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주체사상발표의 목적광복 후 북한사회에서 50년 가까이 독재정권을 유지해온 김일성과 또한 김일성이 가지고 있던 사상과 이념을 확인하는데 있다.남한의 일민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며 지금껏 북한체제를 유지하게 하는 북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이란 무엇인가?목 차1. 김일성의 일생2. 빨치산 무장 항일활동4. 한국전쟁과 정적숙청5. 독자노선의 표방과 주체사상6.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김일성의 사망7. 결 론3. 해방과 정권수립 과정1. 김일성의 일생남북 정상회담 준비 중 사망1994. 7. 8김정일에게 국방위원장직 이양1993국가주석중심체제로 헌법개정 국가주석, 국방위원회 위원장 취임1972박헌영, 김두봉, 허가이 등 정적숙청을 통한 권력체제 구축1953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6.25도발1950김일성으로 개명(본명:김성주)1935임시인민위원회 조직 위원장이 되어 사회주의 정책추진1946.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내각수상1948. 9항일 유격대원으로 활동1932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출생 ( 부:김형직, 모:강반석 )1912. 4. 15194919451931남북노동당 합당 조선노동당 결성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소련군 소좌 진급, 북한에 대한 소련 점령정책 시작 후 입북중국 공산당 입당김일성의 일생북한이익대표부 외교관주폴란드 북한대사당 중앙회 위원당 중앙회 위원북한국방위원회 위원장김경희딸김경진딸김평일아 들김정일아 들가 족 관 계아 들사 위아 내김영일장성택김성애천재적 예지를 지니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님과 아버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가정에는 효자동, 이웃에는 화목동, 나라에는 영웅동으로 자라시였다 -전설적 영웅 김일성 장군 (1976)-2. 빨치산 무장 항일활동북한에서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이 중요한 이유동북항일연군 활동만주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김일성이 주목받음북한에서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을 자신들의 혁명전통의 근원으로 삼음북한의 핵심 지도층이 빨치산 집단으로 구성1930년대 초 빨치산 활동을 시작한 김일성은 한ㆍ중 항일유격대를 통합한 동북 항일 연군에서 1932년부터 1941년까지 만주일대에서 항일 활동 ⇒ 총사령관(양징위) 및 부대원 대부분 중국인으로 구성, “독립운동”보다는 “항일운동” 성격이 강함진급을 거듭하여 제1군 6사장의 지위에 오름일본의 만주 항일세력 진압에서 사살되거나, 투항하지 않은 지도자급들 중 김일성이 유일하나, 일제의 압박에 견디지 못해 1941년 3월 소련으로 도피동료나 상관의 투항, 체포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전향 유혹이나 진압에 굴하지 않고 끝내 살아남았다는 점은 인정해 주어야 할 점2. 빨치산 무장 항일활동보천보 전투백두산 일대 조선과 중국 간의 국경지역인 장백을 중심으로 항일투쟁활동을 벌이던 김일성 부대(동북항일연군 제6사)가 박달, 박금철 등이 이끄는 조선광복회 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함경남도 혜산의 보천보 마을을 침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 수십명을 사상한 사건일제탄압이 극심하여 국내 독립운동세력은 거의 궤멸된 상태였고,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 세력의 활동 역시 뜸하였던 시기에 일어난 보천보 전투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조선에 알리기 된 계기가 됨전투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소규모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장을 거듭하여 전해져 항일투사로서 “김일성 장군”에 대한 과장된 신화가 생기게 됨3. 해방과 정권수립 과정소령군 장교로서 맞은 해방과 분단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최용건, 김책 등과 함께 소련에서 훈련소련군 휘하의 “88특별여단”에서 소련군 대위로 8.15 광복을 맞음소련은 신탁통치를 위해 자신의 지지자 가운데 하나이자 소련군 장교출신인 김일성을 선택해방 전ㆍ후 정치 중심지는 서울이였으며, 김구, 김규식등의 우익과, 여운형, 박헌영등의 좌익이 주도권 대결을 벌일 때, 김일성은 38선 이북을 장악 ⇒ 분단 자체가 김일성 정권을 수립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됨김일성 정권수립 과정평양 지역의 조만식은 소련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와 신탁통치 반대로 인해 실권소련은 김일성은 대안으로 삼으며 적극적 지원함에 따라 김일성의 국내 인지도 향상1946년 6월 북조선노동당을 통해 남한 박헌영의 조선노동당과 결별북한내에서 활동하였던 공산주의자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김일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소련의 지지를 얻은 김일성에게 지지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음겉으로는 남한에 통일정부 수립 제안등을 하였지만, 보안대 및 조선인민군이라는 “정규군” 창설을 완료함으로써 단독정부 수립 준비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독자정권 수립으로 한반도 분단 최종확정4. 한국전쟁과 정적숙청한국전쟁을 일으킨 이유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군사적 수단에 의한 한반도 재통일남한의 반밖에 되지 않는 인구와 중공업에만 치우친 북한경제의 침체김일성과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국내파와의 관계 ⇒ 박헌영은 자신의 정치기반이나 조직이 남한에 있으므로 김일성에게 전쟁을 종용“자기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우려고 일어선 사람들을 어떻게 침략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라며 전쟁의 정당성 주장예상치 못한 미군의 개입, 전쟁의 장기화 등으로 남침은 결국 실패로 돌아감4. 한국전쟁과 정적숙청한국전쟁 후 정적숙청전쟁의 총책임자로서 정치적 책임을 추궁받았으나 정적숙청을 통하여 오히려 1인 체제를 강화시키는 수완 발휘소련계 한인 허가이를 당세 약화의 근원으로 비판하며 당에서 축출 한국전쟁에 소련보다는 중국의 실질적인 지원으로 북한내 소련파 입지 약화된 상태국내 공산주의자의 중심인 박헌영과 국내파를 미국의 스파이 활동, 남한의 공산주의 혁명 세력 역량약화, 공화국 정부 전복 기도 등의 협의로 숙청전후복구를 위해 “3개년 경제개혁('54~'56)을 추진하며, 사적재산의 국유화를 꾀하던 중 연안파를 중심으로 한 反김일성 운동인 “8월 종파사건”이 터지나 실패소련파, 국내파, 연안파의 숙청으로 김일성 1인 독재체제를 구축 ⇒ 김일성의 생존본능과 정치적 수완, 행운을 보여줌5. 독자노선의 표방과 주체사상독자노선의 추구1인 독채제체 구축을 통한 국내 상황이 정리된 후, 1960년대 초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이 중ㆍ소 분쟁을 계기로 급격히 분열된 상황에서 두 강대국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 독자노선을 추구하게 됨중ㆍ소간의 분쟁사이에서 김일성은 “공산주의 진영의 대단결”이라는 원칙만을 되뇌이며, 중ㆍ소 분쟁의 회오리에서 비켜 섬1960년대 중ㆍ소에 의존하던 국제관계를 넓히기 위해 적극적인 비동맹국가연대를 꾀함1966년 8월 “자주성을 옹호하라”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자주노선”을 표방함과 동시에 중ㆍ소 사이에서 중립 선언1966년 10월 당회의에서 “자주노선”을 완전시 공식화 시킴결과적으로 북한의 고립화를 자초하게 됨5. 독자노선의 표방과 주체사상주체사상(主體思想)중ㆍ소의 의존에서 벗어나 자주를 표방하는 상황에서 뒷받침해 줄 사상체계의 필요성주체의 기초는 인간이며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고 혁명과 건설을 추진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음주체사상의 원리에 입각하여 김일성은 북한의 “유일사상체계”라는 것을 공식화소련의 지원과 중국의 한국전쟁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사회주의 분열의 국제정세상 어쩔 수 없이 된 자주, 주체가 과연 자발적인가?주체를 표방하면서도 소련과 중국에 크게 의존해 온 북한사회의 모순주체사상에 대한 비판현재 제국주의의 주구로 맹비난하던 서구와 남한의 도움으로 체제 유지사회주의권 붕괴뿐 아니라 자립경제노선의 폐쇄적인 태도로 외교적 고립을 자초한 북한의 국제사회에서 고립은 주체사상의 한계를 드러냄6.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김일성의 사망북한의 몰락과 사망전후 복귀의 성공과 '천리마 운동', '평양속도 창조운동'을 통하여 60년대, 70년대까지 군사적,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우위1970년대 후반 테러행위와 외채상황 불이행 등으로 국제신용 하락 및 몰락 시작미국의 경제제재 뿐만 아니라 스스로 주체를 표방함으로써 국제적 고립 가속화“주체사상”을 본격적으로 주창한 시기부터 북한의 몰락이 시작되었으며, 권력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주체와 자주를 내세우고, 김일성의 우상화와 신격화에 몰두, 지속적인 대남 강경책을 고집함으로써 북한의 몰락은 가속화 되었음사회주의 체제의 한계가 존재했고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된 상태에서 현재까지 북한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김일성이 그만큼 튼튼한 체계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음1980년대 장남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국정에 참가 하였으며, 1994년 7월 8일 남북정상회담 준비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공화국의 영원한 수령”등으로 추앙 받으며 미이라의 형태로 금수산 궁전에 사체를 보존 중7. 결 론“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한반도 북쪽을 반세기에 걸쳐 건설하고 망하게까지 한 장본인인 김일성은 국민을 가난과 죽음으로 내몰은 악독한 독재자이자 훌륭한 정치수완을 가진 지도자라는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 생각되며북한의 역사는 곧 김일성의 역사이지만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이며 우리가 껴안아야 할 반쪽의 역사이기에 다가올 통일시대에 큰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에 대한 연구나 정보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 하며 그 중심에 있는 김일성 또한 여러가지 관점에서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