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에 필요한 대통령의 리더십(부제 :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 사례에서 얻는 교훈)Ⅰ. 서 론2017년은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있던 해이다. 지난해 12월, 국정농단 의혹으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발의되고 국회 본회의에서 이것이 가결되면서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었다. 그리고 올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된 것이다.조직을 이끄는 지도자의 리더십은 그 조직의 운명을 좌우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조직직원들에게 희망을 주지만, 무능한 지도자는 조직을 혼란에 빠뜨리고 조직원들에게 좌절을 안겨준다. 일개의 조직의 지도자도 그러한데, 하물며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 대통령의 리더십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대통령의 리더십이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대 대통령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지금부터는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 특징을 알아보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서 얻는 교훈을 통해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에 필요한 대통령의 리더십이 무엇인지 제시해보고자 한다.Ⅱ. 본 론1.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가. 이승만 대통령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리더십은 가부장적인 카리스마에 기초한 ‘봉건시대의 리더십’으로 불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태어나고 자라온 시대는 구한말과 일제치하, 그리고 해방까지 격변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양녕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구한말 양반가문의 6대 독자로 태어난 그는 미국의 주요 명문대학을 두루 섭렵하며 해외에서 공부를 하였고, 조국해방을 위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초대 대통령답게 이승만 대통령이 당면한 과제는 해방직후에는 신생 독립국으로서의 민주주의·자본주의 국가건설, 그리고 전쟁직후에는 외국의 원조를 통한 전후복구와 조기 안정화였고, 실제로 그러한 위태로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UN의 감시 아래 남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민주정부 수립하였다. 전쟁 박 대통령은 가난한 농가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장학금을 받으며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사생활도 하였지만, 이내 다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문에 들어섰다. 고생스러웠던 유년 시절과 엄격했던 군대생활이 전부였던 그는 자연히 자기절제와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모습은 권위적이고 강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 지도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런 성향을 바탕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라는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철저히 집중했다. 국정운영의 중심을 경제발전과 자본축적 등 경제부문에 치중시키면서, 때로는 계획과 구상을 직접 담당하기도 하는 기업가형 지도자였다. 실제로 중화학 공업 육성 통한 산업화 유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한 급속한 경제발전, 경부고속도로 등 국가기간 건설과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촌 현대화 등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높은 경제성장을 단기간에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 역시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독재를 시도하였고, 언론검열과 인권유린 등 억압적인 사회로 역행하며 고속 경제성장과는 반대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암흑기를 가져왔다. 그래서 그가 이룩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반민주주의’, ‘군부 권위주의’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前 대통령이 1999년 타임지 선정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 지도자에 선정된 것은 그의 뚜렷한 목표의식 아래 그 시대가 가장 필요로 했던 일, 즉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명확한 목표아래 그것을 이루어내도록 만든 ‘목표지향적 리더십’은 시대적 상황의 요구를 어느정도 성취해낸 긍정적 요소로 평가할 수 있겠다.다. 전두환 대통령전두환 前 대통령은 국민들의 지지가 아닌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으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정당성이 결여된 대통령으로 출범했다. 따라서 ‘민주적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공격형 리더십’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가난결국 정권에 대해 불만을 가진 세력들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집권 시기 내내 국가상황이 혼란과 위기 속에 있어야만 했다.라. 노태우 대통령군정에서 민정으로의 변환기에 집권한 노태우 前 대통령은 전형적인 앞선 대통령들과는 달리 ‘행정가형 리더십’의 특징을 보였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편모 슬하에 자랐다.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면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군 출신인 그는 정보장교 출신으로 참모기질이 강했다. 청와대도 전문가로 구성된 특보 중심으로 운영했으며, 늘 주변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돌다리도 열 번씩 두드린 뒤 건널 정도로 조심스러운 스타일을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정운영에서 과감성이 떨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즉각적이고 돌파적인 국면해결 방식보다는 노사분규, 학원소요 사태 등이 극도로 악화될 때까지 방치했다가 뒤늦게 개입해 오히려 더 큰 후유증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첫 직선제 대선에서 당선된 이후 ‘보통사람’ 슬로건처럼 대체로 무난하게 임기를 마쳤다는 평가를 받는데, 문민정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정부라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소극적 스타일이 오히려 민주주의 발전에는 기여한 측면이 있다는 역설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부 교체가 이루었고, 역 쿠데타와 같은 실패 없이 민정의 토대를 깐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마. 김영삼 대통령군 출신의 대통령이 연달아 집권한 이후 첫 민간인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前대통령은 승부사적 기질이 다분한 ‘저돌적 리더십’이 특징이다. 그는 자손이 귀한 부잣집 맏아들로 태어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김영삼 대통령이 훗날 ‘승부사’, ‘결단의 정치인’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부유한 가정에서 맏아들로 자라난 가정환경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에도 기인했다고 볼 수 있겠다. 집권 초기 전직 김영삼 前 대통령은 대통령들과는 달리 그는 대중과의 접촉과 쇼맨십을 즐겼고, 위기가 닥치, 이러한 내향적이고 치밀한 성격은 그를 행정가형이자, 과업지향형 리더로 만들었다. 정권교체와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시대적 요구 앞에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했고, 연정 형태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외환위기도 빠르게 수습했다. 지역 및 국민 통합을 목표로 삼아 출발한 김대중 정권은 국민과의 정치적 관계에서 매스컴을 통해 회견, 담화, 정견발표 등 그의 정치적 소신을 전달하는 방법을 도입하고 실천한 지도자라는 점에서 ‘소통적 리더십’의 소유자로도 볼 수 있겠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집권하여 꼼꼼하고 치밀한 과업지향적, 그리고 행정가형 리더십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오랜 야당 생활과 자신의 철학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이 이루어지기가 매우 어려웠다. 대통령 주변에 ‘노(NO)’ 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국정운영은 독선적인 경향이 매우 높아졌으며, 또한 결과보다는 ‘모양새’를 중시하여 개혁정책의 추진과정에서 국민에 대한 단기적인 정치적 인기에 관심을 두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임기도중 불거진 세 아들의 비리 문제로 인해 지지율은 급격히 무너졌다.사. 노무현 대통령정치에 입문하기 전 민권 변호사였던 노무현 前 대통령은 ‘탈권위의 리더십’이 특징이다. 노 前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을 우선시 것은 물론, 사회 기득권 전반의 개혁을 주요 아젠다로 삼은 것 답게 직접 상대방 설득에 나서는 수평적 리더십을 선보였다. 또한 대통령 재직 당시 껄끄러운 관계일 수 밖에 없었던 검찰과도 생방송 토론을 할 정도로 설득과 소통을 중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이 오히려 이념갈등을 부추기고 국민의 외면을 가져왔다는 비판도 있다. 국민이 민생에 힘쓰길 기대할 때 국가보안법 개정 같이 본인이 중시한 이슈를 꺼내면서 국민들이 원치 않는 우선순위를 밀어붙이는 ‘불통’의 아이러니를 보였고, 그런 까닭인지 노 前 대통령 재임당시 지지도는 민주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보였다.아. 이명박 대통령기업 최고경영자(CEO) 출가지도자인 대통령 공석상태에 있다. 그리고 대통령 탄핵사태에 따라, 국민의 결정에 의해 당선된 19대 대통령은 별도의 인수기간 없이 당선과 동시에 대통령 직무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빠른 시일 내 국정운영을 정상화해야 하는 것이 19대 대통령의 당면과제일 것이다.또한 한반도는 예로부터 지정학적으로 주변 열강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으로, 외부적으로는 원치 않는 안보 및 경제·외교적 이슈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재 한반도 주변국의 지도자는 스트롱맨(strongman)들이 포진해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중국의 시진핑 주석,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그리고 일본의 아베신조 총리까지 이른바 스트롱맨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서, 궁극적으로는 자국 중심의 패권적 세계질서를 재편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주변국 스트롱맨들의 포진 속에서 요동치는 한반도 정세는 대한민국에게 큰 불안요소로 작용하고 있다.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에서 우리 사회와 정치권은 여러 갈래로 쪼개져 있다. 19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등록한 인원이 15명(중도 사퇴한 인원 포함)으로 역대 가장 많았던 것도 분열된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소통’이 핵심 키워드로 작용하며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불통’과 ‘분열’이 팽배한 현 세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씁쓸함을 자아내며 위기의식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대한민국의 ‘촛불민심’이 한 나라의 국가지도자를 내려오게 한만큼, 새로운 대통령에 기대하는 국민의 염원이 그만큼 크다. 이 혼란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대통령의 리더십은 무엇일까?3. 우리에게 필요한 대통령의 리더십 요소가. 위기관리 능력 : 이승만의 외교력과 박정희의 실행력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반도 주변 정세는 요동치고 있으며, 반년 가까이 대통령 부재상황이 이어지며 우리나라는 북핵문제 등 굵직한 안보현안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움직임에 적절히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다.
제3차 중동전쟁 연구- ‘6일 전쟁’으로 시작해 50여 년간 이어지고 있는 분쟁의 서막-Ⅰ. 개 요제3차 중동전쟁은 1967년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이스라엘과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 간에 6일 동안 진행된 전쟁을 일컫는다.1966년 말 이스라엘과 인접 아랍국들과의 분쟁이 심각한 상황에서 이집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국경 사이에 있는 유엔군의 철수를 요청했고, 이집트 군을 국경에 배치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아랍의 공격에 앞서, 이스라엘 공군이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함으로써 단 6일 만에 압도적으로 아랍 연맹군을 괴멸시키고 대승을 거뒀기에 흔히 ‘6일 전쟁’ 이라고도 부른다.이를 통해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반도 전체와 서안지역, 동예루살렘, 그리고 골란고원까지 엄청난 영토를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의 서막이 형성되었다.제3차 중동전을 알아보기에 앞서 이들 국가가 왜 싸우게 되었는지 배경을 먼저 알아보고, 제3차 중동전쟁의 경과와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까지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관계1. 갈등의 시작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에 유대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모세가 이집트에서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나와서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부터인 BC 11세기경이다. 이후 유대인들의 국가는 BC 8세기와 6세기에 멸망했죠. 이후 유대인들은 2천 여 년 간 나라 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겼으며 세계 각지를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반(反) 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유대인들 사이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대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유태인 조국 재건 운동인 ‘시오니즘’이 호응을 얻게 된다. 또 1차 대전을 치르던 영국이 미국 내 유대인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의 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선언(벨푸어 선언)을 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을 작성했다. 또한 예루살렘과 그 주위 지역은 국제관리 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이를 전면거부 했다. 그래서 같은 해 11월 22일과 26일 유엔 총회에서 실시된 비공식 투표에서는 분할안을 지지하는 국가가 2/3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시오니스트들이 분할안에 반대하는 국가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1947년 11월 29일, 제2차 유엔 총회에서 실시된 투표에서는 유엔 회원국 2/3이 찬성하였다.이로써 영국이 위임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과 아랍인 국가인 팔레스타인으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국제관리 체제에 두는 팔레스타인 지역 분리 결의안이 가결 되었다. 이 결의안을 이스라엘은 당연히 수용했지만, 아랍권은 거부하게 된다. 그리고 위임통치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주둔하던 영국군 부대가 철수한 직후인 1948년 5월 14일, 유대국가 건국위원회 의장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한다.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언을 하지만 이는 일방적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는 오래토록 살던 삶의 터전을 잃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로 구성된 아랍 연합군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저지하게 위해 이스라엘 건국선언 이틀 만에 팔레스타인에 진입하였고, 이로써 제1차 중동전이 발발하게 되었다.전쟁은 1948년 5월부터 1949년 3월까지 10개월 간 지속되었고, 아랍 연맹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1949년 2월 전쟁이 끝날 무렵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서쪽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땅의 77% 차지하게 되었고,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서안과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차지하게 되었다.3.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이집트 정부의 자금 원조로 인도와 북아프리카, 중동을 잇는 전략상 요충지로, 이집트는 1956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이스라엘은 영국, 프랑스와 비밀 협약을 맺은 후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을 빌미로,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의 국반을 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은 요르단 영토를 통 이스라엘에 기습 공격을 가했고, 그러면 이스라엘은 요르단에 보복을 가하곤 했다.한편 이집트는 제2차 중동전쟁에서 패하였으나, 정치적인 승리로 아랍 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다만 당시 이집트는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상황이었기에 이집트는 직접적으로 이스라엘과 충돌을 일으키기보다는 요르단과 레바논, 가자지구 등지에 흩어져 살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이스라엘을 타도하기 위한 무기로 삼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지원하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일원화 하려고 했다.반면, 1964년 ‘알 하피즈’ 대통령이 실권을 장악한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1966년 10월, 이집트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한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 정책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설상가상으로 1967년 초 이스라엘 정부는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정전협정에서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골란 고원 일대에 군 병력을 진주시켜 이 지역에 농작물을 경작한다는 일방적인 조치를 발표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시리아의 감정이 격앙되었다.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시리아와 요르단 정부는 이집트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으며, 이집트는 아랍의 지도자적인 입장에서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에 이집트 대통령인 ‘나세르’는 범아랍권의 지도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리아에 대한 위협에 즉각적으로 대응했다.나세르는 계엄령을 발동하고 동시에 만약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한다면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즉각 공격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리고 1967년 5월 18일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유엔군이 장애가 될 것으로 간주하고 유엔군의 철수를 요구한다. 5월 22일에는 이집트가 시리아와 요르단과 군사동맹을 맺어 시나이반도 주둔 병력을 증강하고 아카바만에 있는 티란 해협을 봉쇄한다. 티란 해협은 이스라엘이 홍해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로서, 이집트의 아카바만 봉쇄는 이스라엘에 대한 전쟁 선포와도 마찬가지였다.이스라엘은 이러한 상황에 렘과 서안을 장악하며 요르단은 휴전을 수용하게 되었고, 전쟁 둘째 날인 6월 8일에는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점령함으로써 이집트도 휴전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9일에는 시리아군이 포격 거점으로 활용해온 골란고원까지 장악함으로써, 6월 10일에는 시리아가 휴전을 수용하게 되었다.결국 6월 10일 이스라엘의 전투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6일 전쟁’이라고 부른다. 한편, 아랍 측은 이런 굴욕적인 표현 대신 ‘6월 전쟁’이라고 부른다.3. 전쟁의 결과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권의 패배는 물질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에서 대가를 치렀다. 첫째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세 아랍 교전국은 이스라엘에게 자국 영토의 일부를 점령당했다. 이집트는 시나이의 유전을 빼앗겼으며 수에즈 운하에서 나오는 수입을 박탈당했고, 이러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이집트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왕정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굴욕적인 처지에 놓였다. 요르단은 가장 생산성이 높은 농업지역인 서안과 예루살렘, 베들레헴 같은 성지도 잃었다. 시리아로서는 골란 고원을 상실한 것이 주요한 경제적 손실은 아니었지만, 그곳에 이스라엘군이 주둔함으로써 다마스쿠스가 타격 사정권에 놓이게 되었다. 둘째로, 아랍국들은 병력의 10분의 1을 잃었다. 이집트는 병력 1만 2,000여 명을 비롯해 공군과 기갑부대의 80%를 잃었으며, 시리아는 2,500명이 사망했다. 요르단 군대는 일시적으로 전투력을 상실했다. 셋째로, 이집트 내부적으로는 수에즈 운하에서 계속된 전투로 이 지역 도시가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에서는 골란 고원에 거주하던 8만여 명이 생활의 기반을 잃었다.전쟁에 따른 또 다른 국면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심각한 군사력 불균형이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속도와 완벽성은 이스라엘군에게 불패의 신화를 안겨주었다. 또한 이스라엘 군대가 보여준 모든 부문에 대한 완벽한 운용은 세계 군사조직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하지열악한 수준으로 공군기를 보호하기 위한 벙커시설이 배치된 비행장은 없었다.이에 이스라엘 군은 6월 5일,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시간을 노려 이집트 공군에 대한 기습폭격을 가했다. 또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의 레이더 방공망과 지대공 미사일을 피하기 위해 지중해를 선회하여 저공비행으로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공군이 뿐만 아니라 활주로까지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남은 비행기도 이륙할 수 없도록 하였다. 약 3시간에 걸친 폭격으로 이집트 공군은 항공기 300여대를 상실하고, 공군기지와 레이더 기지 등을 모조리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이스라엘 군으로서는 단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의 80%를 격파한 것이다.이러한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남은 전쟁 내내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자국영토의 3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 현대전사의 전설을 만들게 된다.2. 충분한 훈련과 유효했던 지상군의 전술계획당시 이집트군은 4개 기갑사단과 2개 보병사단, 1개 기계화보병사단 등 총 7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소련식 교리에 의해 보병이 방어태세를 갖춘 상황에서 기갑부대가 종심에서 기동방어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이스라엘 군은 이집트 국경선에 6개 기갑여단과 1개 보병여단, 1개 기계화보병여단, 3개 공수여단을 집중시켜서 놓았다. 이스라엘군의 작전을 이집트 군을 기습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 공군의 활주로를 파괴하는 시간과 맞추어 공격을 개시하였다.당시 이집트군은 과거에 이스라엘 군이 공격하였던 중부와 남부 루트로 진격하리라 예상하고, 시나이 반도 방면 국경선의 중앙부와 남부에 강력한 병력을 모아둔 상태였다. 이들은 해당 방면으로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들어오면, 반격해서 꺾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좁은 남단부 영토를 관통해서 요르단과 직접 연결한 다음,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의 예상과 달리 국경선의 북부에서 강력한 공세를 하였고, 기갑부
북한의 언론 현황□ 북한 언론 개괄? 북한 언론의 성격과 특징북한의 언론은 당의 강력한 사상적 무기로서 국가가 독점하고 있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노동당의 유일사상인 '주체사상'과 당의 노선 및 정책을 해설 선전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특히 김일성 부자 체제를 유지, 강화시키려는 정치적 상징조작에 동원되고 있다.북한 언론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에는 두 가지의 큰 요소가 있다. 뉴스에 대한 해석차이와 언론통제가 그것이이다. 북한에서의 뉴스란 독자에게 흥미를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당이나 정권 당국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만을 보도한다. 이것은 뉴스가 사건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제반 노력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뉴스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선전 · 선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뉴스를 보도하는데 있어서 객관성보다는 당성(노동당)을, 진실성보다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속보성보다는 교양성을 강조하고 있다. 신문에서 자본주의사회의 병폐를 제외하고는 사회문제나 각종 범죄·비행·사고·공안문제 등과 갈은 사회적 사건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오락기사나 생활정보 기사, 광고가 없다는 점, 그리고 한 두 달 전의 일이 뒤늦게 보도되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성격을 반영하는 것들이다. 한편 언론통제는 북한 언론이 정치기구의 일부 내지 그 부속기구로서 존재 · 기능하는 만큼 당연한 것이다. 매스미디어의 사유 및 영리사업으로서의 운영이 일체 금지되고 있을 뿐더러 모든 매체가 당 조직 · 정부기관 및 각종 단체에 소속되어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행정적으로 관리 운영하는 정무원의 언론관계부서도 당의 지휘와 감독을 받도록 되어 있다. 현재 신문의 경우에는 정무원 산하 출판총국의 검열을 받고, 방송은 조선중앙방송위원회의 직접적 지시를 거쳐 최종적으로 당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밖에 신문이 자유세계의 신문처럼 한번 훑어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독보회나 학습회 때 학습교재로 사용되고, 방송 또한 집단으로 시청하는 경우가 많아서 일종의 통제역할에 활용되고도 있다.따라서 북한의 언론은 자유로운 여론형성이나 사상과 정보를 공개하는 기능이 배제된 채 상의하달식의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언론 정책북한에서 언론은 “김일성의 교시와 김정일의 방침을 해설 선전하고 옹호 관철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일층 강화하고 인민들의 정치사상적 통일과 단결을 강화하는 데 복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북한 헌법 제67조는 “공민은 언론 · 출판 · 집회 · 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언론자유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언론의 자유는 “인민대중을 사회주의 건설에 더욱 힘차게 다그치는 데 이바지”하여야 할 때만이 보장받을 수 있다고 못박고 있다. 특히 김정일은 1995년 11월 언론매체에 보낸 친필서한을 통해 언론매체가 사상교양 및 통제기능을 강화해 체제결속에 앞장서 줄 것을 촉구함으로써 다시 한 번 이러한 언론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북한의 언론은 이러한 언론의 자유에 한하여 대중의 지도자 및 안내자 또는 교사로서만이 그 존재가치가 인정된다. 따라서 북한의 모든 언론매체에 부과된 가장 큰 역할은 당 정책 및 혁명사업을 선전·옹호하는 데 있다.□ 북한의 언론 현황? 신문북한의 신문은 주체언론의 관점에서 지켜야 할 원칙으로 “노동계급성과 당성의 원칙, 인민성과 대중성의 원칙, 진실성과 전투성”을 제시하고 있고, 신문은 이 원칙에 따라 발행한다.중앙지와 지방지를 합하여 모두 30여종의 신문이 있으며, 북한의 신문은 우리의 개념에 해당하는 신문이 아니라 노동당 · 정권기관 · 사회단체들이 발행하는 기관지일 뿐이다. 즉, 노동당의 기관지로서 《노동신문》, 정무원의 기관지인 《민주조선》, 사노청의 기관지인 《노동청년》 등 3개의 중앙지와 각 도당위원회에서 발행하는 11개 지방지가 있다. 이상의 14개 일간지 외에 공장 · 기업소 발행의 공장신문과 각 대학 발행의 대학신문 등의 하급신문과 해외홍보용인 《평양타임스:The Pyong Yang Times》가 있다. 그 밖에 《교통신문》·《건설신문》·《교원신문》과 같이 정무원의 각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들과 공장 · 기업소 발행의 공공신문과 각 대학이 발행하는 '대학신문' 등의 하급신문이 있다. 이들 신문은 비록 발행기관 · 면수 · 부수와 발행횟수 등에 차이가 있으나 그 내용과 편집체제(한글전용, 가로쓰기) 등은 획일적이다. 또 대부분이 조간으로 발간되며, 《노동신문(6면)》을 제외하고는 통상 4면이다. 신문의 지면은 《노동신문》의 경우, 대체로 1면에 김일성 연설문과 동정 및 시책, 2면은 공산주의교양 및 당 선전, 3 · 4면은 사회주의 건설성과를 부각시키는 기사로 채워지고 있다. 5면은 대남비방 및 모략기사, 6면은 국제소식과 시사해설로 구성된다. 기사 중 중요한 것의 90%이상을 조선중앙통신사의 통신문에 의존하며, 기자들의 현지 취재기사는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드물게 이루어지고 있다.북한의 언론인 양성기관으로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신문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현직 언론인들의 재교육과 국제교류 등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기자동맹이 조직되어 있다.? TV · 라디오방송방송은 정무원 직속의 중앙방송위원회와 그 산하에 있는 도 · 시 · 군 방송위원회의 일원화된 체계 밑에서 운영되고 있다. 중앙방송위원회는 북한의 라디오 · TV · 유선방송 등 방송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계획, 집행하는 등 총괄한다. 이 위원회는 임무수행에서 방송내용 자체에 대한 지도조정은 당 체계에 의거하여 당의 지시 · 통제를 받고 있고, 방송국 시설과 기재의 관리 및 사무는 정무원에 의해 관장되는 이원체계로 운영되고 있다.현재 북한의 라디오방송은 국영 라디오 방송인 조선중앙방송 · 대남방송인 평양방송 · 대남선전용인 평양FM · 노동당 비서국 통일전선부에서 운영하는 대남흑색방송인 '구국의 소리방송' 등 4종류의 라디오방송이 있으며, 원산 · 개성 · 남포 · 사리원 등 각 도에 1개씩 11개의 지방방송국과 10개의 유선방송국(제3방송), 200개의 군 · 구역 방송국, 4,300여 개의 방송실이 있다. TV방송으로는 조선중앙TV, 만수대TV와 대남방송을 목적으로 한 개성TV 등 3개가 있다.1945년 광복 당시 북한지역에는 평양 · 함흥 · 원산 · 청진 · 해주 등 5개소에 방송국 시설이 있었다. 이 중 평양방송국의 기능을 정비하여 1945년 10월 조선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고 500kW의 출력으로 첫 방송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67년 중앙방송국을 제1중앙방송, 제2중앙방송으로 분리하여, 제1중앙방송은 대남방송, 제2중앙방송은 대외 · 대남방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1972년 제1중앙방송은 '조선중앙방송'으로, 제2중앙방송은 '평양방송'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황해도 해주에서 송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국의 소리 방송'은 1966년 4월 남조선해방방송으로 시작되어 1970년 '통일혁명당 목소리 방송'으로 개칭되었다가 1985년 다시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된 것이다. 1989년 1월에는 평양FM이 개국, 대내 · 대남방송을 실시하고 있다.TV방송은 1967년 4월 조선중앙TV방송국을 개국하여 1969년 25kW의 출력으로 정규방송을 시작하였다. 1971년 대남심리전을 목적으로 개성TV방송국을 개국하였고, 컬러방송은1974년 이후 방영되고 있으며 컬러TV 수상기의 보급은 15만대 정도이다. 이 밖에 1961~1975년에 걸쳐 북한 전역에 유선방송망을 설치하였다. 방송프로그램편성은 조선중앙방송과 중앙TV의 경우 보도 · 교육 · 교양 · 영화 · 음악 등 전반적으로 오락프로가 경시되고 정치교육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특히 평양방송과 개성TV의 경우 1일 70% 이상이 대남모략 · 선전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다.현재 북한의 라디오 보급율은 약 70%, TV수상기는 약 30만대 보급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라디오수신기는 대내 중파방송만을 수신할 수 있다. TV수상방식은 PAL이고 개성TV만 NTSC 채널을 사용하여 북한 내에서의 시청은 불가능하다(대남방송용). 북한은 또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99개 주파수를 등록하고 있다. 그러나 '구국의 소리 방송'의 주파수는 등록하고 있지 않고 있다. 한편 방송요원 양성기관으로는 아나운서의 경우 주로 평양영화대학에서 양성하고 있다.? 통신대내외 뉴스를 총괄적으로 공급하는 조선중앙통신사가 북한 유일의 국영 통신보도기관이다. 이 통신사는 국내외 정보를 지도 총괄함으로써 북한 언론의 중추를 이루고 있으며, 1946년 소련군 강점하에서 북한의 행정을 담당하던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직속으로 발족한 ‘북조선통신(北朝鮮通信)’이 그 전신이다. 1948년 10월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내각 직속기관이 되었으며, 1949년 9월 중국의 유일한 국영통신 ‘신화사(新華社)’와 보도 교환협정을 맺어, 취재와 보도 권역을 넓혔고 해외로 주재기자도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본사는 평양시에 있으며 신의주 · 함흥 · 원산 · 청진 · 개성 · 사리원 · 해주 · 강계 등 주요 도시에 지사를 두어 취재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세계 주요 국가들에 통신 뉴스를 송신하는 외에도 동유럽 국가의 통신사들과 제휴하여 뉴스를 교환하고 있으며, 일간 《로동중앙통신》,《영문통신》,《프랑스문통신》,《러시아문통신》,《에스파냐문통신》과 《사진통신》, 월 2회간인 《국제생활》, 부정기간행물인 《참고통신(參考通信)》도 간행한다. 대외방송으로는 지역 방향별 영문 텔레타이프 통신과 사진송신을 함과 아울러, 아시아 · 아프리카 ·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제3세계와 유럽 지역 방향 상대의 영어 · 에스파냐어 방송, 아시아 · 아프리카 · 유럽 지역 방향으로의 프랑스어 방송, 유럽 방향으로의 러시아어 방송 등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새마을 운동)□ 개 요생활태도혁신·환경개선·소득증대를 통해 낙후된 농촌을 근대화시킨다는 취지로 1971년부터 전국적 범위에서 전개된 정부주도의 지역사회 개발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 4월 22일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제안하여 내무부를 주무부처로 마을단위의 농촌개발정책을 범국가적 차원에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조국 근대화를 지표로 삼고,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관주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민간주도로의 전환이 모색되었다.□ 배 경1962년부터 추진한 의 성공적인 추진은 빠른 경제성장을 가져왔지만 공업화 중심의 경제개발 전략에 따라서 도·농 간 발전 격차가 심화되고 이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어 농촌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70년대 이전의 한국 농촌마을은 매우 낙후되어 있었는데, 전국 농촌마을의 60%만이 자동차 진입이 가능하였고, 전기가 가설된 농촌은 20%에 불과하였으며, 산에 나무가 없어 홍수와 가뭄이 빈번하여 농업 생산성이 매우 낮았다. 또한 수출중심의 공업화 전략이 1970년대 수출 침체기를 맞게 되어 내수 시장에 대한 개발의 필요성이 있었으며,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 농촌개발의 일환으로 새마을운동이 추진되었다.□ 추진과정? 1970년대 : 1970년 가을, 정부가 시멘트 335포를 전국의 34,000여 농촌 마을에 배포하고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 것이 새마을운동의 시작이다. 1970년 출범 당시의 농촌 새마을운동은 새마을가꾸기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가 1971년부터 새마을운동으로 명명되어 정부 주도로 전국의 마을 단위로 추진되었다. 마을에서는 정부가 지원하는 시멘트와 철근을 이용하여 마을회관 건설, 마을 안길 확장 등 공공적인 사업을 우선 추진하고 이와 함께 지붕개량, 부엌개량, 화장실 개량 등 개인의 주거환경 개량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처럼 새마을운동이 농촌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1975년부터는 도시와 공장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976년부터는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전까지 개별 새마을사업으로 추진해 오던 도로, 주택, 공동시설, 농로, 생산기반사업을 취락구조 개선사업이라는 하나의 계획 속에 종합적으로 추진하고 소득개발사업도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조국을 근대화 시키는 크게 기여하였다.? 1980년대 : 1980년대 새마을운동은 정치 · 사회 · 경제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일시적인 정체가 있었지만, 국민운동으로 계속해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에 따라 1980년 12월 1일 현재의 새마을운동 중앙회가 설립되었고, 1981년 9월에 새마을운동 시·도지부가 설치되었으며, 1982년 10월에 시·군·구지회가 설립되었다. 즉, 기존 정부주도 추진방식에서 민간주도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4 -1971년부터 1982년까지 새마을운동은 총 5조 2,583억원이 투자되었으며, 이 중에서 정부가 51%에 해당하는 27,987억원을 투자하고, 주민들이 49%에 해당하는 24,596억원을 담당하였다. 개발도상국의 농촌개발은 그 재원을 정부나 외부의 원조에 거의 의존하는 것이 관행이지만 새마을운동은 총 투자액의 49%를 주민이 부담하였으며, 이와 같은 대규모 투자가 전국에서 동시에 추진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현재 : 민간주도 운동으로 변모된 새마을운동은 '90년대 초기 민주화·개방화 흐름에 따라 사회 곳곳에서 지나친 이기주의와 탈법·불법, 무질서, 과소비가 판을 치면서 사회적 갈등이 빚어졌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건강한 사회건설을 위한 국민의식 개혁운동, 환경보전운동, 농어촌가꾸기운동, 이웃사랑운동 등에 중점을 두었다. 1997년에는 IMF사태를 전후하여 경제살리기 국민저축운동, 나라사랑 금모으기운동을 주도하여 국가위기극복에 기여하는 등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러시아 연해주 농업협력사업과 베트남 새마을협력사업을 계기로 해외 현지 새마을운동이 본격화 되었고, 90년대 후반 민간차원의 대북교류 사업이 시작되면서 대북지원 사업에도 동참했다. 2000년대에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사회 만들기’를 새로운 이념으로 지역현장 중심의 봉사기능 강화, 행정과의 건전한 파터너십 구축 등 민간자율운동으로서 노력해왔으며, 러시아·베트남 이외에도 중국·몽골·스리랑카·캄보디아·네팔·콩고민주공화국 등 저개발국에 새마을운동을 보급하여 새마을운동 종주국으로서의 위상과 대한민국의 브랜드를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방법(성공요인)? 마을단위 개발 : 농촌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마을 단위로 개발을 추진하였다는 것인데, 1970년대의 농촌 마을사회가 지니고 있는 공동체 조직과 공동체 정신을 농촌지역개발에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하의 상향식 개발 : 농촌 새마을운동은 정부가 주도하는 하향식 추진체제 속에서도 주민참여에 의한 상향식 개발을 지향하는 농촌지역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즉, 상향식 개발과 하향식 개발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종합개발방식 : 새마을운동은 한 지역단위의 개발계획에서 농업과 공업, 수산업 등 관련되는 산업이 모두 포함되어 추진되었고 정부 정책을 통하여 이러한 사업의 추진을 지원하는 종합개발방식을 지향했다.? 인센티브 방식 도입 : 농촌 새마을운동은 모든 마을을 똑같이 지원한 것이 아니라 잘하는 마을을 우선 지원하여 그 성과를 다른 마을들이 보고 따라 오도록 하였다. 정부는 1973년부터 모든 농촌마을을 발전 정도에 따라서 기초 · 자조 · 자립마을로 나누고, 자립마을을 우선 지원하는 동시에 기초마을과 자조마을이 자립마을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지원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 갑오개혁1. 갑오개혁이란?1894년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조선 정부에서 약 19개월간 3차에 걸쳐 추진된 개혁운동을 갑오개혁이라고 한다. ‘갑오경장’이라고도 불렸다. 갑오개혁은 내각의 변화에 따라 제1차, 제2차 갑오개혁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을미사변을 계기로 추진된 제3차 개혁을 따로 분리해 '을미개혁'이라고 부른다.2. 갑오개혁의 배경3 -갑오개혁은 동학농민운동이 실현되지 못한 가운데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일본도 텐진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자진해산하자,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저하되었고 청나라, 일본의 양국은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정부는 청?일 양국군대의 철수를 요구했고, 청나라는 일본에 대해 공동으로 철병할 것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오히려 조선내란 발생 예방을 위해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요구한다. 청나라가 이를 거절하여 회담이 결렬되자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일본은 침략정책 추진상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할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에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을 요구했는데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해 농민들이 제시한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하려고 했지만, 일본은 경복궁을 포위하고 명성황후 세력을 몰아 낸 후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개혁을 강요하며 영의정 김홍집을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수립하여 내정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3. 개혁 내용가. 제1차 갑오개혁1894년(고종 31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개혁이다. 1차 김홍집 내각은 김홍집, 김윤식, 김가진 등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라는 임시 합의기관을 설치한다. 이 기관은 행정제도, 사법, 교육, 사회 등 전근대적인 제반문제에 걸친 사항과 정치제도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특히 개국기원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1차 개혁 때에는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둔다. 개혁전담기구였던 군국기무처는 2차 개혁 때는 폐지된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받게 되었다.구 분내 용정 치내각의 권한 강화, 왕권 제한, 개국기원 연호 사용, 과거제폐지, 종전에 사용하던 청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경 제국가재정 업무를 탁지아문으로 통폐합하고 관할하도록 함은본위 화폐 제도, 조세 금납화 실시사 회문벌과 신분 타파, 연좌제 폐지, 노비 매매 금지, 조혼 금지,과부재가 허용 등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된 각종 폐습 타파※ 제1차 갑오개혁안은 농민들의 요구한 사회 개혁 요구의 일부를 반영하고 낡은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내용은 일제의 편의를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제2차 농민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나. 제2차 갑오개혁1894년 11월부터 1895년 5월까지 이루어진 개혁이다. 1894년 11월,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을 무력화 시킨 일본은 청?일전쟁에서도 승세하자 내정간섭에 방해되던 대원군을 은퇴시키고 일본에 망명해있던 박영효를 귀국시켜, 2차 개혁 때는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김홍집과 박영효 연립내각을 수립시켰다. 또한 친일내각은 고종으로 하여금 14조를 발표하게 했고, 고종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홍범 14조를 반포한다. 2차 개혁은 박영효의 주도로 의정부 명칭을 내각이라 고치고,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으로 개편하고 월봉제도를 수립, 과거를 없애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을 부여했다. 또한 행정제도를 23부 337군으로 개편하였으며, 신분제도의 개혁을 통해 문무, 반상(班常)의 구별을 폐지하였고, 지방관에 의해서 집행되던 사법과 군사업무를 중앙에 예속시켜서 근대 관료체제를 이룩하였다.구 분내 용정 치의정부 8아문 폐지, 일본식 내각과 7부로 개편, 궁내부 관제대폭 간소화, 전국 8도를 23부로 개편, 치안 행정 분리경 제한성 사범학교?외국어 학교 관제 공포, 신교육 실시,경찰권 일원화사 회군무아문 처제로 개편 단행,3도 통제군과 각 도의 병영?수영?각 진영과 진보 폐지※ 1895년 리시아, 프랑스, 독일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세력은 위축된 틈을 타서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박영효가 명성황후의 재등과 조선의 친러화를 막기 위해 왕궁 호위병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려했고, 이것이 고종의 의심을 사게 되어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갑오개혁은 중도에 중단되고 말았다.다.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1895년 5월부터 1896년 2월 11일까지 제3차 김홍집 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이 내각에서는 일본세력의 퇴조에 따라 박정양을 위시한 친미·친로파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일본세력의 퇴조를 만회하기 위해 일으킨 을미사변 이후 그의 의도대로 김홍집내각의 친일적 성격은 강화되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김홍집 내각은 계속 내정개혁을 추진하여 140여 건에 달하는 법령을 의결, 공포하였다. 그 가운데는 7월 9일 ‘소학교령’, 11월 10일 ‘상무회의소규칙’, 11월 15일 ‘건원(建元)’에 관한 건, 11월 15일 ‘연호’를 의정(議定)하는 건, 1896년 1월 1일 태양력의 채용 등의 개혁안건이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