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줄거리다리를 저는 약간의 장애는 있지만 착하고도 순진한 여자 제르베즈. 그녀는 결혼은 안했지만 자신의 사랑이라고 믿는 랑티에와 동거를 하면서 자식을 둘이나 낳았다. 하지만 랑티에는 제르베즈의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앞 집 창녀와 바람을 피우고 급기야는 창녀와 도망을 간다. 믿고 의지해왔던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제르베즈는 열심히 일을 하게 되고 그러던 중 성실하고 인간미 있는 기와장이 쿠포와 결혼을 하게 된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깊은 사랑 속에 안나(나나)라는 딸을 낳았고 또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며 그들의 꿈인 세탁소 경영을 위해 돈도 저축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 쿠포가 작업 도중 지붕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면서 그 동안 열심히 모았던 돈을 다 써버리게 된다. 그러나 대장장이 구제의 호의로 세탁소를 차리게 된다. 쿠포는 음주에 빠지고, 어느 날 랑티에를 데려와 셋의 추악한 동거가 시작된다. 희망을 잃은 일가의 생활은 점점 악화되어가고, 쿠포는 알코올 중독증세로 정신병원에 끌려가고 그녀 자신도 가게를 팔아 술만 마셔댄다.2. 느낌과 총평이 영화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 역시 유전적 요소와 환경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르베즈는 19세기 여성들, 특히 하층계급 여성의 삶과 애환을 보여주는 여인이었다. 어머니이자 아내로써 착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그녀의 환경이 그녀를 비극으로 몰아가고 파멸시켰다. 한 여성으로써의 삶이 아닌 남자들의 노예로써 살아간 그녀의 모습에서 수동적인 여성상을 볼 수 있었다. 가부장제 사회에 의해 억압당하면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그 시대가 만들어 낸 노예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그녀의 강한 의지를 보며, 왜 그녀가 쿠포를 버리지 않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환경인 두 남자중 한 명인 쿠포는 알코올 중독자이고 또 다른 남자 랑티에는 난봉꾼이다. 이런 두 남자 사이에서 왜 성실한 구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구제를 따라 떠났다면 그녀의 삶이 그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런 그녀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면서 그녀의 또 다른 모습도 발견 할 수 있었다. 세탁장에서 비르지니와 싸울 때 귀를 찢고 뜨거울 물을 붓고 볼기를 치는 장면에서 잔인함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남편인 쿠포가 있으면서 힘들 땐 구제의 사랑을 원하고, 자신의 첫남자인 랑티에에게 다시 몸을 맡기는 모습에서 요부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 7살인 나나가 비르지니에게 리본을 주라고 하는데 그 리본은 몸을 단장하는 장식으로, 나나가 매춘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어머니의 모습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나나의 모습에서 인간에게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의 고도는 무엇인가...내가 읽어 본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예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애초에 생각한 바만큼 좋지는 않을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극같다. 이 극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절망하고 때로는 홀로인 듯 외로움에 떠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맨 처음 이 극을 읽고 무슨 내용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어 계속 '고도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신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고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얘기, 그리고 교수님이 말씀해 주셨던 교도소의 범죄자들이 느꼈던 자유에 관한 생각 등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그 중에서 나의 고도는 무엇일까 생각한 끝에 나에게 있어서의 고도는 사랑(진정한,영원한)이라고 생각했다.극중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멀리가면 절망하며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서로를 안아주며 서로의 존재를 느낀다. 하비만 계속 불안해 하며 고도가 오면 우리는 행복할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이런부분에서 고도를 사랑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사랑이 그다지 좋은것만은 아니다.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속에 행복함을 느끼지만 반면에 불안함과 외로움도 같이 느낀다. 나는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소설에나 시에서 보이는 그런 완전한 사랑이 과연 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주는것보단 받기를 원하고 자신이 만족할만한 사랑을 하지 못할땐 절망과 아픔을 느낀다. 진정한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점점 떠나고 있음을 느낀다.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랑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다. 진정한 사랑을 꿈꾸며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그 아픔을 잊어버리고 다시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결국 영원한 사랑은 오지 않는다. 극 중에서 한 소년이 와서 고도는 오늘 못오고 내일 온다고 말을 전한다. 나는 이것은 영원한 사랑 즉 고도라고 생각하고, 그냥 영원한 사랑을 대신해서 오는 보통 사랑 즉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고도 대신에 말을 전하려고 온 소년, 영원한 사랑을 기다리지만 그 사랑은 오지 않고 불안하고 완전하지 못한 사랑이 와서 영원한 사랑이 올거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결국 고도는 오지 않고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는 결국 우리는 포즈와 럭키처럼 될 것이다.포즈는 럭키의 목에 줄을 매달아 놓고 노예처럼 부린다. 우리는 가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자신에게 묶어 두려고 한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포즈처럼 화를 내고 럭키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러 가지를 요구하게 된다. 정신적으로나 심적으로 잔인하게 학대하여 자신의 노예처럼 부리지만 결국 포즈는 장님이 된다. 그리고 럭키는 벙어리가 된다. 생각하는 것이 파괴되어가고 의식이 해체 되어 가는 우리들은 포즈와 럭키가 보여준 것처럼 주어진 시간 속에 어느 날 누구는 벙어리가, 귀머거리가, 장님이 되어 버리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일 것이며 불구의 몸으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이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쓰곤 한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 말에 분개하고 그 발언자를 조선시대 사람인 양, 비웃기까지 한다. 현재 우리 나라 에서는 여성 인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 호주제 폐지 운동 등의 사회 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으며, 각종 페미니즘 잡지와 웹사이트들이 평등 의식 확산을 위해 열심히 활동 중이다. 우리가 가장 흔히 성불평등을 접할 수 있는 건 대중문화이다. 우리 생활에 가장 가까이 있는 대중 문화는 성차별을 은연중 보여주고 있다. 가장 친숙하기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대중문화의 특성상 여성들은 아무 것도 모른 체 무분별 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중 디지털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을 토대로 대중음악. 광고. 영화. 등 각 장르의 벽을 허물고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각광받고 있는 뮤직비디오를 통해 그 속에 나타난 여성상을 비판적 시각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먼저 내가 비판하고자 선택했던 뮤직비디오는 김건모의 더블 이다. 선택 동기는 단순했다. 그 전에 뮤직비디오를 보고 가장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랑을 주제로 한 가사 말과 탤런트 황인영의 출연으로 관심을 모았던 뮤직비디오다. 대충 내용은 이러하다. 김건모는 바보 신사 가수 등 1인 3역을 하고 세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던 황인영이 결국 가수 김건모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의 방황 을 끝낸다는 내용이다. 사실 내용 면으론 전혀 여성상을 비판할게 없다. 하지만 뮤직비디오를 직접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대부분 여성 연예인들은 주로 육체를 자본으로 하는 스타이미지 중심형이다. 특히 이 뮤직비디오에 재현되는 성별 이미지는 과히 좋지만은 않다. 우선 여성 이미지는 청순하고 순종적인 이미지와 성적 매력을 무기로 남성을 위협하는 관능적인 요부 이미지로 양극화되었으며, 이 둘의 중간적인 유형으로서 섹시한 춤을 통해 여성의 몸에 집중하게 하는 섹시걸 이미지로 발견되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뮤직비디오의 대부분은 여자 연예인의 섹시한 춤으로 채워져 있었다. 타이트한 옷과 깊게 패인 상의는 여성의 몸에 집중하는 시각적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아래에서 위로 잡은 컷은 여성의 엉덩이와 가슴을 중점적으로 찍었으며 여자의 몸을 훑어보는 남성적 시각으로 그려져 있었다. 특히 뮤직비디오 내용보다는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여 지속적인 시선을 끌게 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적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둘째, 김건모의 행동이다. 1인 3역을 하는 김건모는 우선 황인영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가슴을 한번만 만지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그때 황인영은 껌을 씹으며 남성의 성을 자극하는 요부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김건모의 손을 뿌리친다. 우선 여자를 성적 대상자로 보고 요부 이미지로 형상화 한 그 장면은 여자의 가슴 쪽에 관심을 쏠리게 하여 남성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황인영이 가수로써의 김건모에게 다가서며 상대자를 유혹하고 있을 때 다른 캐릭터인 김건모가 벽을 통해 그 상황을 듣고 벽너머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관음주의적 시각은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성의 몸을 만지며 여성의 몸을 관찰하는 부분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강조했다는 게 느껴졌다.셋째, 뮤직비디오 속엔 나오지 않으나 제작 과정에서 보인 문제들이다. 촬영 중에 김건모의 노골적인 성적 행동으로 인해 황인영은 계속 무안해 하고 NG가 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부분 남성 스텝들 사이에선 웃음꽃이 피어난다. 감독은 더 찐하게 해보라는 요구를 하고 황인영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이와 같이 작업 현장에서도 여성의 성적 권리가 농락 당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점은 이러한 장면을 쇼프로그램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방송을 통해 내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남성이다. 결국 모든건 남성적 시각으로 표현되어 지기 마련이다. 그 속에서 여성의 성적 권리를 보호해줄 장치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렘2를 감상하고...하렘2에 대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784년 프랑스 낭뜨, 에이메이는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여 수도원을 떠나 집으로 향한다. 배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해적들에게 붙잡혀 노예의 신분이 되어 팔리는 신세가 된 에이메이는 오토만 제국의 하렘으로 팔려간다. 에이메이는 거기에서 낙시델이란 이름으로 술탄 압둘 하미드 1세의 여인이 되어 아들을 낳지만 자신의 아들을 술탄으로 등극시키려는 시네페르버의 계략으로 아들을 잃고 만다. 그런 그녀를 위해 술탄 압둘 하미드 1세는 어머니를 여윈 마흐무드를 양자로 삼게 한다. 예니체리의 압력으로 인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압둘 하미드 1세는 조카 셀림 3세를 등극시키면서 운명하였다. 새 술탄의 등극으로 에이메이는 떠나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던 셀림 3세는 그녀가 하렘에 남아있길 간청하여 그녀는 다시 하렘에 남는다. 하지만 근위대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셀림 3세는 죽음을 맞이하고 에이메이와 마흐무드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결국 그녀는 마흐무드를 위해 술탄이 된 무스타파 4세를 살해하고, 술탄 마흐무드 2세를 등극시킨다. 어린 마흐무드를 대신해 9년동안 통치하다 1817년, 카톨릭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후 죽음에 이르게 된다.이 영화에서 흥미롭게 본 장면이 여러 가지가 있다.첫째로 종교에 관련된 장면들이다. 첫장면에 내시가 신부를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온다. 에이메이는 카톨릭 신자다. 그런 여인이 아무리 이슬람국가에 살고 있다 해도 그 당시 종교를 함부로 바꿀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죽기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난다. 영화 사이 사이에 그녀가 기도를 하면서 마지막엔 꼭 자신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한다. 카톨릭 신자이면서 다른 종교를 가진이를 사랑하게 된 에이메이는 종교를 의식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감정에 따르게 된 것이다. 에이메이가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그녀가 그곳에서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에이메이는 당차면서도 현명한 여성같기도 하지만 다른면에서 보면 자신이 살기 위해 종교를 잠시 버리고 권력과 남성을 선택한 요부라고도 생각된다.그 당시 이슬람과 카톨릭의 대립도 볼 수 있었다. 서로를 약탈하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던 당시에 에이메이는 해적들에 의해 알제르 시장에 팔리게 된다. 또한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술탄은 사신으로 온 러시아인에게 종교를 바꾸겠는가 라고 물어보고, 바꿀수 없다 하자 협상을 결렬시킨다. 종교로 인해 협상이 깨진 것은 지금의 관점으로 볼땐 이해할수 없는 장면이다. 과연 종교때문이었을까? 내가 보기엔 전쟁을 원하는 예니체리의 강압에 못이겨 종교를 핑계로 일부러 협상을 결렬 시킨 것 같았다. 만일 왕권이 강력하였다면 굳이 질게 뻔한 전쟁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이 영화의 주인공인 에이메이가 술탄의 수청을 들기 위하여 튤립이 그녀를 낙시델로 부르자, 자기는 에이메이라며 낙시델이란 이름을 강력히 거부하였다. 이름은 자신의 뿌리이자 종교와 관련된 것이다. 이름을 바꾸는 건 이슬람인으로 취급하고 자신의 종교를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에이메이는 반항한다. 그리고 에이메이는 사랑이 없는 잠자리가 싫어서 수청을 거부하였지만 시네페르버는 그것을 이교도 남자와 잠자리를 해선 안된다는 종교적 원리로 해석한다.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종교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수 없는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장면들 중에 유독 이 장면을 인상깊게 보았다. 종교를 떠나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신있게 말한다는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을 경우엔 더더욱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메이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아가 권력의 정상에 접근하기까지 하였다. 주변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고 대처하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이라고 생각된다.둘째로 하렘에 관련된 장면들이다. 하렘의 원래 뜻은 신성하여 범하지 못하는 금지된 곳 이지만 실제로는 남성출입 금지구역이다. 여기서는 왕 이외의 남성들은 들어올 수 없으며 내시나 난쟁이들은 출입이 가능하였다. 동성애를 하는 여인이 에이메이를 꼬시려다 발각되자 포대에 쌓여서 물에 던져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왕의 여인으로서 왕 이외의 다른 사랑은 있을 수 없으며 만일 그럴시엔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그 장면을 보며 옛날 우리나라의 왕과 궁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왕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평생을 궁에서 보내다 죽음을 맞이하는 궁녀들. 어쩌면 우리나라의 하렘이 여성에게는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술탄이 죽으면 그 술탄의 여인들은 나갈수 있게 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한번 궁에 들어오면 죽어서야 나갈수가 있었다. 영화에서의 하램의 여인들은 온갖 아름다운 것들만, 좋은 것으로만 살고 있지만 궁녀들은 그렇지도 않았다는걸 볼 때 하렘제도는 이슬람만의 관습이 라 볼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여인을 한낱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이러한 관습은 내 자신이 여자의 입장으로서 볼 때 불쾌한 장면이었다. 함부로 얼굴을 드러낼수도, 자신의 의견을 말할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에이메이의 행동은 다른 여인들을 대신하여 여자로써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이루어 나간 것이다. 어쩌면 에이메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모범이 될만한 여성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