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세미나 2004-1 김혜정 교수님청계천 복원사업-인간이 중심인 도시는 가능한가?60032833 한덕규명지대학교 건축대학 CAMU1. 개요600년 고도 서울, 그리고 청계천서울은 내가 태어난 곳이자 내가 지금까지의 20년 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이며 600년동안 수도로서 한민족의 역사를 담아온 도시이다. 난 그 도시안에서 배우고 자랐으며 그 결과 건축에 뜻을 두고 다시 서울 위에 서있다. 건축을 접하고 알아가면서 내게 가장 신선했던 충격은 ‘자연을 지향하는 건축’ 이었다. 더 크게 보면 자연처럼 숨쉬고 순환하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지향해야할 “생태도시”에 크게 매료되었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내가 배우고 느끼고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브라질의 ‘구리찌빠’나 여느 선진국의 생태도시처럼 될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을 갖고 있을 무렵 ‘이명박’ 서울시장은 야심찬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그 것은 바로 ‘청계천 복원 사업’이었다. 그 것이 비록 철거나 보수가 시급한 청계고가 덕분에 불거져 나온 대안이든 간에 정치적 이익을 위한 공약일지라도 어찌됐든 간에 분명 이 사건은 서울을 환경친화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이 아닐까 싶었다.그 위대한 첫 걸음이 시작되고 어느덧 10개월째 접어들고 있다. 공사는 벌써 50%의 공정률을 넘어섰으나 여러 시민단체와 서울시는 문화재 복원문제에 대한 마찰을 빚어 이명박 시장을 고소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지는 등 순조롭지만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또한 최근 시에서는 ‘강북 뉴타운 개발’이란 이름으로 낡은 건물을 부수고 그 자리에 고도제한을 푼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을 짓는 청계천 복원사업과는 상반된 길을 걷는 사업을 추진하려 하니 청계천 복원사업의 취지가 매우 의심스러워질 따름이다. 이 시점에서 건축인의 관점으로 청계천 복원 사업과 크게는 서울시의 도시 정책에 있어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청계천의 역사청계천의 옛 이름은 청풍개천, 일제 때에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청계천은 도성 한양의 동서 축이 형성민 안전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한다.▣도시생태계를 복원하여 환경도시 서울로 전환한다.개발 → 환경, 자동차 → 사람, 효율 → 형평▣청계천 주변지역은 대부분 노후지역으로 경쟁력이 쇠퇴하였기 떄문에 고부가가치 산업지 구로 재편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청계천 복원을 통한 강북지역 경제활성화로 강남북 균형발전을 도모한다.(2)도시계획설계부문▣ 도심부 토지이용 구상사 ▣ 사대문안 문화광관벨트▣ 보행 및 녹지네트워크 구상 ▣ 청계천 주변산업의 관광명소화 구상▣ 단계별 집행전략단기 (2004~2009년) 향후 5년행·재정적, 제도적 기반 구축개발움직임이 있거나 시급성이 있는 사업중기 (2010~2014년) 향후 10년제도적 보완 선행 후 추진할 사업일정한 준비과정을 거쳐 추진할 대형사업장기 (2015~2024년) 향후 20년여건의 성숙을 기다려 장기적으로 추진할 사업상당한 준비과정을 거쳐 추진해야 할 대형사업관리 유형 구분특성보존지구재개발 금지, 기존 특성의 보존 및 보강자율갱신지구주민자력의 갱신 유도, 공공은 환경개선 지원재개발지구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곳, 철거/수복형 재개발종합정비지구공공투자에 의한 종합정비가 필요한 곳▣ 보존 및 개발의 원칙마련(3)도심산업부문▣ 도심산업 활성화의 실행 전략기 능산 업유치 지원시설국제중추관리 및업무 기능금융업비지니스서비스업국제금융 및 비즈니스기능을 수용하는오피스빌딩국제수준의 접객시설 등생산 기능지식기반산업IT/문화산업인쇄출판산업의류패션산업산업별 테크노빌딩(IT문화, 인쇄출판 등)멀티미디어 연구시설의류패션문화센터 등(패션쇼장, 패션박물관유통 및 물류 기능도소매업업종별 전문타운물류유통시설정보네트워크시설 등▣ 도심기능 및 산업구조 고도화 방안신규 유치금융 및 비즈니스서비스산업IT·문화산업무교동일대를 국제금융 및 비즈니스서비스산업중심지로 육성세운상가일대를 IT/문화산업 집적지로 육성존속및재구 조화의류패션, 인쇄출판산업전자, 문화산업 등도소매 유통산업동대문시장일대를 토탈패션 유통집적지로 육성세운상가일대를 멀티미디어 문화산업 집적지 육성정비적인 비용이 투여되어야 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야기될 기존 산업 환경의 붕괴와 그 여파가 결코 적지 않음을 들어 사업의 시행자체를 반대했었다. 하지만 이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묶어놓고 생각해 보면 양측의 주장은 복원해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느냐 아니면 그냥 두어서 지금의 경제적인 가치를 유지하느냐 하는 다소 빈곤한 구도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도시계획의 입안과 실천의 문제가 현재보다 더 확대된 이익의 창출이라는 구도에 종속되어 진행되어온 기존의 관행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계획이 수많은 이익관계들을 조절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새삼스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도시는 더 이상 산업화로 생긴 경제발전의 수단이 아니다. 주거지역과 상업지역 녹지레저지역 등이 분리되어 인간의 삶과 그 인간의 일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도시야말로 인간의 삶과 일이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 되어야하며, 모든 계층의 인간이 복지를 공유하는 통합적 장이 되어야 한다. 경제적 이익 창출만을 위한 도시계획은 더욱 더 도시를 황폐하게 만들어 갈 뿐이다. 청계천 복원역시 환경개선과 문화재건이라는 제목만을 내세운 체 또 다시 종전의 관행에 빠져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청계천 복원에 있어서 좀더 넓은 개념아래 세부적인 실천을 포함시키는 명확한 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고가도로의 철거나 보수가 눈앞에 문제 인데 보수를 하자니 예산이 너무 많이 들고 철거하는 김에 하천을 복원해서 환경개선과 문화재건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자는 식의 생각은 결국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킬 뿐이다. 환경친화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도시를 만들어가는 정책의 일환으로서 청계천 복원 사업이 진행 되어가고 환경개선, 문화재건, 경제 효과 등 은 그 목표아래 종속되어 있어야만 한다. 모든 것이 도시적인 삶의 근거로 설명되는 현재, 도시가 현대라는 시공간의 모든 개념적 사고를 지배하는 유일한 참조틀로써 기능하고 있는 현재적인 상황에서는 그 어떤 것도 유일한 가치가 되어서는꼬르뷔제(Le Corbusier )나 오드(J.P.Oud) 와 같은 유럽 대륙의 건축가들에 의해 처음 시작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유럽 대륙의 어떤 나라들보다도 열렬히 근대건축을 도입하였고 발전시켜 왔다.그 이유는 20세기 모던건축의 특징인 기능주의(Functionalism) 가 실용성을 강조해 영국인의 취향과 잘 맞아 떨어져서엿다. 1905년 대 이후로 이 기능주의는 영국건축에 확실히 자리 잡게 되었다. 영국 건축은 이 이유로 구조나 실내 건축에 더 중점을 두는 전통을 갖게 되었고, 테크놀로지와 과학의 호용성에 중점을 두는 건축가들을 키워냈다. 오늘날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이 실용성을 위한 하이-테크(High-Tech) 디자인이 곧 건축적인 스타일이 되어 버렸다.(2) 21세기 도시민을 위한 런던 템즈 강변 도시 재확층 프로젝트도시환경의 질에 대한 논의는 20세기 후반부터 자주 등장하는 관심사이다. 현재 세계인구의 반 이상이 거대도시에서 살고 있다. 19세기에 불과 10퍼센트의 인구가 살았다는 기록과 대조해 보면 얼마나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그동안 도시로 몰려 들었고 아직도 몰려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흐름을 보면 오늘날 도시들이 ´환경´이나 ´환경친화적 시스템´( Eco-System) 등에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유럽 대부분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국제도시로서 영국의 수도 런던이 당면한 과제 역시 오래되고 낡은 기존의 도시구조(urban setting)에서 어떻게 기존의 옛 건물들과 새로운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는가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지는 시각적 조화보다는 구조나 기능면에서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런던이 템즈 강변 개발계획으로 지난 200년간 지켜온 도시의 아름다운 건축적 균일성을 잃은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많은 반대 여론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도시를 ´바라 보는´ 사람보다는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실용성에 바탕을 둔 인간주의적 신념이 런던을 성 있는 포괄적 비전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공공건물은 대개 문화시설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미술가들을 참여시켜 상징적인 이미지를 시민들에게 심어주려는 것일 수도 있고 얼마 전 본 어느 저널의 기고 글에서처럼 현대 건축이 찾고 있는 대안적 돌파구를 미술가들에게서 찾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4) 문화의 대중화-소외 계층을 위한 노력대부분의 프로젝트 들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건축적 공간들은 흥미롭게도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1. 진입로 주변의 조경, 쉼터와 같은 외부 오픈 스페이스 그리고 로비 등의 내부 오픈 스페이스의 활용소위 문화를 영위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미술관과 음악당 등 문화공간들에 문턱을 낮추는 작업을 내부와 외부의 오픈 스페이스 활용을 통해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 Royal Festival hall 로비의 오픈 스페이스는 음악회를 볼 돈이 없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음악당 친구를 만나서 공짜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고 로비로부터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귀 기울일 수 있게 해 준다. 이렇게 낮에는 무료 공연장이 되기도 하고 주말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육장이 되기도 한다.Tate 미술관 앞 광장이나 St. Paul 성당 앞 관광객만을 위한 쉼터가 아니라 평일에는 회사원들의 점심 먹는 곳이고, 주말에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소풍 와서 도시락을 먹거나 즐기는 곳이다. 권위적인 Somerset House의 안뜰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으로 마당을 시민들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는데 여름에는 시원한 분수를, 겨울에는 신나는 스케이트장을 도시민에게 제공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가끔 공연장으로 쓰이기까지 하는 전천후 오픈스페이스로 변모한 것이다.세인트 폴(St. Paul) 성당 앞 광장.최근 높은 빌딩들에 의해 가려지기 전까지 수백년간 런던에서 가장 큰 높은 건물이었다. 이 권위적인 교회건물의 주변 조경이 바뀐 것은 2000년 테이트 모던과 밀레니움 브리지를 계획하면서 교회건물 주변 짜투리 공간들의 조경을 다시 기획하면서부 한다.
강좌번호:0077 역사와 문명 담당교수 :유의정 교수님중세의 대재앙 흑사병건축학과 60032833 한덕규대재앙의 예고중세 전성기가 “축제의 시대”였다면 중세 말기는 “기근의 시대”였다. 1300년경에서 15세기 중반, 또는 후반에 이르기까지 무시무시하고도 끈질긴 재앙이 서유럽 전체에 덮쳐 왔다. 맨 처음 기근이 만연하게 된 까닭은 지력이 고갈되고, 날씨마저 추워지고, 게다가 갑작스런 호우등으로 말미암아 농업이 황폐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이러한“신의 행동”위에 가장 끔직한 자연 재앙이 또 덮치게 되었으니, 그것은 엄청난 숫자의 서유럽 인구를 살육한 “흑사병” 이라는 이름의 가공할 질병이었다. 게다가 마치 이러한 재앙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듯, 설상가상으로 전쟁마저 끊이질 않고 일어나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파멸적인 전쟁이 기근과 합세하여 수많은 목숨을 앗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14세기 중반까지도 인구 과밀 상태에 있었다. 그 이유는 인구증가가 여전히 식량 공급을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곡물 생산은 줄어든 반면에 인구는 계속 증가했으므로 모두에게 돌아갈 식량이 충분치 못했다. 따라서 곡물 가격이 치솟았고 유럽 전역의 빈민들은 굶주림의 형벌을 치러야만 했다. 그 무렵 또 하나의 재앙이 덮여왔는데, 그 재앙은 너무나도 처참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될 징조라고까지 생각했다.그것은 흑사병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흑사병이란 선 페스트와 전염성 폐렴의 복합 증상으로서 1347년에서 1350년 사이에 처음으로 전유럽에 걸쳐 창궐했으며, 그 후 약 100년 동안에 걸쳐서 시간적 간격을 두고 반복했다. 이 재앙은 죽음과 혼란,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공포로 미루어 보아 실로 20세기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전염병의 임상적 결과는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일단 벼룩에 의해 선페스트에 걸리기만 하면 환자는 서혜부와 겨드랑이 밑에 종기가 겉잡을 수 없이 생기게 되며, 팔다리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설사를 하다가 결국에는 3일 내지 5일만에 죽음을 맞게된다. 질병이 폐렴의 형태로, 즉 공기 흡입을 통해 침투하게 되면, 종기 대신 기침을 하면서 피를 토하고 3일 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한 몸으로 침대에 들어갔다가 밤새 고통에 시달린 후 다음날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선원들이 모두 이 병에 걸려 죽는 바람에 시체를 실은 배들이 바다에서 정처없이 표류하기도 했다. 그 후 계속 창궐한 전염병이 미친 전반적이 인구 통계학적 피해는 엄청난 것이엇다. 몇몇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툴루즈의 인구는 1355년 약 30,000명에서 1385년에는 26,000명으로, 그리고 1430년는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동부에 있는 노르망디의 전체 인구는 1347년에서 1357년 사이에 30%가 줄어들었으며, 1380년이 되기 전에 다시 30%가 줄어들었다. 기근,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염병으로 인해 서유럽 전체 인구의 적어도 절반 가량이,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도 2/3가량이 1300년과 1450년 사이에 줄어들었다.크림반도부터 시작된 흑사병은 유럽전역을 휩쓸었다.엄청난 인구 감소를 가져온 흑사병은 사회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죽음의 공포가 사회를 휘감았으며 살아 남기 위한 투쟁은 기존의 가족관계나 인간관계를 철저히 파괴시켰다.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환자를 간호한다는 것은 생가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시체는 매장되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굴렀다.죽음에 대한 공포는 흑사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더욱 가증되었다. 흑사병의 원인에 대한 설이 난무했지만 모두 허황된 것들이었다.원인은 무엇인가?페스트의 원인에 대해 대개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를 내쫓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페스트의 매개체인 쥐와 벼룩은 14세기에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전혀 의심되지 않았다. 실지로 페스트의 원인균인 "Yersina pestis"는 14세기 중엽에 페스트가 발병한 지 500년이 지난 19세기 중엽에서야 발견되었다. 원인균은 벼룩의 위장이나 쥐의 혈액 속에 살고 있다가 벼룩이나 쥐가 사람을 물 때 인간에게로 옮겨갔다. 보통 페스트를 옮기는 매체는 "rattus rattus", 즉 중소 크기의 검은 색 쥐였는데 이 쥐는 항해하는 선박에서 늘 발견되곤 하였다. 쥐가 죽으면 벼룩은 이동을 했는데, 다음 숙주가 인간이라면 감염이 이루어졌다.그렇지만 중세인들은 페스트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아주 기발한 생각을 하였다. 1348년의 지진으로 공기가 더러운 냄새로 오염되었고, 그리하여 페스트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행성의 정렬방식이 지목되었다. 토성, 목성, 화성은 1345년 3월 30일에 물병자리의 40도에 정렬한 바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페스트는 신의 진노를 의미하였다. 그토록 광범위하고 무자비한 페스트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일 수밖에 없었다. 교황은 3일 동안이나 계속되는 종교 행렬을 인도하였는데, 그 뒤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2천 명의 사람들이 따랐다. 사람들은 기도하고, 울부짖으며, 이를 갈았으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성모 마리아의 자비를 애원하였다. 다수의 사람들은 이 병이 분명히 신의 역사(役事)라고 믿었다. 그리고 1348년 9월에 교황도 여기에 동의하였다. 교황은 칙령을 통하여 "신이 이 역병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이런 견해가 널리 퍼지자 집단적인 죄의식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만약 이 병이 신의 징벌로서 인간에게 내려왔다면, 그것을 불러일으킨 죄는 끔찍함에 틀림없다. 탐욕, 고리대금업, 세속성, 간음, 신성모독, 거짓, 이단, 사치, 불신앙, 우상 숭배, 나태함, 게으름 등이 그러한 죄였다. 기독교 자체의 모판이 바로 이 모든 것 아래에 있었다. 어떤 것도 교회의 심리적, 사회적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심지어 계란을 끓일 시각도 기도서를 말하는 때에 맞추어졌다.역병에 대처하려는 온갖 노력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치료와 예방 둘 다 면역, 회복 혹은 희망이라는 관점에서 아무 것도 주지 못하였다. 의사들은 주로 방향제를 태우거나, 공기를 정화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희생자의 운명이 오직 신에게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의사들의 역할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환자들은 방혈, 완화제를 가지고 장(腸)을 청소하는 일, 그리고 페스트 종기를 찌르는 처치를 받았다. 환자들은 식초와 장미 향수로 씻겨졌고, 독하지 않은 식단이 주어졌고, 흥분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환자가 갑자기 회복되더라도 그 원인은 의사의 치료 때문이라고 보기보다는 운으로 돌려졌다.유태인 탄압사람들은 해결책을 찾고자 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 했다. 페스트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 왜 이곳에서 발생하는가? 나는 왜 살아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분노와 좌절감을 집중하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하였다. 그 희생양은 당시 유럽사회에서 항상 핍박의 대상이었던 유태인 이였다. "모든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파멸시킬 의도로" 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유럽의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1348년 봄에 시작되었다. 더구나 유태인들만이 흑사병에 걸리지 않자 유태인들의 대한 박해는 끊이질 않았다.그러면 왜 모든 유럽인들을 공포와 죽음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흑사병이 유독 유태인들에게는 그 위력을 떨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당시의 유럽인들에 비하여 유태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정결케하는 예법에 따라 손과 발을 자주 씻어 병에 대한 예방력을 크게 했으며, 전염병이나 나병환자들은 가족이든지 아니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리 밖으로 여지없이 격리시킴으로써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채찍질 고행운동흑사병이 발발한 시기에 발생된 보다 흥미롭고 기괴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는 채찍질 고행운동이었다. 1348년에 처음에는 잘 조직된 사람들이 둘씩 짝을 지어 주기도문과 아베 마리아를 부르면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보헤미아, 그리고 저지대, 피카르디를 지나갔다.채찍질 고행운동은 아주 잘 통제되었으며,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가입자들(대부분 평신도거나 성직록을 받지 않은 성직자)은 7세 이후의 모든 죄를 고백해야 했고, 33일 절반 동안 스스로를 채찍질하였다. 또한 각 구성원은 목욕, 면도, 침대에서의 취침, 옷갈아 입기, 어떤 경우든 이성과의 대화 등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런 일을 지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일정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벌금을 지불한 것을 보면 모든 사람이 형제단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벌금조차 지불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여기에 가입할 수 없었다. 형제단은 배타적인 조직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가입은 불가능하였다.
2003-2 현대사회와 기독교 윤리 기말리포트 담당교수: 허종수 교수님기독교윤리와 시민운동- YMCA 로 본 기독교적 시민운동의 개념과 발전방향건축학과 60032833 한덕규1. YMCA란?기독교청년회의 약칭.세계적인 기독교 평신도 운동단체로서 1844년 6월 영국 런던의 히치콕로저스 상점의 점원이던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가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산업혁명 직후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신적?영적 상태의 개선을 도모하고자 설립하였다. 그후 유럽 각국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18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YMCA 연맹(The World Aliance of YMCAs)을 결성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포로를 위한 사업과 난민구호 사업을 펼쳤다. 1955년 YMCA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주체성 재확립을 위한 노력을 다짐하였고, 1973년 우간다 캄팔라 세계대회에서 캄팔라 원칙을 채택하여 YMCA의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강조하였다.회원들은 YMCA 운동의 정신인 독일 경건주의에 따라 정신적 각성, 만인사제론에 입각한 평신도성의 자각, 선교에 대한 정열과 기독교 정신으로의 일치를 기본 원칙으로 하여 봉사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제3세계 나라들로도 확장되어 2001년 현재 세계 120여 개국에 1만여 조직과 회원 3,000만 명, 지도자 70여만 명이 있다.한국에서는 1903년 10월 28일 정회원 28명, 준회원 9명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로 창설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2?8독립선언의 산실로써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부터 고교 Y, 중학Y, 대학Y, 청년Y, 와이즈멘 클럽 등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동안 물산장려운동, 계몽운동, 농촌운동, 전쟁구호운동, 청소년운동, 부정부패추방시민운동, 한강물되살리기시민운동 등을 전개해 왔다.2. 운동이념국제사회 평화를 지키는 지구시민운동체로서 한국YMCA 운동국가적 틀 속에서 규정되던 각종 권리와 의무가 국제적인 보편적 규범 속에서 새롭게 정의되어 가는 국제화 시대의 한국YMCA는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국제사회의 새로운 질서형성에 참여하여 정의롭고 평화적인 국제사회와 지구공동체를 일구어 나간다.21세기 사회는 방어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능동적으로 지구촌을 함께 만들어 가는 개방적 민족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국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평화적 인류공동체를 건설함에 있어 세계 민간단체들의 역할의 증대가 요청되고 있다. 민간운동단체로서 선구적 역할을 해온 한국YMCA는 세계 각지역의 YMCA 운동체를 비롯한 세계의 민간단체들과의 협력체계를 발전시켜 갈 것이다. 특히 제3세계 여러 나라의 빈곤과 어려움에 관심을 기울이며, 급격히 변하고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지역 권역화의 흐름속에서 민간교류를 촉진해 아시아의 평화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국제협력과 연대를 추진해 나간다.정보화 시대 시민 문화를 창달하는 한국YMCA 운동정보화시대의 시민문화를 창달하기 위한 한국YMCA 운동은 정보의 독점을 방지하고 시민사회의 민주적 의사소통 구조와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시민사회 내에 공공선을 담보하는 정보체계를 넓고 다양하게 구축함으로써 참여와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향한 시민사회의 문화적 기반을 확충한다.정보는 시민들 사이에 중추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그 질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시민의 참여가 없는 일방적인 정보화는 필연적으로 정보의 독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등 부작용을 낳으며, 정보를 상업적인 이윤에 종속시킨다. 한국YMCA는 기왕의 정보체계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감시하며, 진정한 공공선을 담보하는 정보를 계발하고 그것을 소통시키는 시민적 미디어 구조를 모색한다.또 개방화 시대에 발맞추어 생활 속에서 자주적인 시민문화를 생성, 교류하기 위한 시민생활 정보문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정보문화 주권운동을 힘차게 추진한다.지방화 시대, 지역 공동체를 가꾸는 한국YMCA 운동한국YMCA는 지방화시대 생활세계를 개혁하고 시민사회의 풀뿌리로서 모든 운동의 바탕이 되는 지역공동체 가꾸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산업화과정에서 생산공간과 생활공간이 분리되면서 우리의 지역은 인간적인 숨결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지역사회에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표류하며, 권력, 금력과 획일적인 대중문화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를 풀어갈 수 없다.생활세계를 침해하는 중앙 패권적 논리와 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의 의사소통망을 다양하게 형성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현안문제들을 발굴하고, 주민들의 참여를 촉진시키며, 지역사회의 과제해결력을 높이는 일과, 나아가 지역사회의 경제와 문화를 창달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또 올바른 지역자치운동을 통해 지방정치를 활성화하며, 풀뿌리운동 지도력개발에 앞장선다.청년과 청소년을 새로운 세기의 주역으로 세우는 한국YMCA 운동참여와 정의와 평화의 새로운 세기를 열어 가는 한국YMCA운동은 청년과 청소년을 21세기 주역으로 세우는 일에서 시작된다. 지구촌시대 21세기 주역으로서 청소년의 문화와 삶은 바로 위기와 희망이 교차되는 21세기 시민사회의 현실이다.한국사회는 권위주의적 사회질서와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으로 청소년들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퇴화시키고 있다. 그것을 다시 살려내어 육성하는 것은 민간운동의 과제이며, 청년 및 청소년들이 중심이 되어 태동한 청년운동체로서 한국YMCA에게 그것은 최우선적인 과제이다.한국YMCA는 그 동안의 운동경험을 토대로 청소년들의 문화비평 능력을 함양시키고 청소년들의 참여를 촉진시켜나가는 일에 힘을 기울이며, 청소년들의 자율적인 문화창조 공간과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들을 도와주는 자원지도력 육성에 헌신한다.또 교육개혁과 청소년정책 대안을 창출하기 위한 사회적 공론형성을 도모하며, 학교, 가정, 지역사회 등 청소년들의 삶의 현장에서 청소년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청소년 건전육성을 위한 시민사회의 역량과 힘을 강화시켜가는 일에 노력한다.청년은 시민사회의 가장 역동적인 부분이며, 21세기 한국사회를 짊어질 주요역량이다. 창립 초기부터 청년의 이상과 기백의 터전으로서 청년지도력 육성에 헌신해 온 한국YMCA는 시민사회의 새로운 세기를 여는 청년운동의 역동성을 발양시켜 나가는 일에 앞장서 헌신한다.민족의 평화 통일을 향한 한국YMCA 운동민족의 평화통일을 향한 한국YMCA 운동은, 단순히 갈라졌던 민족의 재결함을 너머 20세기 냉전체제의 마지막 상처를 치유함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함께 실현하는 운동이며, 21세기 인류의 보편적 과제인 평화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한반도의 평화구조정착을 위해 우리는 평화교육을 시행하고,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냉전의 논리와 폭력과 갈등으로 얼룩진 문화를 타파하며, 평화문화의 창달을 위해 우리의 힘을 모아갈 것이다.통일은 궁극적으로 남북한 주민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서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통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시민들의 자치역량을 강화할 것을 요청한다. 한국YMCA는 그러한 시민참여를 촉발하는 운동의 상징으로서 남북한 인간띠 잇기 운동을 계속 조직할 것이며, 또한 북한YMCA 재건운동과 함께 남북한 민간교류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