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처음엔 무엇에 대해 조사해야겠다는 확고한 생각도 없었다. 일단 박물관에 가보기로 하고 무작정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갔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팜플렛을 받아들고 쭉 훑어보았다. 목표도 없이 왔기에 팜플렛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팜플렛에 나와 있는 유물 사진들만이라도 다 보겠다는 다짐 하에 안으로 들어갔다.박물관은 총 3층까지 있는데 2층까지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잠시 쉬고 다시 3층을 둘러보았다. 여러 가지 유물들을 관람하면서 줄곧 놀랍고 신기했다. 도자기 등을 관람하고 불교조각 코너로 들어섰다.불교 조각실은 입구에서부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진 불상들의 정교함과 화려함에 감탄하였다. 이들의 재질은 보통 금동으로 되어있어 더욱 화려해 보이는 것 같았다. 팜플렛에 나와 있는 사진 중에서 학창시절에 국사책에서 한 번 쯤은 봤음 직한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이라는 팻말은 있는데 이상하게도 제 자리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위만큼 큰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 전시되어 있는 불교 조각실 끝부분까지 가보았지만, 역시 그곳에도 없었다.마감시간도 가까워 오고 힘들기도 해서 그냥 나가려고 1층 로비로 갔다. 그렇지만 반가상이 없는 이유는 궁금했다. 그래서 나가는 입구에서 큐레이터에게 물어보았더니 불교 조각실에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팻말이 있는 곳 안쪽으로 들어가서 관람해야 하는데 들어가는 표시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감시간은 다 되어 갔지만 팜플렛에 나와 있는 사진을 다 보겠다고 다짐 한 이상 꼭 봐야만 했다. 마지막 하나만 남겨두고 그냥 갈 수가 없어 다시 3층으로 올라갔다.안으로 들어가라는 화살표를 따라 들어가 보니 온통 캄캄했다. 그리고 중앙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서늘하고 캄캄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웃고 있는 반가사유상을 보니 왠지 섬뜩했다. 단지 어두워서 무섭다고 느껴졌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마지막으로 보게 된 이 반가사유상은 게 함으로써 불교를 융성케 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해 왔다.뿐만 아니라 중관사상을 고양시켜 고구려 불교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해 오기도 하였다. 더욱이 고구려는 일본 불교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평원왕 때 승려 혜편을 도일케 하여 태자의 스승이 되어 각종 불경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또한 성덕태자의 스승이었던 승려 혜자와 법흥사의 벽화를 그린 승려 담징도 고구려인이었다. 이 외에도 혜관, 도현 등의 승려들도 일본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그러나 고구려 말기에 와서는 도교가 성행하여 왕을 비롯한 수천 명이 당에서 온 도사로부터 노자의 도덕경을 청강하는 한편,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도교를 배워오게 했다. 영류왕은 당에서 도사와 도덕경을 수입하고부터는 불교는 극도로 쇠퇴일로로 치닫게 되자 보덕은 백제로, 현유는 사자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고구려 불교가 오래도록 번영했다는 사실은, 불상만 보더라도 삼국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데다 문화 예술적 가치 또한 뛰어나다는 데서 엿볼 수가 있다. 이뿐 아니고 탁월한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마다 미적 감각이 세련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보아도 고구려 불교가 영화를 누렸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다음으로는 백제의 불교에 대해 알아보았다.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이 늦은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들어와 전도한 것이 불교 전래의 시초였다. 다음 해 한상주(현 광주)에 불사가 세워지고 백제도승 10명이 기거하였다. 그러다 후에 웅진에 천도한 뒤 성왕 때에 와서 불교가 크게 융성해지자 여륜사, 대통사가 세워졌다. 또한 사비로 천도한 뒤에는 왕각사, 정림사, 림강사가 건립되고 별도인 익산에는 미륵사가 세워졌다.한편 법왕은 계율학의 영향을 입어 살생을 금하게 하고 수렵과 어렵 도구까지도 불사르게 하였다. 그리고 불교 연구로는 성왕 때 겸익이 인도에서 유학하고 올 때 범본율문을 가지고 와서 명승 28명과 함께 번역하여 율종의 시조가 되기도 한 사실을 대표로 들 수 있다. 백제 역시 일본에 불교를 널 배워와 대승불교를 널리 펴는 한편, 세속오계를 지표로 세워 호국불교의 토대를 이루기도 했다.이와 함께 불교를 국가통일을 위한 중요한 국가정책으로 삼아 대서성과 소년서성을 설치하여 불교 전반을 관장케 하였다. 불교를 이념으로 하여 탄생한 화랑제도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고 동시에 호국불교의 근간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다음은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에 대해 알아보았다.신라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676년)난 다음 불교 번영을 위한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갔으며 특히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또한 고승, 명승이 많이 배출되었고 그들은 당나라와 인도에 유학하여 선진문물을 수입해 왔는데, 이로 인해 각종 사탑, 불상의 건조와 미술공예가 급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지배층의 적극적인 장려에 힘입어 불교가 크게 융성함으로써 대규모 사찰 건립과 5교9산의 확립 등 그 발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불국사, 부석사, 통도사, 해인사, 법주사 등 대가람은 모두 이때에 건립된 것이다. 그리고 화엄사상으로 너무나 유명한 원효, 율종의 자장,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 그리고 화엄종의 의상, 원축 등의 명승이 배출된 것도 이 시기였다.통일신라 말기에는 특히 선종이 유행하였는데, 경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고구려나 백제는 반야공사상을 중시하는 삼논종에 머물러 있었던 감이 많았다.또한 백제에서는 률을 존중하였으나 심오한 철학적 의미까지는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소승적 견지에서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불교가 바로 화엄사상에 의해 통일의 이상이 제시되었고 실천 불교를 통해 문무겸전과 류사현정의 대승불교가 신라를 지배해 왔다. 따라서 불교는 신라인들로 하여금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게 한 튼튼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9세기부터는 당나라의 선종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기풍이 일어났다. 선종은 헌덕왕 때 도의선사를 위시하여 홍척, 범일, 혜철, 무염, 도헌, 도윤, 현욱, 이엄들에 의해 개종을 아우르고 九山을 통합한 조계종을 세웠다. 이로부터 선종은 9산에서 천태 ·조계의 양종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오교 양종이 당시 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외침을 불력으로 퇴치하려는 호국신앙의 염원에서 강화도에서 대장경을 조판하였는데, '팔만대장경'은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고려 말에 와서 불교는 사원전의 확대, 승병 양성 등에 집착함으로써 그 본질을 망각해갔다. 더욱이 신돈 등의 출현과 함께 세속화한 승려들의 과다한 정치참여로 국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하게 되었다.이러한 와중에 불교배척의 기운은 극도에 이르렀고, 유학을 진흥시키려는 세력들에 의해 조선 개국이라는 역성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다음으로는 불교 조각 중에서도 미륵에 대해 알았다.백제는 6C에 들어서면서 백제 조각가들은 인체에 대한 지식과 조형적인 이해, 그리고 조각 기술을 발전시켜 우수한 불교조각 작품과 불상들을 쏟아냈다. 여기서 으뜸가는 조각 대상은 미륵이었다.미륵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민중들에게 가장 친근감을 준 인간적인 존재이다. 훗날 후삼국 시대에 태봉을 세운 승려 궁예가 스스로 미륵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미륵은 직접 현실 세계로 뛰어들어 민중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영웅의 이미지로 널리 퍼져있다.자연히 조각가들은 자기시대, 자기나라의 전형적인 인물상을 ‘부처’ 미륵에 투영했다. 사람들은 벼랑에 새긴 마에산존불상에서, 돌에 새긴 석상에서 미륵을 보고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백제인을 닮은 백제적인 미륵 불상이 탄생했다. 신비의 미소를 머금은 채 한 쪽 다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사색에 잠긴 모습으로 앉아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그것이다. 이 불상은 한 쪽 다리를 무릎에 올려놓은 불상 고유의 기본자세 말고는 중국 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백제 불상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나온 또 다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고뇌하는 청년 석가의 모습을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인의 얼굴과 결합해 낸 수작이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금동미륵보살반가상도 이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국립중앙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얼굴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종교적인 평온함을 주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준다. 날씬하면서 둥근 맛이 강한 신체에는 천의가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 옷 주름이 전혀 표현되지 않은데 비해 군의의 옷 주름은 두 다리를 덮으면서 무릎과 다리의 볼륨감을 강조하고 대좌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또한 허리 양쪽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양다리 옆에 있는 둥근 고리를 통해 늘어져 엉덩이 밑으로 감추어져 있다. 특히 양감이 강조된 두 다리의 형태나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 주름 표현 등은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하반신 부분만 남아 있는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석조반가상과 양식적으로 비교된다.이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도 양식상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나 침울한 얼굴표정이나 입체감이 적은 두 다리와 옷 주름 표현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목조반가상은 많은 부분이 보수된 상태로 변형되어 있으나 수리 이전의 모습을 보면, 얼굴 표현에서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더욱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의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고류지를 창건한 진하승이 신라계의 도래인이었다는 사실이나 신라에서 온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류지의 목조반가상이 우리나라에 많은 적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통해서 볼 때 우리 나라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고류지 반가상은 목조상으로 서로 재질은 다르나 형태상으로나 양식상으로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의 국적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진다.금동반가상의 왼쪽 다리는 별도로 마련된 연화족좌 위에 놓여 있는데 왼쪽 발과 족좌의 앞부분은 후에 수리된 것으로 원래는 크기가 조금 더 컸을 것으다.
대중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연예인들의 인기도 나날이 높아져갔다. 그러나 햇빛이 비치면 그림자가 지듯, 연예인들의 화려함 이면에도 어두운 부분이 많이 있었다. 그 중 최근 방송을 통해 밝혀지게 된 일부 연예기획사측들의 부당한 계약이 그 일례이다.지난 2001년 MBC 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에서는 연예인들에 대한 일부 연예기획사들의 이런 부당하고 불평등한 계약을 ‘노예계약’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 때부터 노예계약의 실태가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방송 이후 여러 연예기획사가 크게 반발했고 소속 연예인들이 MBC 방송사의 출연을 전면 거부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송은 연예인과 연예기획사간의 관행화 되어 있던 전속 계약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어느 정도의 투명성과 불공정 계약을 바로잡는 전환점이 되었다.이런 문제들은 법률상으로 많은 문제가 되고 있지만, 연예계는 급속한 발달로 인해 아직 법률적으로는 투명성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최근에는 톱스타들이 증가하면서 일부는 노예계약과 정반대의 계약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이는 ‘역노예계약’이라고 불린다. 이 계약관계들이 법률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며, 그에 합당한 해결책은 없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법률상의 문제를 넘어서 문화적 차원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겠다.우선 계약이란 무엇이며 노예계약과 역노예계약의 법률상 문제에 대해 알아보겠다.계약이란 당사자 간의 청약과 승낙의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법률행위이다. 노예계약 또는 역노예계약은 일부 연예기획사와 연예인 사이의 불평등한 계약이다. 연예인은 연예기획사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연예기획사는 연예인에게 보수의 지급을 약속하는 유상쌍무계약관계에 있다. 즉, 노사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계약에서는 고용계약, 근로계약 등의 기본계약이 적용된다. 근로계약에서는 근로조건을 명시해야하고 불리하거나 불평등한 조건의 계약은 금지되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계약의 효력이 없으며, 무효가 될 수도 있다.다음으로는 노예계약이나 역노예계약의 실태와 판례를 살펴보겠다.노예계약의 피해는 주로 신인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노예계약의 대표적인 사례는 탤런트 김지훈의 계약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가 탤런트 김지훈과 전속계약을 체결하면서 부당한 손해배상과 계약기간에 대하여 시정명령을 결정했다. SM측은 김지훈과 지난 2001년 연예전속계약을 체결하면서 부당한 손해배상조항과 계약기간을 설정했다. 공정위는 “에스엠측이 계약 당시 신인 연예인이었던 김지훈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신인 연예인의 계약위반에 대해 과도한 손해배상을 설정했다”고 지적했다. 신인 탤런트 김지훈 씨의 경우, 위약 시 손해배상액이 음반 제작비 등 투자액의 5배, 잔여 계약기간 동안 예상 이익금의 3배에 별도로 1억 원을 물도록 하는 등 일방적으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공정위까지 나서서 시정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이러한 불공정 사례가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공정위 관계자는 “에스엠측이 설정한 배상액은 계약금의 2~3배를 손해배상액으로 하고 있는 통상적인 업계의 거래관행에 비해 지나치게 신인 연예인에게 불리하고, 민법 제 393조 제 1항의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은 통상의 손해를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계약기간의 만료일을 첫 번째 발매일로부터 5년 후로 설정하여, 연예기획사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음반출시가 늦어질 경우, 연예인은 불안정한 계약 상태에 놓이게 되고, 계약 당시 예상과는 달리 지나치게 장기의 계약을 하게 될 수도 있으며, 첫 번째 작품의 데뷔일로부터 5년 후로 설정한 조항에서 ‘조연급 이상’이라는 불명확한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연예기획사의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도록 했다. 따라서 신인 연예인이 기획사와 계약기간 만료에 따라 새로운 조건을 협상하거나 타 기획사와 새로 전속계약을 체결하여 연예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법률상 계약이란 계약기간이나 양 당사자 간의 권리와 의무 관계가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계약은 일방적으로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다든지, 기획사가 모든 권리를 가지고 소속 연기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무도 부담하지 않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특히 배분에 있어서 불공정한 내용이라든지, 계약위반으로 발생하는 연기자의 손해배상에 대해서 매우 높은 비용을 부담시키고, 소속사는 아무런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 등 노예계약의 전형으로 회자되고 있다. 공정위에 제소 되지 않은 불공정 사례도 많아 소속사와 연예인간의 불공정 사례를 공정위에 제소한 것은 일부분이고, 실제로는 더 많은 사례가 있다고 한다. 실제 공정위의 법률적인 자문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수입이 바탕이 되어야지만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자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속 연기자나 연기 지망생은 대부분 수입이 없고, 경제적으로 열악해 적절한 구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최근 공정위가 불공정 거래를 한 연예기획사에 대해서 내린 시정명령이 관심을 끄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대중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최근 연예산업, 즉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한류 붐을 일으키며 급성장하고 있어서 잘못된 관행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이와 같은 노예계약 사례들에 대한 판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재판부는 "원고와 피고 사이에 맺어진 전속계약 중 계약기간과 손해배상액 규정은 원고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고 있다"며 이들 규정은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는 무효''라고 규정한 민법 103조에 의해 무효이며, 본질적인 부분이 무효이기 때문에 결국 전속계약 전부가 무효라고 할 것"이라고 판결했다. 또 다른 판례에서는 "신인가수 훈련투자비용이 막대하고 투자위험이 높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투자위험이 높은 사업은 높은 수익이 예상되고 투자위험은 투자자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성공한 가수의 전속계약 파기율이 높다고 해도 투자에 성공한 가수에게서 실패한 가수의 투자비용까지 회수하는 것은 지나친 손해배상 약정"이라고 판결했다.역노예계약은 주로 톱스타들에게서 나타난다. 지명도가 있는 연예인의 경우 대개 소속사와 7대3의 비율로 수익을 나눈다. 연예인의 몫이 70%이고, 기획사가 30%를 가져간다. 출연료와 CF 모델료를 서로 다른 비율로 계약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같은 비율을 적용한다. 최근 연예가 관계자들 사이에서 톱스타를 잡기 위한 상식 밖의 '11대 0' 계약은 연예인이 자신이 활동해 벌어들인 수입을 모두 가져가고, 연예 기획사는 매출에 따른 10%의 부가세를 떠맡는 '연예인:기획사=110%:0%' 계약을 일컫는다. 이는 지나치게 톱스타에 의존해온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작자가 마이너스 이익을 감수하고 손해나는 장사를 하겠다고 연예인과 계약한다는 건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11대0' 계약이 성립 될 수 있는 이유는 연예인의 활동을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되는 연예 기획사가 톱스타의 이름을 내세워야 투자 유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매출을 올리기까지 적게는 1년 많게는 3년 이상이 걸리는 신인보다는 당장 활용가치가 큰 톱스타에게 투자를 해야만 다른 계약이나 거래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11대0' 계약은 연예인에겐 최고 조건의 계약일지 모르겠지만 결국 연예 산업 전반에 걸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계약을 한 연예인이 수익을 모두 가져갈 경우 현실적으로 지속되는 수익 악화의 부담은 투자자나 주주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계약비율에 대해 함구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수익 비율이 알려지면 자칫 한솥밥을 먹는 연기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수도 있다. 이처럼 매니지먼트사들의 '톱스타 잡기에 매달리기'와 '신인과의 노예계약' 등은 국내 대중문화산업의 다양한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당장 이름 있는 스타에게만 돈이 몰리고 장기 투자가 필요한 신인 발굴에 소홀할 수 있어 향후 연예산업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왜 노예계약이 연예계에서 성행하는 것일까.첫 번째는 스타가 되고 싶은 욕심에 계약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일부 연예인 지망생들과 실패에 대한 금전적 위험 가능성을 줄이고 싶어 하는 연예기획사의 생각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유명 매니지먼트 기획사 관계자는 “10대를 중심으로 한 일부 연예인 지망생들은 연예계를 사회생활의 연장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무조건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 계약의 위험성을 체크하지 못하고 도장을 찍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매니지먼트사가 실패 가능성이 큰 신인들에게 무리수를 두지 못 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투자비를 줄여 경제적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회사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두 번째는 이를 제재할만한 뚜렷한 법적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대가 바뀌고, 가치가 있는 문화재는 보전되어 후대에 전해진다. 전쟁과 자연재해가 함께한 기나긴 역사 속에 현재까지 남겨진 유적?유물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얼마 전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화유산 하나를 잃는 사건이 있었다. 숭례문 화제 사건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다른 문화유산들도 잘 보전해야만 한다. 그 중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문화유산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판, 전국 각지에 있는 고인돌, 그리고 현재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기원인 훈민정음이라고 생각한다.여기에서는 이 세 가지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이 문화재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우선 팔만대장경판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다.우리 민족의 문화재 가운데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민족유산인 '팔만대장경'이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팔만대장경이 1251년에 완성되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이 8만1258장(문화재청에서 밝힌 공식 숫자)이며 전체의 무게가 무려 280톤으로, 경판의 한 장 두께는 4센티미터, 8만1258장을 전부 쌓으면 그 높이는 3200미터로 백두산(2744미터)보다 높다는 것과 팔만대장경을 그대로 목판 인쇄해 묶으면 웬만한 아파트에 꽉 찰 정도로 거대한 분량이 된다는 것까지는 많은 이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경주 역사지구,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해인사 장경각, 고인돌, 석굴암과 불국사 등 7개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세계유산에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해인사 장경각이 포함된 것이지 장경각 안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지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팔만대장경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장경각보다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대상은 유적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문화재청를 절실히 느낀 제자들이 모여 편찬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 만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고려 현종(1009~1031, 재위)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 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 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이규보가 지은 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 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경판은 가로 2척 3촌(약 69.7cm), 세로 8촌(약 24.2cm), 두께 1촌 2분(약 3.6cm)이며, 약 3.5kg쯤 무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기에 놀라울 따름이다.일반적으로 팔만대장경의 특성에 대해서는 다음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 성격을 띤다. 특히 외침을 받고 있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이를 완성하여 인류 문화사에 있어 불후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는 것은 고려인의 끈질긴 민족정신과 신앙심 높은 불심을 엿보게 하며, 둘째로, 대장경을 만드는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여 국민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었고 오히려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 또한 세 번째로, 경전의 내용은 방대하지만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 수집에 의해 작성되었다. 당시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으로 있던 수기(守基) 등이 북송판(北宋板),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탈자, 오자, 누락된 글자 등을 바로 잡아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었다.더욱이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거란판 대장경의 내용까지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팔만대장경'은 중국의 대장경을 모본으로 했지만 '팔만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는 불교 전적들도 포함되어 있다. '법원주림'이나 '일체경음의'처럼 '팔만대장경'이 아니었으면 알려지지 못했을 불전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팔만대장경'보다 훨씬 늦게 간행된 남송의 '사계대장경'이나 원나라의 '원판대장경'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김종명은 적었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내용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의 모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빈가정사대장경'과 1980년대에 편찬된 대만의 '불광대장경'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수적으로 방대한데다가 5200만여 자에 달하는 글자가 한 결 같이 고르고 정밀한 서각(書刻)예술품이라는 점에서도 크게 평가된다. 5200만여 자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만들어온 '조선왕조실록'의 전체 글자 수와 맞먹는다는 것으로 짐작할어 그 가치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된다.다음은 고인돌에 대해 살펴보겠다.고인돌은 고창(高敞), 강화(江華), 화순(和順)의 고인돌유적(遺蹟)이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창·화순·강화고인돌유적은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유럽, 중국, 일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 지석묘(고인돌)이며 선돌과 함께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지석묘는 유럽, 북아메리카, 지중해 연안, 아시아 등 거의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나 각 지역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우리나라 등에 분포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수가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 전남지방에 1만 9천여기가 분포하고 있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밀집 분포된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지석묘군은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 주변에 형성된 넓은 평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평지의 남쪽 산기슭을 따라 지석묘들이 연이어 분포하고 있는데, 약 4.5km에 걸쳐 나타난다. 그러나 특별한 부장품은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화순의 지석묘군은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고개의 양 계곡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계곡으로 고갯길이 나 있는데 이 고갯길은 예부터 교통로의 역할을 해온 곳이기도 하다. 고인돌의 분포는 마을 앞 평지, 마을 내도 있지만 대부분 계곡의 동쪽 산기슭을 따라 군집되어 입지해 있다.춘양면 대신리 지석묘는 해발 65m에서 125m 사이에 있으며, 도곡 효산리는 45m에서 90m 릉 산기슭으로 구분하였는데, 모두 6개 군으로 나누어진다. 각 고인돌군의 동쪽 산에는 채석이 용이한 암반층이 있고, 그 암반에는 깨진 흔적이 남아있다.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일대에 분포한 고인돌은 지표조사를 통하여 총 3,309개의 석재 중 지석 등 하부가 드러난 것 21기, 상석으로 보이는 것 103기 등 총 124기가 고인돌로 추정된다. 하부가 묻힌 석재나 상석의 형태를 보이는 것이 적어도 200여기 이상이어서 원래 고인돌이거나 고인돌 상석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은 300여기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사된 지석묘 중 지석이 있는 기반식 지석묘는 23기이다.대신리 고인돌군은 세장한 계곡평지 끝부분부터 계곡중턱에 이르는 약 1km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 채석장과 초대형고인돌(280여톤)이 있다. 고인돌근의 석재의 군집이나 산?계곡을 따라 모두 6개 군으로 구분하였다.우리나라 고인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좁은 지역 안에 밀집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100톤 이상의 커다란 고인돌 수 십 기가 있고, 크게는 280여 톤의 초대형 고인돌이 있다. 또한 고인돌 숫자의 방대함과 함께 여러 개의 받침돌을 지상위에서 짜 맞춘 지상석곽형(地上石槨形), 바둑판 형태의 기반식(基般式), 받침돌이 보이지 않는 무지석형(無支石形)등 다양한 형식이 분포하고 있다. 이 고인돌들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는 채석장(採石場)이 함께 존재하고, 고인돌의 기원 및 성격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화순 고인돌군은 비교적 최근(1996년)에 발견되었고 자연 상태의 산림 속에 있어 다른 유적보다도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두 번째로 고인돌을 뽑은 이유는 선사시대 즉, 청동기시대의 기술과 사회생활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석묘 문화의 대표적인 곳으로, 수많은 고인돌들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하거나 화려한 부장품들이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 보아 이 시대에는 사회적 강자의 권력보다는 비교적 모든 .
1. 중국의 음식문화“중국 사람들은 땅 위의 네 발 달린 것으로는 탁자를 빼고 다 먹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 중에서는 잠수함을 빼고 다 먹으며, 하늘을 나는 것으로는 비행기를 빼고 다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국 음식의 다양함과 중국인의 식도락을 고려한 농담일 것이다. 특히 곰, 자라. 고양이, 들쥐 등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요리의 대상으로 삼아 불로장수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해왔기 때문에 한의사를 중심으로 요리법이 발전되었다고 하여 "식의동원(食醫同原) : 먹는 것과 의학은 기원을 같이 한다."이라는 어의(語義)를 굳게 믿고 있다.중국은 면적이 넓고 기후 차이가 뚜렷하여 지역마다 생산물이 풍부하고, 풍부한 생산물은 음식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양한 중국음식이지만 크게 ‘난톈南甛, 베이셴北鹹, 동라東辣, 시쏸西酸’으로 요약되곤 한다. 그 다양함이란 식재료, 조리법, 향신료, 소스 사용의 범위에 있어 중국 음식을 능가하는 예를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1) 중국 음식의 공통점①주요리와 부요리의 구별이 없으며, 몇 가지의 요리가 차례로 서브된다.②대개 뜨거운 기름에서 재빨리 볶아내는 방법으로 조리하므로 조리시간이 10~15분 정도로 짧다.③식재료는 단독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여러 가지를 혼합해서 사용하며 음식의 색감, 질감의 조화와 변화를 중시한다.④녹말물을 풀어 걸쭉한 소스를 만드는 ‘류溜’는 중국인이 개발한 조리법이다.2) 중국 음식의 차이점북부의 주곡은 밀과 옥수수, 보리 같은 잡곡이며, 이것으로 국수나 전병, 찐빵을 만들어 먹는다. 남부의 주곡은 쌀이다. 아침으로 ‘콩기’라고 하는 죽을 짭짤한 음식과 함께 먹는다. 북부에서는 국수를 먹는다. 점심과 저녁으로는 수프, 채소요리, 고기와 생선요리를 먹는데 대개 점심보다는 저녁을 많이 먹는다.3) 음식문화의 특징①재료의 선택이 매우 자유롭고 광범위하다.②맛이 다양하고 풍부하다.③녹말물을 사용하여 조리하는 음식이 많다.④조리기구가 간단하고 사용하기가 쉽다.⑤익혀먹는 주 잘게 간 것은 ‘모어’라고 한다.4) 조미료에 따라설탕을 사용하면 ‘탕’, 식초를 사용하면 ‘추’, 고추를 사용하면 ‘라자오’라고 한다.5) 재료의 배합 형태에 따라3가지를 섞어 만들면 ‘싼셴’, 팔보채와 같은 8가지 이상은 ‘바바오’라고 한다.4. 중국요리의 역사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제로부터 한방식(漢方食)이 시작되었고 가공식품도 먹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한(漢)나라시대로 접어들면서 떡, 만두 등 곡류를 가루로 내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조리법이 생기기 시작했고 식기도 금, 은, 칠그릇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어 수 당나라시대에는 대운하가 건설되어 강남의 질 좋은 쌀이 북경까지 전달되어 북경 일대의 식생활이 풍요로워졌으며 화북지방에서는 식생활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제분을 시작함으로 해서 대량생산의 길을 튼 덕분에 일반서민들도 그 혜택을 받아 빵이며 전병 등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지방에서 설탕이 들어와 재배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식사는 1일 2식이었으며 조리는 원칙적으로 남자의 일이었다. 원나라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요리가 서방세계로 전달되기 시작하였는데 몽고인들은 유목민들이었으므로 고기요리와 유제품의 음식을 많이 먹었다. 요리는 주로 구워서 먹었는데 기마 민족의 특징인 것 같다. 명나라시대에는 미대륙이 원산지인 옥수수, 고구마가 수입되었고, 도로, 운하 등이 잘 발달되어 남방에 이르는 길도 잘 트였기 때문에 각 지역의 요리재료, 향신료, 과일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요리법이 한층 더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요리는 청대에 이르러 중국요리의 부흥기를 이루게 되었다. 중국요리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만한전석'은 청나라 시대의 화려함과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이루는데 상어지느러미, 곰 발바닥, 낙타의 등고기, 원숭이의 골 등 중국각지에서 준비한 희귀한 재료들을 이용하여 100종 이상의 요리를 준비해서 하루 두 번, 6일에 걸쳐 먹는 것으로서 이 요리법을 완벽하게 만들도 무방하지만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실례가 된다.(3) 국자형 숟가락은 탕을 먹을 때만 쓰고 밥과 요리는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그리고 탕을 다 먹은 뒤엔 숟가락을 뒤집어 놓는 것이 예절이다.(4) 면류는 국물이 있는 경우 사기 숟가락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에 쥔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 숟가락에 얹어서 먹는다(국물은 사기 숟가락으로 소리 나지 않게 먹어야 한다).4) 음주법중국인의 술자리는 그야말로 떠들썩한데 술자리의 핵심은 즐겁게 마신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란한 와중에서 엄격히 지키는 술자리 예절이 있다. 이는 '술 따르기', '처음 술 권하기', '술잔 부딪히기', '단숨에 마시기', '술 권하기' 등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주의할 점은 상대방의 눈을 보며 같이 입을 대고 같이 입을 떼야 한다. 만일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마시면 대작하기 싫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1) 술 따르기"술을 가득 따르는 것을 존경하고, 차는 가득한 것을 업신여긴다."라 하듯이, 잔에 가득 따르는 것은 손님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윗사람이 먼저 따르기 시작하며 첨잔도 괜찮다.(2) 처음 술 권하기함께 술을 권주하는 것과, 윗사람이 먼저하고 순서대로 하는 것, 친구끼리 편하게 주고받는 것이 있다. 상대가 권하는데 거절하면 존경치 않는다는 의미이지만, 정 마시지 못할 경우 사정을 이야기하거나 대신 마시도록 부탁해도 괜찮다. 또는 음료수를 마셔도 괜찮다.(3) 잔 부딪히기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으로 한다. 너무 세게 부딪히지 말고, 윗사람과 할 때는 상대 잔보다 낮은 위치에서 부딪힌다. 또한 중국에서의 건배는 우리나라와 달리 잔을 비우는 것을 뜻한다. (술을 다 마시는 것을 의미)(4) 단숨에 마시기단숨에 잔을 비우는 것으로, 마신 후에는 상대에게 잔을 거꾸로 들어 빈 것을 보여준다. 건배는 호방한 성격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서로 기질이 통하고, 친구로 사귈 만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강요해서는 안 되고, 응하지 못할 경우는 사정을 말하며 양해를 부터 요리에 관한 명인들이 총집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이 중화 음식문화 최고의 경지를 농축한 이 음식상은 그 수량과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강희제 이후 한 번도 제대로 재현된 적이 없다고 한다. 현대 중국인들도 그저 전해오는 이야기나 책에서 ‘만한전석’의 전설을 기억할 뿐, 누구도 직접 체험해보지는 못한 연고로 이 음식상에 대한 신비감이 더욱 깊어진다. 홍콩의 대륙 반환행사 때 이 ‘만한전석’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만한전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만한전석에서 모든 요리는 한 세트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나온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으면 먼저 과일을 썰어 올리고 찬 고기안주와 함께 술을 올리는데 술은 여러 종류가 준비되어 있어 각자 취향대로 마실 수 있지만 대개는 알코올도수가 약하고 부드러운 소흥주(紹興酒), 그중에서도 화조(花雕, 후아탸오)를 마셨다고 한다. 계속하여 찬 고기요리 모듬과 더운 고기요리를 안주로 하여 술을 마신다. 이때는 보통 손가락을 내밀며 숫자 맞추기 내기(酒令)를 하여 틀린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네 번째 상까지 끝나면 다섯 번째 상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밥, 죽, 탕이 중심이다. 이마져 끝나면 조그만 은접시에 이쑤시개, 빈랑(檳 )나무 열매 등이 나온다. 다시 한 번 얼굴과 손을 씻고 나면 연회가 끝나는데 여기까지를 빈수(檳水)라고 한다.만한전석에 쓰이는 재료를 들자면 그 종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희귀한 것들만 살펴보자. 고급의 궁중음식에 쓰였던 재료로는 3천 년 전인 주(周)나라 시대의 기록에 여덟 가지 진귀한 것(八珍)이 소개되어 있다. 이중에서 대체로 인정되는 진귀한 것을 들자면 날짐승, 해산물, 들짐승, 야채류에 따라 각각 여덟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날짐승으로서 진귀한 여덟 가지(禽八珍)는 붉은 제비(紅燕), 백조(天鵝), 비룡(飛龍, 들꿩의 하나), 메추라기 등이고, 해산물로서 진귀한 여덟 가지(海八珍)는 제비집(燕窩), 상어지느장佛跳檣탕과 찜의 중간 형태로 중국식 수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불도장은 청나라 광서光緖 2년(1876) 복건성 복주의 한 관원이 포정사布政司(명 ? 청대 민정과 재정을 맡아보던 지방장관) 주련周蓮을 집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 그의 부인이 직접 만든 요리라고 한다. 닭고기, 오리고기, 돼지고기, 돼지 위, 돼지 족발, 양고기 등 20가지가 넘는 재료를 소홍주 술항아리에 꽉꽉 채우고 약한 불에 오래 고아서 만든 요리다. 이 요리는 먹는 방법 또한 특별하다. 완성된 항아리 안의 음식을 초대한 손님에게 모두 나누어낸 다음, 뜨거운 기름에 익힌 비둘기 알을 보기 좋게 장식한다. 숙주나물, 표고버섯과 콩 껍질 볶음, 매운 겨자기름, 하얀 실빵과 참깨병을 곁들이면 그 맛이 일품이다.-마파두부麻婆豆腐입안에 가득 퍼지는 얼얼한 매운맛, 뜨겁고 부드러워 사르르 녹는 감칠맛, 향긋하고 신선한 맛 등 다양한 맛을 골고루 갖춘 마파두부는 가장 대중적인 중국 요리의 하나이다. 동네 음식점에도 밥에 마파두부를 끼얹은 마파두부밥이 있고, 슈퍼마켓에도 마파두부소스가 따로 판매될 만큼 인기다. 이렇게 서민과 친근한 마파두부는 중국 청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다. 청나라 동치同治제 때 사천성 성도 북쪽 만복교 근처에 사람들이 요기르 하며 다리를 쉬어 가는 작은 가게가 있었다. 가게 주인은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는 여인이었는데, 남편의 성이 진씨인지라 사람들은 그녀를 진마파라고 불렀다. 이 곳을 찾는 손님은 대부분 하층민으로 노동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기름통을 메고 다니는 노역자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시장에서 두부 몇 모를 가져와 소고기 약간과 통 안의 기름을 조금 친 다음 진마파에게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잘 먹지도 못하고 힘들게 일하는 노역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던 진마파는 성의껏 음식을 만들었다. 소고기를 다져 기름에 순식간에 볶아내고 식욕을 돋우는 고추와 두시등을 넣은 뒤 다시 육수와 두부를 넣고 조리했다. 이렇게 만든 요리는 노역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마파두다.
산문(散文)한대의 산문 역시 주로 철학가나 역사가에 의해 좋은 작품들이 나왔다.1) 서한(西漢) 산문중국의 의론문(議論文)은 전국말에서 진나라에 이르는 시기에, 특히 상소문을 중심으로 완성된다. 이사가 진왕(秦王)에게 올린 등이 그 대표적인 글이다. 한대로 들어와서는 산문이 상소문을 중심으로 한 정론문(政論文)과 전국시대의 역사적 산문을 계승한 사전문(史傳文)의 두 갈래로 크게 발달한다. 한대에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奏)·소(疏)·표(表)·책(策) 같은 글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의(賈誼)의 , 조착(조錯)의 등이 한초의 빼어난 정론문이라 할 수 있다.은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따져 지금의 거울로 삼으라는 뜻을 적은 글인데, 날카로운 필치와 절실한 논리에다 거침없는 기세까지 느끼게 하는 명문이다.는 중농(重農)정책을 역설하면서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고 생산의욕을 북돋아야 함을 주장한 글인데, 표현이 소탈하면서도 간결하고 잘 다져진 글로 이루어져 있다.이들보다도 서한의 산문은 사전문(史傳文)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대표적이다.2) 동한(東漢) 산문동한인의 산문은 상소문이나 의론문을 막론하고 말엽으로 갈수록 모든 글이 더욱 변려체에 가까워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부(賦)에서 닦여진 수사기능이 산문에 원용된 때문인 듯하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은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84편이다.[변려체 :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修辭的)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⑴ 가 의 [賈誼, B.C. 201~B.C. 169]중국 전한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낙양[洛陽:河南省]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시서와 작문에 능했다. 18세가 되던 해 하남군의 태수 오공이 그를 발탁해 문하에 두고 총애했다. 문제 즉위 초에 오공이 정위의 자리에 오르면서 오공의 추천으로 장안으로 가 22살에 역대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박사가 되어 전한 조정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내었고 문제의 신임을 받아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태중대부직에 올랐다. 이해에 황제에게 와 를 올려 현실 정치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문제 2년에는 진의 실패를 거울삼아 선정과 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을 썼다.역법 · 복색 · 관직 제도와 법을 개정하고 예악을 부흥시킬 것을 제안했고 문제는 이중 일부를 채택하고 그를 공경 직에 임명하려했으나 가의의 재능을 시기하던 공신들의 반대로 상사왕의 태부로 좌천된다. 1년이 지난 후 문제는 다시 가의를 불러 시정을 논하고, 양회왕 태부로 발령한다. 이 해 황제에게 를 올렸으며 후대에는 주로 으로 불렸다. 양회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낙마로 사망하자 가의는 태부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통감하고 1년여 동안 곡읍(哭泣)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애도 끝에 세상과 이별했다.[변화와 개혁은 어느 시대나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화두였다. 진나라가 멸망한 다음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는 변화와 개혁을 모색하고 있었다. 진나라의 명망을 타산지석으로 한나라의 새로운 틀을 만들고자 했던 가의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그는 법률과 형벌만으로는 백성을 다스릴 수 없으며 진나라는 강대했으나 잔인함과 포악함으로 민심을 잃어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지나간 역사를 흘려버리지 않고 그것을 거울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모색한 가의의 사상]⑵ 조 착 [?錯. B.C. ?~B.C. 154]영천(潁川) 사람으로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는 비록 특이한 정치가였지만 그가 남긴 논책(論策)들은 정밀하여 훌륭한 의론문들이라 할 수 있다.⑶ 왕 충 [王充. 27~약100]자 중임(仲任). 회계상우(會稽上虞:저장성[浙江省]) 출생. 관료로서는 평생 불우하여 지방의 한 속리로 머물렀으나, 뤄양[洛陽]에 유학하여 저명한 역사가 반고(班固)의 부친 반표(班彪)에게 사사하였다. 가난하여 늘 책방에서 책을 훔쳐 읽고 기억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한 반속정신(反俗精神)의 소유자로, 그 독창성에 넘치는 자유주의적 사상은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 다듬어진 한대적(漢代的) 사상을 타파하고 언론의 자유를 내세우는 위진적(魏晉的) 사조를 만들어 내었다. 사상적 전환기에 선 선구자로서 그가 중국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크다.대표적 저서에 전통적인 당시의 정치나 학문을 비판한 《논형(論衡)》(58편)이 있다. 그 밖에 《양생서(養生書)》 《정무서(政務書)》 등을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후에 다시 관직에 나가 장제(章帝)의 부름을 받았으나 병으로 이루지 못하였다.[≪논형≫은 그 시대부터 자각하기 시작한 지식인으로서의 새로운 의식과 문인으로서의 새로운 문장의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저술이다. 그는 특히 사상을 논술한 글에서 짜임새 있는 논리의 구성과 생동하는 표현으로 동한 산문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히 문학에 관한 이론만으로도 개성적인 문학의 싹이 그때부터 움트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의 중요한 문학이론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① 그는 저술에 종사하는 "문유(文儒)"를 높이었다. 그는 "저술자를 문유(文儒), 설경자(說經者)를 세유(世儒)"라 하면서, "옛날의 뛰어난 사람들은 글을 저작하여 스스로 하는 일에 활용하고 자기의 뜻을 세상에 밝히었다. 세유(世儒)는 그 당시에는 존중을 받더라도 문유(文儒)의 글을 만나지 못하면 그의 행적이 전하여지지 않는다" 하였다.② 그는 헛된 말 헛된 수사를 반대하고 글의 내용과 실용을 중시할 것을 주장하였다.③ 그는 과장된 표현을 쓰지 말고 간략하고도 분명한 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④ 옛 글만을 소중히 여기며 본받으려는 기풍을 반대하였다.그의 비판의 눈은 매우 예리하였다. 그러나 막 수사에서 미(美)의 창조 가능성을 발견하고, 멋진 미를 추구하기에 바쁜 그 시대 산문의 풍조를 바로 잡지는 못하였다.]⑷ 사마 천[司馬遷. B.C. 145~B.C. 68]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여 태사령이 된 뒤 곧 ≪사기≫의 저술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흉노의 땅으로 쳐들어가 적은 병력으로 싸우다 힘이 다하여 흉노에게 항복한 장수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비위를 건드려 성기를 잘리는 궁형(宮刑)을 받게 된다. 그는 치욕적인 궁형을 받은 뒤 옥에서도 자신의 삶의 뜻을 오직 ≪사기≫ 저술에 두어, 출옥한 뒤로도 이 일에만 전념한 끝에 마침내는 130편에 달하는 불후의 대작을 이룩한다.[≪사기≫는 황제(黃帝) 때로부터 무제의 천한(天漢) 말에 이르는 대략 2600년에 걸친 중국의 옛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 내용은 , , , , 으로 크게 나뉘는데, 그 중에도 제왕의 일을 편년체로 기사(紀事)한 와 중요한 인물들의 전기가 중심이 된 이 핵심을 이루어 흔히 "기전체(紀傳體)>"라 부른다. 그리고 이 기전체는 후세 정사(正史)의 표준이 된다.≪사기≫가 중국문학사상 큰 의의를 지니게 된 것은 본기나 열전이 모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어서 후세 전기문학의 시조가 된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이릉의 문제로 궁형을 당한 뒤 자신의 온 삶의 뜻을 이 ≪사기≫ 저작에 두었으므로, 그의 강한 신념과 뜨거운 정열은 객관적이어야 할 역사의 기록에 강한 개성을 불어넣어, 도처에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생동하는 문장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기≫의 문학적인 성취는 인물에 관한 묘사와 인물과 관련된 사건의 묘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사마천의 개성적인 문장이나 희극적인 생동하는 표현 방법은 후세 산문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극곡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⑸ 반 고 [班固. 32~92]자 맹견(孟堅).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이어 고향에서 《한서(漢書)》 편집에 종사하였으나, 62년경 국사를 개작(改作)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었다. 초의 노력으로 명제(明帝)의 용서를 받아, 20여 년 걸려서 《한서》를 완성하였다. 79년 여러 학자들이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토론할 때, 황제의 명을 받아 《백호통의(白虎通義)》를 편집하였다. 화제(和帝) 때 두헌(竇憲)의 중호군(中護軍)이 되어 흉노 원정에 수행하고, 92년 두헌의 반란사건에 연좌되어 옥사하였다. 문학 작품에 《양도부(兩都賦)》 등이 있다.도합 100편인데 12본기, 8표, 10지(志), 70열전으로 이루어졌으며, 한(漢) 고조(高祖) 원년부터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4년에 이르는,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단대사(斷代史)이다.[≪한서≫는 ≪사기≫를 본뜨기는 하였으나 체재를 수정하여 를 없애고 를 로 바꾸기도 하였는데, 특히 유흠(劉歆)의 ≪칠략(七略)≫을 근거로 한 같은 것은 고대 학술사의 연구자료로써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책의 체재뿐만이 아니라 이들이 책을 쓰는 기본 태도에도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궁형이란 치욕적인 형벌을 당하고 나서 자기의 삶의 뜻을 오직 ≪사기≫의 저술에만 두고 있었기 때문에, 글이 감정적이고 어떤 사건의 서술에 자신의 신세를 담은 주관적인 기록이 되기 일쑤였다. 반고는 그러한 울분이 없었으므로 그 시대상황의 기록이 객관적이고 더욱 착실하다. 그리고 반고의 시대는 부(賦)의 영향으로 산문도 대우(對偶)와 수사를 중시하기 시작한 때라서 문장의 성격도 서로 다르다. ≪사기≫의 문장이 질박하고 산만하면서도 기세가 있는 데 비하여, ≪한서≫는 문아(文雅)하고 대구가 많은 정련된 글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사기≫의 글이 천현(淺顯)하고도 생동한다면 ≪한서≫의 글은 간심(艱深)하고도 중후하다.≪한서≫ 중에서도 열전에 속하는 ·· 등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한 글들이 많다. ≪한서≫의 기록이 더 짜임새가 있고 정련되었기 때문에, 동한에서 당대(唐代)에 이르는 고문이 성행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사기≫보다도 ≪한서≫가 훨씬 더 중시되었었다. 그러나 문학적인 성격이나 가치로 봐서는 ≪사기≫에 미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