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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평가 김활란
    인물연구보고서근현대사 레폿.hwp교육, 기독교계 여성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 인물 선정 이유근현대사의 인물 연구라는 주제를 받고 난후 근현대사 인물에 관해 조사를 해보던 중에 여성 교육과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친일파 인물이라는 김활란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김활란이라는 인물이 지금의 이화 여자 대학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비록 내가 이화 여자 대학교 학생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다니는 학교가 여자 대학교인 만큼 그와 관련된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내 종교가 기독교인데 그 부분에서 어떤 친일 활동을 했는지 에도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한 연구를 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물의 생애*생존기간 - 1899~1970*본관 - 김해 金씨*가족 관계 - 김진연과 박또라의 8남매중 일곱째*사제 관계 - 이화여대 초대 총장으로 있으면서 이화여대 학생들이 다 자기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조카이제 제자인 김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가 대표적인 제자 라고 할 수 있다.*활동 - 김활란은 일제하에서는 ‘여성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그리고 YWCA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8?15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배화학원, 국제대학, 동구학원, 금 란여중고, 영란여중고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YWCA,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등 여성 단체를 설립하 고 회장 등의 임원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부 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에 한국 대 표로 참석하였고, 6?25 때는 공보처장, 1965~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 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외교 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결과 정부로부터 1963년에는 대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이후에는 대한민국 일등 수교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 제 말기에는 교육? 종교계 인물 그 누구 못지않을 정다. 3?1운동이 터지면서 활란과 지하모임을 함께했던 가장 친한 동료 두사람이 3?1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붙잡혀 갔다. 다음 차례가 활란임을 눈치 챈 주위 사람들은 활란의 몸을 숨겨주었다. 물론 활란은 처음에는 강력히 반대했지만, 결국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르게 된 것이다.1920년 정월 초순, 김활란은 이화로 돌아갔다. 그리고 6월, 홍에스더, 김함라, 윤성덕, 김폴린, 김애은, 김신도등 여섯 사람이 호응하여 7인전도대가 용감하게 발족했다.「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야한다. 우리 민족의 번영과 건강, 교육, 그리고 사회경제의 개선만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여야 한다.」(김교식, 계성출판, 112p)이것이 7인전도대의 목표였다. 7인전도대는 서울을 떠나 전국을 다니면서 예배를 보며 예수님을 알렸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못가서 왜경들은 이 전도대의 운동에는 틀림없이 민족정신을 고취하려는 불온 천만한 사상이 숨어 있다는 억지소리로 이들을 탄압하였고, 결국,7인전도대의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1921년 봄, 활란은 그녀에게 거론되었던 미국 유학을 잠시 연기하고 1922년 5월, 『세계 기독학생 연합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경으로 떠났다. 그 당시 한국에는 아직 YWCA가 조직되어 있지 않았지만, 앞으로 한국에도 여자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북경에서 열리게 되어 있는 회의에 한국 여자대표를 보내기로 했고, 김활란은 감리교, 김필례는 장로교의 대표로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회의에 참석 한 후 김활란과 김필례는 한국에 돌아와서 YWCA를 조직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북경을 갔던 활란은 그 곳에 거처하는 큰언니와 형부 김달하를 만났다. 김달하는 ‘하늘에는 밝은 달이 있듯이 이 땅에 또 하나의 달이 있다’ 며 ‘또 하나의 달’이라는 뜻으로 우월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활란과 필례는 「이 불우한 시기에 처해 있는도 특히 농촌의 수많은 문맹자들을 가르치려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두 번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근현대사 레폿.hwp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국민생활의 과도기적인 긴장 상태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이상을 성취해야 할 2세들의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조선의 교육자는 진정한 교육의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제공해야 하는 엄청난 과업에 직면하고있다.다음 장들에서는 조선 농촌교육의 목적과 방법에 관하여 어떤 기초 수립의 위한 미약하나마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시도를 제시하였다.이 기초 수립을 위해, 첫째로 조선농촌의 생활 상태를 약술하였고, 그들의 교육 상태를 수록했다.두 번째 단계는, 현 교육제도가 이런 생활환경에서 비롯된 농촌교육에 관한 문제를 충족 시키거나 또는 충족시켜 줄 계획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를 고찰할 것이다.초등학교, 고등학교 및 농업학교는 어느 정도 농촌인 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학교는 아주 자세하게 참착했다.셋째, 농촌교육의 문제해결에 있어 세금으로 운용되지 않는 기타 교육기관의 공헌에 관한 간단한 비평을 실었다.다음 단계는, 다른 국가들은 다소 이와 유사한 환경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하는 것을 고찰한것이다.덴마크, 러시아와 우리 환경의 유사성을 고려하여 이 두 나라의 경우를 연구하였다. 미우 훌륭한원칙과 과정이 조선 농촌교육의 기초 수립을 위한 실현 가능한 제안으로서 게시되어 있다. 마지막 부분은 조선의 교육환경에 관한 앞장의 분석과 외국의 경험에 비추어 조선 농촌교육에 대한몇 가지 합리적인 목적과 방법을 열거한 것이다.이렇게 하다 보니 근본적인 원칙과 함께 조속한 실용성이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졌다.나는 이 논문을 작성하는 데 참으로 많은 친구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고, 또 많은 선배들과은사님들의 지도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는 것을 덧붙여 둔다.김활란」이 논문을 발표한 활란은 한국최초의 여성 철학박사 가 되었다.인물연구보고서0410314 반가이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후에 김활란은 다시 이화전문학교의 학감 직년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섰다. 당시 일제는 중등과정의 학생들에게는 강제로 교복을 입게 했지만 전문학생의 경우는 이 문제를 학교의 재략에 맡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부교장이었던 김활란은 언론과 학생, 학부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체생활상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교복을 입게 하였다. (친일파 99인, 돌베개, 278-279)이런 화려한 친일 행각을 벌이며 김활란 은 1940년 젊은 나이로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가 시시각각으로 옥죄어드는 속에서 이화여전은 교가마저 일본말로 바꿔 불러야하는 굴욕을 감수하여야 했다. 그리고 1940년 11월 16일 이화 캠퍼스에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이 내려졌고, 선교사들은 결국 이화여전은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돌아가고, 미국 선교부의 재정상의 후원이 끊어져 버렸으니, 그야말로 이화는 장차 풍전등화와도 같은 가엾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재정적인 뒷받침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또 선교사들마저 이화를 떠나버린 후라 조선어 사용 금지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날로 심해져 갔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차츰 비관론이 고개를 처들기 시작했다. 자기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기라도 할까 봐서 일본말을 배우고, 되도록 조선말로 강의를 하지 않으려 하는 선생이 늘어갔다. 또 일본말을 배격하여 배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선생이 차츰 줄어들었다. 끝까지 일본말을 배격하고 배우지 않겠다는 지조파 선생은 소리 없이 이화를 떠나기도 하였다. 김활란은 그 때 이미 일본말을 알고 있었다. 불편 없이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통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화여전의 교장으로 취임하기 조금 전에 일본말을 알아두어야 그들이 꼬투리를 덜 잡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뒤늦게 일본에 공부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제의 혹독한 몸부림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일본말을 배우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해야 하는 비애를 안고 있었던 것이 그 무렵의 한국 사람들이었고, 일제 때 가장 안타깝고 분하게 여겼던 일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사실 그가 친일행각을 중단할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도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이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12.25)그리고 결국 일본은 이화라는 이름마저도 아예 바꿔 치우라는 엄명을 내렸다. 경성은 조선에서 제일이고, 이화도 조선 천지에서 제일이니까 ‘경성여자전문학교’라고 고치라는 것이었다. 김활란은 이런 억지 요구까지 받아들였고, 교가까지 없애고 말았다. 또 김활란의 단발머리가 서양식이라며 일본이 트집을 잡자 머리를 길러 틀어 올리는 등 자신의 몸가짐 하나하나까지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던 것이었다.김활란은 이제 들어줄 만한 것은 모두 했으니 끝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일본은 창씨개명까지도 요구해왔다. 큰 학교를 대표하는 교장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일꾼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의 표본이 되게 하루 빨리 창씨개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김활란은 이번에도 역시 일본의 요구대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천성활란, 그야말로 하늘나라의 성 안에서 살고 있는 산 난초라는 뜻인 ‘야마키 카쓰란’이 그녀의 새로운 이름이 된 것이다.1944년 여름, 김활란은 마치 사형장에라도 끌려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일제 당국 사람들에 의해서 끌려갔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일본을 위해서 학병과 징병으로 나가라고 권하는 이른바 권유 유세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확장되는 전것이다.
    인문/어학| 2004.05.26| 12페이지| 1,000원| 조회(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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