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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김육의 생애, 사상, 업적, 평가 평가A좋아요
    김육(金堉 1580~1658)1. 인물의 생애 및 인적사항김육은 기묘8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우당(友堂) 김식(金湜)의 4대손 김흥우(金興宇)와 어머니 조씨의 큰아들로 1580년(선조 13) 7월 한성부 서부 마포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5세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면서 유달리 총명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런데 겨우 13세가 되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남으로써 김육의 소년기와 청년기는 결코 순탄치 못했다. 그는 전쟁이 오래 계속되면서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거의 10년 동안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 사이 15세 때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가 사망했고, 22세 때는 연안에서 어머니를 잃었으며, 함께 피난 생활을 하던 조모와 숙부도 모두 피난 중에 사망했다. 결국 김육은 아우와 두 누이를 데리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전란이 끝난 뒤에는 서울 고모 집에 몸을 의탁해야 했다.25세 때 윤씨와 혼례를 올리고, 혼인한 그 이듬해인 1605년(선조38)에 26세로 겨우 소과(小科)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 시절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했는데, 1610년(광해군 2년)인 31세 때 성균관 유생을 대표하는 소두(疏頭)가 되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현(五賢)을 문묘(文廟)에 향사(享祀 : 제사)할 것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렸다. 5현을 문묘에 향사하자는 상소는 선조 초부터 수십 년간 되풀이된 일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광해군 초에는 약간 사정이 달랐다. 북인이 집권하던 광해군 시절 북인들의 스승이었던 남명(南冥)조식(曺植)을 제외하고, 이언적과 이황을 배향하라는 것은 집권 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었다.그러나 태학생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해에 문묘에 5현을 배향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611년 당시 집권 세력인 대북파의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예전에 이황이 조식의 학문을 비판한 데 대한 반론을 펴면서 이언적과 이황의 학문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성균관의 학적부에 있어서는 가장 긴급한 해결을 필요로 하는 과제였으며, 또 그가 가평에서 10여 년 동안 생활하면서 체험한 민생고가 경제정책의 문란을 처리하기에 많은 고생을 하였던 까닭이었다.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자마자 곧바로 그는 대동법을 확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죽는 날까지 굽히지 않았다.1624년 9월에는 증광별시에 응시해 장원급제를 했고, 대과 급제를 계기로 그의 본격적인 관료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어 중앙 관서로 자리를 옮긴 뒤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세자 시강원 사서, 병조정랑, 성균관 직강,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홍문과 교리, 이조좌랑, 이조정랑을 지냈다. 늦게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그의 앞길은 매우 순탄해서, 이조와 병조의 요직과 삼사(三司)의 청직을 두루 거쳤다. 이와 같이 대과에 합격함으로써 정식으로 관료의 길을 밟기 시작하여 중요한 여러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그의 견식은 점차 풍부해지고, 따라서 그의 이상도 점차로 원숙해져 인조 말년(1649)부터는 적극적인 태도로 나타나게 되었다.특히 정묘(1627), 병자(1636)의 두 호란으로 조선의 국력은 더욱 지치고 쇠약해져 경제상태가 긴급하게 되자 그는 오로지 경제재건과 민생안정에만 온 정력을 기울였고, 이를 그의 정치활동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민생이 안정되고 재정이 넉넉해진 뒤에야 군비의 강화와 북진정책의 수행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효종의 북벌계획에 반기를 들었으며, 그의 진보적인 혁신정책을 저지하는 인물에게는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았다. 79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김육은 이와 같이 부국안민에 목적을 두어 경제기구 및 제도의 혁신에 그의 일생을 보냈으나, 간간이 관심을 기울여 수행한 문학활동과 저작활동의 업적도 또한 적지 않다.그의 저술로는 그의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 潛谷遺稿》(11권 10책)·《잠곡별고 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 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 潛谷續稿》가 전하고,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 天聖日錄》·《청풍세고 적절하지 못한 정부의 사회적 대처 등으로 인해 조선후기의 모순적이고 불안한 사회가 형성되게 된다.(2) 북벌론의 등장17세기 조선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 체제의 재편성 과정에서 청나라의 침략을 받게 된 이후 현실적인 상황을 도외시한 채 대의명분만을 앞세우다가 남한산성에서 패전하여,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야 말았다. 오랑캐로 멸시해 오던 여진족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그 속국이 됨으로써 이제 조선왕조의 명분과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병자호란 중 청태종(淸太宗)에 의해 볼모로 잡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瀋陽)으로 가서 포로로 잡혀온 많은 조선인들과 함께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문물에 접했고, 또 청나라와의 관계도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식견을 가지고 환국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뒤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한 이후 왕위는 동생 봉림대군에게 계승되었다. 새 임금 효종(봉림대군)은 반청척화파(反淸斥和派) 인물을 등용하여 북벌을 준비하였다. 먼저 남한산성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어청의 군사력을 정비하였고, 이완을 대장으로 하여 어영청군을 크게 늘렸다. 서울에 있는 어영청군은 종래 약 7천명의 3개월 근무 비상비군으로 구성되어있던 것을 이때 2만1천명으로 증가시키고 그것을 21패로 나누어 1천 명이 항상 서울에 상주하게 된 것이다. 또한,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국왕의 친병(親兵)인 금군(禁軍)을 전부 기병화(騎兵化)하는 한편, 훈련도감이나 어영청군의 기병도 강화하였으며, 어영청군에는 대포부대인 별파진을 만들기도 하였다. 효종은 또한 송시열, 송준길 등 재야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쇄신하고 전력 증강에 힘쓰는 한편 제주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 등을 훈련도감에 편입시켜 화액과 무기제조에 힘쓰게 하고, 의주부윤 임경업을 시켜 명나라와 대청전선(對淸前線)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북벌계획은 당시 중원세력(中原勢力)의 불안과 청정(내가 소견이 얕아서 비록 학문이 어떠한가는 모르지만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여 실질적인 사업을 하며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의 부담을 가볍게 하기를 원한다.김육은 철두철미하게 민생의 안정이라는 기반 위에서 도덕을 논하고자 하였으며, 현실적인 실용성을 추구하였던 학자요 경세가였음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김육은 유고 경전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를 두루 섭렵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정통 성리학자와는 달리 학통과 세평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기 견해에 충실하였던 학자라 할 수 있다.김육은 이른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탁월한 치적을 통해 도학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였고, 이로부터 한 발짝 나아가 명분보다 실질을 중시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선구가 되었다. 김육은 “천하의 모든 일은 실질일 따름이니 실질 없는 명분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학사상의 핵심은 민생의 안정을 위해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도덕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육이 정치 일선에서 이룩하고자 했던 제도의 개혁에 실학사상이 배태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육이 사회, 문화 제 분야에 있어서 이룩한 실용적인 개혁은 사실상 청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며 청조의 문물을 경험한 데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김육의 업적(1) 대동법의 시행 및 확산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대동법을 본격적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김육은 같은 시대의 일반 학자나 관료와는 약간 다른 생각을 품었고, 그것을 우직스럽게 반드시 실천에 옮기려 애썼다. 그는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면 부국강병도, 유교의 대의명분도 설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현제도를 개혁해서 그 혜택이 백성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중에서도 대동법을 가장 중요한 방편으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반대 정파의 빗발치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대동법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공물과 진상을 대동미로 조 11년 9월에 대사간 이식과 인조 14년 9월에 충청도 관찰사 권반(權盼)이 건의한 바를 종합 연구하여 도내에 있는 전토(田土)에서 1결에 대해 쌀 2말과 베 1필을 부과ㆍ징수하여 서울로 상납하고 공물 가격책정과 도에서 소요되는 여러 가지 경비에 충당하는 한편, 결당 징수한 세금 이외에도 전세와 삼수미를 제하고는 일채 민호에서 징수하는 세목이 없도록 하자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러한 건의는 그 과수량(課收量)이 결당 쌀 7말에 불과한 과소한 것이라는 이유로 중앙정부에 의하여 기각되고 말았으나 그의 연구는 계속 진전되어갔으며, 이때의 그의 구상은 뒷날 법규화된 충청도 대동사목의 기초가 되었다.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육은 우의정에 배수되는 영달을 맞게 되었다. 국가의 온갖 정사에 관해 강력한 발언권과 모든 일의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3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지위에 오른 김육은 효종에게 대동법의 시행을 거의 강요하다시피 하였다. 그는 효종 즉위년 12월에 효종에게 글을 올려 대동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시행의 여부는 오직 왕의 결단에 달렸으니 만일 시행하지 못하겠으면 자기를 벌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과격한 행동은 김집을 비롯한 반대파들로부터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하여 그는 영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그러나 그는 조정의 여론을 모아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시켜 나갔으며, 효종 2년(1651)에 영의정으로 승진 복직되자 다시금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하여 그 해 8월에 충청도에 시험적으로나마 실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충청도에의 시험적인 실시가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자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던 여러 관리도 대동법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고, 다른 도의 도민들도 그 실시를 원하여 김육이 효종 9년(1658)에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맏아들 김좌명에 의하여 전라, 경상, 황해도의 차례로 대동법의 실시를 보게 되었다.이와 같이 김육이 평생 동안 그의 정력을 기울여 실시한 대동법은 모든 전토에서 결마다 12말의
    인문/어학| 2005.07.09| 8페이지| 1,000원| 조회(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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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관계사] 장보고시대의 해양활동 평가A+최고예요
    ◈ 목 차 ◈Ⅰ. 서론Ⅱ. 본론1. 국제관계의 변화와 신라인들의 등장(1) 국제관계의 변화(2) 신라인들의 등장과 역할2. 장보고 시대의 국제상황과 해양활동(1) 장보고 시대의 국제상황(2) 장보고의 활동과 동아시아 질서3. 신라인들의 해양활동과 국제항로(1) 신라인들의 해양활동(2) 신라인들의 국제항로① 서해 북부 연안항로 - (환황해 연근해항로)② 황해 중부 횡단항로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우리 민족은 8~10세기에 이르는 3세기 동안 오늘날 우리 영토와 거의 비슷한 경계를 확보하였다. 또한 여러 왕국으로 분립되어 있던 우리 민족은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이후 고려와 조선에 이르는 단일왕조를 1천여 년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였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당에서 도입한 선진문화를 전래의 문화에 동화시켜 독자적인 문화로 재창출하였다.그러나 이 시대에 이루어졌던 우리 민족의 활동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해양진출이었다. 신라는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해로를 통하여 끊임없이 문물을 교류했으며, 많은 유학생과 승려들을 보내 직접 문화를 체득시켰다.또한 한반도 주변해역에서 황행하던 해적을 완전히 소탕하고 해상질서를 바로잡았다. 이러한 해상평화를 바탕으로 신라는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이 해상무역은 해상실크로드를 통하여 남중국까지 진출한 이슬람 사인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상품을 북중국, 신라, 일본에까지 판매하는 중계무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우리 민족은 바로 이 시기에 세계사의 전면에 나타났는데, 그것은 해양 진출을 통해 가능하였던 것이다.우리는 해양진출이 활발했던 이 시대의 동아시아질서의 재편과정과 장보고와 재당신라인들의 등장과 역할에 대해 알아보고, 그들의 능동적이고 의미 있는 활동을 가능하게 한 해양활동과 국제항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국제관계의 변화와 신라인들의 등장(1) 국제관계의 변화7세기 동아시아질서를 재편하는 대전쟁이 끝나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는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 탄생했다. 당단은 로마로, 동단은 중국 동남해안으로 보는 것이 통설로 되어 왔다. 그 포괄해역은 지중해, 홍해, 아라비아해, 인도양, 중국 남해(서태평양)로 추측된다. 이러한 사무역을 통해 유입된 물품은 점차 확산되어 다 많은 수요를 창출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여 황실의 여인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 사치품을 조달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는 당시 정치적인 부패의 심화로 상류층의 사치가 더해질수록 시박사가 해외무역선으로부터 조달하는 궁중 사치품도 증가함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무역의 발달은 곧 해상 실크로드가 번성할 수 있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이 시대의 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중국인과 사무역을 할 수 있었고, 중국인과 결혼도 할 수 있었으나 함께 외국에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외국인이 동족들 간에 분쟁을 일으키면 본국법에 적용을 받도록 했다. 그들은 번방(蕃坊)이라는 공동 거주구를 이루었으며, 이 지역은 번장이 다스릴 수 있도록 하였다. 당 정부는 이민족들이 교역을 할 수 있도록 국경지역에 호시(互市), 관시(關市), 호시(胡市) 등을 설치하였다. 이 시대에는 물자의 교환은 자유로웠다. 하지만 병기(兵器), 직물, 금, 은, 철 등은 변방에서 교역하는 것을 금하였고, 노예나 동전 등을 유출하는 것도 금하였다.그런데 당나라 내부의 물류체계에는 나름대로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남쪽의 양주와 북쪽의 장안을 잇는, 즉 남방의 물품을 장안이나 북방으로, 서방의 물품을 강남으로 보내는 활발한 물류망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즉 중간의 끊어진 길을 이어줄 도로와 상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한창 발전해 나가야 할 당나라 경제가 봉착한 내부의 문제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당나라의 경제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들이 재당신라인들이다.(2) 신라인들의 등장과 역할당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재당신라인’이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정체가 무엇일까?당시 신라인은 당나라와 일본에 많이 건너가 살고 있었꾼인 재당신라인들은 당나라 내부의 운하경제를 장악하는 것으로서만 만족하지는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무역을 하는 대상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본국인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고, 신라의 산인 및 해양민들과 결탁해야만 했다. 때문에 수륙교통의 요지이며, 신라나 일본으로 출발하는 석도, 문등, 연운, 회안(초주), 양자강 유역의 양주, 소주, 절강성의 영파, 황인등 주로 항구도시에다 신라방을 건설하였다. 산둥반도의 남쪽 해안이자 현재 청도만의 북쪽 해안에는 노산근처 팔수하촌을 비롯하여 유산포와 문등현의 적산포 등 아주 크고 유명한 신라인 마을이 있었다.그러면 그때 신라의 국내 사정은 어떠했을까? 신라는 통일을 이룩한 저력과 자신감 있는 해양능력을 바탕으로 국제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전기에는 주로 당나라와 산둥반도의 등주항을 통해서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등주에는 발해관과 신라관이 함께 있었다. 초기에는 양국 간에 약간의 긴장관계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공식 비공식적인 교섭은 이루어졌고, 특히 교역은 비교적 활발했다.신라는 일본과도 시기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변화는 있었지만 교역은 활발했고, 특히 민간인들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바다를 건너다니면서 물건들을 사고팔았다. 이들의 교역품은 주로 금속품, 기물, 향료, 약물, 염료 등이었다. 훈륙향(薰陸香), 청목향(靑木香), 정향(丁香), 곽향(藿香), 영륙향, 감송향(甘松香), 용뇌향(龍腦香) 등 남중국,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산의 각종 향료와 동남아시아, 페르시아 산 약재, 그리고 신라묵(新羅墨), 종이, 악기, 모전(毛氈), 송자(松子)등 다양한 물품들이 있었다.신라는 일본 무역을 거의 독점하면서, 당나라나 서역이나 아라비아에서 오는 물품들도 역시 마찬가지고 신라를 거쳐야 했다. 신라는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 이슬람권 상인들과 교역을 했다.이렇게 8세기경 교역이 활발해지고 안정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왕성한 무역을 하는 신라인들에게 넓지도 좁지도 않은 동아ㅣ아는 적당라상인들이 취급하는 상품들이 고가의 고급품이었기 때문에 주요고객은 항상 상류층이었다.이처럼 8~10세기에는 바다를 통해서 동서양의 산물이 교환되었는데, 이 상품운송로는 흔히 해상실크로드로 지칭되고 있다. 해상실크로드 양 끝단에서는 게르만족과 신라인이 실크로드를 북구와 일본까지 연결함으로써 북구에서 동아시아 끝까지 해상실크로드를 연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세계가 해양진출에 의해 인류역사상 최초로 하나가 되었던 시대가 바로 이때였던 것이다.(2) 장보고의 활동과 동아시아 질서바다의 현실은 각국의 정부를 대신해서 무장력을 갖춘 해상관리자가 나타나 해적을 퇴치함으로써 바다를 평정하고, 교역로를 보호해주어야 했다. 특히 신라정부를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으며, 서해와 남해에서 발호하여 중앙정부의 힘을 약화시키는 해상세력들을 통제하고 일원화시켜야 했다. 또한 교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국가가 일부 환수하고, 보다 국제화되며, 정치적인 발언권을 강화하려면 자국의 해상세력을 키우는 일이 바람직했다. 장보고는 당시에 전개된 이러한 국제질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역동적인 국제환경이나 신라 내부의 필요성을 명분으로 삼아 828년에 귀국하여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독특한 직책으로 해양과 관련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환황해권에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는 거점도시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였고, 조직적으로 역할분담을 시키면서 군사력을 동원, 신라정부와 국적이 다른 민간상인조직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본거지를 군항(軍港)이며, 자유무역항으로 만든 청해진에 두어 재당신라인과 본국신라인을 동시에 관리하고, 역할분담을 조정할 수 있었다. 제조업, 상업, 운송업, 삼각중계무역, 보세가공업, 문화교류, 이데올로기의 전달 등을 해양이라는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유기적으로 운영하였다.장보고는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를 교관선이라는 무역선에 실어 파견하였으며, 구수(毬? : 페르시아산 담요) 자단(紫檀 : 쟈바 등의 향목) 침향(?香 : 수마트라산 향료)등 고가품을 수입하여 신라귀족들교통의 요지이며, 신라나 일본으로 출발하는 석도, 문등, 연운, 초주, 양자강 유역의 양주, 소주, 절강성의 영파, 주산군도, 황임 등 항구도시가 그 곳이다.그런데 당의 경제는 내부뿐만 아니라 대외교류에서도 문제점이 있었다. 동서남북의 물자들이 모두 모여들고, 서로 오고가면서 환류(還流)해야 물류 시스템이 활성화되고, 정치 경제적으로도 안정되며, 국가의 수입도 증대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류 시스템’에 하나의 장애가 있었다. 한 지역, 즉 동쪽의 물류 시스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이 지역은 비우호적 관계인 신라, 발해가 남북국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육로는 폐쇄된 길이었고, 정작 열린 길은 해로(海路)뿐이었다. 그런데 해로는 그 독특한 메커니즘으로 인하여 황해의 양쪽 내지는 동아시아 해양 전체의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면 모든 나라들 간의 물류망을 장악하고, 해양력을 강화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황해의 서쪽은 재당신라인들이, 동쪽과 그 나머지 지역은 ‘본국신라인’들이 해양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황해 주변에 포진한 신라인들을 곳곳에 점(點)으로 있고, 느슨하게 이어진 민간조직이었다. 그런데 재당신라인들은 내륙수운에 머물지 않고, 다시 황해를 건너 신라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또 절강지방에서 동중국해를 횡단하여 신라나 일본으로 삼각중계무역을 하였다.신라인들은 조선술이 매우 뛰어났다.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수륙양면작전을 활용하여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킬 당시에, 신라 태자 김법민은 병선 100척을 거느린 채 덕물도에서 소정방의 수군을 맞이하고 해양연합작전을 펼쳐 백제 정벌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 후인 671년 10월에는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면서 조선(漕船) 70여 척을 격파하였다. 또 673년에는 당나라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하여 문무왕은 대하찬인 철천(徹川)을 파견하여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이로 보아 신라는 해군력과 조선술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2) 신라인들의 국제항로신라인들은 어떠한 항로를 이용해서 당나라와 이다.
    인문/어학| 2005.05.30| 12페이지| 1,000원| 조회(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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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중세사] 고려말(원간섭기~고려말) 평가A좋아요
    ◈ 목 차 ◈▶ 머리말 -“개혁의 시대 원 간섭기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반적인 내용▶ 본문1. 원나라의 내정 간섭2. 원나라와 결탁한 권문세족의 등장3. 토지와 농민문제를 전민변정을 통해 해결4. 역대 왕들의 반원 개혁 정치5.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6. 신흥사대부의 등장과 조선의 건국▶ 맺음말▶ 참고문헌▶ 레포트 후기< 머리말 >개혁의 시대 원 간섭기에서 고려 말까지1273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 삼별초항쟁이 진압되고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인 고려 후기 사회가 전개된다. 고려 후기 사회는 충렬왕이 즉위한 이후의 원 간섭기와 공민왕 이후 고려 말까지의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원 간섭기는 1273년부터 공민왕이 즉위하는 1352년까지 약 80여 년간으로, 이 때 충렬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 모두 6명의 국왕이 재위하였다. 당시 국왕은 원 공주와 혼인하고, 태어난 왕자들은 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고려에 와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고려 국왕은 원의 승인과 지원 아래서 즉위하고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중간에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 한 국왕이 거듭 왕위에 오른다 하여 重祚(중조)현상이라 한다. 이는 원의 고려 지배가 국왕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하는 예가 된다.한편 14세기 중반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원이 쇠퇴하면서 고려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이와 함께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대외 정세와 환경도 크게 변화한다. 또한 원 간섭기 측근 청지 대신 이색, 조준, 정도전 등 사대부와 이성계 일파의 무장 세력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정치질서도 크게 변화한다. 이상은 고려 후기의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여기서는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간섭에 대한 내용과 원나라와 결탁한 권문세족에 관한 내용을 다뤘으며, 이런 원나라에 대해 강력한 반원정책을 취한 공민왕의 개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고려 말기의 새로운 계층으로 등장한 신흥사대부의 훗날 조선건국의 과정을 다룸으로써 고 대한 원나라의 감독 기관이라 하기는 어렵다. 원나라 간섭 아래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고려의 용어나 관제가 격하되었다. 충렬왕 원년(1275) 국왕의 묘호에는 조(祖)나 종(宗) 대신‘王’자를 붙이도록 하였고,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사(赦)는 유(侑)로 바뀌었다.2. 원나라와 결탁한 권문세족의 등장권문세족은 고려의 정치, 경제적 이득을 독차지한 특권층으로서 정치적으로 고려의 최고 권력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막대한 규모의 농장을 소유했다. 고려 전기의 지배층이 문벌귀족, 중기의 지배층이 무신들이라면 권문세족은 고려 후기의 지배층이었다. 충선왕은 즉위는(1308)의 하교에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제상지종(宰相之宗)15개 가문을 발표했는데, 이들을 대체로 권문세족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를 지배했던 가문들을 살펴보면 문벌귀족과 무신가문 그리고 원나라 지배 이후 성장한 가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가문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① 고려 전기 이래의 문벌귀족들 : 경주 김씨. 정안 임(任)씨, 경원 이씨, 안산 김씨,철원 최씨, 해주 최씨, 공암(孔岩) 허씨, 청주 이씨, 파평 윤씨② 무신 집권기 이래의 득세 가문 : 언양(彦陽)김씨, 평강(平康) 채(蔡)씨③ 무신정권 때의 능문능리(能文能吏)로서 성장한 가문 : 당성 홍(洪)씨, 황려 민씨,횡천 조씨 등 신관인층도 여기 속한다.④ 평양 조(趙)씨 등은 원나라 지배 이후 권세가로 성장한 가문으로서 재상지종에 소속됨특히 부원 세력은 여러 계기로 형성되었는데, 몽고어를 익힌 역인으로 몸을 일으켜 권문이 된 세력은 조인규)(趙仁規)에서 비롯되는 평양 조씨가 있다. 또 매를 사육하여 바치는 응방을 통해 진출한 윤수(尹秀) 칠원 윤씨가 있다. 원나라 공주를 따라온 겁령구(怯怜口:사속인) 출신과 원나라에 환관으로 들어가서 세력을 얻는 것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그 일족, 원나라에 입조하는 국왕을 수행하정치, 경제 문제는 토지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는 사전(私田)문제로 집약된다. 사전에 대한 국가 관리가 무너지면서 사전은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가산(家産)화하였다. 그리고 몽고와의 오랜 전쟁 뒤 농지 개간을 장려하고 지배층을 대우하기 위해 사패전)(賜牌田)을 분급하였는데, 이를 빙자한 토지 겸병이 성행하였다. 아울러 전객 농민에 대한 수취가 무거워지면서, 농민의 불만이 높아갔다. 당시 정부는 이 사태를 법적 차원에서 처리해갔는데, 전민변정사업이 그것이다. 전민변정은 부당하게 탈점한 토지는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농장에 숨겨져 있던 탈점민은 공민(公民)으로 만들어 부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전민변정사업은 이미 원종 10년(1269) 2월에 시행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궁원, 사원, 양반, 군인, 한인의 세전 토지 가운데 권신에게 빼앗긴 것을 가려내어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 일이 있었다. 전민변정사업으로 표현되는 개혁 정치는 충렬왕 24년(1298) 1월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본격 추진되었다. 하지만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5월에 원나라가 충선왕을 강제 퇴위하여 지속할 수 없었다. 충선왕은 복위한 뒤에도 개력 정치를 추진하여 민생 안정책으로 적체된 부세의 징수 유예, 불법적 토지 점탈 금지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다.충숙왕대 개혁 정치는 5년(1318)과 12년(1325) 두 차례에 있었다. 충숙왕 5년 개혁 교서에서 지방관과 공물 징수관의 비행, 권력층의 납세 거부, 전민 탈점, 고리대, 향리의 피역으로 인한 백성의 부담 등 현실적인 폐단을 지적하였다. 대책으로는 비행금지, 처벌, 정액 이상의 사전 환수, 농장 투탁민의 추쇄, 기인역(其人役)의 면제 등과 같은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충숙왕이 장기간 원나라에 억류당하면서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없었다.충목왕대 전민변정사업 3년(1347) 2월 정치도감)을 설치하면서 추진하였다. 정치도감에서는 토지 탈점, 고리대, 압량위천 등 농장 폐단, 수조권의 중첩 현상 등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각 도에 정치관을 파견부에서는 전민변정(田民辨整)차원에서 대처하려고 하였다. 원나라 간섭은 국내 정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국왕의 지위가 불안해졌으며, 부원 세력을 양성해 왕위에 도전하거나 국내 정치를 파행으로 몰고 갔다. 또 내적인 사회 모순을 증폭시켜갔다. 토지탈점, 수취체제 문란, 국가의 재정난, 백성의 궁핍화는 원나라 간섭기에 심각해졌으며 원나라의 수탈, 부원 세력 침탈로 인해 더욱 극심하였다. 역대 국왕은 이러한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대책을 세우고 시행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원나라 간섭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원나라 후원 아래 왕위에 오른 역대 왕들이, 자기 정치 기반을 원나라에서 함께 활동한 측근 세력에 둔 사정에서, 적극적인 반원 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충선왕, 충숙왕, 충목왕대에 개혁정치는 추진하였지만, 원나라의 영향력이 엄연한 실정에서 그러한 개혁 정치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반원이 전제되지 않는 개혁 정치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반원 정책이 어려웠던 사정은 충목왕대 정치에서 엿볼 수 있다. 충목왕 원년(1345)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전왕의 측근 세력을 없애고 개혁 정치는 시도하였다. 개혁안에는 정동행성의 불법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있었다. 이때 원나라는 정치도감 설치를 권유하고 활동을 지원하였는데, 충목왕은 이 정치도감을 통해 부원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정치도감은 활동 과정에서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만을 죽인 것이 계기가 되어 부원 세력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았고, 원나라 지원도 줄어들어 결국 실패하였다.5.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반원 정책은 공민왕대 구체적으로 수행되었고, 개학 정치도 실행에 옮겨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공민왕은 일찍이 왕후ㆍ이제현 등 개혁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충정왕과 왕위 경쟁을 했던 개혁군주였다. 정방(政房))을 혁파해 인사권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로 돌리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권문세가들의 부당한 민전(民田)탈점을 규제하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쳐 나갔다.그러나 이런 개혁 조치에 는다. 신돈은 공민왕 15년 전민변정도감을 다시 설치해 토지와 노비 문제 해결에 나섰다. 즉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 이내에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돌려주라고 포고한 후, 이 기한을 넘기면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공포했다. 신돈의 개혁정책은 성공적이었고, 권문세족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그를 성인(聖人)이라 추앙하기까지 했다.초기의 개혁정책에 실패한 공민왕이 두 번째 개혁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바로 개혁 주체세력의 차이에 있었다. 홍언박(洪彦博)이나 자신의 시종공신 같은 권문세족들을 주체로 내세웠던 초기의 개혁은, 개혁 목표와 주체세력 자신의 기득권이 충돌하는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권문세족이라 하더라도 확고한 개혁철학을 갖고 있을 경우라면 다르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개혁은 좌초하게 마련이다. 신돈 같은 미천한 출신을 주체세력으로 삼아 시행한 두 번째 개혁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신돈은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한 유연한 정치력을 갖고 있었으며, 유학적 소양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의 개혁성에 주목해 이들을 개혁 대열에 동참시키기 위해 성균관을 중건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이색(李穡)을 정점으로 정몽주(鄭夢周)ㆍ이존오(李存五)ㆍ김구용(金九容)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 등의 사류들이 조정에 등장하는 것은 신돈이 신진사류들을 개혁세력으로 인식해 적극 끌어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불교를 개혁 대상으로 판단하던 사류들과 연대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신돈과 신진사류의 결합에 위협을 느낀 권문세족을은 드디어 신돈 제거에 착수했다. 경천흥(慶千興)ㆍ오인택(五仁澤) 들이 신돈을 제거하러 나셨다. 이 때의 신돈 제거시도는 공민왕의 적극적인 옹호로 실패했지만, 그 후로도 공격은 계속되었다.신돈이 강력한 개혁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공민왕의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신돈이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는 상황에 이르자, 개혁 추진 5년에 만인 재위 19년, 공민왕은 친정을 단행하면서 신었다.
    인문/어학| 2005.05.30| 9페이지| 1,000원| 조회(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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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 사상] 음양오행설 평가A+최고예요
    Ⅰ. 머릿말옛부터 사람은 자연을 관찰하여 왔다. 하늘을 보면 해와 달이 있고, 밤에는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다. 땅은 밤과 낮이 있어 해가 지고 달이 뜬다. 나무는 자라나고, 산은 높고 낮음이 있으며, 강물이 쉴새없이 흐른다. 비가 오고 날씨가 흐렸다 맑았다 하거나,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계속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우주 공간 내에 살면서 무엇을 찾으려고 정신적 노력이나 육체적 노력을 하고 있다.중국에는 일찍부터 만물을 음양이라는 대립적인 이원의 상에서 보는 사고방법이 발달해 있었다. 이것은 뒤에 오행설과 결합되어 오늘날에는 대부분 음양오행설로 취급되고 있다. 그로나 음양설과 오행설은 본래 그 기원이나 내용이 서로 다르다. 이 들은 아마 전국 중기 이후에 결합되었을 것이고, 그후 본래 점서였던 『역』에 도입되어 그것의 이론적인 기반으로 사용됨으로써 널리 보급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2천년 이상에 걸쳐 지금까지 중국인의 사고방법 속에 잔존해 있다.사물을 대립 속에서 보는 사고방법은 중국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에게 예부터 존재하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 말에 현재에도 많이 존재하고 있는 명사의 여성고아 남성의 구별은 그러한 흔적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특히 남녀, 일월, 천지, 한난, 명암, 건습 등의 자연현상을 비롯하여 여러 사물의 상호관계를 대립물로 보려고 하는 사고방법이 일찍부터 널리 행해졌다. 그리고 이것들은 후에 명암을 의미하는 음양이라는 말에 통일되어 자연과 생활 속의 만물에 적용되게 되었다.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은 중국을 중심으로 생겨난 고대 철학 사상으로서 은주(殷周)시대에 생겨나 춘추전국 시대에 크게 발전하여 완전성을 띠게 되었다. 이를 자연계의 모든 현상으로써 해석하며 오늘날 의학의 영역에까지 깊이 응용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음양오행이라는 것이 무슨 연유로 어떠한 사상을 담은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본 논고의 연구목적은 음양오행설을 음양론과 오행론을 따로 구분하여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두 이론의 의미변천과 기원을 찾아보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또한 그 속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특성을 각종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중심으로 연구 하였다. 음양오행설이 다방면으로 연구가 되어 있어서 자료 수집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중국식 한자가 많이 나와서 책을 정독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아무쪼록 부족한 소논문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음양오행설의 기원과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 노고를 조금이나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시작하기로 한다.Ⅱ. 음양오행설1. 음양오행설의 기원고대 중국의 세계관의 하나로 음양설(陰陽說)과 오행설(五行說)은 발생을 달리하는 다른 사상이었으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이후 융합되어 음양오행설이 되었고, 특히 漢나라 때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음양설은 음양이기(陰陽二氣)의 소장(消長)에 의해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사상으로, 이것을 역학에서 받아들여 그 기본원리로 하였는데, 음양은 본래 산의 음지와 양지를 가리켰다. 역학은 본래 강(剛)과 유(柔)의 원리로 생성변화를 설명했으나, 후에 강유(剛柔) 대신에 음양을 받아들였고 여기에 순환사상이 추가되었다. 이것은 천체의 운행과 사계(四季)의 추이에서 고찰해낸 것으로 보인다.한편, 오행설은 고대인의 생활에 필요한 5가지 소재, 즉 민용오재(民用五材)의 사상에 기초한 설이다. 생활에 직접적인 수화(水火)로 시작하여 목금(木金)에 이르며, 그 기반이 되는 토(土)로 끝난다. 이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순서는 《서경(書經)》 에 있는데 생성오행(生成五行)이라 한다.음양설과 오행설을 통합하여 체계적인 음양오행설을 성립시킨 대표적인 학자는 추연이다. 그는 음양의 기와 5행에서 발생하는 덕(德)의 소식(消息)이론으로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였는데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학설로는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 있다. 5덕이란 5행에서 발생한 5종류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오덕종시설에 따르면 천지가 나누어진 이래 5덕의 전이에는 일정한 기운이 있고, 거기에 적응한 정체(政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왕조의 제왕은 누구나 이 5행의 덕 가운데 하나를 갖추어 왕자가 되며, 모든 왕조는 5덕의 순서에 따라 흥망하게 된다. 그리고 5행의 상호관계는 토-목-금-화-수와 같이 각기 전자의 왕조를 이기고서 나타난다는 상승(相勝)과 순환의 법칙, 즉 상극설의 입장을 취했다.그 후 이 오덕종시설은 진한의 교체기를 거쳐 전한의 정치적 안정기가 오면서 목-화-토-금-수로 차례차례 생성해 간다는, 정권 선양의 형태를 취하는 상생설로 변화했다. 그리고 진한대의 음양오행설은 12기와
    인문/어학| 2005.05.30| 16페이지| 1,000원| 조회(2,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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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현대사] 바이마르공화국 평가A좋아요
    ◈ 목 차 ◈Ⅰ. 바이마르공화국Ⅱ. 바이마르공화국의 성립독일혁명 [Deutsche Revolution](1) 경과(2) 종식Ⅲ. 바이마르공화국 시대【혼란기(1919~1923)】【안정기(1924~1929)】【몰락기(1930~1933)】Ⅳ. 바이마르 헌법(Weimarer Verfassung)Ⅴ. 참고문헌Mary Fulbrook 저, 김학이 역 :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개마고원, 2000이민호 저 : 『독일사』, 대한교과서, 1998Andre Maurois 저, 전영애 역 : 『독일사』, 홍성사, 1993오인석 외 : 『바이마르 공화국-격동의 역사-』, 삼지원, 2002인터넷 : 네이버, 다음, 야후, 구글, 두산동아백과사전Ⅰ. 바이마르공화국1918년 11월 의회주의 공화국이 선언되었다.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 도시의 이름에서 유래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회복지 관련법을 제정하는 등 일련의 사회적 타협 위에 건설된 진보적인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공화국은 혼란과 패전의 와중에 내전을 방불케 하는 조건 속에서 탄생했고, 가혹한 평화조약과 불안정한 경제에 의해 제약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정부 형태로서의 민주주의를 거부함에 따라 좌, 우파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결국 공화국은 태어난 지 14년을 약간 넘긴 시점에, 합헌적으로 총리에 임명된 히틀러(Adolf Hitler))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몰락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명예스러운 퇴진은 어쩔 수 없이 공화국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독일사를 장기적으로 해석하려 할지라도,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직업적인 원인은 바이마르 역사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공화국 출발 당시부터 공화국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파악한다. 또 어떤 역사가들은 1932년~33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벌어진 개인들의 결정과 오류들, 혹은 1929년 이후 세계 대공황의 영향을 중시한다. 일부 역사가들이 공화국의 몰락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에 무게를 두는 반출격을 명했다. 이에 대하여 수병들은 <죽음의 출격>에 반항하여 11월 4일 킬군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노동자와 연대해서 레테)를 형성하였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항만도시로 파급되었고 내륙부에도 확대되었다. 18년 11월 7일 바이에른왕국의 수도 뮌헨에 혁명이 일어나, 왕제는 타도되고 노·병(勞兵)레테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11월 9일 베를린에 총파업이 일어났다. 막스 폰 바덴은 황제에게 퇴위를 요구했으나 요령부득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지고 황제의 퇴위를 선언하고 사회민주당의 F. 에베르트)에게 재상직을 양보하였다. 이튿날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였고, 11일 연합국과의 사이에 휴전조약이 조인되었다. 한편 그 전날인 10일, 베를린노·병레테대회는 인민위원정부를 승인하였다. 이것은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을 지도한 에베르트는 당면과제로서 질서유지, 국민생활 보장, 국민의회 준비, 평화조약 체결 등을 내세우고 이를 위하여 군부·관료·자본가 등의 협력이 불가결하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인민위원정부는 최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종전의 행정기관에 의존하여 이제까지의 관료를 기술적 전문가로서 경질시키지 않았다. 군부에도 볼셰비즘, 즉 급진분자를 억압하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18년 12월 16∼20일의 전국노·병레테대회는 이른바<함부르크항목>을 결의하고, 군의 철저한 해체, 국민군의 창설 등을 요구하였으나 에베르트는 이것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이듬해 19년 1월 19일의 국민의회선거를 결정케 하여 레테를 압살하였다.(2) 종식에베르트가 독일 군국주의의 지주였던 반동세력과 동맹한 것이 판명되자 독립사회민주당은 정부에서 이탈했다. 이 당의 좌파인 스파르타쿠스단은 정부와의 대결자세를 강화하고, 1918년 12월 말 공산당을 결성하여 이듬해 1월 선거보이콧을 결정하였다. 모험주의자의 활동은 적극적이었다. 사회민주당의 G. 노스케)는 의용군의 선두에 서서 베를린에 들어왔다. 19년 1월 15일 공산당의 지도자 칼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反)혁명 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와 같은 혼란을 겪으면서 20년 6월 6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바이마르 연합파(聯合派)가 대패하여 의회에서 과반수를 잃게 되었는데, 이후 공화국이 붕괴될 때까지 끝내 과반수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보수 제정파와 좌익급진파등 반대 세력은 더 늘어났다. 거기에다 연합국에 대한 배상금 지불과 외국 군대의 주둔 등으로 경비증대가 극심하여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게 되고 23년 1월 11일에 배상금 지불이 조금 늦어진 점을 이유로 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함에 따라, 더욱더 인플레이션을 격화시켜 경제적 파국(破局)으로 몰아갔다. 이에 독일 국민은 이들의 불법적인 점령행위에 맞서 정부의 지도하에 점령지의 자본가관리노동자 들로 하여금 점령군에 대한 저항으로서 총파업을 실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국민생활은 극도로 곤궁하여졌으며, 이 같은 사회적 혼란을 틈탄 극좌극우 양 세력이 더욱 증대해져 사회혁명의 위협이 닥쳐왔으므로, 정부는 그때까지의 연합국에 대한 소극적 자세에서 적극적인 저항 자세로 나서는 한편 인플레이션을 수습하여 위기를 넘겼다.【안정기(1924~1929)】독일 공화국은 외국 자본을 차입(借入)하여 최신의 생산 설비를 갖추게 됨으로써 생산이 향상하게 되고 그에 따라 세계에서 1,2위를 다투는 대공업국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학문, 사상, 예술 방면에서도 눈부실 만큼 크게 발전하였으며, 외교면에서도 외무장관 G.슈트레제만)의 정책이 성공하여 1924년 9월에는 미국의 원조계획인 도즈안(案)이 성립되어 배상문제도 일단락 짓게 되었다. 이어 25년 12월 로카르노 조약(條約))이 체결되어 전승국과의 화해가 확립되고, 26년 9월 국제연맹(國際聯盟)에 가입하게 된데다 상임이사국(常任理事國)으로 선출되기까지 하였다. 이 시기에 국내정치상으로도 온건한 제정파와 공화파에 의한 연립내각이 계속적으로 집권을 하였다. 그러나 25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제정파에서 추대한 힌덴부르크)가 당선되어 우익국가주의가 7월 31일에 의결하고, 8월 11일 공포한 헌법이다.바이마르란 이 헌법이 만들어진 장소로, 튀링겐주(州)에 있는 도시이다. 1918년까지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公國)의 수도였으며, 1919년 8월에 이 곳에서 독일 공화국의 국민 의회가 열려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종래의 비스마르크 헌법과는 달리,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헌법으로 국민의 통일을 최고의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사회 국가적 성격도 지녔는데, 후에 많은 나라들이 이것을 본따서 헌법을 만들었다.이 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민의 주권을 인정하고, 또 그것이 중심 되는 보통·평등·직접·비밀·비례 대표의 원리에 따라 선거하고, 여기에서 뽑힌 국민의 대표인 의원이 행정부를 이루는 의원 내각제를 선택하여, 직접 민주주의 제도를 허용한 점이다. 그러면서, 국민의 복지를 중요시 여기는 사회주의 성격도 포함하였다.즉, 19세기의 자유 민주주의와 20세기의 사회 민주주의 정신을 지닌 특징도 지녔다. 그리고 소유권을 법률상으로 규정하며, 사유 재산권을 활용하는데 있어서 다수의 행복과 이익에 적절해야 하는 항목을 담고 있는 근대 헌법으로는 최초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는 생존권을 보장하고 있는 항목도 있어 오늘날 헌법을 만들게 하는 표본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헌법은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독일 정부를 장악한 뒤 1933년에 폐지되었다.1933년 히틀러의 정권에 의한 수권법(授權法)을 비롯한 일련의 입법에 의하여 사실상 폐지되었으나, 그 후 세계의 민주주의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헌법은 국민주권을 확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상세히 규정한 민주적인 헌법이었으나 대통령에게 긴급명령권을 부여한 제 48조는 뒤에 히틀러가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길을 열어 주는 근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바이마르 헌법에 따르면, 독일은 연방공화국이며 연방의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고 임기는 7년이다. 대통령은 수상을 임명하고 의회를 해산할 권한이 있으며 긴급는 시도는 실패했으나,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경제제도로서는 경영협의회형태로 실현되었다. 50년대에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인 폴란드·헝가리·유고슬라비아 등에서는 노동자 자치와 관련하여 레테가 재검토되었으며, 60년대에는 서유럽·아메리카의 신좌익이 직접민주주의를 제창하면서 레테론(論)을 논의하게 되었다.) 에베르트 [Friedrich Ebert 1871∼1925] :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초대대통령(1919∼25). 하이델베르크 출생. 처음에는 마구(馬具) 직공이었으나 1889년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실무가로서의 수완을 인정받아 1905년 당집행부 서기, 12년 이후부터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3년에는 A. 베벨이 죽은 뒤 H. 하제와 나란히 당의장에 선출되었다. 제 1차세계대전 때에는 정부와 군부에 타협하는 <성내평화(城內平和)>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18년 11월의 독일혁명에서는 하제 등과 함께 인민대표평의회를 조직했으나 군부의 세력과 결탁하여 혁명파를 물리치고 19년에 국민의회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우익의 중상에 의한 재판사건의 피로가 겹쳐 임기만료 직전에 죽었다.) 노스케 [Gustav Noske 1868∼1946] 독일의 정치가. 1883년 이후 사회민주당계의 신문편집에 종사하다가 1906년 제국의회(帝國議會) 의원이 되고, 육해군·식민지문제 등의 전문가로서 주목받았다. 제 1 차세계대전에서는 정부의 전쟁정책에 협력하였고, 18년 11월 혁명의 발단이 된 킬 군항의 해군 반란 때에는 정부와 다수파인 민주사회당(民主社會黨)으로부터 파견되어 반란을 수습하고, 12월에는 임시정부의 인민대표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군사(軍事)를 담당하였으며, 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Spartacus團)의 봉기 때에는 정부군의 사령관이 되어 혹독한 탄압으로 사회주의적 반란을 진압하였다. 2월 이후 바이마르공화국의 초대 국방(國防)장관이 되어 독일 군부의 재건을 추진, 좌익급진파를 철저하게 탄압하였으나, 오히려 우익(右翼)의 진출을 초래시켜, 20년 3월 카프미쳤다.
    인문/어학| 2005.05.30| 9페이지| 1,000원| 조회(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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