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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의 시대의 종말
    신앙의 시대의 종말기독교는 예수의 순교 이후의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 혹은 묵인을 당하면서, 빠른속도로 성장했다. 성장에 원동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내세에 대한 제시와 신의 비인격화로 압축된다. 마침내 기독교를 믿던,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great)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전투에서 막센티우스군을 격파하고, 313년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공인은 기독교를 기성의 종교와 같은 종교로 인정하겠다는 공인이다. 하지만, 그이후의 계속되는 기독교황제들의 등장은 빠른속도로 로마제국을 개종시켰고, 결국에는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great 346~395 재위 379~395)황제의 의해 정통기독교 사상외의 것은 금지되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남게 된다.처음에의 교황은 다만, 로마시의 주교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성직자들과 신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세속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기독교화는 기독교의 양적, 질적인 팽창을 가져왔고, 로마시의 주교는 엄첨난 양의 교회 수입의 주인공으로 부상, 곧 로마사회에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된다. 또 로마의 주교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예수가 인간 영혼을 베드로에게 위임했으므로, 자신들이 신자들의 정신생활의 관리자라고 주장한다. 로마제국의 멸망이후에 정착한 게르만족을 빠르게 개종시키고, 그들의 왕과 황제의 권한에 신성의 지지를 추가하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시킨다.많은 수입과 토지는 종교를 발전도 시키지만, 빠르게 부패시키는 양날의 검이었다. 때는 910년 세르기우스 3세가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두 명의 전임자들을 살해했고, 상당히 불명예스러운 상황 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교황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 지방 낭트와 캥패르에서는 성직 매매가 이루어졌고, 주교들은 자신의 직책을 아들들에게 물려주는 타락해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개탄스러운 상황은 약한 황제권과 미약한 왕권이 기독교에 대한 견제를 할 수 없는 것이 한다섯명의 수도원장들이 200백년동안 권위를 지속시킨다. 그 사이 개혁공동체의 우선의 과제는 9,10세기에 자주 혼란에 빠지던 수도원의 경제적인 생활능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경제 회복은 매일 일곱 번의 기도와 성무일도를 통해서 신의 업적에 헌신했던 클뤼니 수도사들의 생활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노동이나 사역은 일체 이루어지지 않는, 다만 신을 위한 기도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클뤼니 수도원이었다. 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문제에 대한 어떠한 의구심은 존재하지도 갖지도 않았다. 이런 현실에 대한 괴리감으로 인하여, 클뤼니수도사들은 죽은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죽은 자들에 대한 추모를 위해서 많은 이들이 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이런 자선 횟수의 증가는 수도원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아마도 개혁적인 공동체의 몰락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성이 그들을 이끌었고, 개혁적인 클뤼니(910), 시토(1098), 프레몽트레(1120)는 그리스도적인 이상향인, 신을 위한 국가를 원했다. 이 관념 세속에의 신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던, 교황들의 힘을 강화시켰다. 내부의 체질의 개선으로 힘을 얻은 교황은 외치에 힘을 쓴다. 목적은 교황청이 주도하는 유럽으로 파문당한 황제나 더 나아가 부패한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그리스도적인 통치이념을 빼앗는 것이었다.1073년 수도사 힐데브란트(Hidebraud)가 교황의 자리에 올라 그레고리우스7세가 되었다. 그는 키는 작았지만, 매우 인상적인 사람으로 주교와 귀족들이 많은 수가 그의 편에 섰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자리에 오르면서 이런 선언을 한다. 그리고 1075년에는 당시 가장 주교에 대한 권한이 막강하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4세는 교황은 즉각적으로 하인리히를 파문한다.이에 노르만족과 토스카나의 마틸데(Matilde)와 롬바르디아 도시들과 이탈리아 전역이 교황의 편에 선다.1077년에 열린 독일 제국회의에서는 귀족들이 황제의 앞에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교황이 다음 회의가 열리는 아우. 그는 다시 파문 되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대립교황을 내세우고, 대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한다. 로마의 성문앞까지 왔으나 말라리아의 창궐로 후퇴하고, 3년 뒤인 1084년 그는 로마를 함락시키고, 교황이 숨어있던 산탄젤로 성을 포위한다. 그렇지만, 신성 로마제국의 영향력의 증대를 탐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던, 노르만 공국과 로베르 키스가르의 도움으로 살레르노로 구출되어 얼마 후에 거기서 숨을 거둔다.그레고리우스, 빅토르(Victor1086~1087)3세가 사망하고, 1차십자군을 출정시키는 우르바누스(Urban nus1088~1099)2세가 교황이 된다. 우르바누스는 타고난 웅변설을 사용하여, 1095년 11월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간 성묘를 되찾고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길을 다시 열자고 열변을 토하며, 모든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십자군의 파병을 제창한다. 그리고 교황은 십자군에 참여하다 목숨을 잃는 자들에게, 보상책으로 전적인 면죄를 약속한다. 전적인 면죄라는 것은 전례가 없었던, 색다른 이야기였다. 원래 그리스도교는 정치성을 내포한 종교, 즉 인간의 공동체적인 삶, 비폭력적인 공동 생활에 토대를 둔 종교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 교도들이 폭력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무력에 의하여 손상된 질서를 회복할 수 했던 세가지의 조건을 마련할 때까지 그리스도 교도들은 애초보터 전쟁을 거부했다. 이 세가지 조건이라는 것은 정당한 이유, 정당한 의도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설명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올바른 정치권위를 의미했다. 전적인 면죄는 십자군 전쟁이 종교적인 색체가 거의 없는 레콩키스타와 분류가 되는 동시에 이슬람의 세계관인 지하드와도 많이 달랐다. 십자군은 그리스도교적인 사상을 전파하기 공식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전혀 의무성을 띠지 않았다. 다만 개개인의 자발적인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가장 종교적인 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전례가 없는 종교성 이었다.하인리히가 1106년신의 교황이었던, 하드리아누스4세에 의해 황제의 관을 썼다. 그런데 바르바로사가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말의 고삐 사건으로 서열문제의 해묵은 싸움이 살아났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이후에 알렉산데르3세는 황제를 모욕했다. 그러자 바르바로사는 대립교황을 빅토리우스(Victorius)4세를 대립교황으로 세우면서, 교황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났고, 이탈리아는 불바다가 되었다. 교황은 이리저리 쫓기다가 결국에는 프랑스로 도망갔다. 그러나 알렉산데르는 금세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바르바로사는 1166년에 바르바로사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이탈리아를 공격한다. 이번에 교황은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가로 피신했다. 바르바로사는 전염병과 롬바르디아 도시들의 강한 반발로 다시 회군했다. 1174년은 바르바로사는 교황을 옹호하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쳐부수기 위해 이탈리아로 3차 원정을 감행한다. 1176년 황제군과 롬바르디아 동맹군은 레냐노에서 격돌하여, 황제군이 대패한다. 1177년 7월 황제 바르바로사는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에서 엄숙한 화해의 의식을 진행되는 가운데 교황 알렉산데르의 발 앞에 엎드린다. 황제는 성베드로의 유산과 세속적인 권리에 대한 요구를 모두 철회하였다. 그리고 1183년에 콘스탄츠 조약에서는 롬바르디아를 통치하는 권한을 포기하고, 그들에게는 자치권이 부여가 되었다. 라지만, 황제는 롬바르디아 도시에 자신의 세력을 심고, 시칠리아 노르만 왕조의 상속녀 콘스탄체(Constance)공주와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를 1186년 결혼 시킨다. 이렇게 교황을 압박하던, 그는 어이없게 십자군에 출정하여, 소아시아의 강물에서 익사한다. 1189년의 일이다.횟수를 거듭해가는 십자군과 그와 아울러 진행되던 수많은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12세기 중반부터 십자군의 대한 여론이 유럽을 휩쓸었다. 12세기가 끝나기 전에 십자군의 모집과 조직과 방향에 대한 책임은 교황청이 떠 맡게 되었다. 교황청은 십자군을 위한 방대한 조직으로 개편되어, 십자군세와 면죄부에 의한 모금에 상업적부여함으로써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유럽 평신도들이 양심과 지성에 모욕을 주는 타락한 십자군 이상에 강하게 반발할수록, 교황청의 법률가의 준칙은 더욱 비타협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십자군 전쟁에 위한 정당 근거를 발견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거룩한 전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입증하려고 하면 할 수록, 서로간의 비 타협적인 골은 깊어만 갔다.십자군들의 형편없는 업적과 평신도들의 강력한 반발은 교회의 영향력을 흔들고, 이에 교회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후방 십자군의 역할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즉 십자군들은 더 이상 성지로만 나가지 않고, 독일의 동부의 슬라브족(웬드의 십자군 1147년)과 스페인의 무어인족, 알비파(알비파 십자군 1209-1228)를 공격한다. 알비파는 10, 11세기에 개종된 보스니아 지방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이원론 파인 보고밀파(Bogomiles 창시자의 보고밀 신부의 이름에서 유래된 이단 종파. 이원론을 바탕으로 하여 물질계는 악마가 만든 것으로 보고 결혼, 육식, 음주를 배격했다.)의 영향을 받아 12세기말에 이원론적인 교리가 프랑스나 롬바르디아에서 천국을 죄로 가득찬 현세와 분류하기로 시작했고, 이후에는 순회 설교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추종자의 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들 사이 순수한 자들이라는 의미의 카타리파(Cathari 금욕주의와 이원론 적인 세계가 특징으로 프랑스 남부 툴루즈를 주변으로 활동한 분파는 따로이 알비파라고도 부른다.) 카타리파의 성직자들은 당시의 타락한 성직자들과 달리 직공으로 일하거나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도들의 규범에 본받아 청빈하지만, 정열적인 삶을 삶았다. 처음에 교회에서 이들에게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교회는 많은 개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 다른 성과를 거두기 못하고 있을때, 리옹의 상인 발도의 내적 회심의 체험(발도의 내적인 회심이라는 것은 성직자들만 볼 수 있었던,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해서 보면서, 성서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과 가난한 자들에게 소.
    인문/어학| 2004.06.13| 6페이지| 1,000원| 조회(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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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사] 로마군의 전술적인 완성 평가A+최고예요
    로마군의 전술의 완성BC 753년에 로물루스(Romulus BC 753~716)에 의해 로마는 건국되었다. 로마라는 도시국가의 시작은 북쪽의 에트루리아와 남쪽의 그리스 식민지의 사이의 힘의 공백지대에서 태어났고, 주변은 온갖 적대적인 부족들의 근거지 였다. 당연히 로마의 시작은 로마를 병합하려고 하는 주변의 도시국가나 부족과의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건국후 B.C 753년 부터 B.C 270년까지 로마는 북쪽으로는 루비콘 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무려 500백년에 걸친 이탈리아 통일이었다.B.C 270 이후의 로마는 급격하게 팽창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3차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로마는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그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의 유산인 시리아, 마케도니아 등을 격파하고 소아시아를 영유하고, 갈리아, 히스파니아, 아프리카, 브리타니아를 정복하였다. 로마의 대부분의 영토는 정치체제가 제정으로 바뀌기 전에 이미 완성되었고, 오현제중의 트라야누스 시대에는 다키아와 파르티아를 공격하여 영토의 최대판도를 보여 주었다. 이 정복의 바탕에는 강한 로마군이 있었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그리스의 군사제도BC 700 년에서 650년에 이르는 무렵의 어느 시기에 그리스의 국가들은 고대 전쟁에 나름대로 기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호플리테스(Hoplite)라 불리는 것이었다. 호플리테스는 그것이 처음 생겨진 기원전 7세기부터 펠레포네소스 전쟁이 끝나는 5세기 말엽까지 점진적인 개선, 특히 장갑부분에서 이루어졌으나, 기원전 700~400의 300년 동안 호플리테스의 전술적인 배치는 경보병, 척후병, 기병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홀로 작전을 수행하였다. 호플리테스의 빽빽한 창의 숲은 전쟁으로부터 영웅적인 병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병사들은 죽음으로써도 돌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들은 두꺼운 청동제의 갑옷으로 려는 노력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호플리테스의 대형은 8열을 기본으로 하여 전장의 상황에 따라 변하였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진형안에 적병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최전방의 열을 견고히 유지하려고 했다. 이들 호플리테스의 전투는 평지에서만 가능했고, 구릉지대에서는 이러한 견고하고 밀집적인 진형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 같은 전투의 방법은 대단한 훈련, 군기, 용기 등을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추격전이 불가능했고, 전투에서 승리를 하더라도 적군에 대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영토를 병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도시국가와 도시국가간의 국지전의 성격이 강하였다.알렉산드로스대왕 (Alexsandros the great BC 356-323 재위 336-323)마케도니아군은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아니라 필리포스의 군대였다. 군대를 창설하고 20년 이상을 거느린 사람은 필리포스(Philippos BC 382-336 재위 359-336)였으며, 알렉산드로스는 단지 필리포스의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필리포스는 종래의 호플리테스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군대를 만들어 놓았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전법은 장비와 전술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전통적인 호플리테스와 다른점이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필리포스의 병력중에 가장 키가 크고 몸이 튼튼한 자들을 선발하여 팔랑기테스라는 용병 부대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또한 창의 모양도 그대로 였지만, 길이는 두배 이상으로 무게는 6배이상으로 무거워졌다. 이 장창은 두손으로 잡아야지만 제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호플리테스가 쓰던 1미터 길이의 방패도 목이나 어깨에 매다는 조그만 원형방패로 바뀌었다. 또한 무장의 무게도 대폭적으로 삭감하였다. 팔랑기테스는 호플리테스보다 경무장이면서도 공격적이었다.팔랑기테스보다 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더 더 짧은 창을 든 또 다른 보병대, 즉 방패부대(히파스피스트 hypaspist)도 팔랑기테스(phalanglites)와 더불어 마케도니아 대오의 한가운데에 위치했다. 히파스피스트는 콤파팔랑기테스의 기회를 포착하고 창으로 앞을 헤체나가면 그들의 창 공격을 정면으로 막을 수 없었다. 높은 정확성과 강한 힘을 지닌 새로운 마케도니아 팔랑기테스는 일단 목표지점이 시야에 들어오고 기병과 지원병력이 그 지점을 취약하게 만들고 나면 곧바로 결정타를 날렸다.마케도니아의 기병들은 적진의 특정한 지점을 집중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적병을 팔랑기테스의 치켜든 창으로 이루어진 모루 위에 넣고 망치처럼 가격했다. 이러한 기병과 보병의 협동은 서구의 전쟁사상의 전혀 새로운 발전이었으면, 병력의 우위를 무위로 돌리는 포위전술의 시초였다.알렉산드로스의 전술은 우선은 불리한 지형에 신속히 적응하고(전장은 그들의 적들이 선택 평야였다.), 콤파니온(Campanion) 기병대의 선봉에 서서 개인적으로 때로는 파멸적인 용기를 보임으로써 지도력을 과시하고 기병대로 적진 한복판을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후방의 기병대들은 당황한 적군들을 전진하는 밀집대형의 창이 있는 곳으로 몰아간다. 그 다음에는 달아나는 적들을 추격하는데, 이를 적을 패퇴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아예 말살시키려는 알렉산드로스의 성향을 반영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최우선의 과제는 적을 찾아내고, 공격하고, 정면대결을 통한 대규모의 육박전 혹은 충격전으로 섬멸하는 것이다. 승리는 병력이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대오를 유지하고 응집력을 확보하면서 적을 격파하는 것이다.한니발(Barcas Hannibal 247~183)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이 깨닫지 못한 포위와 섬멸에 이은 철저한 추격전술로 적을 분쇄하는 전술은 약 100년후의 카르타고의 한니발에 의하여 더욱 충실하게 부활하였다. 한니발이 치른 전투를 보면 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술을 철저히 공부했음을 알 수있다. 그는 보병과 기병의 비율에 관하여 강하게 의식을 했고,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의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약 1 대 6 이었다. 한니발은 로마군과의 이달은 전투에서 로마군의 양익의 빈약한 기병을 섬멸하고,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로마 보병들을 취약한 후방과차 전세를 반전하기 시작했다.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의 신 카르타고를 함락시키면서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로마군의 반격은 시작되었다. 그는 대규모로 진지의 전면에 정공법을 가장하고, 적이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고 그 자신을 3천명의 보병과 3백명 기병을 이끌고 신 카르타고를 배후의 석호를 건너가 도시를 공략했다. 기원전 208년에 바이쿨라에서는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가 지형의 이점만을 믿고 방어를 하였으나, 스키피오는 지형의 불리함을 이용하는 이중의 측면 공격을 가하여 카르타고군을 격파했고, 하스드루발은 피레네 산맥이후로 물러나게 되었다. 기원전 206년 봄, 카르타고인들은 마지막으로 히스파니아에서 결전을 준비했다. 한니발의 형제들인 마고와 하스드루발은 새로운 징집병들을 무장시킨 뒤 7만 명의 보병, 4천기의 기병 그리고 32마리의 코끼리 부대와 함께 일리파로 북진 하였다.당시 스키피오는 병력적으로 열세 하였으나, 카르타고 기병대의 기습을 역으로 이용하여, 카르타고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카르타고군을 고정시켜서, 로마보병으로 선회 기동을 하여 측면과 배후를 강타하였다. 그리고 도망치는 카르타고군을 철저하게 추격하여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군을 궤멸시켰다.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의 세력을 일소하는 데 성공한 스키피오는 이후에는 전장터를 카르타고의 본거지인 아프리카로 상륙하여, 기원전 204년에 우티카에서 누미디아와 카르타고의 연합군을 화공으로 혼란시키고, 화공에 이은 매복과 철저한 추격으로 격파했다. 기원전 203년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본국 카르타고로 소환된 한니발 그리고 스키피오는 자국의 존망을 걸고 결전을 했다.. 자마에서의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은 스키피오의 로마군에 비하여 수는 많았지만, 기병의 수가 적었고, 병사들의 훈련정도도 덜하였고, 충성심도 믿을 수 없었다. 기병이라는 카드를 못 쓰게된 한니발은 로마군의 정면으로 코끼리를 돌격시켜 로마군의 혼란을 유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에는 카르타고군의 양익에 배치된 기병들은 로마기병들에 의해 격파당하고, 카르타고의 군대 3차 포에니전쟁에서 청년 장교로서의 군사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그 이후는 전쟁의 부재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가 48세가 되던해에 아프리카에서는 유구르타 전쟁이 시작되었다. 마리우스는 부장으로 아프리카에 파견되었으나, 총사령관의 능력의 부재와 로마군단내의 고질적인 모순으로 전황이 질질 끌게 되었다.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마리우스는 107년에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유구르타 전쟁의 조기 종결이라는 공약을 내세웠고, 마리우스는 당선 되었다. 그는 우선 로마군단이 유구르타 전쟁에서는 승리하기 위해서는 군제의 개혁이 필수적으로 인식하였다. 당시의 로마군은 큰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그 문제는 로마가 포에니전쟁으로 팽창하면서, 시칠리아의 밀이 싼값으로 로마에 수입되었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로마 본국에 밀농사를 짓던 로마의 자영농들을 파산시켰고, 이 파산한 자영농들은 로마군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병들 이었다. 파산한 농민들이 많아지면서 예전의 재산의 제한선으로 군을 징병할 수 없어서 재산의 제한선을 점점 낮추게 되어, 결국에는 로마군단을 사회의 밑바닥들이 모이는 곳으로 변질되어 예전의 활기나 용맹성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렇게 약해진 로마군단은 유구르타에게 계속적으로 패하였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의 권리인 정규군단의 편성을 기존의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로 전환하였고. 이에 따라 로마의 병역은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선택에 따른 직업으로 바뀌었다.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총사령관이 지휘할 수 있는 군단의 수가 신축성있게 되고, 재산의 정도에 따른 경보병과 중보병의 차이가 없어지고, 재산에 따른 하스탈리, 프린키페스, 트리알리의 구분도 사라지고, 군단병들의 장비가 투창, 사각방패, 글라디우스로 통일되었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로마군을 한층 정예화 하였으나, 군단이 특정한 장군들의 사병화가 되었다.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46)카이사르는 스키피오에 의해 만들어지고, 마리우스에 의해 개혁된 군대를 한층 정예화 하였다. 그는 갈리아 전쟁을 전개하는다.
    인문/어학| 2004.06.13| 7페이지| 1,000원| 조회(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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