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진은 왜 어떻게 발생하나지난 1988년 12월 7일 소련 남부 아르메니아 공화국에서 큰 지진이 발생하여 수만명이 사망했다. 이 지진은 1976년 중국 당산에서 일어나 약 65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지진이후 가장 큰 인명피해를 가져온 지진이었다. 이처럼 지진은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재해 중에서 가장 급격한 지각변동을 수반,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를 가져온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진대에 속하지 않으므로, 지진현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적다. 아르메니아 대참사를 계기로 지진의 정체를 살펴보자.20세기 초 지진계가 발명되어 전 지구 표면에서 발생하는 지진의 진앙을 정확히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지진은 띠모양의 특정한 지역을 따라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전 지구 표면에서 지진이 발생하지 않는 지역은 없지만 특히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을 지진대라고 부른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지진대로는남미와 북미의 서해안을 따라 알래스카 캄차카 일본 필리핀을 거쳐 인도네시아로연결되는 환태평양 지진대를 들 수 있다. 이외의 주요한 지진대는 대서양의 중앙지역을 따라오다가 다른 대양으로 갈라지며 길다랗게 이어지는 중앙해령 지진대이다.지진이 발생하는 지점을 진원이라고 부르며 진원의 수직 상방 지표면의 지점이진앙이 된다. 지진은 지표에서 대략 700km의 깊이까지 발생하는데 진원의 깊이가70km이하인 지진을 천발지진이라고 부른다. 3백km이상이면 심발지진이 된다. 지진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천발지진의 경우, 전 세계에서 방출되는 지진에너지의 75%전도가 환태평양조산대에서 방출되고 약 23%정도가 그 외의 지역에서 방출된다. 심발지진의 경우에는 거의 전부가 환태평양지진대에서 방출된다.천발지진의 발생은 탄성반발설로 설명한다. 가령 나무막대의 양끝에 반대방향의힘을 작용하면 중간구분이 굽어지다가 변형의 한계에 이르면 막대가 부러진다. 이때 부러진 부분이 격렬하게 진동한다. 지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각에 서로 반대방향의 힘이 작용하면 중간부분이 변형되동이 사방으로 전파해나간다. 이 현상이 바로 지진이다. 이와 같이 지각이 깨어진 면을 단층이라 부르며 따라서 지진의 발생은 대부분 단층운동을 수반하게 된다. 또 지진의 발생은 지각이 끊임없이 큰 힘을 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단층은 지각의 다른 부분에 비하여 훨씬 약하므로 쉽사리 깨어진다. 그래서 지진이 발생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지구표면의 지진의 전부가 단층에서 발생하고 있다.그렇다면 지각에 지진을 발생시키는 커다란 힘이 존재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왜지진들이 지구표면에서 고르게 발생하지 않고 특정한 지진대에서만 많이 발생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오랫동안 지진학의 기본적인 의문으로 남아왔었다. 그러나1960년대에 제창되어 발전된 판구조론은 이러한 문제에 퍽 간단한 해답을 제공하였다.판구조론에 의하면 지구의 표면에서 대략 1백km의 깊이까지가 그 아래의 맨틀에 비하여 비교적 더 단단한 암권(lithosphere)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암권은 대략12개의 판(plate)으로 구성된다. 이 판들은 그 아래의 맨틀 위를 마치 물 위에 뜬 빙산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미끌어져 다닌다. 이 암권 하부부터 대략 1백-3백km의 범위에 걸치는 상부맨틀을 약권(asthenosphere)이라 부르는데 이 약권을 이루는 암석들은높은 온도와 압력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녹아있는 상태잉다. 이 약권내에서는 유체처럼 물질의 대류현상이 가능하다고 믿어지고 있다. 약권은 그 위의 암권이나 밑늬 맨틀층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더 약한 부분이다.약권에서 대류가 이러나면 판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판들의 경계에서 암석층이깨어지며 지진이 발생한다는 것이 판구조론의 이론이다. 따라서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진대가 판들의 경계가 된다. 판과 지진대를 겹쳐보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판들간의 상대운동은 서로 멀어지는 경우, 충돌하는 경우, 엇갈리는 경우로 구분된다.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은 오스트레일리아-인도판이 유라시아판과 1년에 약 3cm의 속도로 서로 충돌할 때 생기는 힘에 의하여 지각이 깨어속도로서로 엇갈릴 때 지각이 깨어지면 생긴 것이다.판은 약권의 물질이 중앙해령에서 지표로 분출되어 만들어지며 다시 주로 태평양연안에 위치한 해구에서 맨틀속으로 비스듬히 내려간다. 그러다가 대략 7백km의깊이에서 높은 온도와 압력에 의하여 딱딱한 물성을 잃어비리고 맨틀에 동화된다.진원의 깊이가 지표에서 대략 7백km의 깊이에 걸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해구를 제외한 지표면의 전 지역에서는 대체로 천발지진이 발생하며 해구에서는대륙쪽으로 비스듬히 경사진 면을 따라서 천발지진에서 심발지진까지 발생한다.2. 지진의 진도와 규모지진의 크기를 나타내는 척도로서 진도(intensity)와 규모(magnetude)가 사용된다.현재 국내 신문에서는 외국에서 발생한 지진을 보도할 때 이 진도와 규모를 명확히구분하지 않고 강도 등의 용어를 사용,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규모는 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방출되는 파동에너지와 연관되는 양이다. 즉 지진의 진앙, 진원깊이, 발생시각 등과 같이 특정지진에 대하여 일정한 값으로 정해지는양이다. 보통 우리가 지진을 이야기할 때 진앙, 진원깊이, 발생시각 및 규모를 같이정해준다. 규모는 1936년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지진학교수였던 리히터(Richter)에 의하여 최초로 제안되었다. 보통 우리가 신문에서 보는 리히터강도는 바로 리히터 규모를 말한다. 지진의 에너지와 규모와의 사이에는 대략 다음의 관계가 성립된다.Log E = 12.24 + 1.44 M여기서 E는 erg단위의 에너지이고 M은 규모를 표시한다. 따라서 규모의 단위가1 증가할 때 에너지는 25-30배 증가한다. 전세게적으로 지진의 규모가 증가할수록그 발생빈도는 감소하며 그 통계는 다음과 같다.규모 8 7-7.9 6-6.9 5-5.9 4-4.9 3-3.9 2-2.9연간발생횟수 1 18 120 800 6200 49000 300000규모가 5를 넘으면 건물이 파괴되며 3이 넘으면 대체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참고로 1976년 중국의 당신지진의 규모는 7.6이었으며 1906년 샌프란시 기준으로 지진의 크기를 구분한 척도이다. 따라서 같은 지진에 대하여도 진앙지 부근에서는 큰 값을 갖고 먼 곳에서는 작은 값을 갖게 된다. 또 규모는 지진계의 기록을엄밀하게 분석하여 결정함에 비하여 진도는 진도계급을 보고 누구나 정할 수 있다.진도의 종류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쓰이는 수정머켈리(MM진도)와 일본에서 쓰이는 일본기상청진도(JMA진도) 등이 있다.수정머캘리진도는 12계급으로 되어있고 일본기상청진도는 8계급으로 되어있다.지진의 규모와 그 최대진도의 관계는 이론적으로 결정할 수 없고 통계적인 방법으로 정한다.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결정된 관계식은 다음과같다.M = 1 + 2/3 I (M은 규모, I는 최대진도)* 수정머캘리(MM) 진도계급- ( )은 지표면의 가속도. g = 9.8m/s^2. 지진에 의해 지표면이 흔들리는 정도Ⅰ 특수한 조건에 있는 극소수의 사람만 느낀다.Ⅱ 건물윗층에 정지해있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느껴진다.허약한 물건이 흔들린다.Ⅲ 집안에서 특히 건물 윗층에서 뚜렷하게 느껴지나 많은 사람들은 지진으로간주하지 않는다. 정지한 차가 조금 흔들리며 트럭이 지나가는듯한 진동이있다. 지속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Ⅳ 낮에 집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느껴지나 집밖에서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느껴진다. 밤에는 잠을 깨는 사람도 있다. 접시나 유리창 문들이 흔들리며 벽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무거운 트럭이 건물과 충돌하는 느낌이들며 정지한 자동차가 눈에 띄게 흔들린다. (0.015-0.02g)Ⅴ 거의 모든 사람에게 느껴지며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잠을 깬다. 접시나 유리창이 깨어지기도 하며 석회에 금이 가고 불안정한 물체가 넘어진다. 나무나 장대 등 긴 물체가 흔들리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추시계가정지하기도 한다. (0.03-0.06g)Ⅵ 모든 사람들에게 느껴지고 놀라서 집밖으로 달려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무거운 가구가 움직이고 석회가 떨어지며 굴뚝이 파손되는 경우도 있다. 가벼운 피해가 일어난다. (0.06-0.07g)Ⅶ 잘 지었더라도 가볍거나 중간정도의 피해가생긴다. 설계가 잘못 되었거나 부실하게 지은 건물은 상당한 피해를 본다.굴뚝들이 넘어지는 경우도 있으며 운전중의 사람에게도 느껴진다.(0.1-0.15g)Ⅷ 특수하게 설계된 건물에 대한 피해는 가벼우나 보통 건물은 견실하게 지었더라도 부분적으로 무너지는 상당한 피해를 보고 부실하게 지은 건물은 큰피해를 받는다. 판벽널이 틀로부터 튀어나오며, 굴뚝, 공장에 쌓아놓은 상품, 기둥, 기념비, 벽 등이 무너진다. 무거운 가구가 넘어진다. 모래와 진흙이 조금 분출되며 샘물이 변한다. 차를 모는 사람이 흔들린다. (0.25-0.3g)Ⅸ 특수하게 설계된 건물에도 상당한 피해가 생기며 설계가 잘 된 건물도 기운다. 견고한 건물이 부분적으로 무너지며 피해가 커진다. 건물이 기초로부터 벗어난다. 지표면이 눈에 띄게 갈라지며 지하의 파이프가 부러진다(0.5-0.55g)Ⅹ 잘 지은 목조건물이 파괴되는 경우가 생긴다. 대부분의 석조 및 구조건물들이 기초부터 파괴된다. 지표면이 심하게 갈라지며 철로가 휜다. 강뚝이나경사가 급한 비탈에서 적지않은 사태가 발생한다. 모래와 진흙이 이동하며강물이 뚝을 넘어 쏟아진다. (0.6g 이상)? 서 있는 건물이 거의 없으며 있다해도 석조건물 뿐이다. 다리과 파괴되고지표면에 넓은 금이 가며 지하파이프들의 사용이 전혀 불가능해진다. 흙이무너지고 부드러운 땅에서 사태가 난다. 철로가 심하게 휜다.? 전체적으로 피해가 발생한다. 지표면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측량선이나 수준면이 변한다. 물건들이 공중으로 튀겨나간다.3. 한국의 지진20세기에 들어와서 한반도에서는 2회의 파괴적인 지진이 발생햇다. 1936년 7월4일의 지리산 쌍계사 지진과 1978년 10월 7일의 홍성지진이다. 이 지진들의 규모는대략 5.2정도이며 홍성지진에 의한 재산피해는 당시 화폐가치로 약 4억원으로 측정되었다.1905년 인천에 최초로 지진계가 설치되었으며 그 이전에 한반도에서 발생한 지진들은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 등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진정한 독립을 향하여1)쿠바의 근현대사▣ 쿠바의 독립과 미국의 개입(1898)- 19C 말 쿠바의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에 의해 독립 운동이 시작- 쿠바 독립을 지원했던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으로 쿠바는 독립되었으나 파리강화조약의 결과 미국의 군정을 받게 됨- 플래트 법(1902) : 쿠바의 미 군사기지 설치권과 내정간섭권 보장( 이 법안으로 현재까지 관타나모 기지 조차)▣ 바티스타 정권(1933-1959)- 하급장교의 불만을 품고 당시 상사였던 바티스타가 쿠데타 일으킴- 미국의 지원아래 권력자로 부상 ,1940년 1952년 1955년 세 차레대통령에 오름- 바티스타의 독재와 부패 경찰의 폭력 쿠바내 자본의 미국 기업의독식으로 시민 봉기등 사회 혼란 가중▣ 쿠바혁명(1959)-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여 게릴라로 활동하던 반미성향의카스트로가 혁명 성공- 카스트로는 미국계 기업과 대지주의 토지를 접수하고 집단농장 운영등 일련의 사회주의 정책 실시로 60년대 의료 교육체육의 분야에서는 당시 선진국의 수준으로 끌어 올림▣ 경제위기와 대량난민발생 (1994)- 경제빈곤의 원인 : 30년이상 지속되온 미국의 경제봉쇄정책과소련 및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붕괴와 이로 인한 교역 감소- 80년대 카스트로는 마리엘 사태를 계기로 쿠바 탈출 제한 철폐-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해상을 통한 미국으로 대량 탈출 사태 발생(미국은 80년대에는 쿠바 난민을 정치적인 이유로 대거 받아들였으나 난민수가 늘어나자 수용 거부)2) 쿠바의 사회주의화와 미국의 정책▣ 발전동맹(1961): 케네디에 의한 미국의 대중남미 정책의 변환중남미에서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햐여 미국의 정책에 지지하는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원조 시혜(중남미의 마샬 플랜)▣ 피그만 사건과 미사일 위기: 미국의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시도와해상 봉쇄로 쿠바정권이 친소 정책을 강화시키게 된 계기▣ 쿠바봉쇄정책(1959-현재 )- 배경 : 미국의 먼로 정책이후 대중남미 정책(미국의 뜻에 맞지않은정권에 대한 강경 개입)에 대한 연장과 미국내 때도 됐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러나 교황의 방문 훨씬 이전에도쿠바 문화는 수년간 자국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했던 바로 카스트로 자신의도움으로 재발견됐다. 소련 붕괴 이후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완화하지 않을 수없었던 그가 관광 산업과 쿠바 토착 예술을 권장해왔기 때문이다.쿠바는 로마 가톨릭교와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 요루바族의 종교 의식, 트럼펫과 콩가 북 등 스페인과 아프리카의 종교·에술전통이 융합돼 정열적이면서 신비롭고, 문확적이며 관능적이고 때로는 자기 해학적인, 독특한 문화를만들어냈다. 데시 아르나스와 글로리아 에스테반 등 인기 연예인들은 쿠바的 감성을 북미에 전파했고 50년대에는 마치토, 차노 포소 같은 쿠바 음악인들이 현대 재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호세 레사마 리마,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 같은 작가들은 중남미 문학 르네상스의선도적 역할을 했다.자신의 혁명 이미지와 국자 재정을 되살리겠다는 카스트로의 결심은 디즈니와 맥도널드,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 상표가 전세계에서 판치는 오늘날의문화 풍토에서 자기들 특유의 '정체성(正體性)'을 갈구하는 경향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쿠바 미술가들은 대담한 그림, 격렬한 색채, 그리고 나무껍질과 흙 같은 '천연' 소재들을 선호한다. 쿠바 문학은 현실적이고 정력적이며 바로크的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인기있는 쿠바 댄스 음악인 '살사'는90년대에 유행하는 레게 음악일지도 모른다. 그 매력은 주로 미국 기업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음악이라는 그 순결함에서나온다.취약한 쿠바 경제에 있어 예술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큰 사업이다. 해외수집가들에게 작품을 파는 화가들은 판매 대금의 50%를 정부에 바친다.쿠바의 댄스 그룹들도 한몫을 한다. 카스트로는 다년간 팝 음악을 억압했으나 이제는 로스 반 반 같은 유명 그룹들이 외국 회사들과 레코드 제작 계약을 하고 있으며 특권도 누릴 수 있다. 지난해 8월 쿠바 정부는 무대에서 외설스러운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라 차랑가 아바네라라는 그룹에 6개월초기 식민 시기의 스페인의 대식민지 개척은 주로 금과 은 등 귀금속에 관심이 집중되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였나 대륙으로 향하는 전진기지의 역할과 플랜테이션 농업의 발달로 쿠바에 많은 사탕수수가 심어졌고 그 농업을 중심으로 발전을 하였다. 1810년부터 1825년까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하였으나 쿠바는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그 독립이 늦어졌다. 하지만 19세기말 쿠바의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에 의해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2) 미국-스페인 전쟁과 파리평화조약1894년 미국은 관세 인상 조치의 하나로 설탕에 대하여 비교적 높은 관세를 부과하였다. 이런 조치는 곧 쿠바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1895년에 이르러 설탕의 과잉생산으로 경제 파탄에 직면하였다. 이렇게 되자 스페인 지배에 항거하는 혁명운동이 쿠바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스페인 본국 정부는 강경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이때 미국 정부는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전함 메인호를 1898년 1월에 아바나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2월 15일 메인호가 원인불명의 사고로 폭발하여 25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전쟁 결정을 주저하던 미국의 맥킨리 대통령도 4월 24일 전쟁을 선포하였다. 전쟁은 오래가지 않았고 이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은 쿠바에서 물러났으며 파리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것이 쿠바의 향방에 관한 것이었는데 미국은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종식시키는데 만족하려 했으나 스페인은 미국이 쿠바를 할양 받기를 원했다. 1901년 6월 미국-쿠바간의 조약이 체결되어 쿠바는 독립을 하였으나 미국은 쿠바의 독립과 질서유지를 위하여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관타나모를 미군기지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법을 플래트 법이라 하며 이 법안으로 현재까지 미국은 관타나모 기지를 조차하고 있다.(2000년까지)(3) 바티스타 정권(1933-1959)하급장교의 불만을 품고 당시 상사였던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미국의 지원 아래 있다. 또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떼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집권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을 강경한 목소리로 비난해, 오르떼가 정권의 대미 화해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특히 교황의 쿠바 방문 일정에는 수도 아바나 도심 광장에서 성회까지 예정되어 있어, 쿠바 공산당 중앙 당사와 체게바라의 기념상이 자리잡은 이 곳에서 수십만 인파가 모인 가운데 교황이 어떤 말을 할 지 아무도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험부담을 안으면서 카스트로가 교황 방문을 추진한 이유는 미국의 강경한 대쿠바 제재를 뚫기 위한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데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교황청의 입장에서도 1100만의 인구 중 40%가 태어나자 마자 카톨릭 세례를 받으면서도 성직자가 260명밖에 없는 나라에 교황이 방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2) 교황의 쿠바 방문 (98. 1.21~1.25)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21일 아바나 국제공항에 도착, 푸른색 양복 차림의 피델 카스트로 쿠바대통령의 영접을 받으며 역사적인 5일간의 방문에 들어갔다. 교황은 도착 성명에서 "하느님이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인간의 눈으로 본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고 찬양한 쿠바를 방문할 수 있게 한데 감사한다"고 밝혔고 "쿠바와 세계가 서로 문호를 개방해 발전과 조화, 평화를 갈망하는 쿠바 국민들이 희망을 갖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강조했다. 카스트로는 환영사를 통해 미국이 36년동안이나 경제제재조치를 가하고 있는데 대해 '집단학살'이라고 비난하는 한편 "교황이 옹호하는 신념을 존중한다"고 말함으로써 교황이 쿠바혁명을 지지하지 않고 있지만 쿠바 공산혁명의 이상이 카톨릭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교황은 앞서 쿠바로 향하는 여객기에서 기자들에게 "미국에 쿠바제재에 대한 입장변화를 요구하고, 쿠바당국에는 인권신장을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황은 또 23일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조치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황폐화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청년들을 바 경제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재개를 시도하고 있는데 지정학적 위치로 보았을 때 쿠바는 앞으로 카리브 국가들 중 중심국가로 원상 복귀할 가능성이 있다.(3) 쿠바에 대한 타국가들의 발언가. 남아공의 만델라 : 3월 27일 남아공의 수도 케이프타운 대통령궁에서 아프리카의 민주주의의 산실인 남아공의 정치적 지도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옆에 앉아 있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꾸짖는 말로 차분하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국가원수를 거명하며 "우리는 암흑시대에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적들을 불러 함께 앉아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나. 윌리엄 코언 미국방부장관 : 3월 31일 의회에 제출할 보고서에서 쿠바혁명군의 전투력은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미국에 대한 생화학공격 위험성도 낮다고 밝혔다. 쿠바혁명군은 80년대 한때 13만명의 병력을 유지했으나 이후 급속히 쇠락하고 있어 미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미국방부의 이같은 평가는 쿠바에 대한 전면적인 제재조치가 62년 소련 핵미사일 반입사태 당시 쿠바를 미국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선언한 직후 취해진 것인 만큼 앞으로 대쿠바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미국측은 쿠바와의 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인 헬름스-버튼 법의 시행을 다시 연장했다. 미국의 최근 정책변화는 경제제재 완화를 통해 카스트로 정권을 더욱 효과적으로 다루고 헬름스-버튼 법을 둘러싸고 높아지고 있는 유럽연합등 우방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다.다. 아르헨티나 정부 : 아르헨티나 정부는 교황의 쿠바 방문 이후 쿠바와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64년 미주기구(OAS)에서 축출되었던 쿠바의 복귀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마르티네스 리오스 OAS주재 아르헨티나 대사는 "아르헨티나 정부는 미주기구 회원국이 오는 6월 카라카스에서 열리는 총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로.
라틴아메리카의 미래- 역사의 반복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1. 서론경제면에서 보면 1997년은 1982년 이래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해였다. 지역 평균경제성장률 5.5%에 한자리수 물가상승률이라면 어디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1997년 말 아시아를 휩쓴 금융위기는 라틴아메리카 경제의 장래에도 암운을 드리웠고, 1998년, 우려는 현실이 되어, 위기가 러시아를 거쳐 중남미 국가들에도 닥쳤다. 브라질은 IMF 구제금융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위기를 막기 위한 처방은 경기를 위축시켜 지역의 성장률은 2%대로 낮아졌고, 1900년대의 마지막해(1999년)에는 경제성장은 기대할 수도 없고, 오히려 1980년대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암울한 분위기이다.이는 같은 미주대륙 북반부의 미국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비전시(非戰時)로는 최장의 호황이었다는 1980년대의 장기호황 기록을 경신하였고, 증권시장에서는 DowJones 지수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그리고 실업률도 1970년 이래 가장 낮은 4.6%이고, 물가는 2% 이하로 안정되어 미국의 분위기는 붐을 넘어 풍요 그 자체이며, 미래에 대한 전망은 낙관을 넘어 자만에 이르렀다. 그 징표는 1930년대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민간소비가 소득을 초과해 저축이 마이너스를기록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소득이 계속 증가하리라는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이같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간의 대조적 분위기와 경제적 성취도의 차이는 비단오늘의 이야기만이 아니고 신대륙의 남과 북이 본격적으로 식민지로 경영되기 시작한 이래 줄곧 보여온 현상이었다. 그리고 장기추세는 서로 간의 갭을 줄여가는 수렴이기보다는 오히려 발산하는 양상을 보여왔다.신대륙에서 역사적으로 관찰되는 이같은 현상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었고, 이 퍼즐을 풀고자 하는 시도가 라틴아메리카 연구는 빈곤, 불평등한 소득분배, 경제의 낙후성, 민주정치의 실패, 정치적 불안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한 연구로접근되어 왔다. 제3세계 모든 국가들에서 람들 간의 싸움이 아직도 계속된다. 멕시코의 치아빠스 내전이 그 예이다.정복자, 식민자로서의 스페인 카톨릭과 북미 프로테스탄트는 매우 상이한 현실을창출했다. 멕시코에서는 멕시코인들 사이에 토착민을 포용하는 그러한 토착민과의관계를 세우려 노력했다. 라틴아메리카인들과 스페인, 포르투칼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인디언들의 노동자원을 정복하고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미국의 태도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토착민은 새로이 건설되는 문명의 밖에 남아 있었다. 미국인들도 토착민을 포용할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토착민들의 과거는 아메리카 미래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라틴아메리카에서는 통합을 생각했다. 미국인들은 분리를 생각했다. 이 분리의 아이디어는 미국역사에 일관성있게 나타났고 이는 미국인들의 시간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미래를 향한 달음박질 도중에 만나게 되는 역사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고립했다. 미국은 항상 외교정책에서도 순수, 고립의 아이디어를 좋아했다.그것은 미국사람들의 심리에 매우 깊게 뿌리박힌 중요한 흐름이다.세계의 한쪽은 마비되는데 다른 쪽에서는 역사의 가속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역사와 생을 시간의 속도를 통해서만 보려는 현대인의 오만이다. 시간에서 가속이란매우 위험한 것이다. 매우 서서히 발전하는 확립된 사회는 현대세계가 가지고 있는변화에 대한 미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들이 변화의 우상을 갖고 있는사회보다 더 잘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다. 원시사회는 수천년을 견뎠지만, 발전된 사회는 2, 3세기 후에는 폭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틴아메리카에는 모호한 경향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멕시코혁명도 두 가지 경향을 갖고 있었다. 승자들에 의해 지지되었던 국가를 개혁하고 근대화하려는 경향이수천년의 안정을 수호하려는 봉기(millenarist revolt) 사빠타와 나란히 존재했다.그는 근대화로의 진행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이상적 농업사회의 사회적 평등과 자유라는 신화적 시도되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독립이후 계속된 신생공화국들 간의 정치적 분쟁이 일반뿐만 아니라 학자, 지식인들의 관심을 경제문제보다는 정치문제로 집중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라틴아메리카 발전문제의 설명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경제적 요인의 하나인 정치적불안은 중남미인들이 줄곧 함께 살아온 현실이다.정치적 불안의 핵심은 이론과 현실의 괴리이며, 위선과 거짓이 체질화된 정치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신생공화국들의 이념적 기초인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상황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것을 호도하는 것"{{) Octavio Paz, La Laberinto de la Soledad, 2d ed. Mexico : Fondo de Cultura Economica, 1959. (Paz[1985], p.122)}}이었다. 이론과 실천, 말과 행동, 내용과 형식 사이의 끊임없는 상충이 라틴아메리카의 특징이 되어 버렸으며, 그것의 도덕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발전의 기본조건인 법과 질서조차도 제공할 수 없는정치체제의 무능에 실망했다. 한편 유럽과 미국에서의 눈부신 발전으로 자신들과 이미 격차가 크게 벌어진 현실에 자극되어 자기반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 환상적인 혁명의 이상과 꿈에서 깨어났다. 멕시코에서의 뽀르휘리오 디아스(Porfirio D as) 독재정권(1884∼1911)에 대한 교육자와 지식인들의 지지는 이같은 사고변화의 특이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혼돈과 침체를 질서와 번영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부패를 척결하고, 소모적인 정쟁을 중단시키고, 근대화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선의의 독재자'가 필요하다는 또 다른 꿈의 반영이었다. 교육자들과 지식인들의 결론은 라틴아메리카가 필요로하는 것은 자신들과 사회 자체의 완전한 변혁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중산층의 형성과 교육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매우 긴 시간을 요하는 변화이다.이같은 생각은 당시 방향을 바꾸었다.이와 같은 맥락에서 라틴아메리카 문제의 근원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찾으려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많이 있다. 특히 그들의 문제에 역사/문화적 접근을 하는 연구들은 중세 이베리아반도의 특징이었던 행태와 제도, 사회관계들이 오늘의 라틴아메리카에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스페인 정복자들, 정부관리들, 카톨릭 선교사들은 엘리트주의, 권위주의, 군국주의에 기초한 사회체제를 신대륙에 이식했다. 포르투칼인들의 유산은 스페인의 것에 비해서는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에 보다 관대한 편이지만, 스페인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포르투칼인들도 그들의 신대륙후손들에게 사회·정치·문화적 계급제도의 엄격한 관념을 심어주었다. 이베리아반도의 군주제도로부터 파생되는 가부장적 사고는 문화와 개성은 교육의 함수이기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지배정치문화에 참여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간주한다. 그들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하느님이 세우신 계급질서에서 자신의 역할로받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복지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그것은지배계층의 몫이었다. 공공도덕성이 정치문화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구조상 계급적이며, 이념적으로 절대주의이고, 현실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카톨릭교회는 정치·도덕질서 유지의 책임을 정부와 나누어 갖고 있었다.이베리아반도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또 다른 학자들은 조합주의 모형을 제시한다.중세 카톨릭사상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며,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살라자르치하의 포르투칼에서 관찰되는 조합주의 모형이 근대화 발전이론에 근거한 모형들보다는 오히려 라틴아메리카 현대정치를 잘 설명한다는 주장이다.조합주의 모형은 수직적 조직경향을 보이는 라틴아메리카 정치집단들의 행태에 주목한다. 조합주의체제하에서, 그런 집단들은 권위주의적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조정되어서, 권력과 의사전달체계는 위로부터 아래로 수직적이다. 조합주의적 조직은 많은 라틴아메리카국가들에서 쉽게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 중세 이베리아반도로부터의 족적을 부인하지는 수 없는 것은 인디오와 라틴아메리카의 원시적 과거에서, 지켜야 될 가치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경제사회질서를 건설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요소들을 찾는 것이다. 그는 페루경제의 이중구조를지적하고, 인디오경제의 집단주의전통을 지키고 그 위에 새로운 농업사회를 건설한필요성을 강조했다. 또레와 같은 부류로 분류될 수 있는 동시대 지식인으로는 호세까를로스 마리아떼기(Jos Carlos Mari tigui) 등을 들 수 있다.⑷ '너의 탓'의 정교화 : 종속이론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제국주의이론이 왜 그리고 어떻게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지배계층이 그들의 착취영역과 정치통제를 확장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종속이론은이 불평등한 흥정과 여러단계의 착취관계가 피지배국가의 피지배계층에게는 무엇을의미하는가를 연구한다. 즉 제국주의이론은 위로부터의 조망인 데 반해 종속이론은아래로부터의 조망이다.종속논리의 핵심은 쁘레비쉬와 그의 UN 라틴아메리카 경제위원회(CEPAL)의 동료들의 연구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들은 제3세계 국가들이 경험한 1차산품의 교역조건 악화로 야기되는 문제를 부각시켰으며,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보호주의와 공업화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그들의 논리는 중심/주변부 간의 관계의 비대칭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번째 비대칭성은 국제무역으로부터의 이익의 분배에 관한 것이다. 무역의 이익이 공평하게 분배되기보다는 교역조건의 악화를 통해 1차산품 생산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소득이이전되는 경로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다. 두번째 비대칭성은 중심/주변국간의 수입수요의 소득탄력성의 차이이다. 이것이 교역조건 악화와 주변부국가들의 국제수지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세번째 비대칭성은 산업보호정책의 효과면에서 나타난다. 보호정책이 선진국에서는 최적자원배분을 왜곡시키지만, 전통부문에 위장실업과 잉여노동력이 무한히 존재하는 주변부국가에서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시각에서도보호정책이 정당화된다.수입대체적 공업화, 라틴아메리카의 경제통합 등 CEPAL이 제시한 경제정책의 실패는 그들에게는 경제적 착취와
@실험 제목 : N /10 탄산나트륨 조제@실험 목적 :무수탄산나트륨을 정확하게 달아서 물에 용해하여 일정 부피로 하여 N/10 탄산나트륨 표준액을 조제한다.@실험 이론 :무수 탄산나트륨은 산 표준액의 표정용 표준물질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Na2CO3 는 약산과 강염기로 된 염으로 수용액은 가수분해 되어 알칼리성을 나타낸다. 이것에 강산을 더하면 알칼리가 중화된다.염의 당량을 구하려면 염의 금속, 또는 양이온을 수소로 치환하고 그 수소로부터 산과 같은 방법으로 산출하면 된다.(당량은 적정의 경우 반은에 의해 변하므로 주의해야 한다)Na2CO3 수소와 당량인 Na2 원자를 가지므로 다음과 같이 계산이 된다.Na2CO3 1g 당량 = Na2co3 /2 = 105.99 /2 = 52.995 g따라서 N /10 Na2co3 표준액을 500 ml 로 조제하려면 Na2CO3를약 2.65 g ( 52.995 x 1/10 x 500/1000 (g) )을 취하여 정확하게 계산한다.( 0.1 N Na2CO3 = 2.65 g Na2CO3 /50O ml )@실험기구 및 시약 :Na2CO3 , 윗접시 저울 , 직시 화학 저울 , 비이커 . 메스플라스크 ,칭량병 ,데시케이터 , 시약병* Na2CO3 ( 탄산나트륨 )- 탄산소다, 소다라고도 하며 무수물은 소다회.10수화물은 세탁소다, 결정소다라고도 한다무수물은 백색 분말로 흡습성이 강하다.알코올, 에테르 등에는 녹지 않는다.수용액은 알칼리성을 나타낸다.염산 Hcl 이나 황산 등의 강한 산에 가하면 이산화탄소를 발생한다.유리, 비누, 수산화나트륨, 탄산수소 나트륨등의 제조 원료로 사용, 알칼리로서 종이, 펄프의 제조, 염료의 유기 합성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된다.@실험방법 :1. 칭량병을 110■C 에서 20~30 분간 건조 후 데시케이터에서 방냉시킨다.
실험제목 : 부피측정실험목적 : 질량 및 부피를 측정하고 이에 관한 기본 단위에 익숙해지는 것은 화학에서 제일 기본이 되는 중요한 것이다. 이 실험에서는 저울을 이용하여 시료의 무게와 액체 및 고체의 부피를 측정하고 측정치를 기본 단위로 표시하는 훈련을 한다. 또한 측정 실험값의 오차 처리 방법에 유의하면서 액체와 고체의 밀도도 측정해본다.실험이론 : 부피 단위는 리터이다. 리터는 길이를 세제곱한 유도단위로 1/1000m3 이다.1데시미터 정육면체의 부피에 해당한다.화학 실험에서는 밀리리터를 가장 흔히 사용한다. 밀리리터는 리터의 천분의 일이다. 최근 밀리리터를 약간 다르게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데 1mL = 1Cm3 이다.*측정의 정밀도 - 물리적 양을 측정할 때 측정 기기는 원하는 정밀도를 일관성있게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50g 짜리 시료를 달 때 1%의 정밀도를 지니려면 저울은 0.5g 까지 정확해야 한다. 1g의 시료를 동일한 정밀도를 달려고 하면 저울은 0.01g까지 정확해야 한다.이 실험에서는 0.1g 까지 읽을수 있는 저울과 0.2mL까지 읽을수 있게 눈금이 매겨져 있는 실린더를 사용하기 때문에 계산한 밀도의 불확정도는 1%정도가 된다.실험기구 및 시약 : 0.1g까지 달 수 있는 저울, 0.1mL까지 읽을 수 있는 실린더.비커 (150mL, 50mL ), 시계접시, Nacl , CaCl2 수용액, 굵은 실리카 모래, 금속조각*nacl - 천연으로는 바닷물속에 평균 2.8% 함유되어 있으며 암염으로 땅 속에서도 존재한다. 공업용으로는 캐낸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식용으로 쓸때는 대개의 경우 재결정시켜 정제한다.등축정계에 속하는 무색결정, 결정속에서 결합간격 2.82A, 녹는점 800.4도 , 끓는점 1400도 , 비중 2.16, 굴절률 1.5443 이다. 보통 마그네슘의 염류를 함유하며 조해성이 있다.*cacl - 천연으로는 복염으로서 타키하이드라이트등의 광물로서 산출된다. 무수물은 조해성이 있는 사방정계읫 백색결정으로 녹는점 772도, 끓는점 1600도이상. 비중 2.512 이다.물에 대한 용해도는 크며 1g의 물에 74.5g 녹는다.이수화물 및 무수물은 수분을 잘 흡수하므로 건조제로 중요하다실험방법 - 가. 액체1. 깨끗하게 말린 150ml 비커를 0.1g 까지 정밀하게 침량하여 기록한다.2. 40 ~ 50 ml의 액체를 실린더로 재어 넣는다.3. 부피를 잴 때 0.1ml 까지 정밀하게 일고 비커에 가능한 한 완전하게 옮긴 다음 시계 접시로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