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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들어가며....처음 아리랑이라는 책을 펼쳤을 때, 나는 심히 당황스러웠었다. 그것은 책의 시작부터 가득한 한국에 대한 미사어구들이었다. 어찌나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좋은 나라..조선인들은 너무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말들만 가득한지 내가 실제로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부감마저 들 정도였다. 점차 책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면서 주인공 김산에 대한 지나치다싶을 정도의 화려한 언어들을 보며 '도대체 이 작가는 뭐냐....'라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일제강점기 시절인 1905년 3월 5일 평북 평양 교외의 어느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김산은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작은 형과 형수의 도움으로 겨우 중학교까지 마친 김산은 어릴 때부터 그는 카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 우리 나라 역사의 한 획을 긋는 3.1운동이 일어났고 이 일로 인해 김산은 민족이라는 입장을 강하게 생각하게 된 듯하다. 이전까지는 교회만이 가장 훌륭한 기구라고 생각했었던 김산의 생각을 바꿔놓았으며 자신의 정치 의식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시간 마저 갖게 되었다. 모든 조선인들이 모두 하나 되어 소리친 그 강렬한 외침이, 이 외침이 하나의 구점이 되어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으로 조선에 독립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던 조선인들에게 사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강대국들의 이해 조정을 위해 제시되었을 뿐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김산에게 있어서도 정치 의식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그 후, 일본으로 넘어간 그는 동경에서 유학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당시 동경은 학생의 성지로서 온갖 혁명가들의 피난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김산은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등 많은 사상을 접하고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장로교계 학교를 다닌 그는 기독교적 사상, 진리와 근면의 윤리로 사상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당시 일본의 유학생들은 크게 두 분류도 분리가 되었다. 돈을 가진 사람과, 일을 하는 사람. 바로 둘이다. 1/3정도의 학생은 일하는 가난한 학생들이었고, 나머지 2/3은 돈이 있는 집안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로 "룸펜 프롤레타리아", "달걀껍질"이라고 불렀다. 2/3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조선인 학생을 지배하였다. 이에 김산 일행은 갖가지 학생집회를 열고 플로레타리아 철학을 충분히 활용하여 마음대로 "달걀껍질"들을 가르쳤다. 때로는 연회에 쳐들어가 톨스토이를 인용하여 우리들 수 백명이 굶주리고 있을 때 어떻게 하여 부자들이 먹을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늘어놓는 등의 낭만적인(?) 활동도 하였다.조선인 지식인과 학생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아주 힘든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은 반 프로롤레타리아였다. 그들의 지위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그 결제 기구에 의하여 전혀 보호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1919년 혁명적 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요한 급진세력이었기에 일본인은 아주 좋은 동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무정부주의자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된다.그러나 일본 역사상 최대의 천재지변인 대지진이 1923년 9월1일에 발생하였다. 대지진이 일어나자 지배계급은 1918년 쌀폭동에 필적할 만한 폭동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 하였으며, 다시 폭동이 일어난다면 농민뿐 아니라 지진으로 생계를 잃은 공장 노동자들도 가담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이러한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선수를 치고 일본민중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지배계급은 소수민족에 대한 조직적인 태러행위를 재빨리 결정하였다.이와 같은 이로 김산은 일본을 떠나 소련으로가 공부를 하면서 갈 길을 개척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산은 사회과학을 약간이나마 공부하였고 특히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김산은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가 같은 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것이다. 그 이후 신흥학교에 입학하게 된 김산은 어린 시절의 우상이었던 이동휘 장군을 만나게 되고 그 외에 안창호와 이광수를 만나게 되면서 당시의 민족주의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상해서 돌아온 후 김산은 공산주의 운동만이 조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희망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1923년 겨울 그는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함과 동시에 김충창외 8명의 동지와 함께 북경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였으며, 이 잡지는 당시 공산당 동조자와 좌인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받게 된다. 김산은 톨스토이를 접하게 되면서(1922년까지 톨스토이의 이상주의자였다.) 1919년에서 1920년 걸쳐서는 무정부주의에 막연히 공감하는 민족주의자로서 살았으며, 이로 이해 지식인, 대중뿐만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와 플롤레타리아 혁명가 그리고 반동적인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산은 희생이라는 도덕성을 확신하였으며, 잔혹한 것에는 극심하게 반대하였다. 바로 인도주의자이며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1924년은 1920년대를 통틀어서도 동아시아에서 이데올로기가 그 힘을 발휘하는 때이다. 중국도 손문의 영도아래 좌익으로 급선회한때이며 조선에서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급격히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일본도 무정부주의자와 함께 이데올로기의 선향을 주장한 때이다. 그 때를 전후로 조선공산당이나(1925) 조선노동자동맹(1927) 등 좌익계열 단체가 생겨났다. 김산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북경지부를 이 때 조직하였다. 1925년이 되어서는 김산은 그 당시 공산주의가 한참 만연하던 광저우로 가서 광동코뮌의 준비에 힘쓰게 된다. 중국식으로는 광저우공사(廣州公社)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 광둥성 위원회의 지도아래 무장봉기하여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당의 군벌간의 상호다툼을 계기로 광둥성을 일시 점령하였다. 그러나 김산의 표현대로 반동군-국민당 군대-는 3일만에 광둥성을 다시 점령하여 광둥코뮌에 참가한 대략 7000명가까이를 죽였다. 그야 말로 김산이 바랬던 중국의 공산화, 그리고 그의 첫걸음인 광동코뮌이 3일천하로 돌아가자, 그는 쫓기는 몸이 되어 해륙풍으로 후퇴하게 된다. 해륙풍에서도 식량이 바닥이 나고 군사들이 흩어져서 재기를 도모하기 어렵게 되고 김산은 병에 걸려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는 얼마간의 요양을 마치고 다시 상해로 가서 김성숙을 만나게 된다.그후 조선인의 중국공산당 입당을 주도하다가 1930년 11월과 1933년 4월 2차례에 걸쳐 일본에 의해 체포되는데, 2차례 모두 곧 석방되자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중국공산당에 다시 가입하지 못하게 된다. 일본에 심해 심한 고문을 받고 결국은 폐결핵을 앓게 된다. 그는 자기가 있는 하숙집에 낼 돈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은 오직 중국혁명의 완수를 통해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유도하여 일본의 압정으로 벗어나고 일본의 노동자까지도 연계하여 세계 모든 곳에 혁명의 기치를 드높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루고자 했으나, 모든 건 현실의 벽에 부딪쳐 깨지고 자신의 굳은 신념마저 같은 공산당원들로부터 의심받고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진다.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그 속에서 얻어왔던 지혜와 오류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이 자살로서는 아무런 성과가 없음을 알고 이제는 자신이 더 이상 추종자가 아닌 주도권을 잡고 많은 조선의 혁명가들을 지도하여 조선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키는데 창조적 역할을 선도해 나가야 할 천명을 깨닫게 된다.그리하여 김산은 다시 대중운동에 앞장서게 되고 1936년 상하이에서 김성숙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그후 군정대학에서 가르쳤으나, 1938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반혁명죄와 간첩죄로 처형되었다가 그 후 1983년에 다시 복권되게된다.김산이란 인물의 일대기를 살펴 보면 그가 곧바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준 단지 선대의 인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의 인간성을 살펴 보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한 망설임없는 도전 등이 보이고 그것이 그가 가질 수 있었던 삶의 결과이며 그가 우리 삶의 지도자로서 불리우는 점일 것이다. 3.1.운동이라는 성장기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계기를 자신을 혁명가로서의 삶을 이끌어낸 것은 대단한 발전이라고 생각된다. 김산은 자신이 어렸을 때 격렬하고 자존심과 고집이 강한 성격을 스스로 지하혁명운동을 하게 되면서 수수하고 침착하며, 자제력이 강하고 예민하지만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화 시킨 점이나, 11살 이후 주린배보다는 배움을 찾아서 다니었다는 내용에서 우리는 김산이라는 인물의 그 그릇을 알 수 있을 것이다.김산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달리 증명하지 않아도 아리랑 책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민족주의자 다음에 테러리스트,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막시스트로 변해온 최종귀착점에 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과격한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따뜻한 폭력이나 테러를 적극적으로 용인하지는 않았으며, 톨스토이나 그리스도를 쓸데없는 인류애에 집착한다고 비현실적이라고 매도하면서도 군데군데 박애정신이 충만한 모습이 드러난다. 중국에 있으면서 톨스토이에서 마르크스라는 책의 한 대목에서도 말하듯이 그의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고조되던 막시즘에 대한 관심은 결국 그로 하여금 중국의 광동코뮌에 참가하게 하였으며 그후 많은 그의 활동에 철학이 된다. 그는 소련이 선구적으로 공산주의를 실현하여 소련을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될 것이라 믿었으며 일본도 소련에 의해 물러날 것이라 믿었다.
    사회과학| 2004.11.06| 4페이지| 1,000원| 조회(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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