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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공황의 원인
    서론많은 경제 지표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가 불황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체감경기는 이보다 더욱 심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고닳파하고 있다. 세계 경제는 회복세에 있다고 하지만 역시 불황을 겪고 있었으며 외국의 경제 특히 미국의 경제는 우리의 경제와 연관성이 매우 밀접함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 경제의 연관성은 이제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주지의 사실이며 백여년 전만 해도 알지도 못하던 나라의 상황이 우리의 일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연관성은 지리적 발견의 시대 전만해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세계가 자유무역을 실시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들의 경제적 영향력을 그들의 식민지에 행사하면서 구미 제국들의 경제는 타국과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정치적 제국주의가 해소된 현재에도 거대자본들은 국경을 넘나들고 있으며 더욱더 연관된 각국의 경제들은 일국의 문제라도 세계에 파급시킬 수 있는 강력히 연계된 망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세계경제에 도래된 사건은 1929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이었다. 1930년대를 휩쓴 대공황은 구미 각국뿐 아니라 그들의 식민지와 그들과 거래하던 모든 국가에 충격을 준 전례없는 첫 범 지구적 불황이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이 대공황의 원인와 경과에는 많은 의견과 연구가 있으며 어찌되었건 그 교훈으로 대공황을 재발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인류는 그와 같은 재앙을 다시 겪지는 않았다.대공황의 원인에 대해 많은 주장이 있었고 대표적인 주장으로 미국의 통화정책,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의 붕괴, 관세에 관한 논란, 1930년 은행위기가 대공황을 촉발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이중 밀턴 프리드먼과 폴 사뮤엘슨의 토론에서 사뮤엘슨은 일련의 역사적 우발 사건이 세계 대공황으로 귀결 되었다고 주장한 반면 프리드먼의 단하나의 요인인 미국의 금융정책의 과오가 대공황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금본위제의 고수를 위해 여러 나라가 동시다발적으로 긴축에 의존한것도 다수가 인정을 각국은 모든 것을 황금기라 여겨졌던 전쟁 이전으로 돌리려 하였다.미국은 급속한 경제발전을 하였다. 그러나 소득 불균형이 심각하였으며 사치재 소비가 매우 중요했었다. 이전에는 중공업과 철도건설등 대규모 투자가 있었지만 20세기에는 자동차 산업을 위시한 고가의 소비재로 제한된 소비자들이 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소비구조는 투자의 부족과 주식투기로 이어져 많은 돈이 주식시장에 투하됐다. 그러나 이러한 투기의 결말을 알지 못했으며 저명한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마져도 낙관적 전망을 하였다. 은행은 지방 도처에 개설되어 고객의 욕구에 부흥하고 있었으며 뉴욕의 J.P. 모건 같은 대형은행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하였지만 정작 중앙은행역할을 하는 FRB는 1913년에야 설립 되었다. 당시까지도 미국정부는 자유 방임주의에 근거하였고 계속된 성장은 이러한 믿음에 확신을 주었다. 대규모 국내시장과 막대한 농촌인구를 가진 미국은 외부 식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고립주의 국가로 무역에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주요 국제 채권국이었고 많은 양의 금이 미국으로 유입되었다.(2) 전후배상1차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의 처리에 승전국들의 처리는 큰 논쟁거리였으며 일반적으로 전간기 정치경제적 실패의 결정적 요소 가운데 하나다. 전쟁 책임을 독일에게 묻는 베르사이유 조약은 배상금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배상금의 규모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특히 케인즈는 독일을 막대한 배상금으로 경제적 장애자로 만드는 것은 승전국의 이익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확정되지도 않는 액수의 배상금을 받기 위해 라인란트 지역과 루르 탄광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루르 점령은 독일 고용주와 노동자의 저항으로 별이익도 없이 프랑스 군에 긴장만 더했으며 독일은 초인플레이션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24년이 되어서야 도즈안의 합의가 이루어져 국제 지불체계의 전제조건이 마련되어 민간자본이 독일로 흘러 들어 올 수 있었다. 도즈안의 기본 골자는 미국이 독일에 . 전쟁이 끝나고 재정적 곤란이 지속되는 동안 물가는 계속 상승하고 통화가치는 하락하였다. 사회는 인플레이션을 두려워 하였고 가능한한 빨리 전전의 시절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향수가 일었다. 황금기처럼 보이는 과거 수십 년의 통화안정과 경제성장을 보증해온 금본위제도를 전쟁이 끝난 후 혼란에 유일한 해결책으로 믿어졌다.시티 오브 런던은 1차 대전 이전의 세계의 금융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데 당연히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배적인 여론은 가능하면 금본위제 하의 평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1918년 전후 통화 및 외환에 관한 컨리프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평가로의 복귀를 목표로 확정하고 1925년 파운드당 4.86달러로 10%정도 과평가된 상태에서 영국은 금본위제로 복귀하였다. 프랑스도 1926년 프랑화의 실질적 안정을 통해 금본위제를 재건하였다.흄(David Hume)이나 리카도(David Ricardo)가 찬양한 금본위제는 한 나라에서 금이나 귀금속이 유출되면 물가가 하락하고, 귀금속이 유입되는 나라는 물가가 상승하여 금은 다시 물가가 더 낮은 나라로 환류하는 방식이었다. 즉 국제수지가 적자인 나라에서 금이 흑자국으로 유출되어 이에 따라 통화량이 감소하면 물가가 하락하여 자국의 재화가 국제가격 이하로 싸지므로 수출이 증가하고 수입이 감소하여 국제수지가 호전된다. 또한 화폐부분의 초과수요는 국내이자율을 상승시켜 자본유입을 불러 일으키므로 국제수지가 개선된다. 동시에 통화량 감소는 국내의 유효수요를 감축시켜 지출이 감소하고 고용이 위축되어 수입 수요을 줄인다. 이러한 지출효과는 구매력평가(PPP)와 이자율평가(interest parity)의 회복이 빠를수록 그 중요성이 커질 것이다. 이러한 제도가 잘 운영되면 중앙은행이 필요도 없지만 각국의 중앙은행은 국제수지가 적자일때는 금유출의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재할인율을 올리고 공개시장매각을 행해 물가를 하락시키고, 흑자국에서는 반대의 정책을 수행하여 물가를 상승시켜서 국제수지를 조정하여야 한다. 이러한 금본위제가 세계평가된 파운드는 영국의 물가수준에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긴축적 통화정책을 통해 영국 물가는 계속 그 수준에서 유지 되어야 했다. 통화가 과대 평가되어 수출이 억제되고 수입은 촉진되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디플레를 감수하고 금본위제에 복귀하였으나 프랑스와 벨기에 이탈리아등 후발 안정화 국가들은 저평가된 환율로 디플레이션의 희생을 피한 수준의 금본위제로 복귀하였다.일단 통화안정이 달성되자 다른 문제들이 나타났다. 각국이 자국의 평가(parity)를 선택할 때 상호 조정을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통화가 상대적으로 과대평가 되거나 과소평가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스웨덴, 이탈리아, 덴마크, 노르웨이는 과대평가되었고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는 과소평가 되었다. 과대 혹은 과소평가가 국제무역 경쟁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과대평가한 국가들은 금본위제로 조기 복귀하기 위해 디플레이션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장이 제한되었다. 인플레이션을 확실히 억제할 수 있으며, 대내외적 안정에 기여하고 무역과 번영을 촉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리고 모범적인 나라가 자국 통화가치를 절하해서는 안된다는 교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도덕적 요인도 있었다. 엄청난 비용이 수반되었는데 높은 이자율과 수입품을 저렴해졌고 수출품은 가격경쟁력을 상실하였다. 물가 하락으로 전시와 전쟁직후 정부와 민간 기업이 진 대규모 부채의 이자부담은 온전히 유지되었다. 영국의 산업생산증가는 1920년대 내내 고통스러울 만큼 더디었으며 실업 또한 높은 수준이었다.반면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는 통화의 안정화를 미루었고 이들 나라에서는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고 통화가치는 더 빠르게 하락하였다. 이들은 저이자율과 과소평가된 환율, 그리고 경감된 부채부담의 혜택을 누렸다. 또한 수출의 급속한 증가에 자극받아 산업생산이 급격히 확대되었다.프랑스의 환율은 국내문제에 집중되었지 국제 경제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파운드 화 과대 인한 손해를 생산물 증대로 막으려 하여 지속적으로 가격이 하락하는 농산물 불황이 발생했다.문제는 농산물 수출가격의 폭락으로 대규모 국제 수지 적자에 직면하게 된 주요 농산물 수출국들이 선진국들의 채무국이었기 때문에 경쟁적 평가절하에 나섰다. 아울러 이 시기에 농민들은 이미 생계형 농업에서 상품형 농업으로 전환했는데 이때 진 부채의 부담이 커져서 생계형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빈민노동자로 몰락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디플레이션이라는 외생적 요인에 고통을 겪게 되고 농민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다.(5) 주식시장의 붕괴뉴욕증시는 28년부터 투기적인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다우지수는 2년만에 두 배로 상승하였다. 주식시장에는 계속 돈이 몰렸으며 주식시장을 떠받치는 불확실한 신용 구조와, 그리고 그 구조가 미국과 전 세계의 신용에 행사하는 영향력에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었다.그러나 대통령 쿨리지도 저명한 경제학자 어빙피셔도 주식시장의 위험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대규모 광란의 투기에 의해 주식시장은 하늘 모르고 높이 치솟아 올랐으며 연방준비은행이 할인율을 6%로 인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원, 이발사, 구두닦이, 교수까지 온통 화제는 주식시장 이었다.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시는 붕괴에 빠졌다. 연방준비은행이 패닉을 진정시키고자 하는 은행들을 지원하여 공개 시장 조작 한도액을 제한하고 증권을 구입하는등의 노력을 하였지만 돈은 계속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은행앞으로 몰려들었고 10월에만 522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은행을 1주일간 닫고 금이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금을 국유화 하고 해외유출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 같은 조치로 미국은 전 세계 금 보유량의 70%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미국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1929년은 이미 20년대 후반의 호황국면이 끝을 맺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경기가 하강추세로반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뉴욕 증시의 대붕괴는 대공황과 직결되었다. 각국은 관세와 무역장벽을 쌓기 시남았다.
    경영/경제| 2003.11.17| 6페이지| 1,000원| 조회(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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