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 南山의 佛敎 彫刻의 意義I. 머리말II. 南山의 歷史III. 佛敎彫刻IV. 南山 佛敎彫刻의 編年V. 南山의 意義I. 머리말경주의 산치고 신라의 유적이 없고 전설이 없는 산이 있을까마는 그 으뜸의 자리에는 남산이 있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들로 이루어진 남산은 남북 8km 동서 4km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있다. 남산은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뉘는데, 동남산 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 서남산 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 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남산에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말기까지 약 300년 동안 계속하여 불상과 탑이 조성되었으므로 남산의 불상만 가지고도 신라 조각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남산에는 1백개소의 寺址, 61기의 석탑, 78구의 석불상이 동서로 흐르는 35개의 모든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의 산은 대개가 수려한 巖峰으로 빼어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남산에서처럼 계곡마다 寺院을 짓고 圓刻像 또는 磨崖像을 彫像하여 하나의 산에 이렇게 많은 불상이 밀집된 곳은 찾아 볼 수 없다.이 글에서는 먼저 남산의 역사와 불교유적을 살펴본 후 불교사적 의의와 新羅人이 갖은 남산에 대한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II. 남산의 역사청동기시대(기원전 1000~300년쯤),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300~0년쯤)에는 남산의 꽤 높은 곳에 사람이 살았고, 역사시대로 들어가는 原三國時代(기원후 0~300)에는 사람들은 보다 아래쪽 산기슭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신라의 귀족들이 경주 평지로 옮겨간 삼국시대에는 일종의 聖域으로서 禁山처럼 되어 있었던 모양이며, 고신라기의 유적으로는 말기의 석실분이 몇기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 남산이 불교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하는 것은 통일 가까운 7세기 전반기부터이며, 불교의 南山 진출은 8세기로 들어가면서 점차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남산이란 산 자체에 대석에 작은 石窟을 굴착하여 그 배후 벽면에 裳懸座의 如來坐像을 浮彫하였다. 이 佛谷의 石窟은 작은 규모로 흔히 龕室이라 불린다.이 석굴의 벽면에 如來坐像이 얼굴은 높은 부조로, 신체와 대좌는 낮은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素髮은 그대로 귀와 연결된 듯 하나로 처리하였다. 얼굴 모습은 단아하여 여성적인 느낌을 주며, 두 손은 포개어 좌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옷자락은 두 무릎 밑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옷자락은 두 무릎 밑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衣紋의 조각수법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이 불상은 三國時代 末期의 佛像으로 南山 佛蹟 가운데 시대가 이른 것이다.2. 三花嶺 彌勒三尊佛남산의 북봉에서 옮겨온 것으로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석조 불상 중에서는 매우 큰 상이며 보존상태도 좋은 편이다.본존은 두 다리를 내리고 의자 같은 곳에 걸터앉은 倚像으로, 인도나 중국의 상에서는 많이 보이는 형식이나, 우리나라의 불상 표현 중에는 드문 자세이다. 미리와 손 부분이 불신에 비해 큰 편이고, 얼굴의 형태도 크고 둥글어서 조각적인 양감이 비교적 강조되고 있다. 눈은 부은 듯이 튀어나오게 조각되었고, 입가의 미소는 온화한 표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들은 7세기 신라의 불상양식에서 흔히 나타나는 요소이다.좌우의 보살입상은 그 얼굴모습이 단아하고 복스러워 ‘애기부처’라고도 불린다. 전체적으로 두 모습이 비슷하나, 三面頭飾, 목걸이, 手印, 天衣 등이 모두 달라서 두 보살을 부분적으로 다르게 표현하려 했던 뚜렷한 의도가 엿보인다. 앳된 미소, 통통한 얼굴과 손, 융기선의 옷주름, 좌우로 뻗친 天衣자락 등 三國期의 전형적 양식이다.3. 禪房谷 三尊佛鮑石亭이 있는 鮑石谷을 지나쳐 그 이웃한 계곡인 禪房谷을 조금 들어가면, 三尊石佛이 남향하여 서 있다. 이 禪房谷 三尊石佛은 古新羅 양식의 대표적인 예이다.본존은 신체에 비하여 큰 얼굴, 천진스러운 미소, 두터운 大衣에 굵은 옷주름, 그리고 앞면의 도식적인 U字 옷주름, 비사실적인 수인의 표고 좌우의 협시보살이 입상이다. 오른쪽 보살은 정병을 들었고 왼쪽 보살은 연꽃을 들고 있다. 두 보살의 보관에는 化佛이 없어서 어떤 보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본존의 이름도 알 수 없으나 전형적인 항마촉지인의 수인으로 보아 釋迦牟尼佛이 확실하다.본존은 머리가 둥글고 큰데 素髮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큰 얼굴은 미소가 없는 근엄한 모습이고 상반신은 당당한 자세이다. 단순한 寶珠形 광배, 부드럽고 풍부한 신체 모델링, 뚜렷하게 융기된 옷주름, 하반신에 비하여 비교적 큰 상반신의 신체비례, 단순하고 편평한 연화대좌 등은 통일신라 최성기 양식을 예고하는 8세기 초의 양식을 보여준다.이 마애 삼존불 바로 앞에 큰 암석 네 면을 다듬어 전형적인 四方佛을 조각하였다. 사방불은 보주형 광배, 소발,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맺어 가슴에 든 수인, 通肩衣에 융기된 옷주름, 앉은 자세, 연화대좌 등 네 불상의 도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東面佛은 왼손에 藥壺를 들고 있어 藥師如來임을 알 수 있다. 암석의 네 면을 곱게 다듬어 단정한 육면입방체를 마련하여 四方佛을 배치한 것은, 8세기 중엽 이후 성행한 石塔의 初層塔身 사면의 四方佛 浮彫의 선구라 할 만하다.神仙庵의 觀音菩薩坐像은 살찐 얼굴, 풍만한 몸, 치렁치렁 늘어진 천의 등 盛唐 양식의 영향이 뚜렷하여 칠불암 불상 양식보다는 뒤에 오는 8세기 중엽의 작품이라 생각된다.5. 塔谷 磨崖四面佛부처바위라고도 불리는 탑골 사방불암은 신라시대 사방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내용이 다양하다. 산만하게 여러 개로 구성된 듯한 거암의 전면을 佛, 菩薩, 神將像, 動物, 塔, 飛天, 樹木 등으로 화려하게 莊嚴하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불국토의 세계를 거암 전면에 이렇게 다채롭게 표현한 것은 다른데서 찾아보기 힘들다.가장 높은 북면에 5m 높이의 9층탑과 3m 50cm 높이의 7층탑을 부조하고 그 사이에 天蓋를 머리에 둔 여래좌상을 배치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평면적인 弱浮彫라 기법상 시대가 9세기경으로 내려옴을 알 수 있다.남면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균형잡힌 신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앉은 자세는 結跏趺坐이며, 수인은 降魔觸地印을 좌우로 바꾸어놓은 듯한 모양이다. 이러한 사실적인 체구의 표현은 8세기 중엽 불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7. 彌勒谷 如來坐像菩提寺址 石佛坐像이라고도 불리며,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서 원래는 법당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나 현재는 노천에 드러나 있다.큼직한 육계가 표현된 나발의 머리에, 얼굴은 장방형으로 양감은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가늘게 뜬 긴 눈, 오똑한 코,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 등이 조화를 이루며 묘사되어 있다. 얼굴에 비하여 신체가 조금 빈약한 편이며, 結跏趺坐에 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신체 부분을 감싸고 흐르고 있다. 擧身光背는 본존의 윤곽에 따라 꽃띠를 두르고 그 안에 화불과 꽃가지를 새겼다. 그 밖으로는 火炎文을 가득 채우고 중앙 꼭대기에 화불 1軀를 배치하였다. 아마도 盛期의 光背로는 가장 화려한 光背가 아닌가한다.전체적으로 양감이 줄어들어 평면성을 띤 이 석불좌상은 8세기 불상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으로부터 훨씬 진전되어 9세기 양식으로 이행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높다란 육계, 눈?코?입이 정제된 세련된 얼굴, 당당한 신체는 다소 위축되고 경직되는 9세기 불상과는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 불상은 8세기 불상의 세련된 佛格을 사실주의 조각으로 성공시킨 당대의 역작으로 높이 평가할만 하다.8. 三陵谷 石佛坐像남산 삼릉곡 정상 가까이에 있는 마애 대불 건너편에 있었던 불상으로 지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항마촉지인 약사여래좌상으로 얼굴은 근엄하며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얼굴은 근엄하며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풍만한 얼굴, 건장한 신체, 조심스럽게 표현된 층단적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 最盛期 양식의 여운을 반영하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불상이 우람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측면에서 보면 머리에 비하여 몸체가 작고 웅크린 자세로 볼품이 없어서 통일신라 IV. 남산 불교조각의 編年남산의 석불들은 7세기초 고신라 말기부터 시작하여, 10세기초 통일신라말까지의 약 3세기에 걸친 작품들이면서 많은 부분은 신라조각으로서는 전성기를 지난 8세기 후반, 9세기 것들이다. 조각기법도 磨崖, 線刻, 圓刻 등 다양하고, 불상의 형식도 다채롭다. 古新羅 末期의 石佛로는 佛谷의 石佛, 三花嶺의 彌勒三尊佛, 禪房谷 三尊佛 등을 들 수 있는데, 모두 古新羅의 대표적 불교조각이다. 이러한 古新羅 佛像이 경주지방에서는 斷石山 磨崖佛郡을 빼놓고는 이 南山에 집중되어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은 일찍부터 佛敎徒들에 의해 南山이 주목되었음을 의미한다.統一初에는 烽火谷 七佛庵이 조성되었다. 이 불상들은 통일신라 最盛期 樣式에 이르는 과도기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남산의 佛域化는 경덕왕(742~764) 때에 본격화한 모양이며, 그 무렵의 석불들은 광배와 대좌를 가진 당당한 체구의 독립상들이다. 8세기 중엽의 최성기 양식으로는 笠谷 如來坐像, 茸長谷 茸長寺址의 三輪臺如來坐像과 磨崖佛을 들 수 있으며, 이에 잇대어 조성된 것으로 彌勒谷 如來坐像, 三陵谷 如來坐像과 線刻三尊佛들, 烽火谷 神仙庵 磨崖觀音菩薩像, 藥水谷 如來坐像 등을 들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남산의 불적들은 대부분 8세기, 9세기 것들이지만 9세기에 들어서면 불상들은 독립된 圓像에서 부조나 선각의 마애불로 바뀌고 있다. 그 예로 塔谷 四方佛과 三陵谷 石佛坐像(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을 들 수 있다. 9세기 중엽 이후 것으로는 三陵谷의 磨崖如來坐像과 線刻佛들, 潤乙谷 磨崖三體如來坐像, 藥水谷 磨崖大佛 등을 들 수 있다.이들 형식을 통관하면 古新羅 말기와 統一初에는 圓刻 三尊佛 혹은 一光三尊式 磨崖佛이 造成되었고, 統一 盛期에는 다양한 형식의 獨尊이 창안되었으며, 降魔觸地印의 石佛坐像이 크게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盛期를 지나면 定形의 佛像들과 병행하여 새로운 형식의 佛像들이 극히 다양하게 조성되어 編年이 어렵게 된다. 八部衆彫刻이 출현하기 시작하고 塔谷 磨崖佛郡과 같은 특이한 형식이.
14세기 후반 象嵌靑磁八角?匙 의 소멸에 대하여I. 머리말II. 象嵌靑磁八角?匙의 기형 변화III. 象嵌靑磁八角?匙의 소멸 원인I. 머리말고려시대 후기의 상감청자는 향로나 象形器皿 등 의례적인 기종이 줄어들고 ?, 대접, 접시 등과 같은 실용적 음식기들이 주종이 되어가는데 이와함께 象嵌靑磁八角?匙도 상감청자의 주종을 이루다가 14세기 후반 인화분청의 성립과 함께 소멸되었다. 이 글에서는 象嵌靑磁八角?匙의 소멸에 대한 원인을 살펴보도록 하겠다.II. 象嵌靑磁八角?匙의 기형변화1. 象嵌靑磁牡丹文八角?匙明宗(1202年歿) 智陵出土 국립중앙박물관2. 象嵌靑磁菊花文「丁亥」銘八角?匙)1347년 고려대학교박물관3. 象嵌靑磁雲文八角?匙14세기 후반 해강도자미술관III. 象嵌靑磁八角?匙의 소멸 원인고려후기는 권문세족에 대신하여 신흥사대부 세력과 왜구?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면서 급성장한 신진무인세력을 주축으로 지배세력이 바뀌었으며,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내외면에 있어서 혼란과 불안정이 지속된 사회였다.현존하는 유물과 窯址 조사 자료를 토대로 이 시기의 상감청자를 보면 14세기 후반에는 운반용이나 의례용의 주전자, 향로, 문방구 등 관상용 기명이 감소하고 대신 대접, 접시 등 음식용기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선 여기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다.첫째, 청자의 생산이 정책적으로 시행되었다. 상감청자의 제작이 전국 각 지방에서 이루어졌고 궁궐에서까지 청자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청동기에 비하여 청자의 실용성과 산업성이 높게 인식된 결과로 볼 수 있다. 恭讓王 3年(1391)에 보이는 기록에 의하면 생활기명의 재료를 磁器나 木器로 제작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청자를 생산하는 사회배경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인 산업정책은 상감청자의 다량생산의 여건을 제공하였다고 본다.둘째, 상감청자의 수요층의 확대이다. 고려시대의 신분제도가 정치, 경제, 사회적인 혼란으로 인하여 고려말기로 갈수록 동요의 폭이 넓어져 고려말의 양반층도 대폭적인 팽창을 하게 되었다. 또한 14세기의 李齊賢의 『益齊亂藁』를 보면 제주도로 가는 배에 청자와 함께 쌀을 싣고 있었다고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점은 중앙의 상층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청자가 보편화되어 일반 수요층을 확대한 현상을 보이는 기록으로 보인다).셋째, 14세기말 15세기초 가마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4세기 후반 왜구의 침략으로 강진?부안가에 위치해 있던 이 시기의 가마들이 파괴되고, 신흥사대부들의 요청에 따라 전국 내륙지방에 곳곳에 가마가 설치되는 전환의 모습을 가져왔다).이상으로 보건대 14세기 후반의 상감청자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혼란속에서도 수요계층이 확대되고 국가의 정책적인 관심으로 인하여 청자 제작량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象嵌靑磁八角?匙’가 소멸된 원인을 이와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다.우선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象嵌靑磁八角?匙는 成形된 器面의 내부에 陶范(틀)을 대고 외면을 손으로 눌러서 다듬어 만든다. 陶范이란 정교한 기형이나 문형을 쉽게 제작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시간이 더 소요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당시 대량생산을 원했던 시기에 이같은 방법으로 제작하는 것은 제작자의 입장에서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둘째 明宗 智陵出土 象嵌靑磁八角?匙는 기벽도 얇고 만듦새도 정교하다. 釉胎가 情致하고 釉가 비교적 두꺼우며 淡緣色 또는 灰靑色을 띤다. 13세기 이러한 제품에서 14세기 후반 면을 구획한 상감선을 제외한다면 물레로 성형한 일반 접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제품은 고급 수요자의 관심에서 멀어졌으리라 본다.셋째 象嵌靑磁八角?匙는 물레로 成形하여 만든 제품보다는 좀 더 장식적이기 때문에 도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象嵌靑磁八角?匙의 소멸은 질적으로 하락하여 고급수요자의 관심에서 멀어진 점과 제작 측면에서 볼 때 수공이 많이 가는 관계로 경제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도태된 것으로 본다.1. 단행본姜敬淑, 『韓國陶磁史』, 일지사, 1989.鄭良謨, 『高麗靑磁』, 대원사, 1998.해강도자미술관학예실, 『高麗時代 後期 干支銘 象嵌靑磁』, 海剛陶磁美術館, 1991.2. 논문구일회, 「고려시대 청자상감대접의 편년연구- 간지명이 있는 대접들을 중심으로」『미술자료』54, 국립중앙박물관, 1994.윤용이, 「고려도자의 변천」『한국도자사연구』, 문예출판사, 1993.이종민, 「14세기 후반 고려청자상감의 신경향- 음식기명을 중심으로」『미술사학연구』201, 한국미술사학회, 1994.정양모, 「간지명을 통해 본 고려후기 상자청감의 편년」『고려시대 후기 간지명 상감청자』, 해강도자미술관, 1991.정양모, 「고려청자의 명문」『고려청자, 강진으로의 귀향』, 강진청자자료박물관, 2000.최건, 「고려시대 후기의 상감청자와 도자관에 대하여」『고려시대 후기 간지명 상감청자』, 해강도자미술관, 1991.
法住寺의 歷史와 佛敎 遺物I. 머리말II. 法住寺의 沿革과 配置1. 연혁2. 가람배치III. 法住寺의 遺物I. 머리말법주사는 忠淸北道 報恩郡 內俗離面 舍乃里의 속리산에 위치한 사찰로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5교구 본사이다. 원래는 寺名을 ‘吉祥寺’라 하였는데 고려 이후에는 ‘法住寺’ 또는 ‘俗離寺’라는 이름을 혼용한 듯하다. 이 글에서는 법주사의 沿革과 가람배치를 살펴보고 남아있는 유물 등을 통해 불교문화를 알아보고자 한다.II. 법주사 연혁 및 배치1. 연혁기록상으로 보면 법주사의 創建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 고종 11년(1873)에 이루어진 , 순종 4년(1910)에 지은 , 李能和의 『朝鮮佛敎通史』, 權相老의 『韓國寺刹全書』 등 여러 기록에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義信和尙이 법주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이고 있을 당시 三國爭覇의 요충지가 되었던 이곳에 신라 승려인 義信和尙이 대규모의 가람을 營建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군사상의 목적에 필요한 작은 庵子 규모의 사찰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성덕왕 19년(720)에 사찰을 중수했고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중창하고부터 대찰의 규모를 갖추었다).법주사가 법상종 도량으로서의 형식을 갖춘 것은 진표율사와 그의 제자 永深 大德 때이다). 속리산에는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사찰이 건립되어 있었으며 영심 대덕 등이 사찰을 중수하고 점찰법회를 열어 법상종 도량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고려시대에는 법주사가 왕실과 연관을 맺고 법상종의 도량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태조 1년(918)에 王師인 증통 국사가 중건하였고 문종 때에는 여섯째 왕자였던 導生僧統이 법주사에 주석했다. 도생대사는 금산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혜덕왕사의 수제자이다. 인종 때에는 왕이 이자겸 일파의 횡포로 죽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고 병환을 낫게 히기 위하여 近臣을 보내어 점찰법회를 열었다는 내용이 俗離寺占察法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주사는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짐으로써 사찰의 중건과 중수 등 營建活動이 끊이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숭유억불책이 강력히 시행되었던 조선전기에도 법주사는 왕실의 願刹로서 중요시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던 법주사와 산내 암자가 모두 소실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으나 인조 4년(1626)에 碧岩 覺性선사가 나와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2. 가람배치법주사는 속리산 팔봉 가운데 수정봉과 관음봉을 잇는 주능선의 동쪽 골짜기에 터를 잡았는데 해발 1천미터가 넘는 험한 산골에 드물에 펼쳐진 널찍한 평지를 택한 것이다. 법주사는 산지에 입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구성형식은 오히려 平地寺刹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형적인 산지사찰의 경우 진입에 따라 공간의 位階가 漸增하는 소위 縱深形式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법주사의 경우 산속에 위치한 비교적 광활한 평지라는 지형적인 이점을 십분 이용하여 일반적인 산지사찰의 구성형식과는 달리 미륵전과 대웅보전이 중심이 된 直交形式의 가람배치를 이루었다). 법주사의 가람구조는 수정?관음의 두 봉우리와 평지라는 점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용화보전, 대웅보전 두 건물이 팔상전을 중심으로 직각의 축선 위에 배치되어 있는 구조는 두 봉우리가 직교하고 있는 지형을 따른 결과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륵신앙과 화엄신앙의 결합이라는 교리적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법주사의 현재 구조는 고려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주사는 미륵 단독 신앙의 사찰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복합적인 구도를 갖는다. 법주사는 미륵불(예전에는 용화보전)과 대웅보전(정확히는 대적광전)이 2개의 중심 불전을 이룬다. 법주사는 미륵신앙과 화엄신앙이 복합된 이중적 신앙체계를 가지며 이를 가람배치에 구현한 것이 바로 지금의 구조이다. 즉 법주사는 화엄신앙과 미륵신앙을 모두 중요한 신앙적 핵심으로 하기 때문에 대웅전과 미륵불(용화보전)이라는 2개의 건축 중심을 설정해야 했으며 각각의 중심은 강렬한 중심을 결합시켰다. 또한 2개의 구성축은 앞서 말한대로 수정봉과 관음봉을 향하고 있어 지형과 교리의 해석이 일치하는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미륵계 사찰 구성의 또 다른 특징은 연못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법주사의 석연지 역시 용화보전(미륵전) 앞에 놓여졌던 시설물이다.18세기의 법주사 그림에는 팔상전과 용화보전을 잇는 축선상에 석연지-석등-희견보살상이 일렬로 놓여져 있었다. 각 시설물들의 의미도 그러하지만 탑-석물-불전을 잇는 구성축을 다시 강조하려는 것이 배치의도였다. 법주사의 정각스님은 이 가운데 희견보살상이 실제로는 가섭존자상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만약 이것이 가섭존자상이라면 탑-석연지-가섭상-석등-미륵전으로 이어지는 구성축이 완벽한 용화세계를 구축한 것이다.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고려시대의 가람구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계속 건물이 지어져, 정유재란으로 불타기 저엔느 불전이 20여 동에 다른 건물이 40여 동, 석조물이 10여점, 암자가 70군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는 초창기의 법상종 고유의 배치에 다른 여러 신앙체계가 습합되어 대규모의 통불교 가람이 되었다.그러나 1872년 용화보전이 무너지고, 옛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10m쯤 옮겨 1990년에 청동미륵대불을 완성하면서 예전 용화보전과 팔상전을 잇는 축위에 한 줄로 늘어서 있던 석연지, 석등, 희견보살상도 이곳저곳에 흩어져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법주사의 가람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 신앙축과 용화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 신앙축이 팔상전에서 직각으로 교착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 구성요소들이 마당 곳곳에 점점이 해체됨으로써 미륵신앙축은 사라져버렸다.III 법주사 유물1. 쌍사자석등2. 石蓮池石蓮池는 국보 64호로 높이 1.95m이며 둘레 6.65m이다. 화강암을 커다란 그릇 모양으로 깎아 안에 물을 담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지금은 능인전 앞쪽으로 옮겨졌으나 예전에는 법주사의 중심건물이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다. 미륵신앙 절과을 지었다는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고 연못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 미륵불전 앞에 놓기도 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김제 금산사 石蓮池, 공주 대통사터 石蓮池, 그리고 이 법주사 석연지 모두 미륵불상을 모신 용화보전 앞에 놓여있던 것이다.토속신앙 가운데 미리 또는 미르(용의 우리말)에 대한 신앙이 나중에 들어온 미륵신앙에 습합되었다는 지적도 있다.石蓮池는 8각의 댓돌 위에 커다란 半球형의 돌을 깎아 연못을 만들어 올려놓은 것으로 석조물 전체에 꽃, 구름, 난간, 덩굴 등의 무늬가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었다.밑에 방형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8각 받침이 있다. 8각 측면에는 각각 안상을 조각하였고 3단의 낮은 층단을 낸 다음 연꽃무늬를 덮었으며 그 위로 낮은 기둥돌이 커다란 연지를 받치고 있다. 이 기둥돌은 둘레가 둥그렇고 피어나는 구름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이같이 구름무늬를 받친 것은 이 연지가 땅 위의 연못이 아니라 천상계의 연못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인 듯하다).石蓮池는 하단부에 單葉仰蓮 8판을 돌리고 중간부분부터 상단에 이르기까지 큼직한 8판의 앙련을 돌렸는데 이 큼직한 연판 안에는 보상화문이 장식되어 웅대한 꽃잎에서 오는 중량감과 함께 세련미가 넘쳐 보인다. 위에는 童子柱를 세워서 난간을 돌렸고 밑의 난간 벽에는 천인상과 보상화문 등이 양각되어 한층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이 난간에도 파손된 부분이 많다. 이 石蓮池는 상하의 각 부가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표면조각은 활짝 핀 연꽃을 상징하여 蓮池의 용도에 알맞게 되어 있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조형에 있어서도 세련되어 8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3. 사천왕석등4. 奉鉢石像법주사 초창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석연지, 사천왕석등과 함께 옛 용화보전을 향해 한줄로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원통보전 옆 마당가로 옮겨졌다. 높이는 2.37m.이다.조각상의 얼굴은 심하게 손상을 입어 뚜렷한 모습은 알 수 없고 그릇을 받쳐들고 서 있는 신체는 팔뚝, 가슴, 벌린 두 다리 등의 표현에서 세밀하게 표현되었으며 하반신에만 걸친 속옷은 허리에서 띠매듭이 져 있는데 무릎 아래에는 옷이 뒤로 젖혀져 두 다리의 선과 맨 발이 드러나 있다. 머리 위로는 두 팔을 들어올려 그릇 받침대를 받쳐 들고 있으며 그 위에 놓인 그릇 표면에는 연꽃잎이 네 겹으로 층층히 피어오른 새김장식이 이루어져 있다.이 상을 자기 몸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한 희견보살이라 하는데 한편에서는 가섭존자상으로 보기도 한다. 서가모니의 제자 가섭은 미륵불이 하생할 때 가사와 발우를 미륵불에게 바친다는 수기를 받았다. 때문에 이 상이 발우를 받들고 여벌의 가사를 걸친채 미륵불을 기다리는 가섭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5. 마애여래의상法住寺 경내 墜來岩 남면에 미륵불이 새겨져 있고 동면에 지장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마애여래의상은 7m 암면에 불상의 전체 높이는 5m이며 보물 제 216호이다.마애여래의상은 倚子像인데 중국의 경우 그 예가 많지만 우리나라에는 흔하지 않는 像으로삼화령 미륵불의상이 알려져 있다. 의자상은 대개 미륵불이다. 법주사 마애불이 의상인 이유에 대해서 『三國遺事』에 “彌勒丈六像을 鑄成하고 金堂 남벽에 미륵이 내려와 受戒하는 장면을 그리니 경덕왕 23년(764)에 시작하여 혜공왕 2년(766)에 봉안하였다” 기록을 참고하여 그것을 모델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육계는 반달모양이며, 육계에 새겨진 螺髮은 三列로 맞추어 규칙적으로 새겨졌다. 육계의 한 가운데에는 ?珠가 있다.얼굴은 둥근 편이고 눈두덩은 부어있으며 눈은 옆으로 치켜 올라갔다. 또한 코는 길면서 빈약하고, 짧은 인중과 작은 입 등 고려시대 불상의 전반적인 특징을 보인다. 귀는 정면향이며, 목에는 三道가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는 수평으로 반듯하여 팔은 거의 어깨와 직각을 이루고 있다. 수인은 설법인이다. 대의는 우견편단이며 가슴 아래 부분부터 옷주름이 U형으로 흘러내려 발까지 이르고 있으며 배에는 중심부분의 옷주름이 표현되지 않다가 다리부분부터 다시 표현되고 있다. 상체는 허리가 잘록하며 허리는 길게 표다.
三國時代 佛敎思想-高句麗·百濟를 중심으로-{I. 머리말II.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발전III.고구려 불교의 특징1. 고구려 불교의 전래2. 고구려 불교의 성격IV. 백제 불교의 특징1. 백제 불교의 전래2. 백제에 있었던 불교신앙들3. 백제 불교신앙의 성격V. 고구려·백제 불교의 해외 진출과 그 의의I. 머리말인도에서 성립된 불교는 서역의 여러 나라와 중국을 경유해서 한반도에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삼국시대 때부터 북방의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건국하여 중국과 인접해 있던 고구려였다. 고구려에서는 외래의 종교인 불교를 국가적으로 환영하였고, 또한 일반 국민들에게서도 별다른 저항이 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받아들여졌다. 이어 불교는 백제, 신라에게 전해졌다.이 글에서는 고구려·백제를 중심으로 불교의 전래와 토착화 과정, 한국 초기불교의 성격과 사상에 대해 살펴보고, 고구려·백제 불교가 갖는 의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II.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발전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秦王符堅의 명에 따라 順道가 來朝하고, 2년 뒤에 阿道가 온 것이 한국불교의 시작이었다. 백제는 침류왕 元年(384), 胡僧 摩羅難陀가 東晋으로부터 내조한 것이 시작이다. 신라는 제 19대 눌지왕 때 사문 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신라의 一善郡에 왔다.삼국에 있어서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선봉적 역할을 한 것은 모두 왕실이었다. 왕실에 의하여 불교가 강력히지지 받게 된 것은 불교가 왕권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적합했기 때문이었다고 믿어진다. 사실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종교나 혹은 왕실의 시조 신화와 같은 조상숭배 사상만으로서는 새로운 지배체제를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북방불교적인 王卽佛 사상과 하나의 불법에 歸依하는 같은 信徒라는 신념은 하나의 왕을 받드는 같은 臣民이라는 생각과 함께 국가의 사상적 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귀족 세력과의 타협 없이는 불교가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비록 현세구복적인 불교에서 점차로 종교적·신앙적인 의미의 來世的인 불교로 바뀌어 간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던 觀音信仰이 삼국통일에 가까워지면서 정토신앙과 연결되어 현세 이익적인 성격에서 초현세적인 해탈을 祈求하는 성격으로 변모하고 있었다.이와 관련하여 涅槃宗이 제창되고, 이것이 백제나 신라에도 전해지지 않은 바 아니지만, 고구려에서는 普德이 도교의 불로장생사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를 제창하여 교세를 떨쳤다{) 普德은 고구려 말기 불교계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는 소위 탈락계층인 지방민 출신으로 당시 淵蓋蘇文 세력의 도교 진흥을 통한 정권 장악에 대항하여 평등을 부르짖었다. 도교 진흥에 대해 정면적인 비난을 함으로써 결국 그는 탄압받고 변방지역으로 밀려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종국엔 더 이상 고구려에 머물지 못하고 구백제 지역인 孤大山 景福寺로 11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이주해 갔다. 보덕은 변방지역으로 쫓겨가면서 국가의 도교 진흥정책에 대해 더욱 강경한 비난을 하다가 결국 고구려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신라로 이주를 하였다.. 또한 萬有의 實相은 필경 空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成實宗·三論宗{) 본종은 인도의 용수 Nagarjuna의 《중론》과 《12문론》 및 제바 Aryadeve의 《백론》을 소의로 한 종파. 印度 龍樹菩薩의 中論과 十二門論 및 그 제자 提婆의 百論을 三論이라 하며, 이 三論은 반야경의 空思想을 집대성한 대승불교의 매우 중요한 論書이면서 불교학 연구의 전공분야이기도 하다. 三論宗은 羅什-道生-曇濟-僧朗-僧詮-法朗-吉藏으로 계승되었다. 이중에서 승랑은 고구려 사람이다.고구려에서는 중국 삼론종 성립의 기초를 이루었던 승랑이라든가 實法師, 印法師 등이 삼론학자로서 이름을 널리 떨쳤으며, 고구려 승 惠灌은 일본 삼론종의 開宗祖가 되었음을 볼 때 삼론학을 중심한 고구려의 불교학은 크게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백제는 武王 3년(602)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曆書와 天文 地理 및 遁甲方術書 등을 전하고, 또 일본 최초의 僧正이 되었회에 가장 많이 普及되고 또 適應되어진 經敎는 般若系統의 空思想이었다고 할 것이다.처음 불교가 전래될 무렵의 후한시대에는 校證訓話의 學이 盛하였으나 三國時代에 와서는 점차 노장의 사상이 세력을 펼치게 되었다. 이리하여 魏晋時代에는 노장사상이 크게 성하여 淸談의 風潮가 일어나, 浮虛를 담론하고 禮敎와 節信을 輕視하며 自然 放逸의 생활을 즐기는 高踏的이며 方外的인 逸民隱士의 生活姿勢를 숭상하기에 이르렀다.이러한 중국의 당시대적 추이에 따라 불교도 그 영향망에서 벗어나 있을 수는 없었다. 漢代 이전부터의 중국적 方士 神仙의 신앙은 차츰 종교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여 황제와 노자가 신화되어 혹은 神仙方術의 敎祖처럼 숭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때의 불교도 그와같은 신선방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佛이 黃帝·老子와 함께 봉기되어지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초기적인 불교신앙의 경향은 神仙方術的 불교의 색채가 짙었다는 것을 짐작 할 수가 있다. 그와 같은 불교의 경향은 다시 淸談社會의 風潮에도 影響을 입게 되었다.. 고구려에 전해준 중국은 安世高로부터 시작된 활발한 역경사업에 의하여 이 시기에는 상당한 경율론이 번역되어 있었지만 아직도 본격적인 불교교리의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심오한 철학적인 교리보다는 중국 재래의 노장사상을 매개로 하여 교리를 이해하는 격의불교가 행해지고 있었다{) 格義란 불교를 해석함에 있어서 중국 古典 특히 老莊의 書에서 그 예를 들어 比較配對하여 佛理를 이해하도록 하는 연구방법의 일종이다. 불교를 해석하고 불교교리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와 상이한 노장사상을 중심으로 한 중국고전에서 예를 들고 또 그에 擬配하여 이해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格義佛敎는 중국에 있어서의 초기적인 불교해석 방법인 동시에 노장사상에 習合된 당시의 般若思想을 중심한 불교연구가 그 내용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격의불교란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중국사회에서 연구된 초기적 경향이었지만 이것은 또 당시 불교의 한 형태이기도 하였다.. 또한 善因善中心으로-」『朴吉鎭博士回甲記念韓國佛敎思想史』1975. p9., 따라서 미륵이나 미타정토의 諸信仰도 함께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辛鐘遠 「불교의 전래와 토착화과정」『한국불교사의 재조명』불교시대사 1992. p59.이즈음 전진의 불교계에서는 주로 대승사상이 유포되어 있었으므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도 대승경전이 위주였을 것이다..그 2년 뒤에 僧 승려 阿道가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阿道는 다음 해 봄 2월에 肖門寺를 지어 거기에 머물고{) 肖門寺는 훗날 興國寺 라 했다., 順道는 伊弗蘭寺를 지어 그곳에 머물었다{) 伊弗蘭寺는 훗날 興福寺 라고 했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시작이라 일컫는다.379년에 부견왕의 迎來로 전진에 오게된 道安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 남·북을 통한 중국의 불교계는 새로운 기운이 조성되고 있었다.지금까지의 초기적 연구경향이며 노장사상의 경향에서 이루어진 淸談格義의 중국불교가 이제 불교의 진정한 본궤도에서 硏學信奉의 자세를 갖추게 된 것은 실로 道安에 의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도안을 통해 당시 중국의 불교계가 老莊習合的인 淸談 格義風의 불교에서 탈피하여 차분히 불교본연의 자세에로 整理되어 갔음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때에 고구려의 요동으로 曇始가 經律 數十部를 가지고 와서 교화하였다는 것이다. 담시가 가져왔던 經律 數十部는 三乘의 經敎를 顯授하고 三歸五戒의 法을 세우는데 가장 適切하고 要緊한 經典과 律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전한 불교는 지금까지의 格義佛敎나 順道 阿道 등이 傳한 前秦의 불교보다 훨씬 진전되고 또 整理된 불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梁 高僧傳에서 담시의 이 불교를 고구려에 불도를 알게한 처음이 된다고까지 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본다. 담시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는 불교가 전래된지 오래였으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청담격의의 노장적 불교나 또는 아직 연구정리되지 못한 경교만이 전해져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담시에 의해서 비로소 본격적인 불교가 전해져서 불교본연의 면목을 지니게 되었다.2. 고구려 불교로 보았으며, 그래서 국민들에게도 불교를 믿어서 복을 얻도록 권하였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결국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불교는 복을 주고 또 복되게 살도록 하는 종교로 이해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셋째 숭신하므로써 복을 얻게 된다고 보았다. 불법이 아무리 복되게 하는 敎라 하더라도 신앙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불교가 고구려 땅안에 전래되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신봉하지 않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불교자체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믿음으로써 즉 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참되게 實踐하므로써 스스로 복을 얻고 행복하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고 하였다.다시 말해서 불교는 복되게 살도록 하는 진리의 교법이므로 믿으라. 그러나 숭신하므로써 복을 갖게 되므로 숭신하여 복을 구하도록 하라. 고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에서는 숭신하여야만 불법을 통하여 복을 얻을 수 있고 또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이와같이 국가적으로 불법을 숭신하였기 때문에 불교의 전수국인 중국에까지도 고구려 불교인의 功績을 빚내었고 또 멀리 일본에다 찬란한 고구려의 불교문화를 심어주었던 것이다.IV. 백제 불교의 특징1. 백제 불교의 전래백제 불교의 수용과 그 국가적인 성격을 맨 먼저 백제의 불교전래와 수용의 첫 역사기록을 통해 이해할 수가 있다.외국의 승려 摩羅難陀가 晋(東晋)으로부터 옴에 왕(枕流王)이 대궐 안에 맞아 들여 禮敬하였다. { 三國史記 卷 24 百濟本紀 2, 枕流王 元年 9月 條.胡僧摩羅難陀自晋至 王迎致宮內 禮敬焉.三國遺事 卷 3 興法 3, 難陀闢濟 條.胡僧摩羅難陀至自晋 迎致宮中禮敬.침류왕은 인도에서 동진을 거쳐 들어온 摩羅難陀를 대궐안에 모시고 禮敬을 다해 공양하였으며, 불설을 받고 불사를 크게 넓혔다는 것이니 더욱 불교수용의 적극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당시 동진은 효무제(373∼396 재위)의 시대로서 효무제는 동진의 모든 제왕 중 가장 불교를 신봉한 제왕으로서 있다.
현대고고학의 이론과 방법론{I. 머리말II. 신고고학의 이론과 문제점III. 후기과정주의 고고학의 이론과 문제점IV. 인지과정고고학의 이론과 문제점V. 맺음말I. 머리말19세기 중엽경 학문으로 처음 자리잡은 고고학은 과거 인류가 남긴 물질적인 자료(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당시의 문화, 즉 행위, 사회적 조직, 이념 등을 복원하고, 그들의 문화가 어떻게 그리고 왜 변화되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 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신고고학과 후기과정고고학의 등장과 최근의 연구동향을 중심으로 현대고고학의 이론과 방법론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1950년대 연구는 1960년대 신고고학(New Archaeology)이 등장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고고학적 배경 위에 빈포드(L. R. Binford, 1930∼)는 1960년대 초에 전통고고학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성격의 고고학을 제창하였고 영국에서도 클라크(D. L. Clarke, 1937∼1976)에 의해 새로운 연구방법론이 모색되었다.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고고학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다양한 방향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기과정고고학은 1980년대 초반 신고고학에 대항하여 영국의 호더 등에 의해 제창된 새로운 개념의 고고학이다. 후기과정고고학은 지역적·시대적인 맥락 및 특성과 그 속에서 활동하는 개개인들의 규범 등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을 강조하였다. 1990년대에는 과거인의 사고체계에 대한 객관적 설명을 내리려는 인지과정고고학이 등장한다.이 글에서는 빈포드를 중심으로 신고고학, 후기과정주의 고고학과 인지과정고고학의 이론을 알아보고 그 이론의 문제점을 파악한 후 앞으로의 연구방법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II. 신고고학의 이론과 문제점빈포드는 문화편년의 수립과 과거 생활상의 재구성에만 치중하는 전통고고학을 공격하면서 고고학적 자료가 인간행위의 소산인 이상 거기에는 비물질적인 행위도 반영되어 있으므로 고고학은 당연히 정신세계를 비롯하여 당시 사회의 총체를 밝히고 인간행위와 문화의 진화과정 원인을 전파나 이주 등에 의한 외적 요인에 두지 않고, 창조에 기인한 자기조절 기능이라는 내적 요인으로 설명하였다.빈포드와 신고고학자들은 인간행위에 있어서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민족지자료에서 보이는 문화양상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행위에 대한 齊一性의 가정에 입각하여 현존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관찰할 수 있는 행위(민족지적 행위)를 연구하면, 과거 물질문화인 고고학 자료로부터 명확한 행위를 추론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제하에 현존하는 물질문화와 연관되는 행위에 대한 관찰을 근거로 특수역사적 유추(혹은 민족지적 유추)에 입각하여 수많은 가설을 만들고 이 가설들을 연역적인 추론 과정을 통해 검사하면 과거 인간행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축적시킬 수 있고, 나아가 일반법칙들을 만들 수 있다고 낙관하였다.미국의 신고고학 연구경향과 유사한 영국내 새로운 고고학 연구시각은 데이비드 클라크에 의해 제기된다. 클라크 역시 당시 미국의 신고고학자와 마찬가지로, 체계이론에 입각하여 과거 인간이 경험한 모든 문화양상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고고학의 새로운 학문적 체계를 세우기 위해, 그는 생물학적 지식을 기초로 고고학 자료에 대한 분류상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당시 新地理學이 표방하던 생태학적 시각 속에서의 체계이론과 공간분석 그리고 분석을 위한 자료의 계량화 경향을 고고학 연구에 적극 수용하면서 과거 문화과정에 대한 설명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문화과정에 관한 설명을 위한 최적의 방법을 장기간에 걸친 시간폭 속에서 고고학 자료로 존재하는 공간 정보에 대한 분석으로 보고, 종래 막연한 분포도에 기초한 문화 전파론적 시각을 벗어나, 고고학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모든 공간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체계적인 방법과 모델과 이론의 정립을 제창하게 된다.신고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물질문화의 성격은 과거 인간이 경험한 모든 행위들의 수동적인 잔재물로서의 물질문화이다. 물질문화는 외적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인간행위의 수동적공을 초월하여 모든 고고학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극단적인 낙관주의적 학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클라크와 콜린 렌프루 등 구대륙의 신고고학자들은 민족지자료에 기초한 특수역사적 유추에 입각하여 설정한 가설들을, 취락유형에서 보이는 고고학자료를 이용하여 연역적 가설검증법으로 그 가설의 신뢰성을 檢査하여 과거 인간행위에 대한 보편법칙들을 만들 수 있다는 헴펠式의 논리적 실증주의적 시각에는 회의를 가졌다. 신대륙의 고고학 상황에서도 역시 연역적 가설 검증법의 활용이 실제 적용상에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게 됨에 따라 1970년대부터 과거 인간행위에 대한 일반법칙설정 가능성에 대해서는 신고고학 내부와 외부의 학자들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신고고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인간행위에 대한 보편법칙 설정을 하려했던 연연적 가설검증법에 있었다고 본다. 연역적 가설검증법은 보편법칙을 만들어 내기 위해 문화의 총체적인 고찰을 불가능하며 보편법칙을 만들어 내기 위해 매우 좁은 시각의 결론만을 유도하는 방법론적 구조를 갖고 있다. 과거 인간행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이 이론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상당한 무리가 있다고 본다. 과거 인간이 남긴 유물만을 통해 고고학자가 과거 개개인의 사고를 설명한다는 것은 고고학자가 단순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신고고학이 1960년대에 등장할 때 빈포드 등은 화이트가 정의한 문화의 개념에 입각해 문화를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수단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적응방편으로서의 인간행위는 결국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唯物論的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인간행위 중 관념과 가치기준 등은 단지 고고학 상황 속에서 존재하는 증거물에 의해 단편적으로 추측될 뿐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체계이론에 입각하여, 문화는 하나의 체계로 파악되었고 이러한 체계 속에서 기술·경제·사회조직·이념 등 아체계들은 환경과의 기능적 관계 속에서 연결 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이 속에서 개인의 행위는 이와같은학적·맥락적 접근을 강조하는 후기과정고고학은 전세계 동조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오늘날까지 확장일로의 길을 걷고 있다.후기과정고고학 연구사조는 1980년대 초부터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고고학과 석좌교수인 이안 호더에 의해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신고고학 연구사조가 견지하고 있던 실증주의 과학철학의 인식론·기능주의·체계이론·과학적 연구방법 등을 전면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제기된 이 후기과정고고학 사조는 당시 고고학 학자 집단에게는 상당히 급진적인 학문사고로 인식되었다.후기과정고고학이라는 새로운 연구시각에 대한 호더의 관점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행동하는 상징들》이란 저술에서이다. 이 민족고고학 연구를 통해 내린 호더의 결론은 크게 두가지인데 첫 번째는 한 집단내의 종족·연령·성별·계층·친족집단간의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관계 속에서 물질문화가 얼마만큼 능동적인 측면에서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각이다. 이러한 민족지적 경험을 토대로, 물질문화는 사회조직을 수동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의 신념·가치·이데올로기 등에 따라 그 사회조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동적이고도 상징적의 의미체라는 주장을 펼친다. 두 번째 이러한 성격을 지닌 물질문화가 사회와 어떻게 연관이 되어있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와 상징적 부호에 좌우된다는 자각이다.필자는 물질적인 것이 담은 상징이 실제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호더의 의견에 공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태극기를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한 한국인만이 느끼는 감정을 갖기 때문이다.호더는 고고학과 과거는 현재 속에서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후기과정고고학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고고학자들이 기본 연구자료로 삼는 물질문화의 성격에 대한 문제였다. 호더는 아프리카지역에 대한 민족고고학 연구를 토대로 물질문화는 과정고고학자들이 보는 것과 같이 단순히 기능적 필요성에 따라 수동적으로만 폐기된 잔존물이 아니라고 보았다. 물질문화의 진정과정고고학은 과거의 물질문화를 과거의 사회관계를 형성시킬 수 있는 능동적이고도 상징적인 의미체로 간주하여 물질문화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였다는 데에서는 의의를 갖는다.그러나 문제점은 물질에 대한 후기과정고고학의 풀이는 주관적인이라는 것에 있다고 본다. 고고학자들이 구축하는 데이터가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의 소산인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만약에 모든 과거 인간의 행위들에 대한 설명이 연구자 각자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면, 그 설명이라는 것은 고고학자가 구축하고자 하는 객관적인 지식이라기 보다는 개개인 연구자의 해석학적 판단에 따라 만들어지는 각양각색의 해석들이 되는 것이고, 최종적으로 하나의 동의된 지식으로 형성되기 보다는 상대주의의 오류에 봉착되는 혼돈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농후하게 된다고 본다.둘째는 물질문화에 기초해 연구할 때 활용하는 연구방법에 내재된 인식론적 연구절차상의 문제였다.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은 신고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과거 문화양상에 대한 일반성 도출은 실제 현재까지도 별 연구소득이 없으며, 특히 과거 사회관계와 이념에 대한 이러한 노력은 전혀 이루어진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고수하고 있는 객관적 설명방식으로는 해결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일반성 추구와중에서 과정고고학자들은 과거 개별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맥락의 독특함과 역사적 발전과정의 특수성을 그리고 개개인들이 그 사회내에서 벌렸던 역할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아주 무시하게 되었다는 것이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은 과거 인간행위(행동)가 의미있게 구축이 된 물질문화는 객관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이 같은 물질문화에 기초한 해석은 특수하고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軌跡 속에서 파악 가능한 맥락성의 풍부함 정도에 따라 좌우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들은 콜링우드의 역사철학에 입각하여, 과거 사회행동의 의미에 도달하기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