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10대 소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급진적인 사상으로 권력자의 부폐에 맞서 정의 실현을 함으로 중국의 미래를 구하려 했던 공자! 공자가 태어난 B.C 550년 그 시기에 중국은 문자, 달력, 법전과 정교한 철제 농기구 등을 만드는 등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하지만 B.C 500년 시기에는 중국 역사의 암흑기로서 봉건 체제가 붕괴하고 시회 혼란이 가중되어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무인 출신이었던 공자의 아버지는 두 부인으로부터 딸 9명과 아들이 1명 있었으나 아들이 불구였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세 소녀한테서 태어난 아이가 공자였다. 그러나 공자 나이 3세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그 이후로 아버지의 전 부인과 가족들은 공자 모자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아 피폐한 생활을 하게 된다. 결국 고향을 떠나 노나라 도성 곡부에 도착하지만 그곳의 삶도 고통스럽기 마찬가지였다. 공자도 어머니를 도와 일을 하게 되지만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곤궁한 삶속에서도 공자는 배움에 대한 향학열이 뛰어났다. 친구도 없고 볼품없는 외모로 항상 외로웠던 이 아이는 친구대신 중국의 고전을 섭려하기 시작하고 어머니도 아들이 정치가가 되길 바랬다. 공자의 학문이 점점 깊어갈 때 쯤 공자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어머니가 사망하게 된다. 이에 공자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데 보통 사람같으면 지독한 가난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쉽게 무너졌을 텐데 공자는 더욱 현명해지고 성숙해진다. 후에 공자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의 성품은 고귀한 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하게 된다. 남다른 총명함에도 불구하고 혼란한 그 시기에 공자를 쉽게 인정하는 사람은 없어지만 자질을 인정하는 사람을 드디어 만나 도성의 곡물 창고지기를 맡게되고 가난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곡물 창고지기라 하면 별 것 아닐 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의 화폐는 곡물이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관직이라 할 수 있었다.공자는 일찍 19세에 결혼을 하여 아들과 딸을 하나 이상을 두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30세쯤에 이르러서는 권태기에 이르게 되고 현실 세계에서 사람과 더불어 함께 이상을 실현하려는 욕망과 제자들에 대한 헌신은 그를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위대한 성인도 두가지 측면에서는 완벽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공자는 그 당시 혁신적인 그의 사상에서 평생 교육과 능력을 중시했다. 그는 “평민이어도 자질이 있으면 황제가 될 수 있고, 황제도 자질이 없으면 평민이 될 수 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이는 공자가 평등주의자이거나 계급 타파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였다. 그는 사람의 능력은 중시했으되 신분 질서 유지와 자발적인 순종을 강조했다. 그리고 공자는 신분에 상관없이 제자를 받아들였다. 공자는 이상적인 인물인 군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고귀한 태생이 아닌 정직, 자기 절제, 덕을 강조했다. 그는 정치를 통해 노나라에 이상을 실현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하지만 그에게도 그의 나이 50에 기회가 찾아오는데 노나라의 새로운 군주인 정공을 통해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개인, 가족, 사회, 국가, 세계에 대한 어진 마음과 민중에 기초한 사회 이론, 급진적인 사회 정책이 성공하면 할 수록 민중은 희망을 갖게 되었지만 이와 반대로 기득권 세력은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기득권 세력은 젊은 군주 정공에게 미인계를 씀으로 인해 정공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이는 공자가 더 이상 노나라에서 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공자는 그의 나이 54세에 제자와 함께 이상 실현을 위해 새로운 군주를 찾아 노나라를 떠난다. 그후 13년 동안 유랑을 하게 되는데, 이는 서민들의 참담한 생활을 보고 느끼게 되는 기회가 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기득권을 가진 통치자를 교육시켜 하향식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공자의 이러한 사상은 인정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 들여지지가 않는다. 게다가 공자의 직설적인 발언과 비판은 오히려 곳곳에 적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방랑시절 노자로부터도 공자의 비판은 화를 불러오게 될 거라고 경고를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공자는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긴다. 중국 여러나라의 엘리트 집단들은 공자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더욱 무자비하게 철저히 그를 무시해 버렸다. 이는 공자에게 상실감을 안겨주었는데, 그에게도 희망의 소식이 전해졌는데 노나라의 관리인 공자의 제자가 군주를 설득하여 공자는 13년만에 다시 곡부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결국 조정에 등용되지 못하고 말년을 저술 작업과 제자 교육에 힘쓴다. 공자의 3000여명의 제자 중 가장 아꼈던 제자는 안회였는데, 가난하지만 총명하고 가난에 만족하며 살면서도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가진 그의 그런 면을 사랑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안회는 그의 나이 41세에 병을 얻어 죽게 된다. 게을렀지만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공자도 이때는 대성통곡을 하고 심한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는 등 새삼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결국 공자는 자신을 스승으로 삼으려는 군주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73세의 일기로 사망하게 된다. 공자는 자신을 인생의 패배자로 여기면서 죽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 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상의 근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