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머리말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 봉건 사회는 나라 안팎으로 커다란 사회 변동의 물결에 휩싸여 왔다. 안으로는 봉건 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 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 사회 안의 일각에서는 나라 안의 사회 경제적 모순을 자각하고 세계 역사 발전의 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사상적 흐름으로서 개화사상과, 이에 대립되는 위치에 있던 위정척사사상이 있었다.당시 쇄국양이책(鎖國洋夷策))을 펼쳤으나 개화파와 민씨(閔氏)의 세력에 의해 정권에서 축출된 대원군은 위정척사론을 펴서 개화정책을 비판하던 유학자들의 지지를 얻고 임오군란을 일으키게 되지만 곧 개화파에 의한 개화정책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이러한 개화사상은 17세기후반부터 나타난 실학사의 한 파인 북학파에 그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개화사상의 기틀을 마련한 박규수는 북학파의 거두인 연암 박지원이 손자로써 연암의 영향을 받았으며 청국에 자주 사신으로 가서 서양선교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발달된 문물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역관 오경석은 청국을 통하여 청의 신서(新書)를 국내에 반입하였다. 이들의 사상적 가르침과 활동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 젊은 정객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 젊은 정객들은 조선의 봉건적인 체제를 개혁하는데 노력을 하였다.이 글에서는 한국 근대사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개화사상과 그에 반하는 위정척사사상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Ⅱ. 개화사상의 연원(淵源)과 개화파1. 북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관계19세기 중엽의 조선은 외적으로는 자본주의 열강의 위협과 내적으로는 봉건체제의 정치적?사상적으로 위기가 깊어져 가던 시기였다. 이와 같이 옛것을 깨뜨리고 그것에 대신할만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상으로서 개화사상이 형성되고 이 사상에 의해 연결된 정치세력으로서 개화파가 등장하였다. 이 개화사상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17동에 대체할 조선의 진로는 개국?개화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의 청년 정객들을 지도하고 1877년 그의 사후에 이 청년그룹은 오경석 및 유홍기와의 접촉과 지도아래 그 사상적 결속을 굳게 해나갔다. 다시 말하면 사상적 결사로서의 초기 개화파가 탄생한 것이다.이상과 같이 근대조선의 개화사상은 기본적으로 조선실학의 북학사상을 계승하면서 조선에 앞서 구미열강의 가열한 도전을 받고 있던 청국 공양학파의 사상적인 영향을 받음으로써 쇄국하의 폐쇄적인 사상의 상황 아래에서도 세계대세를 통찰하고 이에 대응하는 조선의 진로를 탐구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 해 나갔던 것이다.2. 개화파의 형성과 분화1) 개화사상의 형성과 발전초기 개화파의 형성에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박규수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박규수는 자신이 체득한 실학적 학풍에다 청을 오가면서 경험한 중국 견문을 덧붙여 개화사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61년과 1872년 두 차례 북경에 가서 자본주의 열강의 무력에 굴복하여 굴욕적인 천진?북경에 가서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의 각축장이 된 청의 현실을 목격하였고, 1866년 평안도 감사 시절,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을 직접 겪으면서, 문호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었다. 그리하여 그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열강의 군사력에 대항하려면 중국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기기(대포, 화륜선 등)를 채용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밖으로 강력한 쇄국 정책을 실시한 대원군 정권 안에서 박규수의 생각이나 주장에 동조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대다수의 봉건 관료와 지식인들은 완고한 봉건사상에 얽매여 세계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876년 박규수는 일본의 문호 개방 요구에 자주적으로 개국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민씨 정권을 둘러싸고 있던 봉건 관료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박규수는 우의정이 된 지 1년도 채 못 되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였다.현실정치에서 물러난 미 개화된 나라로 보았다. 다만 개화는 문명개화가 아니라 유교에 의해 교화되었다는 의미의 개화였다. 따라서 개화파의 전면적인 개화와는 그 의미가 다른 개화였으나 1880년대 초반까지 개화정책은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화정책은 당시 위정척사론자들과 개항으로 피해를 보고 있었던 일반민의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3) 개화파의 분화임오군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청군이 개입하게 되고 주체적인 해결역량이 없었던 민씨정권은 청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개화파는 “청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야한다”, “청과의 사대관계를 단절해야한다”, “일본의 문명개화론을 수용해야한다” 등을 주장하면서 민씨정권에 강력하게 대항하였다.결국 이를 계기로 그때까지 함께 개화정책을 추구했던 세력들은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결별하게 되었다.온건개화파는 김윤식, 유길준, 김홍집 등으로 청과의 연계에 의한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개화파와의 대결을 피하고 타협하면서 점진적인 개량의 축적과 전통유교에 대해 매우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에 갑오개혁을 주도하게 된다.한편,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들은 중인과 승려까지 포함한 개화집단으로서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체제변혁을 획책하고 수구세력과의 결별을 명확히 한 변법적 급진개화파였다. 이들은 집권층으로서의 수구파와 대결해서 군권(軍權)을 완전히 장악하여 급진적인 변법을 지향하고 전통유교에 대해서는 조선의 유학에 있어서의 허와 실의 문제를 중시하면서 불교와 기독교의 수용에도 관대하였다. 그러나 급진개화파는 임오군란 후 거의 제거 되었으며 이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몰락하였다.다음에서는 이들의 개혁운동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3. 개화파의 개혁운동1) 임오군란개화와 보수의 대립은 개화파의 민씨 세력과 수구파인 대원군사이의 정치적 싸움에 얽혀 척사론(斥邪論)을 바탕으로 한 개화우동이다.1981년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식군대인 별기군은 정부로부터 모든 면에서 특별대우를 받았지 못한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에 있다. 한 예로 지조법 개혁방침은 종래의 지주제를 인정한 위에서 세제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당시 반봉건 투쟁에 가장 철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민중을 고려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정변 당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이는 급진개화파의 대다수가 봉건 대지주에 기반을 둔 계급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다.또 개화파들이 정권탈취와 개혁을 위해 침략자 일본을 원조자로 끌어들였으나 일본의 배반으로 정변이 실패하면서 일본은 배상청구 및 청(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약화시키기 위 해 청과 천진조약)을 맺게 되었다.Ⅲ. 위정척사)사상운양호사건으로 인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조선이 개화운동을 추진하고 있을 때, 여기에 맞서 전통적 유교사회의 질서를 지키고 외래의 자본주의적 세력과 사상을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위정척사운동이었다. 위정척사는 이미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으로 선교될 때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의 유학자들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 비판하면서 천주교의 교리가 충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평가하며 전통적 예교질서를 중시하는 유교를 부정,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그 후 한말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어가자 종래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와 화이(華夷)의식은 이러한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구국애족사상?민족자존사상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한말 위정척사사상이 형성되었다.18세기 후반 조선사회에서 주로 서학의 종교적 측면에 대한 배척을 위하여 형성되었던 위정척사론은 19세기 중반이후에는 종교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침탈에 대한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끼면서 구체적인 운동 형태를 띠게 되었다.위정척사상은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 등에 의해 크게 보급되었다. 특히 화서의 위정척사론은 김평묵에 의배 보다 발전적으로 집성되는 동시에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에 의해 실천적 자원의 의병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의암 류인석(毅菴 柳麟錫 수습하기 위하여 집권세력들이 구언(求言)의 절차로서 재야유림의 대표인 이항로에게 9월부터 한 달이 채 못 되는 사이에 4회에 걸쳐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이항로는 8회의 사직소를 올려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이항로는 서양을 물리치기위하여 국왕이 윤음을 반포하고 외적침입의 연유 및 선후책을 명백히 하여 민심을 진정시킬 것, 홍문관?사간원?사헌부 외에도 언로를 넓혀 여론을 들을 것, 장수를 선발하여 무비를 갖추고 인재를 등용할 것, 전국 각도에서 충의와 기백이 있는 인사를 모아 충의군으로 삼고 관군에 협력할 것, 국왕스스로가 정치 및 사생활에서 모범을 보일 것 등을 주장하였다.그는 이른바 외국의 물품이라는 것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종류가 많은데 양물이 가장 심하며 그것들은 기이하고도 외설스럽고 교묘한 물건들로서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 더욱이 서양의 재화는 손에 의해 생산되는 공산품으로서 하루의 계획으로도 남는 것임에 비하여 우리의 재화는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서 일 년의 계획으로도 부족한 것인데 부족한 것으로써 남아돌아가는 것을 교역한다면 우리 국가의 경제가 장차 곤궁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 제 2기(1876년 개항을 전후한 시기)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최익현이 운요호 사건 직후인 1876년 국왕에게 “持斧伏闕斥和議疏(지부복궐척화의소)”를 올려 통일본과의 통상을 반대하였다. “持斧伏闕斥和議疏”를 풀이 하자면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엎드려 올리는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라는 뜻으로 자기 상소를 받아주지 않으려면 그 도끼로 자기 목을 치라는 것이었다.최익현은 이 상소에서 왜양일체론을 주장하고 왜가 양적의 앞잡이로서 속으로 깊이 연계되어 있는 점, 왜인이 양복을 입고 서양대포를 사용하고 서양선박을 타고 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하여 우리의 땅에서 생산되는 한정된 물품을 가지고 저들의 손에서 나온 무한한 물품과 교역하게 된다면 몇 년이
- 요, 금, 고려 속의 발해유민 -Ⅰ. 머리말Ⅱ. 본문1. 발해멸망 이후 발해유민의 동향2. 발해유민의 거란에서의 활동3. 발해유민의 고려유입4. 발해유민의 고려에서의 활동Ⅲ. 맺음말과목명 :교수님 :학번 :이름 :Ⅰ. 머리말신라와 후백제는 물론 발해 유민까지를 포함한 민족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고려왕조의 후삼국통일은 최초의 완전한 민족통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발해 유민의 고려로의 합류는 그만큼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이 글에서는 이 시기 발해 멸망과 함께 발해 고토에서 발생하게 되었던 발해 유민들의 동향에 대해 알아본 다음, 발해 유민의 고려 유입 배경과 고려사회에서 이들의 활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세부적으로 보면 첫째, 발해 멸망 이후 발해인들의 유망이 나타나게 되었던 배경과 둘째, 발해 유민들이 요, 금에 동화되어가는 과정, 셋째, 발해 유민들의 고려 유입 배경이 되었던 거란의 이주정책과 고려태조의 북방정책 및 발해유민 수용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려로 들어온 발해 유민들이 고려 사회에서 어떻게 활약했는지 살펴 본 글이다.Ⅱ. 본문1. 발해멸망 이후 발해유민의 동향발해의 마지막왕 대인선(906~926)이 통치하던 시기는 당이 멸망하고 후당(後唐,923~936)이 건국되는 초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동아시아 세계의 혼란을 틈타 10세기 초 거란족의 아율아보기(907~926)가 두각을 나타내어 916년에는 거란국을 건설하고는 중국의 중원지방을 차지하기 위한 정지 작업의 차원에서 동쪽의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천현(天顯) 원년(926) 正月에 홀한성을 함락하면서 발해를 멸망시키었다.거란은 발해를 점령한 다음 달인 2월에 발해 고토를 지배하기 위한 방안으로 발해 고토에 동란국(東丹國)을 설치하였다. 아율아보기는 자신의 장자 아율배를 인황왕에 임명하고 관료로 거란인, 발해인을 함께 기용하여 발해 유민을 다스렸다.그렇다면 거란이 발해를 점령하고도 발해 고토를 거란국의 새로운 군현으로 기용하여 거란 관리와 함께 발해인들을 지배하는 간접통치를 취했던 이렇듯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거란은 저항운동을 진압하지만 동단국을 통한 발해 지배가 어렵게 되자 2년 만에 동단국 자체를 홀한성에서 동평지역으로 옮기는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거란의 발해유민에 대한 강제사민정책 실시)거란의 발해유민 이주정책의 그 원인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첫째, 발해유민의 불굴의 투지, 둘째, 남정(南征)을 국가의 과업으로 삼고 있어 여력이 없는 관계, 셋째, 후환(後患)의 예방책, 넷째, 발해의 핵심지인 동란국을 남제동제(南制東制)와 황위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등이다.)결국 동단국을 설치하여 발해 유민을 통치하고자했던 거란의 의도가 발해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게 되자 그 개선책으로 감시가 편리한 요양으로 발해 유민들을 강제 이주하는 방법으로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많은 발해유민들이 강제이주 정책에 반하여 고려나 신라로 유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2. 발해유민의 거란에서의 활동발해 멸망 이후 거란의 지배 하에서 나타난 발해유민들의 동향은 어떠한가?요사(遼史) 사전(死傳)에는 요(遼)에 사환하여 활약했던 발해 유민 출신의 인사들 다수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대표적 인사인 대공정(大公鼎)은 대를 이어 요에 사환함으로써 명문가로 발전해 갔던 사실이 나와있다.대공정 이외에도 발해상은 고청명(渤海詳隱 高淸明), 남부재상 대강예(南部宰相 大康乂), 발해장사 나한(渤海帳司 羅漢) 등도 거란에 협조한 발해유민이었다. 고려에 왕래한 244명의 거란 사신들을 분석해도 발해계 사람들이 많았다. 즉 적어도 발해의 귀족으로 한번씩이라도기록에 나온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106명으로, 거란 국성인 야율과 소씨의 91명보다 많았다. 여기서 거란 국성에 대한 사성제도를 통해 발해인으로서 야율과 소씨 성을 받았던 사람까지를 계산한다면, 발해계 거란인들의 수는 더욱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또 발해의 대표적 고성(高姓)이던 고씨 가문 출신으로는 그 대표적 인물이 고모한이 있다.발오며 요 조정에 사환함으로써 요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 발돋움할 수 있었고 고정(高楨)이 금의 관리가 되어 크게 현달함으로써 금나라에서도 계속하여 명문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타나있다.이 밖에도 金나라 관리로 발탁되어 활약하였던 또 다른 고 씨 가문 출신의 인사로 장호(張浩)를 찾아볼 수 있다. 고향이 요양인 장호는 그의 증조부가 요나라에 벼슬하면서 고씨 성을 버리고 장씨 성을 갖게 되었다. 그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에게 국가정책을 건의한 것을 계기로 아골타의 대외문서를 작성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는데, 태조가 죽은 후에도 희종, 해릉왕, 세종 시대까지 관료 생활을 계속하여 촉왕?노국공에 봉해진 바 있다.)3. 발해유민의 고려유입고려태조8년(926) 12월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수많은 발해유민들이 연이어서 고려로 내부해 오는 사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태조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면서 거란의 군사력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지는 반면, 고려의 국력신장과 후삼국 통일전쟁을 추진하기 위한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고심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며 고려 동북 지방 여진족에 대한 본격적인 기미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과거 고구려 국민의 일원이었던 말갈족의 후예로 보고 차별 없이 고려 국민으로 받아들였고 고려로 귀부하는 자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발해 유민들 역시 태조8년인 925년부터 10세기 후반까지 대략 60년 동안에 고려에 집중적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자.고려건국 초기에 태조 왕건이 적극적으로 여진족을 받아들였던 이유를 남쪽의 후백제와 본격적인 투쟁을 위해 먼저 북쪽 국경을 안정시킬 필요에서 찾는다면 발해유민에 대한 문제도 같다고 할 수 있다.당시 중국 대륙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후당이 고려를 고구려의 부흥국가로 인식하고 있었을 정도라면 같은 시기의 발해유민들 역시 고려왕조를 발해와 동일한 고구려의 부흥국가로 인식하고 망명하여 의지처로 삼으려했었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태조8년 9월 발해의 장군 신덕(申德) 등 500여인을 비롯해 같은 해 12월에는 좌수위소장(左首衛少將) 모두간(冒豆干) 등이 백성 1000호를 거느리고 오는 등 발해 유민의 남하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태조17년(934)에는 발해의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명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귀순해왔다. 왕건은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왕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종적(宗敵)에 올리는 한편, 원보(元甫)라는 관품을 주고 백주(白洲)를 지키며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또 그가 이끌고 왔던 막료들 모두에게 관작을 내려주는 특별한 우대 조치를 취했다.이렇듯 특별한 후대 사실로 보아 고려가 발해유민들을 일개 패망국의 사람들이 아닌 자신들과 동일한 고구려계의 동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4. 발해유민의 고려에서의 활동발해유민의 고려에서의 활동에 대해 고찰하기에 앞서 태조 때에 내부해 온 발해유민 대부분이 발해 왕족 출신으로 볼 수 있는 대씨(大氏)성(姓)을 가진 이들이거나, 예부경(禮部卿), 사정(司政), 오부경(五部卿),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장군(將軍), 승려(僧侶) 등 발해의 고위관리나 군부(軍部)의 고위층 지휘자 등 발해 사회의 지도급 인물이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발해유민 지배층 대량유입은 국정운영에 큰 힘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조정의 관리와 군부의 지휘자로 기용하여 군국 정무를 맡길 수 있는 발해유민 출신의 유능한 인재들 다수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후백제와의 투쟁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실제로 고려가 후백제와의 전투에 발해로부터 내투해 온 인사들을 중요한 군사적 요충에 투입한 사례를 고려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려 수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백주(白洲))에 대광현(大光顯) 등을 투입한 것을 보면 태조 왕건이 대광현 일행의 역량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또 그들에게 기대를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이 밖에도 대거란(對契丹) 전투에 참여하여 활약을 했던 발해 유민 출신침입하였을 때도 대장군으로 있으면서 서경 전투에 참여하여 활약했다.대회덕(大懷德) 역시 현종 원년 12월 곽주(郭州) 전투에서 대장군의 직함을 가지고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한편 태조는 지배층이었던 발해 유민들뿐만 아니라 발해의 기층민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실시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고려 현종2년에 거란의 성종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포로로 잡아갔던 발해인들만을 가지고도 영주(寧州)와 귀주(歸州)를 설치할 수 있었던 사실을 전하는 요사의 기록을 보더라도 고려에서 군인이 되어 활약했던 구발해 기층민들의 수가 대단히 많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다음으로는 고려유민이 고려문화 발전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고려로 내투한 발해 유민들이 가지고 있던 발해 고유의 문화 예술 능력은 고려에 점목되어 고려의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현종대 고려가 확보한 거란군 포로 속에는 기명과 복두를 만들 수 있는 수천 명의 기술자들이 있었다. 따라서 고려는 이들을 특별히 왕부에 소속시켜 뛰어난 기술과 정교한 솜씨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 12세기 인종대에 와서는 기명(器皿)과 의복(衣服)이 부화(浮華)스러울 정도로 화려해지고 기술도 크게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또한 유약 제조 기술이 발달하여 삼채의 유약을 즐겨 사용하고, 자색의 자기를 만들 수 있는 고급 자기술을 지니고 있던 발해 유민이 고려로 들어와 청자제작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고려자기의 제작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0세기 말에서 1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도자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숙련기로 접어들 수 있게 되었다.Ⅲ. 맺음말지금까지 발해 멸망 후 발해유민의 동향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거란은 발해를 점령하고 발해유민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발해 왕족을 포함하여 발해 상류층 인사들의 협조가 필요함을 깨닫고 발해 왕족들을 특별 유대하는 회유책을 마련해 구발해의 상류층 인사들을 대거 되었다.
과목명 :교수님 :제출일 :학번/이름 :1. 아동에게 TV 시청은 좋을까? 나쁠까?- 긍정적인면 -1) 동물다큐멘터리나 과학관련 프로그램은 좋은 학습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2) 우정, 인간애, 인내심 등을 담은 드라마나 명작 만화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린이들에게건전한 도덕심을 심어 줄 수 있다.3) 언어, 기호, 자연현상, 예절 등을 소재로 한 이야기, 노래, 게임, 인형극, 애니메이션, 공작, 율동 등이 합쳐진 매거진 타입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동의 지적, 정신적, 신체적 발달을 촉진하고 사회성과 감수성을 키울 수 있다.4) 아동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휴식과 오락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며,대리만족 할 수 있다.5) 프로그램에서 일상생활이나 아동이 경험했던 것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아동이 자신의 경험을 기억해 내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부정적인면 -1) 아동은 성장하고 발달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TV 시청은 아동의 언어 발달에또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무분별한 언어사용이 되고 있는 성인프로그램 시청 시 아동의잘못된 언어발달을 가져올 수 있다.2) 뇌 세포발달에 미치는 영향인간의 뇌는 태어나서 3세까지는 전체적인 기본 공격과 회로를 만들기 때문에 오감을 통한 고른 자극이 무엇보다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비디오 시청은 보고, 듣는 자극만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다양한 자극을 적절히 경험해야 하는 유아기 어린이에게 부적절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또한 텔레비전이나 비디오의 현란한 화면은 뇌신경 회로 형성을 저해하며 뇌를 수동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고 한다. 즉, 지나치게 빠른 화면의 변화와 현란한 자극이 아직 어린 유아에 게는 부담이 되는 부적절한 자극이라는 것이다.3) 신체 발달에 미치는 영향텔레비전이나 비디오 시청이 대리만족이나 정신적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법임 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들은 어린이들이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시청으로 인하여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며, 신체운동 활동을 위한 욕구가 저하될 수 있음을 지 적하고 있다. (아동비만의 요인 중 하나)또한 오랜 시간 한 자세로 앉아 있게 되기 때문에 한참 성장하는 아동에게는 척추나 뼈의 성 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외에도 화면에서 발생하는 전자파의 유해성이나, 가까운 거리 에서 오랜 시간 시청할 때 시력을 나쁘게 할 수 있으며, 눈의 피로감도 증가 시킨다.4) 정서 및 사회성 발달에 미치는 영향어려서부터 간접적인 경험, 예를 들어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많이 시청한 어린이들은사회성 발달에서 타인 지향적 관심보다는 자기 지향적 관심의 성향이 높다고 한다. 즉 세상 을 남의 입장에서보다는 자신의 관점에서만 주로 보기 때문에 사회성이 결여될 수 있다.또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져 친 사회적 도덕성의 발달도 지연된다고 한다. 그리고 부정적 감정에 노출되었을 때 이를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 는 능력도 저하 된다고 한다.(현실에서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자극, 경험, 관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는 채널 선택 등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 편한 것을 선택하여 다른 자극은 피하므로 경험의 편식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또 텔레비전 폭력물을 자주 보면 실생활의 폭력장면에 대해 감각의 둔화현상을 일으켜 폭력 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게 되거나 과도한 공포심을 갖게 된다.(아이들이 폭력의 공포에 대해"면역"이 생기며 점차 폭력을 문제 해결의 한 방법을 받아들이고 텔레비전에서 본 폭력을 모 방, 할 수 있다. 텔레비전 폭력이 공격성이나 폭력 행동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중요한 요인임은 분명하다.)5) 학습동기에 미치는 영향아동은 아주 어린 시기부터 주변의 새로운 자극에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존재이다.텔레비전이나 비디오의 과잉시청은 아동의 주의 집중 능력을 떨어뜨리며, 수동적인 시청 태 도나 관망하는 자세가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무엇을 찾거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게으 름을 낳는 등 학습에 필요한 적극적인 태도와는 상반되는 태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2. TV시청이 아동의 발달에 도움이 되려면어떻게 시청 지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1) TV 시청 계획 짜기하루 동안 TV를 시청하는 총 시간을 미리 정해주어야 한다.전문가들의 견해는 비디오를 포함해서 하루에 1-2시간을 넘는 것은 해롭다는 것이다.아동이 어떤 프로그램을 볼 것인가, 어떤 시간대에 볼 것인가를 미리 계획하도록 부모가 도와 주며 안 된다고 할 때는 꼭 이유에 대해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어야 한다.2) 자녀와 같이 시청하기가능하다면 자녀가 보는 프로그램을 같이 보면서, 내용과 관련된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3) 어른들 자신도 매우 사려 깊게 시청할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시청시간을 자율적으로 제한 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 아이에게 부적절한 프로그램은 주변에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시청 을 자제한다.4) 좋은 프로그램(유아 및 어린이에게 적합한 프로그램 - TV다큐멘터리 물, 정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음악, 미술, 무용 등의 예술 관련 프로그램, 아이들의 우정과 꿈에 관한 가벼운 오락 물,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행물 등)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자녀에게 알려 주는 것이 필요 하다.5) TV를 시청한 후에는 내용에 대한 대화를 통해 아이의 이해수준을 확인하고 비판능력을 키 워 주도록 TV 시청환경을 적절하게 마련하여야 한다.(시청거리는 2.3미터 이상 떨어져서 바른 자세로 앉아서 시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6) 학습적인 프로그램을 시청했을 경우 그것을 아이와 함께 실생활에 응용시켜봄으로써 아이 의 기억력과 사고력을 키우는 지적발달에 힘쓴다.3.아동용(학령기이전) TV프로그램을다음 준거에 따라 분석해본다.① 대상 연령 - 4세에서 5세의 미취학 아동② 내용 (시간 구성, 회당 줄거리)프로그램에 나오는 인물은 단 두명 뿐이다.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짜잔형”과 짜잔형 옆에서 같이 프로그램 진행을 보조하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뿡뿡이” 이다.'짜잔' 이라고 하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짜잔형은 언제나 프로그램 시작 부분에서 뿡뿡이의 변신 방귀로 자동차에서 사람으로 변신을 한다. 짜잔하고 말이다. 뿡뿡이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약간 꺼림직 할 수도 있는 방귀를 뀌었을 때 나오는 소리를 뜻하는 말이다.뿡뿡, 주인공인 뿡뿡이는 프로그램 중 2번 내지 3번의 방귀를 뀌는데, 방귀를 뀔 때 마다 모두 CG로 꽃이나 별들이 효과로 첨부되어 진다. 우리에게는 다소 꺼림직하지만,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방귀를 뀐다는 것은 즐겁고 재미난 일인 것이다. 방귀를 뀐다는 것이 늘 있는 일이고 유아들 자신들도 매일 하고 있는 일이기에 우선 방귀를 소재로 했다는 것 자체가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일 것이다.“방귀대장 뿡뿡이” 는 1주일 중 총 5번을 방영하는데 매회 마다 12에서 15분 사이로 각 요일마다 일정한 형식들을 갖추고 있다.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놀이 도구를 만드는 형식을 취하고 있고, 수요일에는 노래를 부르며 놀이를 하는 형식이다. 목요일은 아이의 어머니들과 함께 놀이를 하는 형식이고, 금요일에는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놀이를 하는 형식으로 총 4가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③아동의 어떤 발달적 측면에 기여할까? 혹은 발달에 바람직하지 않은가?방귀대장 뿡뿡이는 요일마다 정해져 있는 형식으로 매회 구성되어 진행 되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한가지는 기타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인 것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누구나 보고 자랐을 뽀뽀뽀나 1,2,3 유치원 같은 경우에는 매회 마다 어떠한 한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설날이라는 명절에 방영을 한다면 뽀뽀뽀나 1,2,3 유치원 같은 경우에는 모두 한복을 차려 입고 설날의 풍습이나 의미들을 얘기한다. 그러나 뿡뿡이는 아이들에게 그러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짜잔형과 뿡뿡이, 옆에 있는 친구들과 같이 놀 뿐이다. 그렇다고 놀이의 형식이나 규칙이 복잡하지 않다. 매우 단순한 형식으로 계속 반복이 될 뿐이다.4월 27일 날짜 방영분을 보면 단순히 손을 아래로 위로 올리는 것일 뿐이다.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놀이가 진행 되어 지지만 프로그램 내내 아이들은 지루해 하지 않고 마냥 웃음을 띄고 있다. 손을 별이 반짝이는 것 같이 왼쪽 오른쪽으로 돌리며 올리면 같이 올라간 엄마의 손과 같이 마주 잡고 내려오고 다시 올리고 다시 내리고, 그러한 놀이를 하면서 엄마와 같이 자연스런 스킨쉽과 엄마와의 유대를 강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엄마가 아닌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도 될 수 있고, 친구들과 무리지어 하는 놀이의 경우에는 또래 집단과의 유대 관계 형성과 또래 끼리의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으로 연결되어 원만한 대인관계 형성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1. 균여의 화엄화2. 의천의 천태종3. 지눌의 결사운동4. 보우의 불교쇄신운동고려불교의 전개는 크게 균여의 화엄화, 의천의 천태종, 지눌의 결사운동, 보우의 불교쇄신운동 이렇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균여의 화엄화-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사병화 되었던 노비들을 양민화 시킴으로써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을 확보하였고과거제를 실시하여 기존 정치세력(공신이나 호족 또는 그들의 자제)이 아닌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였고 공복제정, 칭제건원, 공신숙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당시 불교계는 경전과 이론 중심의 교종과 참선에 의한 실천 중심의 선종으로 양립되어 있었다. 광종은 먼저 균여를 내세워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했다. 이때 교종을 중심으로 불교 사상을 통일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 선종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이로써 선종 중심의 불교사회에서 교종이 주도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이는 왕권강화에 적응하는 불교의 한 현상이기도 하다.-의천의 천태종-문종의 아우인 의천은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지양하고 교선일치를 주장하고, 교관겸수(이론과 실천을 함께 닦는다)를 주장하였다.천태일승을 주장하며 선종과 교종의 교량 역할을 하겠다는 의천의 천태종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거란침입)에 사상계를 통일하여 이를 기반으로 국력을 공고히 하고 국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지눌의 결사운동-인종 때 이자겸, 묘청의 난으로 왕권이 실추되었고 의종 때 와서는 무신의 난까지 국내적으로 연이은 신하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대외적으로는 6~7차례에 걸쳐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었다.13C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지방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타락한 불교, 승려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무질서해진 교단 쇄신운동-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운동이 시작되었다.불법을 빙자하여 명리를 쫓는 타락한 승려를 비판하고 산림으로 들어가 돈오점수의 수행방법을 주장하였다.이처럼 지눌은 조계종의 입장에서 지방지식인을 대상으로 정혜결사운동을 하였고이시대의 또 하나의 결사운동으로 요세의 천태종 입장에서의 백년결사운동이 있었다.무신정권 이후 이러한 결사운동을 거치면서 교종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왕실과 귀족을 대신해서 민중을 그 저변에 깔고 있는 민중종교로 확대해 갔다.-보우의 불교쇄신운동-고려말기 14C 왕도의 누적된 폐단과 정치의 부패와왕권불교의 폐단(-사원전확대, 고리대발생, 불교의 세습화, 권력과 결탁),100년 가까이 원 황실과 고려 황실이 권력을 나눠 갖으면서 그 안에 기생하는 승려들,사치와 타락에 물든 의례불교,이를 개혁하기 위해 선교일체론을 주장하며 구산선문의 사상적 통일에 힘쓰고 불교관을 바로잡아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으나 이미 개혁의 대상이 된 불교와 고려사회를 구출하지 못했다.
-사대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차이-김부식과 묘쳥고려는 개국공신, 지방호족, 6두품 계열이었던 사람들이 과거와 음서제도를 통해 중앙귀족이 되어 문벌귀족세력을 형성하였고 특정 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점하였다.인종 때의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여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으며 밖으로는 여진족이 강성해져 금을 건국하고 고려에 대해 부모의 나라에서 형제의 나라로 대우를 달리하였다.이와 같은 시기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주장하였고, 외교문제에서도 칭제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당시 고려 사회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 묘청, 정지상 등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나들이 하였으며 대화궁을 짓게 하였으나 인종의 낙상과 김부식(개경파)의 반대로 서경 천도 계획도 무산되었다.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중앙 정부에서는 김부식에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김부식이 난적인 묘청을 친 것으로 보는 것은 근시안이고 실상은 낭(郎), 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