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1. 머리말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연대의 설정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연대가 결정됨으로써 기타 고고학의 제문제, 즉 문화의 기원 및 전파, 인간집단의 이주방향, 문화의 변동속도 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은 절대연대를 알려주는 방법의 하나로 고고학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은 1940년대 후반 리비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은 실로 세계 고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우리나라에서는 1961년 처음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소개되었다.2. 리비의 약력과 연구동향리비는 갤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하여 1933년에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1941년까지 핵화학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41~1945년 콜럼비아 대학에서 원자탄 개발계획에 참가하였고, 1945년 시카고 대학 방사성화학 교수로 임명되어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점차 알려지면서 리비는 196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1950~1960년대에 와서는 측정방법의 개선을 통해 측정효율을 높였으며, 1960~1970년대에는 연륜법의 발달에 따른 나이테의 연대와 방사성탄소연대를 비교하여 그 오차를 수정하는 일련의 연구가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측정방법의 새로운 시도, 즉 거대한 질량분석기에 의해C ^{14}원자를 직접 헤아리는 방법이 연구되어 이 측정법의 기술적인 혁신을 이룩하였다.3.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의 내용1) 기본이론N ^{14} +n(중성자) -> C ^{14} +H ^{1}기본이론에 따라 연대를 계산하는 공식I=I _{0} ```e ^{- lambda t}#t= {1} over {lambda } log _{e} {I _{0}} over {I} = {t _{1/2}} over {log _{e} ^{2}} log _{e} {I _{0}} over {I}I : 시료중의C ^{14}농도I _{0} : 현대 표준시료 중의C ^{14}농도, 즉 N,B,S.시료[미국 국립표준국에서 조제된 화신시료]의C ^{14}농도의 95%t : 시료의 연대t _{1/2} : 반감기C ^{14}의 반감기는 1951년 리비에 의해 5568+-30년으로 사용되었으나 그뒤 1962년 캠브리지에서 열린 제5회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국제회의에서 5730+-40년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연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혼란을 막기 위해C ^{14}연대는 그대로 반감기를 5568+-30을 사용하기로 하였고 여기에 1.03을 곱하기로 하였다.C ^{14}연대는 편차가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편자는 방사성 측정분야의 발전으로 어느 정도 그 원인을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연구에는 수에스효과, 원폭효과 등의 이론이 있다.2) 측정방법리비에 의해 최초로 개발된 방법은 고체탄소의 방사능을 측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효율이 낮아 방사성탄소가 붕괴되면 그 중 5%정도만을 측정할 수 있었다.다음에 개발된 방법은 기체시료측정법이다. 이 방법은 탄소를 이산화탄소로 전환시키고, 적절한 정제과정을 거쳐 메탄 혹은 아세틸렌 등으로 변화시켜 방사능을 조사하는 것이다.세 번째 방법으로 액체시료측정법을 들 수 있겠다. 이 방법은 시료의 탄소를 액체상태로 변화시켜 이를 액체섬광계측법에 의해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하는 것이다.3)C ^{14}연대의 편차수정처음 리비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자료를 측정해 본 바 3,000~ 5,000년 전의C ^{14}연대가 실연대보다 낮게 나타남을 시인하고 당시C ^{14}농도가 현재보다 다소 높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반감기가 새로 5730±40년으로 밝혀짐에 따라 그 차이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다.캘리포니아 대학의 수에스는 연대를 아는 시효를 재료로C ^{14}측정연대와 실연대와의 차이를 규명했다. 그는 두 연대의 편차를 수정하는 공식을 만들었고, 보정곡선도 작성했다.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랄프는 역시 631개의 나이테 자료를 바탕으로C ^{14}연대와 실연대와의 관계를 규명하려 했다. 먼저 두 연대의 관계를 복잡한 3다항식으로 표현했다.애리조나 대학의 다몬도 549개의 시료를 바탕으로C ^{14}연대와 실연대의 대조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랄프의 경우와 달리 오차에 일률적으로 10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각 연대가 갖는 오차연대를 따로 표시해 둠으로써 연대보정을 할 때 각각 오차의 폭을 계산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또한 이 외에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C ^{14}연대의 편차를 수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계속 되었다.4) 시료의 취급방법C ^{14}연대측정법에서 가장 주의깊게 취급해야 할 점은 시료의 오염문제이다. 오염이 되는 주요 원인은 자연발생적인 것과 시료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1) 시료의 선정시로는 유적과 직접 관련이 되어야 하고, 시료가 유적에서 채집될 때 확실한 층위를 가졌거나 뚜렷한 위치를 점하였던 것으로서, 그 어떤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시료가 적합하다.(2) 시료의 종류 및 필요량C ^{14}연대측정시에 사용되는 시료의 종류나 1회 측정에 필요한 시료의 양은 측정장치나 연구소에 따라 다르다. 때문에 미국과 일본의 두 연구소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양을 보면 과 같다.종류연구소목탄, 목편이탄패각뼈상아토기, 철토양모발, 모피미국의MASCA2550~200100300502,000~5,000일본의학습원대학1050~1004060050050~100(3) 시료의 전처리 및 보존시료가 선정되면 지상에 노출됨으로써 일어나는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료에 포함되어 있는 불순물을 핀셋으로 모두 제거하고 바로 플라시특 용기에 넣고 밀봉하여야 한다. 단 습한 사료는 가능한 빨리 건조시켜 곰팡이가 나지 않게 해야 하고 그 밖에 불필요한 세척, 선별, 노출 등은 일체 금해야 할 것이다.(4) 시료가 내포하고 있는 오차시료 중에서 목탄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연대측정의 대상이지만, 목탄을 시료로 하여 측정하였을 때 그 연대가 가질 수 있는 오차가 있다.취급 과정에서 생기는 오차는 연구소에서 측정한C ^{14}연대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오차의 발생을 배제하기 위하여는 한 유적에서도 확실한 층위를 가졌거나 위치가 분명한 시료를 여러 개 채집하여야 할 것이다.5)C ^{14}연대의 의미]C ^{14}연대가 갖는 오차는 기본이론 시료의 채집, 시료의 측정, 연대보정 등 제 단계에서 발생될 수 있다.측정과정에서 오는 오차는 같은 연구소에서 계속적으로 같은 시료를 측정하더라도 나타나지만 같은 시료를 다른 연구소에서 측정하더라도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C ^{14}연대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단순히 한 개의 연대가 절대연대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끝으로C ^{14}연대를 취급할 때는 반드시 그 연대가 산출된 반감기를 표시해 두어야 하며 만약 연대보정을 했을 때는 그 방법을 부기해 두어야 한다.4.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의 영향1) 유럽가장 먼저C ^{14}측정연대가 편년에 영향을 미친 것은 유럽이다. 유럽의 편년은 덴마크의 톰센, 월사에 등의 삼시대법을 기초로 몬텔리우스를 거쳐 1930년대 차일드에 의해 확립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C ^{14}연대가 발표되기 시작하였으나, 이 연대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 근동지방에 새로운 신석기유적들이 발굴되고 그 연대가C ^{14}연대측정법에 의해 5000~600B.C로 올라가는 것이 밝혀지고, 유럽 각국에서도C ^{14}연대가 계속 발표되자 그 때까지 존속하였던 차일드의 편년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2) 일본C ^{14}측정연대에 대한 논쟁이 가장 격심했던 경우가 일본고고학계이다 일본의 선사시대는 선토기시대, 죠몬시대, 야요이시대, 고훈시대 등으로 구분되는데 논쟁의 초점인 죠몬 토기시대의 연대문제에 있었다. 메이지 대학 고고학교실에서 발굴한 신내천현 하도 패총의 하층에서 출토된 목탄과 패각을 미국의 미시간 대학에서 측정한 결과 이 유적의 하층은 조몬시대 조기에 해당되는 기본의 연대와는 약 5,000년의 차이를 보여준 것이다.
고고학에 있어서 자연과학의 활용Ⅰ.머리말고고학은 학문으로서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20세기 전반까지의 고고학연구는 형식학적 방법, 계기연대법 및 전파론 등이 중심이 되어 유물을 분류하고, 편년하면서 그 계통을 추구하는 단순한 수준에 머물렀다.그러나 20세기 중엽 고고학의 연대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사성탄소연대결정법을 비롯하여 유물의 과학적 분석, 통계적 분석 등 자연과학적 방법이 고고학연구에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바탕으로 1960년대 미국의 L.Binford는 신고고학을 주창하게 된다. 이후 현대 고고학에서는 자연과학적 방법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고고학은 과거의 문화를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른다.한국 고고학에서 자연과학적 방법의 도입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이 효시라고 볼 수 있다. 1951~1952년 가평 마장리 유적에서 목탄을 채집, 미시간 대학에 의뢰하여 방사성탄소연대를 얻었다. 이후 토기의 과학적 분석을 시작으로 철기, 청동기, 곡옥, 흑요석, 유리 등의 자연과학적 분석이 시도되고, 이를 통하여 제작기술의 확인과 산지추정이 이루어지고 있다.그리고 고고학적 자료의 통계적 분석과 지질 및 토양, 동물뼈, 인골 등 자연유물의 분석 등이 소개되면서 자연과학적 방법은 고고학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2.고고학과 자연과학고고학연구는 물질적인 자료(고고학적 자료)인 유물, 유구 등을 찾아내어 이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고고학연구의 목적은 과거의 문화사와 생활사를 복원하고, 그리고 문화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있다. 이러한 연구목적을 위해서는 유물 및 유구에 대한 체계적이고 다각적인 분석이 요구되고, 이러한 물질적 자료들의 변형과정의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자연과학적 도입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일반적으로 고고학자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연과학자는 고고학에서 필요로 하는 요구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자가 전문적으로 자연과학의 교육을 받거나 자연과학자가 고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원활하지 못하다면 가장 바람직한 대안은 두 분야의 학자가 학제적인 연구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고학자가 자연과학적 분석결과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의 특징과 제한점 등을 정확히 파악하여야 하고, 그 결과가 고고학에서 타당한지를 검토한 연후에 이를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3.고고학연구와 자연과학적 방법1. 과학적 탐사법고고학적 자료의 수집단계이다. 가장 먼저 알려진 유적의 탐사법에는 항공사진술이 있다. 이것은 지상조사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대규모의 유적을 항공사진에 의해 확인하는 방법으로 유럽의 거석유적, 남미의 유적 등이 이같은 방법으로 확인되었다. 항공사진술은 기술이 더욱 진척되어 최근에는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을 판독하여 유적을 찾아내는 방법도 개발되고 있다.유적의 탐사를 위한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전자파를 이용하는 물리탐사법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적탐사법에는 전기탐사법, 자기탐사법, 지중레이더탐사법, 전자유도탐사법, 정상파탐사법 등이 있다. 이들 방법은 다양한 전자파를 지중에 발사하여 그 반사되는 파장을 통해 지하의 유구의 존재유무 및 규모를 파악한다.2.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한 분석법여기에는 유물의 재질분석, 연대측정법, 통계학 및 컴퓨터를 이용한 분석, 자연유물을 통한 고환경연구 등이 있다.재질분석은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하여 유물의 성분 및 구조를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과학적 분석 방법은 현미경분석, 화학분석, 열분석 및 방사성사진술 등으로 나누어진다. 현미경분석에는 실물현미경 및 편광현미경에 의한 분석과 주사전자현미경분석, 화학분석에는 발광분석법, X선 회절분석, 전자탐사미량분석, 뫼스바우어 분광분석, 중성자방사분석, X선 형광분석 등이 있다. 그리고 열분석에는 시차열분석 등이 있다.이러한 분석법을 활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1)분석대상과 목적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알아본다.2)분석결과를 검토하고, 그 의미를 찾아본다.3)분석방법에 대한 제한점과 어려운 점 등을 검토하여 더 경제적이고, 편리한 방법을 찾는다.그리고 분석대상에는 석기를 비롯하여 토기, 흑요석, 곡옥, 청동기, 철기, 유리 등이 있다. 먼저 석기의 분석에는 사용흔의 분석과 재질의 분석이 있다. 사용흔 분석은 주로 현미경의 관찰을 통해 석기의 사용방법을 알아보고 사용자들의 행위를 추정하는 것이다. 흑요석과 곡옥 같은 경우 성분분석으로 통하여 그 원산지를 추정하고 제작지의 문제, 제작기술의 문제, 교역의 문제 등을 다룬다. 토기의 경우 태토의 성분, 소성온도 및 조건, 화학적인 성분파악을 통하여 태토의원산지, 토기의 제작기술 및 고대의 교역관계를 추정할 수 있고, 금속기의 경우 철길기의 분석으로 통해 철의 종류, 제작기술 등을 파악할 수 있다.다음은 자연유물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다. 유적 주변에서 발견되는 동물뼈를 비롯하여 어류, 조개류, 조류 등의분석을 통해 당시의 동물상을 파악하고 당시 주민의 생업도 살필 수 있다. 또한 화석화된 식물유체의 검색, 화분의 검출 등으로 당시의 식물상을 파악한다.지질학 자료의 분석은 지질학에서 연구되는 지층에 대한 지식을 고고학의 유적에 적용하는 것으로, 특히 제 4기 지질의 연구가 고고학에 도움을 주고 있다.이와같이 자연유물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동물상, 식물상 및 지질의 상태를 파악하고 당시의 자연환경을 복원하는 데 기본적인 것이며 고고학에서 과거의 문화를 복원하는 데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그 밖에 주로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에 대한 분석적 연구는 화석인간의 연구, 인종의 분화, 생물학적 비교, 법의학, 매장양식, 고인구 등의 연구와 당시 죽은 원인, 즉 고생물병리학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다.고고학에서 연대를 밝히는 작업을 연대결정법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상대연대결정법과 절대연대결정법으로 나누어진다. 상대연대결정법에는 층서법, 형식학적 방법, 순서배열법 등이 있다. 절대연대결정법은 자연과학적인 방법에 의한다는 뜻에서 절대연대측정법으로도 불려진다. 이 방법은 다음과 같이 여러 종류로 분류될 수 있는데, 첫째 방사성원소를 이용한 물리적 방법으로 C 연대측정법, 포타시움?아르곤측정법, 피션?트랙측정법, 열발광측정법 등이 있다. 둘째, 지질학적 연대를 고고학에 이용하는 지질편년법이다. 셋째, 동물상?식물상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화분학, 연륜법 등이 있다. 넷째, 화학적 방법으로 아미노산측정법과 흑요석수화층측정법이 있다. 이러한 절대연대측정법의 등장은 고고학에서 불확실하던 선사시대의 편년을 결정해 줌으로써 고고학연구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통계적 분석은 고고학적 자료의 분석단계에서 전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료의 증가는 통계적 분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연대측정결과나 유물의 자연과학적 분석의 결과도 통계적인 수치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통계적인 개념이 필요하다. 한국 고고학에서는 자료의 정리에 기술통계학이 일부 이용되고 있으며, 다변량분석법은 유물의 과학적 분석을 통한 시료의 분류에 이용되고있다.
운주사의 관불과 괘불에 대하여화순에 있는 운주사에 갔을 때 석가탄신일을 기념하여 사용한 불교유물은 관불과 괘불 두 개가 가장 눈에 띄었다. 그 중 괘불은 스님에게 여쭤본 결과 스님들도 괘불인지 조차도 모르고 괘불이라고 하기에는 크기도 작지만 주변에 괘불로 생각할 만한 다른 불화가 없고 따로 찾아본 괘불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림의 배치 등이 비슷하기 때문에 괘불로 추정하고 있다.운주사운주사(雲柱寺)는 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이 절의 창건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신라말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에 근거해 비보사찰로 세웠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에 비유, 배를 진압할 물(物)이 없으면 침몰하기 쉽기 때문에 그 중심부분에 해당하는 운주곡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워 내실을 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주사와 도선과의 연관은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비보사상을 바탕으로 후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국여지지〉에 고려승 혜명이 무리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혜명을 970년(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면 운주사는 고려 초에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 절로서 천불천탑과 석불 2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석조감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84년 제1차 발굴조사 때 '홍치 8년'이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1495년(연산군 1)에 4번째 중수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초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폐사된 것을 1800년경에 설담자우가 땅에 묻힌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89년 4차례에 걸친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의 파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그결과 운주사는 늦어도 11세기초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비구니가 수도하는 절로 요사채·종각, 그리고 새로 신축된 대웅전·지장전·승방 등이 있으며, 주변에 91구의 석불(완형 50구)과 21기의 석탑 등이 흩어져 있다. 이 가운데 석조불감(보물 제797호)·9층석탑(보물 제796호)·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와불 등이 대표적이다.운주사에 있던 관불과 괘불은 모두 최근에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그곳의 스님들도 운주사의 관불과 괘불들이 언제 제작되었고 얼마나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어서 따로 자세히 알 수는 없다.관불운주사에서의 관불 방법은 전통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약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각종 향료와 오색수를 사용하지 않고 운주사에서 나오는 약수를 이용하여 아기부처님을 목욕시키는데 사용하고 있었다.관불이라 함은 말 그대로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의식으로서 다른 명칭으로는 불생회, 욕불회, 강탄회, 관욕식 등으로도 불린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제석천왕 등의 신들이 천계에서 향기로운 물을 가져와 아홉마리 용이 그 오색향수로 부처님의 몸을 목욕시켰다는 탄생설화에 의거한 것이다. 이러한 근거는 '보요경'이라는 경전에 나와 있는데 오늘날에도 부처님 오신 날에 많은 사찰에서는 아기 부처님을 모셔 씻겨 드리는 관불의식을 행하고 있다. 이 의례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를 상징하여 꽃으로 불단을 장식하고, 그 한 가운데 아기 부처님을 모셔두고 법사 스님과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대중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깨끗한 물을 아기 부처님의 정수리에 붓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을 행하는 이유는 갓 태어난 부처님의 몸을 씻겨 드려 탄생을 축하하고 그와 같은 공덕으로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하루 속히 깨달음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하기 위해서 이다.옛날에는 관불을 하고난 물에는 특별한 공덕이 깃들여 있다 하여 각자 집으로 가져가서 그날 하루 동안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관불의 방법은『마하찰두경』, 『욕상공덕경』에 나오는데 각종 향료를 오색의 길상수로 만들어 다섯가지의 병에 담아두고 관불반 속에 좌대를 마련하여 '탄생불'을 모시고 불상의 두상에 오색수를 붓고 흰 천으로 닦는다. 오색에 있어서 청색은 귀의, 황색은 지혜, 적색은 자비, 백색은 청정, 흑색은 정열을 의미한다.고려시대 때부터 불교 행사들이 대규모의 사회적 행사로 치러졌기 때문에 기록들이 보이나, 백제시대의 관불반이 전해져 현존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때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는 간소화 되어 초파일에만 행해지고 있다.괘불영산회상도·지장회상도·명부시왕도·관음보살도·용왕대신도·산왕대신도 등이 있다. 괘불은 자수를 놓은 것도 있지만 대개는 천에 불상을 그리고 이것을 베에 배접한다. 다른 불화와 달리 크기가 매우 큰데, 큰 것은 높이 15m, 너비 10m에 이른다. 아래에는 원형 축을 달고, 위에는 삼각형이나 반원형 축을 달아 두루마리로 감을 때 부피를 줄이고 사용하기 편하게 한다.
유럽사회와 문화-제 2차 세계대전과 반유대주의1. 반유대주의1) 유대인은 누구인가.-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 민족적인 의미에서는 혈연 또는 개종을 통해 고대 히브리 민족의 후예가 된 유대민족- 유대인들의 집단적 정체성은 출애굽사건에서 기인2) 반유대주의의 발전(1) 그리스 로마 시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유대인은 통치 권력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나 보호와 지지도 여러 차례 받았다.- 대다수의 지식인은 유대인의 불관용, 선교열정, 치안 방해적 태도, 고지식함, 배타성을 혐오- 로마 사람들은 그런 그리스 인들의 유대인에 취했던 배타적 감정을 이어받음(2) 중세- 기독교가 유대교와 경쟁하여 승리-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옛 이스라엘’을 제치고 ‘새 이스라엘’이 언약의 주인이 되었다고 주장- 유대인들을 “예수를 죽인 사람들”로 몰아붙임- 유대인들을 유럽 각처를 방랑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노란 표지를 달아 구별- 사람들이 꺼려하는 고리대금업, 상업, 수공업 종사- 그러나 도시에서도 토착민들과 경쟁해야했기 때문에 박해받고 추방하고 집단 살육도 일어남(3) 근대- 폴란드는 유대인들을 환대- 자본주의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상공업자가 생겨나게 되면서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갈등- 근대의 구체적 반유대주의는 다음과 같다.① 사회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을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자본가로 표현② 19세기 전반에 등장한 낭만주의 운동은 민족의 순수성을 신화적으로 표현.③ 다윈주의의 적자생존 논리로 사회적 약자인 유대인을 더욱더 몰아붙임④ 과학적 인종주의 등장. 고비노 백작은 큰 키에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소유한 아리안족만이 문화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고 했는데, 이를 독일 학자 라가르가 반유대주의로 속화시켰다. 이것이 과학적인 외양을 띤 반유대주의를 심화시킴2. 제 2차 세계대전과 반유대주의1)제 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군과 소련군이 폴란드를 침공으로써 발발- 연합군과 추축군으로 나뉨- 1945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남.- 전쟁기간중 일본은 난징에서 대학살을 감행, 어자 정신대 근무령을 통해 여러 나라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 독일은 ‘인종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 제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 국제 연합(UN)이 창설-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진영사이의 냉전이 발생2) 나치의 반유대주의- 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한 반유대주의 정책은 가면 갈수록 폭력의 세기가 더해짐(1)차별 - 약탈과 불매운동, 뉘른베르크법-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시작(1933)- 당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상점의 약탈, 폭력, 유대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 그러나 시민들에게는 공감대를 사지 못함- 유대인을 판별하고 모든 공공생활과 사회생활에서 몰아내는 뉘른베르크법 제정(2) 축출 - 수정의 밤, 유대인 이민
그라쿠스 형제 개혁 시대의 도시 로마의 경제 위기지금까지 그라쿠스 형제의 경제개혁을 논할 때에는 ‘농지 위기’가 주로 강조되었다. 농민적 성격을 지니면서 로마군의 기초이기도 했던 평민이 병역과 빈곤, 특히 노예 노동에 기초한 대토지 경영의 확대로 가공할 정도로 몰락했기 때문에, 새로이 농민층을 육성하고 동시에 군사력도 강화시키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가 경제개혁을 하려 했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세계 대공황을 전후하여 실제로 정치 혁명의 혼란을 야기시킨 것은 비록 농지 문제에 다소 연관되어 있다 할지라도, 로마시 자체의 긴박한 경제위기였다는 신주류의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이를 정리하면, 그라쿠스 형제의 경제 개혁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농촌의 시각에서 농지 정책적 및 군사 정책적 안목에서 보던 전통적 해석 방식이, 세계 대공황을 기점으로 도시 로마의 시각에서 도시 정책적 안목에서 보려는 새로운 해석 방식으로 바뀌었다는데 초점이 모아진다.Ⅰ. 도시 로마의 호황한니발 전쟁의 종식에서 기원전 167년까지 로마는 다수의 노동자와 공인들을 필요로 하던 번잡한 곳이었다. 배상금, 전리품, 조세, 그리고 광산들의 수입에서 재정 지원을 받아 많은 건축물을 세웠고, 군대는 이전과 달리 보급을 받았고, 군선들이 건조되었다.로마는 주로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시리아에서 거액의 배상금이 들어왔다. 많은 금과 은들이 배상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는 곧 화폐로 주조되었다.특히 기원전 140년대는 돈이 더 자유로운 형태로 로마에 유입되게 되는데 이전과 마찬가지의 배상금 외에도 장교와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전리품을 가져오고 다수의 노예들을 팔아 상당한 금액을 챙길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이 시기에 히스파니아 광산들의 생산량이 증가하여 금의 가치가 폭락하기도 한다.이러한 막대한 양의 돈이 국과와 개인에게 돌아가게 되자 도시 로마는 기원전 146년 이후 놀랄만한 소비가 행해진다. 이는 이 시기에 단기간에 걸쳐 세워진 공공건물과 로마를 장식하였던 조상들로 확인되어진다. 이 시기의 전형적인 소비는 카피톨리움 신전의 천정의 금도금하는 사업이었는데, 이것은 최초의 금도금 천정이 되었다. 기원전 140년대의 또 다른 주요 소비는 상수도 공사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전의 물공급 시스템을 수리하고 새로 건설됨으로써 로마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증명하고 있다.이러한 사업들은 개인의 소비생활을 조장하였는데 공인, 상인들뿐만 아니라 청부업자, 기술자까지도 사치를 즐기게 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이라 할지라도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Ⅱ. 도시 로마의 불황과 곡물 위기기원전 138년 이후 수년간은 기원전 140년대의 경제 번영과는 대조적으로 공공 소비의 급격한 감소가 나타난다. 기원전 130년대의 변화된 경제 패턴은 이 기간 로마가 수행한 전쟁의 성격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때의 전쟁은 비교적 소규모였고, 이 전쟁에서 로마는 한결같이 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없었고 오히려 손실을 가져왔다. 또한 이러한 전쟁 중의 혼란으로 인해서 광산들로부터 금은의 유입량 또한 저하되었을 것이다.그 중 시칠리아의 노예전쟁은 로마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이것은 기원전 135년 에우누스가 반란을 심각한 전쟁규모로 조직화했을 때 더 악화되었다. 로마가 소득뿐만 아니라 식량에 의존해왔던 곡물 10분의 1세는 대부분 징수가 안되었다. 이 곡물 도입의 단절이 로마에서의 위기를 조장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더욱이 전쟁을 통해서 로마는 다수의 노예를 끌고 왔는데, 이들은 최하 계층의 생계를 위협했다. 많은 노예가 농장 경영에 이용되었는데 노예 노동이 자유인 노동을 대체하였다.그라쿠스 시대의 로마는 ‘사회적으로 주요 농업 국가에서 그 도시 인구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와 같이 경제의 위기로 인해 건축 토목사업의 부재로 인한 국고금의 지출 중단은 로마시 노동자와 공인들을 실업자로 전락시켜 그들의 경제생활에 즉각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식민사업의 장기간 중단으로 로마는 더 이상 식민시로 실업자들을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식민사업의 중단으로 인해서 당시의 주택사정은 열학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주택사정에 대한 직접 사료는 없지만 집값의 꾸준한 상승은 분명하다. 빈민 계층은 이러한 집세를 전적으로 혼자 처리해야 했다. 아무리 기원전 140년대가 번영의 호경기 시대였다 할지라도 장기간의 점진적인 인플레이션은 물가를 서서히 등귀시켰으므로, 하층 빈민들의 생활은 만족될 수가 없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도시 경제의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불안의 요인은 곡가의 등귀였다. 그라쿠스로 하여금 호민관에 당선케 하였고, 그의 개혁 프로그램이 취할 방향에 영향을 끼쳤던 상황의 요인은 곡물의 부족과 그에 결과한 빵값의 고가였는데, 이는 시칠리아의 노예전쟁 결과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미증유의 연속적인 대흉작으로 기원전 138년 이후의 곡가는 불과 2년전에 비해 5배로 올랐고 13년 후인 기원전 127년에는 무려 12배로 솟구쳐올랐단 사실은 아무리 임금이 인상된다 하더라도 곡가의 급등에 비할 바가 못 되므로 곡물 위기로 빚어진 사태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