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적 요인과 마케팅1. 문화적 요인과 마케팅1) 문화한 사회 내에서 공통적인 유형을 일으키는 가치, 규범 및 습관을 말한다. 최근에 들어 각광을 받고 있는 문화마케팅을 통해 알아보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문화소비자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생산은 그들에게 문화생활의 선택에 행복한 고민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쉬리, 난타, 오페라의 유령, 리니지, 마시마로, 살인의 추억, 투란도트 등 대표적인 성공사례만을 나열해도 21세기의 문화산업은 너무나 화려하다. 그리고 소비자가 그 화려함을 즐기는 동안 대한민국 문화산업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문화산업의 발전은 살기 좋은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이러한 문화산업을 부흥시킬수 있는 문화마케팅의 시급한 당면과제로서 문화마케팅의 활성화는 문화시장만의 마케팅활동으로는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반기업과 문화산업의 적극적인 만남이 전제될 때 문화마케팅의 활성화는 가능하다.즉, 기업은 문화산업을 전략적, 실용적으로 활용하여 자사의 제품 및 기술에 문화를 효과적으로 접목하고, 인접 문화영역과의 연계마케팅을 통해 제품 충성도를 확보하며, 문화산업을 기업경영에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기업문화활동은 간접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화의 시대를 맞는 기업의 문화전략은 [기업문화]에서 [문화기업]으로의 변신을 시도해야만 한다.2) 하위문화(subculture)한 문화 내 하류 집단 내에서 공통적인 유형을 일으키는 가치, 규범, 습관 등을 일컫는다.하위문화는 빈번한 접촉과 상호작용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게 형성되는데, 대체로 지역, 연령층, 종교, 종족 등을 중심으로 문화의 분화가 진행된다. 예를들어 지역별로 생성된 하위문화는 흔히 지방색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사고와 행동을 야기시킨다.또한 과거에는 가계구조가 다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할아버지, 아버지, 자녀 사이의 빈번한 접촉과 상호작용을 통해 문화요소의 동질성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세대간 접촉이 소원해져 문화요소들의 수직적 동질성이 약화되는 반면 수평적 동직성이 강화되어 세대간 하위문화(세대차)가 두드러지게 되었다.비록 미국과 같이 다민족국가의 경우처럼 하위문화의 영향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우리 나라의 국내 마케팅에서도 특히 노년층이나 유아층을 표적시장으로 선택할 때에는 그들이 "원하는 바"와 행동특성이 마케터의 관점과 매우 다를 수 있으므로 여전히 하위문화적 특성을 이해하고 마케팅 전략에 반영해야 한다.3) 사회계층(social class)계층으로 구분되어지고 그 구성원이 동일한 가치, 관심 그리고 행동을 공유하는 한 사회 내에서의 상대적이고 지속적인 부분들을 일컫는다.이러한 사회계층에 따라 소비 행태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자동차, 옷, 가전제품, 여가선용 등에서 계층간의 소비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돈이 없는 의사, 변호사도 있겠지만, 의사, 변호사가 저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동료들이나 이웃들 (Reference group; 준거집단)에 대한 체면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2. 사회적요인과 마케팅1) 준거집단(reference group)개인의 태도나 행동에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집단으로서 이 준거집단은 소비자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영향을 준다.- 비교기준적 차원의 영향(동일시 영향) : 소비자는 끊임없이 준거집단의 가치나 신념 및 태도, 행동을 자신의 것과 비교함으로써 정체의식을 명확하게 만들어 나가는데, 이는 긍정적 요망성을 갖는 집단과 동일화시키고, 부정적 요망성을 갖는 집단과 차별화하여 자신의 포지션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정보 제공적 차원의 영향 : 준거집단의 정보제공적 차원의 영향은 개인이 준거집단 구성원들의 행동과 의견을 참조하여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결정할 때 나타난다. 이 경우는 대체로 광고나 판매원과 같은 상업적 원천보다는 친구나 가족과 같은 개인적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경향이 있다. 즉 개인적 원천은 상업적 원천보다 신뢰성이 크며 특히 신제품의 구매에서 매우 중요하다.- 규범 제공적 차원의 영향 : 준거집단은 집단의 규범과 기대에 순응하는 소비자에게는 보상을 제공하고 그렇지 않은 소비자에게는 제재를 가함으로서 그로 하여금 집단규범에 순응하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집단규범에 대한 순응은곧 소비자들이 집단의 행동을 모방하고 집단에서 수용되는 제품이나 상표를 구매하도록 영향을 미치는데, 집단규범에 순응할 때 주어지는 기본적인 보상은 사회적 수용(social acceptance)이다.준거집단의 영향과 관련하여 마케터가 마케팅 전략에 참고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 수 있다.첫째, 유능한 판매원이나 제품분야의 전문가들의 전문성을 활용하여 개인에 대한 영향을 증대시킬 수 있다.둘째, 동일화의 열망 때문에 개인은 긍정적 준거집단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고 사물을 지각할 수 있는데, 마케터는 이러한 준거력을 이용하여 소비자로 하여금 광고 속의 모델과 똑같은 것을 좋아하거나 똑같은 행동을 취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셋째, 집단들은 개인에게 다양한 형태의 보상을 제공할 수 있는데, 보상은 화폐나 선물과 같은 유형적이거나 인정, 칭찬과 같이 무형적일 수 있으며 지각되는 보상의 크기에 따라 그러한 보상을 근거로 하는 영향력이 결정된다.넷째, 집단은 벌을 주거나 보상을 철회함으로써 개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생명보험이나 구강청정제, 방취제와 같은 제품의 마케터들은 마케터들은 두려움 소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다섯째, 마케터는 가정과 직장에서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을 활용하여 개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2) 가족(family)가족이란 혈연, 결혼, 또는 입양에 의해 맺어진 2인 이상의 집단을 말한다. 가족은 구성원들의 생리적,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제 욕구를 보다 잘 충족시키기 위해 형성되는 것으로서 한 개인이 소속하는 최초의 일차적 집단이다.마케팅 전략 개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으로서, 최근 현저하게 부각되고 있는 우리나라 가족구조의 변화에 관하여 간략하게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취업여성이 증가하고 여권이 신장됨에 따라 가정에만 전념하려는 여성의 수가 줄고 있으며,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결과, 가족구매결정에 있어서도 부인주도적이거나 또는 부인자율적인 결정빈도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
1. 리디노미네이션 ( Re-Denomination) 의 의의화폐단위를 하향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한 나라의 화폐를 가치변동 없이 모든 은행권 및 지폐의 액면을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조정하거나 이와 함께 새로운 통화단위로 화폐의 호칭을 변경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0원을 1원으로 하는 것인데 이 경우 절하 전 화폐단위의 호칭과 절하 후 화폐단위의 호칭을 구별하지 않으면 혼동되기 때문에 구원, 신원 등의 명칭을 쓴다.리디노미네이션은 기본적으로 인플레이션의 진전에 따라 경제량을 화폐적으로 표현하는 숫자가 많아서 초래되는 국민들의 계산, 회계 기장 또는 지급상의 불편을 해소할 목적으로 실시된다. 그러나 일부 선진국에서는 자국 통화의 대외적 위상을 제고할 목적으로, 과거 중남미 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국민들의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억제할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종전에는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이라 불렀으나 한국은행은 “디노미네이션은 화폐·채권·주식 등의 액면금액을 의미하기 때문에 화폐단위 변경을 영어로 표현하려면 '리디노미네이션' 또는 '디노미네이션의 변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1953년 100원을 1환으로, 61년 10환을 1원으로 바꾼 바 있다.2. 리디노미네이션의 효과1) 긍정적 효과*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고액권 발행이나 화폐가치의 선진화, 위폐방지 효과를 한꺼번에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은행도 고액권발행보다 리디노미네이션을 강력히 원하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고액권 발행보다 초기비용은 많이 들지만 장기적으로는 '조'나 '경'단위를 쓸 필요가 없어 계산, 장부 기재, 데이터처리, 지급결제 등이 간편해진다* 한국화폐에 대한 대외 이미지 제고는 물론 기업들이 무역을 할 때 달러나 유로 화 등 선진화폐와의 환율도 대등해져 편리해진다.2) 부정적 효과* 화폐단위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끝자 리 수를 사사오입하게 되면 높은 금액의 범위에서는 큰 문제가 없는데, 낮은 금액 범위내에서는 반올림으로 물가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국민으로서는 자신의 재산액이 크게 감소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상실감을 감수 해야 한다. 예컨대 1000대 1로 화폐액면을 축소할 경우 현재의 재산 1억원은 10만원 이 된다. 물론 자산가치엔 변화가 없지만 재산의 단위가 축소됐다는 '허전함'은 메 울 길이 없을 것이다.* 지폐와 동전을 모두 새로 찍어내야 하는등 막대한 비용을 초래한다. 시중의 자판기는 물 론 현금 출금기, 신용카드 리더기 등의 액면인식 센서를 교체해야하고 각종 기장, 화폐단위가 들어가는 문서 등도 모두 바꿔야한다.* 디노미네이션으로 액면단위의 절하가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 편승하여 우수리 절상 등에 의한 부당한 가격인상으로 물가불안이 초래될 가능성도 있다.* 디노미네이션에 따른 화폐교환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개인정보의 노출, 재산상의 손실에 대한 우려 등으로 국민의 불안심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3. 리디노미네이션의 실시 예상시기1) 리디노미네이션 실시전 고려사항일반적으로 디노미네이션은 정책의 실시에 따른 국민의 불안감 및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건이 충족된 시기에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첫째, 물가가 안정된 시기에 실시하여야 한다.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는 시기에는 이에 편승한 부당한 가격인상이 초래되기 쉽고 이는 디노미네이션 효과를 반감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남미제국에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하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디노미네이션이 실시되기도 하였다.둘째, 국제수지가 안정적인 시기에 실시하여야 한다. 경상수지가 적자 행진을 계속할 경우에는 환율의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우며 디노미네이션의 실시로 인한 경제상황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환율의 불안정이 더욱 확대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셋째, 경기가 좋고 기업의 수익이 양호한 시기에 실시하여야 한다. 디노미네이션이 실시되면 이에 수반하여 각종 장부와 전표의 변경, 컴퓨터 프로그램의 수정 등 기업의 비용부담이 크게 늘어나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부담을 손쉽게 흡수할 수 있는 경제여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 왕가리 마타이의 활동연혁1940년 케냐 은예리에서 태어난 왕가리 마타이 여사는‘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그는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한 뒤 71년 케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나이로비대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76년나이로비대 첫 여성 교수가 됐다.그녀는 이어 77년부터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그린벨트 운동’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숲을 지킴으로써 사막화를 방지, 아프리카가 직면한 가뭄과 기아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산림녹화를 통해 가난한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무분별한 벌목으로 훼손된 땅을 푸르게 가꾸자는 것이 운동의 취지였다.하지만 마타이 여사는 이 운동으로 인해 오랜 세월 정권의 탄압을 받아왔다. 초기 전개 과정에서 당시 억압적인 케냐 정권의 단기적인 개발 계획과 그가 추구하는 삼림 보존 운동이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케냐는 다른 아프리카 신생독립국과 마찬가지로 외국의 자본과 국내의 값싼 노동력에 기반한 커피, 차와 같은 수출용 단일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플랜테이션을 대대적으로 추진해왔다. 그 결과 전체 삼림의 97%가 파괴되었고 토양유실, 사막화와 기근으로 빈곤은 더욱 심화되었다.이때 교수로 재직하면서 케냐 여성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마타이는 환경파괴로 더욱 빈곤해진 여성의 현실을 목도하게 되고 환경복원, 풀뿌리 경제회생, 여성세력화를 위한 그린벨트운동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이 운동을 통해 약 3000만 그루의 나무가 심어졌으며 10만명의 여성이 조직화되었고 8만여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즉, 마타이는 자연과 공생하며 지속가능한 생존을 일구었던 전통적 삶의 방식에 천착하여 서구를 좇는 따라잡기식 경제개발이 아닌 아프리카식의 대안적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고민 속에 구상된 그린벨트운동 으로 여성들은 땔감과 열매와 약재를 얻을 수 있었고 나무 한 그루당 3센트의 돈을 받아 자립의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이로 인하여 이 그린벨트 운동 은 제3세계 여성환경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이자 공동체의 경제발전에 기반하여 환경복원을 이루어낸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인정받고 있다.하지만 그녀의 활동이 커져갈수록 케냐 정부와의 갈등은 깊어만 갔고 그 결과, 2002년까지 24년간 케냐를 지배했던 다니엘 아랍 모이 정권에 의해 수차례 체포됐으며, 테러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하지만 그녀의 일관된 노력으로 인하여 86년 이 그린벨트 운동 을 ‘범아프리카 그린벨트 네트워크’로 확대해 탄자니아, 우간다, 말라위, 레소토, 에티오피아, 짐바브웨 등 다른 아프리카 10여개국에 전파했다.98년 9월에는 ‘2000년 연대’를 조직해 공동회장을 맡아 아프리카 빈국의 이행불가능한 채무를 2000년까지 탕감해 서구 자본의 삼림 강탈을 막자는 운동을 펼쳐 국제적인 조명을 받았다.이렇듯 그녀는 투쟁적이고 뜻을 굽히지 않는 저돌성으로 환경운동을 펼쳐 나갔는데 그 한 예로 1999년 봄. 머리를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도 한 손에 물뿌리개를,다른 손에 묘목을 든 채 케냐 나이로비 인근의 카루라(Karura) 숲을 향해 걸어 가는 한 아프리카 여성의 투지에 세계는 경악했다. 며칠 전 숲에 나무를 심으러 갔다가 개발업자들이 고용한 무장괴한의 습격을 받아 머리가 깨진 채병상에 누워 있던 그녀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선 것이었다.그후 마타이를 향한 폭력을 보다 못한 코피 아난 유엔 총장 등 세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또한 케냐의 지식인들도 그의 옆에 섰다. 개발업자들과 유착돼 수수방관하던 케냐 정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정중히사과를 한 뒤 카루라 숲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마타이와 카루라 숲은 환경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이 결과, 그녀는 지난 2002년 98%의 압도적인 지지로 국회의원이 된 뒤 케냐 환경·천연자원·야생생물부 차관으로 임명됐다. 마타이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도 계속해 유엔에서 여러차례 여성 인권에 관한 연설을 했으며, 무장해제 관련 유엔 사무총장 자문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활발한 활동내역과 함께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유엔환경계획(UNEP)이 500명을 선정한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이 올라 있고, 97년 환경 전문지 ‘어스 타임스(Earth Times)’가 선정한 환경운동가 100인에 뽑히기도 했다.올해도 왕가리 마타이는 노벨상에 버금가는 상으로 불리는 ‘올바른 삶’ 상, 페트라 켈리 환경상 등을 받았다.2. 왕가리 마타이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의미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최근 왕가리 마타이 케냐 환경부 차관을 올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아프리카에서 3,0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는 ‘그린벨트’운동을 펼쳐 온 마타이는 아프리카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며,환경보호를 이유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첫 사례이기도 하다.
1.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상인이자 여행가이다. 베네치아에서 출생했으며 1271∼95년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여행했고, 그 가운데 17년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폴로 집안은 오랜동안 중동교역을 하여 몽골제국 쿠빌라이 칸[汗]과 우호적 관계에 있었다. M. 폴로는 127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신임장을 받아 몽골제국으로 떠나는 아버지와 삼촌 및 2명의 수사를 따라 여행길에 올랐다. 2명의 수사는 중도에서 여행을 포기하고 폴로 가족만 계속하였는데, 육로로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오아시스인 케르만·타브리즈·발흐·야르칸트·코탄·차르찬 등지를 지나 중국 허시[河西]지방에 이르러 간저우[甘州]에서 1년 머물렀다. 그 뒤 74년 상두[商都]에 도착, 쿠빌라이 칸을 만나 성유(聖油)와 교황의 편지를 바쳤다. 폴로는 상두에 그대로 머물며 원(元)왕조의 관직에 올라 17년 동안 살았다. 그동안 중국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90년 무렵 이란의 몽골 왕조 일한국(汗國)의 아르군 칸에게 시집가는 공주 코카친의 여행 안내자로 선발되어 중국을 떠났다. 그들은 푸젠성[福建省]의 취안저우[泉川]를 출항하여 자바·말레이반도·스리랑카 및 인도 말라바르 해안 등지를 거쳐 이란 호르무즈에 도착하였으나, 아르군 칸은 이미 죽은 뒤였으므로 공주를 그의 아들인 마흐무드 가잔에게 맡기고 95년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98년 베네치아-제노바 전쟁 때 베네치아 해군 고문관으로 참전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제노바의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서 모험소설 작가 루스테첼로를 만나 동방에서의 견문담(見聞談)을 받아 적게 하였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폴로의 여행기인 《세계의 묘사(Divisament dou Monde)》로, 흔히 《동방견문록》으로 불린다.2. 동방견문록의 내용과 그에 대한 담론1) 동방견문록이란인쇄술이 도입된 이후 서구에서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었다. 아직 대항해의 시대가 열리기 전, 중세의 유럽인들은 지중해 너머에 있던 인도나 중국과 같은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확인되지 않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양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중세 유럽인들에게 ‘동방견문록’은 미지의 동방 세계에 대한 놀라운 지식의 보고(寶庫)였던 것이다.동방견문록 의 원제목 'Divisment dou Monde', 즉'세계의 서술'(또는 '세계의 묘사')은마르코 폴로가 자신의 견문을 토대로 여러 지역에 대한 '진기하고 놀라운 것들'에 대해서 서술할 때 그것이 '동방'에 국한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1)--------------------------------------------------------------------------1) 김호동, [동방견문록], 사계절 출판사, 2000, p24한편 이탈리아에서는 '백만'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르코 폴로의 책이라 하여 [백만의 책](Il Millione)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 역시 편의상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에서는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에서 사용한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1)‘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을 기초로 해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기행문의 성격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에서 이 책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Travels of Marco Polo)’라는 제목으로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조금만 읽어보면 누구나 이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여행기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어느 지역을 여행하며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적은 것이라기보다는, 13세기 후반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느 지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산물, 동식물 등을 하나씩 기록했다.다시 말해 그가 이 글을 통해 유럽의 독자들에게 알리려 했던 것은 단순히 자신의 여행담이 아니라, 당시 유럽인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었던 것이다.이 책은 모두 232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의 판본에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덟 개의 편으로 나누어 구성하고 있다. 서편은 마르코 폴로가 어떠한 연유로 여행을 뗘나게 되었고, 어떤 사정으로 돌아와 책을 구술하게 되었는가 하는 여행의 배경을 설명하였다. 1편은 대·소아르메니아와 투르크메니아에서 시작하여 이라크와 페르시아 지방을 포함하는 서아시아에 대한 기술이고, 2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미르를 넘어 타림 분지를 경유하는 중앙아시아를 다루고 있다.2)3편은 쿠빌라이의 수도인 상도(上都)와 대도(大都)의모습과 대카안이 통치하는 모습을 묘사했고, 4편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체류하변서 보았던 중국의 북부(카타이)와 사천·운남을 거쳐 미얀마에 이르는 지역을 설명하있으며, 5편은 당시 '만지'라고 불리던 남송의 영역, 즉 중국의 동남부를 포괄하고 있다. 6편은 폴로 일가가 중국을 떠나 귀환하는 길에 보고 들은 인도양각지(대인도·소인도·중인도)의 사정을 서술했고, 마지막으로 7편에서는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북극지방까지 설명하고 있다.3)이처럼 그가 설명하는 지역의 범위는 북으로는 '암혹의 나라'라 부르는 극지대에서 남으로는 자바와 수마트라 및 잔지바르와 모가디슈에까지 이르렀고. 서로는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동으로는 일본에까지 미치고 있으니. 사실상 유럽을 제외하고는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 를 포괄한 것이었다.--------------------------------------------------------------------------1) 김호동, [동방견문록], 사계절 출판사, 2000, p262),3) 김호동, [동방견문록], 사계절 출판사, 2000, p272). 동방견문록에 대한 담론◎ 허구로서의 동방견문록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갔었다? 그러한 주장에 대한 유일한 증인은 마르코 폴로 자신이다. 우리가 수많은 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과는 달리, 실제로 마르코 폴로는 콘스탄티노플과 흑해를 넘어간 적이 한번도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의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론에 의하면, 그는 몽골의 쿠빌라이 칸을 만난 일도 없으며 그 황제의 칙사를 지낸 일도없을 뿐만 아니라, 카라코룸이나 북경은커녕 그가 자신의『동방견문록Travels of Marco Polo』에서 보았다고 하는 다른 도시들도 대부분 실제로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달리 말해,마르코 폴로는 그가 쓴 책의 상당 부분을 베끼거나 꾸며낸 셈이 되는 것이다(또는 그가 전쟁 포로로서 4년 동안 제노바의 감방에서 지내면서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동료 죄수에게 받아 적게 했을 수도 있다.)그러한 이론은 다음과 같은 간접 증거들을 근거로 삼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보고했어야 마땅할 것들이 모두 빠져있다.예를들어, 10년이상 중국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만리자성을 보았을 것이다(그리고 실제로 마르코 폴로가 여행했다고 주장하는 경로를 따라가보면 그는 적어도 한 번쯤 이 만리장성을 넘었어야 했다).그러나 마르코 폴로는 만리장성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그 당시 중국에 이미 잘 알려졌으며 널리 보급되어 있던 서적인쇄술에 대해서도 서술해놓지 않았다.또한 차를 마시는 것이나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것,또는 여성의 전족 등 중국의 전통적 관습에 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수년 동안 중국에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국 문헌에서 마르코 폴로에 대한 설명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마르코 폴로의 말대로 그가 중요한 사신이자 황제의 착사였다고 한다면, 그런 인물이 한 나라의 역사에서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했다고 하는 여행 경로는 뒤쫓아가는데 상당한 무리가 있다.지금도'마르코 폴로의 발자취'를 따라갔노라고 자랑하는 탐험대들이 있기는 하지만, 저명한 탐험 연구가들은 페르시아의 국경을 넘어 마르코 폴로의 경로를 뒤쫓아가기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1)--------------------------------------------------------------------------1) Frances Wood : Marco Polo kam nicbt bis China(마르코 폴로는 중국까지 오지 않았다), Munchen 1996.* 기행문의 구성 자체에 문제가 있다.이 책은『마르코 폴로의 여행』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상 기행문과는 전혀 다르며 일화나 실제 사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담아놓은 메모 정리 상자나 다름없다. 이 책의 본문은 느닷없이 중동의 연대기로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곳에서 거래되는 물건이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것만 몇 가지 알수 있을 뿐,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여행하는 마르코 폴로의 구체적인 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 다음에는 다른 문헌이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가지고 엮어 쓴 책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리적, 경제적 또는 사회심리학적 여담이 이어진다.◎ 동방견문록의 내용에 대한 실증적 증거여러 학자들의 연구는 이러한 비판에 근거가 없음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만리장성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다녀간 뒤인 명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또한 마르코 폴로가 중국인들보다는 당시 지배층이었던 몽골인이나 색목인들과 주로 어울렸기 때문에 한자를 몰라도 중국에서의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 차를 마시는 풍습 역시 당시 북중국이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아직 크게 유행하지 않았었다는 점 등이 반론으로 제기되었다.
1. 재패니메이션 ; JAPAN(일본) + ANIMATION(만화영화)1) 재패니메이션의 유래와 정의'저패니메이션'이라는 말은 JAPAN(일본)과 ANIMATION(만화영화) 을 합성해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애니메이션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움 직일 수 없는 그림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기술 및 이 기술적 방법을 창출 해내는 모든 분야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필름이나 VTR용 테이프에 그림을 수록하여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 및 그 필름이나 테이프를 의미한다.저패니메이션(JAPANIMATION)은 일본에서 일본인이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여 만든 만화 영화로서, 사용언어는 일본어이다. 즉 저패니메이션은 일본제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김지룡씨는(1998 : 213) [저패니메이션에서 의 JAP는 흑인을 차별하는 용어인 니그로(Negro)와 비슷한 뉘앙스를 가 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패니메이션이라는 말에는 외설적인 장면이 빈번히 사용되는 저질 애니메이션, 폭력적인 장면이 많은 나쁜 애니메이 션이라는 의미가 포함 되어 있다. 즉 저패니메이션이라는 용어는 미국인 의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이다.]라고 했다.저패니메이션이라는 용어의 유래는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인 '철완아톰‘시리즈는 무시프로덕션 제작으로 데 츠카 오사무가 감독했다. 이 작품은 총 193편으로 1963년 1월 1 일부터 1986년 12월 31일까지 4년간 인기 속에 방송됐다. 과학자 코주부 박사와 한가족처럼 살아가는 소년 로봇 아톰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패 전 후 침체돼 있던 일본 사회 분위기에 꿈과 희망을 선사한다. 우리 나라 에서는 1971년 TBC에서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됐었다. 이 1963년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의 서해안에 방영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것을 일본제 애니메이션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그 후 1982년에 '초시공요새 마크로스(Macross)') 외계인과의 싸움에 휘말린 지구인, 그리고 전장에서 애틋한 사랑을 꽃피우는 린메이민, 히중 일본색이 적은 시리즈물은 외국에도 수출되기 시작하여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력을 전세계로 알려가게 된다. 당시의 TV 애니메이션은 아동용 작품이 주로 제작되고 물량이 늘어남에 따라 다른 작품과의 차별화를 두기 위해 특정 시청자를 공략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당시 인기가 있던 프로야구와 프로레슬링, 권투 등이 소재 가 되어 [거인의 별], [사무라이 자이언츠] 등 소년층을 겨냥하였고, 한국에서도 방영되었던 [도전자 허리케인-내일의 조]는 TV와 극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애니메이션들은 스포츠를 통해 '근성'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스포곤아니메'로도 불리웠다.* 1970년대 제패니메이션- 거대로봇70년대, 거대 로봇물의 효시는 나가이 고의 [마징가 Z](1972년)이다. [철완 아톰]이나 [에이트 맨], [우주 에이스] 등 기존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로봇들은 사람들처럼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몸집도 인간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마징가 Z는 주인공이 탑승해 조종하면서 움직이는 전투무기로서의 로봇으로 소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속편에 해당되는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등도 크게 성공했다.- TV애니메이션‘TV애니메이션의 폭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극장용 중심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던 토에이 동화를 비롯한 많은 소규모 제작사들이 TV 시리즈물의 상업적인 매력을 인지하고 다량의 작품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선발대였던 테즈카 오사무와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물론 〈내일의 조〉(1970년)의 치바 테츠야, 〈루팡 3세〉(1971년)의 몽키판치, 〈바벨 2세〉(1973년)의 요코야마 미츠테루, 〈도라에몽〉(1973년)의 후지코 후지오, 〈과학닌자대 갓차맨〉(1972년)토리우미 히사유키,〈우주전함 야마토〉(1974년)의 마츠모토 레이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년), 〈엄마 찾아 삼천리〉(1976년)타카하타 이사오, 〈캔디 캔디〉(1976년)의 이가라시 유미코, 〈집 없는 아이〉(1977년), 〈보물섬〉(1978미야자키 하야오의 흥행과 작품성의 성공, 의 일본 박스 오피스 1위 점령 등 밝은 미래를 보여주고, 아니메 초기를 이끌던 선배감독들의 정신을 이어 받은 후배 재능꾼들의 포진으로 강렬한 창작의지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어서 일본 아니메의 미래는 밝다 할수 있다.2. 제패니메이션의 흥행요인 - 성공비결1)마케팅* 캐릭터의 철저한 상품화캐릭터들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동식물이나 인물들로 이들의 성격이나 모습이 어떻게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그 애니메이션의 성패가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핵심이다. 그런데 일본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캐릭터를 상품화를 미리 다 해놓는다. 그리고 계층에 따라서 캐릭터가 달라지기도 한다.흥행결과에 따른 시나리오를 준비하여 치밀하게 캐릭터를 형상화 작업을 진행시킨다. 또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 생명력이 지속되기 때문에 캐릭터를 지킬 여러 가지 안전 방안들을 세운다.* 복합 미디어 전략'포켓 몬스터(Pocket Monsters - PIKACHU)'의 예를 보면, 일본에서는 1996년 게임 소프트를 발매하는 날 만화잡지 '고로고로 코믹' 4월호는 '포켓 몬스터' 연재를 시작했다. 이렇게 인지도를 높인 '포켓 몬스터'는 완구메이커인 반다이에서 일용품, 문구, 기성복, 캐릭터 식품 등으로 출시됐다. 그리고 나서 TV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만들어져 1997년 4월 TV동경계 전국 6개국 제트와 로컬 31개국을 합한 37개국에서 처음으로 방송되었다. 그리고 1997년 11월 13일 영화판 제작발표를 한 후, 극장판으로 2편이 만들어 져서 흥행에 성공했다. 이런 것을 복합미디어 전략이라고 하는데, '포켓 몬스터'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이런 전형적인 공식을 따라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홍보 전략먼저 일본의 민간 방송 중 하나인 일본 TV방송망 주식회사가 제작에 참가하고 NTV의 많은 프로그램에서 무료로 작품을 소개해 준다. 게다 가 일본을 대표하는 광고 대리 회사인 하쿠호도나 덴츠등 이 이어주는 대기업과의 타이업(tie-up)광고도 이루감 있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 리미티드 기법은 '철완아톰'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1초에 8프레임을 사용하였으므로 당연히 풀 애니메이션에 비해 화면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래서일본은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줄거리의 질을 높이고, 한컷 한컷 정교하게 그렸다. 결국 이런 디즈니와의 차별화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성공 비결 중 하나인 셈이다.* 작품 제일주의대부분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는 작가의 위치와 의견을 존중해 준다. 이 같은 작가주의는 모든 애니 메이터들을 일하는 노동자로서가 아닌 한 명의 장인으로 대접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들은 양보다 질을 중시하며 작품 제일주의의 원칙을 내세운다.먼저 일본을 대상으로 질 높은 작품을 만들고 해외는 그 다음이라는 생각으로 작품 제작에 임하는 것이다. 내용이 나쁘면 아무리 선전을 많이 해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이다.3. 제패니메이션의 사회적 영향1)오타쿠 문화오타쿠라는 일본어는 원래 우리나라 말로 치자면 댁이라는 말로 상대방 또는 집을 가리키는 말인데 최근에는 어느 한 분야에 광적으로 취미의 도를 넘어 빠져드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팬 ,매니아, 그 다음의 단계가 오타쿠다. '오타쿠'가 되기 위해선 전문가를 넘어 비평가 적인 시각까지 지녀야 한다. 애정의 대상을 여러 각도의 관계성으로 인식하고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뒤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오타쿠가 팬이나 매니아와 다른 점이 바로 이점이다. 앨빈토플러는 '미래 사회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결합된 생비자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여 이런 이분법이 사라진다고 했는데 이러한 전조를 바로 일본의 오타쿠에서 찾아볼 수 있다.최근에는 이 오타쿠라는 단어가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배경에는 미국은 물론 동남 아시아, 유럽 등지 전세계에서 일본의 아니메, 만화의 팬이 급증하고 있는 사정이 있는데, 즉 이런 사정은 세계적으로 아니메 오타쿠가 확실하게 늘어가고 있다는 만화란 “이번엔 어떤 스포츠 붐을 일으킬 것인가?”를 결정짓는 스포츠 문화의 견인차이기도 하다.일본은 지금까지 월드컵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조금은 있었다. 그런 일본이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자국에서 유치하기 워해서 1993년부터 프로축구 J리그를 출범을 신호탄으로 수백명의 청소년을 해외에 축구 유학을 시키는 등의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하여 요즘은 프로야구보다도 프로축구의 인기가 더 높을 정도로 축구의 붐이 조성되었다.그런데 이러한 일본의 축구 붐이 조성되기까지 측면에서 더없이 지대한 기여를 한 일들공신은 다름 아닌 1982년 첫방송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다카하시 유이치의난 미야자키 히야오의같은 류의 축구만화들이었다.일본 만화가 단지 축구의 붐만 일으키고 있는게 아니다. 얼마 전까지 일본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킨 NBA농구 붐 역시 라는 농구만화가 만든 하나의 작품이다. 이노우에라는 무명의 젊은 만화가가 1993년부터 4년간 연재했던 이 만화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일으켜 일본의 한 학교 운동부원 5명 중 1명이 농구부원일 정도로 일본 전역에 대대적인 농구 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을 하였다. 이러한 열기는 단순한 스포츠에 국한되지 않고 청소년들 사이에 농구패션을 유행시킬 만큼 대단했다. 그리고 직장인들은 퇴근 후 밤늦게 까지 공원 등지에서 간이 농구를 즐기는 길거리농구가 큰 인기를 끌었다. 만화 한편 때문에 지난 수십 년간 쳐다보지도 않던 농구는 이제 일본의 젊은 세대가 즐기는 사회체육 운동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은 것이다.5)교육수단, 사회운동으로서의 만화일본에서 만화는 결코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점유물이 아닌 지 이미 오래이다. 또 더 이상 킬링타임용 오락거리나 반 교육적 매체로만 인식되고 있지도 않다. 만화는 잘만 이용하면 훌륭한 교육수단이자, 사회운동수단이라는게 일본인의 생각이다.일본도 우리나라의 학생들처럼 영어에 저항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저항감 때문에 일본인의 영어실력은 우리 못지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