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VEN JOBS – 애플은 사과가 아니다?쓰기 쉬우면서 겉모습도 매력적인 컴퓨터를 만들려는 게 스티븐 좁스의 목표이다. 그가 이 바닥에 뛰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초보자가 컴퓨터 조작법을 배우는 데는 적어도 20~30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PC와 거의 동의어처럼 돼버린 애플사(社)를 그가 설립하기 전까지 컴퓨터란 단지 소수의 특권계급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과학이 만든 가공의 괴물이었다. 스티븐 좁스는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지 7년째 되던 해에 태어났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등장했을 때 그는 10대 소년이었다. 이제 이러한 발명품들을 가지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좁스는 발명가도 아니고 더욱이 천재적인 공학도도 아니었다. 차라리 재기발랄한 사업가요, 단단히 한몫 잡으려는 야심만만한 젊은이며, 야망을 가진 업계의 전도사와 같은 인물이었다. 물론 그는 이 모든 일을 기막힐 정도로 휼륭하게 수행했다. 좁스는 자신이 파리에서 배회하던 무명시인들 중 하나였으며 그의 성공 자체가 하나의 대사건이라고 이야기해왔다. 스티븐 좁스는 컴퓨터 제조로 자신의 출세가도를 열었고 결국은 굉장한 부자가 되었다.일반인들이 컴퓨터를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만든 컴퓨터는 가정 필수품으로 부각됐다. 전형적인 미국식 성공일화처럼 그도 1977년 허름한 차고에서 첫 출발을 시작했다. 그후 6년만에 애플은 지가 뽑은 미국 500대 기업의 하나로 선정됐고 또한 그중 가장 젊은 회사로 주목받았다. 1983년에 애플의 매출총액은 9억 8300만달러에 달했다. 애플은 간단히 말해서 PC업계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1980년대 중반까지 모두 200만대 이상의 애플컴퓨터가 세계 각지에서 팔렸다.애플의 1984년 총판매액은 15억달러였다. 좁스는 애플이 100명 이상의 백만장자를 만들 것이며 물론 자신도 그 중에 포함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1984년 그의 개인 재산은 2억달러에 달했다. 지는 1984년 미국의 100대 부호 중 가장 젊은 사람으로 그를 지목했다. 사실 1982년말에 그의 재4년초 그는 영원히 리드대학을 떠났다. 당시 그는 아타리사(社)의 충고(“인생을 즐기면서 돈을 벌어라”)를 받아들여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었던 그 비디오게임 회사에 40번째 종업원으로 입사, 비디오디자인 작업을 맡아 했다. 농구게임 만드는 일을 하다가 실패한 좁스는 아타리 게임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유럽행을 자원하였다. 유럽에 있는 동안 그는 뉴델리에서 마지막 휴가를 보내겠다고 회사에 통보하고 허락을 얻어냈다. 이제 열아홉살이 된 좁스는 유명한 정신적 지도자 니임 카롤리를 찾아 몇달이고 인도전역을 찾아 헤맸다. 1974년 가을에 고향에 돌아온 그는 아타리사에 자문역으로 복귀했다.젋은 좁스는 컴퓨터 광신도들의 모임인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 출입하게 되면서 인생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 홈브루 클럽의 발기인인 워즈니액은 그동안 휴렛패커드에서 연산장치를 설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워즈니액의 기술적 천재성이 돋보였고 두 사람 사이에 의기투합이 잘 이루어졌으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워즈’는 그들의 첫 작품을 상품화하는 데도 반대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25달러를 주고 마이크로프로세서 한대를 사서 컴퓨터를 조립하기로 했다. 작업장도 팔로 알토에 있는 좁스의 집 거실을 이용하기로 했다.그들이 조립해내는 모든 기계들은 완성하는 데 60시간이 걸렸는데 처음부터 조립하고 땜질을 해야만 했다. 곧 그들은 이 작업을 단순화시킨 인쇄 회로기판을 발명했다. 그러나 이 작은 기계를 대량생산하려면 우선 시간과 노력을 감축해야 했다. 두 사람은 그 일을 해냈다. 사실 워즈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컴퓨터를 만들었다. 하지만 좁스는 이것을 보고는 외쳤다. “야 , 이거 한번 팔아보자.” 이때 이미 좁스는 PC의 시장성을 내다보고 있었다.이 두 사람이 팔고자 했던 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PC가 아니었다. 키보드, 케이스, 메모리, 전원 공급장치가 없는 단지 인쇄된 회로기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게임을 하고 베이식을 돌리는 데 쓸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 하나는 1978년 여름에 있었던 디스크 드라이브를 채용하겠다는 발표였다. 이는 컴퓨터 메모리에 접근할 때 애플 Ⅱ에서 사용되었던 테이프 카세트 방식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인 것이었다. 두번째는 비지캘크(VisiCalc)라고 하는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의 개발이었다. 1979년 10월부터 애플 컴퓨터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응용 소프트웨어는 단 100달러에 시판되었다. 이 두가지를 탑재한 것은 굉장했다. 1980년 9월에 팔린 13만대의 애플 컴퓨터 중에 2만5000대가 비지캘크 덕분인 것으로 분석됐다.애플 컴퓨터의 성장은 매우 놀라웠다. 이 회사의 매출액은 1980년 1억1700만달러, 1981년 3억3500만달러, 1982년 5억8300만달러,1983년 9억8500만달러로 매년 2배 이상 증가하였다. 애플은 1980년에 주식을 공개했는데 하이테크산업의 주식으로는 가장 성공을 거둔 좁스는 그 당시 시가로 1억6500만달러, 워즈는 8800만달러 상당의 주식을 소유하게 되었다.과연 좁스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그는 위험부담을 피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매킨토시 광고에만 1500만달러를 쏟아 부은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만 해도 분명히 그는 일과 돈과 권력의 게임에서 기성세대를 강타하는 데 큰 재미를 들였다. 그 당시 그의 모습은 더부룩한 턱수염,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 청바지 들 투자자들을 망설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었다. 1983년에 펩시콜라의 사장 존 스컬리에게 접근해 “5년 동안 펩시에 더 있어봐야 아이들에게 콜라나 더 파는 것 말고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애플로 들어오면 세계를 뒤바꿀 수 있습니다” 라고 설득해 그를 애플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좁스 개인의 이야기는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은 애플의 성장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좁스가 존경하는 인물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창시자 에드윈 랜드, 크라이“진정한 예술가들의 배”라는 모토를 나눠주었다. 반대로 팀원들은 “1주일에 90시간 일하고 그 순간순간을 아끼자”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으며 이에 응수했다. 그중 한 사람은 이 프로젝트를 술 대신 칩과 소프트웨어로 가득찬, 밤낮 구별없이 계속되는 칵테일 파티라고 비유했다. 좁스는 비밀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썼으나 그 자신이 너무 좋은 나머지 시제품을 포크송 가수인 존 바에즈에게 보이기까지 했다.맥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IBM 호환성에 대한 압력이 커지자 좁스는 연간 500만대 이상의 판매를 장담하면서 제2의 산업표준을 꿈꾸었다. 그러나 1985년초 모든 산업분야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미 일반화되어있는 IBM산업표준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신형 컴퓨터를 계획할 때 일반 소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했을 때 과연 시장조사를 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제록스가의 작업을 본떠서 맥의 여러 가지 특징들, 특히 마우스와 그래픽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맥의 판매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시판 100일만에 7만대가 팔려 목표보다 2만대를 초과 달성했다. 그해 연말까지 약 25만대가 판매돼 가장 성공적인 PC로 데뷔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1985년6월까지 40만대, 1986년초 50만대를 달성했다. 1986년에만 40만5000대, 1987년에는 60만대 등 초고속 성장을 계속했으나 좁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IBM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1985년 1월 애플 토크(talk)를 중심으로 하는 매킨토시 본부를 개장하고 여기에서 한 회선당 50달러로 맥 32대까지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맥은 이제 개인용 컴퓨터에서 벗어나 상용컴퓨터로도 우뚝 선 것이다. 한편 1984년 4월 애플은 3.4㎏짜리 휴대용 애플Ⅱc컴퓨터를 개발해서 1300달러에 시판했다.1980년대 중반까지 애플의 전략은 환상적인 전자제품으로서 맥에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이 버그 교수와 식사를 하다가 좁스는 컴퓨터 모의실험장치를 통해서 버그교수의 실험내용이 학업용으로 전송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버그교수는 대학에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많지 않다고 불평했다. 이 말을 듣고 좁스는 무릎을 쳤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도전의 장이 있으며 영민한 두뇌를 바쁘게 움직여야 할 프로젝트가 나타난 것이다.이후 곧 애플의 몇몇 가까운 동료에게 의사타진을 해본 뒤 9월12일로 예정된 애플이사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식 발표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스컬리와 이사회가 그의 생각에 협조적이어서 애플사도 그의 프로젝트에 참가해 10%의 지분을 가질 것으로 얘기가 됐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좁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애플사를 처분해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한 때 스컬리에게 가졌던 좋은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그러나 두 사람의 우호적인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좁스가 새로운 사업에 동반할 애플의 참가자 명단을 발표했을 때 문제는 터졌다. 좁스는 그 명단에 단지 하위직급만을 포함시키기로 약속했었는데 5명의 핵심기술자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컬리는 좁스가 사기를 쳤다고 보았으며, 법적 조치 운운하는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소송이 있든 없든 좁스는 애플을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마침내 1985년 9월17일 회장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아직 그는 애플 총주식의 9%, 약 550만달러를 소유한 대주주로 남아있다. 1주일 후 애플사는 사기와 기업비밀 유출혐의로 좁스를 고소했다. 이에 대해 좁스는 애플의 기술을 도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반박했다.이러는 동안 그는 넥스트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의 새로운 계획은 1만달러 이하의 가격으로 대학에 고품질의 교육용 워크스테이션을 보급하는 것이었다. 이 제품은 현재 2만~3만5000달러를 호가하는 타사 워크스테이션과 맞먹는 수준의 제품이 될 것이다. 좁스는 투기성 자본의 참여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이번에는 소유권의 과반수를 놓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