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말려초 지식인들의 선택1.머리말2.지식인층의 등장(1)6두품출신의 지식인층(2)지방출신의 지식인층3.최치원의 선택(1)사회개혁을 위한 선택-시무10조(2)은둔생활(3)고려건국을 즈음한 태도4.맺음말1.머리말라말려초는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기존의 사회체제인 골품제가 붕괴하고 지방에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호족세력들이 그 시대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새로운 사회의 이념과 체제가 제시되기도 하고 정착되기도 했다. 지방 호족들은 크게 후삼국으로 축소되고 그들이 각축을 벌이는 동안 새로운 사회의 방향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지식인층이라고 하겠다.특히 지식인층은 라말려초의 혼란을 극복하고 성립된 고려사회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정치사회의 형태를 가지고 유교의 교양과 지식을 소유한 유학자 지식인정치가들에 의해 이끌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역할과 활동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여기에서는 라말려초때에 고대의 체제가 없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 이념이나 체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하고 이를 실행시키려 했던 지식인계층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한다.이 당시의 지식인들이 할 수있었던 선택, 그리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들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알아보고, 대표적으로 신라에서 개혁을 꿈꿨던 최치원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한다.2.지식인층의 등장지식인층의 등장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지식인이라는 말의 의미인 것같다. 흔히 지식인이라고 할 때에는 일반적 의미로서 '지식, 교양을 갖춘 사람, 정신적 노동,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르킨다. 그러나 라말려초의 지식인이라고 할 때에는 신라의 구체제와 신분체제의 붕괴를 맞아 새로운 이념과 방향을 제시사고 새사회의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그 성취를 위해 노력하였던 지식인이라는,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은 용어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여기에서는 보다 정치사적인 입장에서 한문과 유학의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나말려초의 정치사회에 참여하여 새로운 시대를 만즐고자 했던 유학자 지식인을 지칭하려한다.그러면 라말려초의 지식인층을 형성했던 주축인 신라 왕경의 도당유학생 출신의 6두품지식인층과 지방사회에서 성장하여 고려, 후백제 등 지방정부에 진출하였던 지방출신 지식인층을 알아볼까한다.(1)6두품출신의 지식인층신라하대의 정치, 사회는 진성여왕기를 거치며 중앙정치체제의 붕괴와 지방사회의 분열로 인하여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궁예나 견휜같은 인물은 왕이라 칭하며 자체적인 정부체제를 갖추게된다. 그러나 이런 지방사회의 분열과 왕실 지배층의 한계로 인하여 위기를 맞게 된 신라는 그 극복을 위한 변혁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이에 관련된 것이 대당유학생출신의 6두품세력들이다.신라하대에 6두품세력들의 변혁은 최치원의 시무10조이후로 활발하게 시작되는 것같다.신라는 진성여왕대에 전국적인 지방세력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고, 크나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지방사회의 이탈과 신라의 분열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신라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델로 삼은 것이 바로 중국사회이다.주지하다시피, 신라 하대의 도당유학생들은 당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합격하면 당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중국 체류시에 대부분 막부에 종사하고 있었던 중국문사와의 교류를 통하여 지방 막부의 실제와 지방세력의 실상에 대한 이해을 갖을 수 있었을 것이다.이는 도당유학생들이 당의 지방사회에 대한 대책과 중국 지방사회의 실상에 대한 체험과 식견을 갖게하는 기회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신라 정부는 도당유학의 경험을 가진 인물들이 귀국하였을 때 신라의 지방관으로 임명하였고, 도당유학생들도 그런 경험으로 신라을 변혁하려고 했다.라말려초때 신라의 작은 변화나 개혁은 6두품세력에게 많이 의존되어서 시행하려 하였지만 신라 6두품의 신분적 한계와 소극적 자세 그리고 지방사회에 대한 대응책이 당을 그냥 모방하는데 그쳤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2)지방출신의 지식인층6두품출신의 지식인층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어느정도의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면 당시 지방사회의 성장에 따른 지방사회출신의 지식인층은 그 신분적 한계에서는 어느정도 자유로웠던 것같다.이들은 보통 신라에 지방독서층에서 그 뿌리을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신라신분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거나 중앙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까닭에 계속적으로 문화적으로나 학문적 정치적으로나 계속적으로 축적, 발전해왔을 것이다.그렇게 지내왔던 그들이 10세기에 신라의 구체제가 붕괴되면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보통 좀 더 자유로운 지방에 있었기에 자신들과 같이 신라에 불만을 갖고있던 지방의 호족들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을 것이다. 보통 이들은 소경지역이나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에서 크게 성장했고, 지방유력가의 후원을 받으면서 더욱 그 능력을 키웠다.이런 대부분의 지방출신의 지식인층은 6두품세력이 시도했던 신라내의 점진적인 변혁이나 개혁보다는 지방세력과 손잡고 급진적인 변혁이나 개혁을 노렸다.그래서 그들은 지방세력가들에게 새로운 이념이나 체제을 제시해주면서 지방사회을 변화시켜나갔다.주로 그들은 서북지역의 지식인층이었고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유, 최웅, 윤봉, 김언규, 박인원 등이 있다.3.최치원의 선택(1)사회개혁을 위한 선택-시무10조최치원은 신라의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 신라내부의 모순을 해결해보고자, 노력한 6두품계층의 중요인물이다. 그는 12세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빈공과에 합격하고 885년에 신라에 귀국하게된다.그는 귀국후에 10년동안 중앙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이것이 바로 시무10조인데 이것은 진성여왕에게 가납되었고 최치원 또한 6두품의 최고의 관직인 아찬을 수여받게 된다.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주지하다시피 신라사회에서 국가의 정책을 제시하고 결정하며 명령할 수 있는 계층은 진골이었다. 상대등이나 시중은 물론 각 부서의 장관인 령과 군사 지휘관인 장군은 모두 진골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6두품은 관등으로는 제 6두품인 아찬이, 관직으로는 시랑등의 각 부서의 차관급이 승급의 한계로써 진골층을 보좌하며 행정의 실무만을 담당할 수 있었던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국가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그러므로 이 시무10조라는 시무책의 형태를 갖추어 공식적으로 국가 정책를 제안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는 6두품의 정치적 지위와 발언권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한편으로는 신라정부가 직면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당유학생 출신 6두품 지식층의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성여왕과 측근의 집권자들이 왕경 내외의 비판과 저항으로 통치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가운데 정치적 발언권을 성장시켜간 6두품 지식인은 이제 당당히 국왕에게 시무책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정치사회의 개혁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하지만 이런 시무10조는 불행히도 내용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냥 추측하건데 반진골적 입장에서 과거제의 실시, 전제왕권에 대한지지, 그리고 귀족적 특권을 옹호하는 일면 반호족적입장에서 중앙집권정책의 강화, 지방의 호족세력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밖에 단편적으로는 새로운 정치운용의 원리 제시, 인사개혁같은 신분제의 제한에 불만을 가진 6두품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이런 시무책에는 당시신라의 큰 문제들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었을 것인데 첫째로 신라내부에 6두품과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진골세력들의 실정에 대한 타개방안이다. 그리고 둘째로 진성여왕 3년 이후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붕괴 위기를 초래한 지방세력의 반발과 이탈에 대한 신라정부의 대응방안이다.당시의 가장 중대한 이 두가지의 당면문제에 대한 최치원의 해결방안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역시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시무책이 제시된 후 신라 정치사회의 변화을 통하여 그 윤곽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시무책이 제시된 후에 신라의 가장 큰 변화는 아무 지방제도의 변화가 아닌가 싶다. 지방통치체제에 대한 대응책에는 무너진 도독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통치구조로의 전환에 대한 제시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최치원이 제시한 지주제군사제이다.최치원은 당에서 주로 경험을 쌓고 성장하였는데 특히 지방세력들의 발호에 대처하기 위해 부심하였던 당말의 상황에서 황소의 난을 겪기도 했기때문에 당의 지방세력에 대한 대응책에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최치원이 제시한 지방대책은 당말에 등장하고 있는 지주제군사와 유사한 형태였을 것이며, 이것이 실행에 옮겨져 신라말의 지주제군사제의 성립으로 나타난 것이다.이 지주제군사제는 지주제군사 및 성주에 대해 그들이 획득한 경제적, 군사적 독립성과 지역민에 대한 지배권의 일부를 인정하고 그 대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왕실의 보호를 보장받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미 지방통제력을 상실한 신라정부는 궁예나 견휜같은 대지방세력과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에 유명무실해진 도독제를 파기하고 지주제군사제를 성립시킴으로써 신라의 권위와 영향이 미치는 범위내에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이처럼 종래에 알아왔듯이 시무10조는 아예 묵살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지방제도의 변화나 그에 따른 정책에 어느정도는 수용되었다는 점이다.이렇게 최치원은 자신의 시무책이 국왕에 의해 가납되고 일부는 실행에 옮겨졌더라 하더라도 그 자신은 마침내 관직에서 물러나와 운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라의 체제 내에서 스스로 특권계층의 일원이었던 6두품의 개혁과 사회전환에 대한 역할이란 결국 제한된 범위에 국한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하 노동운동 연구의 현황과 과제사학과 4 9900133 김동수Ⅰ. 머리말?반제국주의, 민족해방, 나아가 계급해방 등의 총체적인 식민지체제와 자본주의 체제 극복에서의 노동자계급 운동사 연구라고 볼 수 있음.?일제시대 노동자계급이 식민지체제 극복의 주체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었을 때 가능①객관적 조건- 노동시장, 노동과정, 노동력 재생산 과정 등에서의 일제 및 독점자본과 관련된 노동자계급의 상태②주체적 조건- 첫째, 민족적 계급적 인식을 노동자 계급 스스로가 획득하는 것. 둘째, 노동조합 조직과 노동자 정당을 조직하는 것. 셋째, 노동자계급의 상태 자체를 개선. 넷째, 파업투쟁 및 민족적 계급적 해방 투쟁에 나서고 그것을 지향하는 것.?일제시대의 노동운동사 대한 연구①초석- 1950~1960 북한학계에서 17편 이상 ②일본학계- 1960~1980 10편 이상 ③남한 학계- 1960~1980 40편 이상, 1970년대 이후부터 일제시대의 노동운동사 연구는 남한 학계주도, 신용하, 정진상, 김경일, 김광운, 김익진, 김준 등이 연구?1990년 이후 나온 일제 식민지시대의 노동자계급에 관한 연구 중에 식민지체제 극복과 주체형성의 객관적 조건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상태 등에 대한 연구와 그 주체적 조건으로서 노동조합 조직운동과 파업투쟁 및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문화 등에 대한 연구 현황을 간략히 살펴보고, 연구 과제를 전망하겠다.Ⅱ. 노동자계급의 상태1. ‘생산력 지상론’적 관점에서 본 노동자계급의 상태?이것은 식민지체제 극복의 주체형성의 관점과는 상관없이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연구하는 경향?안병직- 「식민지조선의 고용구조에 관한 연구- 1930년대의 공업화를 중심으로-」(1989) 「‘국민직업능력신고령’자료의 분석」(1993)-->제국주의의 침략이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는가 저지하는가 하는 세계사적 문제와 관련하여 식민지 공업화가 고용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그것이 조선의 경제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선의 노무관리체제-소야전 시멘트 평양공장과 본사공장의 비교를 중심으로-」(1995)-->안병직, 박순원 등과 유사한 관점에서 다만 그들이 밝히지 않은 식민지시대의 ‘근대적’ 노동자로 변화하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의 사회적, 경제적 존재에 대한 분석을 함?허수열- 「일제하 조선의 산업구조-고용기준 분석을 중심으로-」->일제하 산업구조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고용기준을 택하여 산업별 취업자수의 동태를 검토하고 그것을 토대로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과 그 변화의 내용을 밝힘.2. 식민지체제 극복의 관점에서 본 노동자계급의 상태?이는 식민지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양적 성장을 전제로 하여 질적 성장의 지표를 노동자계급 다수의 민족의식과 계급의식 획득, 경제적, 정치적 조직화, 파업 투쟁 등을 통해서 식민적, 자본주의적 억압과 착취 구조 등의 총체적인 식민지체제를 새로운 정치 사회체제 즉 자유롭고 독립된 정치, 사회, 경제체제로 대체하거나 지향하려는 투쟁 능력에 두고 그것과 관련하여 객관적 조건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한 1950년대 후반 이래의 지배적인 노동자계급 연구 경향을 말한다.?김경일- 『일제하 노동운동사』->1920년대 노동운동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접근?문윤걸- 「일제초기 임금노동자 계급과 형성 과정과 그 존재형태에 관한 연구」(1990)?김광운- 「일제하 조선 도정노동자의 계급형성 과정」(1990)->도정 노동자의 계급형성 과정의 주객관적 측면을 함께 살핌.?유승렬- 「일제의 조선광업 지배와 노동계급의 성장」(1990)->일제에 의한 조선광업 지배의 실상과 이에 규정된 광업부문 노동자계급의 형성 과정을 주객관적인 측면에서 살펴봄.?강이수- 『1930년대 면방대기업 여성노동자의 상태에 대한 연구-노동과정과 노동통제를중심으로-』(1991), 「1930년대 여성노동자의 상태-면방직업을 중심으로-」(1994)?김경남- 「1920, 30년대 면방대기업의 발전과 노동조건의 변화-4대 면방대기업을 중심으로-」(1994)->강이수와 유사한 관심으로...?남제련소와 1935년 7월의 진남포 제련소 노동자들의 구성과 상태 등을 살핌.?유준범- 「1930년대 ‘경성’지역 공장 노동자의 구성」(1995)->일제시대 노동자계급 형성의 객관적인 측면인 노동자계급 내부의 동질성과 질적인 성장은 제약되었다는 것?곽건홍- 「일제하(1931~1945년) 공장 유년 노동자의 형성과 성격」?이정옥- 『일제하 공업노동에서의 민족과 성』(1990)-> ‘식민지 공업화’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계급의 내부 구성에서 민족별, 성별 차이의 양상과 특히 여성노동자의 특성에 주목?김광운- 「1930년 전후 조선의 자본, 임노동관계와 일제의 노동통제정책」(1992)->일제시대 노동자계급이 처한 객관적 조건의 중요한 요소인 정치적 조건 연구를 본격적으로 함.?김민영- 『일제의 조선인 노동력 수탈 연구』(1995)->일제의 전시 노동력 정책을 파헤쳤음.?서현주- 「1920년대 도일조선인 노동자계급의 형성」(1990)->재일조선인 노동자문제를 일본사나 현재의 재일한국인 입장이 아니라 한국사에 있어서 노동자계급 형성의 일부분이란 측면에서 연구?정혜경- 「1920년대 대판 한인노동자의 생활상」(1991), 전기호- 「일제하 재일 한국인노동자계급의 형성」(1995)Ⅲ.노동자계급의 조직, 파업, 이데올로기1.1920년대의 노동조합 조직과 파업 투쟁?노동조합 조직①유승렬- 「한말, 일제 초 근대 노동자조직의 형성과정」(1991)->1910년대 노동자 조직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 공백을 메꿈.②김흥수- 「1920년대 노동조합조직의 발전과정」(1990)->1920년대 이후의 본격적인 노동자 조직 연구③김경일- 「1920, 30년대 인쇄출판업에서 노동조합 조직의 발전」(1990)->문제의식은 공산주의운동과 대중운동 특히 노동운동을 결합해서 파악하겠다는 점, 노동대중의 자기의식의 획득 및 강인한 투쟁성과 의식적 자발성과 그리고 지도부 내에서 민족과 계급의 해방을 동시에 지향하면서 단결과 통일을 위해 전력을 다한 정열과 의지를 부각하겠다는 점 등. 『일제하 노동운동사』-- 「일제하 도정노동자 계급의 형성 과정」->도정공업 노동자들의 성장을 노동조합 조직의 변화과정을 통해서 밝힘.⑤이준식- 「일제침략기 영흥지방의 노동운동-영흥 총파업을 중심으로-」(1992)->노동자조직에 대해 다른 견해 제시: ‘혼합노조’?파업투쟁①김경일- 「1920, 30년대 인쇄 출판업에서의 노동운동」(1989)->1920, 30년대의 인쇄출판업에서 노동조합 조직의 발전과 그것에 의해 주도된 서울과 지방에서 전개된 주요 파업 투쟁과 다양한 일상 활동의 양상을 밝힘, 「1925년 서울 전차 승무원의 노동쟁의 연구」(1990)->현재와 미래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운동에서 좌절과 패배의 경험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도 승리와 고양의 경험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중요.②유현- 「1920년대 노동운동의 발전과 원산 총파업」->원산 총파업을 중심으로 그 배경과 전개 과정을 통하여 1920년대 말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일반적 노동운동의 일정한 변화 양상과 그 내용을 검토했는데 지금까지 연구성과를 끌어 모아 작성한 느낌이 강함.③정근식, 나간채- 「1920~1930년대 광주 지역의 노동운동」(1992)->광주지역의 노동운동을 1920년대 초반의 노동공제회의 활동, 1920년대 중반의 광주청년회의 노동자층에 대한 조직활동, 그리고 1930년을 전후한 시기의 제사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핌.④이귀원- 「1920년대 전반기 부산지역 민족해방운동의 전개와 노동자계급의 항쟁」(1990)⑤이애숙- 「1920년대 광주지방의 민중운동」(1995)->192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 등은 외형적으로 확대되었지만 내실은 그에 훨씬 못 미쳤는데 이것은 비단 광주지방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전체 운동의 일반적 약점이라고 함.⑥김경일- 「일제하 목포 지방의 노동운동」(1992)->목포 지방의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발전을 노동조합의 조직과 노동쟁의를 중심으로 분석.⑦정혜정- 「1910~1920년대 동경 한인 노동단체」(1994)->동경지방의 한인 노동운동을 노동단체의 성립기와 재일본조선노동조합 조직과 파업 투쟁?서형실- 「식민지시대 여성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1930년대 전반기 고무제품 제조업과 제사업을 중심으로-」(1990)->식민지시대 여성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에 반영된 조건의 다양성 밝힘.?혁명적 노동조합운동사 연구①임경석- 「원산지역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1991)->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노동조합운동과의 정치적 조직적 연관을 해명하는 것②변은진- 「1930년대 경성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연구」(1991)->혁명적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운동노선과 정세인식, 이것에 대한 지도자들 간의 동일성과 차별성 등을 파악.③김경일- 「1930년대 전반기 서울의 반제운동과 노동운동」(1992)->1930년 이후 사회주의 운동이 어떠한 발전 과정을 밟아 갔는가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1930년대 전반기 서울의 사회주의 운동의 경우 반제운동에서 출발하여 혁명적 노동운동을 지향했다는 점을 신현중, 이평산, 이관술, 공원희 등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통해 실증, 『일제하 노동운동사』->1920년대 노동운동사의 총체적 접근, 「1930년대 전반기 반제운동과 노동운동」, 「이재유 연구」->1930년대 중반기 이후의 혁명적 노동운동사, : 1920년대 이후 노동운동사를 나름대로 체계화④곽건홍- 「1930년대 초반 조선질소비료공장 노동자 조직운동」(1995)->노동자 조직운동의 주체를 지도부를 구성한 사회주의자와 조직의 중심인 선진노동자로 구분하고 선진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조질공장 노동자 조직의 양적 질적 발전 과정에 대한 고찰을 통해 노동자 조직운동의 의의와 한계를 도출하고 나아가 일제하 공장 노동자운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추출하는데 중심을 둠⑤오미일- 「1920년대말~1930년대 부산, 경남지역 당재건 및 혁명적 노동운동의 전개와 파업투쟁」(1993)->기존 연구의 결여된 부분의 하나인 30년대 당재건운동과 노동자대중운동을 총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전위의 조직, 투쟁노선의 변화와 함께 이것이 노동자대중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노동자대중운동의 변화양상과 어떠한 관련이 살펴봄
1.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공업9900133 김동수개관중세의 농업생산력에는 경지이용방식을 비롯하여 농지개간, 시비법, 수리관개시설, 농기구와 농학(農學) 등이 포함된다. 중세 전기의 농업생산력에 관한 연구는 1970년대 말에 시작되었고, 휴한법 극복 시기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고려시대의 농업기술은 「영천청계비」,『농상집요』,『농서즙요』을 통해 파악하고 있다.중세전기의 상공업은 지배층과 직접지배자의 생산 및 유통망이 서로 유리되어 사회생산력을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사회경제구조의 중요한 일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군현제나 수취체계, 본관제 등 사회의 제반 구조와 관련지은 연구는 상공업의 구조와 성격에 대한 이해를 크게 증진시켰다.연구동향⑴ 경지이용방식토지의 상경화 달성 시기에 관해 3가지 견해가 있다.①고려시기까지 휴한농법단계에 있었고 14~15세기에 상경화가 진행되었다고려후기까지 휴한법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은 「개선사석등기」에 있는 ‘휴전(畦田)’의 ‘휴’가 종도(種稻)구역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이러한 ‘휴’를 만드는 수도작(水稻作)은 1년 휴한단계라는 점, 「신라촌락문서」,고려 문종 8년의 전품(田品)관련 규정에서 도전(稻田)이 1년 휴한을 전제로 하였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았다.14~15세기에 상경화가 달성되었다는 견해는 『농사직설』이 연작상경(連作常耕)의 수도작법을 담고 있는 사실에 주로 근거하고 있다. 이런 생산력 발달을 촉진한 요인은 인구 증가로 보았다.농법의 발전단계는 토지소유관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데 통일신라기는 휴경농법에 기초한 공동소유-개별점유단계, 고려시기는 2년1작 등의 정기적 휴한과 휴한지에서 휴한경(休閑耕)이 이루어지는 휴한농법단계로서 공동체 수장층의 사적소유자로서 확립하는 단계, 『농사직설』에서 연작농법이 달성되고 일반농민이 사적소유로서 확립되는 단계로 보기도 한다.그러나 ‘휴전’이 잘못 판독한 것이고, 신라통일기 1결의 면적이 약 1450평~1500평에 불과했다면, 「개선사석등기」나『신라촌락문서』를 근거로 당시의 농법이 휴한법단계에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②고려전기에도 상경화가 일반적이었다『농사직설』의 한전 작부체계는 맥을 중심으로 하는 1년2작의 윤작체계이므로 고려시대에도 주곡을 중심으로 최소한 1년1작은 가능했으며, 연작으로의 이행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의 제초문제를 배수(排水)중에 호미로 해결하였고 시비도 가능했으므로 수전농업에서는 이앙법의 보급 이전에도 연작이 가능했다는 것이다.조선초기의 사료를 근거로 볼 때 평전은 상경전이며, 세역농법은 주로 산전에서 시행하였다고 하여 고려전기에 연작법이 일반화하였다고 보기도 한다.③통일신라기에 이미 연작상경이 달성되었다고 본다.문종 8년의 전품 기록과 성종 11년의 공전조 수취규정에 나타난 전품 규정 등을 근거로 고려전기에는 수전과 한전에서 1년2모작 혹은 2년3모작의 윤작체계가 확립되었으며,「신라촌락문서」에 근거해 휴한법이 5~6세기에 이미 극복되었다고 한다.⑵작부체계와 농업기술고려시기까지는 수전농업에 비해 한전농업의 비중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한전농업에 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못한 형편이다. 한전의 농업기술은 주로 작부체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몇 가지 견해로 나뉘어 있다.조선전기 한전에서는 1년1작식 체제를 가진 중등전이 지배적이었고, 2년3작의 근경법(根耕法)이나 간종법(間種法)은 우등지에만 적용되어 고려시대에도 1년1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2년3작은 고려후기 토지 부족 현상에 대한 대응책으로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한편 고려시기의 수취규정에 윤작체제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점과 맥(麥)을 중심으로 하는 1년2모의 『농사직설』의 윤작체계가 여말선초에 확립된 점을 근거로 고려시대에는 최소한 1년1작의 연작은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고 다양한 견해가 있다.고려후기는 농업기술 발전에서 주목할 만한 시기이다. 수리시설의 확충, 점성도(占城稻)?선명도(蟬鳴稻)같은 새로운 종자의 도입, 우마구분법(牛馬廐糞法)을 비롯한 각종시비법의 활용, 윤답법의 시행, 볏 달린 쟁기와 자루 짧은 호미를 이용한 전면경(全面耕)과 중경제초 등의 농업기술이 보급되고, 다양한 시비법을 이용하여 지력 회복이 가능해짐으로써 산전에도 불역전이 등장하고, 연해안 저습지 개발로 농경지가 확대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농기구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는 매우 적다. 농기구 중에 주목되는 것은 철제 보습과 호미이다.농업경영 규모는 농업기술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호등제와 관련시켜 고려전기의 호등제를 족정호?반정호?백정호의 3등호제로 보고 등급호별로 토지와 노동력 소유규모를 추정하기도 하며, 고려후기의 기본 농업경영 조직단위는 2우3인(二牛三人)으로서 5인 소가족의 자립재생산이 가능한 최저한의 토지 규모는 1결 정도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⑶수리시설과 농경지 개발농업생산력의 증대, 특히 수전농업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수리관개수설이다. 수리시설의 축조는 주로 국가가 담당했는데 신라말기에는 승려도 수리시설의 축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수리시설의 발달에서 고려중기는 주목되는 시기이다. 이때 대규모의 제언이 쇠퇴하고 소규모의 제언이 신축되는 한편 하거(河渠)가 건설되었다. 그에 따라 저습지를 논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논농사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이러한 수리시설의 개발은 토목기술의 발전, 일반민의 자연촌의 성장, 지배층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였다.수리시설의 발전과 함께 토지개간에도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고려후기에는 내륙의 저습지와 연해지 등 저지(低地)를 개발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고려 전기의 토지개간이 산전 중심이었던 것과 대비되는 농지의 이동현상이다. 저지 개발로 수전의 규모가 확대되고 연해지에 적합한 새로운 벼종자가 도입된 결과 수전농업의 비중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⑷농학과 농서고려시기까지는 독자적으로 농서를 편찬하지 못하고 중국 농서를 이용하였다. 고려시기에는 여러 종류의 농서가 도입되었는데 1372년(공민왕 21)에 중간한 『원조정본농상집요』는 현존하는 농서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농상집요』는 선진농업기술을 수용하여 향촌사회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이해시키려는 목적에서 간행하였으며, 조선시기에 들어와서도 권농자료로 널리 활용되었다.조선초기에 간행된 『농서즙요』는 『농상집요』를 발췌 번역한 농서이지만, 아직 그 서지(書誌)사항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 책에서는 『농상집요』에서 긴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초역하였기 때문에 내용이 불충분한 한계가 있지만 『농상집요』의 세역농법을 회환농법으로 번역하는 등 조선초기의 실정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고려후기의 농업기술 이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⑸상공업과 구조와 발달①상업고려시기 국내상업은 도시, 특히 개성의 시전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상업과 지방상업으로 구성되었고, 도시상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지방장시는 군현에 설치되는 군현시의 성격을 가졌으며, 해상(海商), 강상(江商), 부상(負商)같은 행상이 이를 연결하였다. 도시와 지배층 중심의 유통경제는 발전하였지만 농민층의 유통경제는 생산 수준과 현물 수취체제, 관영숙공업과 전주전객제에 입각한 토지지배관계, 본관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구조가 그 원인이었다. 고려후기에는 공물대납제의 시행과 민간수공업의 발달, 농장의 발달로 상업이 활발해졌다.
한국근현대의 민족과 계급사학과4 9900133 김동수일제하 농민운동 연구의 현 단계와 과제1.연구성과 개관?일제하의 농민운동의 학문적 관심①북한학계(가장 먼저 관심)- 1920년대 농민운동(리종현, 허장만), 1930년대 농민운동(고정수, 김정숙, 김희일, 김영숙), 과학원 역사연구소(1961)- 『조선근대혁명운동사』, 조선노동당 역사연구소(1964)-『조선노동당역사교재』◈그러나70년대 이후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로 ‘수령, 당, 인민의 삼위일체 역사관’ 표방- 수령의 영도문제를 더욱 중시『조선전사』②일본학계- 1959년 전후세대의 본격적 연구- 자국 사회 모순의 역사적 뿌리를 보여주는 ‘특수한 외국사’로서 접근, 일제의 조선지배가 남긴 부정적 요소(제국주의의 민중 수탈과 억압), 이에 대한 조선민중의 저항에 깊은 관심◈하지만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남한경제의 발전(NIEs化)->일제의 조선지배가 남긴 부정적인 측면보다 긍정적인 측면을 더 주목하려는 경향, 이런 상황에서 좌익적인 민중운동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향③남한학계- 1980년대 중반까지- 김준엽, 김창순, 권두영, 조동걸, 김낙중, 박현재, 이우재, 노영택->소작쟁의나 개량적인 농민운동연구, 좌익적인 농민조합운동 소개(이념의 경직으로 좌익적인 농민운동에 대해서도 포퓰리즘적인 정서가 반영)◈김준엽, 김창순->공산주의운동과 농민운동의 상호관련성, 박현채, 김낙중->좌익적인 농민조합운동에 상당한 의미부여◈해외연구자(서대숙, 이정식, 박경식 등)- 1970년대부터 일제하의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연구를 급진전, 좌익적인 농민운동에 대한 연구◈유세희- 한국 근현대 농민운동사를 ㉠전통에 대한 저항기(1862~1895) ㉡민족의식 발전기(1895~1919) ㉢다각적 항일농민운동기(1920~1945) ㉣국민으로의 편입기(1945~)으로 구분, 다각적 항일운동기의 농민운동으로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실상을 밝힘.◈1980년 광주민중화항쟁 이후 일제하 농민운동에 대한 관심 본격화- 과거운도으이 전통복원, 과학적 변분과가 편찬한 『한국근대민중운동사』(돌베개,1989), 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이 편찬한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한길사, 1991), 한국근대현대사회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이 편찬한 『일제말 조선사회와 민족해방운동』(일송정, 1991)◈최근의 연구성과를 개관할 때 주목된 점- 조직 농민운동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였다는 점, 변혁적인 농민운동(특히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다는 점, 농민운동과 여타 부분운동(청년회운동, 신간회운동), 특히 당재건 운동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됐다는 점, 논의의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역운동 사례가 많이 연구되기 시작했다는 점2.소작쟁의와 농업정책 반대투쟁?일제하의 소작쟁의는 1922~1923년과 1930~1931년을 고조기-> 조선소작조정령(1932), 조선농지령(1934) 등 소작권 관계 입법이 발표되는 1933년을 전후하여 갑자기 소규모의 쟁의조정사건이 급증하는 현상 나타남?일제하의 소작쟁의는 지주?소작관계의 모순에서 기인- 김준보, 박현채, 김용섭, 장시원, 홍성찬 연구->구체적인 원인①주주들의 고율 소작료 수탈문제②마름들의 중간수탈문제③잦은 소작권이동 문제④고율의 고리대 수탈문제⑤노역동원 등 각종의 잡부담 문제 등을 중시, 대부분의 연구자는 소작쟁의의 원인으로서 식민지 지주제를 매개로 강화된 일제와 지주의 농민수탈을 강조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음.?주봉규, 김종선, 강훈덕, 박천우- 일제의수탈적인 농업정책, 지주?자본가 계급의 토지겸병에 의한 농민층 분화, 그리고 이로 인한 소작 빈농민들의 대지주나 자본가계급에 대한 투쟁?1930년대의 농업정책에 대한 논쟁의 핵심-농가경제개선정책이 농업구조나 농가경제, 혹은 농민층의 정치적 동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1930년대의 소작쟁의를 다룬 논문- 소순열-> 능본농업의 쟁의사례(1933~1937, 4회 발생)를 중심으로① 1930년대 중반 적색농민조합운동이 종식된 이후에도 소작쟁의가 더욱 증가한 이유, 그리고②193후하여 갑자기 종식된 이유 등을 구명하고자함?이준식- 찰스 틸리나 데다 스카치폴의 역사사회학 이론을 원용하여 함경도지역의 소작쟁의나 농민(조합)운동을 분석함으로써 경제적 토대문제만을 주목해온 소작쟁의 및 농민운동 연구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을 시도함. 또한 최근 소작쟁의의 발생문제를 전통적인 농촌공동체 질서의 파괴문제와 관련시켜 설명하려는 견해가 있어서 주목?이철우-순천지역 소작쟁의의 성격을 법사학적인 관점에서 접근, 함안희-나주 궁삼면 농민들의 토지소유권 반환투쟁을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분석?일제하에서 조선의 농민들은 소작쟁의의 이외에 ①수리조합 반대투쟁 ②국유지 불하 반대투쟁 ③삼림조합 반대투쟁 ④화전정리 반대투쟁 ⑤호세나 지세 반대투쟁 ⑥잠종 부정판매 반대투쟁 ⑦상묘 강제 배부 및 아마재배 반대투쟁 등 다양한 저항운동을 벌임. 하지만 농업정책 반대투쟁에 대한 구체적 연구성과 거의 없음.?수리조합 반대운동은 조합비 문제나 조합운영의 부실문제 등으로 인하여 발생한 경우도 많았으나 흔히는 수리조합의 설치 문제를 둘러싸고 집중적으로 발생, 이애숙, 박수현->①일제와 대지주들이 수리조합 설치를 강행한 결과 소농과 중소지주의 토지 상실과 더불어 소작료의 고율화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점 ②수리조합 반대운동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영훈- 수리조합사업에 대해 통설과 다른 견해, 수리조합설치사업을 4개의 시기로 나누어 ①1906~1920 ②1920~1926 ③1926~1934 ④1934~1945 각 기간에 전개된 수리조합사업을 분석, 수리조합 반대운동의 존재 사실 및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은 운동사 연구자 이외에 경제사 연구자들의 과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유념3.1920년대의 소작인조합 및 농민조합운동?3.1운동 직후부터 삼남 논농사지대를 중심으로 군, 면 단위의 소작인조합이 속출->1920년대 초반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농민단체는 소작인상조회, 소작인조합, 소작회, 노농회, 농민동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림.?조직 농민운동의 역사는 북한학계의 ->우리나라 농민들은 1920년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보급의 영향하에 자기들의 대중적 투쟁조직인 농민조합에 망라되어 노동계급과 공동으로 반제 반봉건투쟁을 전개하였다고 주장①허장만, 이종현->1920년대 초반 소작인조합운동이 활성화된 배경으로서 소작농민들에 대한 일제와 지주의 가혹한 착취, 소작농들이 오랜 공동체적 삶의 과정에서 획득한 계급적 동질감과 연대의식, 농촌에서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소조의 활동에 주목?허장만- 일제하의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노농동맹의 사상적, 물질적 토대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논증하려는 시도함.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결성, 1925년 조선공산당의 결성,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의 분립 등의 시기를 주목?지수걸- 노농동맹의 물질적, 사상적 기초가 확립된 것은 1920년대 중반이 아니라 1930년대 초반기라고 주장함,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주체들은 이런 변화를 배경으로 토지혁명이나 노농소비에트 건설 구호를 내걸기 시작하였다고 주장, 1926년 무렵부터 사회주의자들의 지도 아래 소작관계 개선투쟁을 주도하였던 소작인조합들은 점차 농민문제 일반을 다루는 농민조합으로 개조되기 시작하였음.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약 75개의 합법적인 농민조합이 활동, 하지만 1930년대 초반 운동의 조건과 정세가 대략 24개의 합법 농민조합들이 혁명적 농민조합으로 개조, 이런 노선전환은 농민의 자연발생적인 생존권옹호투쟁이 격화되고 개량주의 농민운동이 활성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합법 농민조합들이 이를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없었을 요인으로 주장?이준식- 그간의 경제주의적 해석을 벗어나 이념과 조직의 지속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함남지역의 농민조합운동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힘으로 코민테른의 지도 등을 강조하는 외부적 영향설, 혹은 경제적 빈곤문제를 강조하는 자연발생설 등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판단?김익한- 일제의 농촌조직화정책(부락질서 재편정책)과 이로 인한 지방정치구조의 재편(지방명망가층의 분화, 신흥명망가층 두루 문제삼음.4.1930년대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1930년에 접어들면서 농업공황이 발생->농민들의 자연발생적인 생존권 옹호투쟁 격화->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는 투쟁을 전개, 이런 가운데 1930년대 초반기에 민족해방운동의 두 번째 고조기가 도래->이런 혁명적 분위기를 제어하기 위하여 ‘사회정책적인 농업정책’을 실시->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이런 해소투쟁 과정에서 등장한 농민 주체의 반제, 반봉건투쟁이었음.?1930년대의 농민조합운동에 대한 연구들은 대부분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등장배경과 노선문제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어 왔음.?북한학계- 1960년대 초반에 나온 북한학계의 연구성과들은 대부분 일제하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 그러나 북한학계는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의의를 무조건 높게만 평가한 것은 아님. 즉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한계와 오류를 지적.?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등장 배경에 대한 것은 두 가지 경향, 운동의 단계적 발전 등 내부적 계기를 강조하려는 경향과 코민테른의 지도라고 하는 외부적 계기를 강조하려는 경향.?지수걸- 토지혁명론, 노농소비에트 건설론 등은 구체적 실천론으로서는 편향이라 할 수 있으나 우리 역사상 빈농우위의 원칙을 관철시키려는 최초의 농민적 실천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며, 또 실천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개량주의 박멸론, 부농 배제론 등 일부의 좌편향적인 운동노선도 상당부분 극복되었다는 것.?지수걸, 신주백, 이종민, 김점숙, 김익한, 김일수-구체적인 사례연구를 통해,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주체들이 실천투쟁의 전개과정에서 양자의 운동을 이른바 ‘지역전위 정치조직’을 매개로 통일적으로 ‘결합’시키려 했음을 밝히는 성과를 거둠.?박명규, 신기옥, 이준식- E.울프나 H. 알라비 등의 ‘중농테제’나 J.C. 스카트의 ‘도덕경제론’을 수용하여 농민운동의 주체나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5.야학운동과 소비조합운동?야학운동을 ‘농촌계몽운동’, 즉 일부 지식층들의 ‘항일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의 성과와 과제사학과 4 9900133 김동수Ⅰ.머리말?1960년대 이후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는 냉전체제하에서 사회주의를 적대시하던 남한과 미국에 의해 이루어짐. 스칼라피노, 이정식, 서대숙, 김준엽, 김창순 등은 북한학계의 역사서술이 왜곡됐음을 입증하려는 의도하에 이루어짐.?1980년대 중엽이후 남한 역사학계에서는 소장연구자들 사이에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의 일대붐이 조성됐음.?1980년대 중엽이후 오늘날까지 발표된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관련 연구논저들이 거둔 성과와 한계를 검토Ⅱ.한국사회주의운동의 기원?한국 역사상 사회주의 운동과 사상이 최초로 등장한 때는 3.1운동 전후 시기, 당시 국제 정세는 한국 민족해방운동 세력 내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형성되는 과정을 촉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발생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 하에서 외부로부터 이식되어 온 것으로서 한국 민족해방운동의 전통과는 이질적이었다는 것, 소비에트 러시아와 코민테른이 세계 각국의 정치사에 영향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내부의 변화에도 중대한 영향을 준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한국 사회주의 운동 발생의 원인을 외적 영향력에서만 찾는 것은 한국사의 내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것, 그래서 한국 민족운동과의 내면적 연관관계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을 해명하려함.?최초의 한인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에 대한 연구①수야직수, 임경석- 신민회로 간주, ②권희영- 광복회로 추정, ③반병률- 한인사회당의 기원은 신민회, 하지만 해방동맹은 신민회가 아님. 해방동맹은 광복단이나 대한광복군, 철혈광복단으로 추정.?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세력 형성과정 연구방법을 한인사회당 외에 여러 초기 사회주의 단체들에 대해서까지 확대 적용될 필요 있음, 사상사적 측면에서도 연구 필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발생과 초기 전개과정을 내전기 러시아 극동지역의 정세 변동과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사회주의 운동의 기원문제에 대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와의 분열 원인과 성격에 대한 문제①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에 귀화한 순연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고, 상해파는 한국의 독립을 획득하기 위해 소련의 도움을 얻고자 했던 민족주의자들이라고 해석하는 견해②상해파도 역시 이르쿠츠크파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단체임에 틀림없다고 보는 견해③양파의 분쟁은 자금, 권력, 군권을 둘러싼 단순한 패권 다툼이 아니라 혁명운동의 방법과 정책을 둘러싼 노선상의 대립의 표현이라는 견해?한인사회당과 상해파, 이르쿠츠크파의 계승관계①한인사회당을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전신으로 보는 견해②한인사회당에는 이후 대두하는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요인들이 다같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 한인사회당을 단일한 모태로 하여 양파가 분립된다는 견해③양파의 주도세력의 형성이 서로 다른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Ⅲ.1920년대 각파 공산주의 그룹과 조선공산당?1922년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무대는 해외에서 국내로 옮겨지고, 국내 청년층은 대거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게 됨?운동의 주된 무대가 국내로 이전된 이유- 국제정세의 변화와 연관, 1921년 말에 워싱턴회의로 인해 제국주의 열강간의 국제질서 재편과정이 일단 완료되어 민족해방의 가능성은 장기적 전망하에서만 성립할 수 있었음.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운동론에서 그 활로를 찾음.?1920년대에 출현한 각파 공산주의 그룹으로는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외에도 서울파, 화요파, 북성회파, 조선노동당 그룹, 만주공청파, 엠엘파, 서상파 등이 있음. 각 그룹은 자신의 세포단체를 경쟁적으로 결성, 적극적 개입?여러 공산주의 그룹들은 다투어 당 창립을 최우선의 조직적 과제로 설정->화요파, 북성회파, 화요파 공산주의자 그룹은 공산당 결성에 합의하여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1925년 각 그룹간의 분쟁이 격화->조선공산당과 당의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간의 분쟁, 조선공산당내에서 북성회파와 화요파 간의 분쟁, 당외 연합반대파와 조선공산당간의 분쟁 등->1926년 3월 코민테른 제6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운동이 다시 전개->12월 제2차 조선공산당 대회는 각 그룹의 회합-> 하지만 전개과정에서 서울신파, 일월회파, 만주공청파, 북경 혁명사가 연합하여 새로운 공산주의 그룹인 엠엘파가 형성됐고, 그에 대항하여 서울파와 상해파가 연합하여 서울상해파가 생성, 두 그룹간의 대립 격화로 제3차 조선공산당 대회를 개최하여 분립함.①임경석- 엠엘파의 한 구성분분이자 모체 집단인 만주공청파 공산주의 그룹 연구②이달호-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형성과 전개과정에 관해서 연구?각파 공산주의 그룹이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수행한 역할에 관해서는 오늘날 부정적 평가, 북한학계에서도 동의, 하지만 북한학계는 ‘종파사건’ 이전에는 다른 견해였음. 이 견해는 비밀 공산주의 그룹과 합법 사상단체를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파악한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지만, 양자를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지적한 점에서 음미할 만한 단서를 제공.?1920년대 각파 공산주의 그룹의 상호투쟁에 관련해서 연구 과제①각각의 분파투쟁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그것을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운동과 연관지어 고찰.②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분파투쟁을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명멸했던 이론, 전술, 조직상의 노선투쟁과 비교 연구할 필요 있음.?코민테른과 1920년대 한국 사회주의 운동간의 상호관계①수야직수- 코민테른의 각 대회에 참석한 한인대표단의 구성과 그들의 활동 상을 검토②임대식- 코민테른과 각급 국제사회주의 운동기관 한국관계 문헌을 당시 입수할 수 있었던 자료범위 내에서 망라적으로 수록한 데이터를 작성 발표③권희영, 서중석, 우동수, 이균영, 최규진- 코민테른이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 끼친 영향력을 다각도로 분석?연구 진전을 위해 유의해야 할 문제점①국제혁명단체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에 관한 문제②각파 공산주의 그룹과 코민테른의 상호관계 문제도 주목 대상③코민테른과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도 한인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상이한 견해와 정책, 인맥이 형성되어 있었음에 주목해야함.Ⅳ.세계대공황기의 사회주의운동?1920년대말 1930년대 초엽의 한국사회주의 운동은 코민테른에 의해 조선공산당의 지부승인 취소, 각파 공산주의 그룹의 해체와, 세계대공황이 내습한 상황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규정.?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의 지부승인을 취소한 것은 1928년 말, 공산당 재건을 위한 정치적 지침서로 12월테제를 채택.?코민테른이 각파 공산주의 그룹의 해체를 지시한 것은 1930년, 꾸시넨 테제는 바로 각파 공산주의 그룹이 해체된 상태에서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취해야 할 정치적, 조직적 태도를 서술한 코민테른 측의 제안서라고 함. 코민테른 동양부의 직속으로 설치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만이 새로운 공산당 재건의 책임을 담당한 존재로 간주, 당재건운동과 적색노동조합운동에 착수?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개시된 첫 시기는 세계대공황으로 제국주의 나라들간의 식민지 재분할 경쟁이 격화, 대중의 혁명적 진출이 두드러짐. 이에 한국도 혁명적 위기가 성숙 됐다고 인식하고 폭동 선동->폭동전술은 정치적으로는 ‘좌익민족주의 고립화론’과 결부되어 있었음. 1931년 5월에 사회주의자들이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해소시킨 것은 바로 그 정책전환의 귀결Ⅴ.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혁명적 노동조합, 농민조합 운동?종파단체로 규정된 각 공산주의 그룹의 해산이 강제된 뒤로 한국 사회주의자들은 ‘국제선’의 유일적 지도성만 인정되는 조건 아래 적색노동조합, 농민조합운동에 전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