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사 O. T.· 조선시대부터 한국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초기에는 한글보다 한자로 기록된 자료가 더 많다. 물론 기록을 선교사들이 영어로도 했음.· 韓國· 한국기독교라고 할 만한 기독교가 존재했는가? 조선이라는 또 다른 명칭이 있는데 왜 굳이 한국이라는 명칭을 쓴 것인가? 교회사라는 표현이 있는데 왜 기독교라는 표현을 했는가? 일제하라는 말을 왜 굳이 쓴 것인가?· 한국교회란 무엇인가? 한국이란 무엇인가? 한국교회사는 세계교회사의 흐름과 같이 하지만, 매우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어떠한 종교라도 그 문화의 특성을 달리하는 지역에 그 복음이 심겨지고 성장하고 열매 맺고, 꽃이핀다는 것은 보편성도 있지만 특수성 또한 함께 하고 있다.→ 보편성 + 특수성◆ ‘기독교(基督敎)’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뜻한다.· 언제 시작했을까? 이것을 추적하는 것이 역사다.· ‘Christianity’이것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헬라어 Judaismos(유대인의 생각과 관습을 포괄하는 단어) 따라서 ‘Christianismos’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습, 생각, 습관이라고 유추할 수 있음. 이 단어가 Christianity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과 생각과 관습(Christianity): 폭넓은 개념이지만 이 개념이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회, 프로테스탄으로 구성된 것이다.◆ ‘교회(敎會: 가르치는 모임)’: Church· 에클레시아: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 한문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 → 가르치다라는 동사 안에 벌써 이미 계급이 생김. 더 나아가 권력이 생긴 것이다.※ 에클레시아(헬라어)라는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교회(에클레시아를 해석한 한문)’의 의미 차이를 설명하시려고 한 것 같음.· 교회는 원래 처음 해석될 때 공회(公會)라고 해석됐는데, 에클레시아에 가장 근접한 해석이었음· 솔직히 19세기에 교회라는 말로 축약할 수 없는 많은 기독교들이 존재했다.· 한국 기독교는 교육과 의료로 출발했다.∴ 서로 문화가 달랐을 뿐인데 말이다. 아마 목사님도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조심히 해본다.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 부근까지 따라 올라갔는데, 서양선의 구조상 해안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박규수는 이들과 대화를 하려고 하지만 나라에서 허가가 되지 않는다. 이때 로버트 토마스는 순교(1866)를 하게 된다. 그때 그가 뿌린 한문성경을 얻게 된 박영식은 집에 벽에 붙인다. 박춘권은 나중에 안주교회의 영수가 된다. 박춘권의 외조카 이영태가 박영식의 집에 놀러갔는데, 붙어있던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아 예수를 믿기 시작한다.◈ 존로스 / 존 매킨타이어본래는 산둥성의 중국 선교사였다. 거기서 알렉산더 윌리암스가 이들에게 조선으로 가라 권유한다. 한국인 청년들을 만나 한국말을 배웠는데 이때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라는 네 사람의 의주 출신(만상-상인집단:목숨걸고 관군에 밀무역을 함)이 한글을 가르치기(알바)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 공부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 4명의 청년들은 1876년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게 된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지 10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서상륜, 서경조 : 만주황해도 출신으로 1879년에 세례를 받는데, 이들이 성경을 번역하는데 처음에는 현토한한 성경이다. 한자에 한글로 토시가 된 성경이다. 이것은 한글 토시가 필요 없던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만든 성경인 것이다. 성경이 그냥 번역됐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대상으로 그 사람들이 읽게끔, 생각하게끔, 더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적혀있는 성경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엄청나고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이들 모두가 선교사가 들어와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 나가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수정일본에는 이수정이 있었다. 신사유람단의 안종수가 일본의 츠다센이라고 하는 일본인 농악자에게 가서 근대 농업을 배우려고 간 것이다. 그런데 츠다센은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그는 를 낳게 되는 하나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Ⅳ. 초창기의 수용동기와 신앙양태(기독교문명개화론)? 교육과 의료의 선교 전략이 초창기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신앙적으로 전환점이 됐는가?? 초창기 한국 기독교의 입교 동기1) 서민들의 입교 : 첫 번째는 1895~1896년, 1905~1907년에 굉장한 급증이 있었다. 이렇게 급증한 이유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는데 왜 일반 서민들에게 영향이 있었을까? 그것은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청일 전쟁의 전쟁터는 우리나라였다. 교회라는 장소는 서방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청군이던 일본군이던 손을 대지 못했다. 때문에 가장 1차적인 이유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교회로 들어간 사람들의 수가 급증한 것이다. 반면, 러일전쟁은 실제적으로 차이점이 있다. 전장은 우리나라가 아니다. 두 번째로는 탐관오리로부터의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신문명의 효과(인간으로써의 존엄함을 인정받는 것)이다. 신문명에서 주는 평등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문화로 다가왔다. 결국 사람들은 관념적이었던 ‘사랑’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러한 문화를 접촉했기 때문에 모일 수 밖에 없었다. 네 번째로는 전체 사회가 패닉 상태였다. 전쟁 속에 있었으며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목숨이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 속에서 절대자에 대한 희구가 일어난 것이다.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와 같은 서북지역)이 주로 많았던 이유가 그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는 ‘기복신앙’과 관련되어 있다.2) 지식인들의 입교 : 서민들의 입교가 이뤄진 지역은 서북지역이 많았다. 지식인들의 입교가 주로 이뤄졌던 지역은 서울 경기 지역이었다. 서민들에게 영향을 준 교파는 장로교,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준 교파는 감리교이다. 지식인들이 입교한 이유로 첫째는 신문명에 대한 기대다. 지식인들이 볼 때 조선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이다. 신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 개최했는데, 준비 모임을 했다. 그 추운 겨울 12월에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길선주 장로)(조선 3대 부흥사-김익두, 이영도)가 준비 모임을 인도하는 도중, 사람들의 반응이 바뀌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1907년 풍전등화와 같은 우리나라에 길선주는 “왜 국가가 풍전등화의 상황인줄 압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죄악 때문입니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묵시 문학을 풀어서 설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이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깨우치게 됐다. Awakening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여러분들이 왜 지금 같은 모습이냐? 여러분의 죄악이 여러분들을 이 모습으로 만들었다.” 즉, 국가적 위기, 개인적인 자신의 모습의 상실(존재)에 Awakening이 일어났다. 이런 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중소 사경회를 하기로 했는데, 전부다 대사경회가 됐다.이때 당시 찰스무디의 SVM의 후예들의 특징은 회개하고 자복할 때, 교인들 앞에서 자기 체험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런 영향을 받은 대사경회에 참여한 이들은 자기 체험을 이야기하다가 도무지 집회가 진행이 되질 않았다. 길선주 장로는 통회하고 자복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한다. 그것이 ‘통성 기도’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야 하는데 멀리서 온 사람들은 집에 가지 못하고 교회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지내며 준비를 하는 모임이 ‘새벽 기도’로 발전되고, 하나님에게 강렬히 은혜받고 싶다는 사람들은 산에 올라간다. 그것이 ‘산상철야기도’다.일주일 동안 평양에 모인 사람들이 뒤집어 진다. 평양이 뒤집어지자, 평양 시내에 있는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집회 인도를 요청한다. 똑같이 불이 붙게 된다. 1906-1907년의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람들은 먼저 나와 청소, 밥, 준비, 섬김) 등 삶의 양식들이 변하게 된다. 청년 학생들은 이 뜨거움을 혼자 간직할 수 없었기에 전도지를 만들어서 전도의 불이 일어나게 된다.평양 뿐이 아니라 이제 서울. 또한 교회가 통곡 기도회를 했다.3) 임시정부 수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독립 선언문 찌라시에 실려있는 이규갑 목사의 한성 임시 정부가 있었는데 그 생각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다.서재필이 주도한 필라델피아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 또한 기여했다.이와 같이 기독교가 당한 피해는 예배당 파괴가 12곳, 학교파괴가 8곳, 6명의 기독교인이 사망되며, 3,800명이 체포(3·1운동의 총 체포자의 45%에 해당)된다. 목사, 장로만 140여명이다. 3·1 운동은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민족이 일치되어 독립 운동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타국이 봤을 때는 이 민족은 독립을 할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도록 공헌했다. 이와 같은 평화적인 방법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민족 대표 안에서의 기독교인들이 있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 3·1 운동의 성격을 짓는 것에 비폭력 비저항, 임시정부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독교인들의 공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천도교인들 보다 기독교인들이 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다.Ⅱ.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비판과 기독교의 대응? 강의를 들어가며3·1운동 기간 일본의 조선 통치 방법은 무단 정치였다. 그리고 무단 정치가 막을 내리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하면서 이른바 ‘문화통치’가 시작된다.문화란 다양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생활양식), 풍속(세식풍속), 도덕, 역사, 창작의 결과물 등이다. 문화의 요소는 인간의 행위와 통념, 공감대 등이다. 문화는 글로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 인간들만 갖고 있는 어떠한 통념, 공감대, 사고를 글로써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문화통치문화통치를 하면서 한국 기독교의 방향이 많이 바뀌게 된다. 그러면서 결국엔 한국 기독교만의 개성을 잃어버리게 됐다. 그 개성은 기독교가 어떤 문화보다도 앞선 것 같은, 세련된 것 같이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그러한 입지를 밀어낸 것은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는 시대적인 요청이었던 민족주의와 거의 같은 의미로써 작용했다. 제등
종 교 개 혁- 중세 신학을 갈아엎어라--목차-1. 종교개혁이란?2.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배경1) 카톨릭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 들2) 극복하고자 한 방향3) 종교개혁의 역사3. 종교개혁의 중심 인물1) 루터2) 루터 외 인물들4.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파급효과1) 독일교회2) 로마 카톨릭3) 그 외 서부유럽5. 참고문헌1. 종교개혁이란?16세기 서방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일어난 종교혁명이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내부의 부정과 부패를 개혁하여 초대교회의 원형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전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사상적인 개혁자들이었고 사보나롤라 같은 이는 도덕적인 개혁자였고 버나드나 타울러나 엑카르트는 신비적인 개혁자들이었다.이들에 의하여 준비된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기 위하여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강조하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 그리고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기본 원리로 하여 그리스도교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루터나 칼뱅은 이러한 운동을 보다 더 효과 있고 광범하게 전개하였을 뿐이다.2.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배경종교개혁 직전의 시대는 중세의 전성기와는 아주 다르다. 이 시기에는 ‘평신도적 원리’가 중요한 것이 되고 또 성서주의가 교회의 전통과 대립되기 시작한다. 잘 알고 있는대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의 현관에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 등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인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원인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부패였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면죄부(indulgentia)가 있었다.11세기 말 십자군의 참가 독려를 위해 행해졌던 면죄부는 14세기에 이르러서 교황의 성당 건립과 병원 건립 등 그러한 일을 함에 있어서 돈을 거두기 위해 팔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직자의 부패와 맞물려 질병과 재앙이 가득한 세상에서 연약한 인간들은 현세에서의 건강과 내세에서의 구원을교회는 면죄부를 만들어 그 원망에 대응했으나 이것에도 금전적 희생이 필요했다. 이른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매매가 성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회개의 성례전 그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2) 극복하고자 한 방향(1) 오직 성경! (sola scriptura!)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서에 있다는 뜻으로 로마 가톨릭의 교권주의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진리의 판단기준은 성서이지, 교회가 아니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카톨릭의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 이기도했다.루터는 교황을 절대군주처럼 보는 교황주의와 공의회주의) 입장 모두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어떠한 인간 존재도 신적 권한의 대리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황이 하는 식으로 자기의 신적인 법에 올려놓는 것은, 현실에서는 악마적 주장이며, ‘반그리스도적’주장이라고 말했다. 루터에게서 교회는 하나의 머리를 가지는데 그 머리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그 자신이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만이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2) 오직 믿음! (sola Fide!)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터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코 인의를 잃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개념은 가장 많이 오해를 받아 왔는데 오직 믿음은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밖의 어떠한 태도도 신의 은총을 무너뜨리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에게서 신앙이란 신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3) 오직 은혜! (sola gratia!)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느님의 선물로써 하느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믿음"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그것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트라스부르에 감1540칼뱅, 또다시 제네바에 귀환1545트리엔트 공의회) 개시됨(1563년까지)1546루터 죽음1572성(聖) 바르톨로뮤의 학살1620메이 플라워호(號)에 의한 필그림(청교도의 일파)의 신대륙 이주1640청교도혁명개시됨3. 종교개혁의 중심 인물1) 루터(1) 생애루터는 1483년 11월 10일에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인 한스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가레트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루터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기 원하였고 루터는 1491년 3월부터 1497년 봄까지 만스펠트에서 1497년 봄부터 1498년까지 마그데부르크에서, 그리고 1498년부터 1501년까지 아이제나하에서 학교를 다녔다.루터의 집안에서는 루터가 법률가로 출세하기를 바랬지만 법률 공부를 하던 어느 날 교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날씨가 궂고 벼락이 내리쳤다. 그때 루터는 넘어지면서 수도사가 되기로 맹세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루터는 수도원에서 생활을 하게된다.수도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중세 교회가 제시한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 그는 첫째로 종교적 행위의 구원방법을 부정하였다. 그는 고해성사 또한 인간의 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 번째로 신비주의적 방법을 부정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루터는 로마서에 있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신칭의 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이 즈음에 면죄부 사건이 발생한다. 면죄부는 원래 고해성사를 할 때에 사제의 사죄선언 후에 현세에서 받아야 할 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테첼이 면죄부는 내세적 벌과 죄까지도 면해 준다고 설교하면서 루터는 이 문제에 대해 95개 조문을 작성하였고 95개 조문을 1517년 10월 31일 오후에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당 문 앞에 붙인다. 이로써 종교 개혁이 시작 하게 된다. 루터의 95개조의 파문이 확산되자 하이델베르크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들의 총회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으며, 셋째 아들 파울은 의사가 되었다.1525년에 저술한 『상업과 고리대금』에서 상업을 필요악 정도로 취급하지 않고 기독교적 방식으로 실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후에 츠빙글리와 성찬식 논쟁에 들어갔다. 이때 루터는 성찬에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는 임재설을 주장하였다.1526년에는 군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군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저술하였고 1530년에는『시편 82편 주석』을 저술하였다. 루터는 1535년 창세기 강의를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은유적인 해석을 비판하고 역사적 해석을 강조하였다. 1543년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를 저술하였다. 루터는 이 저서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루터는 1546년 2월 18일 그의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2) 사상적 배경① 루터와 인문주의인문주의는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서의 해석에서 중세 신학자들의 사중적 해석보다 인문주의자들의 문자적 역사적 해석방법을 더 낫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성령이 의도한 문자적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는 원리를 가지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서해석을 시도했다. 또한 루터는 인문주의자들의 역사비평 받아들여 그것에 근거하여 교회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루터는 인문주의자들이 편집한 헬라, 라틴저서들을 사용했다. 교육에 있어서도 루터는 인문주의자들과 같이 학교를 세우는데 힘썼다. 하지만 루터는 인문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지지 않았다. 그는 인문주의가 가지고 있는 펠리기우스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② 루터와 스콜라주의루터는 스콜라주의적 배경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다. 루터는 특히 오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보편자 논쟁에서 오캄의 유명론의 입장을 선호했고, 교권과 속권의 분리 사상, 그리고 신학과 철학의 혼합을 비판하고 성서의 권위를 강조한 점에서도 오캄을 따랐다. 하지만 그는 오캄주의의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야 하나님이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비판하고 사랑의 하나님의숨어 있는 ‘자기의 계시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 과 영원히 우리의 미지의 분이고 신비하고 악의가 있는 존재인 ‘자기의 계시 뒤에 있는 하나님’ 을 말한다.루터의 율법의 용도에 있어서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야만적이고 사악한 자들을 억제하는 용도이고, 둘째는 신학적 혹은 영적 용도인데 이것은 범죄를 증가시키는데 이바지한다. 세 번째는 악을 책망하고 비판하고 생명을 세우는 것이다.의에 대해서도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의는 세상의 왕국에 대응하는 의로써 시민적 정직성과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둘째 의는 사탄의 왕국에 대응하는 의로써 자기의를 말한다. 셋째 의는 영적 왕국에 대응하는 의인데 이 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외래적인 의와 이 외래적인 의와 더불어 우리가 행하는 의로 말할 수 있다.루터는 교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복음주의적인 참된 교회와 그에 반하는 거짓교회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불가시적인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의 사랑과 교제와 같은 영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루터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칼빈처럼 자신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서를 저술하기 않았기에 그의 신학사상에서 통일적 원리를 찾아려는 시도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나 통일적 원리를 찾아볼 때 인간중심적 종교에 반한 신 중심적 종교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올라가는 상승운동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는 하강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2) 루터 외 인물들(1) 칼빈1509년 7월 10일 파리 동북방에 소재한 느와이용(Noyon)에서 5형제 중 둘째로 출생하였고 부친 제라드(Jhon Gerad)는 법률가로 감독.서기로 근무 했고, 모친은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1523년 8월에 파리 대학에 입학.라틴어,철학,인문 과학을 공부함. 졸업 때에 법과를 전과하였다. 1533년 11월 1일에 친구 니콜라스 코프(Nicholas Cop)가 파리 대학 학장으 로 취했다.
칼 마르크스목 차Ⅰ.들어가는 말Ⅱ.배경 및 생애와 저작1.사회적 배경2.사상적 배경3.생애와 주요저작Ⅲ.사상1.마르크스의 유물론2.마르크스의 변증법3.마르크스의 사회사상Ⅳ.비판점Ⅴ.나가는 말(우리의 과제)Ⅰ. 들어가는 말)마르크스의 사상은 19세기 독일 사회의 시대 상황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칸트와 헤겔이 살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19세기 중반 독일 사회는, 혁명을 통해 근대 시민사회를 건설해나가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여전히 낡은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였다. 마르크스도 젊은 시절에는 칸트와 헤겔처럼 계몽주의적 전통을 계승하여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이성적 시민사회의 건설을 추구했다. 그러나 독일 시민 계급이 낡은 봉건 체제와 타협하여 혁명 의식을 상실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시민 혁명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는 노동자 계급(Proletariat)을 통해 낡을 질서를 타파할 새로운 세력을 발견한다. 칸트, 헤겔로부터 이어지는 독일의 계몽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회주의 사상을 결합하여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독자적인 역사철학 이론을 전개한다.Ⅱ. 배경 및 생애와 저작1. 사회적 배경)마르크스가 활동하였던 시대적 상황의 특징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먼저 산업혁명의 시대,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 마지막으로 제국주의 시대이다. 산업혁명 이후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면서 임금 노동자들로 급속히 변해 갔다. 도시의 인구는 급증했지만 도시 동자들의 생활은 비참 그 자체였다. 특히 1840년대 초 산업이 가장 안정적이라는 영국의 공업도시라 해도 노동 인구의 절반이 실직 상태에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이성의 지위가 최고로 높아졌지만 인간의 이성은 세상을 ‘약육강식의 힘의 시대’로의 전환을 가져오고 말았다. 소수의 가진 자, 힘센 자가 다수의 못가진 자와 약한 자를 사정없이 지배하고 착취하는, 그야말로 “욕심이 지배하는 시대”로 세상이 바뀌고야 말았다였으며, 성공한 법관으로서 이성의 힘을 깊이 신봉한 온건한 자유주의자였다. 칼 마르크스는 안락하고 꽤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트리어의 고등학교에서 고전을 매우 강조하는 자유주의 교육을 받았다.1835년 마르크스는 본(Born)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웠다. 1년 후 본을 떠나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는 처음에는 법철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나중에는 본래의 철학에 빠져들었다. 불가피하게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의 저작과 만나게 되었고, 헤겔 좌파인 브루노 바우어와 절친한 친구가 되어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1841년 그는『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에 대한 연구』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그리스 유물론의 대표자인 데모크리토스와 유물론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자기 인식의 내면적 문제를 고민한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이 시기에 이미 다루었다는 점은 마르크스 사상이 서양 고대 철학 사상에 근원하고 있다는 점과 아울러 이미 그의 관심이 유물론적인 것에 있었다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마르크스는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며 자본주의의 병폐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1843년 관헌에 의하여『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8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와 『독불년지』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부유한 섬유공장 주인의 아들이며 일평생 자신을 경제적, 정신적으로 후원하게 되는 엥겔스(Friedrich Enge 의해 확증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의 배후에 신비롭고 알 수 없는 것의 영역이 있다고 주장한다.2) 유물론(1)유물론은 세계는 그 본성상 물질적인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인 원인들의 기초 위에서 생성되고 물질의 운동법칙에 따라 생성 및 발전한다고 가르친다.(2)유물론은 물질이 정신의 외부에 그와 독립된 것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라고 본다. 나아가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과 분리되어 존재하며 물질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가르친다.(3)유물론은 세계와 그 운동법칙이 알 수 있는 것이며, 설령 물질적 세계의 많은 것들이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물질적 세계의 외부에 놓여 있는 알 수 없는 실재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절대적으로 유물론을 취한다는 점, 그리고 관념론의 어떠한 논점에 대해서도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었다. 그에게 있어 종교는 민중으로 하여금 사회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C. 기계론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은 ‘기계론적’인 것이 지배적이었다. 관념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초기 유물론자들 또한 변화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존재를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관념론자들이 정신의 영역에서 영원하고 불변적인 것을 추구하는 반면에 유물론자들은 그러한 것을 물질적 세계 자체에서 찾았다. 즉 그들은 그것을 궁극적인 물질적 미립자인 원자 가운데서 찾았던 것이다. 그러한 유물론자들에 있어서 세계의 모든 변화들은 원자들의 운동과 상호작용에 의해 기계론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기계론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약점과 한계를 지녔다.)(1)기계론적 유물론은 세계가 기계와 같다면 누가 그것을 만들었으며 누가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2)기계가 움직이는 것은 단순 변화일 뿐, 그 변화에 아무런 창조나 발전을 찾아볼 수 없다.(3)기계론적 유물론은 본래 봉건적 이데올로기에 결론이라고 제출하지만, 마르크스의 경우는 그 단순 범주는 다만 출발점일 뿐이고 귀결은 항상 ‘풍부한 구체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법”이 곧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의 방법”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헤겔 변증법에 의거하여 부르조와 경제학자들의 잘못된 방법적 오류를 비판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2). 마르크스의 변증법 1: 헤겔 “지양”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의 원용헤겔 변증법에서 “지양” 개념은 매우 중요하며, 핵심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마르크스는 일체의 변증법 역사의 총괄이자 완성태를 보여주는 헤겔의 변증법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정치 경제학 비판”, 즉 부르조와 사회의 운동법칙을 해명하는 데 활용하였다.생산 관계의 지양은 곧 새로운 사회 상태를 위한 역사적 전제들을 정립함을 뜻한다. 새로운 사회 상태란 자본주의가 지양된 상태이며,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생산 조건들 자체가 스스로를 지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생산 조건들은 스스로를 지양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헤겔이 말하는 사물과 개념의 “자기 운동의 원리”가 여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 상태”란 자본주의가 지양된 상태이며,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생산 조건들 자체가 스스로 지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생산 조건들은 스스로를 ”지양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헤겔이 말하는 사물과 개념의 자기 운동의 원리가 여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 상태“로의 역사적 지양이 관념적인 방식이 아니라 형성되는 운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면서 그와 동시에 ”현재의 생산 조건들이 스스로 지양되는 것“으로 자기”정립“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3). 마르크스의 변증법 2: 현실적인 차이를 지양하지 않는 변증법)또 한편 마르크스는 “차이”에 대해 관해 언급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현실적인 차이를 지양하지 않는 변증법”마르크스 역시 “현실적인 차이”를 없애는 데에 반대한다. “차이를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양적 변화로 인해 일어나게 된다. 즉 지배 관계가 바뀜에 따라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로 된다. 대립물의 통일의 낡은 형태가 해체되고 새로운 형태가 생겨난 결과로 그러한 근본적이거나 질적인 변화가 생길 때 대립물 자체도 변하게 된다. 한 쪽이 지배되는 것으로부터 지배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면 다른 쪽은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지배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질적 상태에서는 동일한 낡은 대립물이 관계만 변화된 채 있는 것이 아니다.D. 마르크스의 변증법 4: 부정이란 어떠한 것인가?마르크스는 헤겔을 말한다.“시장 가치는 끊임없는 진통을 통해서, 제3자로서의 실제 가치와의 균등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지속적인 부등화를 통해서(헤겔의 표현을 빌자면 추상적 동일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부정의 부정, 즉 실재 가치의 부정으로서의 자신의 부정으로 통해서...... - 마르크스의 첨언) 실재 가치로 조정된다. 나는 프루동을 비판하는 내 팜플렛에서 실재 가치는....스스로 다시 부정되며, 상품의 실재 가치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규정과 모순에 빠뜨린다는 것....을 증명했다.”여기서 “자기 자신과의 지속적인 부등화”란 곧 ‘자기 부정’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자신의 부정을 통해서 실제 가치로 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자면 그 어떤 “제 3자”와의 “균등화를 추구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자신과의 지속적인 부등화“이고, 단지 ”추상적인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자신에 대한 성찰로서의 ”자신의 부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을 이루는 힘은 바로 어떤 외적인 초월적 실재로 파악되기 보다는 ”스스로 부정되는 것“. 그리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규정을 모순에 빠뜨리는 것“에서 찾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의 운동의 결과이며, 그 힘은 ‘내재적인 원천’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어떻든 간에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흡수한 제측면 (부정의 부정+자신의 부정+스스로의 부정+자기 자신과의 모순에 빠지는 것) 등이)
-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목 차-Ⅰ. 들어가는 말Ⅱ. 니체 : 생애와 시대적 배경1) 생애2) 시대적 배경Ⅲ. 니체 : 근대철학자들간의 관계성1) 헤겔과 쇼팬하우어, 그리고 니체2) 헤겔과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니체3) 헤겔과 마르크스, 그리고 니체Ⅳ. 니체 : 힘(권력)에의 의지Ⅴ. 니체 : 영원회귀1) 시간과 공간의 문제2) 디오니소스적 생성과 영원회귀3)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Ⅵ. 니체 : 초인Ⅶ.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1) 근대철학의 몰락2)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하여3) 니체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인가?Ⅷ. 나가는 말Ⅰ. 들어가는 말니체는 고대 철학부터 근대 철학까지 가장 근본인 ‘이성’을 무너트리는 데 큰 일침을 가한 철학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 철학까지 이어온 철학적 체계를 무너트린 철학자가 바로 니체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적 체계는 모순적이고 불필요한 것이기에 그의 철학을 논하고 비판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본적 철학 체계를 철폐하기만 했을 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가만히 두고 슬피 울기만하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니체가 만든 철학을 살펴보면서 철학의 근본 체계의 흐름을 알아보고 니체의 사상이 어떤 영향과 결과를 만들었는지 지금부터 알아볼 것이다.Ⅱ. 니체 : 생애와 시대적 배경1) 생애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1884년 10월 15일 독일의 뢰켄 근교에서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도 목사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강력하게 기독교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5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과 함께 외조모집에서 기독교의 경건성을 유지하면서 자라게 되었으나 고독하고 허약해 보였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극기심과 자신의 연마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후년의 성격적 특징이 조성되었으리라 본다.)니체는 어려서부것을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몰아넣었는데, 절대정신이야말로 또 다른 이름의 주체가 아닌가. 쇼펜하우어는 칸트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경험의 원천이 감각자료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정신은 그 감각자료를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칸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만, 칸트의 잘못이 본체를 인식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시대 철학에 대한 이런 판단에서 자기 자신만은 제외시켰다. 자신의 사상에 비하면 이전의 철학자들은 ‘평이한’ 생각 정도에 머물렀고, 자기 자신을 ‘철학의 비밀 황제’라고 불렀다. 스스로 일종의 철학의 종교 창시자와 같이 굴었다.그의 인간 실존에의 염세주의는 “모든 삶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다”라는 말에 드러난다. 그가 고통스런 삶을 치유하는 방책으로 제시한 것이 예술(특히 음악)과 종교이다. 그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말로 모든 물건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라는 표현을 통해,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계승하여, 감히 그 물건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까지 진술한다. 인간의 육체를 물 자체로의 영역과 그것들 각각을 지배하는 의지의 실현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 ‘의지’는 니체의 ‘의지’와는 달리 싸움과 대립으로 가득 찬 것이다. 이러한 의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회복하는 방책으로서 그가 추천하는 종교는 인도 종교이다. 아직도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지가 완전히 소멸된 뒤 남는 것이 무(無)일 것이며, 그 반대로 의지를 부정한 사람들에게는 세계가 모두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염세주의는 끝내 음울하고 부정적인 한계를 떨쳐내지 못한다.본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고전 문헌학을 공부하면서 니체는 ‘정력적이고 음울한 정신인’ 쇼펜하우어에 열렬히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니체는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긍정적인 니힐리즘(허무주의)을 노래한다. 쇼펜하우어가 헤겔의 변증법 체계가 설명하지 못하는 ‘의지’ 개념을 통해 절대이성에 낸 균열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니체이다. 이 ‘유물론’을 주장하였는데 물론 헤겔도 ‘유물론’에 대해서 주장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헤겔 이전까지의 철학은 모두 ‘이론(theoria)’를 논하는 철학이었을 뿐, 현실에서 '실천(praxis)'을 하지 않는 철학이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가 주장한 ‘실천적 유물론’은 이전 철학자들과 확실히 구별된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헤겔처럼 원칙적으로 인간의 인식 능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과 구체적 행동을 중시했다.마르크스는 인간을 철저히 사회적 존재로써의 개인으로 바라보았고, 생산력이 인간의 삶의 토대이며, 그로 말미암은 물질문명의 기반 위에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이루는 의식의 방식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유물론이다. 기존의 유물론의 결함이 사물, 현실, 감성을 대상 또는 관조의 형식으로만 생각했을 뿐 인간적인 감성적 활동으로,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데 있다고 보고, 인식론을 배경으로 했던 기존의 유물론과는 달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철학의 외부인 사회적 현실과 맞물려서 전개된다. 마르크스는 원시 공동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 - 중세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으로 시발하는 사회주의 사회-공산주의 사회의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로 풀어낸다.철저한 무신론자였던 마르크스와는 사뭇 다르게 니체는 그냥 “신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신은 죽었다”고 한 데에는 의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정치적인 니체는 대단히 보수적으로, 영웅과 귀족 지배를 찬양하고 군주적 인간과 우둔한 대중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역사를 바라보았으며,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는 물론 그의 시대에 서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러시아에서 속속 폐지되고 있던 노예제마저 긍정적으로 보았다.Ⅳ. 니체 : 힘(권력)에의 의지니체는 파르메니데스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서양의 도덕?철학?종교 등, 서양철학 해석 전체가 허무주의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키 어려운 크고 작은 일들이 다시금 되풀이되어야 한다. 모조리 그대로의 순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 이 거미도, 나무 사이의 월광도, 지금의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그것과 함께 미세한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 역시 같이 회전될 것이다.)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그의 철학에서 가장 난해하며 또한 가장 중심적 사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의 근원적 토대는 자연 현상 속에서 무수히 목격하게 된다. 예를 들면 밤과 낮의 계속적인 반복이나 계절의 변화, 바닷가 밀물과 썰물의 바뀜, 우리 몸속의 혈액의 순환, 더 나아가서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 등 자연은 끝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며 결국은 늘 원점으로 되돌아온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 유전설’을 주장하였고 특히 피타고라스에게서 체계화된 영혼의 불멸설은 인간의 육체적 죽음 이후에 영혼은 영생하여 다른 육체를 받아들여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겪게 된다고 주장한다. 인도의 윤회설 또한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견지에서 고대로 확립된 영혼 불멸설은 원시 종교나 신화 그리고 고대 설화에서 중요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순환과 회귀에 대한 고전적인 신념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19세기 후반 ‘마이어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니체의 사상 발전 단계로 보아 영원회귀사상은 비교적 후기에 도달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혼 회귀사상은 그의 여러 사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부르고 있는가 하면, 가장 무거운 사상으로 보고 있다. 하이데거도 이 사상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을 강조 하면서 영원회귀가 니체철학의 기본 가르침이 됨을 지적하였다.)1) 시간과 공간의 문제니체는 영원회귀의 세계란 피안 세계를 ‘무’로 환원시킨 “신은 죽었다” 선언 후, 진실로 있는 순수 세계를 가리킨 것이며, 그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목적도 없이 무조건 되풀이 되는 만물 순환설”이며, “의미도 목표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기 위해서 그러한 최대의 시련, 즉 자신이 극복해야 할 최대의 장애를 정립한다. 그리고 이러한 최고의 장애물이 바로 영원회귀의 상황이다. 우리의 삶이 이미 아무런 확정된 목적도 갖지 않는 것으로 드러날 때 삶은 인간에게 최대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힘에의 의지가 이러한 최대의 고통 앞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될 경우 힘에의 의지는 자신의 본질에 상응하는 최고의 힘을 얻게 된다.)결과적으로 힘에의 의지는 세계의 사실성을 강조하고 영원회귀는 그 세계 속의 동일자의 유쾌한 긍정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무한한 힘에의 의지는 결국 영원회귀라는 작업을 수행하며 영원회귀의 운동인은 이 세계의 본질적인 힘에의 의지이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는 모든 본질적 작용을 하나의 사상으로 표현할 때 영원회귀 사상을 내세우게 된다.)니체의 영원회귀는 오히려 한 순간에 갑자기 깨달은 사상이 아니라 일찍부터 자신의 내면에서 추구되어 왔다.) 실봐 플라나 호숫가의 체험을 통해 구체화된 사상이라 확신할 수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새로운 삶의 긍정 형식이며 생성과 유전 속에서 허무와 죽음을 극복하는 운명애적인 사상이다. 그것은 허위와 날조 그리고 평균화되고 세속화된 현대 세계에 새로운 경종이다. 오직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도 능력이 있는 자만이 견디어 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초인의 철학이다. 니체 철학은 ‘이것이 삶이였던가, 좋다 다시 한 번’하며 외칠 수 있고 2천 년간의 반 자연과 인간 모독으로 점철해온 플라톤의 이성주의와 내세 중심의 기독교에 ‘노’라고 외칠 수 있는 의지의 철학이다.Ⅵ. 니체 : 초인니체의 “초인 사상”은 신적인 존재의 의미로 초인을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적인 면을 뛰어 넘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누구보다도 더 인간적인 사람을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니체의 초인은 신들의 죽음 이후 새롭게 태어나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상을 말한다. 따라서 초인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조건으로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다.
합 리 론(르네 데카르트를 중심으로)Ⅰ.서 론- 전 사상과의 관련성Ⅱ.본 론1.데카르트의 생애2.데카르트의 저작3.역사적 배경과 합리론의 주요동인4.데카르트 철학의 주요 내용5.신학과의 연계성Ⅴ.결 론- 감 상Ⅰ. 서론- 전 사상과의 관계중세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리의 재해석과 새로운 틀을 제시하며 그 유명한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성의 일부 영역을 인정하였지만 여전히 신앙은 이성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 오캄의 유명론 이후 이성은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면서 르네상스에 대한 제반 과정을 마쳐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신앙과 이성은 분리되어 신앙의 측면에서는 종교개혁이, 이성과 관련하여서는 르네상스의 흐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파급효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르네상스의 큰 물결을 거스르지는 못했다Ⅱ. 본론1. 데카르트의 생애)르네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650)는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라 에(La haye)에서 1596년 3월 31일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평범한 중류의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브르타뉴 주 의회의 고문으로 있었는데 평생 동안의 신조는 교양인으로서 처신하는데 있었다. 데카르트의 어머니는 그의 탄생 1년 후에 죽었다. 데카르트는 너무도 허약한 아이여서 주위 사람들은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여하튼 10살에 데카르트는 예수회 회원이 세운 라 플레슈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허약한 체질 때문에, 또 남달리 뛰어난 머리 때문에 그는 학교에서 특별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그에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키지 않고, 그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마음대로 기상하도록 방임하였다. 늦잠을 즐겨 잔 데카르트는 아침의 자기 침대에서 오랫동안 명상에 잠기는 습관을 몸에 붙이게 되었다. 그가 배운 과목은 주로 고전어, 역사, 수사학, 철학, 물리학이었다. 그는 라 플레슈 학교의 창설 이래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렸었고 특히 그는 메르센 학에 관한 논문과 물리학에 관한 저작을 내놓았다. 그 저작의 이름은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이다. 이 논문의 출판을 위한 제반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에 데카르트는 갈릴레이의 재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논문을 출판시키지 않고 다시 책상 속에 넣어 두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와의 불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1649년 데카르트는 그의 철학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로 스웨덴에 갔다. 데카르트는 늦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는데 여왕은 기상 후의 새벽 한 시간 동안 데카르트로부터 철학을 배우고자 하였다. 결국 데카르트는 조기기상과 스웨덴의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감기와 폐렴에 걸렸다. 만 8일 동안의 와병 끝에 1650년 2월 11일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는 숨을 거두었다.2. 데카르트의 저작)(1) Discours de la m?thode 『방법서설』,부록으로 Dioptrique 『굴절광학』,M?t?ures 『기상학』, G?om?trie 『기하학』,1637, Leyde(2) Meditationes de primn philosophia 『제 1철학에 대한 성찰』, 1641, Paris(3) Principia philosophiae 『철학의 원리』, 1647, Paris(4) Trait? das passions de ??me 『정념론』, 1647, Paris(5) Le monde ou le trait? de in lumi?re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 1664, Paris(6) Trait? de la formation 여 Foetus 『태아의 형성에 관하여』, 1664, Paris(7)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 『정신지도를 위한 제 규칙』, 1701, Amsterdam(8) Les lether de Descartes 『데카르트의 서간집』3. 역사적 배경)과 합리론의 주요 동인여러 면에서 근대 초 유럽의 위기는 극심한 혼란을 겪은 중세 말기의 상황과 유히스테리는 위기의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지속되었고 특히 전쟁이나 경제적 혼란이 가장 극심한 지역에서 더욱 격렬했기 때문이다.이러한 극심한 혼란을 배경으로 당시의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두 가지 주제를 지배적으로 다룬다. 그것은 당시 사회에 대한 회의주의와 관용이다. 또한 프랑스의 법률가 장 보댕(1530~1596)은 국가 권력에서 어둠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하였다. 한편 홉스는 인간 본성에 대해 철저히 비관적이었다. 그는 시민 정부가 등장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 상태는‘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단정하였다. 당시의 또 다른 방편으로 깊고 어두운 밤을 밝히기 위한 근대적인 시도는 블레즈 파스칼(1623~1662)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면서도 불신자의 지성뿐만 아니라 감성에도 호소함으로써 그들을 개종시키기를 희망하였다.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찰해보면, 아테네의 혼란기에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질서, 법, 이성의 강조는 근대 초 유럽에서도 동일하게 아니 오히려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데카르트 철학의 주요 내용(1)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르네상스의 큰 물결로 인해 이제 서양에서 이성과 신앙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즉 이성의 잣대로 신앙을 규정하는데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이렇게 이성이 중요시 되면서 두 가지 흐름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이성을 통해 삶을 편리하게 하는 과학의 발전에 주로 관심을 갖는 흐름과 신앙을 대치한 이성의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흐름이다. 전자는 경험론자들의 철학이고, 후자는 합리론자들의 철학이었다.)데카르트는 후자, 합리론에 속하였다.그러므로 그는 객관적 지식 체계를 세울 확실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철저한 회의의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의 표어는 모든 것은 회의 되어야 한다(De omnibus dubitandum)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는 회의의 방법을 선택한 것인가?갈릴레이의 지동설 이후 중세의 세계관은 잘못된 리마저도 의심하였다. 1+1=2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장난으로 1+1=2가 맞는다고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내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동안에→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비록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또 의심한다고 하여도→ 그렇게 의심하는 나는 또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이렇게 나오게 되었고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제 1원리, 확실한 토대로 여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첫째,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이 문장에는 인식되는 대상이 있고 인식하는 나가 있다는 이원론적인 사고구조가 반영되어있다.둘째, 이 명제는 육체에 비해서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유하는 나를 강조하고 있으므로 당연하다.셋째, 이 명제는 추론의 결과가 아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결론을 유도하는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이 명제는 직관에 의해 파악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사유하는 내가 있다(cogitans sum)'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 생각하는 나, 현재 존재하는 나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1인칭 단수 현재형을 강조하는 것이다.넷째, 데카르트는 회의함에 있어서 종교와 도덕의 영역은 제외시켰다. 왜냐하면 종교는 이성의 이해력을 넘는 계시의 세계이고 도덕의 본질은 진리가 아니라 선의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방법론적인 회의).)그리하여 그는 이 명제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였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일 내가 나 자신에서 왔다면 나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의심하고 조금은 알지만 많은 것을 모른다. 따라서 나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유래 할 수 없다. 다른 것에 의해 유래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를 지탱하고 탐구를 바탕으로 한 실용적인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다.둘째, 뿌리, 둥치와 가지가 연결되어 있듯이 학문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상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이성을 통해 동일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데카르트는 믿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란 무엇인가?그래서 나도 그런 법칙을 단 한번이라도 준수하지 않는 일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튼튼하고 확고한 결심을 갖기로 하고 다음의 네 가지 방침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첫째로, 내가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하지 아니하는 어떤 것도 진리로서, 나의 정 신에 명석하고 판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결코 나의 판단 속에 포함시키지 않고, 내가 의심할 수 없는 것만을 포함하겠다.둘째로, 내가 검토하는 각각의 어려움들을 가능한, 그리고 더 잘 해결하기 위하여 필 요한 한에서 가급적 세분한다.셋째로, 나의 생각을 질서 있게 인도하기 위하여, 즉 인식하기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쉬운 대상들로부터 출발하여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복잡한 것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자연대로는 피차 아무런 순서도 없는 것들 사이에도 질 서를 부여한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아무것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전체적인 열거와 일반적인 검열을 실시한다.)5. 신학과의 연계성첫째, 형이상학을 토대로 하여 실용적인 목적을 이루려고 과학을 강조하는 그의 철학은 인류문명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의 목표가 세속적 가치로 전락하여 신학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제 1 원리 제 1 원리제 1 원리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추구하는 방향과 방법이 달랐지만 제 1원리(이데아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경우 제 1원리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었다. 즉, 사고의 구조가, 제 1원리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외부에(이데아,신적존재) 제 1원리가 있었으나 데카르트에 오면 제 1원리가 인간의 내부에, 이성으로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