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다민족국가를 형성한 싱가포르Ⅰ. 서 론싱가포르는 도시국가로서 총인구 약 350만, 면적은 우리나라의 서울정도 크기로 말레이 반도 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싱가포르의 전 수상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굶주린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새우 로 비유하면서 주변국가 특히 북쪽으로는 말레이시아가 삼키려 들면 30분이면 되고 남쪽으로는 인도네이시아가 삼키려면 1시간이면 족하다 라고 표현 할 정도로 아주 작고 자원적으로 아주 취약한 나라임이 분명하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1965년에 독립하였고 그 후 4세기 만에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세계 경쟁력 1위 국가, 세계에서 가장 사업하기 좋은 국가 또한 부패가 없는 나라로 받들여 지고 있다. 반면에 싱가포르보다 모든 면에서 충분한 성장 잠재성이 있었던 말레시이아나 인도네이시아는 아직까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때문에 동남아국가들 중 외적으로만 강대하게 나타나는 크지만 작은 나라고 전락하고 말았다.우리가 배워왔듯이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다민족 국가로서 단일민족국가인 우리로서는 언어, 문화, 종교와 역사가 서로 다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이시아, 베트남 같은 나라들이 하나의 국민의식을 가꾸어 나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를 감히 짐작하기가 힘들다. 특히 140여년 동안의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쳐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하여 건국된 다인종 이민사회 싱가포르공화국에 인종간 결속 은 한 국가의 정치, 사회, 문화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될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은 누구 나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나는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싱가포르에서 거주하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이 수업을 통해서 내가 모르고 있던 다른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공부하게 되면서 싱가포르에 대해서 조금 더 친숙한 위치에서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성공한 다민족 국가 사례로서 접근해 보고 싶어서 다민족국가로 형성된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제쳐놓고 싱가포르를 선택하게 되었다.싱가포르의 성공적인 복합민족사회 이룩 과정을 보기 위해 먼저 싱가포르의 독립직후 인종과 민족관계를 살펴 볼 것이며 그 다음 다민족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쓰여진 정부 정책을 중점적으로 분석해보고 그에 대한 결과를 마지막으로 알아 볼 것이다.Ⅱ. 본 론1. 싱가포르의 역사와 독립직전·후 상황싱가포르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래플즈경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대항하기 위한 기지로서 1819년 조호르의 술탄으로부터 사들인 뒤, 영국 식민지로서 자유·중계 무역항이 되었으며, 말레이 반도를 비롯하여 인근 여러 나라와 유럽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그 당시 싱가포르 섬에는 인구가 아주 적어서 경우 150여명만이 살고 있었으며, 그 중 120명가량은 말레이인이었고 나머지는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921년에는 영국군의 기지가 설치되었으며, 군사·경제적으로 영국 식민지배의 핵심적 존재로 변화하였다. 그 후 싱가포르 식민당국은 싱가포르항 개발사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보유하기 위해서 문호를 개방하여 노동이민을 받아들였는데 주로 중국 남부로부터 대규모의 이민자들이 유입되었고 또한 중국인들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동기 에서 인도의 남부로부터 타밀인들을 상당 규모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식민당국 입장에서 중국인들은 노동력 차원에서 우월한 것으로 인정되어 특별히 선호되었고 그들의 근면, 검약 및 자신들의 치안을 스스로 유지하는 능력등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인도인 특히 타밀인들과 말레이인인들은 식민당국의 관점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나타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방대한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이미 1921년에 중국인과 인도인을 합친 인구가 말레이인보다 약간 더 많게 되었다는 점이다.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에 점령당하여 쇼난섬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일본군정의 통치 아래 중국인들은 반일운동을 펼쳤으나 말레이인들은 일본측의 정치적 선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돌아갔으나 중국인 중심의 반식민지운동이 활발해졌고 싱가포르 전역으로 반식민지 투쟁이 확대되자 영국은 1959년 싱가포르를 자치령으로 만들었으며, 그 해 6월에 공포된 헌법에 따라 실시된 입법회의 선거에서는 중국계 유권자, 특히 청년·노동자층을 기반으로 하는 인민행동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인민행동당의 리콴유가 수상이 되면서부터 사회주의적 정책을 탈피하고 영국기지의 존속, 평화적 방법에 의한 사회변혁을 달성, 노사협조 등과 같은 온건한 정책을 택하였으며, 경제정책으로는 공업화의 촉진에 중점을 두었다.이에 대하여 급진파들은 1961년 리콴유 수상에게 반기를 들고 '사회주의 전선'을 결성하였다. 인민행동당 정부는 그 후 '말레이시아 구상'을 지지하여 1963년 9월 사바및 사라와크와 함께 주정부로서 말레이시아연방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연방의 결성에 따라 싱가포르의 중계무역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와 사이에 대립이 일어나 싱가포르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주정부와 말레이시아 정부 사이에도 견해차를 빚었으며, 이와 함께 인종적 대립도 가세하여 1965년 9월에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 같은 해 9월 영국연방 가맹국으로서 독립하게 되었다.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대부분의 말레이인들이 생활력이 왕성한 중국인에게 경제적 실권을 빼앗기고 사사건건 그들의 아래 위치에 어 있는데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고 그 결과 독립하기 바로 전년 1964년 7월과 9월에 중국인과 말레이인들 사이에 민족공동체적 폭동이 일어났다.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하지만 65년 독립이후에도 싱가포르 정부는 말레이인들의 감정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되었다. 이는 싱가포르가 지역특성상 말레이인들로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립당시 자칫 잘못하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이사의 개입을 피할 수가 없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콴유 수상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독립 후 해결할 첫 번째 과제를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모든 인종에게 싱가포르인 이라는 국민의식을 형성하는데 두었다.2. 다민족 국가 형성을 위한 노력다른 수많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 다민족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나라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에서는 민족간 갈등이 아직까지 현저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인도네이시아 경우 아직까지도 지방 내분으로 많은 사상자들을 내고 있다. 1999년 2-3월 발생한 서칼리만탄의 북부 도시 삼바스(Sambas)의 종족 분쟁은 원주민 말레이족(Malay)과 다야크족(Dayak) 집단이 마두라섬에서 이주해오는 마두르족(Madurese)을 위협세력으로 경계하면서 시작된 분쟁이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민족문제 에 대해서 만큼은 다른 나라들과 뚜렷이 대조된다. 싱가포르 정부는 독립후 싱가포르인 으로서의 국민의식을 형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다인종주의 라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 즉 정부가 모든 인종을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싱가포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인종의 이질적 성격은 덜 강조하는 반면에 싱가포르인 이라는 단일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책을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1965년 독립이후 언어·교육정책에 중점을 두고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 에게 제나름대로의 민족어 이 외에 각 민족간 매개어로 영어를 마스터하라고 요구한 두언어정책 (bilingualism) 과 인종, 종교, 문화에 상관없이 각 민족에게 교육의 기회균등 을 보장하였다. 정부는 다수파 중국인의 언어인 중국어를 국어로 고집하지 않고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기도 한 영어를 공용어로 그리고 국어로서는 역사적 경위 와 소수파인 말레이인의 상징적인 우대와 나아가서는 아웃나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이시아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신중한 배려에서 말레이어를 선택하였다. 결과적으로 영어는 복합민족사회를 만드는데 적절한 중립의 수단으로 쓰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인종의 혼합을 이루기 위해서 싱가포르 정부는 새로운 주택단지에 건설된 공공주택의 배분 정책을 펼쳤다. 정부 기관인 HDB에 비슷한 사회경제적 수준을 갖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민권, 가족규모 그리고 청약순서에 따라 주택을 배분하였고 각 단지 내 입주자들의 민족별 구성 역시 4개 민족 집단 즉 중국계, 인도계, 말레이계 그리고 기타인종이 각기 차지하는 비율이 거의 같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입주자들의 사회, 문화적 거리를 좁히는데 정부는 많은 노력을 하였다.싱가포르 정부는 싱가포르인 이라는 주체성을 모든 인종이 갖게 하기 위해서 특히 중국인과 비교했을 때 경제적인 수준도 낮고 교육 수준도 낮으며 싱가포르 땅의 옛 주인 이라고 생각하며 가장 불만을 많이 가지고 있는 소수민족에 속하는 말레이인의 생활수준 향상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는 싱가포르에서 태어나거나 양친이 싱가포르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말레이인에 한하여 초등교육부터 대학까지의 고등교육까지 무상으로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법률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인 학생의 학력은 급속도로 향상하지 못했고 취직면에서도 중국인. 인도계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정치참여에 있어서도 이 들 두 인종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떨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1977년 이후 근대화에 적응하려는 말레이인의 의도가 착실히 다져졌고 변화를 보이기 시작해서 지금은 독립직후 보다 정치적 동화가 상당할 정도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