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중국의 역사 중에서 1368년부터 1968년까지의 중국 경제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1368년은 명이 건국된 해로, 중국은 중세혁명 후 6세기 동안 기술의 확연한 발전이 보여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꾸준히 생산력이 증가했을까? 이러한 의문점을 이제부터 4가지의 주제로 중국의 경제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로 경작면적당 곡물산출량의 증가에 대해, 둘째로 곡물산출량의 증가의 방법, 셋째로 농민들을 둘러싼 제도에 대해, 마지막으로는 농촌의 시장구조의 변화 및 구조를 분석해봄으로서 위의 물음에 답해보도록 하자.첫째는 곡물생산량의 증가로 곡물 생산량의 증가를 나타내어 주는 방법으로는 인구의 증가를 뽑을 수 있다. 중국의 인구는 14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5~6배 가량 증가했고 19세기 초부터 1950년대까지 또다시 50% 증가했다. 이러한 인구증가의 배경은 곡물생산의 증가 없시는 말할 수 없다. 이런 곡물 산출량의 증가를 증명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하나는 중국의 일인당 곡물생산량의 증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것을 자료를 사용하여 계산해보면 1400년대에는 1무당 139근, 1770년에는 203근을, 1850년에는 243근을, 1933년에는 242근을, 1957년에는 276근을 생산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두 번째 방법인 중국의 여러 지역과 여러 기간의 산출량 자료를 비교하는 것이 좋다.둘째는 곡물 산출량의 증가 방법으로 어떠한 발전을 통해 곡물 산출량을 증가시켰을까? 그 발전은 종자개량, 경작방식, 신작물 도입과 농기구?치수?비료의 발달 등을 통해서이다. 먼저 종자의 개량은, 농민들이 농업의 발달 지역에서 저개발지역으로 이동할 때, 관리와 상인이 해외로부터 특별한 품종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리고 자연발생적으로 유용한 변종이 만들어졌을 때 농민들은 신품종을 얻을 수 있었고 “천락종”과 “참파벼”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둘째, 경작방식의 변화는 북부로의 벼농사의 확대, 벼 이모작의 증가, 벼와 밀?기장?보리의 이모작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셋째, 신작물의 도입은 16세기 이르러 감자?옥수수와 같은 작물의 도입과 20세기 미국면화의 도입을 들을 수 있다. 넷째, 농기구의 경우는 6세기 동안 수량은 인구의 증가만큼 증가하나 질적으로는 발전이 없었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아직 근대 과학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술상 돌파구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노동력으로 인하여 발전된 농기구는 그리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기계화된 동력이 농업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인식하였고 관계나 배수펌프와 탈곡기를 사용하여 노동력이 많이 사용되는 일에서 노동력을 절약시켰다. 다섯째, 치수로 치수사업이 산출량에 미친 영향을 실질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드나 치수상업의 전개는 수세기에 걸쳐 나타나는 산출량의 증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며 또한 관계면적의 증가는 산출량의 증가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마지막은 비료로서, 전통적으로 비료는 뿌리?짚?콩류?잡초 등이 사용되었으나 1920년에 들어오면 더 이상 이러한 비료가 주요비료로 사용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전통적 비료는 토양을 비옥화시키는 효과가 그다지 없다는 것이 알려졌고 이것들을 수집하기 위한 노동력 또한 많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학비료의 생산과 사용은 중국에서도 농업 생산성을 한층 향상시키게 된다.셋째는 농민을 둘러싼 제도에 대한 것으로서 먼저 경제적 요인은, 농민들은 농업생산으로 인한 이익이 많지 않았다. 가족중 병자가 생기거나 한?두해 기근이 일어나면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돈을 빌리는 데는 토지를 담보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한 일이 없어도 소농은 부를 축적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균분상속이라는 관습으로 인해 부가 계속 나뉘어져 토지는 계속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토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국가의 공적인 토지를 제외하면 소작토지는 1/4이 촌락의 개인이나 종족토지였고 3/4이 외부인인 부재지주의 토지였다. 대부분의 토지는 촌락의 토지가 아닌 부재지주의 토지였는데 이들 부재지주는 농업을 통한 이윤으로 토지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농업외의 분야에서 토지자금을 조성하였고 대체로 부재지주가 상공업쪽에 종사하였다라는 것으로 보아 자본은 상공업의 자본을 이용하였다. 둘째로 정치적인 요인은 지주의 주요지지자는 국가로서 농민들이 지대를 내게하는 역할을 담담하였다. 상업이 발달한 곳에서는 ‘조잔’에 위탁하여 지대 징수를 보다 간단히 하였고, 낙후된 지역에서는 지주가 관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지주들이 사실상 국가권력 자체였다. 그러나 1940년대 말과 1950년 공산당의 토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은 제거되고 토지는 빈곤층에게 분배되었다. 그리하여 토지는 국가 소유화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농민들이 분배된 땅을 경작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방식은 개인이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경우보다 산출량 면에서 확실히 효과적이지 않았고 국가는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제도를 구상해야 했다.넷째는 농촌시장의 구조 및 변화로서, 먼저 중국 농촌시장의 구조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교역의 3가지 형태는 시진내무역, 국내 장거리 교역, 그리고 대외무역이다. 1910년 이전에는 시진내교역이나 이웃 시진간의 교역이 중국 농촌상업의 지배적 형태였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이런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하여 장거리 국내무역이 10%이상에 달했고 1950년대에는 수출량이 농업생산량의 7%로 증가한데 비해 국내교역은 15%정도였다. 이와 같은 대외교역이 시진내교역에 미친 영향은 농민들로 하여금 상품작물의 생산을 촉진시켰고 토지와 전문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력의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전업화를 유도했다. 반대로 1910년 이전에 장거리 국내외 교역은 차, 비단, 면화, 등 몇 가지 상품을 제외하고는 영향이 적었으나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와서 철도와 증기선의 운송으로 자신들의 생산물을 가공하기 위해 도시로 운송하는 일이 많아졌고, 근대산업의 발전은 대외무역의 팽창과 도시인구를 증가시켜 농촌으로부터 물자공급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50년대가 되면 이러한 산업화는 더욱 진행되어 도시에서 필요로 하는 농업 공급량은 더욱 많아졌고 농민은 이익도 없이 점차 증가하는 도시인구를 부양하고 대외무역을 위해 공급을 늘려야만 했다. 이제부터는 중국 시장 내에서 곡물시장의 변화는 어떠하였는지 알아보자. 20세기 곡물시장에서 발생된 역동적인 변화 요인은 산업화와 철도건설에 따른 북부지역의 비약적인 성장이다. 1900년 이전까지 북부지역이 대규모의 상업과 수공업 중심지로 성장하지 못한 요인은 곡물 생산성이 낮은데서 오는 높은 곡물운송비가 한 원인이었다. 이러한 북부의 발전은 남부지역의 생산력을 자극했고 북부지역에 전업화를 가져왔다. 그 전업화는 근대산업과 상품작물로서 북부는 더욱 남부의 잉여곡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처음에 이 영향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1950년대 말에는 곡물잉여 지역에서 도시 인구를 지탱해야 하는 것에 대한 압력이 심각해졌고 이 문제는 1959년~1961년에 발생한 흉년으로 더욱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1945년 이전의 일본인들에게는 한국인이 지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공론에 대해 거부하고 한국의 예술에 대한 극찬과 함께 한국민족에 대해 애정을 보여주었던 지식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중국의 대두와 남?북한 종단 철도의 건설 등 동북아시아의 협력이 강하게 인식되는 시기인 만큼 우리 또한 야나기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일본을 한층 더 이해하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일제는 미워하되 일본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이제부터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 살펴봄으로서 이 생각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자.야나기 무네요시는 1889년 3월 21일 도쿄에서 해군소장인 아버지 야나기 나라요시와 어머니 가쓰코 사이에서 태어났다. 야나기가 태어날 때의 일본 정세는 미국의 전함 페리호에 의한 강압적인 강제개국과 메이지 유신으로 인한 근대과정이 20여년이 지난 시기였다. 그는 가쿠슈인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가쿠슈인은 귀족의 자제만이 다닐 수 있는 고급학교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의 아버지는 해군소장이었고 그의 외조부는 해군대장과 해군장관을 역임한 상위계층의 가족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쿠슈인은 일본 엘리트들의 자제들이 다니고 있었고 당연히 학교의 성격은 은연중에 제국주의의 일본을 위한 사상이 깔려있었다. 하지만 야나기는 제국주의의 편에 서지 않고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야나기는 학교시절 수석졸업을 할 정도의 영재였지만 러일 전쟁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글인 「전쟁의 전도」을 교지에 실어 한때 퇴학 처분을 받는 등의 진통을 겪기도 하였고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의 대국들에 끼였다고 환호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이의를 제기한 「나는 회의한다」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국가관은 일본 엘리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과는 다른 차별화를 두기 시작한다. 일본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넘어서 “인류 보편의 기준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과 그 기준을 자발적으로 짊어지는 것으로서의 개인의 해방”을 추구했던 야나기는 이「잃게 될 조선의 건축물에 대하여」, 「조선 도자기의 특질」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애미론의 개략적인 논지는 ‘조선미술 거의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조형적 특질’을 선(線)으로 보는 것으로 그는 석굴암의 불상들, ‘금동미륵 반가상’, 경주 ‘선덕대왕 신종’과 오대산 ‘상원사 범종’의 형태와 양각된 비천무늬, 고구려 벽화인 ‘선녀도’와 ‘사신도’, 경주 ‘첨성대’, 도자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공에품들, 지붕 기와, 하다못해 책상다리, 서랍고리, 부채자루, 칼집, 신발, 버선에 이르기까지 온갖 기물들의 넘쳐흐르는 곡선의 물결, 흐르는 선, 가늘고 긴 곡선들에 주목했다. 그리고 조선의 예술이 선을 추구하게 된 이유, 즉 야나기에 따르면 “조선의 역사와 자연은 대륙도 섬도 아닌 반도라는 사실이 조선의 운명을 정했다는 것이다. 땅은 편안하지 않고 봉우리는 가늘고 나무는 듬성하고 꽃은 퇴색하여 있다. 땅은 메마르고 물건들은 윤기없고 방은 어둡고 사람은 적다. 소리에는 강한 가락이 없고 빛깔에 즐거운 색채가 없다. 다만 감정과 눈물 넘치는 마음만이 있다. 역사는 즐거움을 잃고 강함을 잃었다. 끊임없는 외래의 압박에 의해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백성은 힘 앞에 굽힘을 강요당했다”라고 하여 조선의 예술품이 비애미를 낳은 것은 조선의 자연과 역사라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선에 지배된 까닭은 조선예술은 형태의 힘이 부족하고 색채가 결핍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조선 미술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주된 요소가 ‘백색’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상하게도 동양의 세 나라에 있어서 세 개의 다른 자연이 대표되고 세계의 다른 역사가 표현되고 세계의 다른 예술의 요소가 시현되었다. 대륙과 섬나라와 반도, 하나는 땅에 안정되고 하나는 땅에서 즐기고, 하나는 땅을 떠난다. 첫째의 길 강하고 둘째의 길은 즐겁고 셋째의 길은 쓸쓸하다. 강한 것은 형태를 즐거운 것은 색채를 쓸쓸한 것은 선을 택하고 있다. 강한 것은 숭배되기 위해서, 즐거운 것은 맛보기 위해서, 쓸쓸한 것은 위로 니라 종교나 예술적인 내면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웃과의 사귐은 오직 사랑이 맺어주는 것이다. 군정이나 압박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일본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본인의 조선관을 비판했다. 2편에서는 “우리 일본인이 지금 조선인의 입장에 처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의분을 느끼기 좋아하는 우리 일본인이야말로 가장 많은 폭동을 꾀하는 무리가 될 것이다. ...... 내일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폭동이라고 매도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반항을 현명한 방법이라거나 칭찬할 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지식인들의 반응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3편에서는 “나는 조선의 예술, 특히 그 요소로 볼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은 실로 사랑에 굶주린 그들 마음의 상징이라 생각한다.”라고 하여 제국에 의한 압박의 역사에서 생겨난 예술과 거기에 담겨진 민중의 생각이라는 논리로 비애미론을 전개하였고 “그러나 그들에게 빼앗은 것은 군대요, 우리가 보낸 것은 그들의 것이 아닌 우리의 군대였다. 우리는 영원한 독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고정된 방법을 취했다. 더구나 그들의 자율적인 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일본에 적합한 도덕과 교육을 주었다.”라고 하여 야나기는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본질을 이렇듯 숨김없이 표현하였다. 4편에서는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외국어를 피하고 주로 일본어로 일본의 도덕이나 이제까지 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던 일본 황실의 은혜를 중심으로 그들 사상의 방향마저 바꾸려 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인 고등학교 자수를 만드는 참관수업을 보며 “그것은 조선 고유의 아름다움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현대 일본풍의 작품, 즉 반서양화되어 아취도 없고 기품도 없는 우둔한 도안과 천박한 색채의 작품이었다.”라고 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예를 도외시하는 일본 교육 방침을 비난했다. 그리고 마지막 5편에서는 “이웃간의 영원한 평화를 구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말하며 조선예술을 보전하고 알리기 위한 미술관 설립에 앞장섰고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짖기위해 광화문을 없애려 할 때, 야나기는 잃어서는 안 될 한 예술품이 사라지려는 운명을 애도하면서 광화문을 만든 민족의 눈앞에서 그것이 파괴되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서글픈 감정과 일본의 무모한 조치에 대한 분노를 담은 「잃게 될 조선의 건축물에 대하여」라는 글을 씀으로서, 그의 글은 영어와 조선어로 번역되었고 광화문 파괴에 대한 내외의 반대여론이 일어나 광화문을 지키기도 하였다. 야나기의 뇌리에는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으로 대표되는 일본관헌의 만행과 무단통치로 불리는 강압적인 시민정책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층은 3?1운동을 계기로 기존의 조선통치 정책을 바꾸었고 1919년 8월 조선총독부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에서 사이토 마코토로 바뀌고 새 정무총감에는 학자로서도 알려진 미즈노 렌타로가 취임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야나기가 비판한 무단통지는 모습을 감추고 미술이나 음악이 장려되는 시대가 되었다. 야나기는 교활한 식민지 통치수단으로서의 ‘문화정치’에 대해 결국 비판적인 관점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에게는 겉으로 예술을 중시하는 문화정치는 조선의 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는 모습으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비판없이 수용하는 모습은 사실 그 전부터 보여왔는데 먼저 포웰 논설문에서는 “나는 조선에게 최대의 재해는 일본으로부터 버려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일본인이 종래의 심한 행동을 개선하고 또 시기를 봐서 조선인에게 넓은 범위의 자치를 허락함으로써 일본이 성의 있는 우의를 나타내면, 조선인도 가망없는 절대독립의 요구를 버리고 일본이 양보한 범위 내에서 일본의 선정을 즐거워하고 일본과 협력해서 동양문명의 진전을 도베 되어, 결국 우리는 동양의 정국에서 조선문제라는 것이 소멸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야나기의 반응은 “조선문제에 관한 평론을 많이 읽었지만 이렇게 오류가 적고 고명한 비평은 본 적이 없다.생활 주변에 숱하게 널려 있는 무명성의 미에 대한 일련의 발견들이 하나의 관점 아래 묶여 언급된 것은 「일본민예미술과 설립취지서」에서였다. 야나기는 그러한 발견들을 “민예”라는 새로운 말로 일컫기에 이르렀다. 야나기는 이제 ‘미의 본류’가 서구 중심적 예술이나 엘리트 미술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묻혀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던 ‘민예’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민예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민’은 원래 ‘민중’의 ‘민’이고 ‘예’는 우리의 의미로는 ‘공예’의 ‘예’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민중적 공예’의 약칭으로서 ‘민예’ 두 글자를 골랐던 것이다. ‘민중예술’이라는 의미라 해도 좋으나 예술이라고 하면 자칫 개인적인 고급 미술 등을 연상시키므로 좀더 이름도 없는 동인들이 만든 실용 공예품리라는 의미를 시사하고 싶어 ‘민중적 고예’의 의미를 취해 ‘민예’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영역할 경우에도 ‘Folk Art'라는 어휘를 피해 ’Folk Crraft'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야나기는 이러한 공예의 길을 불교의 수행방법 중 하나인 타력도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타력도가 깨달음의 길이듯 도예 역시 깨달음의 방법인 것이다. 야나기는 민예의 가능근거를 바로 이행도인 타력도에서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지한 공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민예를 바로 타력도에, 천재적인 개인 작가들에 의한 미술을 자력도에 연계시켜 이해한다. 따라서 불교적 수행의 한 방법으로서 특히 타력본원, 즉 아미타불의 본원에 따라 염불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법부성불의 방법론에 의탁하는 정토종의 종지야말로 그의 민예론의 토대이다. 작품이 아닌 잡기에서, 천재 작가가 아닌 무명의 공인에서 비범이 아닌 평범에서 미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래서 야나기에겐 진정한 아름다움을 낳는 힘은 천재적인 작가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가 타력도에 입각해 이상화한 아름다움의 생산자들은 따라서 범용한 공인들의 ‘협단’이다 그래서 민예미는 사회미이다. 야나기에 따르면 “협단은 하나의 이데아이다. 나는 그것을 단지 방법이라하였다.
중국은 진의 통일 이후 20세기의 중국에 이르기 까지 계속해서 거대한 제국을 운영하고 있다. 그 거대제국을 운영하는 기초는 바로 농민들이었다. 이 책은 중국 농업에 대한 여러 논문으로 쓰여져 있다. 그럼 이제부터는 그 논문들을 바탕으로 중국의 농민과 농업에 대해 알아본다면 현재 중국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약간이나마 이해가 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1. 중국의 농업 생산력에 대해서중국의 농업 생산력에 대한 보고서는 세 가지로 첫째는 1368년부터 1968년까지의 6세기 동안의 곡물 생산량의 증가, 둘째는 강남의 도작문화에 대해, 셋째는 상업화와 농업 생산력의 변화에 대해서이다.첫째, 6세기동안의 곡물 생산량의 증가를 알아보면, 중국 인구는 14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사이에 5~6배 가량이 증가하였다. 또한 1950년대까지 다시 인구가 50%가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곡물 생산량의 증대가 없이는 일어 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제부터 중국의 어마어마한 인구를 지탱할 수 있었던 곡물의 증가에 대해 살펴보자. 이러한 생산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밝히는 데는 2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중국의 1인당 곡물 생산량이 조금이라도 증가했다는 주장으로 출발한다. 두 번째 접근 방식은 다른 지역과 다른 기간의 산출량 평가를 수집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다. 첫 번째 접근에 필요한 3가지 요소는 상당히 신빙성있는 인구 통계, 경작 면적 통계와 초기의 1인당 곡물 생산량에 대한 가정이다. 인구와 경작면적에 관한 자료를 살표보면, 1400년도의 인구는 6500~8000만명이고 경작면적은 37000무(畝) 정도에서 1957년도에는 인구가 64700만명 정도이고 경작면적은 167800무 정도로 인구와 경적면적이 계속해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개인당 생산량을 계산하여 보면 1400년에는 무당 139근, 1770년에는 무당 203근, 1957년에는 무당 276근을 생산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출량의 증가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그 당시의 농법은 전과 다름없는 직파나 휴한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강남의 화경수누는 모내기 농법이 도입도어 휴한 경작이 폐지됨으로써 수확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강남의 도작이 화북의 식량을 보충하기에 이른다. 결정적으로 경제의 중심지가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한대의 문헌에 화경수누는 계급이 미분화 된 사회에서 행해진 농경으로 종종 묘사되고 있으며, 국가권력이나 민간호족이 아닌 소규모 집단에 의한 식량확보의 차원이라고 반박되어지기도 한다. 둘째는 우전과 위전으로, 우전과 위전은 큰 하천이나 호수에 가까운 저습지를 제방으로 둘러쌓아 외부의 물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한 수전으로 송대에 이르로 대규모로 조성되었다. 슈토우 요시유키는 특히 우전은 국가 권력의 자본투자와 일반 농민에 의 해 경작된 관우롸 소규모로 조성된 사우가 있다고 하여 관우가 남송의 군사 비용을 충당한 재원이었고 사우는 형세호의 경제적 기반이었으며 동시에 송왕조를 유지시켰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자연 지리학자인 다카다니 고우이치는 작은 하천으로 경계를 이룬 논이 위전이었으며 거대한 제방으로 둘러싸인 대윤중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위전은 이 지역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가와가치 마모루는 생태학적으로 곤란한 지역일수록 국가 권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개발에 착수를 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여 다나카니의 환경론을 비판했다. 셋째는 점성도로, 10세기 강남 삼각주의 조성이 얼마나 집약적이었는가가 쟁점이 되었는데, 이시이 요네오에 의하면, 10세기에 이르면 상당히 고도의 공학적 적응이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로 행해졌고 그러나 한편으로 신품종의 도입에 의한 농학적 적응도 동시에 행해졌다라고 하였는데 송대 점성도의 도입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점성도의 도입에 주목한 이는 가토우 시게시로 당대이래 미곡 생산의 폭발적인 증가에는 품종 개량이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벼는 가뭄에 강하였고 2~3월에 파종하여 8월에 수확할 수 있었기 때는 농업 생산량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작았고 당시 중국인의 총 GNP와 비교해도 매우 작았다. 다음으로는 성간의 교역으로, 장거리 교역이 적었다고 한다면 중국 농민은 그들의 이웃을 제외한 모두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도시와 농촌간의 교역은 어떠했을까. 두 가지의 형태가 있어 하나는 농업과 관련된 원료를 도시로 보내 가공한 후에 도시 소비용과 수출용울 제외하고는 다시 농촌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농업적 원료를 사용한 도시의 산업 상품과 농업 생산물의 교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와의 교역은 농민의 입장에서는 식량이나 다른 소비재를 대체한 생산재 공급만으로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농촌에서 1인당 식량 소비량의 증가를 수용할 만큼 충분한 농업 생산량의 증가도 없이 도시만 성장하는 것은 기존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다음은 농산물 수출로, 1900년 이전 중국 대외 무역의 주요현상은 거래된 상품이 국내 교역에서 다루던 상품과 유사하였다는 것이다. 수출면에서 차와 비단은 대외 무역 추기 단계의 주요 상품이었고 수입면에서는 면직물이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다. 차 수출은 19세기 말에 생산되고 매매된 차의 총량 중 30~40%를 차지하였다. 다른 흥미로운 상품은 면화로 면사와 면직물 수입으로 1900년과 1910년 이전의 국내 수공업 생산이 감소되었다. 중국 농업에 대한 대외 무역의 영향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 대공황 이전 20년 동안 중국 농산물 수출과 중국 무역은 보다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가장 이익이 많은 상품이 콩과 유류 품목이었다. 1950년대 중국 정부는 대외무역에 변화를 보인다. 해외 수출에서 농업 부문에 압력을 가하고 중공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그러나 결국 정책 일부는 1960년대 초에 포기 되었다. 계획자체의 오류때문이었다. 중국의 소비자가 선택할 상품에 대하여 충분한 분석 없이 내린 결정으로 말리암아 농산물 자유 시장 폐지가 추진되었던 것소부르주아적 전개기(명말 이후)로 명대 선진 지역에서 상업적 농업의 발전은 이전의 자급적 경영과의 양립이 허용되지 않았다. 상품작물의 재배, 장기 노동자, 단기 노동자 등의 고용 노동의 중시, 금비 도입 등의 움직임이 주된 요인이었다. 그리고 상업적 농업의 경영은 그 자체의 생산력 수준에 의해 자급 자족적 경영을 능가하게 되었다. 한편 화북에서는 대농법에 의한 집약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상업적 농업의 침투에 의해 거대 경영은 해체되어 가고 부농화, 중농화 되면서 지주, 전호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청대 화북의 주요 동향이었다.다음의 논고는 전근대사 연구의 과제와 소경영 생산 양식이 진, 한, 수, 당시기에 어떠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중국 전근대사 연구의 출발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소경영 생산 양식이 중국 전근대사 연구에 대한 단서의 범주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중국 전근대 사회 전제를 완전히 표현하고 해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전근대 사회의 발전을 해명하기 위한 기초적 범주인 국가, 공동체, 소경영 생산 양식의 내적 관계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전근대 사회의 관계의 기초는 첫째,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서의 정치적 지배 예속관계와 둘째 사람과 자연 = 생산 수단과의 관계로서 본원적 결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전근대 사회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때 소경영 생산 수단의 관계로서의 본원적 결합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서의 정치적 지배 예속 관계가 어떻게 연관되었는가를 고찰하여야 한다. 위의 경영을 받아들인다면 노동의 주체인 농민은 객체의 토지와 직접적인 관련하에 그 생산물을 첫 번째로 취득한다. 그리고 생산 조건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공동 단체 - 사회의 재생산에 불가결한 사회적 필요 노동이었다. 이 노동은 사회적 성격으로 보아 그것을 향유하는 개별의 농민 경영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편성되는 결합 노동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제삼자로서 황제와 관료가 사회적 필요노동의 관리, 즉 사회적 공동사를 수행하였다. 이렇게 해서왕조약탈 및 천재 등에 의한 것이고 자발적인 경제법칙이 겸병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견해는 토지겸병은 농민을 자경농을 전호로 변모시켜 더욱 참혹한 착취를 당하게 하였고 이 때문에 생산의 효율성이 낮아졌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농민들이 오히려 지주에게 투탁한 것은 왜일까? 그 이유는 자경농은 역을 부담하지만 전농은 도리어 호강의 도움을 받아 역을 면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겸병의 주요한 결과가 소농경제의 파산이 아니며 또한 생산의 쇠퇴는 더욱 아니고 단지 봉건국가의 수입 감소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소농경제의 안정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봉건 사회의 생산은 소농 생산으로 소농 경제는 가장 중요한 경제 내용이며 이는 어느 봉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봉건사회에서의 소농 경제는 노예 생산에 비해 큰 진보가 있었다. 봉건 소농은 조세 납부의무만 이행하면 자유로이 생산품을 지배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재산권을 확고하게 소유하였기 때문에 생산에 적극적이고 자발적이었다. 그럼 봉건 사회가 소농경제를 쇠퇴, 파산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봉건주 계급의 착취로 여기에는 지조라고 표현되는 봉건주의 착취와 주로 부세, 부역이라 표현되는 봉건 국가의 착취가 포함된다. 둘째는 토지겸병으로 토지겸병은 단지 토지 소유건의 이전에 지나지 않으므로 농민을 파산시키지는 않았다. 셋째는 상품화폐의 영향으로 주로 상인의 중간 착취와 고리대 착취를 의미한다. 넷째는 천재와 인화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근, 질병, 전쟁등 이었다. 다섯째는 인구압력으로 농촌에서 소토지 소유자와 빈농이 출현했으며, 많은 식량의 공급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그 외에 봉건 사회에서 소농경제를 발전 혹은 재건하는데 도움을 준 것도 있다. 첫째는 생산력 증가, 둘째는 황무지 개간, 셋째는 봉건 국가는 점전, 균전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농민이 땅을 소유하고 경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안주시켰는데 이는 중국만의 제도였다. 넷째는 기의 농민이 지주를 공격하여 토지를 탈취하였다. 다섯째는 파산한 농민들 중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