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서 차례 ◎◆ 팀명, 주제, 팀원 역할, 답사지역①-1 주제선정이유 (재조명)-2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일반적 사실② - 백제의 개괄적 역사- 백제 전?후기 역사,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③ - 백제의 사회적 분야별 특징- 정치?군사?형벌?신분제도- 풍속?경제?종교?예술?학문?미술?음악의 특징④ - 역사적 유적지 답사 내용 기술- 답사진행과정과 각 유적지별 의미와 내용⑤ -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 조사에 의한 자체판단에 의거,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역사적 사실⑥ - 팀원 답사후기 정리⑦ - 정리 (사회문제 해결과 결부시켜 정의)- 답사후기순서 김준식, 김재원, 유광현, 이진주, 차영철◆ 참고문헌 및 자료◆ 팀명 - 의자왕 사수하기◆ 주제 - 삼천 궁녀에 가려진 의자왕의 진실◆ 팀원별 역할김준식(1998018049) - 팀장, 자동차 렌트 및 운전김재원(1999001228) - 문헌자료 보조, 총무, 보고서 정리류광현(2001013061) - 문헌자료 주, 사진(디지털카메라)촬영, 식사이진주(2002036346) - 인터넷자료 주차영철(2002036332) - 기록원, 사진 편집, 인터넷자료 보조◆ 답사 지역부여와 공주 백제관련 유적지 일원부여 - 부소산성(삼충사, 영일루, 군창지, 반월루, 궁녀사, 낙화암, 백화정, 고란사)서복사지, 정림사지 등공주 - 공산성 등①-1 주제의 선정에 대한 이유(재조명)원론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번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답사를 가게 된 이유는 우선, 삼국에서 나름대로 ‘부국강병(富國强兵)’했던 국가로서 찬란한 역사와 전통을 지녔던 백제가 어떻게 퇴보의 길을 겪게 되고 결국 국가의 멸망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의문과 진실을 알고싶은 욕구 생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근간을 두었던 백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조명하고자 이렇게 조사하고 알아보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이번 우리의 보고서의 궁극적인 주제인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그의 상징적인 신하인 ‘삼천궁녀’에 대해 과)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이때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870명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당나라는 백제 땅에 5도독부(都督府: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을 설치, 통치하다가 다시 이를 개편하여 웅진도독부를 최고의 치부(治府)로 하고 그 밑에 7주(州)?52현(縣)을 두어 잠시 통치하다가 훗날 신라가 통치하게 되었다.- 백제의 부흥운동 -왕족 출신인 복신(福信)은 승려인 도침(道琛)과 주류성(周留城:韓山)에서 부흥운동을 시도하여 왕자 풍(豊)을 영립하고 광복군을 조직, 일본에 원병을 청하고 임존성(任存城: 대흥)에서 기병한 흑치상지(黑齒常之)?지수신(遲受信) 등의 호응을 받아 662년(문무왕 2년)에는 지라성(支羅城)?급윤성(及尹城)?대산책(大山柵)?사정(沙井)?내사지성(內斯只城: 지금의 유성 근처) 등 대체로 금강 이동(以東)의 여러 성책(城柵)을 점령하였다.이로써 당군에 대한 신라의 군량미 보급을 한때 불가능하게까지 하는 등 그 세력을 떨쳤으나, 복신과 도침의 불화로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복신을 죽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광복군은 약화되어 주류성이 함락되었다. 풍은 고구려로 망명하고,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들어가 무공을 세웠으며 지수신은 주류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임존성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고구려로 망명하여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다.③ 백제의 사회적 분야별 특징- 정치제도 -중앙관제 - 백제는 북방계통의 유이민에 의해 지배계급을 이루었다. 고이왕 이후 왕은 부여씨(扶餘氏)가 세습하였고, 귀족으로 성장한 8대 성(해?진?국씨 등)의 세력이 커짐과 함께 왕권은 미약해졌다.백제는 일찍이 중국 주(周)나라 육전(六典) 제도를 본떠서 삼국 중 제도정비의 선구였다. 고이왕 때부터 왕 밑에 6좌평과 16관등급 제도를 두어 행정을 맡게 하고, 또 왕의 바로 밑에는 수상격인 상좌평(上佐平)을 두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관청의 장 백제예술은 중국의 남조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예술을 개발하였다. 특히 일본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개발시키는 등 한반도 문화 전달의 공이 컸다.건축 - 백제의 건축은 절터?탑?고분(古墳)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절터로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金馬面) 소재의 백제 최대의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고 이 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 최대의 것으로 목조탑(木造塔)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유명하다.그리고 정림사지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안정감을 주며 삼국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하다. 백제의 분묘는 복장(複葬)이 가능한 석실묘의 전통과 현실(玄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중국 남조의 전실(塼室) 고분의 형태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대륙과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 한성시대의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石村洞)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卒本)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積石塚)이며, 웅진(熊津)시대의 공주 송산리(宋山里) 고분은 굴식[橫穴式] 돌방[石室] 고분이다.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전분(塼墳)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蓮花文)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전축분(塼築墳)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석수(石獸)?동자상(童子像)?청동경?자기?지석(誌石)?금은 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서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양(梁)나라와의 문화교류, 장법(葬法)은 물론이고, 특히 삼국간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다.또 사비시대의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은 횡혈식 석실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기술과 연화문?운문(雲文), 사신도(四神圖)의 벽화가 세련되었다.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은 백제 말기에 화강암벽에 새긴 마애석불인데,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은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그밖에도 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데, 당시 백제 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정림사지부여 정림사지는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하며, 백제 사적을 대표할 수 있는 유적으로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있다.이 사지의 사명이 정림사라 불리고 있는데 백제시대에도 정림사란 명칭이 사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관련된 유래나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었다.사지 내에는 국보 제9호 정림사지 5층석탑과 보물 제108호 정림사지 석불좌상이 남아있다.⑤-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의자왕(義慈王)은 태자 때부터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로까지 칭송되었고, 또 아들의 이름을 효(孝: 뒤에 태자가 됨.)로 지을 정도로 효도의 덕을 강조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관산성(管山城)패전 이후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즉 642년(의자왕 2년)에 제왕자(弟王子: 손아래의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를 비롯하여 모매여자(母妹女子: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자매의 딸) 4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인사(高名人士)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한 것이 그것이다.그 결과 귀족세력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이 보다 강화되었다. 대좌평(大佐平)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나지성(奈祗城)으로 은퇴한 것도 이때의 정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정책으로 돌아섰다.이러한 정책변경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집권과 연개소문의 대중국 강경노선정책 및 신라와 당나라의 밀착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고구려와 연계성을 확립한 뒤 의자왕은 신라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는데, 642년에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등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또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보호한다는 느낌이 물신 풍기는 구역이였다. 성벽은 그리 높게 쌓여 있지 않았다. 우리는 부소산을 이미 가기로 했던 코스대로 올라가기로 했다. 관광지라서 길에 포장이 잘되어 있었고 표시판이 잘 갖추어 줘 있어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근데 아쉬웠던 것은 예전에 있던 데로 보존이 잘되어 있지 않았고 최근에 와서 만들었거나 많이 고쳐져 있었다. 삼총사는 상충, 홍수, 계백을 혼을 기린다는 사당이었고 이것도 최근에 세워진것이였다. 우리 조에 주제는 삼천 궁녀에 가려진 의자왕의 진실 가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에 구경을 하기로 했었다. 영일루와 군창지를 거쳐 반월루에 도착해서 반월루에서 부여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백마강을 건너 부여의 전경이 마치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 왔다. 이곳에서 아마 주변의 경치를 보며 향락을 즐겼던 곳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월루에서 내려와 궁녀사로 갔는데 궁녀사는 1965년에 삼천 궁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하는데 사당 안에 보면 궁녀들과 의자왕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굉장히 화려해 보였다. 최근에 그려진 그림 이였는데 의장 왕의 그림을 그린사람이 의자왕의 향락적인 생활을 보여주는 의도로 그림을 그린 것 같다. 궁녀사를 나와 사자루를 거쳐 송월대에 도착하니 시간이 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오랜만에 산에 오르니깐 힘이 들었다. 나만 힘이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운동을 평소에 안한 탓인 것 같았다. 약간의 꿀 같은 휴식을 취하고 낙화암으로 갔다. 낙화암은 굉장히 좁은 공간이었는데 밑으로 백마강이 흐르고 있는 산의 절개면 에 위치하고 있어 아래를 보면 굉장히 아찔할 정도로 절개면의 경사가 심했다. 삼천궁녀의 존재가 의심이 간다. 그 좁은 자리에서 어떻게 삼천 궁녀가 뛰어 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람이 몇 명만 있어도 꽉차보이는 곳인데 삼천 궁녀가 뛰어내리려면 시간도 시간이고 낙화암으로 오는 길이 좁아서 삼천 명이 그쪽으로 도망을 와서 뛰어내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낙화암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