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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상주의] 인상주의와 마네
    인상주의와 마네덕성여자대학교 인터넷정보공학04032005 양승아목차Ⅰ. 서론Ⅱ. 인상주의와 탄생배경Ⅲ. 인상주의 전개 상황Ⅳ. 인상주의 특징Ⅴ. 인상주의 작가 - 마네Ⅵ. 마네 작품분석Ⅶ. 미술사에 있어서 종?횡적 분석Ⅷ. 결론Ⅰ. 서론종래의 아카데믹하고 근엄한 양식의 회화와는 달리 거친 붓터치와 빛의 광선을 표현한 색상을 이용한 새로운 미술양식이 나타났다. 이는 바로 인상주의 이며 19세기 당시 많은 젊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새로운 양식은 바로크등 종래의 웅장하고 교과서적인 미술 양식에서 벗어나 추상화등 다양하고 새로운 표현양식의 발견에 발판이 되었다. 또한 이는 동양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하엿다. 이러한 인상주의에 대해 살펴보자.Ⅱ. 인상주의와 탄생 배경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주로 1860년대-9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유파의 하나이며 이를 추진한 화가들을 인상파라 한다. 이들이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데 있었다.당시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따라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연계의 모든색은 빛과 대기에 의해 생겨나고 변화하므로 물체 고유의 색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 분해에 의해 얻을수 있는 7가지 색에 한정하려 하였다.인상주의 운동의 시작은 1863년 낙선자 전람회 (Salon des Refuses)에 출품한 과 1865년 살롱에 출품한 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마네를 중심으로 한 청년화가들이 카페 게르보아(Cafe Guerbois)에서 모여 새로운 회화에 대한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인상파 활동이 탄생되었다. 이때의 시기를 대체로 1868년 부터 1870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1870년 프로이가,조각가,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 제1회전을 열었다.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라는 풍경화의 제명을 따서 르루아라는 미술기자가 '인상파전람회'라고 다분히 조롱 섞인 기사를 에 실은 것이 '인상파' 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Ⅲ. 인상주의 전개 상황인상주의가 이룩한 혁신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몇 가지의 새로운 기법으로 뒷받침되어 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이래의 다양한 노력이 체계화된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인상파의 전위적 움직임이 18세기 말경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의 전성시대를 이어받아, 18세기 후반에는 특히 영국에서 풍경 그 자체의 미와 위대함을 그리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 중에서 J.M.W. 터너·J. 컨스터블·R.P. 보닝턴 등의 유채(油彩)와 수채의 스케치에는 야외에서 직접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빛의 상태가 묘사되어, 인상파의 초기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것들은 습작의 단계에 그쳤고, 실제 유채작품의 제작에서는 대폭 수정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아카데미의 성채에 틀어박혀 있던 신고전주의의 풍경화가들까지도 인상파를 연상하게 하는 참신한 스케치를 보여주었다. P.H. 발랑시엔은 저서 《실용원근법입문(1800)》에서 자연의 모든 계절·시간·빛의 상태를 분석하였을 뿐 아니라, 구름과 산을 덮는 안개 등을 단시간에 포착한 유채스케치를 남겼다. 이와 같은 스케치 단계에서는 일찍부터 야외의 밝은 빛을 보이는 대로 그려내려고 노력하였는데, 그것을 실제 완성작품에 부분적이나마 응용한 화가가 F.V.E. 들라크루아이다. 그는 베네치아파 연구를 통해서 밝은 색채를 추구하였으며, 색채를 특별히 밝게 보이게 하기 위해 보색을 색반(色斑)으로 늘어놓는 연구를 하였다(일설로는 컨스터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J.B.C. 코로는 야외에서 제작할 기회가 많아서 화면이 밝은 뉘앙스로 차 있다. 독립된 자연을 갖가지 양상으로 다룬 바르비종파는 자연관찰의 측면에서 인상파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젊은 그들을 격려하고 지도한 인물, 빛이 충만하고 대기가 변화하기 쉬운 장소에서 정확한 자연관찰을 한 뒤 밝고 생생한 화면을 완성하였으며, 특히 부댕은 소년시절의 C. 모네를 직접 지도한 스승이었다.인상파가 그룹활동을 그만둔 뒤에도 그들은 각기 독자성에 알맞는 제작활동을 해나갔다. 즉 모네는 빛의 변화를 더 순간적으로 포착하기 위해서 대상을 한정하고 때로는 구도를 고정시켜 상이한 빛의 상태를 나눠서 그리는 연작의 세계로 들어갔으며, 르누아르는 한때 고전주의적인 윤곽선의 부활을 지향하였으나, 얼마 뒤 벽에 부닥쳐 다시 나부(裸婦)를 중심으로 한 풍요한 색채의 세계로 돌아갔다. 드가는 인체나 말의 순간적인 움직임의 표현과 그 결과 생기는 특수한 구도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세잔은 목욕하는 사람들과 풍경을 공간의 중심에 구축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피사로만이 혼자서 다음 세대와 함께 신인상주의 기법을 받아들였다. 한편 인상파의 영향은 대단히 폭넓고 다양하며 또 깊게 오늘날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기술하는 것은 곤란하다. 회화기법에서 <인상파적>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주로 화필의 터치를 남기면서도 밝은색을 나란히 하는 기법, 또는 대단히 빠르고 큰 화필(畵筆)의 터치기법(touch技法)이다. 또 빛의 느낌으로 가득찬 밝은 화면을 뜻하기도 한다. 후세에 끼친 영향으로, 그들이 사용한 유달리 밝은 색채는 모든 유파의 회화에서 사용 이전과 이후의 화면의 빛깔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프랑스에서는 1850·60년대에 태어난 화가의 대부분이 인상파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카데미즘 이외에도, 이 운동에 대한 비판은 같은 시대에 이미 있었다. 인상파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지나치게 나타냄으로써 정신적 내용을 간과하고 있다는 입장(G. 모로·르동)은 상징주의라는 경향을 낳았고, 또 후기인상파라는 일련의 작가들도 이 반성 위에서 일어섰다. 또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본능적인 부분을 초월하고자 과학적·이론적으로 이것을 체계화하였다.인상주의의 경험적·본능적 특성을 계승하면서, 색채당연히 원색 내지 순색으로 분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켄버스 위에서 색을 직접 혼합하지 않고, 화면에 순색 또는 원색의 작고 균일한 크기의 점을 찍어 순도 높은 빛과 밝음을 얻어 혼색 효과를 내는 디비조니슴이 신인상주의의 특징적 기법이다. 쇠라의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6)》는 이러한 신인상주의 화법의 특징을 살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는 C. 앙리의 상징주의적인 미학에 공감하여 그것을 실제작품에 실현시킴으로써 신인상주의를 보다 완벽하게 확립하려 했으나, 1891년 그의 죽음으로 이 운동은 쇠퇴하게 되었다. H. 크로스·C. 앙그랑·A. 뒤부아피·M. 뤼스 등이 쇠라의 기법에 공명하여 이 유파를 이었다. 과학성과 이론성의 추구라는 특성은 큐비즘과 미래파에 영향을 주었다.빛을 색채로 환원시키는 인상주의의 감각 추구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방향을 개척한 것이 후기인상주의이다. 이는 영국 비평가 R. 프라이가 인상주의 이후에 다양한 양식들을 표현해 낸 작가들에게 편의상 붙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주로 세잔·고갱·V. 고흐 3명을 가리키는데, T. 로트렉·르동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세잔은 형태감각이 결여된 인상주의의 화면에 대해 견고하고 질서감 넘치는 화면을 구축하고자 하였고, 고갱은 인상주의의 섬세한 필치 위에 강력한 장식성과 심리적인 화면구성으로 상징주의적인 정신성을 표현하려 했으며, 고흐는 격렬한 감정으로 밝은 색채를 철저히 주관화하여 화면에 쏟아부음으로써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세잔을 제외한 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색채와 형태를 상징적으로 이용하는 상징주의회화와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데, 이는 <인상파 이후>의 화가들이 의미내용의 상징화를 목표로 설정한 데 기인한다. 즉 객관적 빛의 묘사에 치중하는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그들은 주관적 내면세계의 형상화를 추구하였던 것이다.Ⅳ. 인상주의 특징인상주의 미술의 특징은 크게 색채, 구도법, 주제로 나누어 살펴볼수 있다.19세기가 되어 색채와 빛의 원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색이란 3원색 중의 2가지를 섞으면 새로운 색이 되는데, 섞을수록 명도를 잃게 된다. 따라서 어떤 색을 보다 밝은 상태로 만들려면, 화면 위에 점묘(點描)로 2색을 나란히 찍고(디비조니슴), 조금 떨어져서 보면 이것이 혼합되어 보이므로(시각혼합), 필요한 색을 보다 밝은 상태로 얻게 된다. 이처럼 밝은 화면을 얻기 위한 집요한 노력은 그들이 야외제작을 한 결과였다. 즉 빛속에는 원래 검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빛이 풍부한 야외에서는 모두가 밝게 보인다. 따라서 사물에는 각각 고유색(local color)이 있다는 종래의 사고방식은 타파되고, 빛이 물질에 반사되어 그것이 눈에 들어올 때 색이 보인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구도법에서 그들은 사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진은 네모난 틀로 시야를 잘라내는 식으로 대담한 구도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측면과, 대상을 <영원한 상(相)에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발상이 인상파의 대상을 포착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주제의 선택에서는 1세대 전의 사실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종교화·신화화·역사화에 등을 돌리고, 그들은 특히 같은 시대의 풍속과 초상·정물 등의 시민적 장르, 주변의 흔한 풍경 등을 주제로 채택하였다.Ⅴ. 인상주의 작가 - 마네마네(1832.1.23-1883.4.30)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을 시작했으나 학교보다 루브르,피렌체,마드리드등의 미술관에서 직접 대가의 작품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따라서 외국의 전통적 화가인 네델란드의 할스( Frans Hals), 스페인의 벨라케즈(Velazquez) 및 고야(Goya)등의 작품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그는 인상주의 운동의 선구자로서 그의 작품은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그러나 인상파를 규정하는 미술사가는 인상파 화가에서 마네를 분리하기도 한다.이는 그가 ,, 등의 인상파 화가들이 추구하던 빛에 의한 색채의 변화에 별로 흥미가 없었고 인상파 전람회에도 출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아
    인문/어학| 2005.09.13| 7페이지| 1,500원| 조회(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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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 헬레니즘 철학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신플라톤주의)
    Ⅰ. 헬레니즘 시대Ⅱ. 헬레니즘 철학의 발생Ⅲ. 헬레니즘 철학의 발전과정Ⅳ. 헬레니즘 철학 사상ⅰ.에피쿠로스학파ⅱ. 스토아학파ⅲ 신플라톤주의목차Ⅰ. 헬레니즘 시대‘고전(古典)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사상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 이같은 의미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 대왕이 갑자기 병사하자,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를 분할하였다. 입소스전투(BC 301), 쿠르페디온전투(BC 281)것이다. 기원전 323년에 그 위대한 정복자가 죽은 이후에는, 그리스 문명보다는 헬레니즘(즉 국가적 그리스와 반대되는) 문명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알렉산드로대왕이 보기에 그리스인과 ‘야만인’을 엄밀하게 구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도시국가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제국의 견지에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동방 세계가 서방세계의 영향에 개방되었던 반면, 그리스 문화도 그 자신의 쪽에서 그 새로운 사태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트 등은 더 이상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야만인들의 미개함에 대해 공동으로 느끼는 문화적 우월감으로 결속된 자유롭고 독립적인 단위체가 아니었다. 이들은 보다 거대한 전체로 합병되었고, 그리스가 로마제국에 속하는 하나의 지방에 불과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그 새로운 정치 상황은 철학에도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그리스 도시국가의 사람들이었고, 이들에게는 개인은 도시와 e시에서의 삶으로부터 분리하여 생각될 수 없었다. 개인이 목표를 달성하고 선한 삶을 영위했던 것은 도시 안에서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도시국가가 더 거대한 범세계적 전체로 통합되었을 때, 스토아주의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세계 시민이라는 이상을 지닌 세계주의뿐만 아니라 개인주의 역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사실상 세계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이 두 요소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왜냐 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대로의, 작으면서도 모든 것을 포괄하던 도시국가의 삶이 붕괴되고, 시민들이 훨씬 거대한 전체 안으로 통합되었을 때, 개인은 어쩔 수 없이 도시국가 안에서의 정신적 지주에서 풀려나 홀로 표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주의적 사회에서 철학은 스스로의 관심을 개인에 집중하여, 그 개인이 더 이상 비교적 자그마한 도시 가족 안에서가 아니라, 거대한 사회 안에서 영위해야만 했었던 삶의 지침에 대한 그 개인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의자들은 퀴레네주의자들의 윤리학을 빌어왔다.이러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은 특히 로마시대에 전개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학파들에게서 두드러졌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처럼 사색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색가들이 아니라 주로 실천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로마인들은 개개인의 품성을 강조했으며 사변은 그들에게 다소 낯설었다. 그리고 그리스 공화국의 과거 이상들과 전통이 사라진 후, 로마 제국에서는 어떤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독자성에 기초한 행위와 원리 사이에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인생이라는 바다를 헤치고 자신의 길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해줄 행위 규범을 개개인에게 제공하는 것이 바로 철학자의 임무였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에 알려진 대로의 정신적 지도자들의 임무와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는 철학자-지도자가 등장했다.이처럼 실천적인 것에 관심이 집중되었다는 것, 즉 철학이 삶의 표준을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는 사실로 인해, 철학은 자연스럽게 헬레니즘세계의 교양을 갖춘 계층에 폭넓게 확산되었으며, 따라서 일종이 대중 철학이 되었다. 로마 시대에 철학은 점차적으로 정규 교육과 정의 일부가 되었으며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제국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기 시작했을 때, 철학이 기독교의 라이벌이 되었던 것은 이런 방식에 의해서였다. 실제로 철학은 최소한 어느정도까지는 인간의 종교적 욕구와 열망을 만족시키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통속적인 신화에 대한 불신이 만연되어 있었고, 이런 불신이 지배적이었던 곳에서 종교가 없는 삶에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음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즉 동방에서 제국으로 유입된 많은 이교(異敎)들 가운데 하나며, 사무적인 태도를 지닌 국가의 공식적 종교보다는 인간의 정신적 열망을 분명히 더 잘 만족시킬 것 같은 이교에 가입하던가, 아니면 그러한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철학에 의지하는 것. 따라서 스토아주의와 같이 윤리설이 지배적인 체계에서 우리는 종교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나, 반면에 고대철학의 마지막 꽃인 신 세속적인 제국에 대한 어떤 독립성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 두 태도가 서로 융합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어떤 때는 윤리적 요인이 강조되었고 어떤 때는 종교적 요인이 강조되었다. 한편 신(新)플라톤주의에서는 포괄적인 종합이 시도되었는데, 윤리적인 것이 종교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중요성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Ⅲ. 헬레니즘 철학의 발전과정헬레니즘 철학의 발전은 몇 가지 시기로 구별된다.제1시기는 기원전 4세기말경부터 기원전 1세기 중엽에 걸쳐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스토아철학과 에피쿠로스철학이 창시되었다는 것인데, 그 철학들은 행위 및 개인적 행복의 획득을 강조하며, 자신들 체계의 우주론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귀를 기울인다. 이 ‘독단적’체계들에 맞서서 퓌론과 그 추종자들의 회의주의가 있었는데, 이런 회의주의에는 중기 아카데미아와 신 아카데미아에서의 회의적 기질이 더해졌음이 틀림없다. 이 철학들의 상호 교류는 어떤 절충주의로 귀착되는데, 그것은 중기 스토아, 페리파테토스학파 그리고 아카데미아가 각각 서로의 이설(理說)들을 절충적으로 융합시키려한 경향에서 드러났다.한편으로는 절충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주의가 제2기로 계속 이어지는데, 이 시기의 특징은 철학적 ‘정통성’으로의 복귀다. 학파의 창시자들과 그들의 생활, 저작, 이설 등에 커다란 관심이 모아지는데, 철학적 ‘정통성’으로의 이러한 경향은 계속되는 절충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예를 들어 옛 철학자들의 저작을 편집하고, 그것들에 대한 주석을 달고 해석을 하는 것과 같은 학문적 연구에서도 커다란 결실을 보았다. 이러한 작업에서 알렉산드리아인들은 탁월성을 발휘했다.그러나 이런 학문적 관심만이 제2시기의 유일한 특징은 아니다. 학문적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종교적 신비주의의 경향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점점 더 강해진다. 이러한 경향은 학문적 경향, 즉 생산적인 사색의 실종과 그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구나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적 사색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했다.Ⅳ. 헬레니즘 철학 사상ⅰ.에피쿠로스학파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사모스섬[島] 출생이다. 35세 전후에 아테네에서 학원을 열었다. 그 학원은 ‘에피쿠로스 학원’이라 불렀고, 부녀자와 노예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각자 형편에 맞는 기부금을 내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함께 우정에 넘치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문란하지 않은 생활(아타라쿠시아) 실현에 노력하였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원자론(原子論)에 의하면 참된 실재(實在)는 원자(아토마)와 공허(케논)의 두 개뿐으로서, 원자는 불괴(不壞)의 궁극적 실체이고 공허는 원자가 운동하는 장소이다. 원자는 부정(不定)한 방향으로 방황운동을 하는데, 이것에 의해 원자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나서 이 세계가 생성(生成)한다. 그러므로 세계에 있는 모든 것, 즉 인간이나 신(神)들이나 모두 원자의 결합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인식(認識)이란 감각적 지각에 지나지 않고 물체가 방사(放射)하는 원자와 감각기관과의 접촉에 의해 성립한다.이 자연학에 의하여 그는 죽음과 신들에 대한 공포를 인류로부터 제거하려 하였다. 죽음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산일(散逸)이며, 죽음과 동시에 모든 인식(자기)도 소멸한다. 신들도 인간과 동질의 존재이며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며, 명예욕·금전욕·음욕(淫慾)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공공생활의 잡답(雜踏)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것, 빵과 물만 마시는 질박한 식사에 만족하는 것, 헛된 미신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우애(友愛)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것 등이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주의의 골자였다. 「자연에 대하여」등 300여 권에 이르는 저서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산일되고 단편만이 전한다.에피쿠로스 학파는 에피쿠로스의 학설을 신봉한 학파이다. 에피쿠로스가 죽은 뒤 이 학파는 약 600년간 계속되었으나, 그동안이다.
    인문/어학| 2005.06.20| 7페이지| 1,500원| 조회(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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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독서세미나] 멕베스 평가B괜찮아요
    교양독서 세미나 - 멕베스1. 맥베스 부인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맥베스 부인은 맥베스의 살인을 실행하도록 구체적으로 돕는 인물로 그녀는 스스로 악령들을 부르며 양심의 가책이나 연민의 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먹는다. 그러면서도 살해의 원인을 술 취한 시종들에게 돌리는 모습에서 남의 탓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악한 모습을 그대로 본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해를 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욕망이 달해도 만족이 없는 한 살인을 하고도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없다’ 면서 인간의 만족할 수 없는 끊임없는 욕망추구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허무함을 느끼며 손의 피비린내를 맡으며 미쳐서 자살한다. 그리고 맥베스는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듣자 ‘눈앞의 환상밖에 보이지 않는다’면서 그의 내면 세계는 혼돈상태에 빠지게 된다. ‘빛을 감추라. 나의 검고 깊은 욕망을 엿보지 말라’면서 그의 마음은 어둠, 혼돈, 파괴, 죽음 등 삶의 부정적인 요소들로 가득하게 된다. 이미 그의 마음속은 왕의 근친이며 집주인으로서 살인을 할 수 없다는 선한 생각은 잠시 일뿐 살해해 버리고 만다. 빛을 두려워하고 현세적인 보복이 두려워서 공포에 떨다가 끝내 비극적 파멸을 겪는 인물이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 말고 그의 부인인 레이디 맥베스가 주인공인 연극이나 음반도 있다. 극단 물리의 ‘레이디 맥베스’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레이디 맥베스’는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맥베스보다는 그를 막후 조종했으나 스스로 죄의식에 빠져 괴로워하는 맥베스 부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범죄심리와 죄의식을 연극적 형식을 빌려 비틀고 뒤집는다. (국민일보 2002.6.12일자)- 또한 오페라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가 있다.3. 작품속에 나타난 밤의 이미지는?어둠은 자연 현상에서의 어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세계의 어둠을 의미한 다. 어둠은 흔히 상징하는 것처럼 악의 세계와 부정적인 사건들을 상징하고 있다. 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밤, 어둠의 상태에서 악행을 강행하거나 피해를 당하게 된다. 죽음, 죄, 악을 나타내는 어둠과 생명, 덕, 선을 나타내는 빛이 대립되어 나타나고 있다.
    인문/어학| 2004.10.15| 1페이지| 1,500원| 조회(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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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독서세미나] 서민귀족
    독서세미나(서민귀족)1. 주인공 주르댕이 다른 인물들과 맺는 관계 분석- 음악?무용?검도?철학 선생과의 관계: 이들은 진정한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가 아니라, 어쩌면 서로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무엇을 교환하는 것뿐인 소비자, 생산자와 같은 관계를 이루고 있다. 즉, 주르댕이 수업료를 지불하면 선생들은 이에 대해 귀족이 영위하는 삶의 부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들이 주르댕에게 가르치는 것들은 모두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수업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진행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르댕 자신이 귀족이라고 느끼도록 하나, 실제로는 그가 귀족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도랑트와의 관계: 주르댕은 귀족신분인 도랑트와 친구가 된 사실에 기뻐하며, 그의 도움을 빌려 후작부인인 도리멘느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그러나 도랑트는 주르댕을 절친한 친구로 대하는 척하고, 그의 재물을 이용하여 도리멘느를 자신의 아내로 만든다. 결국 도랑트는 어리석은 주르댕을,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했다는 것이 된다.아내와의 관계: 주르댕의 부인 역시 부르주아이지만 신분상승의 욕망을 가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녀는 주르댕의 생각과 태도 등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고쳐주려 한다. 그러나 주르댕은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멘느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상태이므로 부인의 존재를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니콜, 코비엘과의 관계: 표면상으로 보면 니콜과 코비엘이 주르댕의 하위 계급으로써 명령과 지배를 받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내용면에서 볼 때에는 니콜이 직접적으로 주르댕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코비엘이 현명한 꾀로 주르댕을 속임으로써 주르댕이 그들의 밑에 깔려 조종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여기의 등장 인물들과 주르댕의 관계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점은, 그 인물들은 주르댕의 신분 상승 욕망이 어리석고 잘못된 것임을 나타내 준다는 것이다.2.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부르조아 귀족의 특성도랑트 백장은 시대를 반영하는 몰락 귀족으로, 주르댕의 돈을 빌리고 감언이설로 환심을 사지만 정작 주르댕을 속이는 이중인격의 인물이다. 또 한 명의 귀족인 도리멘느 후작부인은 돈이나 다이아몬드 반지 따위를 중요시 하지만 '당신의 낭비는 막고 싶어요. 당신이 파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죠.'라는 대사에서는 인간적인 모습도 비취는가 싶지만 귀족들의 사치스런 행각은 여전히 일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귀족을 거울처럼 따라하기에 여념이 없는 주르댕의 생활을 통해서도 당시 귀족들의 생활을 살펴 볼 수 있다. 철학과 검술,음악 무용등을 배우며 음악회와 무도회를 여는 것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주르댕의 부인은 부르주아에 만족하는 인물이다. 또한 주르댕의 딸 뤼실과 그의 연인 클레옹트도 돈과 명예, 계급보다는 인간다운 삶과 사랑을 중요시한다. 특히 부인의 대사중 "당신은 옛날부터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였죠. 정말 못 살겠어요. 나는 나의 권리를 지키겠어요. 저 분과 같이 있게 되지 못할 바에는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 드리렴" 이라는 대사에서 이런 사고 방식이 잘 드러난다.
    인문/어학| 2004.10.15| 1페이지| 1,500원| 조회(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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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독서세미나] 유토피아 평가C아쉬워요
    독서세미나(유토피아)1. 16C 영국의 역사적 상황과 이책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16C 영국 - 르네상스 시대모어 시대의 영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유토피아라는 소설 안에서도 라파엘의 지적으로서 다루어지는 인클로저라는 것이다. 그 이전의 농민들의 삶이 무척 유복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이었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심각했다. 영국과 주변 국가에서 모직물 공업이 발전해서 양모 값이 크게 오르자 농사를 지어 곡물을 수확하는 것보다는 양을 길러서 양모를 시장에 파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한 지주 귀족들은 농민들을 다 내쫓고 이 땅에 울타리를 쳐서 둘러막은 다음 양떼를 기르게 된 것이다. 이전에 수많은 농민들을 먹여 살리던 땅에 이제 한두 명의 목동만 있으면 충분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생계를 잃게 된 농민들은 품팔이 농민이 되든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도시로 흘러 들어가 도시 빈민이 되었고 그러다가 결국은 도둑이 되어 교수대에 매달리는 경로를 밟게 된 것이다. 근대의 발전은 사회에 많은 부의 생산을 가능케 했으나, 그 성과는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가고 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더 심한 빈곤에 빠지게 되었다. 부의 증가와 대중 궁핍화는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또한 당시 1455년에서 1485년에 걸쳐 일어났던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은 영국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 전쟁은 랭카스터, 요크의 두 귀족가문이 왕위쟁탈을 위해 약 30년 간 계속했던 전쟁으로, 1485년 랭카스터 가의 헨리 7세가 겨우 왕이 되면서 진정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전쟁, 특히 내전은 수많은 음모와 흉계, 그리고 온갖 부조리한 일들이 날뛰며 국가를,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든다. 토마스 모어는 1477년, 그 전쟁의 말기에 태어났다. 물론 모어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이미 전쟁이 끝난 뒤지만, 사회에 남겨진 혼란과 상처가 사라질 만큼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이런 오랜 전쟁은 귀족들의 세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튜더 왕조의 절대왕정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3. 모어가 제시한 유토피아의 좋은점과 한계? 노예제도죄인들이나 노예들은 시민이 하지 않는 유토피아의 온갖 힘들고 굳은 일들을 도맡게 된다. 고된 일이나 더러운 짐승의 도살은 자유민들의 마음의 평정과 자비심을 잃게 한 다는 명목으로 금지되고, 그 모든 일들은 노예가 하게 된다. 결국 유토피아에서의 안락한 삶은 그곳에 쓰여지는 언어처럼 지극히 고대 그리스 적인 것이었다. 유토피아인 들도 노동은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은 노예에게 맡겨버리는, 대속적인 것이었다. 다만 이 곳의 계급은 상당히 유동적인 것이어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자유민일 지라도 노예가 되고, 노예라 하더라도 성실히 일하고 죄를 뉘우친다면 다시 자유민이 될 수 있다는 첨가설명이 붙어있다.
    인문/어학| 2004.10.15| 2페이지| 1,500원| 조회(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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