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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문화] 일본 결혼식
    일본의 결혼식일본의 결혼식은 절차도 복잡하고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최근에 들어서 우리나라에서 전통 혼례식을 치루는 드물지만, 일본에서는 전통 혼례와 서양식 결혼을 섞어서 진행하기도 하며, 피로연을 서양식으로 하는 등 아직까지도 많은 커플들이 전통 혼례식을 치루고 있다.우리나라와는 다른 양상을 띤 일본의 결혼식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우리나라의 맞선과 같은 개념으로 일본에는 미아이 (見合い · 맞선) 라는 것이있다. 예전에는 미아이를 통한 결혼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연애를 통한 결혼이 늘었다. 그러나 아직도 미아이는 많은 커플들을 결혼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중매인은 맞선을 주선하는 데에만 그치지만 일본의 중매인인 나코우도 (仲人 · 중매인)는 그 결혼에 더욱 깊이 관여한다. 나코우도는 결혼식에 입회해 결혼을 보증, 결혼의 증인으로 그리고 결혼식 당일에 신랑 신부를 대신해 식을 전반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다. 결혼 후 상담역할까지 한다. 맞선은 나코우도의 집에서 양가 부모와 신랑 신부 후보가 함께 만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애 결혼의 경우 맞선은 볼 필요가 없지만 나코우도를 부탁하여 정해두어야 한다. 즉 한국에서 생각하는 단순한 중매인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이러한 중매인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는 주로 직장 상사가 맡는 경우가 많으나 적당하지 않을 경우 친족, 은사, 선배, 친구 등이 맡을 수도 있다.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세 번은 나코우도를 해봐야 할 것」,「나코우도는 돈을 주고라도 해볼 만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나코우도 의뢰를 받는다는 것이 그만큼 그 부부가 신뢰?존경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서로 간에 결혼 약속이 정해지면 유이노(結納 · 약혼예물)를 주고받고, 약혼파티를 하며 약혼 기념품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결혼 통지를 하는 것이 통상의 관례이지만, 최근에는 간략화되는 경향으로 약혼식의 절차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유이노는 새롭게 친척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같이 먹고 마시는 술과 안주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점차 신부의 액세서리나 돈이 등장하게 되어, 현재의 유이노는 금봉(金鳳)과 함께 장식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유이노의 내용물은 주로 홀수로 5,7,9개로 맞추는 것이 관례이다.유이노의 내용물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1. 목록(目?)2. 나가노시(長?斗 · ながのし · 전복 말린 것을 얹는 종이) ? 건조 식품 중에서도 최고의 진미. 비린내 나는 것이 경사 날에는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코소데료(小袖料 · こそでりょう) ? 약혼을 증거로 주는 돈을 의미한다. 칸토 지방에서는 기모노를 입을 때 쓰는 띠인 오비에다가 돈을 넣기도 하기 때문에 '오비료,오비다이' 라고도 한다.4. 토모시라가(友白? · ともしらが · 마로된 실) ? 부부가 흰머리가 될 때까지 살라는 뜻.5. 수루메(?留女 · するめ) ? 옛날에 장시간 보존 식품이므로 귀중하게 여겨짐.6. 콘부(子生婦 · こんぶ · 다시마) ? 자식 운이 있으라는 뜻.7. 카츠오부시(勝男節 · かつおぶし · 가다랭이포) ?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많이 썼음.8. 스에비로(末? · すえびろ) ? 하얀 부채 끝이 퍼져 나간다고 해서 운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때 남자가 부채에 와카(和歌 ·?일본 고유형식의 시)를 써서 좋아하는 여자에게 줬다고 한다. 말하자면 프로포즈의 원점이라고 볼 수 있다.9. 야나기다르(家?喜多留 · やなぎだる) ? 버드나무로 만든 통으로 술을 담아 2통을 보냈지만 너무나 고가였기 때문에 돈을 넣어 보내게 되어 현재에도 그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모두 홍백이나 금은색으로 된 끈을 걸쳐 1~9개를 상 위에 올려놓는다.결혼 대상이 정해지면 유이노를 주고 받는다. 유이노는 나코도가 예물을 상대방 쪽을 방문하여 전해주게 된다. 한국의 함과 비슷하나 나코도가 정중하게 예를 갖춰 쌍방 모두 전달하는 것이 다르며 내용 또한 다르다. 유이노 비용은 월급의 2,3배 정도를 적당한 선으로 본다. 돈과 예물과 함께 장수, 백년해로, 발전, 건강 등을 상징하는 장식품을 함께 보내게 된다. 목록과 함께 보내면 받는 쪽에서는 받았다는 수령서를 보낸다. 여자 쪽의 경우 남자쪽의 반 또는 2/3 정도 선 여자 집에서 신랑의 예복비로 돌려주는 것을 하카마료. 최근에는 기념품을 보내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유이노결혼식 당일에는 집에서 신랑 신부 예복을 차려 입고 각자의 부모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작별 인사를 한 뒤 식장으로 향한다. 결혼식에는 신전 결혼식이나 불교식 기독교식을 막론하고 식장에 참여하는 것은 양가 가족만 참가한다. 식이 끝난 다음에 피로연석으로 향하는데 일반 하객은 피로연회장에 축의금을 들고 모이게 된다. 단 피로연장에는 좌석에 이름이 모두 적혀 있어서 미리 통보된 사람만 참가할 수 있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 피로연석에는 본인의 회사 직원이나 가까운 친지 친구들만 초청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50명에서 100명선이 일반적이다. 피로연석에서는 나코우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인사와 연회가 중심이고 도중에 이로나오시 라고 하여 신부가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전통의상으로 식을 올린다음 도중에 서양식 드레스로 갈아입고 등장하는 것이다.피로연장에는 친척 외에 친구나 관계자를 초대하여 이들에게 신랑,신부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한다. 주빈들의 축사, 건배 후 웨딩케이크를 자른다.식사가 시작되면서 친구들의 테이블 스피치(table speech)가 이어진다.피로연은 2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피로연 도중에 신부가 자리를 떠나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다. 이를 오이로나오시(お色直し)라 하는데 수백년 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다. 최근에는 한창때에 비하면 오이로나오시를 덜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그렇다해도 신부가 결혼식과 피로연에서 입는 의상은 평균2.8벌정도로 대여임에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마지막으로 친족 대표가 하례객에게 답례인사를 함으로써 결혼식은 끝난다. 이때 결혼식이 '끝났다'라고 하지 않고 (두 사람의 미래가) '열렸다'라고 표현한다.하객들은 「히키데모노(양가에서 마련한 일종의 답례품)」를 가지고 돌아간다.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의 결혼식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하객 1인당 3∼5만엔 식비가 평균 1만엔에서 1만5천엔 정도이고 답례품이 1인당 1만엔 정도이니 참가자는 스스로 2만엔 이상을 소비하게 된다. 따라서 축의금은 최소한 3만엔 이상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결혼의상은 예식의 형식에 따라 다르지만,격조 높게 기품을 소중하게 여기고,인생에서 맑은 하늘의 출발을 축복하는데 어울리는 것을 선택한다. 신부가 시로무쿠를 입을 경우에,신랑도 일본옷(와소우)으로,흑 5개 무늬가 있는 나가기에(안쪽겉옷),하오리(겉옷),하카마로(바지) 치장한다. 시로모쿠 색깔은 흰색과 칼라가 있지만 원래는 때묻지 않았다는 뜻으로 흰색을 입는다.▶ 혼례 의상일본의 결혼식 종류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일본인들이 선택하는 신전식 결혼과, 불전식 결혼, 서양식 문물의 수용과 함께 로맨스 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기독교식 결혼, 절차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인전식 결혼식으로 볼 수 있다.
    인문/어학| 2005.07.21| 5페이지| 1,500원| 조회(2,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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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역사] 요시노가리 역사 공원
    吉野ヶ里史公園요시노가리 역사 공원1.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은 ?요시노가리 유적은 사가 평야의 동부에 있는 일본 최대의 환락의 흔적으로 죠몬 시대에서 야마타이 시대에 이르는 일본의 고대 생활상을 생생하게 복원해 놓은 곳입니다.지금 복원되어 있는 것들은 촌락에서 국가로 발전되는 과도기 시기인 야요이 후기 시대의 것으로 그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일한 유적입니다.2. 야요이시대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 남부로부터 농경문화의 영향을 받아 북큐수를 중심으로 벼농사와 동과 철로 된 도구를 사용하는 새로운 문화가 일어나 일본열도에서 처음으로 농경사회가 성립한 시기입니다.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촌락이 형성되고, 수확물의 분배에 의한 빈부의 격차가 생겨 계급의 분화가 일어나며 고대사회로 접어들게 됩니다.3. 야요이 시대의 생활* 종교야요이 시대부터 농경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히 날씨나 그 밖의 농경에 중요한 조건이 중시되기 시작했고, 그런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신이 관장하는 영역이라고 여겨져, 종교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권위는 거의 왕, 족장처럼 높았으며, 의식과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들은 매우 소중히 여겨져, 금속을 이용해 특별히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의복문화농경기술과 방직기술은 한반도 남부의 집단 이주자들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화의 전파 경로나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지석묘가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지석묘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식문화벼농사의 기술의 도입으로, 벼농사가 굉장히 성행하였습니다. 일정한 토지에 정착해 음식의 안정을 가져오는 벼농사 농경에 돌진하게 되었다. 그것에 의해 , 지방 마다 벼농사중심의 제문화나 식생활 문화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벼농사 문화와 함께 탄생했던 것이 젓가락을 사용하는 습관입니다. 그 이전은 수식、즉 손을 이용해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그 외에 야요이 시대의 사람들은 채집이나 사냥, 고기잡이등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그들의 밥상메뉴로는, 대합의 조수국물 , 은어의 소금구이 , 참마의 조림, 껍질을 벗긴 건어물 ,참다래, 호두, 밤, 떡, 현미의 팥밥, 등이 있습니다. 또 이 시대에 콩 재배가 이루어 졌기 때문에, 일본의 대표음식인 낫토를 먹었을 것 이라고 추정됩니다.* 주거지벼농사가 시작됨에 따라 사람들은 저지대에 살게 되었고, 거기에 촌락을 형성했습니다.주거(住居)는 조몬시대 때와 같이 구덩식[竪穴式]을 주류로 합니다. 저지대에서는 지면을 바닥으로 하였고, 주위에 담을 둘러쳤으므로 상부구조는 구덩식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야요이시대의 주거지를 수혈주거라고 합니다.4. 요시노가리 역사 공원①입구▶ 環壕(칸코우,환호) - 부락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해자 (깊이 3m 폭 6.3m V자형)외해자 - 부락전체 2.5km 40ha내해자 - 내부를 구획▶ 逆茂木(사카모키,역무목) - 적의 침입 방지②전시실▶ 甕棺 (카메칸) - 매장할 때 쓰던 독 관야요이 시대 북부 큐슈에서만 볼 수 있음▶ 甕棺墓列 - 길이 600m 2개의 열구릉 근처에 15000~20000개의 묘지③南內郭 (남내곽)▶ 수혈주거 - 지면을 수직으로 파서 만든 반지하식의주거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주거의 형태가 환형과 장사각형, 구조도 기둥이 2개인 것과 4개인 것 등 다양한종류가 있습니다.▶ 철제품 발견 - 왕, 지도자 등이 거주▶ 物見やぐら(모노미야구라?망루) - 적의 침입 방지, 부락의위용을 나타내는 심볼, 요시노가리 마을에만 있는 특색적인 건물④北內郭(북내곽)▶ 주제전 - 나라전체의 의식, 기도가 행해지던 곳▶ 최고사제자 - 여성▶ 나카노무라(중심마을) - 제기 제작⑤창고와 시장▶ 市樓 (시로우,시루) - 시를 관리하는 건물▶ 창고 - 시장의 판매물품, 각 무라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물, 무기? 금속도구의 재료 등▶ 物見やぐら(모노미야구라,망루)▶ 고상식 창고 - 곡물이 습기나 쥐와 같은 동물에 의
    인문/어학| 2005.07.21| 4페이지| 1,000원| 조회(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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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 독도 영유권 일본측 주장
    독도에 관한 일본측 주장독도문제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엄연한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비합법적으로 점령하고 자 하는 일본의 주장에 의해 시작된 문제이다.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 것은 1905년 1월 28일의 일이다. 러일 전쟁의 승전과 동시에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시마네현()의 隱岐(おき)島에 소속시키고, 군수물자 보급기지, 어업활동을 펴는 등 영토편입 이전부터 독도는 일본의 점령 하에 있었다.우리정부가 일본에 의한 竹島의 영토 편입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이듬해인 1906년 3월이 되어서부터 였다. 당시의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 외교권마저 강탈당한 상태로서 이에 대하여 강력히 대항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였으며, 일본측의 영토편입 은폐의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전후 국가차원의 분쟁은 1952년의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설정 직후,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체결 전후, 그리고 1977년의 영해 200해리 문제가 등장하였던 시기에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다.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근거는 크게 역사적 문헌에 대한 근거와 법적 근거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우선 역사적 문헌에 의한 근거를 보면,1. 한국 문헌에 나오는 于山島는 죽도가 아니고 울릉도의 다른 이름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한 설(說)로는 우산, 울릉, 본일도(本一島)'라는 두 개의 섬이 본래 동일한 섬이라는 구절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속지도는 우산도를 한반도와 울릉도 사이에 그리고 있어 위치관계가 죽도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 외의 많은 문헌들도 우산도의 위치가 지금의 독도의 위치와 다르므로 우산도를 독도라고 볼 수는 없다.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于山(독도)과 무릉(울릉)의 二島가 縣(울진현) 正東의 바다 가운데 있다. 이도(二島)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울릉도에서 우산도(독도)는 보이지 않는다.죽도에 관한 일본 최초의 문헌인 隱州視聽合記에서 죽도는 송도(松島)라는 명칭으로, 울릉도는 죽도(竹島)라는 명칭으로 기술되어 있고, 일본의 북쪽 국경을 죽도(송도)로 명시하고 있다.2. 안용복 사건에 관해서조선이 6세기의 신라시대부터 울릉도를 지배했으나 1438년 부터는 도민을 조선본토로 철수시켰고, 1696년 이후는 3년마다 순찰사만을 파견, 공도(空島)정책을 1884년까지 취해 실효적 지배를 포기한 데 비해,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어업가 오오다니 진키치(大谷甚吉)와 무라가와 이치베(村川市兵衛) 두 가문에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 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를 통해 17세기 말, 안용복에 의해 강제 퇴거를 당하기 전까지 80여년간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 점유하였다. 조선으로 복귀한 안용복은 정부의 허가없이 국경을 넘어간 죄로 비변사에서 국문을 받았고, 이 밀항사건 기록에 대해 기록한 ‘숙종실록’의 기술을 한국은 고의로 위조해석을 하고 있으며, 일본의 기록에는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하여 영유권을 주장하였다는 내용이 없다. 당시의 항해 금지령에 마츠시마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현재 한국은 자국의 개념을 무리하게 짜 맞추고 있는 것이다.3.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의 해석명치유신 직후 일본 외무성과 태정관이 조선을 염탐하기 위하여 파견한 사다 하쿠가(佐田伯芽) 등의 결과 보고서에 “독도는 울릉도와 인접한 섬으로서 울릉도는 원록시대에 잠시 조선으로부터 빌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독도와 관련된 서류는 없다”고 기록하여 독도가 조선령이라는 내용은 없다. 또한 외무성이 기안하고 태정관의 결재를 받은 ‘조선에 파견되어 내탐하는 자가 준수해야 할 사항’ 에도 죽도, 송도가 조선에 부속 된 자초지종을 조사하여 올 것이라는 조사 지시가 없으므로, 독도가 조선에 속한 영토라고 볼 수 없다.법적 근거로는1)대한제국 칙령 제 41호의 해석울릉도를 강원도에 소속시켜 관할구역으로 정하고, 그 주변의 石島도 관할구역에 포함되는데 한국은 이 석도를 독도를 가르키는 것이라 하지만 석도는 울릉도 주변의 암초를 의미하는 것이다. 석도가 독도라 할지라도 법령에 울릉군의 관할구역으로 규정한 한 가지 사실만으로 한국의 영유라 할 수는 없다.2)시마네현 고시에 대한 해석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죽도를 국제법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으므로 죽도에 대한 한국점령은 '죽도강탈'이다. 편입 후 시마네현은 죽도에서의 강치어업을 나카이 요우자부로(中井養三郞)등 4인에게 허가하고 매년 허가료를 받았다. 이것은 근대 국제법 상의 형식에 맞추어 영유의사를 확인하여 공시한 것으로 1906년 4월에 대한제국 정부에 통보까지 하였다. 설사 독도가 한국령 이었다 하더라도 당시 한국이 항의하지 않았으므로 일본의 고시를 묵인한 것이다.3) GHQ의 처분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 677호는 행정권의 정지였을 뿐 영토 처분은 아니다. 지령 제 6항에서도 “이 지령중의 조항은 어느 것이나 포츠담 선언의 제8항에 있는 작은 섬의 최종적 결정에 관한 연합국측의 정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지령 제 1033호도 일본국의 관할권, 국제경계선 또는 어업권에 대한 최종결정에 관한 연합국의 정책표명은 아니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사회과학| 2005.07.21| 2페이지| 1,000원| 조회(1,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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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 독도 영유권 한국측 주장
    독도문제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엄연한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비합법적으로 점령하고 자 하는 일본의 주장에 의해 시작된 문제이다.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 것은 1905년 1월 28일의 일이다. 러일 전쟁의 승전과 동시에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시마네현()의 隱岐(おき)島에 소속시키고, 군수물자 보급기지, 어업활동을 펴는 등 영토편입 이전부터 독도는 일본의 점령 하에 있었다.우리정부가 일본에 의한 竹島의 영토 편입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이듬해인 1906년 3월이 되어서부터 였다. 당시의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 외교권마저 강탈당한 상태로서 이에 대하여 강력히 대항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였으며, 일본측의 영토편입 은폐의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전후 국가차원의 분쟁은 1952년의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설정 직후,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체결 전후, 그리고 1977년의 영해 200해리 문제가 등장하였던 시기에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다.먼저 독도 영유권 한국측의 주장은,1) 독도는 6세기경부터 한국의 실효적 지배 아래에 있었다.독도는 신라시대에 울릉도의 자도, 속도로 우산국으로서 신라 지증왕 13년 (512년) 신라의 관할 아래 있었다. 그 이후 계속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실효적인 지배 아래 있다. 1438년 부터는 도민을 조선본토로 철수시켰고, 1696년 이후는 3년마다 순찰사만을 파견, 공도(空島)정책을 취한 것은 도민의 거주로 왜구, 해적의 약탈과 관련된 치안상의 문제로 인한 통치 방법의 일환이었을 뿐 실효적 지배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2) 지정학상으로 독도는 한국의 영토이다.한국 본토(죽변 해안)와 독도의 최단거리는 218km, 일본 본토(히노미사키 해안)와 독도와의 최단거리는 208km로 일본에서 조금 더 가깝다. 그러나 독도와 모도인 울릉도와의 거리는 93km이고 독도와 일본 오키 제도의 도고(島後)까지의 거리는 157km로 독도-울릉도 거리의 약 두배이다.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우리 나라에 포함되어야 한다.3) 역사적 문헌을 통해 보았을 때 우산도는 독도이다.독도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성종실록, 숙종실록등의 고문헌에 의하면 조선 초기 그 이전부터 우산도 또는 삼봉도로 불리면서 울릉도와 함께 한국측에 소속되어 있었다.울릉도와 독도는 모도와 자도, 본도와 속도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한국의 고문헌과 고지도, 일본의 고문헌과 고지도, 그리고 서양의 자료들에도 모두 울릉도와 독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나타나있다. 동서양의 모든 학자, 일반인, 해군 장교들 모두가 그렇게 인식했다. 따라서 울릉도의 영유나 소속이 밝혀지면, 독도는 자연히 그에 따라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고문헌이나 고지도에 똑같이 울릉도와 독도사이의 명칭이 뒤바뀌고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이 두섬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이 두섬을 항상 바로 붙여서 표시하는 것도 두 섬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 때문이다.세종실록지리지에서 "우산과 무릉(울릉도) 二島가 울진현 正東의 바다 가운데 있으며,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는 기록"이 현재의 독도를 의미하고 있으며, 울릉도에서 독도는 육안관측이 가능하지만 일본의 오키島로부터는 불가능함을 제시하고 있다.독도는 맑은 날 울릉도의 해발 117 m지점에서부터 점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200m정도에서는 상당 부분이 보이나 오키 섬의 어느 지점에서도 독도는 보이지 않는다.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사실은 고대부터 한국인들이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3) 국제법상 근거영토를 차지하거나 편입할 때 대외적으로 공포되어야 하는 다음과 같은 국제법상의 원칙이 있다.1. 그 지역이 주인이 없어야 한다.2. 영역취득의 국가의사가 있고, 그 의사를 대외적으로 공표 하여야 한다.3. 그 지역의 실효적인 점유가 있어야 한다일본은 독도를 “무주물선점”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무주물 선점이란 그 지역이 주인이 없어야 하고 그 지역의 실효적인 점유가 있어야 한다.이미 역사적인 문헌에서 밝혀졌듯이, 독도는 6세기부터 우산도로서 한국의 영토로 실질적 지배 하에 있는 섬이므로 “무주물선점” 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부합되지 않으므로 1,3번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일본이 1905년 1월 28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자국의 시마네현의 오끼島에 소속시키고, 소극적인 자세로 1년이 지나서야 대한제국에 알렸으나 대한제국은 이미 5년 앞서 1900년 칙령 제41호로써 울릉군의 행정구역 안 에 독도(獨島, 石島)를 명확히 표시하여 ‘관보 (官報)’에 게재하였고 전세계에 공표하였다. 한국 고유영토인 독도(우산도)에 대하여 대한제국은 근대 국제법 체계를 갖춘 칙령 제41호로써 1900년 ‘독도’가 ‘울도군수 ’의 행정관리하에 있는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거듭 확인한 것이다.일본의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보다 앞서 전 세계에 공표된 대한제국 칙령에 의해, 일본 정부의 1905년 일본 내각회의 결정이 당시 국제법상 하자가 없었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4) GHQ의 처분 (1946년)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 SCAPIN 제677호 제3항에서 일본 영토에서 제외되는 섬들의 (a)그룹으로서 울릉도.독도.제주도를 들었다. 제677호에 의해 1946년 1월 29일독도를 주한 미군정에 이관하였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자동으로 독도를 포함한 모든 영토를 반환 받은 것이다.
    사회과학| 2005.07.22| 3페이지| 1,000원| 조회(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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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역사] 요시노가리 역사 공원
    吉野ヶ里歴史公園목차요시노가리 역사 공원은? 야요이시대 (종교, 의,식,주) 요시노가리 역사 공원 (전시관-남내곽-북내곽-창고와시장)요시노가리역사공원야요이시대 후기 후반(기원전 3세기) 복원 2300년전~1700년전 옛 건축의 잔존물,유물 발견 촌락(무라)→ 국가로 발전되는 과정 알수 있음야요이 시대기원전 300년~기원후 300년 벼농사, 청동기·철기 사용 → 계급 발생 촌락(무라)→ 국가식문화벼농사의 기술의 도입됨→정착생활. 지방마다 벼농사 중심의 제문화나 식생활 문화가 자라기 시작 벼농사를 시작하며 수식이었던 식습관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게 됨야요이시대의 밥상에 올라온 메뉴 대합의 조수국물 , 은어의 소금구이 , 참마의 조림, 껍질을 벗긴 건어물 , 호두, 참다래, 밤, 떡, 현미의 팥밥의복문화방직기술 발달 한반도 남부 이주자에 의해 여름 – 마 (농업에 편리) 겨울 – 모피(방한용)모피로 만들어진 야요이시대 의복주거지벼농사 시작 → 저지대에서 촌락형성 수혈주거 - 구덩식종교농경의 발달과 함께 종교의 중요성이 대두 동탁, 창, 칼- 의식용 도구체험공방발견된 유적環壕(칸코우,환호) – 부락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해자 깊이 3m 폭 6.3m V자형 逆茂木(사카모키,역무목) – 적의 침입 방지외해자 – 부락전체 2.5km 40ha내해자 - 내부를 구획전시실甕棺 (카메칸) – 매장할 때 쓰던 독 관 야요이 시대 - 북부 큐슈甕棺墓列 – 길이 600m 2개의 열 구릉 근처에 15000~20000개의 묘지南內郭수혈주거 철제품 발견 – 왕, 지도자 등이 거주 物見やぐら(모노미야구라) 적의 침입 부락의 위용을 나타내는 심볼 요시노가리 마을에만 있는 특색적인 건물北內郭주제전 – 나라전체의 의식, 기도가 행해 지던 곳최고사제자– 여성 나카노무라(중심마을) – 제기 제작창고와 시장市楼 (시로우,시루) – 시를 관리하는 건물 창고 시장의 판매물품 각 무라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물 무기, 금속도구의 재료 등 物見やぐら(모노미야구라,망루)高床の倉庫(고상식 창고) 습기, 쥐 등에 의한 피해 방지 시장 – 해외 교역품, 특산품체험공방야요이 시대 생활 체험 소품 만들기참고자료www.yoshinogari.jp 5.20 http://idea.woweb.net/enter/history/yayoi.htm 5.20 http://www.sagainfo.net/history/yoshino.html 5.20 http://www.geocities.co.jp/SilkRoad/6436/page8a.html 5.20 http://www2.jyose.pref.okayama.jp/cec/sirabetemiyou/2_yayoi/yayoi.htm 5.21 (동영상){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05.07.21| 24페이지| 1,500원| 조회(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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