讖緯와 漢代의 정치- 목 차 -Ⅰ. 머리말Ⅱ. 참위의 제작Ⅲ. 참위의 내용Ⅳ. 후한 시대 참위의 세력 Ⅴ. 참위에 대한 비판Ⅵ. 끝맺음Ⅰ. 머리말참위설(讖緯說)은 전한 말기인 7 B.C.-5 A.D. 경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학설이며, 특히 후한에서 크게 유행했다. 참위설의 연원은 미래예언서로 알려진 하도낙서(河圖洛書)이며 참위설을 담고 있는 텍스트는 수나라 때 실전되어 현재로서는 그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후대의 학자들이 여러 책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문장들을 취합, 정리하여 엮은 것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참과 위는 본래 별개의 것으로서 참(讖)은 그 뜻이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는 말이나 징표를 거짓으로 꾸며내 길흉을 예언하는 것을 뜻한다. 위서)(緯書)는 각각의 경서 속에 숨겨진 진리를 설명해 주는 책으로 미래를 예언한다. 참과 위는 모두 신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 후한(後漢)시대에 이를 일괄하여 ‘참위’라는 명칭이 생겼다. 즉 참위설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바탕을 두고 일식?월식 등의 천지이변이나 은어(隱語)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설이다.그렇다면, 참위설이 漢에서 발생하여 유행한 까닭은 무엇이며 漢代의 정치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참위의 제작과 그 내용, 후한 시대 참위의 세력과 비판에 관해 살펴봄으로써 그 해답을 구해보려 한다.Ⅱ. 참위의 제작고대 사람들은 예언을 좋아하여 하늘의 상제가 인간에게 전수한 예언을 참이라 불렀다. 꿈을 꾸고 나서 만든 진(秦) 목공(穆公)의 진참(秦讖), 진(晋) 조간자(趙簡子)의 진참(晋讖), 이외에도 진시황(秦始皇)대 노생의 도서(圖書)와, 벽옥(璧玉)등을 들 수 있다. 참을 상제가 내렸다고 하지만, 상제는 분명히 말하지 않고 유사한 것으로 암시하며 사람들에게 해석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시황제 때의 인조 참언)이 초한대의 상황에 실현 된 것으로 보아 참이 상제가 내린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전한(前漢) 시대에는 사회가 안정되어, 인심을 자극하는 참언은 감소하였다. 그었다. 이러한 풍조는 왕망의 시대에 다시 성하게 되었다. 맹통이 우물을 파자 한개의 백석이 나타났는데, 표면에 ‘告安漢公爲皇帝’[안망공왕망에게, 황제가 되라고 이르노라]의 빨강색 8글자가 있었기 때문에 왕망은 섭황제(攝皇帝)가 되었고 이후 한고조의 선양을 받았다.왕망대의 참 기록 중 애장의 「금궤도」와 ·「금책서」가 특히 중요한데, 도서(圖書)에는 애장을 포함한 11인의 관작이 정해져 있었다. 또한 왕망은 용모가 점술가에 가장 흡사한 인물들을 등용하기도 하여 사람들은 다투어 부명(符命)을 만들었다. 때로 부명을 헌사한 사람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는데, 천명을 어지럽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왕망은 진황제(秦皇帝)가 되자 자기선전을 위해 부명 42편을 천하에 반포시키고,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하려 했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왕망의 토덕(土德)의 흥기와 부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에게 내렸는지에 대한 고사가 서술되어 있다.왕망이 멸망하자 공손술(公孫述)이라는 사람은 자립하여 천자가 되고서 왕망의 5덕체계)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금덕(金德)이라 지칭하였으며, 광무제(光武帝)는 참서속에 타인이 천자라는 증거가 확실함을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공손술과 광무제의 기록중에 주목만할 것이 몇 가지 있다. 그들이 천자가 되는 근거는 모두 참서에 있었고, 참서에 대해 각각의 해석방법이 있었으며, 자신의 멸망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인용한 참서 몇 가지를 이전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단편적인 참은 일찍부터 있었지만, 위의 형식을 갖추고 서적의 체재로 발표된 것은 왕망의 집권시대부터이며, 한대경학가인 유향 ? 유흠 부자의「7략」에 씌여 있지 않음을 볼 때, 참위가 황제로부터 공자에 이르는 성인들이 만든 것이 아님이 자명하다.Ⅲ. 참위의 내용참위서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전한 200년간의 술수 사상을 총정리하여 체계화 하는 것이며 둘째는 왕망등이 제창한 신고사(新古史)의 학설에 증거를 제시하여 더욱 더 발전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학문과 신화를 모두 것 이외에 천문, 역법, 신령, 지리, 역사적 사건, 문자, 전장제도를 설명하는 것 등이 있었다. 그러나 참위는 음양오행의 체계에 맞춰서 서술되었으므로 도식은 한 가지 뿐이었다.한고조가 평민의 신분으로 천하를 얻은 것에 더하여, 문제 ? 경제 이후의 5덕설을 중심으로 한 논쟁과 무제의 봉선(封禪) ? 개력(改曆)사업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황제가 천명을 받는 천명을 받는 이유와 그 수속, 이후의 역할 등을 중요시하였다. 이것은 제왕의 수명에 대한 군중의 신앙과 공상을 증진시켜, 중국의 상고사의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요.순 임금이 특히 중시되었으며 후대의 왕도 참에 의해 즉위하였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참위 속에서 공자는 중심인물이며 과장의 정도가 극심한 편이다. 그 이유는 역시 음양오행설에 따라, 목덕(木德)을 지니는 주나라는 수덕(水德)의 공자)를 낳을 수 없으므로 공자가 천자가 될 수 없어 대신 한을 위해 많은 경전을 제정했다는 것이다.왕망 등이 고문화(古文化) 전체를 새로이 정리하지 않고, 정리할 때에 의도적인 변화를 많이 가하지 않았다면, 여러 고사(古史)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고사의 문제는 실은 중고사의 문제이며, 한대의 사회상황에 대한 인식이 상고사를 해석 할 수 있는 중요한 여지가 된다.Ⅳ. 후한 시대 참위의 세력광무제는 참위를 매우 열심히 읽어 기절한 적이 많을 정도로 참위에 대한 신봉이 대단히 강하였다. 인재 등용에 있어 왕망과 차이점이 없을 정도였다. 광무제는 A.D.56 2월 신묘辛卯의 이른 아침에 태산 기슭에서 하늘에 요제(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냄)를 행하고, 2월 갑오甲午에는 양음에서 땅에 선제禪祭를 지냈다. 진시황?한무제의 봉선封禪에는 원래 천지음양의 구별이 없었는데 이 이후 태산에서의 봉은 하늘을 태산기슭에서의 선은 땅을 제사하였다. 이것은 왕망의 제도를 답습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11월에 광무제는 천하에 도참을 선포했다. 당시 도참은 이미 학령學令상의 필독서였다.명제明帝는 부친의 사업을 잘 이었으므로 《하명칭을 고치게 한다. 또한 가규가 《좌전》에서 화덕설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내었다고 하여 그가 지은 《해고解?》의 사본을 보관하고, 장제章帝역시 가규의 설을 좋아하여 《좌전》의 지위는 확립되었다.후한시대 인물의 묘비명을 읽으면 대개 “널리 5경에 능통하고 아울러 도참에 밝았다.”라고 한 문구가 있다. 후한시대 참위의 세력은 엄청나, 정치, 사회 일반 등 모든 것에 영향을 주었다.Ⅴ. 참위에 대한 비판한대를 통틀어 참위설을 비판한 학자는 환담(桓譚), 정흥(鄭興), 장형(張衡), 윤민(尹敏) 등 네 사람에 불과하다. 특히 환담(桓譚: 24-56, 훈고경학파)은 참위설을 신봉하는 광무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참에 기록된 사항 가운데 나중에 일어난 일과 일치하는 것도 없지 않지만, 그것은 점을 쳐서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조금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경서의 가르침과 어긋나기 때문에 마땅히 배척해야 합니다.' 그러나 광무제는 환담의 말을 듣지 않았다.또한 광무제가 영대(靈臺)를 지으려 하면서 그 자리를 참으로 결정하려 했다. 그리고 환담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영대는 임금이 앉아 낮에는 경치를 바라보고 밤에는 달과 별을 즐기기 위한 높은 망대를 뜻하는데, 천문 관측소나 하늘에 제사지내는 장소로도 사용된다. 환담은 '신은 참에 대해 모릅니다'라고 답했고, 이에 크게 노한 광무제는 환담을 사형시키려 했다. 광무제의 미움을 산 환담은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임지로 향하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한편 윤민(尹敏)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윤민은 광무제로부터 참 관련 문헌을 교정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참은 성인의 글이 아니라는 이유로 명을 거부하려 했다. 이에 광무제는 다시 한 번 강력하게 명했다. 결국 황제의 명을 따르게 된 윤민은 참 관련 문헌에 '군(君)이라는 글자에서 입(口)이 없는 사람이 한나라를 보필하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을 적어 놓았다. 이를 본 광무제가 군이라는 글자에서 구가 빠지면 윤(尹)이 되니, 윤민이 한나라의 재상이 된다는 뜻헛된 참을 만들어 황제를 미혹시키는 무리들이 있음을 우회적으로 경고한 것이다.문학가이자 과학자였던 장형은 도참이 허망하기 그지없으며 결코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참위가 기껏해야 전한 말기에 생겨난 것임을 지적하고 도참을 소장하는 것 자체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제는 도참이 국전(國典)이므로 장형의 말에 따르지 않았지만, 그러한 논의는 크게 옳다고 생각하였다.참위라는 것은 수시로 증가. 개변될 수 있었고 황제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증거가 될 수 있었으므로, 통치계급은 극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장형의 금지주장은 남북조 시대에 몇 번 시행되고 수양제가 즉위하면서 참위에 대해 철저히 탄압하여 겨우 금지에 성공했다. 현재 「역위(易緯)」의 8가지가 완전한 이외에 다른 참위류는 극히 단편적으로 다른 책 속에 남아 있을 뿐이며, 명.청 시대인의 힘겨운 집록(輯綠)으로 겨우 대체적인 윤곽이 남아있게 되었다.Ⅵ. 끝맺음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참위설은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하였고, 집권세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되었다. 즉 참위설은 유가 사상과 관련없이 출현한 미신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신비주의를 유가가 채용하여 이것으로 유가사상의 체계를 상고주의와 모순되지 않게 재구성 한 것이다. 따라서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한대에 성행하여 한대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참위를 비판하였던 인물들이 한 시대 사상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진단한 것처럼, 살펴본 참위의 내용은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고사에 대한 해석과, 한대 전반의 시대 상황과 분위기를 알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겠다.【참고문헌】고힐강(이부오역), 《중국고대의 방사와 유생》, 온누리, 1991.양계초 외,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신지서원, 1993.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1), 지식산업사, 1989.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중국 고대의 이해》, 지식산업사, 1998.곽말약,
「동양 고대사 교육」초기 권력자의 출현 배경- 목 차 -Ⅰ. 머리말Ⅱ. 초기 권력자의 출현 배경ⅰ. 무격巫覡 문화와 정치ⅱ. 권력 독점의 수단Ⅲ. 맺음말Ⅰ. 머리말인류 초기의 지배자는 청동기 시대의 사유재산제 확립을 토대로 출현하였다. 청동기 시대에 농업 기술과 농기구가 발달하여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였고, 그에 따른 계급 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자연 재해에 대비하여 농경 생활의 안정성을 추구하였으며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혀간 것으로 보인다. 전설 속의 삼황오제는 그 연원이 불분명하고, 하 왕조는 실증적인 유물이 없어 그 객관성을 판단하기 어렵다. 비교적 기원이 분명하면서 그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국가는 상왕조 이후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주로 상, 주나라에 관련된 사료와 유물에 근거하여 초기 권력자의 출현 배경과 그 실상에 관해 밝히고자 한다.Ⅱ. 초기 권력자의 출현배경ⅰ. 무격巫覡 문화와 정치앞선 언급과 같이, 농경생활에 있어 절대적인 것은 자연이라는 변화무쌍한 존재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즉 자연현상을 미리 예측하여 인간이 입게 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 때 하늘(신)과 땅(인간)을 이어주는 무당(제사장)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제사장은 하늘의 계시를 전달하는 인간이었으므로 신성시 되었고, 치수?관개 산업을 담당함으로써 백성들을 이끌었다. 하나라의 건국설화에서 ‘우’의 아버지 ‘곤’이 홍수를 다스리지 못해서 왕이 될 수 없었다는 표현이나, 상나라의 12대 왕인 ‘성탕’이 주나라를 정복한 이유가 군주 ‘갈’이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또한 성탕이 보낸 제물을 탕진한 것에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제사장의 역할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여기에서 한 가지 살펴 두어야 할 점은 과거의 무당은 현재의 그들과 다른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귀신을 혼돈스럽게 보지 않고 지혜와 자문을 구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귀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무당은 신령하고 신실한 존재였던 것이다.《묵자?경주》에 실려있는 『귀 핵심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늘이 모든 인간사를 다스리니 이 같은 하늘의 지식을 취득할 수 있어야만 정치권위를 얻어낼 수 있게 된다.) 고대 중국에서는 모두가 무당의 도움을 얻어서 하늘과 통할 수 있었다. 절천지통(絶天地通)에 관한 신화에서 알 수 있듯, 천지간의 교통이 끊긴 뒤부터는 하늘과 통할 수 있는 수단을 장악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치적인 지식, 즉 권력을 잡을 수 있으므로 당시에 무당은 모든 정치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절천지통의 신화 : 《국어?초어》에 기록되어 있음.「옛날에는 사람과 귀신의 일이 어지럽게 혼동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 가운데 정명하고 변함이 없어 언제나 나같이 공경스럽고 마음이 바르며, 그 지혜는 위아래의 마땅한 도리를 알고 그 통달됨은 멀리가지 밝게 깨달을 수 있으며, 그 명석함은 두루 빚을 비출 수가 있고, 그 총명함이 들어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이에게 귀신이 강림하게 되는데 남자에게 임하면 격覡이라 했고 여자에게 임하면 무巫라 하였습니다.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귀신들이 제위祭位와 서열을 정하게 하고, 희생물과 제기와 때에 맞는 의복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선성先聖의 후예 가운데 밝고 명석함이 있어 능히 산천의 이름?종묘의 으뜸되는 신주?종묘의 일?정중한 근무?마땅한 예절?용모의 갖춤?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성품?제사 때에 입는 복장 등의 일들을 잘 알고 정명한 귀신을 잘 섬기는 자를 뽑아 축祝으로 삼았습니다.......〈중략〉이렇게 하여 천지와 신민을 담당하는 벼슬과 사물의 선악을 분별하여 사용케 하는 일을 담당하는 벼슬 등이 있게 되었으며, 이것을 오관이라 하였는데 각각 그 맡은 바를 담당해서 서로 혼란스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능히 충성과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귀신은 능히 명덕을 갖게 되었으며, 사람과 귀신이 각각 자기의 직분을 달리하고 공격하여 무례하지 아니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귀신은 좋은 것을 복으로 내려주고 삶은 제물을 바치게 되니 재앙이 없고 쓸 것이 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제사를 드리고 집집마다 무사巫史를 두어 진실함이 없게 되었고, 급기야는 제사에 소홀하게 되어 그 복을 얻지 못하였으며 배향하는 것도 법을 잃어 사람과 귀신이 같은 자리를 갖게 되었고, 사람들이 무례히 귀신과 같이 되려고 하여 경외하는 마음이 없게 되었으며, 귀신은 사람들의 법을 익혀 그 행할 바를 순결하게 행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욱이 왕권을 받자 남쪽의 우두머리인 중에게 명하기를 하늘을 주관하여 귀신들로 하여금 각자의 위치에 거하도록 하였고, 북쪽의 우두머리인 려에게 명하기를 땅을 주관하여 사람들이 자기의 본분에 충실하도록 함으로써 서로 침범함이 없도록 하였으니 이를 일컬어 절지천통(땅 위에 있는 사람과 하늘의 신이 서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ⅱ. 권력 독점의 수단제사장(무당)의 임무가 막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고대 중국 사회에는 이라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사회 강제 조직이다. 동일한 부계종족의 구성원들은 모두 스스로를 동일한 남성 조상의 후예로 생각하고 있는데, 조상에 대한 제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예는 곧 법규와도 같았으며 제례를 잘 실행하고 있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왕은 영주들의 제사를 정기적으로 순시하였다. 만일 규칙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때에는 영주의 지위를 박탈하고 큰 처벌을 내렸다. 또한 적국敵國을 물리쳤을 때에는 그 종묘를 허물어뜨리고 제기를 빼앗아 완전히 부수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당시 사람들이 제사의식을 대단히 중시하였으며, 종묘와 제사가 곧 한 나라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제례를 주관하는 제사장이 권력자가 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청동 제기 역시 제사장이 초기의 권력자임을 뒷받침 하는 증거이다. 청동기는 농경 생활 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일반인들이 쓰기에는 너무 값비쌌다. 따라서 부를 지닌 권력자 계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는데 주로 제사를 지낼 때 이용되었다. 청동 예기의 문양을 살펴보면 상호 대칭성을 띈 동물의에 대한 해석이 실려 있다. 조상과 산 사람의 소통수단으로서 무술巫術에 의존하였고, 제기와 동물희생은 고대중국의 제례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무당을 도와 천지신인天地神人이 서로 교통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각종 동물들의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입을 벌리고 있는 동물의 대칭된 옆모습 사이에 사람이 그려져 있을 때도 있는데, 그것은 동물의 숨결을 빌어 인간(제사장, 무당)이 하늘에 승천함을 나타내는 것이다.상주시대 청동예기 가운데의 동물 문양은 무당이 천지를 왕래하는 데 있어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으므로, 이 같은 매개수단을 독점한다는 것은 바로 지식과 권력에 대한 독점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었다. )제사장의 지식에 대한 독점은 골복 의식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상왕조 때의 점복 행사는 오로지 임금의 의식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실시되었으므로 대개 궁전에서 거행되었고, 왕이 직접 감독 하였으며 무당을 포함한 모든 신하들이 참석하였다. 복사에 의하면 점을 쳐서 묻는 대상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조상이며, 골복 의식 후에 기록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의 인물과 왕이었다. 왕이 직접 골복 의식을 주관하며 스스로가 그 중개인이 되엇음을 볼 때, 제사장이 곧 왕(권력자)이었음을 알 수 있다.골복 의식은 권력자가 문자 체제를 독점하여 선대의 역사와 지혜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고대 중국의 문자 가운데 최소한 어느 일부분은 그 종족의 정치나 종교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족휘로부터 변천되어 왔을 가능성이 많다. 문자의 힘은 그것과 지식의 불가분의 관계에서 기인한다. 왜냐하면 지식은 이미 돌아가신 조상들로부터 오는 것이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문자라는 매개체를 빌어 조상과 교통할 수 있으며 더불어 그들의 지혜를 전수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를 앎으로써 미래를 예견하는 데 참고하는 자료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고대의 역사학가들에게 도덕적 권위가 모두 부여되었고, 어느 통치자들도 감히 이 권위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 권위는 바로 지고대 중국에 있어서 역사지식은 지식을 점유하고 있던 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지식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었으며, 역사학이라는 것은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지식을 점유하는 것과 지식을 다루는 문자를 점유하는 것은 똑같은 효용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고문헌을 장악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바로 고대의 통치술에서 예언의 능력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의 관건이 었다.그러므로 은상 시대와 주대 초기에 역사지식을 점유했던 계층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에 누가 문자를 장악하고 있었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더불어 이 같은 계층의 출현 역사 또한 곧 문자 탄생의 역사가 될 것이다. 우리들이 신빙성 있는 자료를 통해 문자 탄생 역사에 관한 어떠한 추측을 할 수 있지만 ,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유사 이전의 도기 부호와 동주시대의 문헌 사이에 표준할 만한 문자자료로는 은상과, 주대 초기의 갑골문과 상대와 서주시대의 금문정도이다. 이 같은 문자와 관계된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은상 시대의 갑골 복사는 당시 임금이 점을 칠 때에 썼던 것이므로 일상적인 기록이 아니며, 가끔 선조가 내려주는 답변도 포함하고 있다.점의 결과가 이미 세상을 떠난 선조의 지혜로부터 오는 것이고, 뒤에 참고하기 위해 그 점의 결과를 기록?정리해 놓은 것이라면, 복사는 후대의 문자기록과 같은 목적을 갖고 있으며 점치는 지식을 장악하던 이는 바로 최초의 지식계급에 속한 사람일 것이다. 최초의 사관은 또한 무당이었다.Ⅲ. 맺음말이상에서 고대 중국에 있어서 뛰어난 정치적 권위를 갖고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윤곽을 어느 정도 살펴보았다. 통치자들은 제사를 주관하고 농경 생활의 정착에 힘씀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들은 신화와도 연관이 있으며 신과 인간의 소통의 매개로 자리잡았다. 의식과 예술, 문자 등으로부터 얻을 었다.
- 5일장의 존속 이유 -역사교육전공 200201114 신나연어렸을 적에 할머니를 따라 다녔던 5일장(정기시장?재래시장)은 여러 가지 느낌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향긋한 과일 내음과 고소한 튀김 냄새, 비릿한 젓갈과 생선 냄새 무엇보다 5일장에 가면 먹을 수 있는 솜사탕과 설탕과자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상인과 손님의 크고 작은 실랑이와 콩나물 500원어치만 달라는 할머니 말씀에 넉넉히 검은 봉지 한 가득 담아 주던 아주머니의 미소도 떠오른다. 시장 옆 골목에선 퐁퐁도 타고, 딱 한번만 딱 한번만 더 타자고 하는 나를 보며 부러 흐뭇한 표정을 짓는 할머니 얼굴도, 그 외 5일장에선 새로 보는 것, 새로운 경험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장 보러 가는 날은 내게 있어서도 특별한 일이었다. 소꼬리를 처음 본 것도, 촘촘한 대나무로 된 참빗을 보면서 감탄한 것도 5일장에서의 일이었다. 그런 추억담을 나의 자녀, 그 자녀와 자녀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5일장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기에, 5일장이 존속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5일장은 한국 사회가 도시화되고 교통이 발달하며, 상품구매 대체시장이 확충되었고, 농업의 상업화와 농산물 유통기구가 변화하였으며, 근대적 대중문화 매체가 보급되고, 가축시장이 쇠퇴하는 등의 이유로 점점 소멸하거나, 폐지의 위기에 처해있다.5일장의 상인들은 한 곳에 자리를 잡고 계속적으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시장이 개설되는 곳으로 이동하여 도매상 등으로부터 조달한 생활필수품을 판매한다. 5일장에서는 전업상인이 아니더라도 농민 자신들이 직접 재배한 채소 등 농산물을 시장에 갖고 나와 소비자를 대상으로 판매활동을 벌이기도 하기 때문에 소비자는 정기시장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구입하게 된다.정기시장의 물건값이 슈퍼마켓이나 상가들에 비해 저렴한 이유는 시장에 많은 상인들이 일시에 모이게 되어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산물의 경우 생산자인 농민들이 소비자에게 직접 물품을 판매하여 중간거래 마진이 붙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기시장은 장터를 중심으로 고정건물이 없이 임시로 개설되는 시장이기 때문에 상가나 상설시장과 달리 건물임대료 등 고정투자비가 소요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우월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과거 사교와 정보 기능 교육 기능까지 두루 담당했던 5일장에 대한 소비자들의 문화적인 관습 역시 5일장을 존속하게 한다. ~은 어디의 5일장에 가서 ~에게 사야만 질이 좋아 안심이 되더라, ~엔 ~이 꼭 있을 것이다 라는 소비 심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때의 전제조건은 이용자가 많이 있는 곳에 정기시장이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5일장을 이용하는 소비자가 많아야만 시장 수요가 증대하여 정기시장도 발달 혹은 유지할 수 있다.또한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에 시장 경쟁력이 있는 주로 고위 중심지에 위치한 5일장은 존속할 뿐만 아니라 한 동안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다양한 품목과 싼 가격, 그리고 카니발적인 성격 정기 시장을 존속시키는 중요한 이유이다. 대구의 약령시장, 안동장과 함께 경상도 3대 5일장인 영천장은 요즘도 경북일대의 상인들이 모여드는 경상도 최대의 농산물 교역시장으로 옛날 못지않은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영천장이 성한 이유는 교통이 불편하던 때 동해안의 어류를 하루만에 군위 의성 안동 달성 경산방면으로 보내고 내륙의 농산물과 면직품, 약초 등을 동해안으로 가지고 가는 교통 요충지였기 때문이다.특정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가축시장이나 약재시장 등이 특화된 시장) 역시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한다. 5일장이 아직 남아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며, 그 결과이기도 하다.5일장이 근대화된 지역에서도 상설시장으로 쉽게 전환되지 않고 예전처럼 정기시장으로 존속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까지 5일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는 주된 이유와 일맥 상통한다. 인구가 밀집돼 있고 소득이 높아져서 상품에 대한 수요가 충분한 곳이면서, 각종 상설시장과 교통이 잘 발달돼 있는 곳 즉, 대도시 및 중소도시에도 오래된 정기시장이 아직도 개설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설의 현대화와 상설화를 추진하였음에도 정기적인 형태로 개시되고 있는 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이러한 현상은 정기시장이 사회문화적인 시간제도를 반영하여 성립되었기 때문에 근대화가 되어도 지속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에 부합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도시지역에 정기시장이 존속되는 것도 이를 이용하는 주민 특히, 농민들의 생활문화적인 시간적 관습과 그 관행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즉 어떤 사회 또는 지역이 정치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없이 안정을 유지하며 발전해 간다면, 정기시장의 변화 또는 발전과정은 농촌 인구수의 증감, 사회 경제적 근대화의 정도, 시장 관련 제도와 정책의 방향 등과는 함수관계로 나타나지만 이용자의 문화적인 관습은 정기시장을 그대로 유지.존속시키려고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서양 근대사 교육】영국 혁명【서양 근대사 교육】 역사교육 200201114 신나연Ⅰ. 서언Ⅱ. 본론1. 영국 혁명의 배 1) 정치적 배경2) 종교적 배경2. 영국 혁명의 과정1) 혁명의 1단계 : 의회 권력의 공세2) 혁명의 2단계 : 내전 끝에 의회 승리3) 혁명의 3단계 : 찰스 1세 처형, 공화정 수립3. 영국 혁명의 한계-지배 계급 내부 권력 투쟁의 한계 -4. 영국 혁명의 의의-영국 혁명이 ‘청교도 혁명’이라 불리는 이유-Ⅲ. 결어* 소감문으로 대체하며 *【서양 근대사 교육】역사교육 200201114 신나연Ⅰ. 서언영국 혁명( Die Englische Revolution, Puritan Revolution)은 1640~166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폭동’인지 ‘내전’인지 ‘혁명’으로 보아야 할 지, 어떤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을 영국 역사에서 어느 정도의 핵심적 사건으로 보아야 할 지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오늘날까지도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이 현대 유럽 역사에서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정치적 변혁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저물어 가는 한 시대를 매듭짓는 유럽 최후의 종교 전쟁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일부에서는 왕정의 패배와 뒤이은 국왕 처형으로 영국 역사의 전환점으로 이해하고 그때부터 영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1640년부터 1660년까지 있었던 사건들이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성을 별 의미 없이 일시적으로 단절시켰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Ⅱ. 본론1. 영국 혁명의 배경과 원인1) 정치적 배경영국 혁명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찰스 1세와 의회의 권력 다툼에서 기인한다.찰스(Charles) 1세가 제임스(James) 1세를 계승했을 때만 해도 영국에서는 혁명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순탄한 왕위 계승으로 정치적 안정성을 보였고, 30년 전쟁이 독일을 황폐화시킨 반면에 영국은 그 영향으로부터 비켜나 있었기 ‘국민서약’(National Covenant)을 통해 저항하였다. 스코틀랜드의 봉기에 굴욕 스런 군사적 항복을 한 찰스 1세는 의회를 다시 소집하여 재정적 지원과 배상금을 얻고자 하였다. 이것은 곧 의회와 스코틀랜드, 영국내부 모두를 자극하였다.폭력적 갈등을 불러 온 것은 아니라 해도, 결국 영국 혁명의 본질적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은 지배 계층과 왕권의 정치적 협력의 근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현실적 권력 기반을 과대 평가한 찰스 1세의 편협한 정치였다.2. 영국 혁명의 과정1) 혁명의 1단계 : 의회 권력의 공세위와 같은 배경으로 찰스 1세는 고립무원에 빠졌다. 영국 지도층은 국왕이 요청한 지원을 거부했고, 간신히 징집한 군인들은 스코틀랜드에 출정하기를 거부하며 카톨릭과 영국 국교에 대항하여 교회당을 황폐화시키기도 했다. 의회는 정치적으로 압력을 받는 국왕에게 새로운 요구 사항들을 관철시키려고 시도했다. 즉 그들은 국왕에 대한 예외 규정을 삭제하고 국왕의 재정 정책에 대한 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즉 국왕은 조세 승인권에 발목을 잡히게 된 것이었다. 또한 3년마다 의회를 소집하는 법이 발효되었으며 국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해산, 소집, 연기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이에 반해 의회가 거둔 성과들은 원래부터 의회가 지니고 있던 정치적 동질성과 일맥상통했다. 1640년 의회를 구성한 선거는 예외적으로 정치 원칙에 관한 토의의 시점에서 이루ㅇ졌다. 이 선거에서 국왕의 추종자들은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 결과 핌이 이끄는 비교적 소규모이지만 정치적으로 활발한 반대파 의원들은 하원에서 신뢰할 만하고 종종 만장일치에 육박하는 표결을 이끌어내는 다수파에 의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비관적 표결 상황에서는 런던에 있는 급진적 청교도 교회들의 연결망을 이용해 청원을 하거나 의회 정문 앞에 모여 결연한 시위를 하면서 상원이나 국왕에게 부수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등, 의회 밖으로부터 지원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다. 훗날 많은 혁명에서와 마찬가지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요구 사항들이 가장 신랄한 형태로 다시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미 그 이전에 찰스 1세는 정치적 타협을 체념한 듯한 행동으로 이에 대응했다. 찰스 1세의 이러한 행동은 치명적인 헌법 침해 행위였다. 이제 양측은 실제로 무력 대결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1642년 8월 22일 찰스 12세가 노팅엄에서 국왕의 깃발을 세워놓고 추종자들을 불러 모은 것을 계기로 내전이 일어났다.2) 혁명의 2단계 : 내전 끝에 의회 승리영국 혁명의 제2단계인 내전은 정치 상황이 1640년과 비교해 현저하게 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찰스 1세는 그 사이에 자신에 대한 의회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의회 반대파의 정치적 압력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지 않다고 여겼다. 애초 자신의 추종 세력이 전혀 없었던 하원에서조차도 반대파의 정치가 과격화되는 것에 동조하지 않는 의원들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대간의서는 겨우 11표 차이로 의결되었고, 결국 최초 552명의 하원 의원 가운데 236명이 내전을 치르는 동안 국왕의 편에 섰다.이때 점점 많은 의원들이 앞으로 찰스 1세와의 협력에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국왕이 경우에 따라 양보 의사를 보여줄 것 같아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의회 정치가 내포하는 혁명적 함의가 점차적으로 국왕을 전래 헌법의 보증인으로 보이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의원이 사회 질서를 보장하는 보루로서 영국 국교회가 철폐될 위험에 맞서야만 했다. 특히 런던 주민들을 비롯하여 상당수 국민들이 점점 정치화되어 가는 현상에 대해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대간의서를 출간하는 전례 없는 사례가 보여주듯이 급진적인 반대파는 공공연히 의회 바깥의 일반 대중과 동맹을 추구했던 반면, 많은 의원들은 그러한 움직임이 민중 지배의 무정부 상태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주의적 - 가톨릭적 혁명의 위협에 맞서 반대파가 의회 안에 형성되었듯이 이번에는 그 반대파 내부에서 전래의 군주제 질서가 파괴도리 위협에 맞서 왕당파가 형성되었다. 이 왕 권력이었다. 이제 의회가 추구하는 방식에 전래 헌법의 복구, 즉 혁명적으로 변화된 교회 헌법을 동반하는 제한된 군주제는 국왕의 협조 없이는 실현 불가능했다. 이러한 타협안을 수락할 수 없었던 찰수 1세는 이와 같은 상황을 이용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반대파 진영 내부에 1643년 이래로 점차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의회는 국왕에 대해 승리를 거둔 이후 두 개의 당파, 즉 전적으로 타협할 준비를 갖춘 다수파와 타협을 원치 않는 급진적 소수파로 또렷하게 갈라졌다. 다수파가 찰스 1세에게 제시한 유일한 요구 사항은 스코틀랜드의 모범에 따른 교회 의회 헌법의 도입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을 장로파라고 불렀다. 반면에 소수파는 의회 군주제의 틀 안에서 자유 교회 방식의 종교 헌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들을 독립파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러한 삼각구도 속에서 결단의 순간은 외부에서 주어졌다. 그 주제는 의회의 정치적 도구에서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발전한 제 4의 세력인 군대였다.이러한 현상은 전시법 아래에서 저질러진 범죄들에 대한 일괄 사면의 보장과 체불된 급료를 둘러싸고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온 갈등이 고조되다가, 1647년 정치적 지도층에 대한 군부의 단호한 저항으로 이어졌을 때 명백히 드러났다. 이미 내전이 진행 중인 동안에도 기병대 장군인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지휘하던 정에 부대가 스스로를 신성한 도구로 이해했던 것처럼. 이제 병사들도 자신들이 단순한 용병 집단이 아니라 영국 국민의 진정한 자유와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했음을 강조했다.임금 및 군대 해산 방식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된 사항들이 급속히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훗날 다른 혁명들에서 나타난 병사 평의회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각 부대는 자신의 대변인으로 이른바 ‘선전원’(agitators)을 선출했다. 이들은 군대의 지휘부를 상대하거나 그들과 맞서기도 했다. 병사들의 직접적 이익을 넘어서서 새로운 정치 질서에 관한 일반적 문제들과 관련된 요구 사항 목록들이 람베스에 있는 대주교의 저택을 불태워버리겠다고 위협했는가 하면 지방에서는 귀족들의 저택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제단들이 파괴되었다.3. 영국 혁명의 한계 - 지배 계급 내부 권력 투쟁의 한계또한 영국 혁명은 오랫동안 막스주의 역사가들이 강력히 대변해온 태제인 ‘초기 시민 혁명’ 이라는 의미의 사회 변혁도 아니었다. 경제적?사회적 신분 상승을 정치적으로도 실현하려는 의지를 지닌, 즉 계급 의식을 지닌 시민 계급이 17세기 영국에서 정치적 의미를 지닌 중요한 존재였다고 내세울 증거는 없다. 대립 관계에 있던 파벌들의 사회적 지위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내전은 계급 투쟁이 아니라 정치적 국민 또는 지배 계급 내부의 권력 투쟁이었으며, 이 지배 계급 중 지방의 지도층들이 명백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이 계급 내부를 두 부류로 나누려는 시도, 즉 지주나 상인처럼 이미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의 방법과 형식을 실행에 옮기고 있던 사람들과 특별히 오래된 귀족 가문처럼 여전히 전적으로 봉건적 생활 형태에 고착된 사람들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이를 통해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대립을 설명하려고 하는 한 실패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두 파벌 사이의 투쟁은 정치 권력의 소유와 조직을 둘러싼 투쟁이었던 만큼 그 결과는 정치 혁명이라는 구성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다.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군주제가 사회 공익이라는 차원에서도 논란의 여지없이 최상의 국가 형태로 인정받던 시대에 영국에서 일어난 국왕 처형과 공화제 도입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러한 영국 혁명의 결과로 인해 일반적으로 인정되어온 정치 질서의 원칙들이 의문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건들이 본래는 황망한 상황 속에서 취해진 해결책이었다는 점이다. 어떤 종류의 타협도 거부한 국왕과는 결국 지속적 평화를 도모할 수 없게 되어 국왕의 처형과 더불어 군주제의 철폐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승리자 측에서 보기에 적합한 후계자도 없었다.“우리는 그의 머리를 그 위의 왕관과 함다.
《조선왕조 실록을 통해 고찰해 본 수신전의 성격》Ⅰ.서 언{【한국 근세사 교육】역사교육200201114 신나연조선 시대의 토지제도는 토지와 민에 대한 국가의 관리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변하였다. 국초에는 고려 말의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하였고, 1465년 세조 11년에 직전법(職田法)으로 전환하였으며, 성종 때에 이르러서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필자는 조선 시대 토지 제도의 변천사에서, 과전법에서 직전제로 전환하게 된 사전의 부족을 야기시킨 수신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조선 왕조 실록의 사료를 중심으로 하여 1. 수신전의 지급 대상과 시기 및 전답의 양, 환수 시기 등 실질적인 운용을 이해하고, 2. 수신전의 성격을 알아보며, 3. 수신전과 과전이 소멸된 궁극적인 원인을 고찰하여 보도록 하겠다. 수신전을 토대로, 조선 시대 토지제도에 반영된 사회상과 가치관을 알아 보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을 둔다.Ⅱ. 본 론(조선왕조 실록으로 본 수신전)1391년(공양왕 3)에 제정된 과전법에 따르면 “무릇 수전자(受田者 : 토지를 지급받은 자)가 죽은 뒤 그 처가 자식을 가지고 수신(守信)하는 경우에는 망부의 수조지 모두를 전수하며, 자식 없이 수신하는 경우에는 절반만을 전수하고, 수신하지 않는 경우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였다. 다만, 제유역인(諸有役人)의 절수지(折受地 : 일정한 공유지를 떼어 지급받은 토지)는 그 대역자(代役者)가 이어받는다고도 규정했으므로, 실제로 수신전의 혜택을 받는 것은 중앙에 있는 관인에게 주어진 과전의 경우에 한하였다.전. 현직 관리에 대한 우대의 뜻으로 지급 된 과전은 원칙적으로 세습이 불가능하였다. 즉 전. 현직 관료가 죽으면 과전을 나라에 반납을 해야 했으나, 관료가 죽었을 때 아내에게 수절을 조건으로 하여, 자식이 있으면 남편 수조지의 전부를, 자식이 없으면 절반을 주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해서 그 아내마저 죽으면, 자식이 없을 때에는 나라에 수신전을 반납하고, 있을 때에수신하지 못하고 개가를 한 경우, 그녀 외조부의 전지를 세습 받으려 하여도 전계가 이미 끊겼기 때문에 불가하고, 그녀의 자녀들이 휼양 받는 것도 보류하며, 다만 20세 이상의 직사일 때 과전을 지급하라는 의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식이 관료가 아니라면, 개가한 여인의 경우 어떠한 명목으로도 과전을 지급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다음 사료에도 나오지만, 개가한 남편이 죽었을 경우엔 수신전이 지급되지 않는다.) 두 번째, 수신의 의미를 재고한 논의이다. 일부종사를 하여 수절을 지켰을 때에도,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경우(사료에는 아내가 소박맞은 걸로 나온다.) 홀로 된 아내의 경제적 기반이 불투명하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수신전이 지급되지 않는다. 다만 소박을 한 남편이 아내 조상의 전지를 가지는 것은 나라에서 회수한다.두 번째 사료에서는 선처, 후처, 자식들의 적자 서열과 관련하여 수신전이 지급되는 논의를 읽어 볼 수 있다.. 사헌부 대사헌 유관(柳觀) 등이 상소(上疏)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부부(夫婦)는 인륜(人倫)의 큰 벼리[大綱]입니다. 전조(前朝) 말엽에 예제(禮制)가 문란(紊亂)하고, 기강(紀綱)이 능이(陵夷)하여져 대소 인원(大小人員)이 경외(京外)에 두 처(妻)를 임으로 아울러 두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자신(自身)이 죽은 후에 두 처(妻)의 자식(子息)들이 서로 적자(嫡子)를 다투어서 드디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중략..빌건대, 선처(先妻)와 후처(後妻)의 은의(恩義)의 심천(深淺), {의 유무(有無), 동거(同居)의 여부(與否)를 분간(分揀)할 때 은의(恩義)는 서로 부부(夫婦)의 도(道)를 다하는 것이니, 선처(先妻)의 은의가 담박(淡薄)하고, 후처(後妻)는 종신(終身)토록 동거(同居)하여 부도(婦道)에 어그러짐이 없으면, 비록 후처라고 하더라도 작첩(爵牒)을 주고, 수신전(守信田)과 노비(奴婢)를 분급(分給)하고, 처첩(妻妾)의 자식이 적자(嫡子)를 다투는 경우에는 선후(先後)를 논하지 말고 조사하여 밝혀 결절(決絶사전(別賜田) 각품(各品) 과전(科田) 시사전(寺社田) 수신전(守信田)의 한 반을 경상도 전라도로 옮겨 절급(折給)하고, 장차 그 한 반을 {) 녹전 군자(祿轉軍資 ): 관리의 녹봉이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두 번 쌀과 보리를 걷던 제도로, 조운을 통하여 서울로 수송하였음{로 충당하소서. 그 중에 각인이 절급(折給)하여 받은 누대(累代)의 농사(農舍)와 경작하던 {은 기일을 정하여 방({)으로 고시(告示)하고 단자(單字)를 수납(收納)하여서, 경기 감사에게 {하여 사실을 조사하고 절급(折給)하되, 만약 망령되게 고(告)하는 자가 있으면 헌사(憲司)에 이문(移文)하여 죄를 논하소서. 임금이 성질이 본래 인애(仁愛)하여 사람이 무고(無辜)하게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매양 스스로 몹시 마음 아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배가 패몰(敗沒)하여 죽은 자가 많아서 2백여 인에 이르니,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태종 028 14/08/18(무오) / 의정부와 6조의 관리들을 불러 조세운반과 토지급여 방법에 관해 의논하다과전을 수급할 수조지가 줄어들자, 1414년(태종 14)에는 수신전의 축소 지급을 단행하였다. 아래 4번째 사료에 구체적인 언급이 나온다. 그 내용은 자식이 있는 관인의 처에게는 수신전으로서 3분의 2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군자전(軍資田)으로 돌렸으며, 자식이 없는 관인의 처에게는 3분의 1을 지급하고 그 나머지 토지는 상장(喪葬)이 끝난 뒤 타인에게 진고체수{) 진고체수(陳告遞受) : 관청에 보고를 한 뒤 뒤를 이어 이어받음.하게 하였다.. 호조에서 의정부 육조(六曹) 대간(臺諫)과 같이 의논한 양향(糧餉)을 비축(備蓄) 할 조건(條件)을 올렸다.1. 자식(子息)이 있는 처(妻)의 수신전(守信田)은 3분의 2를 지급하고 그 나머지 전지를 임시로 군자(軍資)에 붙이고, 그 자손이 나이가 장성하기를 기다려 과(科)에 의하여 절급(折給)하되 위의 항목(項目)의 예와 같이 하고, 부모(父母)가 함께 죽었을때 유약(幼弱)한 자손(子孫)에게 {{을 각각 5결(結)을 고 기한을 정하여 고하는 것을 허락하소서....중략....《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여 논죄(論罪)하여 그 전지를 고한 자에게 주고, 그 전지 받은 것을 마감하지 못한 자는 미두(米豆)를 추징하여 논상(論賞)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 028 08/05/27(신유) / 호조의 건의에 의해 수신전 휼양전의 은휘자에 대한 처리 방안을 세우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대전(大典)의 과전 체수조(科田遞受{)에, 조부모 부모 및 남편이 죽으면 그 과전(科田)은 아들 사위 손자 및 아내가 복제(服制)를 마친 뒤 이듬해 안에 호조에 고하고 호조에서는 전관 작첩(田關爵牒)을 상고하여, 만일 기한에 미쳐 관에 고하지 않고 조(租)를 거둔 자는 연수를 계산하여 추징(追徵)하고 그 밭은 속공(屬公){) 속공 : 나라에 속하는 것하며, 밭을 받고 아내가 없이 당자가 죽은 자 {을 받은 뒤에 타인에게 간 자 처부모가 대신 받은 뒤에 아내를 버린 자의 밭은 족친이 관에 고하여 속공하고, 숨기거나 빠뜨려서 고하지 않은 자는 저죄(抵罪)하는 법이 이미 서 있는데, 무식한 무리가 혹은 혐의를 두려워하고 혹은 수조(收租)하는 것을 달게 여기어 곧 관에 고하지 않으니, 청컨대 경중(京中)은 {정월 그믐날까지 한하여 끝까지 추문하여서 적(籍)을 만들어 본조(本曹)에 수송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 037 11/12/16(기축) / 호조에서 과전 체수에 관해 아뢰다여기에서 잠깐, 과전법이 직전법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면, 1434년 공해전公 田을 축소. 정리하여 과전을 보충하였으며, 1443년에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전세를 개혁하여 세율을 낮추고, 20년마다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양안을 작성하고, 호적을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곧 과전법의 폐단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1466년(세조 12)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실시하여 현직 관료에 한아여 최고 110결~10결까지 과전을 지급하였다. 재언하자면, 수신전이 이 때부터 소멸되었다고 할배가 유지되도록 운용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 이극기(李克基) 등이 상소(上疏)하기를,....중략....그 네째는, 과전(科田)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과전은 한 가지 일일뿐이나 두가지로 좋은 점을 겸하고 있으니, 대개 벼슬을 하는 자가 살아서 봉양(奉養)을 받으면 과전(科田)이 되고, 죽어서 그것이 처자(妻子)에게 미치면, {{이 됩니다. 이것은 남의 신하가 된 자로 하여금 충성을 권장하고 남의 자식이 된 자에게 효도를 권장하며, 남의 아내가 된 자에게 절개를 권장하는 것이니, 그 관계되는 것이 어찌 크지 아니하겠습니까? 비단 국가의 세록(世祿)으로써 선비를 기르는 후한 뜻일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교화(敎化)하고 풍속을 이루는 방도에 있어서도 또한 작은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국가에서 과전(科田)을 혁파(革罷)하여 직전(職田)으로 삼았는데, 이것도 또한 선비를 권장하는 좋은 법이기는 하나, 그러나 신 등이 생각하건대, 이것은 사람이 살았을 때는 특별히 후하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는 박(薄)한 것이요, 녹(祿)을 중(重)하게 하여 선비를 기르는 도리는 얻었다고 하나, 백성들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근본은 잃었다고 하겠습니다. 대저 선비 가운데 재산이 많은 자는 자신이 비록 죽더라도 그 처자(妻子)가 또한 어찌 갑자기 헐벗고 굶주리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마는, 만약 항산(恒産)이 없는 자라면 자신이 살아 있을 때도 또한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자신이 죽은 다음의 계책을 세우겠습니까? 이리하여 처자들은 돌아갈 데가 없어서 헐벗고 굶주리며 곤고(困苦)하게 되니, 최질(衰{)에서 벗어나지도 아니하여 이미 일반 백성과 더불어 나란히 생활하게 됩니다. 대저 어느 누가 옛날에 관대(冠帶)를 착용하였던 진신(縉紳)의 아내이고 자식인 줄 알겠습니까? 이리하여 과부는 능히 그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고아는 능히 그 효도를 다하지 못하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이 듣건대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할 때에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