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과목명 : 한국문화와 역사담당 교수님 : 서정석 교수님학 과 : 문화재 보존과학과학 번 : 199920003이 름 : 김상권제출 일자 : 2004. 5. 6- 들어가는 길에이 곳 공주에 오기 전까지 20여년을 이 곳 전라북도에서만 줄곧 살아왔지만 좁은 도시의 그늘에 가려 ‘징개맹개 외매비들’ 이라는 호남평야의 넉넉함을 자주 느껴보지는 못했었다. 이제 답사라는 핑계를 대고 길을 떠난다. 금요일까지는 봄 외투를 다시 꺼내 입어야 하는 쌀쌀한 날씨였는데 어제, 오늘은 여름 햇빛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청명한 날이다. 일이 있어 하루를 늦춘 것이 오히려 운으로 작용했다. 누나에게 차를 빌려 몰며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오르니 밑으로 보이는 골짜기들이 다른 어디선가도 본 풍경이다.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강원도 산골의 산하는 가파르고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던데, 이 곳의 대지는 이리도 낮고 조용한 모습이다. 도로는 다시 내리막으로 치달아 산 아래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들어서기 전에 「귀신사」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지금은 퇴락하여 대적광전과 몇 개의 요사채만 남아있는 조촐한 풍광이지만 한때 화엄십찰의 하나로 금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찰이었다.드디어 도착. 눈앞으로 모악산이 우뚝 서 있다. 부모님은 주말마다 바람 쐬러 가볍게 오르는 산일 만큼 가까운 곳이었지만 내게 이 산은 어릴 적 어머니 손 붙잡고 낯선 곳에 당황해 울먹이던 모습만 기억하게 할 뿐이었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모악산과 금산사라는 이름은 큰 산을 뜻하는 古語 ‘엄뫼’,‘큼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뫼’는 어머니의 뫼라는 뜻의 ‘母岳’으로, 또 ‘큼’은 金으로, ‘뫼’는 ‘山’으로 적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악이라는 산 이름은 전국적으로 많다. 조선 초기 천도 과정에서 한양과 모악이 양자택일되었던 역사적 사례, 시대를 더 올라가 東晋을 통하여 백제로 들어온 불교가 영광땅을 거쳤으며, 그 영광땅에도 모악이 있어 佛甲寺가 전해지고 있으니 이들 지명 내력을 우두상과 몸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곳에 있던 부분을 합해 놓았나? 발 앞의 제단이 이 일대 민간 신앙의 흔적을 보여준다.사당을 나왔다. 멀리 모악랜드에서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10여년 전 놀이공원을 건립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이 지방신문을 휘젓고 다니더니 결국 정부의 하수인들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무엇이 중요한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한치 앞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한심스럽다. 옆에 활짝 핀 벚꽃과는 대조적으로 아직도 무엇을 덜 지었는지 공사판의 먼지가 올라오고 있다.매표소를 지나니 왼쪽에 꽃밭 사이로 산책길이 나있다. 산책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속칭 견훤성문이라고 하는 석성문이 보인다. 문루나 문짝은 사라졌으나 홍예문 형태는 완벽하게 남아 있다. 견훤이 쌓았든지 아니면 왜구를 막기 위해 후대에 쌓았든지 간에 금산사의 자체 방어를 위해 쌓인 성의 문인 것만은 틀림없으니 이 성을 쌓을 당시의 금산사 사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드디어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 일주문을 지난다. 몇 년전 기억으로는 一中 金忠顯 선생의 母岳山 金山寺 라는 현판이 인상적이었는데, 왠일인지 아직 단청을 칠하지도 않은 거대한 일주문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예전의 일주문은 없어졌나 싶었는데,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니 아직 옛날 그 모습의 일주문이 있었다. 단청이 많이 벗겨져 앞선 일주문보다는 초라하긴 하지만 금산사의 옛 모습을 기억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옆으로 칡즙을 파는 용달차에서 틀어놓은 불경외는 소리와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대황하’가 묘하게 어우러져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여느 사찰과 다름없이 경내로 진입하기 전에 다리를 건넌다. 解脫橋. “해탈” 절을 찾는 방문객들에 던지는 화두일까, 아니면 이곳의 스님들이 스스로에게 바라는 마음일까.금강문과 사천왕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당간지주 한 기가 보인다. 곧장 앞으로 가 보제루 계단을 오르니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절도 자신을 품고 있는 땅 모양을 닮는 것일까. 산이 절을 굽어보고 절이 산 보제루 옆에는 약수가 흐르고 있는데 왠일인지 석불의 두상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훼손이 된 듯 박리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안의 화강암은 옛것이 아닌 듯 깨끗한 편이었다. 이제 보제루 계단을 올라간다.왼쪽에 大藏殿이 있다. 미륵전을 마주하고 서 있는 이 법당은 경전을 봉안하는 곳이다. 안에는 광배가 굉장히 화려하게 장식된 석가모니불과 제자인 아난, 가섭존자를 모셨고, 앞에는 석등 한 기가 있다. 이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을 중창할 당시 건립한 庭中木塔이었는데 중건하면서 일반 불전의 모습으로 변형되었던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신라시대 목탑의 모습은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 있는 복발과 보주로 더듬어 볼 수 있다.冥府殿은 중생들이 죽은 후에 六道輪廻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구제해 주는 명부의 구세주인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 좌우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있고, 그 옆으로도 시왕이 배치되어 있다. 명부전은 조선시대에 특히 유행하여 어느 절이나 거의 있었던 불전으로 사원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대적광전(大寂光殿)은 원래 비로자나부처가 봉안된 전각으로, 큰 블전에는 비로자나?석가?노사나의 삼신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은데, 금산사의 대적광전은 여기에 아미타와 약사여래를 더 봉안하여 모두 다섯 여래와 여섯 보살을 모신 국내에서는 유래가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정리를 해보자면, 아미타불ㆍ비로자나불ㆍ석가불ㆍ노사나불ㆍ약사불 여래와 대세지보살ㆍ관세음보살ㆍ보현보살ㆍ문수보살ㆍ월광보살ㆍ일광보살의 협시보살이 봉안된 것이다. 이것은 대웅전, 대광명전, 극락전, 약사전, 나한전 등 다섯 전각을 한 전각으로 통합시켜 놓은 특이한 통합 법당이다.예전의 대적광전은 정유재란 후 수문대사가 절을 복구할 때 지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지만 1987년 12월 화재로 사라져버렸다. 화재는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의 실측작업 과정 중에 발생했으나 실화인지 방화인지의 정확한 화인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여래와 보살을 합해 모두 11구이번이 처음이다. 금산사에 전해지는 『금산사지』에는 보주란 탑 꼭대기의 찰주를 露盤之柱라 부르는 데서 생겨난 말이며, 불전의 정면 두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幡竿을 가리킨다는 내용과 이것이 원래 미륵전 앞마당에 높여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롱이었으며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이것이 광명대의 역할을 하던 석등이었다면 그 위의 화사석이 없어진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아직은 정설이 없으므로 무어라 말할 수는 없다.대장전 앞에 서 있는 보물 제 828호인 팔각 석등은 거의 원형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난 겨울 전주박물관에 실습을 나갔었는데, 야외 전시장 한 켠에는 금산사 석등의 모사품이 있어 그 때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다. 부분적으로 결실된 부분이 있고, 시멘트 몰탈로 보수한 흔적을 볼 수 있지만 고려시대의 탑이 이렇게 말끔한 모습으로 내 눈 앞에 건재함을 보고 신기함을 넘어 경외감을 느끼게 해준다.미륵전 앞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 현재 높이 2.18m의 점판암제 육각다층탑이 서 있다. 금산사에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본래 고려 혜덕왕사가 금산사를 중창할 당시 원로대덕들의 주식처로 만들었던 봉천원의 庭中塔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인조 때 금산사를 복구하면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 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든 방형탑인데 비해 이 탑은 점판암으로 조성한 육각탑인 점이 특이하다. 암석의 특성상 다른 암석에 비해 화강암이 풍화에 잘 견디는 좋은 소재임에도 점판암 계열로 된 탑을 만든 이유는 뭘까? 개다가 이 지역엔 점판암을 채취할 만한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려시대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점판암 탑이나 육각, 팔각 등 다각탑들이 만들어졌다. 화강석으로 된 2개층의 기단부와 11개 층의 옥개석이 남아있는 탑신부의 규모로 옥신을 추측해 보면 탑의 크기는 적어도 방등계단 위에 있는 오층석탑 정도는 될 것 같다.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모셨던 대석을 말한다. 높이 1.67m, 둘레 10m가 넘는히 간직하고 있다.석종부도의 앞에는 오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계단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곳에는 석등 대신 석탑이 있다.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지만 하층 기단이 좁은 편이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 상층 기단, 갑석, 1층 탑신부는 모두 여러 개의 돌들을 짜맞춘 것이지만, 2층 이상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이루어졌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3단으로 줄고 얕아졌으며 처마가 길어지면서 중심에서부터 양끝을 향하여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고려탑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급한 편이나 모서리의 반전은 심하지 않다. 5층 지붕돌 위의 상륜부에는 일반 석탑에서처럼 노반이 있는데, 그 네 모서리에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그 위에는 갑석형의 판석이 하나 올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 탑을 육층탑으로 오인하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또 한 층의 탑신부가 아니고 특이한 형태의 복발일 뿐이다. 복발 위에는 보륜과 보주가 있다. 후백제 왕 견훤이 공양탑으로 건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석탑중수기」에 따르면 고려 성종 원년(982)에 처음 세웠고 조선 성종 23년(1492)에 도괴된 것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그런데 이상으로 서술한 석련대, 석종부도, 오층석탑의 제작연대와 위치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다.우선 석련대에 대해서는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상과 함께 신라시대에 조성했다는 앞의 의견과는 달리 고려초 10세기경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 근거로 상대석 안상이나 연판의 조각 수법과 각부의 양식이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는 점을 드는데 석련대의 시기를 놓고는 현재 후자의 의견에 일치를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그 다음으로 석련대의 현 위치를 미륵전이 있었던 원래의 자리로 보고 전각을 세웠을 경우를 가정했을 때 방등계단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방등계단을 후대에 세웠을 거라는 입장에 대해서이다.여기에서 앞서 서술한 내용으로는 석종부도가 고려 초기에, 오층석탑 또한 고려시대에 세워졌고 현재의 형태는 조선 성종 때 보수된 것이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