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4
검색어 입력폼
  • [철학] 헤겔의 시민사회와 법철학 평가A+최고예요
    헤겔의 시민사회와 법철학헤겔 법철학 이 법 에 관하여 논의한다고 할 때, 그 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법뿐만이 아니라 도덕, 인륜, 나아가 세계사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그에게 있어서 법 은 자유 이념의 자기실현 과정을 표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의 법철학 은 전인류적인 자유에 입각한 범(凡)세계사적 철학사상 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법철학 은 헤겔의 다른 모든 저작이 그러하듯 넓게든, 작게든 변증법적 원환(圓環)의 구조를 지니면서 그것을 형성하는 요소들은 변증법적 논리를 따라 발전한다. 이를테면 법철학 3부, 즉 추상법 , 도덕 , 인륜 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각 부분의 단계적 이행은 변증법적 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또한 그 각각이 구체적인 사회ㆍ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는 예컨대 인륜 을 구성하는 가족ㆍ시민사회ㆍ국가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인륜의 처음 단계인 가족은 분열되어 시민사회가 되었다가 국가라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통일되는 것이 인륜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개별성, 특수성, 보편성 사이의 분열과 통일의 과정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개별성과 보편성의 직접적인 통일이 가족이고, 이것이 부정된, 따라서 양자의 통일이 아니라 분열로서의 특수성이 시민시회이다. 그러나 이 시민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변증법에 의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다시 말해 시민사회 또한 부정되어 특수성과 보편성의 절대적 통일을 이룬 것이 국가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국가는 가족에 있어서의 보편과 개별의 즉자적 통일, 시민사회에서의 대자적 분열을 경과한 즉자ㆍ대자적 통일로서 서술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자유와 연관지어서도 그대로 적용해볼 수 있다.개별성과 특수성의 감성에 의한 직접적 통일이 가족이고, 오성 내지는 반성에 의한 이 통일의 분열이 시민사회다. 시민사회에서는 뭇 개인이 특수 대 특수 로서 대립하지만, 대립하면서도 관계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형식적 보 통해 외적으로 매개된 연관을 이루고 있는 전체가 시민사회로서의 국가 혹은 외적 국가이다.헤겔의 정치철학을 바르게 평가하기 위한 끝없는 논쟁, 즉 이 철학의 진보적 함의(含意)나 반동적 함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전제나 보수적 전제라는 문제들과 관련된 논쟁에서, 그 논쟁의 축은 헤겔의 시민사회이론에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시민사회 개념을 전개시키는 것이 객관정신의 사변적 체계화를 폭넓게 제시함으로써, 프로이센의 국가철학자, 정부당국의 하수인, 또는 국가형이상학자라는 소문이 경향적인 떠벌림에 불과하며, 오히려 헤겔은 근대적인 사회 ―개별자의 자유의 원리가 그 사회의 체제와 작동방식을 정당화하는 토대로 여겨지고 이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 형식에 대한 전형적인 이론가로 존경받고 전승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주된 책무를 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헤겔은 시민사회에 관한 논의의 첫머리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기서 그는 우선 시민사회의 두 가지 원리를 지적하고 있다.스스로가 특수적 목적으로서 존재하는 구체적인 인격(die konkrete Person)은 온갖 욕망의 전체를 간직할뿐더러 또한 자연 필연성과 자의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민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원리이다. ―그러나 또한 이 특수자로서의 인격은 본질적으로 또 다른 특수자에 의하여, 그리고 동시에 오직 단적으로 보편성의 형식이라고 하는 또 다른 원리(die Form der Allgemeinheit, das andere Prinzip)에 의하여 매개된 상태에서만 자기를 관철시키며 또 만족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헤겔은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요인은 자립적인 개인이고, 이 개인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은 여러 가지의 욕망이라고 본다. 개인의 목적은 오로지 자기 욕망의 충족에 있다. 이러한 연유로 시민사회는 특수성을 첫 번째 원리로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민사회에 보편성의 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타자와의 관계 망에 끼어 들지 않으면 자신의 욕망조차도 충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계기에 대하여 특유의 존재양식을 부여하는바 ―즉 특수성에 대해서는 모든 방면으로 자기를 전개시키며 마음껏 펼쳐나갈 수 있는 권리를, 그리고 보편성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특수성의 근거와 필연적 형식이며 또한 이 특수성과 그의 궁극 목적을 지배하는 힘이므로 입증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결국 이 특유한 존재 양식은 인륜성의 양극으로의 분열로 인하여 스스로가 상실된 체계로서 이것은 이념의 실재화를 위한 추상적 계기를 구성하는 바, 여기서 이 이념은 이상과 같은 외적 현상에 안겨진 상대적 총체성과 내적 필연성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특히 특수성은 모든 면에서 해방되어 자기 자신 여러 가지 욕망, 우연적 자의, 주관적 기호를 자유분방하게 만족시키려 한다. 그 결과 시민사회는 방탕한 향락과 비참한 빈곤의 광경을 드러내고 아울러 필연적 욕구나 우연적 욕구 어느 쪽에도 공통되는 자연적인 인륜적 퇴폐의 광경을 드러내고 만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시민사회를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인 빈곤의 문제는 뒤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다시 하는 말이지만 시민사회에서는 특수성의 원리는 인륜적 동일성을 이룰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두 원리의 통일은 자유가 아니라 필연성으로 존재하다. 다시 말하면 특수한 것이 스스로를 보편성의 형식에로 고양시키지 않을 수 없고, 이 보편성의 형식에서 자기 자신 존립을 찾아야만 한다는 필연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리하여 시민사회의 제3의 원리는 필연성이 된다. 헤겔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그러나 특수성의 원리는 그 자신이 스스로 총체성을 향해서 전개돼 나가는 가운데 어느덧 보편성으로 이행하며 또한 오직 이 보편성 속에서만 그의 진리와 함께 그 자신이 지향하는 적극적 현실성에의 권리를 지닌다. 물론 이러한 통일은 분열된 입장에서는 각기 두 권리의 자립성을 인하여 인륜적 통일성에 다다르지 못한 까닭에 그것은 자유가 아닌 필연성으로 존재함으로써 결국 특수적인 것은 보편성의 형식으로 고양되어 바로 이 형식 속에서 자기존립을 추구하고 또 지녀야만 하는 것이 포함된 자유라고 하는 보편적인 것을 현실화시키는 것, 이것은 사법(司法)에 의하여 소유를 보호하는 것이 된다.C. 이들 체계 속에 상존(尙存)하는 우연성에 대하여 미리 배려하는 가운데 경찰행정 및 직업단체를 통하여 특수적 이익을 곧 공동이익으로 하여 관리하는 것이다.시민사회는 세 가지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즉 a) 각자의 노동을 통해 각 개인의 욕구를 매개하고, 각 개인을 만족시키는 것으로서의 욕망의 체계, b) 욕망의 체계에 포함되어 있는 인격권이나 소유권과 같은 보편적인 것을 사법작용에 의하여 보호하는 것, 그리고 c) 위 두 체계 안에 잔존하는 우연성에 대하여 미리 배려하고 경찰행정(die Polizei) 및 직업단체(die Korporation)를 통하여 특수한 이익을 하나의 공동적 이익으로 배려하고 관리하는 것 등이다. 여기서 세 계기 는 시민사회의 세 가지 기능 내지는 역할을 표현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요컨대 시민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사법에 의하여 자유의 현실성인 소유를 보호하며, 경찰행정과 직업단체에 의하여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주요 기능 내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계기는 각각 욕망의 체계 , 사법 , 그리고 경찰행정 및 직업단체 라는 핵심어로 구분될 수 있을 터인데, 나머지 둘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욕망의 체계 와 관련된 헤겔의 설명 및 주장을 음미해 보도록 하자.먼저 욕망의 체계와 관련하여, 왜 욕망이 아니고, 욕망의 체계 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철학에서 하나의 체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출발점과 이것의 변증법적 전개를 위한 내적 모순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헤겔에 있어서 욕망은 단순히 욕망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체계, 즉 욕망의 체계를 성립시킨다고 말해진다. 이 욕망의 체계는 어떤 변증법적 전개를 보여주는지를 주목해보자. 욕망의 특수성과 욕망의 보편성이라는 계기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인용해보자.특수성은 우선 의지 일반의 보편적 요소에 반하여 규정된 것이므로 곧바로 이 타자의 욕망이나 노동에 의하여 만족은 상호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또 욕망이나 수단의 성질로 화하는 추상의 경우도 역시 여러 개인 사이의 교호적인 관계를 띠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서로가 인정된다고 하는 이 보편성이야말로 바로 그 개별화되고 추상화된 욕망과 그 만족의 수단방법으로 하여금 어느덧 구체적이며 따라서 또 사회적인 욕망이나 그 만족의 수단방법이 되게 하는 계기이다. 특수성으로서의 욕망은 우선 주관적 욕망 이다. 그러나 이 특수성은, 첫째로 한 사람의 욕망이 다른 사람의 욕망과 관계 맺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둘째로는 동물의 욕망과 그 충족 수단처럼 어느 정도 제한성을 지니면서도 또한 그의 욕망 및 수단의 다양화와 세분화를 통해 그 제한성을 넘어서게 된다는 점에서, 어느덧 보편성의 체계 속에 놓이게 된다. 헤겔에 의하면 이것은 나와 타인이 상품생산자로서 서로를 인정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 상호 인정의 보편성이야말로 그 개별화되고 추상화된 욕망과 그 만족의 수단방법으로 하여금 어느덧 구체적이며 따라서 또 사회적인 욕망이나 그 만족의 그 만족의 수단방법이 되게 하는 계기이다. 바로 이러한 욕망의 사회성 속에서 헤겔은 해방의 요소를 발견하다. 그러나 특수성이 욕망의 근저에 놓여 있는 이상 이러한 해방은 형식적이다. 또 욕망ㆍ수단 및 향유를 무한정하게 특수화하려는 경향은 끝내 사치와 상호의존과 경제적 궁핍을 초래하게 된다. 욕망은 한편으로는 그것의 다양화ㆍ추상화를 통해서 자유실현의 계기가 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의존과 궁핍을 낳음으로써 시민사회의 내적 모순의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다.헤겔은 위의 첫 번째 인용문에 덧붙여 아담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로 대표되는 근대의 국민경제학(Staats konomie)은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출발한다 고 말하면서 그것의 기초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간략히 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헤겔은 욕망을 시민사회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욕망의다.
    인문/어학| 2004.11.17| 6페이지| 1,000원| 조회(512)
    미리보기
  • [한국민속의 이해] 죽음이란 무엇인가? 평가A+최고예요
    죽음이란 무엇인가?어떤 사람이 죽음으로 그는 더 이상 사회에서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마치 어떤 물건이 고장나버려 활용가치가 없어서 그것에 대한 존재가치를 상실했을 때 (1)그 물건은 존재하기 때문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인가? (2)그 물건이 존재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물론 위물음은 지극히 유물론적인 질문이라 한계가 있지만 현상계에 보통사람들은 유물론적 사고에 갖혀있기 때문에 바로 어제 전화통화를 했던 어머니나 친구 마저도 죽으면 끝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결국 현사회에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라면 죽음을 (2)의 물음의 답으로써 단절로 본다는 것이다.형이상학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시각으로 단절과 다르게 인식한다. 크게 2가지로 나눠서 (1)죽은 다음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영혼회귀사상인 윤회를 믿는 부류와 (2)죽은 다음 또 다른 세계로 생을 유지하는 부류이다. 나는 크리스챤으로서 절대자와 유일신, 기독교신앙의 사상이 토대이기 때문에(물론 맹신하지 않는다. 최대한 합리적인 사고로 신앙에 가까이 다가서려 한다.) 교수님의 수업은 많은 반박의 여지가 있으나 나 역시 확립된 철학과 이론이 부족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논리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래서 최대한 보편적이고 사회성을 지닌 이론으로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을 적겠다.인간은 태어나서 부모를 보고자란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큰 모델은 부모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하려하고 그러므로 인간은 개연성을 갖추게 된다. 여기서 보편의 개념이 성립한다. 보편이라 함은 뒤에서 언급할 사회성과 연개가 있으므로 부모에게서 사회성을 배우는 것이다.인간의 죽음이란 물음에 신개념은 반드시 필요하다. 보편적으로 인간이 살면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외롭고 의지할 곳을 찾기 때문에 신이 생겼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원래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신을 의지하는 것 일수도 있다. 어째든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에는 신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 이후 해도 그것은 불완전하고 어떨 때는 인간보다 하등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신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당이 굿을 통해 접신을 한다는 것은 강신 한다는 것인데 강한 신은 부르기 힘들고 약한 신은 무당의 재량으로 부르고 보내기가 쉽게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의 재량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 존재인 신보단 귀신이나 영혼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맞다.교수님의 신개념은 원시시대때 신중심의 사고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이란 결국 혼자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의지하려하고 그래서 만물에 신이란 개념을 부여하여 떠받들고 의지하려는 성향 때문에 그토록 많은 다신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란 본래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신개념은 결국 상당히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어째든 사회학적으로 신존재는 변화하게 된다. 현사회에서는 신은 숨은신의 개념이 된다. 원시시대때에 삶과 죽음이 현상계에 공존해서 신도 현상계에 존재했으나 이제는 니체의 말대로 신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현상계에 관여하지도 않고 삶과 죽음도 이분법적으로 나뉜 것이다.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사고는 결국 삶에 속해있는 이상 죽음보단 삶에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유물론적인 사고에 빠지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배운 예전에는 신 때문에 인생을 받치고, 왕 때문에 인생을 받치고, 이제는 유물론적 사고로 인해 돈 때문에 인생을 받치는 것이다.동종주술과 전파주술에 대해서도 배웠다. 동종주술에는 공감하는 바이지만 전파주술은 반박에 여지가 있다. 먼저 동종주술은 내가 어떤 것을 바랄 때 이루어 진다는 것인데 꼭 유일신에게 빌지 않아도 악마도 사람을 고치는 능력은 갖고 있다. 그래서 현사회에 수많은 사이비 귀신종교가 있지만 그런 맥락에서 동종주술은 존재한다. 그러나 전파주술은 아무래도 심리적인 작용 아닐까? 내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바라면 무의식중에 발휘되는 잠재적 능력이나, 오비이락 의 개념처럼 말이다. 아니면 내가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신이 들에서 말한 신개념과 동일하지 않으므로 잡령이나 귀신등이 되는 것이다. 또한 수업시간에 배운 수직적 관계가 아닌 인간과 수평적 관계의 신도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과 수평적이라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신개념을 벗어나기 때문이다.태양신을 최고의 가치를 얻었다는 것도 사회학적인 신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태양이 있어야 만물이 탄생할 수 있고 생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태양이라는 행성에 신이라는 개념을 부여하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무리가 있다.인간의 죽음에는 생물학적 죽음과 사회학적 죽음이 있는데 생물학적 죽음이란 누구나 알고있어서 언급하지 않겠고, 사회학적 죽음이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생이라는 새로운 생을 얻은 것이고 고등학생으로써 나는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업시간을 통해 원시시대인간들은 이런 사회학적 죽음을 생물학적 죽음과 동일시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회학적죽음을 당하더라도 새로운 위치로써 탄생함으로 또 다른 사회학적 생을 얻지만 생물학적 죽음은 단 한번뿐이다. 이 두 가지 죽음의 견해를 동일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일인데도 그들은 그렇게 형이상학적 죽음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영혼회귀라 하여 윤회를 믿게된다. 그들이 사회학적 죽음과 생물학적 죽음을 동일시 한 것에 대한 모순을 간과하면서 형이상학적 견해를 펼침으로써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을 생각하는데 결국 모순을 바로 잡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이어진 윤회라는 이론 또한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우리가 신을 접촉하거나 신의 물건을 접했을 때 우리가 신과 동질적 위치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너무나 간단한 반박으로 이것을 부정할 수 있다. 내가 교수가 되고 싶다고 박태성교수님을 만졌을 때 내가 교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동등과 동질의 개념에 호모 함에 빠져서 오해를 할 수 있다 생각하여 다르게 생각한바가 있다. 내가 교수님을 만짐으로 나와 교수님은 연결되고 동화되는 개념으로 서로 비슷해진다면 신과 내가 동질한 위치가 되다는 것이 성 접신과 강신의 정화라는 개념과 다른 견해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정화를 통해 새로운 내가 되는 것, 사회학적으로는 입사식과 세례식처럼 새로운 내가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정화 역시도 사회학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집을 불태워서 새로운 시작하는 것처럼 예전의 것은 죽지만 정화를 통해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의 생물학적 탄생과 죽음에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지금껏 설명을 하다보면 무엇인가 빙빙 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사물의 비교가 합리적이지 못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 역시도 기독교적인 사고지만 어떤 철학자도 인간을 사물에 예를 든다는 것은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 세상 만물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인간을 위한 유일신의 선물이라 할까? 하여튼 더 이상은 종교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다. 위에서 말한 면에서 본다면 땅을 여자로 비교하고 하늘을 남자로 비교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다. 단지 땅이 곡식을 생산하듯이 여자가 아이를 생산한다. 는 것처럼 비슷한 현상을 가지고 있다하여 정의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역시 바다에 남근석을 배치함으로 풍부한 해산물을 기원하는 것도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다.신화에서 주인공들은 형이상학적인 탄생과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현실에 있었던 일을 신비주의로 이끌어 더욱더 큰 믿음을 갖게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아는자-알 처럼 박혁거세가 알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언어의 오류로 인해 아는자 를 알 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단군의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도 고조선의 건국하고 멸망할 때까지의 기간을 단군의 나이로 대치한 사회적인 생의 기념이 내포되어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것은 사회적으로만 인정하지 합리적이지 못한 삶과 죽음의 개념이다.자연의 순환법칙과 시간의 순환에 대해서도 배웠다. 자연의 4계절로 삶과 죽음을 순환하고 시간도 계속하여 해가 뜨고 달이 뜨므로 삶과 죽음을 순환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앞에 말한 것처럼 인을 통해 생성되던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 생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생성할 수 없으며,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생성이 아니라 그대로 있는 것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 생성하지 않는다.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을 통해 소멸되든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 소멸되어야 한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작용을 할 수 없으므로 소멸을 가져올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은 비록 작용을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존재로 남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단지 존재할 뿐이지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존재할 뿐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그는 이처럼 변증법을 통해 ‘존재는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는다’는 명제를 세웠다. 그래서 어제 교수님이 종이를 찢어서 죽었고, 불태워 죽였고, 밟아 죽였고, 바람에 날려죽은 종이는 단지 형태만 변했을 뿐이지 소멸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멸=죽음이라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처음에 말한 죽음=단절을 한번 더 반박한 말이기도 하다. 단지 찢어진 종이는 그대로 종이의 형태를 찢어진 모양대로 변한 것이고 불탄 종이는 공기중의 이산화탄소(CO2)와 재의 탄소(C)로 형태가 변했을 뿐 존재하고 있다. 발로 밟고 비바람에 흩날려서 땅속에 바다속에 공기속에 속한다 하더라도 형태와 성질이 변한 것이지 결코 소멸하거나 생성하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논리라 사회학적 견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좀 더 과학적인 논리를 인간에 비유하여보자. 인간은 생물학적죽음을 통해 죽음이라 일컫어 지지만 그 육체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고, 땅에 묻어서 썩던 녹아지던 그것은 여전히 이 현상계에 존재한다. 그래서 소멸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 시체는 사회학적으로는 존재의 가치가 없어서 죽음을 당한 것이고 존재의 것이다.
    인문/어학| 2004.11.17| 5페이지| 1,000원| 조회(239)
    미리보기
  • [철학] 소피스트와 정치가
    소피스트와 정치가-목차-서문1. 소피스트 용어의 정리2. 현재 한국정치의 모습중문3. 소피스트와 정치의 관련성4. 소피스트와 정치의 다른 점결론서문소피스트와 정치가에 대해 생각해볼 때 같은 부류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성격을 지닌 것 같기도 하다. 소피스트라 하면 고대이후로 사라진 그룹이나 정치가는 고대부터 현존해왔다. 그러나 명칭만 다를 뿐이지 지금도 소피스트의 성격을 지닌 직업이나 그룹들이 있고, 그때의 정치의 성격과 다른 현재에 정치가 있으니 우리는 여기서 소피스트와 정치에 대한 각각의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1. 소피스트 용어의 정리소피스트에 사전적 정의를 내리자면 ‘BC 5세기 중반에서 BC 4세기에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궤변론적 지식인들’ 인데 각각의 소피스트는 지방출신이나 아테네로 모인 것은 아테네의 지적, 예술적 중심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어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소피스트는 위험한 직업이며 외견상의· 그러나 실제는 아닌 지혜를 말하는 자, 학설사적 설명이 거의 없어 사상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소피스트라는 것을 숨기는 것이 현명하다.’ 라 말했다.19세기 이전 재검토된 소피스트는 협잡꾼, 대중들의 섣부른 믿음으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위해 막대한부를 챙기고, 덕을 가르친다고 자칭하며 실은 거짓된 담화술로 부도덕한 실용적 학문을 가르치고,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에서 수사학의 공허함을 드러냈고, 궤변을 말해서 진지한 사상가가 아니고, 철학사에서 어떤 속함도 없고, 부도덕함 이였다.그러나 헤겔의 ‘철학사 강의’를 보면 소피스트는 정립·반정립·종합의 변증법은 부정에 의해 진행되는데 여기서 부정은 보편적 사유운동에 필수적이고 주관주의로 통하기 때문에 철학사에서 필수적인 지위로 회복했다.소피스트의 성격은 가르침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와 덕에 관한 교훈을 판것에 대해 지적했고, 이러한 것은 돈이 아닌 우정과 감사로 보답하는 것 이라했다. 그리고 논변에 있어서 길게 말하려한다. 대를 대상으로 한건 아니다. 대중의 교육에 기여하지 않으나 정치와 공적인 일에서 널리 출세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하다. 14세 이상의 연령대를 위한 정예교육을 했고, 주로 설득력있게 말하는 기술의 훈련을 했다. 그러므로 출세지향적이다.2. 현재 한국정치의 모습<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관찰자·연구자의 경험이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유동적이고 가변적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옳은 정책이 나빠질 수도 있고 나쁜 정책이 옳은 것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정치의 정의를 내리기보단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하고 이해가 쉬운 현대정치에 대해 다루고자한다.그전에 정치의 본질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정치는 현재 상태의 부족한 점을 개선하고,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즉 미래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그릇된 정치라 하여도 이 사회에서는 없어서 안 될 필요악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정책에 있어서 중요한점은 현재에 더 나은 삶을 위한 방적법제시가 필요하다.현대정치는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은 민족주의·민주주의 및 경제적 발전을 이념적인 목표로 추구함으로써 근대적 시민사회를 지향하였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권력의 구조화과정에서 친일파세력을 제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식민지시대의 사회적 성격을 근원적으로 변혁시키지 않았고, 미국의 영향을 차단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행정체제는 권위주의적이었는데, 6·25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심화시켰다. 4·19혁명에 의해 수립된 제 2 공화국은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하였음에도 민주당 신구파분열에서 비롯된 정치적 혼란과 국민의 무절제한 민주화요구는 5·16에 의한 민주주의의 파국을 재촉하였다. 군부세력을 기반으로 한 공화당정권은 경제적 성과를 이루었으나 경제발전을 내세운 독재로 수차례 야당과 국민의 저항을 겪었다. 특히 유신체제는 장기집권을 확고히 하기 은 <서울의 봄>을 맞아 새로운 민주정치질서 수립을 모색하였으나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은 79년 12·12군사반란, 80년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같은 해 5·18광주민주화항쟁의 진압의 수순을 거쳐 제 5 공화국을 세움으로써 다시 권위주의 통치체제로 돌아갔다. 이후 87년 6월민주항쟁 성과로 얻어진 6·29선언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제 6 공화국이 성립되고, 93년 김영삼정부가 출범함으로써 그간의 군부통치가 없어지고 문민정치시대가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공직자재산공개·금융실명제·군비리척결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민주정치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정부의 정치력부족과 개혁의 좌절, 독선은 문민정치의 의의를 퇴색시켰다. 게다가 군사정권 이래로 계속되어온 정경유착은 마침내 97년말 경제파탄을 불러왔으며, 이는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라는 큰 사건을 만들어냈다. 김대중정부 또한 출범 초기부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개혁을 다그쳤으나 여전히 개혁을 거부하는 보수집단의 반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개혁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 정부>,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참여 정부>를 표방하면서 한층 민주적으로 발전한 절차와 방식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근대나 조선, 고려등 역사에서 이토록 혼란스럽고 많은 체제가 바뀐 적은 없다. 지난 50년이란 시간은 경제논리에서 인력의 전문성을 키워 지배층을 위한 피지배층의 초등교육 의무화라 할지라도, 대다수가 초등교육을 받고 고등교육까지 이수한 교육수준이라면, 지난역사에서 배움의 길이 전혀 없는 피지배층에 비해 현재 다수의 민중들의 의식이 깨이고 실천에 있어서 적극성을 띤다. 또한 지난 시간 한국의 정치에 영향을 끼친 민중들은 학생이고 그중 대학생들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에 필자는 정치에 교육, 즉 앎과 지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자한다.윗글을 통해 정치가는 무엇인가를 알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현대정치에 관해 적은 글을 이해하면 현재 한국의 정치가 성향을 알 수 있다. 거의 없다. 앞에서도 강조한 교육이라는 부분에 있어 월등이 앞선 이들이 조선시대에는 양반으로서, 일제침략기에는 친일활동으로서, 현대에는 정치가로서 형태만 바꿨을 뿐이지 본질과 성향은 그대로이다. 그들의 본질은 지배층이고, 성향은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보수라는 것이 불합리하고 그릇된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그것이 정치라 더욱 그렇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명제 ‘만물은 끊임없이 흐른다.’는 그 명제자체로 알 수 있듯이 모든 사물은 유동적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 또한 가변적이고, 정치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유동성과 가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에 보수라는 것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보수적인 지배층들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피흘림과 노력이 있었어야 했다. 다시 한번 보수에 대해 분석하자면 변하지 않고 예전 그대로를 유지하려는 성향인데 이것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현대정치에 있어서 역기능이라 함은 권위주의, 독재, 유신체제등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예전 그대로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개입한다는 것인데, 즉 보수를 위한 강제성을 띤다는 것이다. 필자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폭력은 정당화 될 수없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철학적으로 봐도 폭력은 불합리적이다. 하지만 정치나 사회에서 폭력 또는 강제성이 필요악임을 알 수 있는 것이 군과 법이다. 그렇기에 이 사회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법과 강제성이 필요함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역기능의 억지스러움을 지닌 정책이나 불합리성을 지닌 정책이라면 언제든지 깨뜨려 질 수 있고 변화되야한다. 하지만 이글을 통해 보수가 잘못된 것이고 진보가 옳은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판이다. 보수에도 순기능이 있고 진보에도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책에 있어서 올바른 방향은 보수와 진보의 조화이다.이로써 현대정치가의 성향을 2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데 보수성과 그 보수성을 유지하기위한 강제성이자는 이 글을 준비하기 전부터 소피스트와 정치가의 관련성에 회의를 느꼈다. 소피스트라 함은 이미 사라진 변론술이 뛰어난 학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학문적, 철학적 맥락이고, 정치가라 함은 근·현대에 나타난 사회적, 정치적으로 소위 고위층을 지칭하는 말이기에 연관성을 맺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뚜렷한 공통점이 보이기도 한다. 소피스트와 정치가의 관련성과 다른점에 대해 알아보자.3. 소피스트와 정치의 관련성소피스트와 정치가는 이익에 있어서 그 어떤 가치보다 앞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소피스트는 돈을 받고 지혜와 덕을 팔기위해 존재했고, 정치가의 본질도 이 사회가 좋음을 얻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소피스트는 개인을 위해 정치가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한국의 현대정치가들은 탈세, 군비리등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다수가 피해를 보더라도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모습이 보여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소피스트와 현대정치가의 모습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다.그리고 이기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소피스트는 대중의 교육에 기여하기 보단 이익을 위해서만 활동을 했고,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도 궤변이나 변증법·변론술로서 해결하려 했다. 현대정치가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정치가의 본질을 벗어나서 개인을 위해 사회의 법과 질서를 깨뜨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또한 보수적인모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들게했던 사건이나 노무현대통령의 탄핵에 숨겨진 배경을 곰곰이 유추해보면 현체제와 소위 권력층, 지배층의 자리를 유지하기위한 소피스트와 현대정치가의 보수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비록 그것이 어긋난 방향과 잘못된 성향을 지니고 있더라도 소피스트는 민중을 현혹시킬만한 궤변과 변증법으로, 현대정치가들은 노무현대통령의 비리를 전에는 밝히지 않다가 그들이 필요할 때, 탄핵할 시점에 이르러서야 밝혀내어 국회에서 다수의 표결로 노무현대통령을 탄핵시켰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언어폭력을 행사하였으며 이 있다.
    인문/어학| 2004.11.17| 6페이지| 1,000원| 조회(429)
    미리보기
  • [중세철학] 스콜라철학의 기본 개념(본질)
    본질n.1스콜라 철학은 플라톤의 우시아(본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실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는 다양한것과 대립되는 개별적 존재자로 실체를 지칭하고 반대로 플라톤은 이데아뿐만아니라 인간의 우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그런 속성까지도 우시아라 부른다.n.2토마스 아퀴나스는 본질과 존재자를 항상 구분 한다. 토마스는 어떤 특정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이기는 하지만, 본질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본질은 그냥 실체로 표현된 수 없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에센씨아를 본질성 이라고 번역했으며, 후대인들은 그냥 본질 을 선호하게 된다.n.3본질과 대립되는 각각의 것에 따라 주된 의미가 구분된다. 첫째로, 본질은 존재내지는 현존재와 대립되는 것이다. 둘째로 본질은 하나의 종이나 유의 필연적 존재 내용을 이루는 성분을 의미한다.n.4현존재 내지는 존재와 대립되는 본질은 종종 존재내용 이라는 단어로 지칭되어 왔다. 그래서 본질은 본질과 존재 내지는 본질과 현존재에 대한 실재적 또는 사유적 구분에 대한 오래된 질문 속에서 이해되었다. 본질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제 본질은 그냥 모든 존제내용이 아니라, 존재의 제한과 한정을 진술하는 한에서의 존재내용 그 이상일 뿐이다.n.5어떤 종이나 유가 되기 위한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본질은 곧장 (논리적) 우유 , 우유적인 것 , 비본질적인 것, 이 존재자에 우연적인것과 대립관계에 있다. 본질은 필연적이다 라고 말했을 때 , 이 말은 그 본질이 필연적으로 실존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특정의 종이나 유익 존재자로 유효해야 한다면 거기에 필연적이라는 상대적 의미를 뜻한다.n.6토마스에 의하면 본질이란 다양한 존재자들을 다양한 종과 유로 질서짓는 것으로서 모든 본성에 공통적인 어떤 것 을 지칭한다. 이는 동시에 한 존재자가 무엇이라는 것을 말하는 정의를 통해 지칭되는 바로 그것이므로, 결국 본질 이란 단어 대신에 통성원리 란 단어가 사용된다 . 본질은 형상이라고도 불리지만, 이는 본질 부분으로서의 형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본질 전체의 형상이라는 의미이다. 결과적으로 본질은 그 중에 고유한 작용의 원리인만큼 본성이라고도 불린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토마스는 그 종의 모든 개별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본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n.7형이상학적 본질과 물리적 본질의 구분은 신스콜라 철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두되는 것 같다. 본질개념의 정의에 확정되어 있는 바와같이, 본질의 제일개념은 하나의 종을 다른 모든 종으로부터 구분하기 위한 필연적이고 충분한 특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제 개념적으로 이렇게 제한된 본질도 현실적으로는 다른 특성들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특성에 대해서 이미 정의의 특성 속에 비록 내연적 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함께 생각된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특성들 없이는 그 정의도 실현될 수 없다. 이들 특성은 해당 종에 고유한 것이라 불린다. 사람들은 이들 특성을 제일의 본질개념으로부터 초래되는 것이라고 말한다.n.8그러나 형이상학적 본질 과 물리적 본질 이란 표현에 대하여, 특히 인간 이란 본질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본질, 인간 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본질은 그래도 그냥 단순하게 새로운 개별적 형태들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이 새로운 형태들은 다름아닌 형이상학적 본질 을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지속적이고 다양한 공통적 양상에 잇어서 물리적이다.n.9이런 것이 단순한 순수이론적 사변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연법 이나 자연권 이라는 개념만을 가정해 보자. 단지 사물의 본성 내지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본질적 필연성에 따라 당연하게 야기되는 것이야말로 자연법 내지는 자연권으로서의 효력을 가진다. 그러나 자연권이 불변적이라는 것은 단지 그 본성이 불변적인 한에서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다운 본성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4.06.13| 2페이지| 1,000원| 조회(343)
    미리보기
  • [중세철학] 스콜라철학의 기본 개념(보편) 평가C아쉬워요
    보편n.1보편적이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여러 가지의 주체들이 하나의 같은 술어로 쓰는 것, 예를 들면 베드로는 인간이다, 바울로는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것이란 이런 언어적 기능에서 야기되는 것인가. 단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유개념과 종개념이 나타내는 것은 어떤 실재적인 것인가 아니면 오직 우리의 사유 속에서만 생겨나는 것인가? 물체적인가 빗물체적인가? 분리되어 있는가 감각적 사물속에 연관되어 잇는가? 정리하면 (1)보편적이라 불리는 그것은 단어일 뿐이고,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2)보편적인 것은 명칭을 넘어서는 사고적 내용,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3)보편적인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재적으로 존재한다.n.2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정의를 통해 보편적인 것을 규정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 그는 보편적인 것을 무엇보다도 의로움 등과 같은 윤리적 행위와 연관시킨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 정의란 감성적으로 주어진 것을 특정 지을 수있는 것이 아니였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감성적 사물은,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스스로 끊임없이 변천하는 것이기에 어떤 정의가 불가능했다. 결국 정의란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 던져져 잇지 않은, 다른 어떤 종류의 실재성, 즉 이데아에 상승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n.3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론을 거부한다. 본질은 그 자신이 본질로서 근거지어야 할 바로 그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라는 말을 이데아를 편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과 동일한 단어 에이도스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치만 형상과 질료가 하나로 결합되게끔 하는 것 근원적 본질로 표기하고 있다. 오직 형상만이 제2실체 이다. 보편적인 것은 그때그때 질료를 받아들임으로써 제각기 개별화되고 다양화되는 것이다. 이는 물론 형상과 질료가 합쳐져서 본질을 결정한다고 하는 그의 다른 문헌들과 상충된다.n.4보편적인 것이란 사물인가. 아니면 말뿐인가? 빌헬름은 보편적으로 파악되는 인간본성은 하나의 사물이며, 이는 모든 개별적 인간에게 유일하고 동일한 것으로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반대로 로셀리누스는 보편적인 것을 오직 단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적인 것은 소리일 뿐 아니라, 말, 즉 단어이기도 하다. 여기서 단어는 바로 이 단어와 결합되어 잇는 보편개념을 통하여 그 개념에 의해 서술되는 사물 전체의 속하는 실재적인 어떤 것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실재적인 것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의 위상이다.n.5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벨라르두스의 위상이란 개념 대신에 본성 또는 통성원리라는 더욱 적절한 표현을 고정시켰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욱 분명하게 어떤 사물의 본질적 부분으로서 형상과 총체적 본질로서의 형상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총체적 본질로서의 인간성이라는 형상은 개별적 인간을 언급하는 보편성이 아니다. 토마스는 또한 특정 개별성을 배제하는 종이나 유로서의 보편성과 특정 개별성으로부터 추상될 뿐인 보편성을 구분했다. 이 구분은 그때까지 이루어진 어떤 구분보다도 명백했다. 후대에 이르러 종이나 유로서의 보편성은 반성적 보편성, 개별성으로부터 추상된 보편성은 직접적 보편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반성적 보편성이란 수많은 것에 대해 합당하게 언명될 수 있는 바의 통성원리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안에만 존재하는 이성적 존재자 일 뿐이다. 오직 직접적 보편성만이 실재하는 개별적 사물에 대해 언명되며, 또한 실재적이다.
    인문/어학| 2004.06.13| 2페이지| 1,000원| 조회(290)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2
12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3
  • A좋아요
    2
  • B괜찮아요
    4
  • C아쉬워요
    2
  • D별로예요
    1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02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6:26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