회로, 독일의 빌헬름 1세와의 3국 황제회담을 주선하였다. 이듬해 10월 3국이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을 경우, 상호 협조한다는 내용의 동맹을 체결하였다. 뒤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관계가 악화되자 붕괴되었다. 1881년 6월 비스마르크의 노력으로 발칸반도에서의 3국 이해를 상호 존중한다는 내용으로 신(新) 3제동맹이 결성되어, 1884년 동맹 체계가 다시 3년간 연장되었다. 그러나 1885년 발칸반도의 불가리아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다시 대립하게 되어, 1887년 3월에 붕괴되었다.▷ 독일-오스트리아 동맹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맺은 방위동맹. 1878년의 베를린회의로 러시아와 독일의 관계가 멀어지고, 러시아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과 반독일 동맹의 체결을 꾀하였으므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교섭, 79년 10월 7일 빈에서 독일 ·오스트리아 동맹을 체결하였다. 양국 중에서 일국이 러시아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에 양국은 전력을 다하여 협력하며, 러시아 이외의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다른 일국은 호의적인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다. 조약기간이 5년인 비밀조약이었으나 조약기간이 갱신되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존속하였다.▷ 삼국을 인정하지 않고 1882년 5월 20일, 5년 기한으로 독일·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동맹을 체결하였다. 1890년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은퇴하기 전에는 비스마르크 안전보장체제의 일환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3국협상과의 대립이 격화함에 따라 지중해에서 영국과 대항할 힘이 없으며 오스트리아와는 미수복지 문제로 대립했던 관계로, 이탈리아는 점차 소극적이 되어, 이탈리아-터키전쟁, 발칸전쟁 이래 영국·프랑스에 접근하고 프랑스와는 비밀동맹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동맹국 원조의무는 방어전쟁에만 국한된다는 구실로 중립을 선언하고 결국 1915년 5월 3국동맹의 폐기를 선언한 뒤, 협상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다.▷ 2중 보호조약독일과 러시아가 1887년 6월 18일에 체결한 비밀조약. 비스마르크의 보장체제의 중요한 테두리를 형성한다. 이 해에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의 3제동맹(三帝同盟)이 만기가 될 예정이었으나 발칸 문제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고 러시아는 프랑스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어 3제동맹의 지속은 바랄 수 없게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를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1887년 1월 이후 러시아를 독일에 결부시키려고 교섭을 벌여 6월에 양국은 본조약 및 추가의정서를 조인하였다. 이로써 독일은 러시아의 불가리아·동루마니아에서의 우월권을 인정하고, 러시아의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양해협 점령시 이를 외교적으로 지지하고, 체결국의 한쪽이 제3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 다른 한쪽은 호의적 중립을 지키며, 체결국의 한쪽이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에 대해 공격했을 경우에는 이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중보호조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따라 동쪽에 대한 보장에 추가하여 서쪽의 프랑스에 대한 보장을 얻고 거기에 서로 대립하고 있는 러시아·오스트리아를 함께 독일 쪽에 묶어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90년 이 조약의 만기에 즈음하여 러시아측에서는된다.
    인문/어학| 2004.02.23| 5페이지| 1,000원| 조회(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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