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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칼빈과 쯔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사의 공통점과 차이점 평가B괜찮아요
    (1) 서론1. 연구 동기예전에 장로교회사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쯔빙글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었다. 종교개혁자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마틴루터와 칼빈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쯔빙글리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이번에 종교개혁사를 듣게 되면서 쯔빙글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예배 형태 그리고 개혁주의의 교리들에 있어서 특별히 한국 교회에 있어서 칼빈의 영향뿐만 아니라 쯔빙글리의 영향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교수님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쯔빙글리와 칼빈의 생각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어느 정도 인지 그리고 동시대의 인물로서 혹시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쯔빙글리와 칼빈의 교리들을 중심으로 각자의 생각을 구분해 보았고 이를 통하여 그 답을 얻고자 하였다.(2) 본론 - 쯔빙글리와 칼빈의 견해A. 성경* 성경의 권위에 관하여쯔빙글리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결코 성령님의 사역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즉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지만 아무 매개체 없이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에게 역사 하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만이 인간이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명료하고 확실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독자적인 역할 곧 하나님의 조명하신다는 사실을 제한하지 않고 이러한 독자적인 성경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그러나 가톨릭에서 성경이 아닌 성자에 대하여 권위를 부여하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려고 했던 관습을 비판하며 마리아 숭배사상을 부정하였다.쯔빙글리의 영향으로 농민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농민들은 그동안 교회의 잘못된 제도로 인하여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억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쯔빙글리의 교회 개혁을 외치는 소리는 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모든 관습과 제도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봉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농민들위와 유익한 규범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귀중하고 심오한 뜻을 성령님께서 이해하게 해주심으로 성경 속에서 이러한 모든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칼빈 -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을 우리들의 내면에 가져올 수 없다. 인간의 성화 곧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하여 나오며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통하여 성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인격과 관련해서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성령은 삼위일체 속에서 하나님의 제3의 인격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서 제3의 인격으로써 성부와 성자와 마찬가지로 성령에게도 성령의 자존성을 부여하고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성령님은 창조주 성부의 영과 창조주 영원한 말씀 의 영일때는 일반사역인 창조와 섭리와 관계되고, 구속주 성부의 영과 구속주 중보자의 영일 때는 특별사역인 선택과 관계된다.{) 박노원, [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유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2003) p.286*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쯔빙글리 -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누구나 택하고 버리실 절대적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이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신론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교리를 다루고 있다. 예수그리스동의 십자가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이해하지 않는다. 단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차원에서 이러한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과 비참함 속에 하나님의 정의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것을 생각한다.칼빈 - 하나님은 하늘에서 세상의 일을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즉 역사를 주재하시고 실제로 이것을 움직이는 하나님은 예지를 통하여 세상을 당신의 섭리가운데 있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성이 도달할 수가 없는도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며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세상에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이유는 타락한 세계를 회복시키고 파멸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갖는 분이셨다. 그런데 인성과 신성은 어느 한가지가 더 뛰어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님 안에서 연합되어 있는 것이다. 즉 한 인격을 구성하는 별다른 두 본질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구원에 관하여쯔빙글리- 이러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초는 인간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하심에 근거하여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이중 예정론으로 주장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타락 전에 예정을 하셨고 타락 후에 예정을 하셨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악하게 살게 되면 선택받은 영혼이 유기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의 예정에 있어서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쯔빙글리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또 다른 기준을 갖고 심판을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칼빈- 인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행위만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죄인인 인간은 구원에 있어서 아무 것도 첨가할 수 없으며 만약 신인 협력을 주장한다면 이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부정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 인간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심 )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유화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만일 이러한 예수그리스도 곧 중보자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칼빈의 5대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한번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은 끝까지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성도의 견인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와 성도의 견인의 문제에서 칼빈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록 하는 한가지 방향으로만 역사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을 보게끔 하시는 것도 신에 대한 궁금한 갈증 과 같은 종교의 씨앗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을 한다.칼빈- 인간은 누구나 종교의 씨앗이 남아있고 양심에 의해서 선악을 어느 정도 식별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예배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하여서 성경 외에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없다.* 인간의 과실에 관하여칼빈 - 인간의 과실은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과실은 우리들 자신에게 돌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절대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은 사실 세상 적인 기준으로 볼 때 모순이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서로가 조금도 모순이 아닌 것이다.* 결혼에 관하여가톨릭의 사제들은 당시에 결혼을 할 수 없게 규정지어져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제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며 그 규정을 어기고 결혼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쯔빙글리는 사제들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며 얼마든지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칼빈도 자신이 결혼을 한 것으로 보아 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 같지는 않다.* 금식에 관하여쯔빙글리는 금식이 결코 의무 조항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금식을 성경에서 주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금식 자체가 결코 구원을 얻게 해주는 지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쯔빙글리는 금식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까지 말하였다. 그는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말하였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금식을 할 때 고기를 먹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거리가 된다면 금식을 하고 그렇지 않다면 의무는 아니기 때문에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주장했다. 일례로 그는 사순절에 다른 사람들이 금식을 할 때에 고기를 먹기도 하였다. 이처럼 금식은 사적인 일이며 그러므로 개인에게 충분한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교회음악에 관하여쯔빙글리 - 교회에서는 수 있다. 칼빈은 그래서 교회들에서의 모든 성상들을 파괴하였다.E. 구원의 외적 생활* 성례에 관하여쯔빙글리- 성례전의 객관적 현실적인 효력을 부정하였다. 그리스도를 쫓는 제자직의 삶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아담 안에서의 모든 것들을 총괄 갱신하는 분으로서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이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으므로 하나님이시라고 쯔빙글리는 주장한다. ( 만족설 ) 이러한 예수그리스도는 성찬식이 베풀어질 때 결코 우리에게 다시 내려올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첫째, 성서의 선언에 의하면 육은 무익한 것이다. 둘째, 그의 세계관은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것 사이에 어떠한 밀접한 결합은 인정할 수 없었다. 셋째, 그의 기독론에 의하면 예수의 인성은 하늘의 일정한 장소에 제약되어 있다.즉 편재교리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므로 결코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로 오시지도 영적으로만 임재 하시지도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례는 결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도구는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칼빈- 칼빈은 성례전을 설교와 함께 우리들의 신앙을 돕는 또 하나의 것으로서 우리들의 신앙이 약한 것을 부축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외적인 표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례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의 요약이고 또 성령의 매개에 의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참여케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성례전은 반드시 성경말씀과 복음과 설교에 종속되어야 하며, 성례전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성례전의 효과는 성령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복음의 설교와 아울러 우리의 믿음을 돕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성례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노원, op. cit. p.292칼빈에게 세례는 죄씻음 을 의미하고 성찬은 구속의 증거를 의미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의 은사에도 참여한다.
    인문/어학| 2005.09.22| 15페이지| 1,000원| 조회(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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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눅 15장 11-32 절 (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 ) 에대한 고찰과 그를 통한 설교 평가A+최고예요
    우리는 본문에서 한 아버지와 두 아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모습을 각각 분석해 보면서 본문의 말씀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우리는 먼저 둘째 아들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의 분깃을 요구하였다.(12절)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의 분깃을 요구하는 행위는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재산을 줄 수도 안줄 수도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혹 재산을 나누어준다고 하여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이 재산을 필수적인 것처럼 여겼다. 아들로서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로서 아버지께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나올 첫째 아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다. 사실 아들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당연히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재산을 요구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아버지께 재산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빨리 돌아가시라는 말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섬기고 존경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버지를 수단으로 돈을 얻으려고 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유산을 남기는 수단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 그 자체로서의 목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아버지를 수단적인 존재로서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은 아버지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얻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이용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어야지 수단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 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이러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 방탕하게 사용하였다(13절).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가치를 제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생명과 바꾸어진 아버지의 피와 땀으로서의 유산이 아니라 아들로서 것이다. 이처럼 육신의 갈증을 느끼게 되면 나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갈급함은 쉽게 지각되어지지 않으며 나의 힘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아들은 아직까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의 풍요로움 ( 영육간에 ) 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육신의 평안함(17절- 부요한 가정을 추측해 볼 수 있기 때문에)은 누렸을 지 몰라도 영적인 평안함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까지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께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떠날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만약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있었다면 아버지를 멸시하는 행위를 하지도 않았으며 아버지를 떠나려는 마음을 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버지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갈급하게 되고 그 갈급함을 채우기 위하여 세상의 육적인 것을 향하여 달려나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이와 같은 둘째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다. 그는 아버지에게 종으로 써달라고 하기 위하여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19절)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재산을 달라고 하였을 때 만약 아버지에게 사랑과 자비가 없었다면 순순히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버릇없는 아들을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아버지의 마음은 즐겁기보다는 걱정과 근심이 더 컷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버지도 자신처럼 이기적이며 악하기 때문에 자신을 더이상 아들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종으로 써달라고 간구하기 위해 아버지께 가려고 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아들의 태도는 사실 모순을 갖고 있다. 만약에 아버지가 그처럼 악하다면 과연 자신과 같은 아들을 종으로 받아 줄 수 있는 가 하는 점이다. 정말 그러한 아버지라면 종으로조차 받아주9절) 이제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종으로서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간청하기 하려고 합니다. 그가 돌아가려고 했던 궁극적인 목적인 육신의 요구를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에 대하여 죄를 지었음을 깨닫는데 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었고 고백할 수 있었다.탕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뉘우쳤고 이제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아버지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다.(20-21절)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며 아버지처럼 우리를 감싸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 처럼 우리도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스스로 외면하며 아버지를 떠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떠난 삶이 더 행복할 것 같지만 아버지를 떠난 삶, 하나님을 떠난 삶은 우리에게 온전한 평안과 안식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내 육신의 갈증을 채울 수 있지만 내 영혼의 갈증은 결코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이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은 아들에게는 구원의 감격이요 아버지에게는 잃은 양을 찾은 감격인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아들의 어떠한 노력으로서 얻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로부터 환영을 받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은혜요 2차적으로는 자신의 회개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서 얻어진 구원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언제나 나의 죄를 회개하되 그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하여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우리는 두 번째 로 아들들을 향한 아버지의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12절) 아버지는 재산을 요구하는 아들들의 요구를 순순히 응답해주었다. 사실 자녀로서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재산을 요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수치스럽고 앞에서 아들을 기다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수치를 참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달려간 데에 있다. 그는 아들에게 달려가서 입을 맞추고 목을 안았으며 건강히 돌아온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이처럼 아버지가 잃어버린 자식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가 돌아옴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처럼 하나님도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자가 수많은 양을 치면서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모든 양을 나두고 달려가는 심정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들이고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다.(22-24절) 아들은 아버지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고 하였다.(21절) 그러나 아들의 죄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새 옷과 반지 신발을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행동은 돌아온 둘째가 자신의 아들인 것을 공식적으로 명시하는 행위였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도 사실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의 행위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수치 또한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실 둘째 아들의 재산 분배 요구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아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하고 환대해주고 잔치를 베푸는 것은 어쩌면 비상식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누가 감히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그렇게 처참히 죽임으로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자식을 갖는 부모의 마음으로서 불가능한 것이다. 혹 부모가 자녀를 위해 대신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자녀를 부모가 죽이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비정상적인 사랑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고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처럼 불가능한 역사가 일어났다.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특권을 얻은 유대인들을 곧 바리새인들 ( 첫째 아들 ) 사랑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들 또한 돌아오고 회개하기를 원하셨다. 이방인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아버지는 이렇게 자녀들을 사랑했건만 자녀들로 인한 아버지의 수치는 계속된다. 29절과 30절에서의 첫째의 항변에 대해서 아버지는 아들을 설득하려고 아들에게 준 기업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 재산분배 사건은 아버지로서 생각하기 싫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아들에게 법적으로 완전히 양도하였기에 더 이상 이 일을 들추어내는 것은 피차간 좋을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다시는 입에 담기 힘든 그 사건을 언급하였으며 지금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은 곧 첫째 아들의 것임을 명시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두 아들은 가족이므로 돌아온 다른 형제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며 거기에 참여하는 것도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여기서 함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만찬에 참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첫째 아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새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원망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들을 인정하며 예수님이 베풀어주는 구원의 만찬에 함께 참여하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비난하며 둘째 아들을 위한 잔치( 죄인을 위한 잔치 )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보여주는 사랑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직결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구원은 결코 우리들의 의로 인한 것이 아.
    인문/어학| 2005.06.16| 7페이지| 1,000원| 조회(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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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학] 영화속 남녀의 역할- 여성학 ( 가문의 영광에서 )
    남녀 인물의 특성과 역할정준호 -극중 대서대서로 나오는 정준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편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그는 부와 명예를 함께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물질 만능주의의 현 세대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세대에도 선호되어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가지 갖지 못한 점이 있다면 남성다움이라고 하는 남성미를 갖고 있지 못한 점이다. 서울대 법대생 이라는 단어는 공부 벌래 라는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인지 정준호는 자신의 사업 쪽에서는 자신감이 있고 당당하고 두뇌 회전이 빠르다. 하지만 연예에 있어서는 카리스마와 자신감은 온대간대 없고 부끄러움이 있으며 눈치가 없는 매너가 없는 어리숙한 모습으로 돌변한다. 또한 강한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한 남성의 모습으로 전락해 버린다. 나약한 남성인 것을 알지만 때로는 여자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강인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일반적인 남자들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연약함과 어리숙한 모습은 여성의 모성애 본능을 자극하고 영화의 재미를 위해 서울대생이라는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설정해 놓은 것 같다. 그는 법대생의 이미지답게 논리적으로 말하며 득과 실에 대한 철저한 이분법적 원리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인지 일 처리에 있어서 철저하게 분석하며 인과 관계에 대한 원리를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인 것 같다. 때로는 냉철한 판단과 냉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방식 때문에 감정도 없을 것 같이 보이지만 가슴 따뜻한 남자의 모습을 갖고 있다. 연예에 있어서 그는 일반적인 여성이 원하는 것과 같이 이끄는 타입의 남자는 아니다. 성격은 온화하며 수줍음을 많이 타기 때문에 여자에게 먼저 다가서는 리더적 역할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 매일 리드 당하는 여성들 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사회적인 구도 속에서 압박 당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모습은 대리 만족을 시켜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 여성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속하며 그 여성에게 충성하려고 노력하며 교제 가운데 어려움이 있어도 가능하면 유지하려고 노력을 한다. 하지만 노력을 해본 후에 아니라고 판단될 때에는 가차없이 돌아서는 결단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이처럼 극중인물로서의 정준호는 외적으로 아주 강한 남성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상함과 따뜻함을 갖고 있는 남성으로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선호하는 남편의 상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김정은 - 극중 진경극중 진경으로 나오는 김정은도 평균적으로 남성들이 원하는 아내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일반적인 여성이 그런 것처럼 자기보호 (내숭) 라는 코드를 갖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남자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며 순종적이다. 이러한 순종적인 모습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과는 다른 털털함과 담대함이 숨어 있다. 어머니와 여자 형제가 없는 가족에서 자라난 환경 때문인지 이러한 순종적인 면 뒤에는 털털함 그리고 정준호에게는 없는 담대함과 박력이 있다. 그러나 이 모습이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 그녀의 부드러운 모습 속에 숨어 있다. 그러나 특별한 때가 되면 그것이 나타나는데 그녀가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적극적으로 대서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담대한 모습에서 그녀의 성품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녀는 연예의 과정에서 오히려 남성을 리드하며 남성이 여성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남성의 마음을 얻으려고 자신의 마음을 소극적인 듯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성을 쟁취하려고 하는 어쩌면 남성들이 갖어야 하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도 여성들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 2005.06.16| 2페이지| 1,000원| 조회(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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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윤리] 기독교 윤리와 그리스도인과 삶
    1. 서론이 시대는 절대적 가치와 절대적 보편성이 사라진 개별성과 개성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상이 지금 이 시대의 우리의 사고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이 무너지고 가치와 기준이 무너짐으로 나타난 것은 개별성이 강조되는 개인주의였다. 개인주의가 처음에 나타날 때와 달리 사회적인 문제로서 이슈화 되어가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삶을 동일하게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동안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세상의 기준을 받아들인 결과 개교회 중심, 개인의 신앙 과 같은 폐단을 낳게 되었다. 특히 개교회 중심주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돌아보고 구제해야 할 교회가 자신의 역할을 상실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많은 교회들은 자신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하여 많은 사업들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양적으로 수적으로 성장하였지만 오히려 영적으로는 뒤떨어지고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면은 단지 교회적 차원으로만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니다. 교회에 속해 있는 기독교인들의 개개인의 삶 속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게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그 어느때 보다 더 만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세상사람들은 점점더 기독교인들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종교를 갖게 된다면 어떤 종교를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서 가장 낮은 지지율을 보이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최소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기준은 갖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그들의 기준은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 유지되는 데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의 붕괴와 탈 도덕주의{) 윌리엄 슈바이커( 문시영 역 ),『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서울 : 삼림출판사, 2003 ) 100p등으로 인하여 그 현상이 기독교인에게서 현저하게 나타남으로 인하여 사회는 기독교에 대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기독교는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자체가 무너짐으로 인하여 사회에는 큰 혼란이 찾아오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의 기준이 무너지고 어른과 아이의 기준이 무너지며 질서가 점점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그것이 가장 옳으며 윤리적인 것이라는 착각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 마치 노아의 홍수 사건 이전에 나타난 인간들의 타락상, 바벨탑을 지으려고 하였던 그 당시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인간은 죄의 씨앗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계속적으로 전가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사람처럼 살지 못하게 만들어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은 것 선한 것 윤리적인 것을 찾는 다고 하지만 이성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고 소에서 지금의 단계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고 중세에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찾기 위하여 그리고 그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절대자를 찾는 일을 철학이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죄로 인하여 가리워 졌기 때문에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자연계시 속에서 조차도 도저희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연구와 경험을 통하여 다양한 많은 윤리적 기준 가치의 기준을 내놓았지만 결코 사람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론이 나왔으니 데리다를 기점으로 한 해체주의 였던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이성은 아무런 진리도 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진리라고 여겨왔던 것들 또는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겨졌던 것들에 대한 회의를 갖고 해체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세상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윤리의 기준 가치의 기준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러한 기준은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해결점은 바로 성경 기준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자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십계명을 통하여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ibid, 77-78p십계명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1-4계명과 5-10계명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5-10 계명만을 논하겠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5번째 계명이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6개의 계명중 첫 번째에 위치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앞의 4개의 계명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난 것은 궁극적으로 영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에 의한 것이고 육적인 의미로서는 부모님을 통하여 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낳았지만 육적으로는 인간이신 부모님을 통하여 육신을 입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부모님을 경외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전 인류의 머리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듯 현실의 삶속에서 부모님을 섬기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기준이 요즘은 지켜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부모님을 섬기며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의 세대는 부모님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또한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온전히 실천되어지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부분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사실 이생에서의 첫 번째 축복이 가정으로부터 주어지는 축복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하나님의 원리 안에서 잘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큰 실수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급속한 산업의 발달과 서구식 사고의 영향으로 우리는 핵가족 개인주의 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예전과 같이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농경시대에 부모님은 곧 연장자로서 삶의 지혜를 갖고 있는 존재 이었다. 언제 씨를 뿌릴지 언제 물을 대며 언제 수확해야 하는지를 아는 분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지혜로운 부모님뿐이었다 사랑하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창조자인 하나님 자체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며 누구나 지킬 수 있는 계명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대중 매체를 통하여 보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루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 인구에 대비하여 이러한 큰 범죄를 짓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비율을 차지하지 않을 것이다. ( 나머지 다른 계명들을 범하는 횟수나 비율에 비하여 ) 그러므로 이 계명은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에게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율법의 명령과 요구가 무엇인지 깨닫는 다면 결코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율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첫째는 문자 그데로의 의미로 이해하는 소극적인 것이고 둘째는 문자를 역으로 생각하여 적극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적극적인 측면으로 이 의미를 생각해 보면 사람의 생명을 풍부하게 해주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좀더 쉽게 이해하면 이 말은 자신이 살인의 충동을 느낄 정도로 배척하는 사람조차도 사랑하라는 것이며, 자신을 살인하려고 하였던 용서할 수 없는 죄인조차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의 삶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용서의 모범을 따라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을 쉽게 적용하기 어려워하고 있다. 일반적인 교회의 신자뿐만 아니라 직분을 맡은 직분 자에게도 이는 결코 쉽지 않을 일일 것이다.용서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는 일은 교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교역자들 간에 또는 교역자와 유와 기적 그리고 사랑의 베풂을 통하여 보여주셨다. 특별히 초대교회의 나눔의 원리는 큰 시사점을 준다.{) 혹자는 이러한 나눔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공산주의가 생겨났다고도 말한다.현재의 한국 교회의 추세는 교권 확장과 교세 확장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 결과 교회가 지역과 사회 속에 들어가 있지만 그것은 단지 그 지역과 사회 속에 교회의 부지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밖에는 더 이상의 어떤 의미도 제공할 수 없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워지는 것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는 어렵고 힘든 약자를 돌아보는 관심이 철저하게 배제된 상태이다. 개인의 안심입명과 개 교회의 안심입명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 적인 부를 포함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서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이다. 나에게 있는 부와 명예는 나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상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은 부를 축적하되 사회로의 환원 은 피하고 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에 축적을 통한 기쁨은 영원토록 해결되어질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잠시 있다 썩어져 버릴 것들을 위해서 온 마음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사회를 돌아보아야 한다. 복음은 사랑과 함께 선포되어져야 한다. 사랑이란 것은 사람에 따라 말을 통한 위로 또는 물질을 통한 구제로 여겨질 수 있다. 사랑이란 의미는 어느 상황 어느 시대에나 똑같지만 그 표현방법은 때에 따라서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표현과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다. 또한 외식주의에 빠져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사랑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랑을 하곤 한다 . 이러한 사랑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구제이며 사랑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사랑이 이러
    인문/어학| 2005.06.16| 15페이지| 1,000원| 조회(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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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신학] 다양한 현대신학 사상들과 그 평가
    1. 윤리주의 신학1-1 형이상학(形而上學)에서 실천(實薦)윤리(倫理)에로의 전환중심적 사상형이상학적 대상에 대한 인간 인식의 가능성이 회의 내지 불가지론의 입장으로 귀착된 것은 칸트의 입장에서 정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칸트철학 이래로 형이상학 내지 신학의 학문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더욱 증대되었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칸트 철학에 힘입어 순수이성의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들을 윤리의 문제로 끌어내렸다는 것이다.다만 신학의 당위성은 전통적 교회와 인간의 내적 양심의 명령에 의한 실천적 요청에 의하여 윤리성의 문제로 그 관점을 달리하게 되었다. 단지 신학의 신앙고백은 윤리적 결단에 의한 새로운 인간상을 세워나가는데 큰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교회의 전통적 신앙고백에 대한 윤리적 행위의 우선적 이해는 일찍이 경건주의를 일으킨 스패너에 의해 시도되었다. 현대의 윤리 신학은 그 중심에 있어서 교리 가 아닌 삶의 문제 또는 형이상학적 신학이 아닌 윤리에 대한 강조 점으로 인해 경건주의가 강조한 요소를 역시 반복하는 모습이 있기는 하나...20세기초에 시작한 윤리신학이 생명이 없는 교리가 아닌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즉 하나님에 의한 계시가 (형이상학) → 윤리로순수이성 → 실천이성으로기독교의 내용이 도덕적 양심적인 내용으로 끌어내려진 것이 중요하다. 계시적인 차원의 사라짐 - 스패너에 의해서 윤리적 행위의 우선적 관점 - 경건주의1-2 : 철학적 배경이러한 사상의 흐름은 , 일면 칸트에 대한 헤겔 철학의 비판에 그 근원을 두기도 한다. - 칸트의 비판 철학에 영향을 입은 철학자들은 소위 신-칸트학파로 불린다. 이들은 형이상학의 문제로부터 탈피하여 윤리적인 가치관의 문제나 이러한 가치관에 입각한 종교의 해석에 관한 문제 등에 관심을 갖게 된다.- 칸트에 의해서 형이상학이 단순한 내적인 양심의 문제 가치의 문제 정도로 끌어내려짐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지식은 따라 종교의 내용을 제멋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현대적 사고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과 신앙의 내용간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이 두 간격을 메우는 역할을 반대하는 것이 바르트의 입장인 반면에 철학이 이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틸리히의 입장이다. 인간의 문명과 신앙은 분명히 내용간에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명에 따라 신앙을 또는 신학을 종교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이들은 윤리신학이나 자연신학을 배척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으로 종교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틸리히는 신정통주의적 사고 안에 들어 잇는 종교철학적 경향, 즉 신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이므로 신과 인간의 만남은 논리적으로는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신정통주의적 사고를 배격한다 ( 신정통주의에서는 전적 타자성 의 원리에 의해서 인간과 신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판단 또는 가치판단 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방법이 있으니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접촉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르트 t( 신정통주의 - 신학을 이성적으로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신학을 인간의 내면의 종교 또는 윤리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사고를 비판하면서 나온 것이 신정통주의 , 윤리신학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 ) 그는 오히려 신과 인간간의 차이를 존재론적 이해로서 극복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 자기를 발견함으로서 그는 비로소 자기를 초월한 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이해함으로서 자기를 초월하는 신을 발견하게 된다. 실존주의에서는 진리를 얻기 위해 자기이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신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존재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과 결코 신은 완전히 떠나있지 않다. 인간은 인간자신을 올바로 인식할 때 자신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실재하는 만물 속에 깃든 존재론적인 근거로서 신과 세상간의 화해를 주장한다. 틸리히그 자체로 명명되는 초월자가 하나님의 존재로 이해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피조물로 이해된다는 자신의 논지를 펴고 있음을 본다.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서 여겨져야지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때 곧 피조물로 이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존재자는 존재 그 자체로서 있어야 한다. 때문에 기독교적인 모든 지식은 ( 상징, 종교적 언어, 신화 )다양한 문화의 근거를 이루면서 일종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일체의 문화 내지 종교는 존재의 근거를 표현해 내는 일종의 상징이요 이 상징은 종교와 문화의 구분이나 간격을 없애고 하나를 이루어내는 유일한 준거가 된다는 것이다. 일체의 문화 내지 종교는 기독교의 모든 지식의 혀에는 종교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의 근거를 이루면서 기독교의 모든 지식이 종교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에 근거를 두면서 존재자에 대해서 또는 존재의 근거를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그러나 그의 방식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대한 견해를 빗나가게 했다. 기독교의 계시를 약화 시켰다. 그는 성경을 중심으로 한 신학의 지직 계시의 가능성이 칸트철학 이래로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다는 전제하에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하기 때문에 만일 누군가가 전통적인 신학의 입장이나 성경적 진술을 근거로 그의 사상을 평가하거나 비판한다는 것은 오히려 서로 간의 평행선을 달리게 되는 격이 되고 만다. 성경은 단지 종교성 존재이 근거를 표현해내는 상징,. 우리가 인격적으로 만남을 갖고 있는 하나님을 존재자가 아닌 비 존재자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이라고 규정함으로서 이미 그는 피조물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2 과정신학현대의 과학적 사고와 하나님 이해과정신학은 현대의 신학적 흐름 중에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일종의 반응으로서 나온 철학적 사고에 영향을 입은 신학적 경향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제는 급변하는 이 세계와 현실에 관심을 두면서 신학적 관심도 신의 불변하는 초월적이 아니니 내재적 측면에로 그 강조점이 옮겨지면서 소위 과정신학이라는 이름아래 그 영향력을 갖게 우리는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창조해내는 그 어떤 것을 규명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 일수도 있고 아무튼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과정철학이다.2-2 화이트 헤드 -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과정철학으로서 모든 존재와 흐름의 과정에 있는데 그것은 그 본질로서의 정적이 아닌 역동적 흐름을 지닌 동적이라는 말이다. 변화하고 움직이는 활동성. 일체의 모든 실재는 그 존재와 흐름의 과정에 있는데 그것은 그 본질로서의 정적이 아닌 역동적 흐름을 지닌 동적 이라는 말이다. 모든 실재는 존재와 흐름의 과정에 있는 데 그것은 그 본질로서의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실재와 존재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정적 아니라 동적이라는 것.- 활동성일체의 모든 사물은 스스로 변화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실제로 서로 관련을 지으면서 계속 변화해 나가는데 있다고 한다.과정철학에서의 화이트 헤드는 일체의 모든 실재는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어서 서로 관련을 지으면서 계속 변화해 나가는데 있다. 그래서 실제란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라는 것이다.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이해면 세상의 모든 실재는 스스로 변화하는 힘이 있어서 서로 상관하여 계속 변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실재는 동적이라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신을 포함한 일체의 만물들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물리적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기능을 유하면서 서로를 포괄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신에 대해서 신은 끊임없는 자기변화 + 창조적 활동 : 불변성X. 그러나 그는 범신론이라는 누명을 쓸 수 있으나 그는 세계 안에서의 신의 개념으로 여타의 신 개념과 구별하고자 한다, 그는 전체를 거대한 생명의 움직임 그 자체로서 보고 있다. 움직임 현상 그 자체가 실재인데 이는 창조와 변화를 함께 하고 있다.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2-3 과정신학과 하나님 이해화이트헤드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과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다른 모든 실재들과 마 상대적이며 시간적이며 유한한 존재다. 신은 주어진 시간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으로서 결과적 본성에 따르면 신을 주어진 자연 그 자체로 보는 범신론적 사고와는 달리 자연과 더불어 또는 자연 속에서 파악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엇이? 신이 신은 끊임없는 변화와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순환과 흐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신!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신이 아니라 역동성 흐름 변화 등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신 존재는 이러한 두 극의 관계 속에서 변화와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타낸다.2-5 기독교와 다른 점일반 신학에서의 신은 창조자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과정신학에서의 신은 Director 곧 신은 세계의 움직임을 관할하는 자 신은 어떤 것으로서 세계를 움직여나가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신은 세계를 움직여나가는 자! 또는 어떤 것!이 곧 신이다. 신은 이 세상과 더불어 함께 움직여 나가며 상호의존적인 입장에서 신과 세계가 전개된다고 하는 것이 과정신학의 입장이다.신은 이 세상과 더불어 함께 움직여 나가며 상호의존적인 입장에서 신과 세계가 전개된다.신이 세계와 완전히 떨어진 것 또는 세계가 신도 아니며 신은 세계와 더불어 또는 그 속에서 상호의존적인 입장에서 신과 세계가 전개된다. 신은 세계 속에서 또는 세계오 더불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만유내재신론 -panentheism과정신학에서의 신 - 과정, 현상, 존재 자체, 흐름 더불어, 상호의존, 양극, 소위 하나님은 세계 내의 존재로서 시간의 연속성과 사건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세계와 더불어 드러내는 것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세상에서 드러낸다. 시간의 연속성과 과정 속에서2-6 평가형이상학적 개념 안에서 우주의 변화나 흐름과 전혀 무관한 하나님의 개념을 과정신학은 배격한다. 우주의 변화나 흐름과 무관한 하나님의 개념을 과정신학은 배격한다. 과정신학은 우주의 변화나 흐름과 무관한 하나님의 개념을 실어한다.- 성경적 진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오히려 형이 협력자
    인문/어학| 2005.06.16| 10페이지| 1,000원| 조회(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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