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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변동] 경기변동
    일자리가 줄어든다-‘고용없는 성장’ 실태.대책[매일신문 2004-09-07 14:39]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전기.전자, 기계.금속 등 지역 내에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산업군에서조차 고용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오히려 성장이 빨라질수록 고용창출능력은 더 떨어지는 ‘성장과 고용의 반비례현상’이 심화되고 있다.자동화, 공장 해외 이전 등이 가속화하는 탓이다.때문에 정부가 기업에만 일자리 창출을 맡겨둘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정부차원의 일자리 늘리기 대책 수립에 나서야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얼마나 심각한가? 대구 성서공단의 사무용 의자 제조업체인 부호체어원. 이 공장의 캐스터(의자 바퀴) 조립라인에는 올 초까지만 해도 25명이 달라붙어 일을 했다.하지만 현재 캐스터 조립라인에 근무하는 직원은 단 1명. 2억4천만원짜리 캐스터 자동조립시설이 들어오면서 무려 24개의 일자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김노수 부호체어원 대표는 “24명을 줄인만큼 1, 2년 만에 기계 구입 비용을 번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성은 그대로인데 최근 4대 사회보험 강화 등 근로자를 고용하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늘어 사람을 줄이는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포항과 인천 2곳의 공장에서 3천300여명을 채용하고 있는 국내 최대 전기로 생산업체인 INI스틸. 이 회사는 3년째 현장 근로자를 거의 채용하지 않고 있다.포항공장에서 지난해 퇴직자 보충으로 겨우 20여명을 채용했을 뿐이다.이 회사의 경우, 근로자 수 변동이 거의 없는데도 불구, 매출은 오히려 늘어났다.지난 2001년 2조8천700억원에서 2002년에는 무려 3조3천700억원, 지난해는 3조6천억원으로 매년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김창기 포항공장 총무팀장은 “2001년 이후 현장 근로자 충원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퇴직 등을 제외하고는 당분간 신규채용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포항공단에서 열연과 냉연제품을 포장하는 업체인 삼정피앤아이는 오히려 근로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지난 2001년 941명(1천155억원)에서 2002년 902명(1천94억원)으로 대폭 줄었다가 지난해 겨우 4명이 증원돼 906명(1천378억원)이 근무하고 있다.이 회사도 설비자동화가 인력 감소에 큰 영향을 끼쳤다.장춘식 삼정피앤아이 팀장은 “이제 노동집약적으로 사업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기술집약적으로 사업하는 시대가 됐다”면서 “설비자동화와 1인당 생산성 향상으로 매출을 극대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내화물 제조업체인 포스렉. 이 회사는 매출이 느는데도 지난 2001년부터 매년 평균 30여명이 줄어들고 있다.이 회사에 따르면 기존 근무 인력의 숙련도가 향상, 줄어든 인원으로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높은 생산성을 이룩해 낼 수 있다는 것. 신규채용도 자동감소분만큼만 충원할 계획이라고 이 회사는 밝혔다.이 같은 사정은 200여 업체가 입주해 있는 포항철강공단 대다수 회사가 마찬가지다.공단 내 업체에서 고용하고 있는 근로자 수가 지난 2001년 1만6천148명에서 2002년에는 41명이 줄어들었으며 지난해에는 무려 480여명이 현장을 떠났다.그런데도 생산성은 향상, 매년 1조원 가량 전체 공단 매출이 늘고 있다.IT업종이 주축인 구미는 사정이 더 심각하다.구미공단의 생산액은 31년 전 614억원에서 지난해말에는 36조원으로 586배, 수출액은 4천500만달러에서 455배인 205억달러로 늘어났다.올해도 총생산액 38조원, 수출은 230억달러 등으로 성장세는 지속될 전망.그러나 구미공단의 고용은 지난 1996년 7만5천명, 1997년 7만2천명 등으로 최고치에 달한 이후 계속 감소세를 보여 지난해말에는 6만8천여명에 그쳤다.◇원인은? 고용감소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1990년대 이후 기업의 기술.공정혁신 및 자동화, 서비스업의 다양화에 따른 탈제조업(de-industrialization) 바람에다 최근 기업들의 ‘해외로’ 열풍까지 가세하고 있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풀이하고 있다.중국 등으로의 생산시설 해외 이전도 일자리를 줄이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현재 구미공단의 154개 기업체가 지난 1989년부터 지난해까지 8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바다건너에 해놓고 있다.김종배 구미상의 조사진흥부장은 “현재 국내 기업의 30% 이상이 이미 해외이전을 했거나 준비 중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며 “이 같은 제조업계의 해외투자가 결국 산업공동화를 초래하고 국내의 고용시장을 얼어붙게 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고 했다.결국 구조적 원인이 일자리를 줄이는 ‘역할’을 하면서 향후 일자리가 더 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구미상공회의소가 최근 IT.전자산업단지인 구미공단에 대해 기업경기 전망(BSI) 조사를 한 결과, 체감경기는 다소 개선될 것으로 파악됐지만 유독 고용만은 떨어질 것으로 나타났다.향후 고용감소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기업들이 한목소리로 내고 있는 것이다.지난 3월 대한상공회의소가 밝힌 ‘2004년 주요 업종별 고용전망’ 보고서에서도 올해 평균 생산증가율은 5.9%에 달하지만 이에 따른 고용증가율은 2.0%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대한상의는 반도체의 경우 고용은 생산라인을 중심으로 6.7% 증가하는 데 그치고, 전자 업종도 생산은 15.5%나 확대되지만 고용은 5.5% 늘어나는 데 불과하다고 전망해 이같은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다.◇어떻게 극복할까? 국내 최대철강업체인 포스코는 최근 ‘색다른 행동’을 해 주목을 받고 있다.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매년 100~150여명 가량 현장 근로자들을 신규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2, 3년 후 퇴직자들을 염두에 두고 경기가 좋을 때 미리 인력을 확보해 놓으려는 전략 때문이다.박세연 포스코 인력지원팀장은 “최근 들어 자연퇴직이 줄어든 데다 고용유발계수마저 낮아 대규모 신규채용은 쉽지 않다”면서 “청년실업 해소차원에서 매년 100명 내외의 신규인력을 충원하고 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잊어버릴 수는 없다”고 밝혔다.김태현 포항상공회의소 과장은 “기업들이 신규 고용 없이 1인 2역 등으로 생산성만 높이는 구조로 바뀌어 청년실업 해소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면서 “이에 따라 여유인력 부족에 따른 근로자들의 조업피로도가 누적되는 등 업무강도가 종전보다 훨씬 높아지게 됐으며 기업들이 지나치게 인원 감축에 나서는 것은 장기적으로 생산성 향상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했다.류권우 계명대(경영학) 교수는 “서비스 부문의 침체와 수출 내수 경기양극화로 일자리 감소가 심화되고 있다”며 “기업들이 자동화 등 무조건적인 외형 인프라 확충에 나서기보다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 ‘사람’을 어떻게 제대로 활용해서 생산성을 높일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류 교수는 또 “근본적으로 기업 경영에 있어서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 될 수 있다”며 “정부도 제대로 된 일자리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했다."부품산업, 일본에 기대지 말자"[중앙일보 2004-09-08 21:11][중앙일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부품소재 산업의 대일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국내 부품소재 산업 육성에 팔을 걷었다. 이를 위해 전경련은 8일 부품소재 태스크포스(TF)팀를 만들고 내년 2월까지 10대 핵심품목을 선정해 품목별 발전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전경련은 부품소재 산업의 일본 의존도가 높아 경기양극화와 고용 없는 성장이 빚어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주요 부품이 일본에서 수입돼 수출의 과실이 대부분 일본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우리나라는 197억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지만 대일 무역에서는 158억9000만달러의 적자를 보였다.'중소기업 육성해야 고용안정'[뉴시스 2004-09-07 16:35]기업들의 투자활동 위축과 농수산업 경쟁력 약화 등이 가속화되면서 광주.전남지역의 고용 부진을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한국은행 광주.전남본부는 7일 '광주.전남지역 고용부진의 배경 및 정책적 시사점'이란 보고자료를 통해 최근 광주.전남지역 고용사정이 크게 악화된 것은 농림어업의 경쟁력 저하, 투자활동 위축, 제조업의 고용창출력 저조 등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또한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고용비중이 높은 농수산업과 도소매. 음식숙박업 등 내수침체의 영향을 크게 받는 서비스업이 큰 타격을 입고 있는 것도 고용창출 부진의 큰 요인으로 분석됐다.특히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경영형태가 보수적으로 바뀌면서 지역내 투자활동이 줄어들어 소비부진과 함께 지역내 고용창출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이와함께 산업기반이 취약한 가운데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등 대기업 및 자본집약적 산업의 비중이 높아 고용흡수력이 낮은 것도 이 지역 실업율 증가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이에 따라 한국은행 광주전남본부는 최근 경제회복 국면에서도 취업자가 크게 증가하지 않는 '고용없는 성장'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고용증대를 위한 다양한 해결방안 등을 제시했다.
    경영/경제| 2004.09.11| 6페이지| 1,000원| 조회(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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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토피아] 유토피아
    1.유토피아의 개념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곳 이란 뜻이다. 즉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 유토피아이다.유토피아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가능성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론적인 실현 가능성이 유토피아가 갖는 진실성이며 현실비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원래 상상력이란 자연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유일한 은총이다. 이러한 상상력을 현실에 적용시킬 때 단순히 맹목적으로 현실도피를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현실을 탈출하기 위한 현실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적극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의 관습적인 요구에 맹목적으로 타협해 버린다면 우리는 현실 속에 영구히 매몰될 것이며, 우리는 현실, 즉 사회에 속박되어 인간의 숭고한 정신세계의 발전에 쐐기를 가하는 결과가 되고만다.이러한 사회현실에 정체되어 버린다면 더 나아가서는 인류 문화의 창조에도 장애를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현실비판이야말로 유토피아의 진실성을 의미하는 것인것같다.2.유토피아의 저술 배경 - 영국의 르네상스(1)문화적 배경유토피아는 영국 르네상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실질적으로도 휴머니즘과 진실한 의도를 간접적으로 우회하여 말하는 풍자성에도 르네상스의 사상이 물씬 포함되고 있다. 1500년도 당시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말기적 증세로서 관능주의와 이기 주의로 물들을 무렵, 유럽 대륙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섬나라 영국에서는 그제야 르네상스를 비로소 맞이했기 때문에 페트라르 카 본래의 도덕적 중용 정신이 뿌리내렸다. 또한 당시의 영국왕 헨리 8세는 이런 학자들을 원조해 줌으로서 유럽에서도 늦은 편 이긴 했지만 영국에서의 인문주의는 크게 발달하게 된다.확실한 것은 영국에서의 카톨릭 교회는 이탈리아만큼의 세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후일 제임스 1세쯤 되면 카톨릭교는 단순한 풍자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는 1618년에 기록된 베네치아의 공사 오라지오 비지노의 글에도 틀림없이 나타나있 다. 그 때 당시 연극에서 상영된 작품들은 모두 `선량한 사람을 실망시키는' 반카톨릭적인 풍자적 내용이었다. 실제적으로 영국 인들에게 있어서의 로마는 너무나 먼 곳이었고 교황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세력가였다. 물론 제임스 1세 시기는 당시는 이미 프로테스탄트가 대세를 잡고 있었던 때이니 만큼 당연하기도 하지만, 만약 영국이 진정으로 신실한 카톨릭의 신봉자였다면 헨리 8세가 겨우 이혼문제로서 카톨릭 교회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수장령을 발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 중에서도 모어는 제 2세대의 영국 인문학자들을 대표하며, 영국 문예부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바로 제 1세대의 인문학자들 은 예술이나 문화쪽 보다는 전형적인 북유럽 르네상스의 일부분으로서 과학, 윤리, 신학 쪽이라는 좀더 딱딱한 쪽에 더 치중을 한데 비해, 영국의 제 2세대 인문학자들은 모두 사상적으로나, 소재면으로나 훨씬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영국의 많은 인문학 자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유산을 모방하는 데 몰두했으며, 그것은 모어도 별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문학가로서의 토마스 모어가 단테나 다른 르네상스 문학가들에 비해 사용하는 용어의 차용에 있어서 라틴어나 모국어보다 그리스 언어를 사용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특히 토마스 모어는 일찍부터 당대의 가장 유명한 인문주의자중 하나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와 친교를 맺었다. 그의 우신예찬도 바로 모어의 집에 묵으면서 쓴 것이라고 한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보이는 르네상스 문학의 기교를 대표한 다고 할 수 있는 능숙한 비유와 은근하고도 신랄한 풍자 방법들을 에라스무스에게 영향받았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다.(2)역사·사회적 배경한편 모어 시대의 영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들자면, 유토피아라는 소설 안에서도 라파엘의 지적으로서 다루어 지는 부분이며 또한 대대로 고등학교 수학능력시험의 사회과 탐구의 예제로서 20번도 넘게 들어지는 인클로저 운동이다. 농민들 의 농지를 당시의 유력자들이 빼앗아 물론 그 이전의 농민들의 삶이 무척 유복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래도 살 곳과 땅을 잃은 채 실업자로서 무작정 상경하는 농민들은 정말 상당한 사회적 문젯거리였다.또한 모어가 살던 영국만의 특유한 상황은 1455~85에 일어났던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이다, 이는 왕위를 넘보고 랭카스 터, 요크의 두 귀족가문이 약 30년간이나 왕위쟁탈전쟁을 벌였던 일로, 1485년 랭카스터 가의 헨리 7세가 겨우 왕이 되면서 진정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전쟁이란 수많은 음모와 흉계, 그리고 온갖 부조리한 일들이 날뛰게 되는 시기이다. 토마스 모어는 1477 년, 전쟁의 말기에 태어났다. 물론 모어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이미 전쟁이 끝난 뒤였겠지만 사회에 남겨진 혼란과 상처가 사라 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 전쟁의 탓으로 귀족들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어 튜더 왕조의 절대왕정을 성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3.내가생각하는 유토피아평소에 유토피아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토머스 모어 의 유토피아, 마르크스의 유토피아 같은 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이번 레포트를 계기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어보았다. 그 책을 읽고 난 느낌은 커다란 어린이용 동화를 한편 읽은 것 같은 것이었다. 내가 5살 정도로 어렸을 때 동화책에서 읽었던 신기한 나라,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가질 수 있는, 그런 신비한 나라의 이야기. 그러나 도저히 갈 수도 없고 있지도 않은 동화의 이야기 같았다.물론 동화로 보기에는 너무 자세하며 현실적이다. 모든 것이 조직적으로 그 아래 깔려있는 강한 사상이 느껴진다. 그리고 지나치게 이상적이지도 않다. 어쩌면 어른을 위한 동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며, 실제로 어떤 책에서는 `유토피아'를 정치 적 공상소설로 규정하고 있었다.
    경영/경제| 2004.08.25| 3페이지| 1,000원| 조회(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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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전래] 불교의 전래
    I.머리말II.동향1.불교의 전래1)성왕과 불교의 전래2)사찰의 건립3)불교전래의 의의2.불교문화의 개화1)아스카문화2)광륭사의 반가사유상3.선진문물의 전래1)왕인과 금래재기2)오경박사3)선진문물 전래의 배경III맺음말I.머리말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전파된 불교에 대해서는 많이 본 듯 하나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져간 불교문화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불교 문화의 역사적배경 등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조사를 시작하게되었고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백제 성왕이 6세기 중엽에 왜에 경전과 불상을 보냄으로써 공식적으로 일본열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불교수용을 두고 내부의 혼란이 있었으나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입장에 있었던 소가씨의 승리로 불교는 공인되어 정치적 이념으로도수용되게 되었으며 불교와 함께 전래된 여러 문물들은 일보의 분화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백제가 이러한 각종 선진문물을 일본열도에 전한 사실은, 고구려 및 신라와 각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왜의 군사력을 이용하려고 한 정치적인 의도를 배경으로 하였다.II.동향1.불교의 전래1)성왕과 불교의 전래성왕대의 백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538년 충청남도 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을 뿐 아니라,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여 76년 만에 백제의 옛 수도인 지금의 서울지역을 되찾았다. 백제는 이처럼 국내에서 활발한 활도을 전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각종 선진문물로 왜에 대한 외교적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오경박사나 역박사,의박사 및 그들이 지니고 있는 각종 지식들을 당시의 백제는 외교적인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고대 일본에서는 사령에 대한 숭배와 주술적 풍습이 아주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가문의 조상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이들의 토착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을 신도라고 한다. 이 시대에 대왕으로 불리었던 기나이 지역의 수장도종교적, 주술적인 권위와 세속적인 권위를 아울러 지니고 집안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였고, 친백제계를 바탕으로한 황실세력의 권력 강화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가씨는 우마코이후 60년간 전성기를 누린다. 소가노우마코는 자기가 내세운 스슐을 암살하고, 다시 조카인 스이코를 대왕의 자리에 앉혔으며, 정치는 사위인 쇼토쿠태자에 맡겨 섭정토록 하였다.이 쇼토쿠태자의 등장과 그의 정치적 성과는 일본 고대국가형성의 기틀이 되었으며, 이것은 이른바 아스카시대의 개막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스카시대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불교의 공인과 불교문화의 발달이며, 둘째는 정치질서의 확립과 율령정치의 시작이며, 셋째는 활발한 국제관계의 개시이다.2)사찰의 건립일본에서는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호족들간의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분란에 참여했던 쇼토쿠태자는 배불파의 타도를 성취하면서 지금의 오사카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이와 함께 당시의 실권자인 소가노우마코는 아스카지역에 비조사를 세웠다. 당시의 사원건축은 당시 건축술의 정수를 잘 반영해 주는 종합예술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일본열도ㅇ에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기술과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는 왕권을 상징하는 조형물이기도 하였다. 백제는 왜에 불교를 전래해 주면서 그와 관련된 건축술도 함께 전파시켰으며, 이는 전방후원분과 같은 대형 고분을 대신하여 일본열도의 왕권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사원을 건립하기 시작한 스슐 원년(588년)에 백제에서는 사공(사찰건축기술자), 노반박사(탑건축기술자), 와박사(기와제조기술자), 화공 등을 속속 일본으로 보냈으며 불사리도 보냈다.또 602년에는 백제의 승려 관륵이 일본에 역본과 천문지리서, 둔갑방술서를 전하였으며, 610년에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회화도구, 종이, 묵, 벼루 그리고 방아를 만드는 법 등을 전하였다고 한다.이들은 각자 기량을 발휘하여 불교의 전파 및 사원건립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사원은 백제 공인의 기술을 전제로 하여 비로소 건립될 수 있었다. 그중에 비조사는 백제식 가람배치로 된 일본최고모두 고려척(고구려의 측량단위)을 척도로 하여 건축되었고 각 층의 높이와 너비의 합이 모두 같은 것으로 알려졌다.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알려진 669년 건립된 석타사의 3층석탑도 백제건축가들이 설계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탑이 소재한 시가현(가모군 일대)이 덴지천황(662~671) 당시에 백제 주민들이 대거 이주한 지역이라는 점과 옥개석이 날씬하고 매우 경쾌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는 전형적인 백제탑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야마토조정의 요구에 의해 백제대사가 661년부터 671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이 사원은 총국사로서 그 아래많은 국분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원이 가와치(오사카), 셋쓰(오사카), 오우미(시가), 시나노(나가노) 등에 있던 백제사이다.가와치의 백제사는 오사카 히라카타시에 터만 남아 있는데 다카노에 거주하던 백제 왕경복이 창건한 백제 왕씨의 씨사였다. 발굴 결과 동서쌍탑, 중문, 회랑, 금당, 강당 등의 유구가 밝혀졌다. 간무천황의 생모인 다카노노니이카사도 백제출신인 관계로 간무가 이 백제사에 토지를 바치기도 하였다. 그 옆의 백제신사도 백제왕씨의 씨신을 섬기는 제사처로서 유서를 간직하고 있다.그 외에 우리나라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조형물이 있는데, 그 세 귀퉁이에는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배치한 원숭이 모형의 석상이 있다. 충북 중원군에 소재한 석굴사원인 미륵대원에도 원숭이 석상이 존재한다고 한다. 특히 미륵사지의 것은 일본 나라현의 아스카촌에 소재한 긴메이릉 곁의 기비노히메미코히노구마묘 안에 있는 원석(원숭이 모양의 돌)과 계통적으로 연결되므로 그 조형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백제사, 법흥사와 같은 사원이 천황의 명령에 의해 건립되어 국가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해졌으며 불교의식이 궁중의식 속에 섰여 들어가면서 궁중불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3)불교전래의 의의불교전래 당시 일본의 상황은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는 시기였고, 종교적으로는 토착적인 자연숭배 왕궁의 건축물에도 응용되었다. 수형식 주거에 익숙한 일반 백성에게는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물 그 자체에 압도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들의 지배자가 갖는 궈위와 권능을 실감하게 되었을 것이다.7세기 이후 일본열도에서 수많은 사원들이 건립된 것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보다는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지금까지 왕권을 상징하던 전방후원분이 급격하게 소멸하게 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왕궈의 상징물이 고분에서 사원으로 옮겨졌으며, 그사회의 잉여가 고분의 조영이 아니라 사워의 건립에 투여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불교가 종교로서 이해되고 교리의 깊은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 다음 시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아울러 불교는 다양한 문화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으며, 그들은 불경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유학 경전은 물론이고 당이나 삼국의 선진적인 제도에 대해서도 상당한 시짓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불교교리만이 아니라 정치제도, 나아가서는 외교문제에도 조언하였다. 종이나 먹 그리고 문자의 사용도 그들의 활약으로 급격하게 보급되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회화, 의약, 건축술 등도 승려들이 전래한 지식에 힘입은 바 크다. 이처럼 승려의 존재 자체가 선진문물을 상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2.불교문화의 개화1)아스카문화불교의 전래와 그에 따른 각종 선진문물의 도입된 결과, 개화된 것이 아스카문화이다. 아스카시대는 일본 문화사상 획기적인 시대였다. 아스카문화는 6세기 후반에서7세기 중엽까지 기나이의 아스카를 중심으로 융성한 불교문화를 가리킨다. 고구려, 백제, 신락의 한반도 삼국과 중국 남북조의 강한 영향 아래 성립한 이 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세기 후반, 백제 등에서 파견된 승려를 비롯한 오경박사, 의박사, 재약사, 주금사 등에 의하여 불교, 유교, 역법,위학 등의 진보된 지식이 도입되었을 뿐만아니라, 건축, 예술, 일본열도에서 자생하지 않은 나무이고 한반도에서는 상당히 흔한 나무이다. 또 그 조각 형태가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의 양식ㄱ과 흡사하다. 전하기로는 603년 11월에 하타노가와카쓰가 쇼토쿠태자로부터 백제에서 온 불상을 받아 봉강사를 세워 봉안한 것이라고 하는데, 하타노가와카쓰는 그 출신지를 신라, 보다 구체적으로는 울진지역과 연관짓기도 하며, 백제에서 왜로 건너온 궁월군을 후손이라고도 한다.이처럼 일본열도의 불교전래과정에서 처음에는 백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사찰의 형태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이 나타나며 또 적지 않은 고구려계 승려가 일본열도에서 활약하였다. 또 반가사유상에서 보는 것처럼 신라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불상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승려들이 중국을 왕래하는 과정에서는 신라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불교전래 이후 일본열도의 불교문화가 개화하는 과정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모두 관여하였다 고 말할 수 있다.3.선진문물의 전래1)왕인과 금래재기『고사기』에 의하면, 4세기 중엽에 백제의 국주 조고왕(근초고왕)이 숫말 한 필과 암말 한 필 그리고 횡도와 큰 거울을 아지길사(아직기)에 맡겨 바치게 하였다고한다. 다시 어진사람이 있으면 추천하라고 하여 파견된 인물이 화이길사(왕인)이었으며, 그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바쳤다고한다. 흔히 왕인으로 알려져있는 이 인물은 후대에 문필을 담당하게 되는 후미노오비토 등의 조상이라고 한다. 또『일본서기』에 의하면, 진씨의 조상인 궁월군 한씨의 조상인 아지사주가 일족을 거느리고 백제로부터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또 서문씨의 시조인 왕인이 논어 및 천자문을 저하였다고 한다.왕인이 과연 백제인이며 4세기 중엽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는지는 의문이 남지만, 논어와 천자무으로 상징되는 한자 및 유학경전에 대한 지식이 백제를 통하여 왜에 전래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으로 생각된다.『고사가』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이러한 기사는 이 시기에 한반도로부터 활발한 이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회과학| 2004.08.25| 10페이지| 1,000원| 조회(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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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아담스미스 평가B괜찮아요
    목 차1. 아담 스미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2. 아담 스미스의 사회경제사상Ⅰ. 자연권Ⅱ. 경제인과 사회 및 경제적 자유주의3.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Ⅰ. 국부론의 개요Ⅱ. 분업론Ⅲ. 가치 가격론Ⅳ. 분배론Ⅴ. 자본 및 재생산Ⅵ. 생산적 노동과 자본축적4. 아담 스미스의 경제정책1. 아담 스미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아담 스미스(1732-1790)는 산업혁명의 전야인 1732년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했다. 14세때 글래스고우 대학에 입학했으며 거기서 그리스문학과 수학도덕철학 등을 공부했다. 중상주의자였던 허치슨으로부터 사회과학 일반에 관한 도덕철학을 수학했다. 1740년에 옥스퍼드 대학으로 옮겼는데 잉그랜드지역은 스코틀랜드지역보다 농업 및 기타 경제발전에서 앞서가는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데이비드 흄의 인간본성론에 영향을 받는다.25세가 되던 해 에딘버러에서 강사자리를 얻어 수사학을 가르쳤으며 26세에 글래스고우 대학에 교수로 취임했다. 29세에는 스승인 허치슨교수로부터 도덕철학강좌를 이어받았는데 25세에 취임한 이래 아담 스미스의 강의는 크게 4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제1부는 자연철학, 제2부는 도덕감정론, 제3부는 정의론, 제4부는 편으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제1부는 산학, 제2부는 윤리학, 제3부는 법학 그리고 제4부는 경제학으로 구성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그후 아담 스미스는 프랑스를 여행할 기회를 가져 중농학파 학자들 그리고 볼테르와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이후 아담 스미스는 약 10년 동안 국부론의 저술에 전념했으며 철학, 역사, 정치 등의 연구에 몰입했다. 1787년에는 글래스고우 대학의 총장이 되었으며 1790년에 서거하였다.아담 스미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정확히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기였다. 도시에서는 상인자본이 성장하고 있었고 농촌에서는 매뉴팩쳐가 새로운 생산형태로서 광범하게 등장하고 있었다. 아담 스미스는 매뉴팩처시대의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다. 분업에 기초한 제조소 형태를 띤 대규모 산업자 이러한 교환은 인간의 중요한 본성이다. 따라서 사회는 개인의 이기심에 의해 교환을 하는 교환체이다. 즉 사회의 기원을 개인이 갖고 있는 이기심에서 찾은 것이다. 사회는 개인주의적이고 따라서 합리주의적이다.한편 뒤에서 살펴보듯이 스미스는 분업으로부터 국부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법 속에서 아담 스미스는 사회전체를 서로를 위해 일하고 노동생산물을 상호 교환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노동사회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를 각 개인들이 노동하며 교환하는 사회라는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스미스는 공업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고 노동가치이론에 접근할 수 있었다.사회를 생산활동을 통해 서로 의존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노동사회로 간주함으로써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들과는 달리 상품과 화폐의 교환이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생산자들이 노동을 투입해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들을 교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또한 노동생산물의 교환 속에는 여러 생산자들의 생산활동이 숨겨져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경작자로부터 사회의 다른 계급(즉 지구와 공업계급)으로 상품이 이동하는 것을 자연의 물적 소재가 단순히 이동하는 것으로 보았던 중농주의자들의 편협성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 나아가 모든 생산자들이 서로 의존한다는 생각은 모든 생산부문이 동등한 지위에 있는 생산분야라는 인식을 갖게 했다. 여기서 중농주의자들이 무역에 부여했던 특권이나 중농주의자들이 농업에 부여했던 특권적 지위는 그릇된 것임이 분명하게 된 것이다. 각 생산분야 사이의 교환은 등가물의 교환이다.아담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와 낙관주의를 피력했다. 개인의 이익이 모든 경제제도의 기원이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 생각한 아담 스미스는 이를 매개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진보적이었던 경제적 자유주의사상은 이후 세이, 바스띠아 등에 의해 체제 옹호적인 것으로 변질된다.경제이론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사상은 모든 경제현상동자의 기교가 발전하고 공정간의 이동시간이 절약되며 기계의 발명 및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업에는 기술적 분업과 사회적 분업이 있다. 여기서 사회적 분업은 직업의 분화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적 분업은 개별기업간의 생산물의 교환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사회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기술적 분업은 자본주의사회에 고유한 것이다.또 사회적 분업은 생산수단의 소유가 분산 소유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함에 비해 기술적 분업은 생산수단이 한 자본가에게 집중되어 있을 것을 요구한다. 아울러 사회적 분업은 생산물의 사회적 교환에 의해 가능해지는데 시장교환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관계가 느슨한 모습이다. 이에 반해 기술적 분업은 자본가의 전반적인 지식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다.아담 스미스는 고로 분업은 사회적 형태가 아니라 그 물적-기술적 장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개별기업들간의 사회적 분업과 기업내부의 기술적 분업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다. 즉 분업에 의한 국부의 증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적 분업과 사회적 분업의 차이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국부를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아담 스미스는 생산력을 구성하는 요소를 생산도구와 생산경험(노동숙련)에서 찾았다. 생산력이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는 자연의 본질이나 자연의 힘과 인간의 관계인데 이런 인식에서 조직적인 힘 즉 분업을 중시했다.Ⅲ. 가치 가격론아담 스미스는 분업의 원리로부터 출발해 가치이론을 새롭고 중심적인 위치에 설정했다. 아딤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들-특히 페티-에서 미처 발달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했던 개념을 받아들여 노동 가치이론을 더욱 발전 시켰다. 노동가치로의 전제가 된 사고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분업에 기초한 사회에서 각 개인들은 타인을 위해 생산물을 생산하고 그 생산물들은 교환관계를 통해 자신의 생계에 필요한 생산물로 돌아온다.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획득하는 것은 특정 생산자가 실제로 치설이 일치했지만, 문명사회 즉 자본축적과 토지사유화가 된 자본제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지대와 이윤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노동(즉 노동력)을 고용함으로써 생기는 자본과 노동력의 교환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물의 가치가 그 생산에 지출된 노동량보다 훨씬 더 크게 나타나는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아담 스미스가 결국 생산비이론으로 빠지게 된 이유도 이러한 한계 때문이었다.그리하여 아담 스미스는 노동에 대한 임금, 자본에 대한 이윤, 토지에 대한 지대가 실질가격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노동만으로는 가치를 결정할 수 없고 임금, 이윤, 지대가 실질가격의 구성요인으로 파악하여야 한다고 인식했다. 이것이 생산비설이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가치구성론이라고 부르며 피에로 스라파는 합산이론(adding up theory)이라 부르고 있다.결국 생산비설로 빠짐으로서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렇지만 아담 스미느는 임금, 이윤, 지대의 실질가치는 역시 지배노동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함으로써 노동가치론을 전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지배노동가치설은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로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어떤 상품의 지배노동가치는 결국 임금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임금에 의해 지배노동량의 크기가 결정되고 이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고 이 가치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변화하는 기준인 임금을 가지고 변동하는 상품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되므로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즉 가격인 임금으로 가격을 설명하는 순환론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이후 지배노동가치설은 맬더스와 세이 등에 의해 계승되었고 투하노동가치설은 리카아도에 의해 계승되고 마르크스에 의해 완성되게 된다.왜 시장가격은 진실가격에서 벗어나는가가 문제제기의 핵심이다. 아담 스미스는 생산비(임금, 이윤, 지대)로 자연가격을 설명했다. 이 자연가격은 통상적와 자본가의 교섭에 따라 임금은 결정되지만 자본가의 힘이 더 크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자연율은 최저생계비이하로 내려갈 수는 없는데 이것이 바로 임금의 자연율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생존비설(subsistence theory of wage)이다. 수요의 증가에 따라 임금의 시장율은 자연율을 초과할 수도 있다고 아담 스미스는 보았다.한편, 아담 스미스는 노동에 대한 수요는 노동자에게 충당될 수 있는 기금에 의해 결정된다고 함으로써 임금기금설(wage fund theory)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기금은 자본축적내지 국부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결국 종합해볼 때 임금의 자연율은 생존비설로 설명하고 시장율은 임금기금설로 설명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임금생존비설은 이후 리카도에 의해 계승되어지고 임금기금설은 맬더스를 거쳐 밀(나중에 포기)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고전학파 학자들에게는 임금기금설적 요소가 있다.이윤은 원료나 임금을 선대한 자본가에게 대한 대가라고 인식하였다. 착취로 본 것은 아니지만 결구 착취설로 연결되는 착취설의 맹아를 보여준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이윤의 시장율이 결정되는 원리를 명백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단지 수요와 공급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파악했다. 즉 자본이 많으면 이윤은 낮아지고, 적으면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본의 증가가 이루어지면 임금의 시장율은 오르고 이윤의 시장율은 내리는 역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는 리카도에 의해 명백하게 정시화 된다.이윤의 자연율에 대해서도 명백한 설명을 하지는 못했다. 시대와 산업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파악했다. 다만 이윤율은 이자율과 비례하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따라서 이윤론은 제대로 이론화 되지 못했다.아담 스미스의 지대론은 세 개의 요인을 병열적으로 제시하는데 그치고 근본적인 원인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스미스는 지대론 속에는 착취설적 요소와 절대지대론적 요소 그리고 차액지대론적 요소가 섞여 있다. 그리고 아담 스미스는 지대가 임금, 이윤과는 다른 방법다.
    경영/경제| 2004.08.25| 12페이지| 1,000원| 조회(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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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계열] 스위스의 문화와 역사
    스위스 ( 유럽 )SWITZERLANDI. 자연 환경II. 역사III. 정치IV. 경제V. 문화와 생활상I. 자연 환경중유럽에 속해 있는 연방 국가 스위스의 국토 면적은 4만 1293km2 이며 총인구는 690만 명이다.스위스의 공식적인 국가명은 라틴어로 콘페더라치오 헬베티카(Confederatio Helvetica)이고 줄여서 CH라 표기한다(스위스의 모든 차량에서 국가 표시 CH를 볼 수 있다).북쪽은 독일, 서쪽은 프랑스, 남쪽은 이탈리아, 동쪽은 오스트리아·리히텐슈타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베른(Bern)으로 13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 외의 주요 도시로는 취리히, 바젤, 제네바(쥬네브), 로잔 등이 있다.연방국은 26개의 칸톤(스위스의 주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칸톤은 인구 1만 3500명(아펜젤이너호덴)에서 115만 명(취리히)까지 인구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면적도 37.2km2(바젤)에서 6069.4km2(베른)까지 다양하다.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몽블랑(이탈리아어로 몬테 비안코:4807m)은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 3국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스위스의 대부분은 알프스의 고산지인데(알프스가 국토의 60%) 서쪽과 남쪽은 산맥이고, 북쪽은 평야 지대로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II. 역사스위스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민족은 게르만족 갈래의 켈트족 가운데 헬베티족으로 B.C. 107년 로마에 대항한 기록과 B.C. 58년 알프스 지역을 지나 프랑스로 진격하는 로마군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이후 로마에 정복당하여 오늘날의 스위스 지역은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동부 지역은 레에티아(Raetia) 주에, 서쪽은 벨기카(Belgica) 주에 속하였다.5세기에 론 강 계곡에 부르군트 왕국을 포함해서 서부 스위스의 대부분이 성립되었다. 동쪽으로는 알라만 공국이 위치해 있었고, 동남부의 산악 지대는 그 당시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 부르군트족은 라틴화되고 알라만족은 은 왕이 없는 대공위 시대(1254~1273년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1세가 황제로 선출될 때까지의 기간)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의 왕들은 작센의 황제나 호엔슈타우펜 왕국과 같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고 왕권은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의 결과로 매우 약화되어서 점차 명칭뿐이고 형식적이 되었다. 일부 지역의 독자적인 지배는 점점 영주들의 손에 넘어갔으며――공작, 백작, 주교, 수도원장, 많은 기사와 도시들의 지역 공동체――이런 상황에서 스위스의 주(칸톤)들이 성립되었다.13세기에 스위스는 다양하고 정치적으로 얼룩진 양탄자와 같았다. 바젤과 콘스탄츠는 자치를 얻은 제국 도시였고 그 외에 몇 개의 자치 공동체, 작은 백작령, 수도원령의 다수가 공동체 내에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황제의 특권을 받았다.――그것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요구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였다. 지역 공동체에서는 일요일마다 병역 복무 능력이 있는 남자들이 광장에 모여 공동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회의를 하였다(이런 민주주의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이웃 영주들의 팽창욕을 막기 위해서 지역 공동체 여러 개가 동맹을 맺었다. 1291년 우리(Uri), 운터발덴, 슈비츠가 연방으로 결성되었다. 이 연방은 합스부르크가와 갈등 관계에 빠지는데, 프리드리히 쉴러의 `빌헬름 텔'이 잘 묘사하고 있다. 이는 1332~1536년 사이에 계속 확장되었고 당시의 영토 경계는 미미한 변화를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고수된다. 당시의 알프스 주 지역 공동체인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은 역사적으로 스위스의 형성에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스위스는 그들 스스로 창안해 낸 고유한 공화적 헌법을 통해 이웃 국가들과 구별되었고, 16세기 초의 종교 개혁은 스위스의 특성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종교 개혁은 취리히(츠빙글리)와 제네바(캘빈)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주로 중부 평지 지방에서는 신교(프로테스탄트)를 믿었으며, 산악 지방의 스위스 동맹 주들은 카톨릭을 믿었다. 츠빙글리가 이끄는 신교파와 산악 지방의 카톨릭 동맹 깨고 헬베티아 공화국을 세워 중앙 집권 제도로 제도를 바꿔, 개별 연방주에 비하여 중앙 권력이 강해지게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많은 주들이 불신에 찬 태도로 따랐다. 왜냐하면 주들은 크기와 인구뿐만 아니라 언어와 종교, 인구 구성에 있어서도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1845년 카톨릭 주의 분리파가 형성되었고, 분리파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새 헌법이 통과되었고 이 헌법은 교회 정책을 각각의 주에 일임하고 그와 더불어 카톨릭 주의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다.스위스는 1847년 이후로 더 이상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래된 중립 정책이 오늘날까지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앙리 뒤낭(Henri Dunant)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중인 1859년 솔페리노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보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지원하는 국제 적십자를 기초하였고 제네바에 설립하였다. 1901년 앙리 뒤낭은 첫번째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1875년 독일의 우편 장관 슈테판(Heinrich von Stephan)은 만국 우편 연합(UPU)을 설립하였다. 스위스가 중립성을 보장했기 때문에 소재지로 베른이 뽑혔다.1차 세계 대전에서도 스위스는 중립을 지켰다. 스위스는 다른 민족 국가들보다 당시의 민족주의 해악에 덜 영향을 받았다. 독일어권 스위스인들은 독일, 프랑스어권 스위스인들은 프랑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공화국 전통이 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스위스라는 국가 의식을 만들었고 그것은 1차 세계 대전의 어려운 시기 동안 스위스를 지탱시켜 주었다.연합군의 승리 이후에 유럽의 새로운 형성 과정에서 국제 연맹이 결성되었고 제네바가 그 소재지가 되었다.2차 세계 대전에서도 스위스는 중립을 유지하였다. 독일군 나치 친위대(SS)로부터 도망쳐 피난처를 찾는 피난민들로 스위스의 상황은 매우 격동적이었다. 당시에 “배가 꽉 찼다(Das Boot ist voll)”는 독일어가 유행하였을 정도로 스위스는 많은 피난민을 ) 그 주를 대표하게 되며, 소수의 주민을 대표하는 주의 의원들은 주민의 의견 대부분을 수용할 수 있으나, 많은 수의 주민을 대표하는 주의 의원은 주민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여 표출할 수 없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각 주는 연방 탈퇴와 각 주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금지하고, 헌법에 규정된 것 외에는 완전한 주권을 행사한다. 또 몇몇 주에서는 란츠게마인데라는 직접 민주 정치가 행해지는데 4월 마지막 주나 5월 첫째 주 일요일날 주민들이 모여 거수로 주지사 등을 선출하고 주 법을 표결하기도 한다.스위스는 20개의 완전한 주와 6개의 반주(半州:아펜젤이너호덴, 아펜젤아우서호덴, 바젤란트, 바젤슈타트, 니트발덴, 오프발덴)로 되어 있고, 각 주에는 주의 헌법과 주 의회 그리고 주 정부가 있다(아펜젤 주에서는 종교 개혁시 평야 지대에서 신교를, 산악 지방은 카톨릭을 믿어 나뉘고, 바젤 주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혁명 세력이 바젤 시를, 혁명 반대 세력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어 나뉘었다).스위스는 연방 대통령에 의해 대표되는데 대통령은 매년 12월에 연방 의회에서 새로 선출한다. 정부는 자유 민주당(FDP), 사회 민주당(SDP), 기독교 민주주의 국민당(CUP) 그리고 스위스 인민당(SPP)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밖에 녹색당 등 환경 보호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7명의 장관이 4년마다 각 주에서 선출되어 연방 의회에서 결정되고, 연방 대통령 아래에서 일한다.IV. 경제1인당 국민 소득(3만 6500달러)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관세율이 세계 최저로 수입 제한이 없고 통화 외환 등에도 제한이 없는 스위스는 원자재와 식량을 수입하고 완성품을 수출하는 선진국형 무역 형태를 띠고 있다. 매혹적인 알프스 경관은 스위스를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의 하나로 만들어 체르마트, 다보스, 쟝크트모리츠 등의 산악 휴양지, 루체른 호, 루가노 호, 마조르 호 등의 호수와 루체른, 인터라켄, 로잔, 로카르노 등의 호반 도시에 전 세계의 관광객이 찾아와 관광 수입으로 무역 수지의 은 주머니칼로 인정받고 있다.또 스위스의 은행은 비밀 엄수로 유명하며, 스위스 프랑은 안정된 통화로 인정받아 외국 자본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하여 세계 금융과 은행업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V. 문화와 생활상1. 언어와 종교스위스인 가운데서 약 60%는 모국어로 독일어를 사용하며, 약 30%는 프랑스어, 약 8%는 이탈리아어, 3%는 레토로망스어를 말한다. 네 가지 언어 모두가 공용어이다.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44%는 개신교를, 47%는 카톨릭을 믿는다.2. 예술중세와 근세 초기에는 예술 애호가에 의해 건축과 회화, 연극, 발레 같은 조형 예술이나 상연 예술이 장려되었고, 예술가들은 영주와 성직자 다음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위스에 위치한 합스부르크로부터 이름이 유래된 합스부르크가는 강력한 영주들이었으며 동시에 스위스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들이었으나 그들이 오스트리아로 옮긴 후 연방 공화제로 바뀐 다음에는 세금을 사용할 때 국민들의 동의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지원이 상대적으로 저조하게 되었다.한번쯤 스위스 경치를 구경한 사람은, 인상적인 산의 경관 한가운데 아름다운 마을을 기억에 담아두게 된다. 스위스 마을에 관한 그림은 높은 탑을 가진 마을 교회로 많이 나타난다. 또한 튀어나온 지붕, 나무로 된 창덧문, 발코니가 있는 집들은 매력적이다. 청결은 스위스의 미덕에 속하고 독일어권 스위스 마을들은 이런 방식의 전형으로 손꼽힌다.스위스의 정치적 중심은 취리히, 바젤, 베른, 제네바였으며, 이 곳에서 스위스의 문화 생활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 것은 궁중의 사치스러운 예술이 아니라 스위스인의 미덕, 신중, 검소를 높이 평가하는 예술이었다.독일 제국 수상 아돌프 히틀러는 좌절한 미술가라 할 수 있는데 두 번을 오스트리아 예술 학교에 입학 신청서를 냈으나 거절당했다. 후에 그는 제국 수상으로서 `아리아 예술'을 정의하였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변절된 예술'로 간주하여 박물관에서 떼어내게 하였다. 이렇게 떼어진 작품들은 스위스로 가다.
    사회과학| 2004.08.25| 8페이지| 1,000원| 조회(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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