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12지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10간토생금, 금생수,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상생.수>화, 화>금, 금>목, 목>토, 토>수 - 상극.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크게 2가지이다. 하나는 특수 상대성 이론, 하나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공간의 휘는 것을 의미하며, 특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을 설명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공간의 휘는 현상은 달리는 열차 안에서의 공놀이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공을 위로 던졌을 때, 그 공이 공을 던진 행위자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만약 공이 순수하게 위로 던져졌다면 그 공은 공이 던져진 위치로 떨어져야 하고, 그 동안 이동하는 행위자에게 돌아와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공이 행위자에게 돌아온 것을 볼 때, 이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에서나, 정지해 있는 물체에서는 모든 운동법칙이 똑같이 성립한다는 것과 공의 낙하가 휘어서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동시가 동시각이 아니다는 것으로, 빨리 달리면 시간은 느리게 간다는 것과 빠를 수록 물체가 무거워 진다는 것, 아무리 빨라도 빛보다 빠를수는 없다는 것과 빨리 달리면 길이가 줄어든다는 것이다.자연관은 동아시아적 자연관과 서양의 자연관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동아시아적 자연관은 기(氣)설로 동아시아에서는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로 인간은 우주에서 나온 존재로, 둘은 서로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두 존재 역시 기로 이루어져 있고, 이러한 기 사상은 동아시아의 사고방식 및 언어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반면에 서양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자원으로 생명이나 활력, 의지등을 일체 부정한다. 따라서 자연은 이용의 대상으로만 볼 뿐, 다른 의식을 갖지 못해, 환경 파괴의 주 원인이 된다.세종대의 과학기술은 당대 세계최고의 기술로,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의 발전을 볼 수 있다. 먼저 천문기구를 살펴보면, 간의의 경우, 중국에선 혼천의라 불리는 것으로 직접 별을 관찰할 수 있으며, 3개의 고리가 있다. 원래 호판을 시켜, 경회루 앞에 두고 관측하였지만, 임란 때 소실된 후로 기록으로만 크기를 추측할 뿐이다. 동표는 태양의 그림자를 관측하는 막대기로 남북의 길이변화로 계절을 파악하고 동서 길이로 하루시간을 파악했다. 가로막대와 영부로 그림자 길이를 정교하게 잴 수 있었고, 이는 아랍의 천문학 지식이 원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여진다. 혼천시계는 물을 이용해 움직이는 시계로, 지구를 중심으로 해와 달의 움직임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역법의 개량과 천문의 관측에 큰 도움이 되었고, 후 송이영의 혼천시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임란 때 소실되었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기에 복원하는데 약 100년이나 걸렸다. 자격루 역시 물을 이용한 시계로, 현재는 그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종소리와 푯말로 하루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였다고 한다.역산학은 달력과 1년주기 및 일식, 월식을 예측하는 등의 연구를 하는 학문으로 초기에는 중국의 역산학을 빌려 사용했으나, 우리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만의 역산학을 기록한 칠정산을 개발하기에 이른다.의약학 역시 처음에는 중국의 황제내경과 같은 의술서를 사용했지만, 의타성에 의해 잘 맞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사람들에게 맞는 의학집을 저술하였다. 바로 의방유취와 향약집성방이다. 그 중 의방유취는 의약학 백과사전으로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출판된 중요 의약학 저서들이 집대성되어 있다. 이는 후에 허준의 동의보감 저술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리지로는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이 있고, 세계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있어서, 당시 조선의 세계관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농업에 관련되어서는 농사직설과 측우기의 발명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측우기는 강수량 측정기로서, 각 지역마다 강우가 얼마나 많이 왔나를 측정해서, 지역마다 세금분배의 차등과 농업 생산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농사직설은 우리의 실정에 맞는 농업 방식을 제시한 농서로, 기존에 사용하던 농상집요와 같은 외국 농서를 배제하고, 여러 지역에 보내 농업발전을 적극 권장한 책이다.이렇게 세종시대에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던 배경은 지배계급이 과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공정한 과세를 위해서도 천문학과 역산학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조선문화의 일본전파에 대해 살펴보면, 삼국시대에도 담징이나, 왕인, 아직기 등과 같은 학자들이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거나, 유교나 건축술 등 여러 가지를 전래해 주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1592년 임진왜란이다. 일본은 임란 이전에 이미 1543년 총포를 전래 받고 얼마 뒤 부터는 각 지에서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자체 내전이 종결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수십만의 정병들이 갖춰져 있던 반면, 조선은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발전했을지 몰라도, 무력에서는 월등히 열세였다. 따라서, 임란 후 수많은 과학 기술의 정수들이 소실되고, 20만 정도의 인구가 일본으로 강제 나포 되었으며, 많은 서책들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이후, 일본의 문화는 이들에 의해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나포되었던 많은 수의 지식인들은 일본 지역에서 이들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이는 향청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러 기술을 가진 직공들은 각기 위치에서 이들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여러 사람이 있지만 그 중 한명인 홍호연이란 선비를 보면, 사가현 일대의 유학의 개조로서 기록되고 있고, 현재도 그의 비석이 남아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에선 유학이 강성하고 불교와 기독교를 배척하기 시작한다. 유학이 기득권층에 미친 영향은 하야시 가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한 축을 담당하던 하야시 가문이 후지와라 세이카의 학문을 사사 받는데, 후지와라 세이카 역시 조선 유학자에게 학문을 사사 받은자 이다.직공들이 문화를 발전시켰던 예는 도자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란 후 남원에 살던 43명의 도자기 공들이 일본에 끌려와 ‘묘대천’에 정착하여, 사쓰마번에 도자기 부흥을 일으켰다. 이들은 전원 사족의 신분을 얻었고, 명치유신때까지 조선 이름을 갖고 조선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이들의 후손은 지금도 일본 6대 도자기 가문 중 하나이다.또한, 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이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통신사절은 당인 이라 불리며 일본인들에게 경외를 받았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들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도쿠가와 정권 초기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명분을 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정림사지사학과3학년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위치한 삼국시대 절토로써 1983년 3월 26일 사적 제 301호로 지정되었다. 정림사지에는 유물인 탑(국보 제9호) 과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있다. 정림사지가 생긴 역사적 사실, 구조, 유적 순으로 알아보겠다.사비도성의 중심지 정림사백제 성왕은 538년 봄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왕궁과 관청을 비롯하여 사비도성 안을 중앙 동 ·서 ·남 ·북 등 5부로 가르고 그 안에 거주민을 조성하는 도시계획과 더불어 사찰이 건립되었다.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던 시기의 도성의 모습이 중국 사서「주서(周書)」백제전에는 "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 라고 적혀있다.사비성 도읍기의 사찰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단연 정림사지이다. 게다가 정림사지는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 구간 내에서도 중심지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입지조건은 정림사지가 사비도성을 조성할 때 일정한 계획 하에 조영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림사지와 왕궁과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 낙양성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와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준다.또한 정림사지 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있는데, 이것은 백제 왕실 내지는 국가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성의 공간으로 정림사지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구조정림사지는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일직선으로 놓인 백제 전형의 1탑1금당식 가람배치)구조이다. 또한 복도가 건물을 감싸는 배치 형태이다.하지만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다.또한 중문 바깥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다.이는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연못이다.이 밖에도 정림사지는 금당의 이중기단, 강당지 및회랑지의 와적기단, 석탑부의 판축기법등 고대 가람의특별한 형식을 보여준다.유적(1)정림사지5층 석탑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 흔히 백제오층석탑이라고도 한다.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8.33m이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개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선택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 형식을 간략화 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 되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2)석불좌상보물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불신의 입체감이 없이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다. 손상으로 인해 그 형태를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우나, 친근감을 주는 형상과 조각이 우수하여 주목되는 걸작으로 고려 때의 번성함을 보여준다. 이는 노천에서 전래되고 있었으며, 머리와 보관은 화재와 마손으로 손실되어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머리 위에는 둥근 보관이 올려져 있으며, 이목구비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신체는 불신과 불두를 잇는 짧은 목에 삼도표시가 없으며, 좁고 둥글게 표현된 어개와 법의 형태는 마멸로 알 수 없다.우리나라 탑은 다 홀수 이다??-모든 탑이 다 홀수는 아니다. 짝수탑도 많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경천사지 10층 석탑, 원각사지 10층 석탑, 불국사의 다보탑도 2층이다. 또한 그 외에도 짝수 탑이 많이 있다.일반적으로는 홀수 탑이 많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보통 탑의 모양을 보면 위로 갈수록 얇아지는데 이것이 그냥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제곱근 까지 계산해서 안전하게 만들려고 그런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비례를 잘 맞추어야 한다. 또한 탑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예를 들자면 목탑, 석탑, 전탑, 청동탑 등이있다. 그런데 비교적 만들기가 수월한 목탑계는 짝수탑이 많다. 그리고 비례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고 개성을 중시하던 고려시대 탑도 또한 그러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천사탑 이다. 중국에는 전탑이 많고 일본에는 목탑이 많다. 우리나라는 중국처럼 좋은 흙이 없으니 전탑을 별로 만들지 않고. 그에 비해 질 좋은 화강암이 많았기 때문에 석탑이 많은 것이다.
◎음식 예절 및 초대방법A가정에서 B가정의 점심 식사 초대 방법이다. 먼저 거실에 위스키ㆍ과실주 등 여러 가지 술과 비스킷 등 짭짤한 마른안주를 마련하거나 조그만 소시지 또는 땅콩ㆍ올리브 열매를 준비한다. 이제 식사가 시작이라고 알리는 ‘아페리티프’라는 술을 초대한 가정에서 초대 받은 가정의 한두 잔 둘을 권하며 술이 못하는 사람을 위해 오렌지나 사과주스를 준비해 놓아야 한다. 손님이 많을 땐 식탁에 앉을 사람의 이름을 적은 카드를 놓기도 하며 초대받은 B가정은 초대한 A가정이 자리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는다.식사의 첫 순서 ‘전채’라는 입맛을 돋우는 음식이 나오는데 이를 ‘오르되브르’라고 한다. 점심 식사엔 절대로 수프는 나가며 안 되며 저녁에는 간혹 나가도 되지만 오히려 오르되르므를 나갈 때가 많다. 수프는 프랑스 사람들 인식의 아주 질이 낮은 음식으로 가족끼리 간단히 식사할 때나 먹지 손님을 초대했을 땐 내놓지 않는 것이 보통이며 만약 스프를 대접할 때는 새우 수프라든지 해산물 수프 등 고급재료를 사용한 수프나 건더기 없는 맑은 수표인 콩소메 수프를 대접해야한다.두 번째로 ‘앙트레’라고 전채가 나오는데 (영어로는 에피타이저) 대개는 오르되브르 없이 ‘앙드레’부터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앙드레는 생선 또는 고기 즉 육류가 섞이지 않은 요리로 고기를 사용하더라도 아주 잘게 갈거나 또는 진기하고 맛 좋은 해산물로 사용하기도 한다. 흔히 앙트레로 나오는 음식은 버섯을 섞어 구운 타르트(파이) 같은 위에 부담가지 않는 부드러운 식물성 요리나 감바스(왕새우),오마르(바닷가재),위트르(굴) 같은 고급 해산물이나 소송(연어)을 얇게 저은 것 또는 거위 간(푸아그라)을 간 것 등이 나오는데 거위 간 같은 것은 프랑스에서 대단히 고급으로 여겨서 100g에 보통 몇 만원이 넘는 게 보통이다. ‘앙트레’가 들어오면서 그날의 초대받은 가정은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따라주게 되어 있는데 손님을 앞엔 이미 3~4개의 잔이 놓여그림(1)져 있으며(그림2) 목이 말라도 직접 자리 손으로 따르지 않으며 그렇다고 눈치 주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 주인은 주인대로 손님들의 잔이 비기 전에 따라주어야 하며 수프를 먹을 땐(그림3) 기울이는 방법도 있으며그림(2) 그림(3)-4p-야채샐러드를 먹을 땐 나이프로 잘라서는 안 되고 오직 포크로만 사용하여야 한다(그림)생선은 한쪽을 먹은 다음 뼈를 들어내고 다른 한쪽을 마저 먹으며 뒤집어서 먹을 경우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으므로 음식이 나온 대로 먹는다. 닭고기를 먹을 땐 허락 없이 손에 들고 먹었다간 야마인 취급을 받으며 식사를 할 때에는 항상 손은 식탁위에 있어야 한다. 음식이 하나 나오고 다른 하나가 또 나올 때마다 초대받은 사람은 그 음식한 사람한테 맛있다고 계속 칭찬을 해주어야지 예절이며 음식을 남기면 그 집안의 음식이 형편없단 식으로 판단되어 다시는 초대 받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