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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종교문화] 일본인들의 종교관 평가A좋아요
    일 본 인 들 의 종 교 관(일본사회와 문화 PAPER)소속 : 영어영문학과학번 : 20002498과목명 : 일본사회와 문화제출일자 : 2004. 6. 1제출자 : 정민혁우리는 종종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그렇게관심을 갖는 이유는 종교를 통해서 상대방의 가치관 또는 인생관, 세계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상대방의 종교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실례가 되는 경우도 종종생기게 되기 때문이다.역시 어떤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하위문화로서의 종교문화는 대단히 핵심적이며 중요하다.때문에 우리가 일본사회·문화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려고 할 때 종교문화에 대한 이해는 거의기본적이며 선행적인 작업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일본에서의 종교는 좀 특이한 점이 있다. 신도와 불교 신자가 대부분이긴 하나 국교라고할만한 종교가 마땅치 않을뿐더러 불교, 신도, 기독교 등이 교묘히 공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행사는 불교와 깊이 관계되어 있으면서도 설날에는 신사를 참배하고 결혼은 교회나 성당에서 올린다.또한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각 가정에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나눈다. 이 보고서에서는 이처럼 생활의중요한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를 통해 이러한 일본만의 특징의 원인과 일본인들의 국민성에대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일본은 예로부터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온화한 기후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나라를 신의나라로 믿게 하였다. 수많은 카미(神, 성스럽고 초인간적인 존재)들이 가득 사방에 가득 차 있다는믿음이었다. 또한 씨족은 사회, 경제, 정치적인 단위였으며 우지 카미(氏神)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연대성의 단위기도 하였다. 이런 기본믿음을 바탕으로 일본 고유종교로서 신토(神道)가 나타났다.신도는 일본고유의 자연종교이며, 신도의 신을 제사 지내며, 모시고 있는 곳이 신사이다. 신토는자연에 대한 숭배 심이 종교로 발전한 것으로, 애니미즘의 일종이다. 신도는 초기에는 창시자도 교리도없었으를 읽어 준다. 도리이(신사 입구에세운 기둥 문)는 신사의 상징이며 도시에서는 신사가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이지만, 빌딩 옥상과 같은뜻밖의 장소에 도리이가 서 있는 경우도 있다.신도에서 말하고 있는 신은 대단히 많아서 각 신사마다 모시고 있는 신이 다르다. 처음에는 자연물이나자연현상을 신이라 하였다가 차츰 조상을 모시는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신도에는 특정한 교조나 교전이없다. 일본 신화에는 팔백만의 신(야호요로즈노가미 : 수많은 신)이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신들의 수는극히 많다. 그러나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신화부분에서는 천황의 황조신 천조대신의 태양신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불교, 유교의 영향을 받아 이론화 되어왔다. 신 가운데는 현실의 인물도 많다. 예를 들면역대 천황, 도요도미 히데요시, 이도오히로부미 등을 들 수 있다. 신도는 19세기이후부터 국교와 같이대우를 받아 천황과 같이 [현인신]으로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가와 관계를끊고 각 지역마다의 신사신앙으로 되었다.일본의 종교는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우세한 불교로서 1994년 말 현재 그 신도수가 9,000만 명에 이르고있다. 기독교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어서 1994년 현재 신도수가 150만 명 정도다. 그 밖의 종교로는회교도가 있는데 외국인 교인으로 일시 일본 거류 자를 포함하여 신도 수는 10만 명에 이른다.일본의 불교는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비롯되어 6세기에 중국과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7세기 초 천황대신에 정치를 행하고 있던 황태자 쇼오또꾸태자 태자가 불교에 심취하여 그것을 널리펴게 하였다.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의 승려 혜자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보호하였고, 그 뒤 백제로부터 기술자를 불러 호류지 등 많은 사찰이 일본 각지에 세워졌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일부 엘리트를위한 종교에서 민중의 종교로 바뀌었는데 호넨, 신란, 도겐, 니치렌 등의 승려들이 민중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도를 설파했기 때문이었다.12세기경까지 불교는 귀족중심의 종교였다. 그러나 13세기부터 일적역할가지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일본인의 거의 모두가 어느 절이거나 단까로 되어 있어 죽으면 불교의식의 장례식을 하는 것이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막부의 보호를 받아 크게 융성했으나, 지금은 선조 공양을 주로 하는 장례식불교의 성격이 강하다. 불교는 신토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여 독특한 일본만의 신불 신앙을탄생시켰다. 현재 일본의 가정에는 신단과 불단이 함께 있는 경우도 흔하다. 이와 같이 일본의 종교는기존의 신토신앙을 중심으로 불교전래후 두 종교가 같이 전파되었으며 현재도 일본인들의 생활의기본이 되고 있다.일본이 처음으로 크리스트교가 전래된 것은 1549년에 카톨릭교회의 Jeus회사 프랑시스 자비에르가가고시마에 도래한 때이다. 처음에 지배층 중에는 서양의 문물에 관심이 있어 카톨릭포교에 호의적인자도 있었다. 17세기 초 최 성기에는 신자수가 75만 명이나 되었다. 그 수는 현재 일본전체 그리스도교파의 신자 수와 같은 수이니 당시의 인구가 현재의 1/6 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수는 얼마나 많았는지짐작할 수 있다.그러나 주종관계를 철저히 유지하기 위해 도쿠가와 막부는 1612년 금지령을 내리는데 이르렀다.16세기 말 15만의 신도를 자랑했던 카톨릭에 대해 처음엔 온건한 태도를 취했는데 이는 당시 선교사들의 모국인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과의 무역에 정부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사건들이 발생한 후 막부는 선교사업이 유럽 식민제국의 첨병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신자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 대해서까지 혹독한 조치를 취했으며 탄압을 가했다. 신자는 박해를 받고1613년에는 외국인선교사가 국외로 추방당했다. 이후 모든 교류까지 단절해 버리는 등 극단적인쇄국정책을 택했다. 이후 신앙의 자유는 메이지 이후 겨우 인정되었다.일본에 있어서의 근대화의 거의 구미문화를 의미하는데 구미문화의 중심을 이룬 그리스도교적 사고 생활방식의 일부 도덕 등도 일본에 전래되었다. 현재의 일부일처제도 그 한 예이다.현재 크리스트교가 차지하는 비율은체제 문제 - 천황 중심제, 국가주의 정신.4. 세속주의 문제 - 얽매이는 것을 원치 않음, 자기중심주의, 개인의 유익이 없으면 쉽게 종교도 포기.5. 교회가 적은 것 - 믿고 싶어도 교회가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경우6. 교육제도의 문제 - 교육우상, 주일등교, 교과서문제, 히노마루 경례, 천황만세 .7. 집단사고형 - 개인종교보다 가족종교, 원칙주의보다는 인간관계 우선, 시대에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8. 무사도 정신 - 회개 반성보다는 책임감 강조.9. 끈질기게 전도 못한 교회의 책임 - 계속 전도하면 싫어하기에 일찍 포기하는 경우.10. 다신론, 다종교 사상 - 800만의 신, 어느 특정 종교에 얽매이는 것을 원치 않음.11. 안정된 사회 - 직업의 안정, 노후문제의 안정, 간절하게 신의 도움을 청하지 않음.일본에는 불교, 일본신도, 크리스트교에도 수많은 종교가 현재 활동하고 있다. 그 가운데 100만명이상의 신도를 가진 신흥종교의 활동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신 종교'라는 용어는 다소 어색하고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신종교란 상당히보편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용어이며 이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과 같은 역 사종교와 비교해서 쓰여지는 말이다. 신 종교는 근대 이전의 역사종교와 민속종교로부터 많은 부분을 계승하였다. 하지만가장 큰 차이점은 내세구원이 아닌 현세구원을 주장하는 것이다. 신흥종교의 신자는 신자로서의의식이 높고 종교를 자기생활화하고 신자 모두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또 요즘은 만 명도 되지 않는 미니종교가 많이 생겨 성행하고 있다. 얼마전의 옴진리교의 사건은커다란 사회문제를 야기 시켰다. 오옴진리교는 특유의 폐쇄성과 극단적인 행동으로 국민과 정부로부터지탄을 받고 있다.이상의 이유에서도 일본인 특유의 종교관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이를 국민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첫째, 일본인들은 독자성을 중시하고 외부의 것을 거부하는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1984년 하와이 출신 고니시끼(씨름선수)씨가 천하장사 추천에 있어서 일본인이 영향권의 틀 안에서 안주하려한다. 일본인은고립을 싫어한다. 이것은 집단주의로도 볼 수 있으며 예를 들면 빨간 신호에서도 모두가 건너 간다면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전에 언급된바 있는 무라하치부(村八部)와 같이 반대의견이 있어도 8할의다수 의견에 따라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본심이 아니지만 전 체에 맞추는 경우가 많다. 신사의종교행사에 참가하지 아니하면 和를 깨뜨리는 것이 라고 인식하고 있다.일본인의 종교관의 특징으로서 관찰하고 싶은 것은 집안의 종교가 중심이고 개인구제(個人救濟)를중심으로 하는 개인의 종교의식은 대단히 약하다는 점이다.일본인의 대부분은 장례식이나 제사 등을 통해 자기 집안의 종교를 알게 된다. 그러나 아직 젊은이들은자기 집안의 종교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도, 그것을 곧 자기 종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자기 부모가 죽어 불단(佛壇)을 계승할 나이가 되면 집안의 종교를 곧 자기 자신의 종교로 자각하기시작한다. 개인의 종교를 기본으로 하는 외국인이 볼 때 대단히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 중의 하나는,여성이 다른 종교의 남성과 결혼하면 자기 남편의 종교로 바꾸거나 혹은 남성이 양자로 갈 경우 양자로들어간 집안의 종교로 개종하는 점이다.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에서는 개인의 구제(救濟)를 중심으로 하고 어디까지나종교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결혼해도 결혼 상대자의 종교로 쉽게 개종하는 것은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젊은이들이나 대학생들은 자유스럽게 교제를 하고결혼할 때도 종교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다.그러나 연애는 자유지만 결혼과 종교문제는 의외로 까다롭다. 결혼할 때는 같은 종교를 가지고있는 사람을 결혼상대자로 선택한다. 물론 사랑하기 때문에 종교를 초월하여 결혼하는 예도 있기는하다. 그러나 그 경우 종교. 신앙을 소중히 여기는 남녀인 경우 그 결혼생활은 자칫 파탄으로 이르기쉽다. 이에서 보듯이 일본인의 종교관은 집안의 종교에 중심이 있고 개인의 종교라는 의식이 너무나
    사회과학| 2004.06.18| 6페이지| 1,000원| 조회(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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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미시인] W.shakespeare & edmund spencer 영미시인 평가B괜찮아요
    영미 시인Edmund spenser와 W.Shakespeare에관한 보고서과목명 : 영미시 이해담당교수님 : 김형태 교수님소속 : 영어영문학과학번 : 20002498성명 : 정민혁애초 시에는 관심이 많았으나 영미시나 영미 시인들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던 나로서는 이번 Paper를 통하여나름대로 많이 알게 되어 좋은 경험이었다.시대상으로 먼저인 Edmund spenser에 관한 조사를 먼저 해보았다.Edmund spenser스펜서와 그의 시대1. 생애2. 시대배경3. 작품경향.4. 주요작품5. 영문학에서의 위치1. 생애Edmund Spenser(1552/3∼1599.1.13)Edmund Spenser는 영국 문학사상 사대 시성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Jone Spenser는 런던에서 과히멀지 않은 north-east Lancashire에 있는 Burnley로부터 런던으로 왔다. 스펜서는 Merchant Taiors’School을다녔고 1569년 5월 20일 지금의 케임브리지의 Pembroke College인 Pembroke Hall에 입학하였다. 스펜서는가정형편이 별로 좋지 않아서 감액된 등록금을 내고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스펜서는 열심히 그리고 많은책을 읽고 공부하였다. 라틴이나 그리스뿐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문학등의 해박한 학자가 될 정도였다.스펜서는 Pembroke 시절 뿐만 아니라 건강도 좋지 못했다. 그러나 요정 여왕(Ⅳ,��, 34)에서 보면 스펜서는 케임브리지에서 많은 은혜를 입고 또 모교에 깊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스펜서는 학부시절에도 앞날이 기대되는시를 써서 그의 천부적 재능을 보여 주었다. 그 중에서 Complaints" 나 Visions" 등이 그 실례이다.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이태리의 페트라르카, 프랑스의 뒤벨레 등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플라톤의 영향을받은『사랑과 미의 찬가』Hymnes in honour of Love and Beautie등의 시를 썼다. 1578년에 그의 대학 친구인하비(Harvey)를 통해 레스터(가하였다. 헨리 8세가 즉위하자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이탈과 영국 국교회의 설립이라는 정치적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해외 식민지 개척, 신흥중산층의 발흥, 부의 축척 등 근세 국가로의 번영기를 이루기 시작했다.이런 사회적 변천 배경과 이탈리아에 바탕을 둔 문예부흥의 물결이 영국에 밀려오기 시작했고,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대학 등이 새로운 학문의 요람이 되었다. 이들 대학 출신의 많은 젊은 휴머니스트 들을 중심으로 새로운영국 문학이 시작된다. 한편, 산문 분야에서는 영국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고 볼 수 있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있으며, 많은 번역문이 나오게 되었고, 성서의 영역과 후대에 수많은 문학의 소재가 되는산문들이 나오게 되었다. 토머스 모어의 작품 『유토피아』의 주제는 가장 훌륭한 정부 형태의 추구이다.이러한 시기에 시문학 분야에서는 유럽 여러 나라의 작품들이 영어로 번역·개작되고 이들을 모방한 작품들이씌어져, 영문학을 이탈리아 문학이나 프랑스 문학에 맞먹는 것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노력과 실험들이이루어졌다.그리고 시인으로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에드문드 스펜서(Edmund Spenser)이며, 목가시를 영시에 도입했다.에드먼드 스펜서는 튜더 시문학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실험하고 종합하여 초서 이후 최고의 시인으로영국의 16세기를 시문학적으로 집대성한다. 영국 시문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새로운 시인으로 등장한 스펜서는젊은 시절 한때의 소일거리고 소네트와 같은 서정적 연애를 몰두하던 당시에도 궁정의 아마추어 글쟁이들과는달리, 시인으로서의 강한 자의식을 가졌다.그는 당시 문인들의 귀감이던 필립 씨드니 경의 문학관(『시를 위한변론』에 개진된)의 영향 아래,문학이 인간의 도덕성을 형성하고 한 시대의 문화를 주도하는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다는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졌다. 또한 스펜서는 초서풍 언어를 모방한 다양한 시적언어와 후대에 여러 시인들에 의해 모방되는 스펜서풍 스탠저(으로 스펜서는 영국의 테오크리투스라는, 그리고목가시로 시작하여 서사시로 마감하는 베르길리우스적 궤적을 따른다는 점에서 영국의 베르길리우스하는이름을 얻었으며, 이 작품은 고전문학과 비견할 수 있는 영문학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첫 작품에서부터 스펜서의음악적인 아름다움과 장식적이고 감각적인 묘사와 우아함이 깃든 세련된 취향이 두드러지는데, 이 작품으로인해 스펜서는 동시대에는 주로 뛰어난 연예시인, 전원시인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고, 후대에 이르기까지영국의 대표적 전원시인으로 확고한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르네상스 시대의 여느 목가시와 마찬가지로『목자의 달력』에서 일견 평화롭게만 보이는 전원세계는 현실세계에대한 은유나 비유로서, 당대의 사회적·정치적, 종교적인 논평을 위한 틀로 활용되고 있다. 스펜서는 목자의 달력에서 계절에 변화에 따라서 다르게 쓰는 전원풍의 사랑을 전통을 따라서 묘사하였다. 그 사랑은 1월, 3월, 6월,12월의 전원시 속에서 나타나 있다. 그리고 2월, 5월, 7월, 9월은 도덕이나 또는 종교에 관련된 문제를 묘사하고있다. 4월에는 엘리자베스 여왕께 바치는 찬사의 노래를 Hobbinol이 낭송하는 것인데 그 노래는 Rosalind를 사랑하므로 그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떠난 그녀의 애인 Colin이 지은 노래이다. 그리고 11월에는 목동의 딸 Dido의죽음을 Colin이 애도하는 노래이다.8월에는 순수하고 소박하게 노래하는 한 쌍을 묘사하고 10월에는 시를 소홀히 하는 슬픔을 그렸다. 그리고스펜서가 이 시를 쓴 것은 도덕적인 의도보다는 예술적인 목적이 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목자의 달력은그 분위기가 인위적인 인상을 주지만 목동들의 생활의 아픔과 기쁨을 아름답게 묘사하였고 속삭이는소나무, 폭포, 산과 언덕을 오르는 양떼들과 꽃피어 아름다운 언덕의 묘사는 매우 매력적이다. 그리고 스펜서가전원시를 쓰는데 있어 기법면을 주로 본다면 목자의 달력은 영국시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념비가 될만하다.또, 목자의 달력의「시월」에서 스펜서는 시의 본질을 탐구하는왕』에는 알레고리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독자들이 기사들의 모험과 사랑이야기를즐겁게 읽으면서 내러티브의 단순한 베일 너머 알레고리 속에 몰입하여 각 덕이 구현되어가는 과정을 의미있게해석해나갈 때, 문학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자아를 형성하고자하는 스펜서의 교육적 신념이 실현되는 것이다.스펜서가 만들어낸 시적 알레고리의 세계인 페어릴랜드는 실재 세계인 엘리자베스 치세의 당대 잉글랜드에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세계가 구현하려 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들은 공간적으로페어릴랜드와 잉글랜드 사이를 넘나들고, 시간적으로는 전설적인 아서왕이 활동했다고 여겨지는 6세기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인 16세기가 중첩되는 알레고리의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 알레고리의 세계는 성결·절제·정절·우정·정의·예절 그리고 미완성의 항덕 등의 덕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중세시대의 기사도정신에새롭게 접목된 윤리적 가치를 가진 페어릴랜드의 이상적인 궁정의 모습은 부정부패와 모반속에서 정치문화의 중심으로서의 이상을 잃어가던 16세기 말 엘리자베스 여왕의 궁정을 조망한 스펜서가 윤리적·정치적·문화적으로개혁된 새로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문화적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4. 주요작품그의 주요작품들로는 『목자의 달력』(The Sbepbeards Calender, 1579) 『요정여왕』(The Faerie Queene, 1590) 『아일랜드의 현상에 대한 견해』(A View of the Present Seate of Ireland, 1633)등이 있다.5. 영문학에서의 위치16, 17세기에 스펜서는 격조높고 고풍스런 아름다움 시어, 세련된 취향의 회화적인 묘사와 더불어진지한 도덕적 사상 등으로 인해 시인들의 스승이요. 권위있는 도덕사상가로 인정받았다. 18세기에이르기까지 밀턴, 셰익스피어와 함께 스펜서풍의 시어, 스타일, 여러 형식의 알레고리 등은 문인들에게많은 찬사와 모방의 대상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스펜서의 문학적 영행은 워즈워스, 셸리, 키츠,바이런, 테니슨등에게서, 그리고중부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영국의 전형적인 소읍이었고,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고 있었다. 당시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는 훌륭한 초·중급학교가 있어서 라틴어를중심으로 한 기본적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뒤에 그에게 필요했던 고전 소양도 이 때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운이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학업을 중단하고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생각되며, 상경의 동기가 극단과 어떤관계였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으나, 1592년에는 이미 그가 유수한 극작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선배극작가인 R.그린의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다.1590년을 전후한 시대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국운이 융성한 때였으므로 문화면에서도 고도의 창조적잠재력이 요구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을 얻어 그의 천분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당시의 연극은 중세 이래의민중적·토착적 전통이 고도로 세련되었으며, 특히 그리스·로마의 고전(古典)을 소생시킨 르네상스 문화의유입을 맞아 새로운 민족적 형식과 내용의 드라마를 창출해 내려는 때이기도 하였다.그러나 1592∼1594년 2년간에 걸친 페스트 창궐로 인하여 극장 등이 폐쇄되었고, 때를 같이하여 런던 극단도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이 때부터 신진극작가인 셰익스피어에게 본격적인 활동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당시의극계를 양분하는 세력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 극단(당시는 유력자를 명목상의 후원자로 하여 그 명칭을 극단에붙이는 것이 관례였다)의 간부 단원이 되었고, 그 극단을 위해 작품을 쓰는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 그는 이극단에서 조연급 배우로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의재능도 과시하여 《비너스와 아도니스 Venus and Adonis》(1593)와 《루크리스 Lucr.
    인문/어학| 2004.06.18| 7페이지| 1,000원| 조회(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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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예술] 복제시대의 예술 사진 평가B괜찮아요
    복제시대의 예술 사진사진의 특성과 예술성에 대한 견해과목명 : 사진의 이해와 생활담당교수님 : 윤국헌교수님제출일자 : 2004년 4월 30일소속 : 영어영문학과 2학년학번 : 20002498성명 : 정민혁복제시대의 예술 사진사진의 특성과 예술성에 대한 견해영어영문학과 2학년20002498정민혁위의 제목을 저렇게 정한 이유는 이번 페이퍼에 참고하기 위해 참고 문헌을 찾는 도중 정말 가슴에와 닿는 단어라고 생각하여 제목을 적어본다.개인적으로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중의 한 명으로서 중, 고등학교 때는 사진부 써클활동을 통해전시회도 2번 열었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만 솔직히 필름값과 현상과 인화에 드는 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여 지속적으로 취미생활을누리고 있다. 내가 사진을 좋아하게 된 최초의 이유는 사춘기 시절 그저 아~ 사진을 찍으면 누드도찍을 수 있겠구나~ 하는 성적인 호기심이 최초로 사진이라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당시 사진에 대해서 담당선생님이나 선배들로부터 하나 둘씩 배워나가면서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볼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지면서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만이 아니구나 아직도 인간적이고 아름다우며 그 하나하나의 피사체 속에서 아주 작은 아름다움이라도 발견 할 때 희열을 느끼는 나를 보게되면서 사진에 대하여 정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또한 고1시절 학교 1층 계단 및에 위치해있던 창고를 암실로 개조해서 현상 인화 기구들을 넣고 약품을 만들고 현상을 하고 인화를 하게 되면서 그 과정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고3이 되도 공부안 하고 학교에서 아주 가까이 있던 소품들을 사용해서 사진을 찍고 그것을 현상하고 인화하는시간이 학업에 지장을 주게 되어 더 좋은 대학을 갈 수도 있었던 나를 지금의 여기에 있게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사진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기 전 나는 산을 글자 그대로 산으로만 보는 관점으로 세상을 봤었다.그러나 사진을 찍게되고 사진에 나오게 될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 사진을 찍게 되었을 때 그 산은 글자 그대로의 산이 아니라 그 속에는 나무가 있고 계곡이 흘렀으며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있었고 그야말로 조용한 그러나 수많은 유기체를 가지고있는 커다란 하나의 집합체였다.여기서 내가 느낀 점은 사진의 예술성이라는 것은 뭐 유명한 작가나 좋은 필름 또는 좋은 사진기로찍어서 나오는 사진이 예술성 있는 사진이 아닌 그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 이나 피사체만의특성을 촬영자 관점대로 촬영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졌을 경우 다른 사람들도 같이 공감하고 느낄수 있는 사진이 정말 예술성 있는 사진이 아닐까한다.물론 그림이나 글을 통해서 그 사물이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나 특성을 나타낼 수 도 있겠지만그 현장감이나 색채감 느낌이 사진만큼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진이 가진 특성중의하나인 현실기록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수가 있다.또한 수업시간에 배웠던 우연성에 관한 특성은 내가 우연하게 친구와 축구장에 들렀을 때의 경험을들 수 있다. 포항과 전북간의 경기였는데 후반 42분 0:0의 상황 포항이 전북진영으로 돌파하고들어갔다. 왠지 모르게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었던 나는 셔터를 눌렀고 이때 마침 운이 좋게도 포항의결승 골~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어쩌면 그리 상관이 없는 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그때가 그리도생각이 나던지 지금도 감회가 새롭다.세번째 특성이 지시적 언어적 특성. 이라고 할 수 있다. 글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기능에대해서 쉽게 이야기하자면 특정 대상에 대한 전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우리는 이런 기능들을 TV나 신문 잡지 광고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상품에 대한정보를 제공함으로서 개인이나 회사의 이익이 될 수 있는데. 여기서 전달성이 부족하거나 잘못된정보를 전달 할 경우에는 상품이나 물건을 제공하는 입장이나 그 전달성을 보고 상품을 구입하게 된소비자의 입장이나 양자 모두 손해나 불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을 통해서 어떤정보나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진이 되어야 하지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다음 복사성에 대한 기능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진은 인간이 아니기에 단순 복잡한 기계이기에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있는 사실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그것을 표현한다. 즉 찍고자하는 피사체에대해 정확히 객관적인 요소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어느정보 제공자가 한 장의 사진을 웹 상에 올리게 되면 그 사진이 재미가 있고 내용이 있다면 그사진이 복사 돼서 여러 사람에게 유포되는 것은 시간문제 일 것이다.이외에도 많은 기능들이 있겠지만 내 생각 중에 특별하다 생각되는 사진의 기능에 대하여 서술해보고자 한다. 그 기능은 바로 사진으로 인한 통합성 이라 말하고 싶다.감동적인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모두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예를 들어 시골전경을 찍어놓은 사진을 통해 관객이나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거의 대다수가머릿속에 아늑한 시골풍경의 모습을 정지된 영상이 아닌 살아있는 영상으로 재현을 시킬 것이고예쁜 여자가 찍힌 사진을 관람하면서 대다수의 남자관람자들은 그녀가 가진 매력에 흠뻑 빠지고그중 몇몇은 아 저런 여자랑 사귀어 봤으면.. 혹은 한번만 만나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진 한 장은 여러 사람의 공감대를 하나로 묶을 수 있어 공동 공감대 형성의 원인이될 것이다. 글쎄 적당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전공수업시간에 듣는 수업 중에 영미 희곡입문이라는 수업이 있는데 과거 영국 국민들이 카톨릭과 청교도파로 나뉘어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여왕 Elizabath Ⅰ는 문학과 예술 연극등을 통해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대영제국을 건설하였다고한다. 글쎄 그 당시 만약 사진이 개발되고 일반화되었다면 저 사이에 사진도 하나의 부류로 낄 수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이처럼 사진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하지만그 내면은 다시 말해 사진이 가지고 있는 기능은 우리생활에 항상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그럼 지금부터 위에서 서술한 사진의 예술성과 기능에 대한 내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술과사진을 보는 작은 안목이지만 몇 장의 사진을 가지고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먼저 사진의 예술성에 대한 사진을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사진 1) (사진 2) 2003 서울 국제불꽃축제 중사진 1번과 2번의 차이점은 그냥 봐도 분명 차이가 난다. 글쎄 사진 2번도 어설프게 예술사진을흉내는 내보려고 했으나 차이가 나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실력있는작가가 찍은 것과 본인의 실력으로 찍은 것은 엄청난 차이이겠지만. 뭐랄까 사진1은 마치 불꽃이살아서 사진 속에서 퍼질 듯한 느낌을 주지만 사진 2번은 뭔가 어설프다 즉 죽은 사진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본인의 생각으로 위에서 강조했듯이 죽은 사진은 결코 예술성있는 사진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그럼 좀 더 구체적인 느낌이 들 수 있도록 2장의 사진을 더 올려보고자 한다.{{(인터넷 출처) (내가찍은사진)그럼 이제 사진이 가진 특징 중 현실 기록성에 대한 사진을 몇가지 예로 들어보기로 하겠다.{{(사진1) (사진2)이곳은 한국전쟁 직후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닌 대형참사가 있었던 북한 룡천역 주변풍경이다.아무리 기사로 써내고 말로 전달해도 이 사진 2장이 전달하는 느낌만큼 큰 느낌을 주지는 못할것이다. 이처럼 사진의 현실 기록성은 신문기사나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다.두 번째 특징인 우연성에 대한 몇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다.{{(사진1) (사진2)사진 1번의 사진은 항해사가 항해 중 우연하게 목격한 태풍을 찍은 사진으로 어찌보면 현실기록성과도상관관계가 있는 사진이라 할수 있겠다. 사진 2번은 강운구 사진작가의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수분리〉라는 작품으로서 의도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비의도적이었다면 우연히지나가던 개 한마리가 사진에 찍히게 되어 사진이 더욱 감칠맛 나게 표현이 되었다고 느껴진다.이처럼 의도적이 아닌 혹은 의미 없이 찍었던 사진 한 장이 사진이 기록사진이나 예술사진으로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하겠다.세 번째로 사지의 지시적 언어적 기능. 위에서 언급했다 시피 이러한 기능들을 가진 사진은 주로상품광고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혹은 현실기록성과 더불어 신문기사로도 많이 사용될수 있을 것이다.{{{{위 사진은 모두 동일한 제품으로서 다양한 각도에 따라 촬영하면서 제품이 가지고 있는 외형적디자인에 대해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이렇게 사진은 지시적 언어적 기능으로 인해 홍보성의상품광고나 전달성의 기사 사진 등에 사용되어지고 있다.네 번째로 사진의 복사성에 대한 사진들을 나열해 보자면{{위 두 사진은 모두 본인이 속해있는 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 MT 단체사진으로서 그때 왔던
    예체능| 2004.06.18| 7페이지| 1,000원| 조회(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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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로마멸망의원인과 한니발
    로마제국의 멸망에 관하여(로마인 이야기 Paper)수업명 : 로마인 이야기담당교수님 : 임순희교수님소속 : 영어영문학과학번 : 20002498성명 : 정민혁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론로마제국의 멸망은 역사가 뿐 아니라 신학, 문학, 경제학, 철학, 지리학, 생리학 등 여러 분야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으며, 다양한 측면에서 그 원인이 제기된다. 그런데 제국의 쇠퇴가 이미1세기 이래 로마인들 스스로가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주 흥미롭다. 예컨대, 호라티우스는로마인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사악해져 간다고 한탄했고, 세네카는 이제 로마제국은 병들어남은 것은 사멸밖에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특히 군인 황제기의 혼란 속에서, 황제들의 '영원한로마(Roma Aeterna)'와 '황금시대로의 복귀(saeculum aureum novum)'라는 거창한 구호에도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로마의 쇠망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쇠퇴의원인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크리스트교의 흥기과 연이은 만족들의 로마 제국의 침입이라는 시대적상황속에서였다. 로마 전통의 종교를 옹호하는 측(이교도)에서는 로마제국이 이민족의 침략에노출된 된 이유가 로마의 전통적 제신들을 버리고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데 대해 신들이 분노한결과라고 믿었는데 비해, 기독교도들이 이에 반박하면서 그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던것이다. 그 후 오늘날까지 로마제국 쇠망의 원인을 두고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이를시대별로, 주제 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시기인 5세기 경, 전통 로마의 종교를 받드는 사람들, 예컨대 이교사가조시무스 등은 로마 제국의 쇠퇴는 그들이 전통적으로 섬겨오던 신들을 버리고 크리스트교화하였기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해 기독교의 교부들이 반대논리를 폈다. 성 어거스틴은 410년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함락, 약탈되는 것을 보고. {신국론, De Civitate Dei}을 서술하여,기독교가 로마 쇠퇴의 원인이 아님을 논하였다. 로마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의 이교 시대에도로마에는 여러번 가공할만한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갈리아 인의 침입이나 네로 황제의 로마방화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쇠퇴는 오히려 기독교를 진실하게 믿지 않는이교도들 때문이라고 한다. 살비아누스는 {신정론}에서 로마 쇠망의 원인이 죄악과 부정 부패에대한 하늘의 심판이라고하였다. 오직 신만이 관심을 끌던 중세를 거쳐 다시 인간적인 것으로 눈을돌리던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 다시 고전 고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로마제국의 멸망론도다시 새로운 관점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대 유명한 서정시인인 페트라르카는 로마가당한 모든 해악의 근원을 원천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파괴한 카에사르에게로 돌렸다.페트라르카는 또한 고대 문화의 몰락을 이민족에 의한 야만화에서 찾고, 최초로 암흑시대(DarkAge)란 용어 사용한 사람이다. 또 비온도와 시도니우스는 로마 멸망의 원인을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의 전환 때문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편적인 사료와 연대기 등에 의존하였으므로, 그 이론에는 확실하지 못한 추측의 여지가 많다.17세기에 이르러 439년 제정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이 발견되었다. J. Godefray가 1665년에 세밀한주석과 논평을 달아 이를 출판함으로써 그 당시 사회상을 깊이있게 연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로마제국 말기의 경제적 취약성, 과중한 과세 부담, 중간계층의 몰락, 산업의 파탄, 경작지의황폐 등의 요인들에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를 이어 계몽주의시대의 몽테스키외는 지리나 기후,민족적 요인과 역사적 사건간의 관계를 중시하였는데, 로마제국의 멸망에 관해서도 크리스트교나야만족의 침입, 기후변화, 인종 혼합, 한발과 토양 고갈 등을 언급하고 있다. 또 기번은 로마 제국의도덕적 타락, 군사력의 무기력화, 재정 곤궁, 동서 로마의 분열과 상호간의 질시, 기독교와 게르만족의 침입 등에 대해 논하고 있다.결론적으로 기번은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2가지로 압축한다. 그것은 무기력한 기독교를 수용하여 국교로 한 점, 그리고 로마제국이 당시 기술수준으로 보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대해진 점등이다. 19세기에도 르낭은 흡혈귀와 같았던 기독교 때문으로 로마멸망의 원인을 규정하였다. 다른 한편 기조는 전제 군주정의 폐해 때문에 로마제국은 쇠퇴하게 되었으나, 게르만의 침입은일부 지역에 한정되었고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라 하였다. 몸젠은 속주 통치가 인도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못한 점, 변방 방어의 허술했고 제국의 변경이 너무 길어 지리적으로 방어의난점이 있었던 점을 든다.부르크하르트는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상류 계층에서 혼혈에 의한 인종적 퇴화 현상 때문이라고하였다. 역시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인종적 특성의 순수성 상실. 잡종화 현상이 그 몰락 원인이라고규정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종교, 정치 뿐 아니라 사회경제사 등 인간생활의 제반 측면에 대한관심이 더 폭넓게 확산되었다. 예를 들면 핀리는 제국의 멸망을 문화적 토양에서 찾았고, 퓌스뗄 드꿀랑쥐는 대지주의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했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호드킨은 노예제의 폐단,로마 무산자들의 극빈화, 자치 도시의 붕괴, 페르시아와 게르만의 침입 등을 들었다. 또한 헌팅턴은기후 변화와 농토의 고갈을 원인으로 든다.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에 관해 20세기에 나타난 견해를크게 분류해보면, 첫째, 마르크스적 유물사관이다. 프랑크는 로마의 경제가 농업과 노예제에의존함으로써 공업이 후진성을 면치 못했음다는 점을 든다. 생산 증대와 생활 향상을 위한 기술의발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칠드는 시장의 제한, 일반 대중의 구매력 하락. 노예 노동으로 자유노동자의 임금은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이라 한다. 또 월뱅크는 칠드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저급한기술과 일반 대중의 구매력 하락, 노예제도의 폐단. 부의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한 전체주의적 체제 등을 꼽는다. 둘째, 문명 사관이 있다. 슈펭글러는 사회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청년, 장년, 노년기의 과정을 겪는다고 보면서, 로마의 멸망을 유기체적 숙명론적으로 해석하였다.토인비는 역시 일종의 숙명론에 입각하여, 그리스 로마 문화를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분류하고,이 문화권의 자살 시기를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시기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제국은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몰락하도록 되어있었다는 것이다.로마 멸망에 따른 이상의 여러 견해들을 주제별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먼저 도미나투스 체제의 폐단이다. 전제적인 제권으로 인해 로마 사회가 탄력성을 상실하게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세금 징수를 위해 직업과 신분을 고정시킴으로써, 자유로운 경제의흐름이 차단되었다. 또한 대규모 관료 체제와 군사력의 증강은 막대한 재정의 지출을 초래하였는데,이는 과중한 수세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과중한 수세와 국가 재정 타개의 방안으로 주조된 악화의강제유통은 바로 화폐 경제 혼란을 초래하여 제국의 경제를 돌이킬 수 없는 파탄으로 몰아갔다.나아가 이러한 현상들은 제국에 대한 지방민의 애착을 약화시켰다.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군단과 정치의 중심이 상당부분 지방에 분산되어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지방의 원심적 경향을조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 다음은 군대의 질 저하와 게르만 족의 유입 문제이다. 로마 시민보다 속주 이민족 출신의 군인이 많아짐으로써 군대가 로마시민이 아닌 속주출신의 이민족의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또 노예제의 폐단이 있다. 강제 노동으로 인한 생산의 비능률성, 노예반란 혹은 태업 등이 장기적으로 제국의 생산력을 저하시켰다는 점이다. 동시에 노예노동은 기술개발을 촉진시키지 못하였고, 사회전체에 노동을 천시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이어서 제국의정복전이 한계에 다다라 노예의 공급원도 끊기자, 라티푼디움 체제는 위기를 맞이하고 마침내 콜로나투스제로 전환해간다.제국의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제국 후반기 전염병 등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도 빼놓을 수 없는현상이다. 이에 더하여 로마인의 정신적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퇴폐적이고 향락적 생활도 빼놓을수 없다. 이는 임신, 출산, 육아 등을 포기하는 현상과도 연관된다. 제정기 로마 인구는 백만 정도로감소하였는데 이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그같은 퇴폐적 풍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인구의 감소는 바로 경제력의 약화, 혹은 지배권력의 약회로 연결된다. 로마의 멸망과 관련하여한마디 덧붙이자면, 서로마가 망하고 난 뒤에도 서구에서는 항상 영원한 로마제국의 재건을꿈꾸면서, 그 멸망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 옛날로마제국이 태동하던 기원전 1세기 이미 베르길리우스는 아에네이드 1장에서 신들의 왕 제우스의약속[I have fixed them(로마인들을 의미) no limit, not in place, not in time. I have giventhem rule without end]을 통해 '영원한 로마(Roma Aeterna)'의 꿈을 그렸다.영원한 로마에 대한 이같은 꿈은 실제로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은 듯 하다.
    인문/어학| 2004.06.18| 5페이지| 1,000원| 조회(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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