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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슐라이에르마허의 생애와 사상 평가A좋아요
    오늘날의 조직신학Friedrich E.D. Schleiermacher교 수이 승 구 님학 번1044006발제일2004년 9월 20일이 름방 동 주Ⅰ. 서 론19세기의 신학자들은 인간 생활 안에 종교라는 어떤 특정의 자리를 정함으로써 계몽 사상에 의해 초래되었던 곤경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또한 그 결과로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칸트는 윤리와 도덕을 종교라는 특정 차원의 초점으로 제시하였다. 헤겔은 이 초점을 지적 또는 사변적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제안들보다 훨씬 더 혁신적인 것은 금세기 초 수십 년 간을 대표하는 세 번째로 위대한 사상가)였던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에르마허의 제안이었다. 그의 대안은 그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별한 경험, 곧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의 근거를 찾기 위하여 ‘감정’에 주목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고, 현대 과학과 사상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떻게 존립할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았다. 현대 세계관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현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현대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은 현대 신학에 고루 퍼져있다. 그것은 특히 19세기 말엽쯤에 가서 개신교 사상을 장악하게 된 ‘자유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신학의 학파들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반면에 바르트는 슐라이에르마허가 신학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연구가 아닌 인간의 종교성에 대한 연구, 즉 인간학으로 전환시켰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주도한 신정통주의(neo-orthodoxy) 신학은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거부와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었다.)슐라이에르마허는「종교론」출판 1년 후 그 속편으로 간주되는「독백론」을 저술했다. 1802년 베를린을 떠나 소도시 스톨프의 개혁교회 목사로 부임하면서 사상이 성숙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목회하는 동안 플라톤의 글들을 독일어로 번역했으며 1803년「이전의 윤리론 비판 개요」를 출판했다. 1804년 모교 할레대학교의 신학교수와 대학교회의 설교자로 부임하여 가르쳤으며, 1806년 그리스도 성육신의 의미와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대화 형식으로 논의한「크리스마스 이브」를 출판했다. 1806년 나폴레옹 군대가 프러시아를 침공하여 할레시를 점령하고 할레대학교를 폐쇄하자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를 반대하는 설교를 했으며 그는 할레대학교를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지자 베를린으로 가서 프러시아 재건운동에 가담했으며 베를린 삼위일체 교회의 목사로 활동하면서 베를린 대학교 창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부 초대 학장을 네 차례나 지냈으며 총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신학부 교수로 재직할 당시 헤겔은 철학부 교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학적인 라이벌 의식에 기인된 면이 없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베를린 대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1810년에는「신학연구개요」를 1821-1822년에는「신앙론」을 출판했다. 1834년 2월 12일 급성 폐렴으로 1주간의 투병 끝에 그는 운명했다. 가족과 함께 성찬을 나누면서 고린도전서 11장을 인용한 후 “이 성서의 말씀에 나는 굳건히 서 있다. 그것들은 내 신앙의 근거”라는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이 소식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맡았던 스테펜스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와 같은 장례식은 지금껏 없었다. 미리 정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고 전혀 의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애도가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왔고, 사람들 속에서 있는 내적 허탈감이 전 도시를 사로잡은 나머지 모든 시민들이 그의 묘지를 둘러부터 플라톤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그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플라톤 저서의 번역으로 당대의 가장 훌륭한 고전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에서의 플라톤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왜냐하면 신플라톤학파 이후 처음으로 진정한 플라톤 사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기계론적인 윤리관을 거부하고 결정론적 윤리관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낭만주의와 개인주의적 주관주의를 극복했다.)3. 사상적 배경계몽주의 시대에는 역사비평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문이, 성경 및 그 밖에 기독교의 권위있는 문서들의 기원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했다. 자연의 움직임에는 자연의 법칙이 지배한다는 믿음 때문에 기적이나 역사의 행로에 초자연적 개입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얕잡아 보게 되었다. 또한 세계의 종교들에 대하여 알게 된 지식은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하여 질문들을 제기하였다. 기독교는 다른 모든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나온 종교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 신학의 문화적 맥락을 형성시켜 주었던 새로운 상황은 낭만주의 운동이었다. 그는 낭만파 친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종교론」,「독백록」,「크리스마스 이브」등과 같은 그의 초기 작품들은 낭만주의 사상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는 18세기 계몽주의와 계몽주의 신학의 초자연적 교리를 거부했던 낭만주의자들에게 공감하여 그들과 결합했으나, 신학과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낭만주의에 종속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했다. 부분적으로 낭만주의자들은 계몽주의가 낳은 자녀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권위라든가 교의적 신앙체계 같은 것들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생동감이라든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힘과 상상력 같은 것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이 그들의 선배들이 주창하던 합리주의 때문에 상실되었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강조하는 낭만주의로부터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라기 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의식에 관한 학문이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증거나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교의 또는 교회적 의식이나 절차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화 속에 있는 ‘근본적이고, 쉽게 식별이 되는 통합적 요소’, 즉 유한한 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무한한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신학적 방법에서 슐라이에르마허가 이룬 혁신은 이른바 “믿는 주체로 돌아가라”(turn to the believing subject)는 데 있다. 신적인 계시에 의한 정보의 어떤 체계가 아니라 믿는 자들의 경험이 신학의 주제이며 기준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 방법은 계몽주의에 의한 진취적 사상을 흡수하는 한편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였다. 이성의 시대에 걸맞게 그의 사고는 인간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면서 권위를 피하고 ‘아래로부터’의 지식을 세워가려고 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경험될 수 있는 것에 국한시키고 ‘하나님 자체’나 우주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사유를 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를 따랐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종교를 이성의 한계 내에만 규정짓고자 한 데 반해, 슐라이에르마허는 그것을 경건의 영역에 한정지었다. 그의 신학적 방법은 감정과 직관적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로만티시즘의 주관주의와 비이성주의를 피하고는 있으나, 낭만주의 운동에 호소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를 인간 경험에 있어서 환원될 수 없는 한 요소로서 보아 그 독특성을 주장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식’의 지고한 표현으로 보아 그의 독특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계몽주의와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있다.)“실천은 기술이고 사색은 학문이지만 종교는 우주에 대한 감능이자 취미이다.”)2. 기독론슐라이에르마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식’이라는 경험에 기초한 기독론으로 그리스도의 인격 뿐이었다. 또한 죄의 용서를 구원의 본질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에서 유일하게 중히 여기고 있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 감정의 후속적인 향상에 의하여 인간 자신이 변화되는 문제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것은 고난을 참아낸 모범적인 전례라는 의미 외에 어떠한 내용의 의미도 거기에 추가될 수 없었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심과 그리스도의 인격적 사후적인 영향으로 인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속죄론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된다.첫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일어났음을 강조했다. 그의 구속 능력은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특정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 즉 하나님 의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둘째,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새로운 공동 생활의 건설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임을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하나님 의식의 능력을 통해 죄의 공동 생활에 대치되는 새로운 공동 생활을 이룩했기 때문이다.셋째,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 사역의 본질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에 부수적인 중요성을 부여했을 뿐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희생의 개념과 그리스도의 고난이 죄의 징벌을 폐기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일관되게 거부했다.넷째, 그의 속죄론은 주관주의적이며 인간 중심적이다. 그는 속죄를 하나님 의식에 뒤따르는 축복의 감각 또는 종교 의식의 변화로 간주했다. 그런 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주관주의적 속죄론의 중요 대표자가 되었다.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 속죄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보다는 인간의 의식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그의 속죄론은 인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의의를 약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다.)
    인문/어학| 2004.09.23| 10페이지| 1,500원| 조회(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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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과 섹슈얼리티 평가C아쉬워요
    문화연구 방법론여성과 섹슈얼리티교 수학 번 / 과 정제출일이 름일반적으로 서구에서는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결혼생활에서의 성이 재생산과 성적 쾌락으로 분화된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혼전의 성교가 사회적 현상으로 확산되고, 1990년대에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성해방 담론이 하나의 저항담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들은 성에 대한 모든 금기와 규제를 철폐하고 성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하여 성적 쾌락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인간 해방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본다.성해방 담론은 한국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은 한국의 남녀 모두가 결혼과 재생산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한국의 남성들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결혼이나 재생산과 무관하게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성해방 담론의 영향으로 한편으로는 미혼 남성들의 성적 자유는 더욱 확고하게 보장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성에 대한 의식과 태도도 훨씬 개방적이 되었다.1. 전통사회에 있어서의 섹슈얼리티전통사회에 있어서의 섹슈얼리티는 오늘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적용되는 논리이다. 여기에서는 개인이 자기 자신을 성적 주체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서 성적 쾌락을 추구할 수 없었다. 성은 근본적으로 재생산을 위한 수단이었다. 자녀를 생산하여, 더 정확히 표현하면 아들을 생산하여 가문의 대를 이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국가의 존속을 위하는 것이 남성과 여성 모두의 섹슈얼리티의 존재 의미와 가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몸은 가족 구성원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도구’로서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여성과 그의 몸에 관련된 성 담론과 윤리도 전적으로 이러한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성에 대한 모든 규범은 궁극적으로 남성 가족 중심적이었다. 따라서 혼전 임신의 경우에도 이후 혼인을 하고, 아들이 태어나면 윤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하게 된다. 이는 개인의 감정, 즉 사랑이라는 것이 남녀관계와 성교 그리고 결혼생활의 기초이자 전제조건이라는 가정 하에, 가족이라는 초개인적이고 집합주의적 자아가 아니라 개인적 자아가 성적 주체가 됨을 암시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의 자유연애는 근대적 자아의 주체성을 역사적, 문화적 배경으로 하는 현상이나 과정이 아니다. 한국적 자유연애는 결혼과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성 또한 결혼생활에서의 틀 안에서만 용인되었다. 결국 서구로부터 배운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도 사실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와는 달리 초개인적, 집합주의적 가치와 이상의 맥락에서 가족 재생산을 위한 남녀관계 과정에 새로이 삽입된, 하나의 부분 과정에 불과하다는 명제가 성립한다.2. 현대 한국 여성의 섹슈얼리티현재 한국의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는 독립적 주체 인식과 행위의 유형으로 볼 수 있는가? 그리고 현재 한국사회는 여성을 성적 주체로 인정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동시에 한국의 여성들을 이제는 주체성에 입각한 근대적 자아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연결될 수 있다. 이것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성교, 임신, 낙태의 선택 그리고 낙태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를 짚어보기로 한다.1)성경험요즈음 한국의 젊은 남성과 여성 모두 혼전 성교에 대하여 비교적 개방적 입장과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 혼전 성경험 자체도 점차로 늘고 있는 추세이다.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남학생의 전체 응답자 가운데 20%(무응답23.5%), 그리고 여학생의 23.2%(무응답29.2%)가 성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한편 결혼 상대자가 혼전에 다른 사람과 성교를 가졌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남학생의 68.2% 그리고 여학생의 41%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대답한 반면에, 남학생의 35.9% 그리고 여학생의 29.3%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입장이나 태도와 실제 행위 사이에는 괴리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최소한 요즈음 한국의 젊은이들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남녀 모두에게 각인되어 이후의 성행위를 결정하는 유형의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재현되는 성관계 상황에서도 계획된 성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행위가 우연히,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루어지곤 한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개인 스스로가 독립적 성적 주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직도 문화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다.이는 일본 종군 위안부 여성의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 방식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정신대 문제 대책위원회’는 종군 위안부 문제를 ‘여성을 성노예로 끌고 간 국가의 폭력’으로, 다시 말하면 개인과 국가의 문제, 인간의 권리와 국가의 폭력의 문제 또는 문명과 야만의 문제로 접근하는 데 반하여,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 여성의 정조를 빼앗은 일본'이라는 지극히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곤 한다. 이러한 감정적 반응의 배후에는 정조를, 즉 성적인 것을 여성 인격의 전체와 동일시하는 ‘문화적 의미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한국사회에서의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성에 대한 이와 같은 전통적 의식과 최근의 성해방론의 교차에 의해서 규정되고 결정된다.2)피임:지식과 실천피임 기술의 발달이 여성해방에 기여한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선 여성의 성이 재생산과 성적 쾌락으로 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여성은 피임 기술의 도움으로 자녀를 생산할 것이냐 아니냐를, 또한 생산한다면 어떤 시기가 좋은가를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제 자신의 몸과 성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미혼의 성지식 인지도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한국의 미혼 여성들은 대체로 피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이에 대한 주요한 인과 관계는 무엇보다도 성교육에서 찾을 수 있겠다. 한국에서의 성교육은 주로 학교라는 공식적 통로와 친구집단이나 잡지라는 비공식적 통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전자에서의 성교육은 아직는 피임방법인 콘돔에 대한 광고는 피임광고가 시작된 지 10여 년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피임이 근본적으로 여성의 일로 고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모든 것은 성교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피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한국의 젊은이들은 피임에 대한 구체적 지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피임을 잘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피임에 대한 여성의 지식 부족이라는 인지적 요소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성적 주체로 행위할 수 없는 문화적 요소가 고려되어야 한다. 여성이 피임을 요구하면 ‘헤픈 여자’로 비추어질까봐,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이러한 문화적 상황은 성교에 대한 재현물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한국의 에로영화에는 피임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는 부부사이의 성행위를 묘사하거나, 성해방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의 성을 묘사할 때도 그렇다. 한국의 남성들은 대체로 피임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성행위라는 남녀간의 상호작용에서 피임이란 없는 것으로, 또는 여성이 남몰래 혼자서 피임약을 복용하는 식의 ‘블랙박스’로 처리됨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서 미국의 시트콤 를 보면, 두 커플이 한 집에서 성행위를 하려고 할 때, 두 여성이 갑자기 방에서 뛰어나와 콘돔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이라는 하이틴 영화는 성교 직전 콘돔이 없음을 알고 이를 사러 나간 소년이 겪는 일에 대한 영화이다. 이 모든 것은 미국 사회에서는 피임의 단계가 성행위의 중요한 구성요소이자 과정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대하여 남녀 모두가 합의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3)낙태의 문제지금까지의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한국의 미혼 여성들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할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이런 경우에 결혼을 통해서 이러한 임신이 가족이라는 제도 아니면 낙태를 할 것인가, 그러나 전자의 경우도 그렇게 좋은 방법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미혼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많은 경우에 낙태를 선택하도록 사회적, 문화적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낙태는 낙태법과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묵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인구조절을 수월하게 하려는 국가의 의도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 모두에서 용인되는 낙태는 다른 한편 병원의 상업적 이해관계와 결합됨으로써, 이제 한국사회에서는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한국사회에서의 낙태는 미혼모에 의한 것이 전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 이외에도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전통적 가치와 이상 때문에 발생하는 여아의 낙태도 매우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한 해동안 이루어지는 낙태는 공식적으로는 150만건이, 비공식적으로는 200만건이 넘는다고 한다.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의 낙태는 성적 주체인 여성이 자기 자신의 주관적 인식과 판단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과 자신의 몸을 통제하고 처리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가족구성원 재생산 기제인 여성의 몸을 윤리적이고 규범적으로 통제하려는 전통적 문화의 힘이 작용한 결과라는 점이다. 낙태법도 바로 이러한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낙태행위를 법적으로 규제함은 혼외 임신이라는, 이른바 부도덕한 성을 통제함으로써 결혼과 가족구성원 재생산에 한정된 전통적 성윤리를 고수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여성이 주체로 존재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이 ‘내 배는 내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실정이다. 여성의 배는 궁극적으로 가족에 속하게 된다. 또한 여기에는 태아를 인격체로 보는 인권 사상이 자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1970년 대에 ‘모자보건법’이 제정되면서 부분적으로 합법적 낙태가 허용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은 결혼생활 내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낙태에 대한 법 된다.
    사회과학| 2004.06.09| 4페이지| 1,000원| 조회(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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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윤리] 환경과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
    생명윤리 “환경과 생태계” 2004.5.31기독교학대학원 방동주Ⅰ. 서 론교회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실 뿐 아니라) 세상은 에덴동산 상실 이후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곳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거나 세상의 방법을 따라 간다면 교회의 존립 의미는 이미 상실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교회는 세상의 형식과 논리로 교회의 모든 일들에 그대로 적용해 온 감이 없지 않다. 이제 환경 문제에 있어서 교회와 기독교인의 인식이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는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옮겨가야 하며, 세상의 논리에서 성경의 논리로 이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전세계가 죽어가고 있다. 오늘날 생명을 위한 자연의 요람인 바다가 인간의 산업 공해 쓰레기와 오물을 버리는 용기로 변화되고, 핵폐기물 때문에 북해의 수많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고열의 원자로를 식힌 냉각수로 인해 어류의 생존율이 감소할 뿐 아니라 변종 어류가 양산되고, 자동차의 배기가스와 산업 공단에서 분출되는 납과 수은 등의 중금속에 의한 공기 오염이 심각해지고, 그로 인해 대기권의 오존층이 파괴되고, 산성비가 내리고, 토양의 생산력도 저하되고, 냉장고 ? 에어컨 ? 각종 스프레이 등에서 나오는 프레온 가스가 지구를 온실화 하는 등등의 환경 위기를 알리는 지표들이 시시각각 지구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인류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든다. 특정한 어느 나라라고 할 것 없이 전세계가 과도한 공업 육성 정책에 의한 경제 제일주의를 지향한 결과, 이제 우리는 다음 세대의 인류와 지구 전체의 생존을 추락해 가는 생명 파괴의 현실에 저당잡히고 말았다.)이러한 생태계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환경의 손실에 의한 경제적 이득을 좇는 인간의 탐욕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생태계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뚜렷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을 만드셨으며, 그 보살핌을 인간에게 위임하셨고,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갯벌의 기능과 중요성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과학이 점차 발달하면서 더럽고 쓸모없어 보였던 갯벌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고 있다. 갯벌은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완충지대로서 각종 어패류의 서식지와 산란장을 제공하고 전체 어획량의 60% 이상을 생산한다. 더구나 간척 사업처럼 만들어진 땅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어진 땅이다. 이곳을 일부러 메꾸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려면 확실한 타당성과 경제성이 있어야 한다. 간척이 오염의 우려를 불러일으키는데 비하여 오히려 갯벌은 오염 물질을 정화시키는 자연 정화 기능이 있다. 일본의 미카와만 이시키 갯벌(10제곱킬로미터)에서 조사한 연구 결과를 보면, 갯벌의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능력을 여과율로 보면 시간마다 약 8%의 비율로 오염물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12시간 주기로 계산하면 전체 해수의 96%를 여과하는 셈이다. 이것을 같은 오염 물질 제거 기능을 갖춘 하수 처리 시설을 만드는 견적을 뽑아보면, 우리 돈으로 약 1,220억 원이 든다. 이것은 유지 관리비와 부수 경비를 제한한 액수이다. 하수처리장은 관리비가 필요한 반면, 갯벌을 어업의 수익을 주는 동시에 스스로 자연 정화를 한다. 갯벌은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 중 삼분의 일이 서식할 뿐 아니라 자연 재해와 기후조절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갯벌은 동북 아시아 철새의 이동경로와 서식지로 이용될 뿐 아니라 최근에는 그 특유의 경관과 갯벌 진흙의 다양한 효능 때문에 관광 뿐 아니라 새로운 벤처 사업의 아이템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과거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바다와 땅의 경계를 이루면서 거무틱틱하고 냄새나고 이상해 보이는 갯벌이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갯벌은 하나님께서 우리 지구촌에 내리신 자연 정화 장치이고, 가난한 이웃들이 아무런 경제력이 없이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삶의 터전이며, 사람과 생물과 자연이 함께 어울려 사는 축복의 장소였던 것이다.2. 핵폐기물현재 예비신청이 완료된 것으로 간주한 전북 부안군과 함께 오는 9월 15일 이후 주민투표를 실시한다. 주민투표는 투표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참석하면 효력을 발휘하게 되며, 과반수 찬성을 얻게 되면 신청이 확정된다.전라북도 부안은 군 단위로는 특이하게도 현안이 된 대규모 국책사업만 두 가지다. 물막이 공사 후 부지 활용방안을 놓고 논란을 빚고 있는 새만금 간척사업과 지난해 하반기부터 관심의 촛점이 됐던 핵폐기물 처리장 부지선정 문제다. 특히 핵폐기물 처리장은 유치신청을 낸 김종규 군수에 대한 부안 주민의 반발과 유치에 찬성하는 위도주민과의 마찰 등이 얽혀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후유증이 오래 갈 전망이다. 현재로서는 부안이 주민들의 반발로 대형 국책사업이 무산된 첫 사례로 기록될 듯 하다.핵폐기물 처리장 문제는 김 군수가 지난해 7월14일 전격적으로 유치신청을 내면서 시작됐다. 범부안군민 대책위, 반핵국민행동 등은 즉간 반대운동에 나섰다. 7월24일 산업자원부가 위도를 처리장 부지로 확정하자 반발은 더욱 심해져 41일간의 등교거부를 포함한 촛불시위가 11월말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9월8일 김 군수 폭행사건을 비롯해 고속도로 점거, 어선의 해상 시위 등 격렬한 시위가 잇따랐다. 결국 정부에서 지난해 12월10일 전면재검토를 발표하고서야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재미있는 결과를 얻었다. 반대 측에서는 '핵폐기장'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비해 찬성 측에서는 예외 없이 '원전센터'라는 말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말이 본질을 규정하는 사례일까. 문제는 부안 외에 유치를 신청하는 지자체마다 앞으로 격렬한 내부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홍보 미비, 지역 이기주의, 환경단체의 개입 탓에 핵폐기장 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정부의 인식과 개발을 미끼로 낙후된 지역에 위험시설을 지으려 한다는 주민들의 반발 사이에는 '핵폐기장'과 '원전센터' 만큼이나 넓은 간극이 존재한다. 모두 만족할 만한 타협안은 없는 것일까. 부안을 떠나면서 서울대나 청와대)인 두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런 점에서 다음의 기사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하다.오존층 파괴로 피부암 · 백내장 환자 급증)태양의 자외선을 막아 지구 생명체를 지켜주는 성층권의 오존층.지난해 가을 남극 상공의 성층권에 생긴 '오존 구멍'의 넓이는 남한 면적의 280배가 넘는 2800㎢에 이르렀다. 사상 최대를 기록한 2001년과 별 차이가 없었다.1989년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 등 염화불화탄소(CFCs)의 사용을 규제하는 몬트리올 의정서가 발효됐고, 2002년엔 오존 구멍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때 낙관론을 펼쳤던 과학자들은 다시 넓어진 오존 구멍을 보고 곤혹스러워 했다.매년 9월을 전후해 남극 상공에는 엄청난 크기의 오존구멍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북반구에서도 엷어진 오존층이 회복되지 않고 있다. 유럽 등 북반구 중위도 지방에서는 성층권 오존농도가 10년마다 4%씩 줄었다. 자외선 양은 2020년까지 계속 증가해 80년에 비해 10%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학자들은 97년 이후 오존층 파괴 속도가 줄어들고 있지만 앞으로 50년은 지나야 오존 구멍이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오존층 파괴로 늘어난 자외선은 피부암과 백내장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유엔환경계획(UNEP)은 21세기 전반까지 피부암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미국에서는 매년 120만명의 피부암 환자가 발생해 2000명 정도가 사망한다. 사망자의 75%는 자외선이 원인인 악성 흑색종으로 파악되고 있다.영국의 경우 95~2000년 악성 흑색종 환자가 24% 증가했다. 매년 7000명이 악성 흑색종 진단을 받고 그 가운데 1700명이 사망한다. 호주에서는 매년 72만건의 피부암 제거 수술이 진행되며 특히 흑색종은 암 종류 가운데 다섯 번째로 흔한 암이다.백인이 황인종에 비해 자외선에 훨씬 민감하지만 우리도 안심할 수 없다.국립암센터의 한국중앙암등록사업 자료를 보면 2002년 등록된 전체 암 발생 사례 9만9025건 가운데 1.3%가 피부기 때문에 급성 호흡기 질환을 앓다 숨지는 5세 이하의 어린이만도 연간 100만명이 넘는다.어린이들은 성인들에 비해 환경오염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피해가 그만큼 크다.국내 5세 미만 어린이 가운데 천식 환자의 비율은 1980년대 이후 3배 이상 증가, 현재는 10%를 훨씬 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최근 어린이들 사이에서 천식이나 아토피 피부염이 급격히 늘고 있으나 아직도 뚜렷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치료법도 나오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전적인 요인이나 패스트푸드 등 음식과 함께 환경오염도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대구가톨릭대 산업보건학과 허용 교수는 "환경오염이 천식이나 아토피성 질환 발생에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許교수는 "대도시에 거주하는 어린이는 백혈구 숫자가 농촌 인근 소도시 지역 어린이에 비해 낮았고, 혈액 속의 면역 단백질도 농촌지역 어린이보다 알레르기에 민감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오염이 어린이들의 체질까지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국내에서 아직 많은 연구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가 대기오염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연구결과가 최근 속속 나오고 있다. 이화여대 의대 하은희 교수가 2002년 11월 서울시내 한 초등학교 1, 2학년 524명 전원을 대상으로 만성 호흡기질환을 앓거나 천명음(기관지가 좁아져 숨쉴 때 내는 쌕쌕거리는 소리)을 내는지를 조사했다.이에 따르면 도로와의 거리가 10m 미만인 집에 사는 어린이는 10m 이상 떨어져 사는 어린이에 비해 만성호흡기 질환 비율이 1.9배, 천명음은 2.85배나 됐다.河교수는 "유전적 요인이나 실내 환경뿐만 아니라 자동차 배기가스로 인한 대기오염도 어린이의 호흡기 관련 질환에서 중요한 요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기오염이 영아(출생 후 4주~1세) 사망률까지 높인다.이화여대 의대 河교수가 95~99년 사이 서울지역의 사망자 수를 바탕으로 조사한 결과 미세먼지 오염도가 크게 악화되면(이 경우 한다.
    인문/어학| 2004.06.09| 13페이지| 3,000원| 조회(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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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성례전] 성례전7가지 평가A좋아요
    목 차Ⅰ. 서 론Ⅱ. 성례전1. 세례2. 견진례3. 성찬식4. 고해성사5. 성직 서품식6. 혼배성사7. 성유식Ⅲ. 성례전의 신학적 의미Ⅳ. 결 론▣ 참고서적Ⅰ. 서 론성례(sacrament)란 헬라말 신비, 또는 비밀이란 뜻에서 그 어원을 찾는다. 이 말은 신 앞에 목숨을 바쳐 충성을 맹세하는 서원의 예식으로 이방종교에서 행한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하며, 특히 로마 군인들의 맹세를 위한 의식에서 사용된 말이라고 한다. 교회의 역사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3세기 경 로마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기독교의 성찬을 가리켜 거룩한 예식 곧, 성례라고 칭하게 되었는데, 그 이래로 이 말은 기독교 예전의 전문 용어가 된 것이다.{) 정일웅, 「기독교예배학개론」,(서울:솔로몬출판사,1993), p.163정교회의 성례전은 세례, 견진례, 성찬식, 성직서품식, 고해성사, 혼인(혼배성사), 성유식 등 일곱 가지로 구성된다. 이 중 세 가지(세례, 견진, 서품)는 반복될 수 없으며, 나머지 네 가지는 반복될 수 있다. 각각의 성례전은 나름의 특별한 은혜를 전달한다고 보는데, 세례와 견진례는 의롭게 하고 중생하는 은혜를 전달하며, 고해성사와 성유식은 영혼과 몸을 치료하는 은혜를, 서품식과 혼배성사는 어떤 특별한 기능을 행하는 은혜를, 성찬식은 영적으로 사람을 먹이고 만족케 하는 은혜를 준다.{) 김경희, 「동방정교회의 신화론과 신화방법에 관하여」,(장신대석사학위논문, 1997), p.28Ⅱ. 성례전교회는 성찬식에 의해서 교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고 성화하시는 은혜를 교인들에게 수여한다. 성찬식은 거룩하게 제정된 의식으로서, 신비하게 전해진 불가시적 은혜를 가시적인 수단에 의해서 전해준다. 그러므로 합당하게 받은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된다. 성례전은 참여하는 자들을 위한 효과적인 은혜의 도구 로서 신실한 참여자로 하여금 구주의 구속사역 안에서 성체 배령자가 되게 해준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위한 훌륭한 수단은 아니다.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며, 그를 통해서 은혜의 나라인 교회에 들어간다.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중생하고 새롭게 되며 새로이 지음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가 되며,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성령 안에 참여함을 통해서 신적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크리소스톰의 말에 의하면,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성화되며, 성령과 교제하게 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대바실에 의하면, 세례는 포로들을 속량해 주는 것, 빚을 탕감해 주는 것, 영혼의 중생, 밝고 빛나는 옷, 누구도 공격할 수 없는 인, 천국을 향하는 전차, 천국의 목적, 양자됨의 선물이다. {) 대니얼 B. 클렌데닌, Ibid., p.32정교회에서는 서방 그리스도교계가 침수에 의한 세례를 그만두고 이제 수제자의 이마에 물을 조금 붓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사실을 매우 근심스럽게 본다. 정교는 침수를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침수가 없으면 외적인 표지와 내적인 의미 사이의 일치를 잃어 버리게 되고 성례의 상징적인 면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세례는 신비적인 죽음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함을 의미한다. 성사적인 상징은 수세자가 세례수 속으로 침수되거나 묻히어야 하며 그리고 나서 물에서 다시 일어나야 하는 것을 요구한다.{) 강태용, 「동방정교회-역사와 신학」,(서울:익산출판사,1991), p.272세례는 정상적으로 주교나 사제에 의해서 집전되어야 한다. 위급시에는 보제나 보통 남녀 신도가 수행할 수도 있다. 세례를 베푸는 자는 반드시 세례를 받은 자라야 한다.{) 강태용, Ibid., p.2722. 견진례세례 받은 사람들은 견진례를 통하여 세례 때에 시작된 새로운 영적 상태를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 및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받는다. 몸은 눈에 보이는 기름으로 부음을 받으며, 영혼은 거룩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 성화된다. 견진례는 성령이며... 그리스도의 선물인 성령이며, 그의 신적 임재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여 정교회에 입회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기름부음은 견진례의 반복이라고 볼 수 없다.3. 성찬식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키릴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그대는 그 분과 동일한 몸 동일한 피로 만들어진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 지체들에게 공급되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품게 된다. 그리하여 복된 베드로의 말대로 우리는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크리소스톰의 성찬 예식문은 성찬식이 어떻게 신화의 길이 되는 지를 보여준다. 신자들은 영혼의 정화와 죄 사함과 성령과의 사귐과 하늘나라의 성취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을 받는다. 첫째, 수찬자의 영혼은 정화되고 성화되고 영적 양분을 받으며, 신비하게도 썩지 않게 된다. 둘재, 수찬자는 썩지 않음, 부활, 불멸, 그리고 영생의 씨를 받는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흡수하여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로서 더욱 크게 성화되며, 신적 생명과 신화를 받는 통로인 거룩한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 및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다. 성찬 안에서 사람들은 신화에 필요한 성품을 받으며 신인(神人)과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김경희, Ibid., p.29정교회는 성찬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한다고 믿는다. 즉,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며,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성례 안에 임재하게 된다. 여기에서 정교회는 7세기의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공식화 된 전통을 고수한다. 주님이나 그의 제자들은 결코 사제가 축성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진실로 임재하게 된 제물이 우상이며 허상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다마스커스 요한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떡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방법에 관해 질문하기 보다는, 이것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변화의 방식은 결코 우리가 조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이 평범한 떡을 먹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가 되며,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 때문에 다른 몸의 지체가 된다.{) 대니얼 B. 클렌데닌, Ibid., pp.36∼37이 성례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지니는 중요성은 대단히 크므로, 이 성례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세례와 동등하다. 이런 까닭에 정교회 사람들은 성직자나 평신도 모두가 2종의 성찬을 받는다. 2종 성찬은 마태복음 26:26∼27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요한복음 6:53∼54에 따라 유아들도 세례 직후에 성찬에 참여하는데, 유아 세례는 요한복음 3:5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위의 사실들로 볼 때 성찬은 단순히 성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희생제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것 온 세상을 위한 것, 거룩하고 공번된 사도적 교회를 위한 것 살아있는 자나 부활하여 영생을 얻으리라는 소망 안에 잠자고 있는 모든 정교회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 제사는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는 결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Ibid., pp.37∼384. 고해성사고해성사는 세례 받은 후에 범한 죄들을 뉘우치고 사제나 주교 앞에서 고백하여 죄 사함을 받는 성례이다. 그래서 제2의 세례라고 묘사된다.{) Ibid., p.38정교회에서는 진지하고 마음에서 우러난 회개를 통해서 얻은 죄 사함은 완전한 것이므로, 거기에 어떤 다른 것을 추가하기를 거부한다.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한 사람들에게 형벌이 부과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도덕적 회복과 치료의 출발을 확실히 하기 위한 일종의 교훈적이고 치료적이고 교정적인 방편이라고 본다. 그래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공덕의 보고나 성인들이 수행하는 공덕사역, 연옥의 불에 대한 가르침에는 반대한다.{) 김경희, Ibid., p.31정교회에서는 고백을 들을 때 고백실을 별도로 사용하지 않고, 이코노타시스 앞 개방된 곳에서 이루어진다. 때로는 특별한 방에서 고백성사를 보기도 한다. 서방에서는 사제가 앉고 고백자는 무릎을 꿇는 반면 정교회에서는 둘 다 모두가 선다(때로는 모두가 앉기도 한다). 사제와 고Ibid., p.283정교회에서 서품식은 대단히 중요하며, 사도적 승계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사제나 목양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정교회는 원래 교회 외부에서 거행된 성례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또 이단 성직자들의 임명식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교회는 이단적 교회일지라도 그 교회가 사도적 승계를 소유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교회의 정통적인 견해를 신봉하며 서품식을 일종의 성례로 인정하고, 그것을 교회법에 합당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할 경우, 그 교회 출신 사람의 사제 임명을 인정할 수도 있다. 서품식은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는 성례중의 하나이다. 이단적 공동체로 변절했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정교회 사제는 결코 다시 서품될 수 없을 것이다. 또 교회법에 따라 성직을 박탈당했다가 복권된 정교회 사제도 다시 서품받을 수는 없다.{) 대니얼 B. 클렌데닌, Ibid., p.406. 혼배성사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삼위일체적 신비는 교회의 교리에 뿐 아니라 혼인의 교리에도 적용된다.{) 강태용, Ibid., p.286혼배성사 안에서 한 남자와 여자의 연합이 혼인의 목적에 합당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신적 은혜를 수여함으로써 남녀의 자유로운 연합이 축성된다. 이 성례를 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결혼하는 남녀는 반드시 정교회 교인이어야 하며, 결혼하는데 대한 두 사람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위한 감독과 장로들의 축복이 있어야 한다. 결혼은 깨어질 수 없는 것이며, 부부 중 한 사람이 죽었거나 간통했을 경우에만 이혼이 가능하다. 후일 몇 가지 이유가 첨가되기도 했다. 한 번 결혼이 깨어진 경우에 두 번째, 세 번째 결혼을 허락할 수 있지만 네 번째 결혼은 허락하지 않는다. 친족이나 인척들끼리의 결혼은 금지된다.{) 대니얼 B. 클렌데닌, Ibid., pp.40∼417. 성유식이 성사는 그리스어로 에프헬레온이라고 하는데, 기도의 기름 이라는 뜻이다.{) 강태용41
    인문/어학| 2004.06.08| 7페이지| 1,000원| 조회(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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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사] 한국에 정착된 프로테스탄트 평가B괜찮아요
    목 차Ⅰ. 서론A. 연구동기B. 연구목적과 범위Ⅱ. 서구교회의 한국선교 시도들A. 당시 한국의 상황B. 개신교 전래의 선구자들1. 벨트브레(Jon Janse Weltevere)와 하멜(Hendrick Hamel)의 표류2. 바실 홀(Basil Hall)과 머레이 맥스웰(Murray Maxwell)의 성경 전파3. 카알 구츨라프(Karl F.A.Gutzlaff)4. 로버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 B.A.)5.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6. 존 로스(John Ross)와 맥킨 타이어(John McIntyre)C. 서구 교회 선교의 의의Ⅲ. 한국에 정착된 미국형 프로테스탄티즘의 유형A. 미국 개신교의 한국 선교 배경1. 정치적 배경2. 종교적 배경B. 장로교1. 북장로교회2. 남장로교회3. 지역별 선교지 분할정책과 결과4. 선교정책C. 감리교1. 북감리교2. 남감리회Ⅳ. 기타 교파 교회의 정착A. 성공회B. 호주 장로교회C. 캐나다 장로교회D. 침례교E. 안식교F. 성결교G. 구세군H. 러시아 정교회I. 기타Ⅴ. 프로테스탄트의 한국 정착 성공 요인과 특성A. 정착의 성공원인B. 정착된 프로테스탄트 유형의 특성(장점과 단점을 중심으로)C.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형태Ⅵ. 맺음말▣ 참고 도서 및 연구과정Ⅰ. 서 론A. 연구 동기1885년 부활절을 기하여 제물포항에 도착한 두 선교사로 시작된 한국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오늘날 천만의 신도를 자랑하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놀라운 성장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으로 믿는다. 물론 이 성장을 위해서 인간적 수단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구주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한 것이었다.{) 강근환, 한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정책에 끼친 Nevius Plan의 영향 -「신학과 선교」제2집, 부천:서울신학대학, 1974, p.87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한국에 들어왔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활동에는 정치, 사회적인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다. 그리고못한 채 한반도를 떠나게 되었다. 한달 남짓 한국 해안에 머물면서 뚜렷한 성과는 없었으나 그의 방문은 통상교섭이라는 의도를 가진 첫 외국인이자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문화사와 한국개신교회사에 남을 것이다.4. 로버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 B.A.)구츨라프의 성과 없는 탐방 사건이 있을 때부터 33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백낙준, Ibid., p.44그러나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펼쳐지고 있는 이 땅에서 두 차례나 한국을 방문한 끝에 처형된 영국인 선교사가 있었다.한국 개신교 사에서 첫 순교 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게 된 토마스 목사(Rev. Robert Jermain Thomas)가 그 분이다. 토마스와 그 일행이 사망한 일련의 사건을 그들이 타고 온 선박의 이름을 따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라 한다.영국 웨일즈의 회중 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런던 대학교의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학사 및 신학 과정을 마치고 런던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곧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그의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된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선교회의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Wm. Muirherd)와 불화를 겪게 된다.그는 중국어, 러시아어, 몽고어에도 능통한 선교사로 한국에서 건너온 천주교인 두 사람을 만나 한국어를 습득하게 된다. 그 이후 1865년 토마스는 한국으로 선교 여행을 떠나고 9월 13일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2개월 반 동안 체재하면서 그는 한국 천주교인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며 윌리암슨으로부터 받아간 성서를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1866년 1월 초에는 북경에 되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런던 선교회로부터 그의 새 임지로 북경이 정해졌음을 통고 받았던 것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 (서울: 기독부흥사 무디(Dwight L. Moody)가 부흥운동을 주도했으며, 1880년대에 이르러 신학교 학생들 사이에 선교부흥운동의 열기가 치솟아 전국신학교동맹 (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이 결성되면서 해외 선교에 뜻을 세운 선교사들이 나온 것이다.{) 전용복, 「한국 장로교회사」, (서울:성광문화사, 1980), p.50B. 장로교1. 북 장로교회1) 호레이스 뉴톤 알렌(Horace Newton Allen)그는 미국 북장로교 외지선교부 선교사로서 상해에서 의료 전도에 봉사하다가 1884년 2월 19일에 장로교의 정식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게 된다. 그는 처음 선교사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미국 영사관의 공의란 명목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1884년 12월 4일의 우정국 사건 때 부상을 입은 금위대장 민영익의 생명을 구함으로 고종의 어의가 되었으며 그 후에 광혜원(廣惠院)이란 한국 최초의 병원을 개설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한국프로테스탄트 역대기에 길이 남을 선교역사의 기점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선교사의 직함으로 인천에 상륙하게 된 것이다.2) 호레이스 그란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그를 목사로서의 한국 선교사 제1호로 임명하여, 1885년 4월 5일 바로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발을 내디디었다. 그는 입경하여 알렌의 제중원 교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활동초기에 외국세력을 반대하려는 백성들의 선입관념으로 기독교의 배척은 필연적이었기에 개인접촉을 시도하였다. 한국인 집에는 웬만한 집이면 사랑방이 있어 응접실 겸 회의실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언더우드 목사는 이 사랑방을 이용하여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 후 한국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Street Chapel)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중 그는 14명의 신자를 모아 예배를 드린 후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다. 이때에 서상윤과 백홍준을 장로로 선출하였다. 그후 서상 장로교에서 있을 때 보다는 훨씬 마음이 안정된 것 같고, 또 나는 실제로 언제나, 그리고 완전히 감리교인었다고 생각한다. {) 민경배, Ibid., p.150-151아펜젤러는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95-1916)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한 최초의 미 감리회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이다. 아펜젤러의 전기를 쓴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의 신앙과 선교활동과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한국에서 나의 사랑하는 교회의 초석을 놓은 데에 내 평생을 기꺼이 바치겠다. 아직 건물을 바라보지 말라.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건물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러면 감리교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꽃 피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란 이 나라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할 것이다.....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사는 기간이 최소한 1910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주여, 그 기간 동안에 내가 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만 알도록 도와주소서. 나는 주께서 내가 이곳에서 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으로 믿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으로 믿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메시지이기에 나는 그것을 충실하게 전파하기를 원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위대한 일이다. ..... 그것은 영광된 일이 아니겠는가. 악마는 자신이 세워 놓은 조상숭배, 관습, 방탕 등으로 열심히 우리를 침범하나, 우리는 그를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아펜젤러는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 등에게며 그리고 남쪽의 농사꾼들에게 그들의 말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위의 글은 아펜젤러의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당시 북감리교 해외선교부가 매클레이 목사를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 사업을 해도 내한했는데 그는 메리타임즈(Maritimes){) 캐나다의 노바스코시아(Nova Scotia)주 동부 해안지역을 의미한다.지역 장로교학교 선교협회(The Student Missionary Association of Presbyterian College)의 파송을 받아 온 것이다. 메켄지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 {) 백낙준, Ibid., p.148인 황해도 소래에 머물면서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겪었고 헌신적으로 교인을 돌보며 교회 건축에 매진하다가 1895년 6월 24일에 죽었다. 그러나 메켄지의 죽음은 캐나다에 있는 교인들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거기에 소래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메켄지의 후임으로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서한이 캐나다에 답지하여 특히 노바스코시아(Nova Scotia)지역 교회들이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캐나다장로회의 메리타임대회가 1897년 10월 7일 한국선교를 정식으로 결정하게 되었고, 이어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도 메리타임대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서둘러 한국선교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그리어슨(R. Grierson), 맥레(D. M. McRae), 푸트(W. R. Foote) 등 3인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9월 7일에 내한함으로 캐나다장로회의 한국선교가 본격화된 것이다.{)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소, Ibid., p.190D. 침례교펜윅(M. C. Fenwick)은 1889년 캐나다의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황해도 소래에서 머물다가 선교사업이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자 1893년 다시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는 보스턴에서 고든(A. J. Gordon)이라는 북침례교의 목사와 친분을 맺고 비로소 침례교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94년에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다시 내한하여 원산을 중심으로 침례교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고든이 시무하던 교회에 엘라 딩 기념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 {) 고든이 시무하던-107
    인문/어학| 2004.06.08| 24페이지| 2,500원| 조회(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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