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1. 서론(1)탑파의 의의(2) 석탑의 발생2. 본론(1) 한국의 석탑 발생기(2) 삼국시대의 시원양식(始源樣式)(3) 통일신라시대의 석탑3. 결론1. 서론우리나라 고대 미술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 미술이다. 그리고 오늘날 남아 있는 고대의 유적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 역시 불교적인 조형 미술품이다.이와 같은 불교 미술 가운데서도 양과 질, 양면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탑파 와 불상 이 불상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탑파와 불상이 불교의 예배 대상으로서 불교 신도들의 신앙과 정성이 모두 이 두 곳에 결집되었던 때문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사원을 건립하는 목적이 탑파와 불상을 봉안하고 예배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탑파는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기 때문이며 불상은 직접 예배를 올리는 대상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탑파와 불살이 가장 뛰어난 불교 미술로서 한국의 고대 미술을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현재까지 조사된 전국의 탑파는 천 수백 기를 헤아릴 수 있는데 이 천 기가 넘는 탑은 만들어진 재료에 따라 목조탑파, 전조탑파(벽돌로 쌓은 탑), 모전석탑(모전석으로 쌓은 탑), 석조탑파, 청동탑, 금동탑 등으로 구별된다.(1)탑파의 의의탑파는 탑 이라고도 하고 스투파 라고도 쓰는데 이를 의역하여 방분(方墳) 또는 고현처(高顯處)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탑이라고 하며 스투파는 고대 인도어인 범어의 'stupa'의 소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탑파는 파리어(Pali)의 th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스투파의 원래 의미는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을 쌓아 올린 불신골(佛身骨:진신사리)을 봉인하는 묘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시 말해 탑파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건조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그런데 탑파 또는 불탑이 석가모니 곧 불타(佛陀)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이라고 말하는 데 대하여 승려의 사리를 모신 탑도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치탑 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4대 탑문(塔門)과 주위 난간의 조각들이 아름답고 또한 가장 오래 된 불탑으로도 널리 아려져 있는 세계 제1의 탑파이다.이와 같이 불탑을 세우는 양식은 원래 인도에서 비롯되어 8기의 탑을 쌓았었는데 최초의 탑은 반구형을 이루어 마치 분묘와 같은 모양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탑은 본래 원분형을 이루고 있는데 차차 후대에 이르러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면 상륜도 그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 돌난간을 둘러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놓았음을 볼 수 있다.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정이 다르다. 우리의 불교 수용은 중국을 거쳐 4세기 후반에 비롯된 것이고 탑파의 건립 또한 그러한 경로였기 때문에 인도, 중국과 다른 독특한 탑파의 양식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다음의 내용에서 살펴보고자 한다.(2) 석탑의 발생앞에서도 말했듯이 불탑은 그 재료에 의하여 목탑, 전탑, 모전석탑, 청동탑, 금동탑, 석탑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우선 목탑을 살펴보면 그 재료가 목재이므로 불에 타기 쉬워서, 사실상 여러 차례의 병화(兵火)로 모두 타버리고 고대에 만들어졌던 목탑의 실물은 없다. 그러나 신라시대 목탑이 있었던 흔적으로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지와 사천왕사 목탑지, 망덕사 목탑지 등이 남아 있다. 백제시대의 목탑 유적으로는 부여 군수리 사지의 목탑지와 금강사 목탑지를 볼 수 있으며, 고구려의 것으로는 평양 청암리 사지의 목탑지와 평안남도 대동군 상오리 사지의 목탑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조선시대 후기인 17세기 초반의 건축물인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 팔상전은 옛 목탑의 양식을 오늘에까지 전해 주고 있는 유일한 목탑의 유구이다. 이 밖에 전라남도 화순군 쌍봉사의 대웅전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3층 불전이 있었으나 1984년에 소실되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그 자리에 다시 3층 불전을 건립하여 옛 모습을 보임으로써 목탑의 자취를 알 고찰은 곧 한국 미술사 연구의 지름길인 바, 이러한 견지에서 많은 선학들의 조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앞에서도 말했듯이 한국에는 품질이 우수한 화강암이 많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적인 유적 유물 가운데 석조 미술품이 다른 어느 것보다 그 수효가 단연 으뜸이다. 물론 석조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수성암이나 납석, 점판암, 대리석 등으로 이루어진 석조 미술품도 상당수가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훨씬 많으며 실제로 조사된 수를 보아도 거의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유적 유물들이다.이러한 현상은 곧 화강암이 다른 암석보다 풍부하였고 특히 암질이 채석과 치석을 하기에 손쉬워 여러 가지 조각과 건조물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조나 지물, 토제, 금속제 등의 여러 조형물이 재난을 당할 때마다 모두 불에 타버리고 파괴되어 때로는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와는 달리 석조물은 내구성이 있고 화재에도 잘 견디기 때문에 다른 어느 유물보다도 많은 수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예부터 많은 조형물이 석재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도 손쉽게 다량으로 채취되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었으며 4새기 후반에 이르러 불교가 들어온 이후부터는 불교 미술품 전반에 걸쳐서 화강암이 그 조성 재료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불교의 융성은 곧 장엄미를 갖춘 여러 가지 조형물의 조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때 다량으로 필요했던 화강암 등의 석재가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충당되었고, 이러한 연유로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탑이 건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2. 본론(1) 한국의 석탑 발생기한국의 석탑 발생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불교를 받아들인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의 약 200년간은 목탑의 건립 시기로서 이같은 목탑의 경영과 그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케 한 것이라 보겠다. 석탑의 건립에 앞서 목탑이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기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 목탑 양식의 조 탑파를 만드는 석탑의 시원(始源)을 이룩하게 되었다. 한국 석탑의 연원은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2) 삼국시대의 시원양식(始源樣式)한국 석탑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미륵사지 석탑과 충청남도 부여읍 정림사지 석탑뿐이다. 초기 석탑인 이 2기의 각부를 살펴봄으로써 석탑의 발생 과정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선 이 두 탑에서 건조 재료가 화강암이고 가구 수법이 매우 견고한 점에 주목하게 된다.우선 미륵사지 석탑을 살펴보면 현재 절터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이 원위치이다. 이 석탑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보고 석탑의 시원을 여기에 두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이 석조물이지만 보는 순간 그 양식이 목탑과 비슷함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탑은 이전에 선행되었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서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석탑 발생의 선두에 두게 되는 것이다.각부의 구조를 살펴보면 기단부는 목탑에서와 같이 낮고도 작은 편이다. 탑신부는 초층 탑신의 각 면이 3칸씩인데 중앙의 1칸에는 사방에 문호를 마련하여 내부로 통하게 하였으며 그 내부의 교차되는 중심에 거대한 방형 석주가 있다. 이것이 곧 찰주(擦柱)인데 이러한 석주가 지탱하고 있는 것도 목탑과 같은 형식이라 하겠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 를 표시한 장방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가설하였으며 두공(枓供) 양식을 모방한 3단의 받침이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는데 이것 또한 목조 건물 가구의 수법을 본받고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초층보다는 훨씬 얕아졌으나 각 층 높이의 차이는 심하지 않으며 가구 수법이 간략화 되었다.옥개석은 얇고 넓은데 네 귀퉁이의 전각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을 보이며 2층 이상의 옥개석은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었을 뿐, 두공 양식의 3단 옥개 받침이나 전각의 반전 등 각부는 초층의 구성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다.이와 같이 백제에서 건조된 2기의 석탑은 똑같이 석재를 사용하여 목탑을 모방함으로써 발생하였으므로 이 두 탑을 목탑계 석탑이라 할 수 있겠다.그러나 당시 신라에서의 석탑 발생 사정은 백제와는 다르다. 신라의 석탑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탑(塼塔)의 모방에서 출발하였다고 보겠다. 그러나 그 받침의 형식 등이 전탑의 양식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은 아니고 전체에 하나의 양식 발생사적인 계열이 있다는 것이다.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 된 것은 경주의 분황사 석탑이다. 이탑은 전탑 양식에 속하는 것 같으나 이탑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는 전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석탑은 선덕여왕 3년 634년에 낙성된 것이며 백제의 무왕대와 같은 때이다. 신라 석탑의 출발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분황사 석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板石) 괴임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탑재는 백제 석탑과는 달리 흑갈색의 안산암이다. 이탑은 안산암을 소형의 장방형 벽돌 모양으로 절단하여 쌓아 올려 전탑형을 이루었으니 백제 석탑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석재에 대한 집착을 볼 수 있으니 초층 4면에 감식(龕室)이 설치되어 있고, 그 좌우에 인왕 입상(仁王立像)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부에서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주된 재료가 이와 다르고 또 그 양식도 백제 석탑과는 달라서 거의 때를 같이하는 7세기 초반에 양구에서 발생한 석탑의 차별상을 알 수 있겠다.다음으로 분황사 석탑과 관려된 탑으로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동에 있는 5층석탑을 들 수 있다. 의성 탑리 5층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석재로 전탑 양식을 모방한 것임을 곧 알 수 있다. 이 석탑은 넓고 큰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는데 탑신을 받기 위한 1매의 판석과 옥개의 상하 받침이 5단인 점은 곧 분황사 석탑과 통하는 점이며 기단이 광대한 것도 상통하는 점이라 하겠다.그런데 의성 탑리 5층석탑은 .
목 차Ⅰ. 시작하면서... p3Ⅱ. 고구려의 기원과 발전과정................p31. 고구려의 건국.........p32. 고구려의 건국초기.....p41) 부족연맹체의 형성2) 고구려의 저항3) 계루부의 대두4) 고대국가의 성립과 지배체제의 강화3. 고구려의 전성기.......p64. 고구려의 멸망.........p8Ⅲ. 맺음말..........p9..........p11Ⅰ. 시작하면서이제는 다소 잠잠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 나라가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 문제로 떠들썩하였다. 우리가 당연히 하였던 우리 민족사의 뿌리를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의 분노는 당연하다고 본다. 이러한 고구려사에 대한 논란 덕분에 그동안 잊고 지내던 우리의 북방 고대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수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중국 땅에서 한때 방치되다시피 했던 고구려 유적들이 새롭게 관심과 보호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상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 같은 관심이 결국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중국의 입장은 한국이 고구려사를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측이 수많은 역사의 기록을 무시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해온 연장선상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동북공정이야말로, 현재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과거 역사 연구가 뒤틀리고 있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이런 역사 왜곡의 시대에서,「비문」에서 보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과 자신들이 북부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즉, 자신들이 남만주 지역에서 오래 전에 정착해서 발전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주민이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의 주도세력도 역시 부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부여가 고구려보다 북쪽이라는 것을 볼 때 고구려의 주민 구성은 북방에서 말을 타던 무리들이 내려와 압록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살던 사람들과 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부여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출신지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가 당시 동방사회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던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것에서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주몽)을 북부여 천제(天帝)의 아들로 알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한편 고구려가 건국되던 때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부여가 상대적인 강국으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이끌만한 강력한 국가는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나라도 무제가 죽은 후에는 외부의 확대정책을 포기하고 있던 터라, 만주 일대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이와 같은 동방사회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빠르게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의 군소 국가들을 통합하였다. 졸본부여를 시작으로 행인국 북옥저 등을 통합했고 3대 대무신왕 시기엔 벌써 동방지역 최강의 국가로 자리잡게 된다. 이처럼 고구려는 부여의 혈통을 계승하고 고조선을 세웠던 역사적 경험을 이어 받아 강력한 국가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단군신화의 흔적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단군신화의 내용과 밀접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고조선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2. 고구려의 건국초기1) 부족연맹체의 형성어떤 강력한 조직과 결속력을 지닌 국가라기보다는 각 지역의 부족집단들을 영도하는 완만한 연맹체로써 더 이상의 수준으로 통합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漢)나라의 동방침략으로 인하여 그 지배하에 귀속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서기 전 107년에 현도것이다. 계루집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한 고구려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아래 귀속되어갔다.4) 고대국가의 성립과 지배체제의 강화대체로 1세기 후반 태조 때에 이르러 고구려족 전체를 통괄하는 강력한 집권력을 지닌 고대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고구려왕들의 성은 해씨(解氏)라 하였는데, 태조왕 이후는 고씨(高氏)라 스스로 칭하였으며,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점차 약화되어갔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의 변화가 시도되었고 대외전쟁을 통한 정복과 약탈 및 공납의 징수 등이 가져다주는 부의 증가는 공동체적 성격의 약화를 더욱 촉진하였다.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사회 분화가 확대되면서 나부체제는 해체되어 갔고, 중앙집권력이 강화되었다. 5부의 지배자들은 중앙귀족으로 바뀌게 되었고, 부민(部民)들은 국가의 공민(公民)으로 편제되었다. 이러한 체제 변동은 뒤에 소수림왕대의 율령반포로 제도적인 정비를 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력을 기른 고구려는 중국이 5호16국시대의 혼란기로 접어들자 본격적인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313년(미천왕 14)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중국 군현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비옥한 농경지대인 이 지역의 확보는 고구려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어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선비족의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전연(前燕)과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두차례의 전연의 침입을 받아, 342년(고국원왕 12)에는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요동 진출이 용이하지 않자 고구려는 남쪽으로 정복활동의 방향을 돌렸으나, 새롭게 성장하는 백제와 대결하면서 371년에는 백제의 침공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대 타격을 입었다.미천왕 이후의 대외 팽창이 서와 남에서 좌절되고 오히려 커다란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고구려는 국가체제의 정비와 새로운 지배질서의 구축을 위한 일련의 개혁을 추구하였다.3. 고구려의 전성기고구려는 4세기 말 소도 남부의 한강 상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그리하여 밖으로 중국의 전진과 평화적 외교 관계를 맺고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안으로 국립대학인 태학을 세우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때의 불교 수용은 고대 왕국의 사상적 통일에 기여하였고, 태학의 성립은 유학의 보급과 문화 향상에 영향을 끼쳤으며, 율령 반포는 국가 통치 체제의 정비를 가져왔다. 소수림왕 때의 이러한 문물제도 정비는 고구려가 고대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다음에 오는 대외팽창의 바탕이 되었다.그는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여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던 요동 진출을 이룩하였다. 이어 동북으로 숙신을 복속시켜 요하 동쪽의 만주 땅을 차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을 차지하였다. 또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의 침입한 왜구를 무찔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요동을 비롯한 만주 지방의 주인공이 되었고, 남쪽으로는 그 판도가 강원도 남부의 한강 상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5세기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이란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면서 고구려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영토를 확대하여 대제국의 기틀을 쌓았다. 그는 동서남북의 전방위공략 정책을 취하여 북만주일대와 연해주지역, 요동 반도 그리고 남으로는 한강 이남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그리고 해양활동을 활발히 하여 동해 및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에까지 세력을 뻗쳤다.그리하여 광개토대왕은 지정학적인 위치를 활용하여 전통적인 육지위주의 질서를 기본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적 질서를 수용하면서 복합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동서남북의 전방위 동시 군사공략정책을 구사하여 東아시아 각국을 연결함으로써 자국중심의 거대한 망(網)을 구성하는 정책을 취했다.장수왕 때 세워진 광개토 대왕릉비는 그의 영토 확장 과정을 자세히 나타내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그의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하였다. 이것은 그의 정복 사업에 따른 국토 개척을 기념하는 명칭이다.광개토대왕의 위업을계를 조정하였다. 고구려는 평양천도로 대동강 유역의 풍요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 고조선의 문화유산을 차지하게 되어 정치·경제·문화면에 비약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황해를 통해 중국의 남북조와 교통하고 백제·신라 방면으로 진출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하였다.고구려의 이와 같은 남하 정책에 대비하여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중국의 북위에 도움을 청했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장수왕은 3만 명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으로 함락하고 개로왕을 붙잡아 죽였다. 이로 인해 백제는 남쪽의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서울을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구려 영토는 남으로 더욱 확대되어 중부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충북 중원군에서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는 이 때의 고구려 세력이 중부 이남 지방에까지 미쳤음을 보여 준다.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자명왕도 신라와 백제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늦추지 않고, 만주 경영도 전개하여, 부여의 남은 세력을 완전히 병합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외척 세력간에 분쟁이 그치지 않아 왕권이 약화되고, 동시에 정치 상황은 불안해졌다.4. 고구려의 멸망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장기간에 걸쳐 귀족세력 사이에 치열한 정쟁이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장왕과 안원왕이 피살되고 많은 귀족들이 숙청되었으며, 일부 세력이 외국으로 이탈해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어느 한 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일정한 타협 아래 귀족연립체제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주서》 고구려전이나 《한원》의 에 최고 관직인 대대로(大對盧)가 3년마다 선임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귀족들이 각기 병사를 동원하여 싸우며, 왕이 이를 통제하지 못한다 는 기록에서 잘 엿볼 수 있다.수의 뒤를 이은 당은 처음에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꾀하여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포로를 교환하기도 하.
목 차1. 단군신화(1) 신화 속의 단군 ........pp 3~51 에 나타난 단군2 에 나타난 단군3 와 에 나타난 단군신화의 비교(2) 단군신화의 해석 ..............p5(3) 단군의 어원 ............pp 6~7(4) 단군신화에 대한 인식의 변천 ......pp 7~82. 고조선(1) 고조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pp 8~9(2) 고조선의 시대와 위치 ..............pp10~12(3) 풀어야 할 과제들 ...pp12~13참고문헌 ..........p14단군신화와 고조선사1. 단군신화(1) 신화 속의 단군신화는 우주 만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신화에서 어떻게'는 신이나 문화 영웅들의 활동이다. 따라서 신화는 우주 만물의 기원을 신이나 문화 영웅들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신화는 비현실적 존재인 신이나 문화 영웅을 통해 우주 만물의 유래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황당무계한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사의 초기 단계에서는 신화가 우주 만물을 이해하는 지식의 원천으로 기능했다. 이렇듯 신화가 살아 움직이며 신화적 사고가 지배하는 단계에서는 국가나 정치권력의 출현도 신화의 형식을 빌려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국가나 고대국가 단계에서 그 동안 단군은 강의 신 딸과 혼인하여 부루를 낳기도 했다.2 에 나타난 단군환인이라는 하늘신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온다. 환웅은 자신의 손녀에게 약을 먹여 인간으로 변신하게 한 다음 박달나무의 신과 혼인하게 했고, 여기서 단군이 태어난다.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했고, 재위 1038년에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된다.그렇다고 할 때 의 앞부분, 즉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부분은 와 다르지 않다. 또,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는 것도 같다. 그러나 지상에서 전개되는 부분은 상당히 다르다. 우선 에서는 곰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곰이 인간으로 변신하는 부분도 없다. 대신 환웅의 손녀가 등장하여 단군의 어머니가 된다. 또, 박달나무의 신이 단군의 아버지가 되면서, 환웅은 단군의 외증조할아버지가 되어 버린다. 그 결과 단군과 하늘신의 관계가 변한다. 하늘의 신은 아버지를 통해 연결되는 부계친이 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연결되는 모계친이라는 것이다.3 와 에 나타난 단군신화의 비교를 지은 일연(一然)은 우리 역사가 중국과 거의 대등한 시기에 하늘님(환인)의 신성한 혈통을 이어받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에서부터 시작하며 고조선의 혈통이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삼국 이전의 역사를 단군조선에서부터 체계를 세운 일연의 역사 인식은 고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언급이 없었던 김부식(金副軾)의 보다 한 단계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그렇다면 일연은 왜 단군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부각시켰을까? 당시 고려는 몽고 침입의 장기화로 인하여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토대를 모색하게 하였고, 여기서 단군이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결국 일연은 단군을 통해 민족사의 유구한 전통과 문화의 우위성을 내세워 외세의 압력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했던 것이다.가 저술된 것과 비슷한 시기인 충렬왕 13년(1287)에 이승휴(李承休)가 저술한 에는 의 것과 약간 차이가 있는 단군신화가 수록되어 있다. 에 소개된 단군신화는 전체적인 큰 흐름에 있어서 의 것과다. 그럴 때 고조선 왕은 천손(天孫)으로서 신이한 능력을 지닌 존재가 된다. 즉, 단군신화는 고조선 왕실의 신성한 내력을 밝힌 일종의 본풀이 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단군신화는 신왕의 즉위식과 일년 중 일정한 날에 그 시기 나름의 제의나 연희를 통해 재현되었을 것이다. 그 제의에 각지의 족장들이 참석하였을 것이다. 당시 고조선은 왕의 휘하에 속해 일정한 통제를 받지만 자치력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집단의 장들이 고조선 왕이 집전하는 제사 의례에 참여한다는 것은 왕의 권위에 귀속함을 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수도에서 제의가 행해질 때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상호 교류와 물자 교환 등도 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나라와 왕실의 신성함을 내세우는 의례에 참여하는 것은 고조선 주민들의 정서적 일체감을 함양하는 데 큰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이렇게 볼 때 단군신화는 당시 사회에서 일종의 정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녔으며, 정치·사회적 통합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3) 단군의 어원단군의 어원에 대해 이를 호남 지역의 말에 무당을 가리키는 당굴 이나 몽고어에서 하늘(天)을 뜻하는 탱그리 와 연관시킬 수 있으며, 에서 전하는 한(韓)의 국읍에서 하늘신(天神)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주관하였던 천군(天君)과 그 성격을 함께하는 면이 있다고 한 견해가 일찍이 제기된 바 있다. 즉, 단군이 하늘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사장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물론 단군이 제사장적인 면만 지녔다는 것은 아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에 신시(神市) 를 열고 인간 사회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였다는 것은 정치적 권력자로서의 면모를 지녔음을 말한다. 이에서 전하는 신시의 시(市)는 후대의 도시나 시장의 의미가 아니다. 상고시기에 제정이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는 제의가 행해지던 신성한 곳이며, 그와 함께 시는 처형이나 사면의 장소이고, 재화의 재분배 장소로 정무의식은 20세기 초에 제기되어 널리 일반화되었다. 이에는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가 민족의 이름 앞에서 대등한 자격으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의식이 담겨 있다. 이제 단군은 근대적 민족의 상징으로 새롭게 재인식되었다.그런데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담은 새로운 단군 인식이 대두한 이후, 그것이 그 뒤 어떻게 전개되었고 또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까? 그것이 만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시민사회의 노리와 결합한 민주적 민족공동체 의식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개인을 사상(捨象)한 채 민족의 집단적인 운명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전체주의 논리와 결합한 국가지상주의로 치달을지. 또는 사회주의와 결합한 제3의 형태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일단 형식 논리상으로는 모두 가능하다. 이는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단군에 대한 인식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에 근본적으로 달려 있다.오늘날 바람직한 단군에 대한 인식 방향은 곧 단군을 민주적 민족공동체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이며, 이럴 때 단군은 남북한 모두에게 여전히 살아 숨쉬는 민족의 소중한 유산으로 다시 한 번 거듭나게 될 것이다.2. 고조선(1) 고조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고조선은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따라서 한국사에서 국가의 기원과 형성 문제 뿐만 아니라 한국사의 첫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고조선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 고조선은 부여, 동옥저, 삼한을 비롯하여 이후의 삼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의 국가 형성과 정치적 성장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고조선사는 우리 민족사에서 초기 국가의 모습과 사회상을 복원하고, 이후 시기인 고대사회의 발전 과정을 복원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일반적으로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말 그대로 고대조선 의 역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개 단군왕검이 세운 단군조선과 이후의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이라는 세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친 것으로 이해한다. 즉, 기원전 108년 한군(漢軍)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존재하였던 조선 국가와 그 앞 시기에 국가를 형성하는 과의 기록을 통해 고대중국인들이 이미 기원전 4세기(전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조선의 활동과 그 위치에 관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전국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에 나타나 있다. 권29 [연책(燕策)]1에는 소진(蘇秦)이 연나라 문후(文侯, 기원전 361~333)에게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다. 라고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기록이 [소진열전]에도 실려 있다.이 기록은 연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연나라의 국세나 대외 관계 등을 논할 때 주의해야 할 세력 집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늦어도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의 실체가 북중국 지역 사람들에게 뚜렷이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조선의 세력에 대해 에서는 좀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에는 고조선이 연 소왕(昭王, 기원전311~270)대 이전 시기에 연과 각축하는 존재였음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의 칭왕(稱王) 시기에 대해서는 역왕(易王) 대로 보거나 기원전323~318년 사이라고 보고 있다.고조선은 기원전 320년을 전후해서 왕을 칭한 것으로 보인다. 연의 역왕이 왕 을 칭하면서 연나라 동방의 주요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던 고조선도 왕을 칭하고 연과 세력을 다투게 된다. 이상과 같이 과 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조선은 분명 기원전 4세기 이전에 존재하였고,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하여 그 세력이 매우 성장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2) 고조선의 시대와 위치고조선의 시·공간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역사 자료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와 에 묘사되어 있는 고조선은, 통치 집단을 기준으로 할 때 위만조선과 그 이전의 고조선으로, 역사적 사건에 드러나 있는 단계성을 기준으로 할 때 조선후(朝鮮侯) 대의 고조선, 준왕(準王) 대의 고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뉜다. 이
{{목 차서 론1. 박람회의 소개 및 개최목적2. 서울 세계 관광 음식 박람회의 역사3. 컨벤션 구성요소본 론1. 행사개요2. 행사 프로그램3. 회의장 구성4. 등록데스크 배치5. 부속실 현황6. 참관객 입장에서의 선택속성(중요도와 실행도 차이)7. 제공 entertainment8. 제시된 문제점과 해결방안결 론REFERENCE2004 서울 세계 관광 음식 박람회서론1.박람회의 소개 및 개최목적행사명칭: 2004 서울세계관광음식박람회/Seoul International Tourism & Food Expo 2004 (SIFE2004)행사기간: 2004년 5월 26일 (수) ~ 30일(일) 5일간장 소: 삼성동 코엑스 인도양홀행사내용: 세계음식 전시 및 판매, 국제요리 경연대회, 문화행사, 미국감자메뉴경연대회 등주 최: (사)한국 조리사회 중앙회, (사)한국전통음식관광협회,주 관: (사)한국전통음식관광협회, 조리기증장려협회, (주)성원엔터테인먼트후 원: 문화관광부, 보건복지부, 노동부, 해양수산부, 서울특별시, 한국관광공 사, Food & Restaurant, 파이낸셜 뉴스행사 목적: 우리 음식의 국내외 홍보를 통한 세계화 추진새로운 관광상품 개발과 홍보를 통한 세계화 추진세계음식 전시 및 경연을 통한 우리 음식의 수준향상과 발전도모국제적 이벤트 개최를 통한 국내 음식문화산업 활성화 도모주요일정 : 전시품 반입 및 전시장치공사 ---2004.5.24(월) ~ 5.25(화) 2일간박람회 개막 ---2004.5.26(수)박람회 폐막 ---2004.5.30(일)전시품 반출 및 전시장철거 ---2004.5.31(월)저녁참가대상업체 : 일반 식품업체, 식품 가공기기/식품포장기기업체,참가신청 및 문의 :2004 서울세계관광음식박람회 추진기획단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27-1번지일성빌딩 4층TEL : (02)720-1815 FAX : (02)720-1852E-mail : sife @sife.co.kr2.서울 세계 관광 음식 박람회의 역사.2002년도2000년, 2001년에 이일본, 중국 등 당초 10여개국이 참가의사를 밝혔으나 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사스)의 여파로 인해 불참을 통보, 한국, 독일, 인도네시아 3개국만이 참가해 아쉬움을 더했다.2003년부터 조리사들을 위한 쉐프라운지와 한국음식의 세계화를 위해 전통요리전시경연부문이 신설되었다.30여만명이 다녀간 이번 박람회는 조리현장에 몸담고 있는 조리인들은 물론, 조리학도, 일반인,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식문화를 시각, 미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기 간:2003년 5월 14일~18일장 소:서울 삼성동 코엑스 인도양홀경연부문국가대표 3개팀, 일반단체 13개팀, 학생단체 18개팀, 일반개인 174명, 학생개인 182명, 조각 30명, 전통요리전시경연 82명경연결과대상 : 독일(국가대표), JW메리어트호텔(일반단체), 중앙요리전문학원(학생단체)특별상: (주)63CITY(호주청정우상), (주)강원랜드(청정원상), 혜전대학(샘표상), 한국관광대학(현대지네트상)3. 컨벤션 구성요소1. 컨벤션 개최주체(사)한국조리사회중앙회, (사)한국전통음식관광협회, 푸드채널2. 컨벤션 운영주체(사)한국전통음식관광협회, 조리기증장려협회, 주)성원엔터테인먼트3. 컨벤션 개최장소 및 시설삼성동 코엑스 인도양홀4. 컨벤션 개최를 위한 다양한 서비스 제공자이벤트 및 행사진행업체- 성원엔터테인먼트후원기관 : 문화관광부, 보건복지부, 노동부, 해양수산부, 서울특별시,한국관광공사, Food & Restaurant, 파이낸셜뉴스5. 전시 참가업체(주)놀부, (주)네슬레, (주)하림등의 음식관련 기업(주)포유 프랜차이즈, 농협, CJ 주식회사등의 기업대경산업등의 주방용품 업체안동시청의 전통음식 홍보6. 컨벤션 참가자음식관련산업 종사자, 요리대회 참가자, 전통음식연구 전문가,관련학과 대학생들, 일반 대중들본론1.행사개요우리 음식의 국내외 홍보를 통한 세계화 추진새로운 관광상품 개발과 홍보를 통한 세계화 추진세계음식 전시 및 경연을 통한 우리 음식의 수준향상과 발전도모국제적 이벤트 개최를 통한 국내 음식문시음(13:00~17:000)음청류시연및 시음창면만들기(13:00~17:00)떡시연및시음(인절미떡메치기)(13:00~17:00)전통주시연 및 시음(막걸리시음)(13:00~17:00)15:00~16:00전통혼례시연칵테일쇼(14:00~14:40)레크레이션(20분)궁중음식시연(조다소반과,야다소반과)칵테일쇼(14:00~14:40)레크레이션(20분)메이트리아카펠라공연(14:00~14:40)레크레이션(20분)궁중음식시연(조다소반과,야다소반과)Funny Band(14:00~14:40)레크레이션(14:40~15:00)16:00~17:00조리인의날 행사17:00~18:00시상식(30일은 폐막식)3. 회의장 구성코엑스 컨벤션 센터 인도양홀{`규모 : 2,427평 (8,010m2)용도 : 종합전시회, 전문전시회, 대규모 집회각종 이벤트행사 등 2개실 분할 사 용 가능부속회의실 : 148평(1), 3개실 분할 가능전시회와 관련한 회의공간, 전시회와 관련한 Dining 및 연회공간Swing Space :218평전시화물 유통 경로 : 기존 전시장과 연결하여 사용할 경우 전시공간 또는 관람객 이동 통로로 사용이 가능Pantry 4개소 : 15평형 2개소, 22평형 2개소3층 Loading Dock의 Mall Kitchen과 연결하여 Catering Service 제공스넥코너 : 2개소(각 16평, 전시회 개최시 스넥코너로 사 용가능)주최자 사무실 : 2개소(각 32평, 2층에 위치) 바닥은 컬러 하드너 마감Trench 및 Trench Box : Gas, 급배수, Air, 전원,통신 배 선 공급AV Jack Box 조명 및 AV Control Room운영 기둥간격 : 18m, 27m행사장 Lay out -코엑스 인도양홀4. 등록데스크 배치 코엑스 인도양홀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등록 카드 작성대는 입구 좌측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행사장내 각종 홍보자료들로 데스크 위가 어지럽혀져 있었고 작성을 위한 필기도구 조차 구비되어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이 행사의 마지막 날임을 고려요원의 진행능력3.06142.40150.6611지역주민과 매스컴의높은 관심3.02152.68130.349.변수의 설정은 팀원들 간의 의견교환에 의해 이루어짐.설문 참여인원이 소수(100명)이기 때문에 이 자료의 타당성이 높지 않음M1=행사 프로그램의 적절성, M2=유용한 정보의 습득, M3=입장료의 적절성, M4=행사장 내 이벤트M5=불평에 대한 처리능력, M6=행사장으로의 접근성, M7=행사장내의 청결성, M8=행사장 편의시설, M9=행사장 규모, M10=참가업체 물품 판매 가격, M11=행사 관련정보 제공 및 안내센터 운영, M12=쇼핑, 식당, 엔터테인먼트 시설 접근성, M13=안전성, M14=행사진행 요원의 진행능력, M15=지역주민과 매스컴의 높은 관심2) [중요도-실행도] 매트릭스{실행도(고)중요도(저)과잉노력 지양(Possible overkill)2사분면좋은 성과 지속 유지(Keep up the good work)1사분면중요도(고)낮은 중요도(Low priority)3사분면노력 집중화의 지향(Concentrate Here)4사분면실행도(저)3) [중요도-실행도] 분석 결과{분석결과에서 나타나듯이 1사분면에 분포한 행사 프로그램의 적절성, 행사장 내 이벤트, 행사장으로의 접근성, 행사장 편의시설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반면, 4사분면에 위치한 유용한 정보의 습득, 입장료의 적절성, 불평에 대한 처리능력, 행사장내의 청결성 면에서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전체적으로 속성들의 위치를 분석해 보면 하드웨어적인 부분(개최시설면)에서는 참관객들에게 만족을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운영면)에서 참관객들의 불만족이 예상된다.7. 제공 Entertainment경연대회각 나라를 대표하는 세계 최고의 조리사들이 벌이는 국가대표팀 경연을 비롯해, 국내 수준급 조리사들의 단체, 개인, 학생들이 요리의 자웅을 겨루는 장으로써, 단순 음식의 차원을 넘어선 요리 작품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 제공부대행사요리경연 및 이틀에 걸 맞는 전시회였는가에 관한 문제올해 박람회가 우리 전통요리를 세계에 알리는 행사이고 내년 박람회 때는 전통요리가 세계로 뻗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행사였던 것으로 보여진다.관람객의 입장으로 세계박람회라기보다 내국인들의 장터와도 같은 분위기의 재연으로 끝난 박람회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독일대회라든가 싱가폴 대회처럼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서울세계음식박람회가 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나은 환경구성과 모든 사람의 관심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컨셉(궁중 한식 : 모두 비슷)에 비슷한 작품들이나 예년보다 훨씬 줄어든 대회참가자들, 무엇인가 눈을 끌만한 새로운 것이 없는 전시회였다는 문제이다.. 해외 관람객 유치를 위한 체계적인 홍보와 외국인 경연자 초청2 관람료에 관한 문제작년 행사와 내용적인 면에서 크게 달라진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장료가 성인 5000원이었던 작년에 비해 이번 박람회의 성인 8000원이라는 큰 폭의 관람료 인상은 관람객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볼거리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가격 대비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3 행사 로고 사용권, 홍보용 부스 제공, 매체광고(TV, 라디오/일간지 등), 인터넷 광고, 홍보물(배너, 포스터, 리플렛, 입장권 등)에 회사상호 노출, 행사장 내 홍보 영상물 상영, 박람회를 이용한 프로모션 방향 제시 등의 benefit이 관람객에게 어느 정도로 인식되어졌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관람객에 대한 사후 관리(만족도 조사)를 통해 참가업체가 박람회 참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홍보효과나 이익에 대한 정확한 근거 제시4 요리 경연대회 참가의 제한경연대회 참가규정에는 18세미만은 참가제한이 되어 있었으나 학사가 인정되면 출전 가능하다는 제시되지 않았던 규정으로 차별적인 참가가 있었다. 참가규정에 제시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여 볼 때 명확한 규정을 제시하지 않은 운영주최측의 잘못이라 보여진다.. 일관적인 참가규정 제시5 요리경연대회 심사위원의 평가 기준도 투명성다.
Italian FoodCourse MenuANTIPASTI차가운 전채요리Prosciutto e Melone(이태리 파르마 햄을 곁들인 달콤한 멜론)Italian raw ham complemented with honey melonZuppe (스 프MINESTRONE(이태리식 야채 스-프)Vegetables, beans, bacon and parmesan cheeseANTIPASTI(따뜻한 전채요리ANTIPASTO DI LUMACHE(아몬드 마늘 버터와 그라탕한 달팽이 요리 )Sauteed snails with mushrooms, brandy, garlic and cream, served with puff pastryINSALATE (샐러드INSALATA DI CESARE(로메인 상추와 시저 드레싱 샐러드)Romain lettuce and crips croutons tossed with traditional caesar dressingENTREEPESCI (생 선Grigliata de pesce(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와 레몬을 곁들인 가리비, 생선, 해물, 바닷가재 모듬 그릴)Grilled seafood served with lemon and extra virgin olive oilDolCI 후 식Tiramisu(마스카르포네 치즈로 만든 이태리 정통 커피 무스 케익)Traditional mascarpone cheese mousse cakeCoffee 커 피Espresso Maronccino(뜨거운 우유와 초콜릿을 곁들인 에스프레소)Espresso with hershey's syrup, hot steam milk & chocolate powerⅠ. Aperitif (식전의 추천와인)Martini - Italian VermouthⅡ. Table wine (식사중의 추천와인)Chablis Maligny 원산지 - France 와인등급 - AOC 와인타입 - whitevintage - 1999 포도품종 - Chardonnay 100%Ⅲ. After DInner Drinks (식후의 추천와인)Marsala Fine 원산지 - Italy 와인등급 - DOC 와인타입 - dessertvintage - 2002 포도품종 - Catarratto, Grillo, Inzolia저는 위의 코스 메뉴를 전체적으로 이태리 음식으로 구성해보았습니다. 특히 앙뜨레는 이탈리안 요리의 특징인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가 사용된 해산물 모듬요리를 코스에 넣었습니다. 우선, 전채 요리와 함께 피에몬테 지역의 이탈리안 버무스로 입안을 향기롭게 한 후 앙뜨레에 와서는 샤블리와 함께 음식을 즐기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샤블리는 샤르도네가 주품종으로 프랑스 버건디 지역에서 생산되고 그 맛은 드라이합니다. 그래서 샤블리는 신선한 해산물과 같이 먹을 때 해산물의 깊고 독특한 향을 잘 느끼게 해주고 약간의 신맛은 해산물과 산뜻한 조화를 이루게 해줍니다.식후 와인으로 추천한 마르살라 피네는 DOC급 마르살라 4종의 와인 중 가장 짧게 숙성시킨 주정강화와인으로 3종류(까따랄로, 그릴로, 인죠리아)의 포도로 화이트 와인을 만든 후 6%의 보강용 와인을 첨가한 다음 당분이 아주 높은 포도주스를 첨가하여 만든 와인입니다. 식후에 마시는 디저트 와인으로써 알코올은 17%정도로 약간 높은 편이며 당분 함량도 다소 높아 식후 입안을 달콤하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와인으로 생각됩니다. 마르살라는 아라비아어로 ‘신의 항구’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것은 영국의 한 회사가 이 지역의 와인을 영국으로 수송해가서 큰 호평을 받으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부드러운 치즈의 향이 독특한 티라미슈 케익과 함께 이 와인의 달콤함을 즐기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