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교와 비교문학‘비교’라는 단어는 현대에 들어와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발하게 사용되는 연구, 또는 학습 방법일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이상의 대상을 두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며 더 나은 결과물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을 것이며 또는 비교 대상의 장점과 단점들을 들추어 그 사실에 대한 반성과 회고의 시간을 아니면 전환점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기회 일 것이다. 결국 비교는 한 가지 이상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바탕으로 더 나은 결과를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문학 분야에서 ‘비교’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비교문학’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던 그 확실한 출발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비교문학의 범주는 19세기 말엽부터 정식 명칭을 가지게 되었지만 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비교’의 필요성을 인식한 시기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스슈타인은 이러한 시기를 비교문학의 라하며 13세기 후반부터 비교문학의 태동기를 정의하고 있다. 비교문학의 에는 ‘비교’를 통하여 어떤 사실 관계나 타당한 영향관계를 체계적으로 설정하지는 못하였지만 문학에서의 ‘비교’의 필요를 인식하여 후의 비교문학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할 수 있다.2. 문학에서의 ‘비교’를 위한 준비유럽의 지식인들은 기원전부터 공통된 ‘공용어’를 사용하여 지식의 전파나 수용을 이롭게 하였다. 그리스 시대이후 로마 시대까지도 희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멸망 이후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말까지도 로마 문자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여 그들만의 계층을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사태는 유럽문화의 공유에는 이득을 줄 수 있었으나 지방만의 주체적인 민속 문화에는 어느 정도 선을 그어 다양한 문화의 발전을 저해시켰음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라틴어의 학습은 특정한 상류 계층이나 성직자에 한하여 있었으므로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민중들은 라틴어로 쓰여 진 글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민중들은 뜨거운 학구열을 가졌다 하더라도 학식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으며 민속 문화의문제는 일부 학자들에게 문제시되었으며 그들은 유럽 공용어인 라틴어와 지방 토착어를 비교하여 그 지방언어의 우수성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단테’는 라틴어로 쓰여 진 자신의 논문에서 프랑스 고전 문학과 프로방스 고전 문학을 비교하는 한편, 이탈리아어가 문학어로서의 위치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위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어가 이탈리아 지방에서 구축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와 달리 이탈리아 지방의 유명한 삼대 문호 중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는 라틴어로 걸작을 남겼다. 이탈리아 외의 다른 지방에서 토착어를 사용해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로는 『빌레할름』의 저자 ‘에센바하’를 들 수 있다. 그는 독일어를 사용하여 작품을 썼음을 물론이고 프랑스의 무훈 시 『알리스캉의 노래』를 자료로 『빌레할름』을 집필하였다. 다시 말해서 에센바하는 프랑스 민속 설화를 바탕으로 독일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비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을 독일어로 새롭게 표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와는 달리 단테와 에센바하는 자국어의 우수성과 편의성, 표현성 등을 파악하기 위하여 자연히 외국어와 비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교는 후에 지식층에서 자연히 비교 문학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언어의 비교는 단테 이후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을 작성한 ‘뒤 벨레이’는 어휘를 강조하고 전통적인 시 형식과의 결별을 강조하여 ‘조국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정에 의해서만 작가는 집필할 수 있을 뿐’임을 밝혔다. 또한 앙리 2세는 『프랑스어와 그리스어의 유사성론』같은 저서에서 프랑스어와 타 언어를 ‘비교’하여 프랑스어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파스키에’는 『프랑스 연구』에서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를 프랑스어와 비교하여 프랑스어의 우수성을 피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문학이 지니고 있는 과거의 유산의 찬란함과 현재의 영광을 강조하였다.이러한 학자들은 라틴어의 범람을 탓하며 자국어의 우중심인 라틴어를 탈피하여 자국어인 프랑스어를 국어로 사용한다는 발표를 유럽 여러 나라 중 가장 먼저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유럽의 문화를 이끌어나가는 대표국가라 자부하고 있었다. 결국 자국어에 대한 애착과 자국 문화에 대한 우월성이 라틴어로부터의 탈피를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비교’는 자연스럽게 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비교문학’의 태동기라 부르고 있다.3. 자국어 정화와 비교이미 유럽 문화권을 형성한 이후부터 활발한 교류를 해온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외래어를 자주 사용하였으며 외래어 사용을 오히려 지식의 상징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앞에서 밝힌 태동기의 일부 학자들은 자국어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자국어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수많은 지식층에서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독일지방을 무대로 벌어진 30년 전쟁은 독일 문화의 발전을 저해시켰으며 일찍이 자국어 구축에 성공하여 자국 문학을 이룩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방의 문학의 유입으로 독일어의 순수성과 독일 문학의 기틀이 위협받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 지방에서는 ‘Fruchtbringende Gesellschaft’를 조직하여 독일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한편 철자법과 문법을 규정하여 비속어와 외래어를 철저히 제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순수성 강조로 오히려 의미전달에서의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러한 가치 있는 운동은 그 본질을 탈피하게 되었다.독일 학자들은 이시기에 고전을 독일어로 번역 하는가 반면에 독일 문학의 기틀을 바로 잡기위해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오피츠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독일 시론』을 집필하여 독일시의 규범을 만들었으며 보드머와 브라이팅거는 주간 평론지인 《마홀런 평론》을 출판하여 다양한 작가들이 등장할 기반을 마련하였다. 예를 들어 클롭프슈톡크, 괴테, 쉴러와 같은 독일 문학의 거대한 주인공들의 문학 활동을 견고히 해주는 역할을 하여 독일 문학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반면에 영국에서는 주로 프랑스문학과 라틴어 언어인 영어로만 집필 했다는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캔터베리 이야기』는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와 같은 이탈리아문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여 자국어로 소화시킨 초서의 활발한 작품 활동은 그 당시 많은 문화를 비교했음이 틀림없다. 또한 초서의 친구인 시인 가워는 라틴어와 프랑스어와 영어로 집필 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다양한 언어로의 집필활동은 비교문학의 중요한 일부분을 알려주게 된다. 그는 세 개 이상의 언어에 능통함과 동시에 그 시대상을 문학에 반영할 수 있었으며 문학과 인간의 심리를 접목시키고자 했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비교문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며 태동기의 대표적인 활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유럽 공통 언어였던 라틴어에서 가장 먼저 탈피한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다른 지방의 문학보다 우월한 입지를 먼저 굳힐 수 있었으며 미쳐 자국어 구축을 하지 못했던 이외의 다른 지방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방의 문학에 흡수되어 자국어 구축을 위해 정화 운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오히려 다양한 언어로 창작을 하기도 하였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하나의 현상은 다른 현상을 낳고 그 현상은 또 다른 현상을 낳을 수도 있고 한 가지 이상의 현상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자국문화 형성이 먼저 이뤄진 프랑스, 이탈리아 문학의 번성은 다양한 언어로 쓰여 진 문학 작품의 활발한 교류를 불러왔으며 오히려 더욱더 향상된 문학의 세계를 열게 되었다.비록 ‘비교문학’이라는 학문의 테두리는 형성되지 않았지만 다른 분야의 ‘비교’처럼 다양한 대상을 발생 시켰으며 보다 발전되고 훌륭한 문학 작품과 작가들을 탄생시켰음은 틀림없다. 이는 외국문학과 자국문학을 비교하여 자국의 업적을 나타내기보다는 우월한 점과 열등한 점을 파악하여 우월한 점은 발전시키고 열등한 점은 보완하는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문학 세계의 확장과 개발을 활발히 진행시켰다.4. 문학의 수용주의모국어 실천 운동과 자국어 정화 운동을 거듭하며 발전하게 된 자국 문학의 특성은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애국정신작품 활동을 일으키게 되고 실로 18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많은 작품의 발간과 함께 많은 비평과 많은 이론으로 문학 세계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많은 작품을 접하게 된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은 이 시기에 외국문학을 안다는 것은 곧 자국문학을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원천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많은 작품을 통하여 다양한 세계를 간접 경험하면서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분명한 것은 ‘비교’를 통하여 과거에 경험했던 작품들보다는 더욱더 발전된 작품을 창작하였음이 틀림없다.‘메리안-제나스트’는 최초의 비교문학자를 프랑스의 ‘볼테르’로 보았다. 볼테르는 실제 인물 앙리 4세를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시 『앙리아드』를 출간하였는데 ‘르 보슈’는 이를 두고 주인공이 실제 인물이라는 점과 신화체계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이에 볼테르는 자신의 작품을 옹호하기 위하여 영국 체류 기간동안 『서사시론』를 집필하였다. 그는 고전주의 서사시와 영국 작가 밀턴의 『실락원』, 자신의 『앙리아드』를 비교해가며 프랑스의 서사시가 고전주의 서사시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외에도 밀턴의 『실락원』이 자국어로 번역되었을 때도 외국문학을 안다는 것은 곧 자국 문학을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원천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외국문학에 대한 수용 자체를 이렇게 언급하였다. ‘모든 나라가 어떤 감정상의 문제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런 감정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잘못일 수 있다.’이처럼 외국문학에 대한 활발한 수용과 그에 따른 자국 문학으로의 출판 과정과의 역학적인 관계에서 ‘비교’의 필요성은 자연스러웠으며 돌출적인 비판을 수용하는 자세에서도 ‘비교문학’의 뿌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결과를 확인할 수가 있다. 이 시기의 성과는 각 지방의 활발한 문학 세계의 형성에서 시작하여 각 국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 세계주의의 지향을 이루었다는 점인데 ‘세계주의’의 자세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외국문학의 수용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