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Le Corbusier......이 강의를 들으면서 처음 듣게 된 이름이다. 하지만 강의 계획서의 주제란 한 칸 모두를 차지하고 있다. 그 만큼 유명한 건축가구나-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근대건축의 대가라 불린다는 그에 관한 리포트를 써 내려 갈까한다.건축적 배경책을 통해서, 지난날의 Le Corbusier가 탄생하기까지 그에게 성장배경이 되었던 쥐라 숲을 다녀왔고, 그의 건축기행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파리에서의 그의 데뷔와 당시대의 건축적 움직임을 간추려 보았다.▣ 쥐라 숲에서 기하학을 배우다「보시는 대로 나는 얼빠진 늙은이죠. 그러나 아직 나의 머리 속에는 적어도 백년 분의 계획은 있습니다. 그럼 또 나중에......」 1965년 8월 27일죽음을 수 시간 앞둔 Le Corbusier(본명은 Charles Edouard Jeanneret, 1887~1965.스위스, 프랑스)의 이웃사람과 나눈 최후의 대화이다. 겉으로는 차갑게 보이지만 그는 풍부한 학식과 직감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건축가였다.1887년, 한해 중 반은 눈에 묻혀 산다는 스위스 쥐라산맥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태어나, 빛에 대하여 예민한 창조의 어두운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는 내향적인 성격의 한 소년, Charles Edouard Jeanneret. 하지만 그는 시계 세공인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아래서 예술 전반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집념을 갖게 된다. 특히 그림그리기에 뛰어난 감각을 보였고 국제장식예술전람회에서 금으로 만든 시계 문자판을 출품하면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의 스승은 수공예적인 도안방식이나 조각이 근대공업사회라는 시대적 흐름에 더 이상 부응할 수 없다는 점을 잘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Jeanneret에게 전혀 다른 목표를 지향할 수 있는 폭넓은 시각과 교육을 제공한다. “자연만이 모든 것의 참이며, 바른 것이고 근본적인 그 자체”라고 여기는 그의 스승은 자연이 우거진 쥐라 숲으로 향하고 자연과 예술의 문은 활짝 볼 수 있다.▣ Jeanneret, Le Corbusier로 다시 태어나다그가 다시 고향, 라 쇼드퐁(La Chaux-de-Fonds)에 돌아왔을 때는 그의 모든 건축수업의 기초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 후 그는 대량생산을 위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인「도미노Domino」주택을 연구하고 30세 되던 해,『슈와브 저택Villa Schwob』의 완성을 끝으로 고향 라 쇼드퐁을 등지고 세계를 무대로 할 준비를 위해 파리로 진출한다. 그 후 파리의 ‘예술과 자유’라는 명칭의 예술인 모임에서 알게 된 화가와 함께 새로운 예술의 도래를 선언하는 잡지의 창간을 구상하게 되고, 1920년 10월에는 『에스쁘리 누보 l'Esprit Nouveau』라는 명칭의 창간호를 발간하며 이때부터 Jeanneret라는 이름 대신에 ‘Le Corbusier’라는 이름을 쓰면서 건축가로서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잡지는 단행본으로 출판되면서 그의 이름이 크게 알려지고 제2판 간행은 개인 저작으로 출판되는데, 바로 이 책이 건축사상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이다. Le Corbusier의 건축미학적 기초를 대변하고 있는 동시에 건축가로서의 Le Corbusier를 세계 건축계가 주목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된 책이다.▣ 프랑스 근대건축의 움직임을 말하다위 표에 나타난 근대 이전의 과거 양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꾀하면서 19세기 말에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 “창조”를 지향해야한다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인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아르 누보(Art Nouveau)와 빈을 중심으로 한 세제션(Sezession)운동이 그것이다. 여기서 신재료인 철, 판유리 등과 신구조인 철골, 철근 콘크리트, 구조가 융합된 속에 건축계는 20세기를 맞이한다. 이 때에 건축은 합목적성에 따른 기능주의로의 경향이 나타나면서 산업의 발달과 함께 합리주의 건축이 전개되는데 이것을 근대건축으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으며 아르누보는 쇠퇴하게 된다.위의 신재료itation Marseille』의 입구『Unite d'habitation Marseille』의 옥상 풀장『Unite d'habitation Marseille』의 옥상공원으로 닿는 계단그의 연구와 업적그가 건축을 하면서 연구했던 것들과 그의 건축사조라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건축 순수령화가로서의 생을 살기도 했던 그는 입체주의(Cubism)에서 순수주의(Purism)로의 발전과정을 경험하고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정신을 기하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조형세계에서 기하학적 형태가 우위를 차지하여야 한다는 순수주의 운동을 전개하고 순수파를 창시한다.순수주의는 형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이르고자하는 것이며, 자연은 더 이상 추상적이거나 환상적인 세계와 같은 비밀의 세계가 아니라 완전성과 아름다움이 일치된 ‘기계’로 인식된다. 그의 저서 『건축을 향하여』는 주택을 하나의 기계장치로 보는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낳는다. 이 명제는 자칫 Le Corbusier를 기능주의자로 규정짓는 오류를 범하게도 하지만, 그의 공간개념은 논리와 이성의 요소들이 감성적이며 미적인 요소들과 하나의 연속적인 복합체로 구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Le Corbusier의 건축사상Le Corbusier가 고집한 건축사상은 합리주의적 사상과 낭만주의적 사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건축형태의 근원으로써의 Le Corbusier가 응용하고 있는 공간관은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물에 일반적 관심을 던져준 입체주의자들과 공간을 인접한 대상물들이 침투하는 영역으로 파악한 미래주의자들의 공간개념이 Le Corbusier에 의해 건축적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첫째, 공간은 무한하며 어떠한 구속 없이 팔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둘째, 공간은 모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나 기하학에 의해서 치수가 결정되며 인식된다. 일반적인 구조는 장방형이며, 건축은 3차원3』이 있다.◇ 제 2형식에 관하여절대로 순수한 겉봉 속에 기관을 틀어넣는 것을 말한다. 곤란한 과제지만 이것은 아마 정신의 쾌락을 의미한다. 또 과해진 틀 안에서의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이다. 이 예로는 『가르슈 저택Villa Stein a Garches.1927』이 있다.◇ 제 3형식에 관하여외부로 노출된 독립뼈대에 의하여 단순 명쾌하게 마치 아네트모양 투명한 외피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각 층마다 변화시켜 각 실의 유효한 면적을 그 형태와 수량에 의하여 정할 수 있다. 극히 용이하며 수단이 풍부한 구성, 예로는 『스튜 트가르트(Stuttgart)의 집.1927』이 있다.◇ 제 4형식에 관하여외부에서는 제 2형의 순수한 형태를 나타내고 내부에서는 제 1형과 제 3형의 특징과 장점이 허용된다. 순수하고 극히 일반적이며 또 수단이 풍부한 형, 예로는 『사브아 저택Villa Savoye.1931』이 있다.▣ 근대건축을 위한 5가지 원칙에 관하여근대건축의 '근대'란 단순히 시기상의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이 전개하는 테크놀로지에 바탕을 두고 고전과 역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과거와의 분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근대건축에서의 테크놀로지란 단순히 건축의 기술적 문제에 있지 않고, 건축의 가치관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므로 근대건축가에게는 기계란 구체적인 기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근대건축에 있어서 건축에 대한 테크놀로지의 상징적 의미는 Le Corbusier의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Le Corbusier가 지은 제 1형식인 『라로쉬 저택』과 제4형식인 『사브아 저택』이 계획된 백(白)의 시대 주택에는 공통되는 몇 개의 구성상 특징이 있다. 그것은 구조의 시스템(도미노)이 가져오는 건축 상의 발견인데, 1929년, 「근대건축의 5가지 원칙」으로서 그 특징을 스스로 정식화하고 있다. 만날 수 있었던 필로티(Les Polotis), 옥상정원(Le Toit-Terrasse),자유로운 평면에 관하여지금까지 건축평면은 구조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14-1945년에 걸쳐 Le Corbusier는 건축의 참된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공간 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은 1932년 알지에의 오뷰계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고 『바이센호프Weissenhof 주택.1927』에서 Le Corbusier는 가동식 칸막이를 도입해서 야간에는 거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꿀 수 있게 처리했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가로로 긴 창에 관하여Le Corbusier가 제안한 도미노 시스템은 파사드의 폭 안에서 창의 가로 폭은 무제한으로 확정될 수 있다는 특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내공간을 한결같이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시트로앙 주택』이나 『와이센호프 주택』에서 이 같은 창들은 필로티 위에 얹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국제연맹본부 계획안에서는 길이 200m에 이르는 가로로 긴 창이 선보이게 되기도 한다.◇자유로운 건물정면에 관하여자유로운 파사드(Facade)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의 건축원리는 독립되어 구상된 원리라기보다는 이상의 네 가지 원리의 준수에 뒤따르는 조형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파사드의 구상원리는 Mies(Ludwig Mies van der Rohe,1886~1969.독일,미국)의 경우처럼 완전한 유리상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Le Corbusier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사브아 저택』에서 이 원리를 알 수 있다.▣ 규준선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한 「모듈러Modulor」Le Corbusier가 생애 전반기에 연구한 「도미노시스템」은 기본 골조 시스템을,「근대건축의 5원칙」은 건축 요소들의 설계 원칙을에 연
..PAGE:1건축가 Le Corbusier국제언어문화학부2001103144진 주 영..PAGE:2건축적 배경「보시는 대로 나는 얼빠진 늙은이죠. 그러나 아직 나의 머리 속에는 적어도 백 년 분의 계획은 있습니다. 그럼 또 나중에...」 1965년 8월 27일죽음을 수 시간 앞둔 Le Corbusier(본명은 Charles Edouard Jeanneret, 1887~1965.스위스, 프랑스)의 이웃사람과 나눈 최후의 대화이다. 겉으로는 차갑게 보이지만 그는 건축에 관한 학식과 직감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건축가였다.1887년, 한해 중 반은 눈에 묻혀 산다는 지라산맥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태어나, 빛에 대하여 예민한 창조의 어두운 꿈을 키워오고,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는 내향적인 성격의 한 소년은 그의 나이 18세에 이미 첫 작품 『파예 저택Villa Fallet』을 만들고 24세 때, 마침내 동방으로의 여행 길에 올랐다. 비엔나에서 시작하여 부다페스트, 터키, 그리스 등지를 돌아 이탈리아를 경유하는 긴 여정의 동방순례. 여행에서 만날 수 있었던 지중해의 쪽빛 바다와 찬란한 햇살, 눈부신 백색의 단순한 형태의 건물들, 푸른 초목들에 매료되어 버린다...PAGE:3그의 동방여행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과 건축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눈뜨는 계기가 된다. 여행수첩을 보면, 뒤에 아이디어의 근원이 되는 것과 같은 모든 발견의 씨앗을 그곳에서 볼 수 있다.1914년에는 대량생산을 위한 철근콘크리트 구조인 도미노 주택을 연구한 바 있는 그는 30세 되던 해, 슈와브 저택의 완성을 끝으로 고향 라 쇼드퐁을 등지고, 세계를 무대로 할 준비를 위해 빠리로 진출한다. 화가로서의 생을 살기도 했던 그는 입체주의에서 순수주의로의 발전과정을 경험하고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정신을 기하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조형세계에서 기하학적 형태가 우위를 차지하여야 한다는 순수주의 운동을 전개하고 순수파를 창시한다...PAGE:4Le Corbusier 의 연구활동도미노(Domino)구조4개의 기둥에 2개의 슬래브를 올려 이를 계단으로 연결하는 단순한 건축체계이다. 이것은 철근 콘크리트에 의한 기둥과 보와 바닥판이 주구조이고, 여기에 벽체가 독립적으로 첨가되는 것으로서 보를 제거하고, 콘크리트 벽을 해방시켜 판유리를 벽으로 대체시키는 기법이다. 따라서 주택은 지상의 기둥에 의해 지지되고, 여기에 필로티도 만들고, 그 위는1층이 되고 주거공간을 만들게 된다. 따라서 수평적으로 생활공간을 넓히는 기법으로서 수평적인 건축을 제안하고 이에 따라 그는 「도미노」를 응용한 많은 양산주택을 계획한다.「도미노」구조..PAGE:5시트로앙 형 주택1920년대 초 Salon d'automne에「도미노」에서 유래한 「시트로앙Citrohan형」양산주택을 출품한다.그에 의하면「시트로앙형」이야말로 현대생활의 기초단위이며, 양산이 가능하고, 어떠한 대지에도 건설될 수 있었다.실제, 파리의 장식 박람회를 계기로 건설된 『에스쁘리 누보관』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집합주택인 『유니테 따비다시옹』으로발전된 하나의 유니트이다.「시트로앙형 주택」1922..PAGE:6근대 건축을 위한 5가지 원칙1920년대 중반 르꼬르뷔지에는 근대건축에 관한 5가지 요점으로 지주,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계획, 자유로운 정면외관, 가로로 긴 연속창 등을 열거하였다.르 꼬르뷔지에는 “각각의 문제들로부터 새로운 것을 이끌어 낸다”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한 위대한 해석자였다. 그 실례를 보면 그는 전통적인 주택을 선택해서 그것을 ‘차가운 이성의 빛을 통해 분석하였다. 아래 그림들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근대 건축을 위한 5가지 원칙을 엿볼 수 있다.대개 주택들은 지상 위에 세워지면서부터 그 토지를 ‘차지’하게 된다. 건설 시 근대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면 주택은 다리를 갖고서 지상위로 올려 질 수 있다.필로티에 관하여..PAGE:7옥상공원에 관하여그에 의하면 옥상테라스의 장점은 눈이 많은 북유럽 지방의 경우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의 누수의 위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엷은 층의 흙을 덮어둘 경우 옥상테라스는 언제나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옥상에 숲이 무성한 풍경은 지금은 일상적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Le Corbusier의 ‘새로운 정신’과 도 같았다...PAGE:8자유로운 평면에 관하여지금까지 건축평면은 구조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14-1945년에 걸쳐 Le Corbusier는 건축의 참된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공간 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은 『바이센호프Weissenhof 주택.1927』에서 Le Corbusier는 가동식 칸막이를 도입해서 야간에는 거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꿀 수 있게 처리했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PAGE:9가로로 긴 창에 관하여Le Corbusier가 제안한 도미노 시스템은 파사드의 폭 안에서 창의 가로 폭은 무제한으로 확정될 수 있다는 특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내공간을 한결같이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시트로앙 주택』이나 『와이센호프 주택』에서 이 같은 창들은 필로티 위에 얹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국제연맹본부 계획안에서는 길이 200m에 이르는 가로로 긴 창이 선보이게 되기도 한다...PAGE:10자유로운 건물정면에 관하여자유로운 파사드(Facade)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의 건축원리는 독립되어 구상된 원리라기보다는 이상의 네 가지 원리의 준수에 뒤따르는 조형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Le Corbusier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사브아 저택』에서 이 원리를 알 수 있다...PAGE:11규준선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한 「모듈러Modulor」「모듈러」는 쉽게 말해, 모듈이라는 말을 황금분할과 관계시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이 개념의 발상은 근대사회를 보는 그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근대사회의 건축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표준화와 도미노시스템 주택을 위한 콘크리트의 골조의 방법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주택의 대량생산이라는 사회적 당면과제를 풀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치수시스템에 입각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켰고 1948년 모듈러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천하를 추수하는 씨앗을 뿌린여 불 위과 목 명 : 중국문화기행과 제 명 : 중국관련 주제에 대한 조사(여불위)차 례들어가며여불위에 관하여{기화가거{태자를 키우다{천하를 추수하는 씨앗을 품은 창녀,하지만 자신도 몰랐을 이름, 태후 조희{六과 야반도주{태자들, 군주로 올려놓다{일자천금{큰 물고기도 물을 떠나면 개미에게 먹힌다.나가며참고문헌들어가며진(秦)나라의 천하를 통일제국으로 만들어 중국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초대황제, 진시황에게는 태생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다. 왕위쟁탈하기 위한 십수 년간의 숙원사업을 일구어내고 천하의 여자와 금은보화를 가졌던 위나라 상인 여불위,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여불위에 관하여{기화가거아버지,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백 냥을 투자 했다면 그 소득은 얼마나 되겠습니까?갑작스런 질문에 아버지는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약 열배는 벌어야 되지 않겠느냐?그럼, 보석을 사서 보관하였다가 내다 팔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아마 백배는 될 것 같구나.이 말을 듣자 아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넌지시 물었다.아버지, 그럼 왕이 될 자를 도와주고 나중에 권력을 차지하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하고는 말했다.글쎄다. 그건 계산하기가 어렵구나.아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농사를 지어서 얻는 이익이란 그저 추위에 떨지 않고 배곯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장차 나라의 대권을 잡을 왕을 키워주면 그 혜택은 두고두고 남을 것입니다. 저는 방금 꽤 괜찮은 인질을 하나 봐 두고 오는 길입니다. 보아하니 천하에 으뜸가는 귀인이 되겠더군요. 이 기화를 사놓겠습니다.기화가거(奇貨可居)기묘하고 귀한 물건을 사두었다가 때를 기다려 큰 이익을 얻는다는 뜻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출전 : 사기 :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주왕 52년, 기원전 263년의 일이며, 그 아들은 이름하야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35)였다. 위(魏)나라 상인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해 두고 있었으며 여러 나 여불위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여불위는 한단의 이인을 만나 제안을 한다.공자님의 문호를 넓혀 드릴 기막힌 묘안이 있습니다.내 걱정은 마시고 그대의 문호부터 넓히신 다음에야 오든가 하시오.아하, 모르시는 말씀, 공자님이 잘되셔야 제가 잘 됩니다.음~ 그럼 어디 들어나 봅시다.타국에서의 인질 생활을 어찌 팔자려니 하며 신세한탄만 하고 계십니까? 공자님, 저에게는 모아 둔 재산이 좀 있습니다. 이것으로 공자님은 생활하 고 계십시오. 저는 나머지의 것으로 안국군이 총애하시는 화양부인(華陽夫 人)을 만나 뵙겠습니다. 왜냐구요? 자태가 고운 미인 화양부인이시지만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후계자를 정하실 수 있는 분은 화양부인 이십니다. 이런 화양부인의 사랑을 얻어 태자(太子:황태자의 준말로 황위를 이을 황자)가 되어 보시지 않겠습니까?왕위를 황금으로 사려는 계략과 음모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이인을 보는 순간 기화라 하며 여불위만 탁 하고 무릎을 쳤던가! 자료를 조사하면서 나 또한 여불위의 통찰력과 말재간에 그 조용한 도서관에서도 무릎을 때리지 않을 수 없었다.바로 여불위의 탁월한 능력, 생각의 민첩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태자를 키우다크게 볼 줄 알고 멀리 내다 볼 줄 아는 그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사업의 기초 작업에 착수하였다.그는 황금 천 냥을 가지고 한단의 이인을 다시 찾아가 황금을 반으로 나누어 이인에게 쥐어주며 생활과 옷차림 그리고 대인관계에 힘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나머지 황금으로 금은보화를 가득 사서 수레에 싣고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있는 진나라의 함양으로 갔다.먼저, 화양부인의 언니를 찾아가 호감을 사고는 화양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수레에 한가득 실은 금은보화와 진귀한 물건들을 화양부인의 앞에 펼쳐 보이며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이인이 화양부인께 선물로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인은 지금 어렵다는 타국 생활에서도 한 시도 부인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며 지극한 효성을 보인다고 했다.그리고는 본론으로 들「여불위열전」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여불위는 한단의 기녀들 중에서 자태가 유난히 아름답고, 춤을 잘 추는 여인을 골라 측실로 삼으니 얼마 후 잉태했음을 알게 되었다. 자초가 여불위를 따라 술을 마시다가 그 여인을 보고 기뻐하여 자기에게 양보해 주기를 청했다. 여불위는 노했으나 생각건대 이미 재산을 털어 자초를 위하고 있음은 장차 큰일을 도모하고자 함이다. 드디어 조희를 바치니 여인은 잉태하고 있음을 스스로 감추었다. 12월에 아들 정(政)을 낳았다. 자초는 조희를 부인으로 삼았다.때는 진소양왕 48년 기원전 259년 정월 초하루에 천하를 통일할 진시황(秦始皇)이 태어났으며 사랑하는 아내의 성을 따 조(趙)씨라 하였다. 정이 누구의 씨앗인 줄도 모른 채...... 여기서 자초는 이인이 후에 화양부인으로부터 받은 이름이다.「진시황 본기」에는 좀 다르게 나와 있다.진 시황제는 장양왕(莊襄王:이인)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진나라의 질자(다른 나라에 인질로 온 인물)로서 조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의 첩을 보고 반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아 시황을 낳았다.아마도 천하를 다스린 황제를 외간의 씨앗이라고 하기에는 진시황의 명예에 흠이 나기 때문이라고 여러 책들은 쓰고 있었다.{六과 야반도주정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다. 진 소양왕 47년, 조나라에 대한 진의 폭격으로 조나라는 황폐화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한 복수는 고스란히 질자의 몫이 되었다.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여불위는 당황해하지 않고 이인에게 초(楚)나라 옷을 입히고 거금을 준비했다. 야반도주를 위함이었다. 어둠이 온 마을을 뒤덮었을 때 여불위와 이인은 어둠의 길을 내어달렸다. 수문장 앞에 다다랐을 때 여불위는 보따리를 건네며 오른손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황금 6백 냥이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그들은 어렵게 조나라를 탈출하여 진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부인부터 찾았다. 그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화양부인은 이인의 초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심히 놀라 물으니 이인은 한 시도 잊지 못해 어머니의 자 책봉을 받았다. 그런데 안국군은 효문왕(孝文王)으로 즉위한 지 사흘 만에 까닭 없이 죽었다. 여불위는 재빨리 자초를 왕위에 앉혔다. 바로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은 화양부인을 태후(황제의 살아 있는 모후母后)로 모시고 조나라로 귀국한 조희를 왕후(왕비王妃)로 삼았다. 그리고 조정은 태자로 책봉되었다. 보답으로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乘相중국의 옛 벼슬 이름. 우리나라의 정승 에 해당됨.)으로 봉하고 문신후(文信侯)로 칭함과 동시에 하남땅 낙양의 10만 호의의 영지를 받았다. 장양왕이 왕이 된 지 불과 3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태자인 정이 왕위에 올랐다. 그 때 정의 나이 13세였다. 조태후가 나라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게 되었으며 여불위는 상국(相國조선 시대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 되어 권세를 휘둘렀고 중부(仲父아버지의 형제 가운데, 백부(伯父) 이외의 아버지의 형을 이르는 말)의 호칭을 왕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여불위의 숙원사업 왕위찬탈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장양왕이 인질 생활에서 진나라의 왕위에까지 올라 올 수 있었던 것에는 실로 여불위의 공이 매우 컸으며 그는 상당한 전략가였다. 한 나의 재상에 10만 호의 식읍을 차지하게 된 여불위는 무수한 금은보화와 미인들을 품안에 거느리게 되었다.{일자천금정의 나이는 어렸으니 진나라의 정치는 여불위의 손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의 생모 또한 여불위의 애첩이었으니 싫을 리 없었다. 왕을 아들로 두고 애첩을 태후로 두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여불위, 하지만 가질수록 더욱 갖고 싶은 법! 그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남길 기막힌 묘안을 찾았다. 한낱 장사꾼이란 신분에서 벗어나려 했던 여불위는 책을 내는 것만큼 탁월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불위의 위세와 재력을 보고 선비들은 몰려와 그 수가 3천명을 넘나들었다. 그는 선비들에게 천하의 학문을 집대성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무려 20만여 자에 달하는 대저작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완성되었다. 『여씨춘추』나 한편 이것은 여불위의 기가 막힌 공갈협박술이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한자 고치고 상금을 타 갈 일이지만 여불위가 산을 보고 강이라 해도 지당한 말씀이라고 했어야 할 상황이었다고 한다. 왕보다도 더 막강한 세력을 가진 자가 여불위였으니 말이다.{어찌하였건 여불위는 그의 탁월한 능력,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주 밝은 눈을 과시했다. 강국이지만 문화가 없던 진나라의 모자란 점을 간파하고 그로 인해 장사꾼이란 자격지심도 벗어 던지면서 이름을 알릴 또 다른 사업을 일구어 냈던 것이다.큰 물고기도 물을 떠나면 개미에게 먹힌다한 편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조태후는 나랏일을 의논한다는 핑계로 종종 여불위를 불러들였고, 두 사람은 채우지 못한 지난날의 애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태후의 호출은 때를 가리지 않고 그런 그녀가 자신의 명예에 골칫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자랄 대로 자란 왕의 눈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불위는 여느 때처럼 태후의 처소를 다녀가던 어느 날, 그녀의 불타는 애욕을 채워 줄 또 다른 인물을 찾아냈다. 그가 거느리던 노애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남근은 풍차를 돌릴 정도로 힘이 세다고 귀뜸해주니 음탕한 태후는 눈이 번뜩이며 노애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여불위는 해방감+안도감을 한 숨을 내어 쉬며 노애를 내시처럼 보이게 한 후 환관으로 꾸며 태후궁으로 들이밀었다. 사실 노애를 자신의 식객으로 받아들인 것도 태후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이 후 태후는 여불위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노애는 조희의 세 번째 남자인 셈이었으며 그들의 육신만큼은 찰떡궁합이었던 것이다.그러던 중 큰 문제가 발생했다. 태후가 노애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들은 방법을 강구해냈다. 자신의 운세에 액이 끼었으니 옛 땅인 옹으로 가서 살라는 점쟁이의 말을 아들에게 꺼냈다.옹에서도 그들의 애욕은 잠들지 않았고 장차 왕위로 앉히려는 아들을 둘이나 낳아 기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노애의 권세는 날로 커져갔고 옹에서 떵떵거리며 지내고 있었다. 진왕 정 8년(다,
행복한 사랑은 없네-루이 아라공아~ 다시 한 번 샹송의 감미로움에 빠진다.흘러나오는 샹송 에...옆에 앉은 친구 수업시간... 딴 짓 하다가도 어느 새 feel 받아 따라 부른다^^::나 : 너 이 샹송 알아?친구 : 아니, 첨 듣는 건데.나 : 역시 우리 친군 절대음감이다. ㅋㅑㅇㅏ~멜로디가 쉽기도 하여 나 또한 어렵지 않게 따라 부른다. 구슬픈 멜로디가 나로 하여금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어째서 이런 슬픈 곡조를 만들어 냈을까. 슬픈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젠 시를 읊어보자.그의 그림자는 십자가의 형상행복을 움켜진다면서 행복을 부수어 버리네.무기 없는 병사와 같네.내가 엮어 낸 말, 그대 두 눈앞에서 지워버리는 말은 나의 가슴에 와 닿는 시구들이다. 비교적 긴 시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듯 하다. 하지만 희생, 전쟁의 참상, 조국에 대한 사랑, 생활의 각박함, 그녀 앞에선 부정하고픈, 행복 없는 사랑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루이 아라공은 행복한 사랑은 없다고 연마다 되풀이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시를 읽는 우리들도 힘을 얻는다. 우리 둘의 사랑이니까..명시감상의 수업이지만 이 시만큼은 샹송으로 느끼고 기억하고 싶다. 샹송이나 시나 예술.. 그들의 범주는 두부모 자르듯 자를 수 없는 것!식당-프랑시스 잠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ㅡㅡㅡㅡㅡㅡㅡ^이 시를 감상하고는 끝에 한 마디 써 둔 말을 옮겨보았다.의 무엇이 위의 명시구를 생각나게 만들었을까...식당의 장과 시계와 찬장 등 함께 살아 숨쉬는 것들이 많은데안녕하세요, 잠 씨? 하는 방문객의 인사에 대답을 하기가 무엇하기에 잠은 그냥 한 번 웃고 말았을 것이다. 지극히 소박하고 자연주의적인 잠의 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시 와 사상을 같이함을 느낀다.
제라르 드 네르발요컨대, 단단한 돌 껍질 속에서도 순수한 정령은 자란다!-제라르 드 네르발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그 누가 말했던가, 네르발은 반박한다.인간간의 소통에는 언어 가 있듯이개미들 사이에는 더듬이 가 있고별들 사이에도 빛 이 있다고.문득 궁금해진다. 왜.. 제목이 『황금시』일까..황금시 라는 제목을 가졌던 또 다른 어느 시에서는 그것이 그리스신화가 들려주는 황금 시대 로의 복고를 뜻한다고 어느 책에서 본 바 있다. 만물들 하나하나에는 신성한 생명이 깃들어 있고 그러한 것들이 서로 탐내지 아니하며 조화를 이루던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황금시 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황금시의 마지막 행을 보고있자니 그것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몇 가지가 뇌리를 스친다. 경남 어느 소도시에는 영남루라는 누각이 있다. 그 밑을 유유히 흐르는 남천강변에는 범치 않은 돌들이 있는데 이름하여 석화(石花)가 줄지어 깔려 있다. 비가 와서 돌들이 젖게되면 그 윤곽을 확연히 드러냈던 석화들... 그것들도 꽃이니 깔려있는 것이 아니라 피어 있었다고 다시 말하고 싶다. 다른 한 가지는 나라의 중대사가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 이야기이다. 이 비석이 땀을 흘리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 없지만 익히 들어 알고 있으며 사진으로 봤을 때는... 한낱 돌덩어리를 다듬었다는 생각이 아닌, 신성하리만큼 신비한 생명감을 느꼈다.단단한 돌 껍질 밑에서 순수한 정령이 자란다! 네르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내가 말한 돌 들 뿐만이 아닐 테다. 그는 우주만물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황금시』는 초자연적 세계로의 비상을 꿈꾼다.이 마음을 나타낼 수 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