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역사 1.머릿말고려왕조의 정치?사회?문화의 중심지로서 개경에서는 고려왕조가 정치를 행하고 지배층을 교육하여 관료로 충원하는 핵심적인 일들이 이루어 졌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정치이념으로는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고려 건국 초기의 학교 교육은 전적으로 신라의 것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독창적인 학교제도를 확립하지 못하였으며 성종대에 이르러서야 고려왕조로서의 학교 제도를 갖게 되었는데, 관학으로서는 중앙에 국자감, 동서학당, 5부학당, 지방에 향교 그리고 사학으로서는 12도와 서당이 그 주종을 이루었다. 이 시대의 교육을 대별하면 학교기관과 과거제도로 나눌 수 있다.2.고려초기(국자감 이전)의 교육개경에는 건국 직후부터 신라의 국학을 계승한 국립대학이 있었다. 건국 직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없지만, 성종 초에 지방에서 260여명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교육을 받도록 했다든가 공로가 많은 선생을 포상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미 그 이전에 학교제도가 대략적이나마 갖추어져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성종은 군주권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위해 유교 도덕을 보금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국에 12목을 실치하고 종래의 지방호족들을 향리로 격하시켰다. 성종 2년에는 모든 주?군?현에 명하여 향리의 자제들을 수도에 모아 수학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주공지풍(周孔之風)을 일으키기 위해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그 가운데서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기용하고자 했다. 성종 11년에 비로서 최고 학부로서 국자감의 창건을 결정하였다.3.국자감의 위치와 변천12세기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남쪽 회빈문(會賓門)안에 있다가 예현방(禮賢坊)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다. 국자감의 위치와 모습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공민왕 때에 있었던 홍건적의 침입이었다. 이때 성균관이 허물어지자 1367년 탄현문(탄현문)안쪽의 숭문관(崇文館) 옛터에 새로 지었다. 원래 이곳은 문종이 창건한 대명궁(大明宮)이란 별궁이었는데, 1072년 6월 송나라 사신 안도 진목이 왔을 때 이름을 순천관(順天館)이라 하고 외국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쓰였다. 그후 숭문관, 홍문관(弘文館)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성균관이 옮겨오게 된 것이다.4.국자감의 구조와 기능국자감은 고려시대의 고등교육기관으로서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을 위한 중심역할을 수행했다. 국자감 안에 국자학?태학?사문학 등의 유학부와 서학?산학?율학 등의 기술부가 있었는데 이곳에 속한 생도는 한 경전을 공부할 때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했고, 다 읽지 못한 사람은 다른 경전을 보지 못하였다. 이곳에는 역시 정해진 교육과정과 수업연한이 있었다.국자감에 재학 중인 학생의 수업연한을 보면 논어(論語)·효경(孝經) 도합 1년, 상서(尙書)·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각각 2년 반, 주역(周易)·모시(毛詩)·주역(周禮)·의례(儀禮) 각각 2년, 예기(禮記)·좌전(左傳) 각각 3년이었다. 대개의 경우 재학기간은 3년에서 9년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효경과 논어를 읽은 다음, 다른 경전을 읽고 아울러 시무책을 짓는 법을 연습하였다. 규정된 연수만 따져보아도 시무책 하나 짓는 단계까지 오려면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려야 했음을 알 수 있다. 경전 외에도 오늘날로 따지면 일반교양이라고 할 수 있는 국어, 설문, 자림, 삼창, 이아 도 읽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경전을 읽는 일 뿐만 아니라 글씨 연습을 위해서 붓글씨도 날마다 한 장씩 썼다.국자감에 재학중인 학생은 3년간만 재학하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국자학 태학 사문학에 재학하는 학생의 정원은 각각 300명이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모두 합하여 300명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는 계층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국자학의 경우 문무관 3품 이상의 자나 손, 훈관 2품으로 현공(縣公) 이상을 띤 사람과 경관 4품으로 3품 이상 훈봉자(勳封者)의 자로 한정되었으며, 태학은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정·종 3품의 증손 및 훈관 3품 이상 유봉자의 자로 한정되었고, 사문학은 훈관 3품 이상 무봉, 4품 유봉 및 문무관 7품 이상의 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당시 국자감을 거쳐 제술업이나 명경업에 응시하였는데, 국자감의 입학에 커다란 제한이 가해졌던 것은 당시 과거에 응시하는 계층을 제한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공민왕 때 유학부와 기술학부가 서로 분리되기 시작해 1352년 십학교수관이 설치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즉 약학은 전의시, 율학은 전법시, 자학은 전교시, 의학은 전의시 등에서 전담하게 하여 특수 분야의 교육은 해당 관서가 맡았다.국자감은 공부를 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서도 그 의미가 깊다. 이곳에서는 공자에 대한 정기?비정기 제사가 행해졌다. 정기적인 제사로는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치러진 석전제가 있었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고려에서 이는 당연히 중시하던 제사였는데,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그 전통이 단절되기도 했었다. 공민왕 때 성균관을 중영하고 제대로 석전제를 치르고자 했으나, 그 절차를 잘 아는 이가 없어 책임자였던 이색위하의 많은 이들이 고민을 했다. 결국 예행연습만 3일 동안 한 끝에 제사를 치렀다고 한다.5.과거제도국자감에서 3년 이상 재학하면 과거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과거제도는 고려의 국학인 국자감과 큰 연관이 되어 있다. 국자감에서 경전을 읽고 붓글씨를 쓰기도한 솜씨를 과거제도에서 발휘하는 것이다.과거는 958년 처음 실시되었다. 초창기에는 중앙관리의 자제인 국학생과 지방 출신인 향공을 막론하고 예비시험 없이 직접 본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후 점차 예비시험제도가 발달하여 국자감 시험인 성균시를 거친 후에야 본 시험인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과거는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고려시대에 관료로 진출하는 데는 음서 등의 방법도 있었지만, 문관의 등용문인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료가 되는 것이 자신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고려서』열전에 실려 있는 총 650명의 관료 중 과거에 합격해서 관료가 된 자가 340명으로 가장 많다는 점이 그 대표적인 증거라고 하겠다. 이런 연유로 부친의 음덕으로 벼슬을 시작한 고위 관료의 자제도 좀 더 확실한 출세 길을 보장 받으려고 과거시험에 응시하기도 했다. 하물며 중앙정계에 배경이 별로 없는 지방 출신들은 더욱더 과거시험에 매달릴 수 밖 에 없었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했다 하더라도 이는 관료자의 후보를 뽑는 것에 불과 하였다. 급제자가 관직에 나아가려면 이부와 병부의 심사과정을 거쳐야 했고, 여기서 집안배경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고려과거의 종류에는 문장을 잘 짓는 자를 뽑는 제술업과 경서에 밝은 사람을 뽑는 명경업, 기술관을 뽑는 시험인 잡업)이 있었다. 이중에서도 행정 실무능력과 문장력 있는 사람을 우대하여 제술업을 중시 하였다.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응시과목 중에서 시?부를 주요 과목으로 했으나, 후기에 이르면 대책과 경학의 비중이 커졌다.6.국자감 설치 이후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동서학당은 이전시기에 있었다가, 원종 2년에 다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몽고와의 관계가 크게 호전되어 그동안 전쟁으로 인해 위축되었던 모든 분야의 재정비를 준비할 때였으므로, 그 동안 전쟁 등으로 폐지되었던 동서학당을 다시 설치 하였 던 것 같다. 이 동서학당은 고려말 공양왕 때에 5부학당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그 전통은 조선시대의 4학(學)으로 이어졌다.중앙에 설치된 교육기관으로 또한 10학이 있었는데, 이 10학은 고려 말에 전문교육기관으로 설치되었다. 공양왕 원년(1389) 설치된 10학은 예학(禮學) 악학(樂學) 병학(兵學) 율학(律學) 자학(字學 : 書學) 의학(醫學) 풍수음양학(風水陰陽學) 이학(吏學)과, 그 밖에 역학(譯學 : 司譯院)과 산학(算學 : 版圖司)등이 있었다. 이 10학의 설치로 성균관(국자감)에서 종래의 율학 서학 산학 등의 기술교육은 분리되고, 성균관은 오로지 유학만을 전담하는 교육기관으로 되었다.
고려사의 편찬과 사료적 가치1.머릿말특정 시대의 문학을 보다 깊이 있고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 정리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며, 연구 자료가 영성한 시대나 영성한 분야에 관한 연구일수록 이와 같은 작업이 지닌 의의는 더욱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경우, 유감스럽게도 그 많던 자료들이 거의 대부분 인멸 되는 바람에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특히 고려 전기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고려시대의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일방적으로 자료의 부족 탓으로만 돌려버릴 수는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자료가 부족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기존 자료를 정리하고 새로운 자료를 찾으려는 노력도 또한 부족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고려시대에는 역대 국왕의 사후에 행해지는 실록 편찬의 기록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을 집성한 『고려왕조실록』이 현존하지 않는 이상,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이 두 사서가 고려사 연구의 기본사료임은 물론이다. 두 사서에 결락된 부분은 개인 문집이나 금석문 등에서 보충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려사』의 가치와 그 중요성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2.고려사의 편찬과 과정마치 고려 정부가 그전 왕조의 정사로서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과 같이 조선도 창건과 동시에 고려사 편찬에 착수했다. 조선초기인 1392년(태조 1) 10월 태조로부터 이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 정도전 등은 1396년 37권의 『고려국사』를 만들어 바쳤다. 정도전과 정총이 책임을 지고 예문춘추관의 신하들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우선 통사인 이제현(李齊賢)의 『사략』, 이인복, 이색의 『금경록』, 민지의 『본조편년강목』 등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역대 고려실록과 고려 말의 사초(史草)를 기본 자료로 삼았다. 이 책은 역성혁명을 일으킨 태조의 입장을 반영해 고려필망론(高麗必亡論)에 입각해 있었고 동시에 정도전과 이방원의 정치투쟁과 관련해서는 정도전의 입장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그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1414년 하륜, 남재, 이숙번, 변계량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6년 대표자인 하륜이 죽자 중단되었다. 이를 잇고자 하는 논의는 세종의 즉위 후 왕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고, 마침내 19년(세종 1) 9월 유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기니, 이들은 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다. 이리하여 본래의 사초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어 제칙(制勅)·태자(太子) 등을 교(敎)·세자(世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도 반포되지 못하다가 23년 12월에 다시 유관과 윤회로 하여금 이 부분을 실록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 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변계량의 반대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31년에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42년 8월에 신개(申>)·권제(權)가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다. 이 책은 48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교감을 거쳐 일단 인쇄되었으나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배포가 곧 중지되었다. 세종은 다시 49년에 김종서·정인지·이선제, 정창손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김종서는 드디어 51년(문종 1) 8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최항 등이 열전, 노숙동 등이 기(紀)·지(志)·연표, 김종서·정인지 등이 교감을 맡았다. 열전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52년(단종 즉위)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인쇄, 반포되었다.『고려사』에 실려 있는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에는, 본기(本紀)라 하지 않고 세가(世家)라 함으로써 명분이 중요함을 보이고, 거짓 왕인 신우(申禑) 부자를 열전에 내림으로써 분수 넘치는 것을 엄하게 처벌하고 충직하고 간사함을 명확히 구분한다 하였으며, 제도를 나누고 문물을 헤아려서 비슷한 것끼리 모음으로써 계통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연대를 헤아릴 수 있게 하며, 사적을 상세하게 하는 데 힘을 다하고, 빠지고 잘못된 것을 메우고 바르게 하려 하였다는 편찬의 방침이 제시되고 있다. 이 방침은 다시 범례에서 각 항목별로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먼저 세가에 관한 것을 보면, 왕기는 세가라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넘는 칭호도 그대로 써서 사실을 보존하며, 일상적인 일은 처음과 왕이 직접 참여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하며, 고려세계는 실록에 있는 3대추증 사실을 기본으로 삼는다 하였다.또한 우왕·창왕을 거짓 왕조로 규정하여 열전에 강등시켰으며,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제현 등의 평론을 그대로 실을 뿐, 따로 작성하지 않도록 하였다. 세가에서는 32왕의 왕기가 46권에 수록되어 전체 분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서술의 방식은 『원사(元史)』를 모방하여 첫머리에 왕의 출생, 즉위에 관한 것을 쓰고 끝부분에 사망, 장례 및 성품에 관한 것을 썼다. 왕의 연대는 실제로는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세가 다음에는 지(志)를 두었는데, 천문·역지·오행·지리·예·악·여복·선거·백관·식화·병·형법 등 총 12지 39권으로 되어 있다. 이 지(志)도 《원사》에 준하여 분류하였으며, 실록 등이 없어져서 빠진 곳은 『고금상정례』『식목편수록』 및 여러 사람의 문집 등으로 보충하였다 한다. 그런데 실제 고려의 제도는 당나라 것을 기본으로 삼고 송나라 것이 덧붙여지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고유의 전통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도병마사·식목도감 및 향직 등 독자적인 제도를 아울러 썼고, 당률을 채용하면서도 실제 고유의 관습법이 적용되고 있었다.지의 맨 첫머리에는 편찬자의 서문이 놓여 있는데, 대개 일반론과 실제 사실에 대한 개설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설명의 큰 줄기는 태조 이후 문종 때까지의 고려 전기를 제도가 정비되고 국세가 번창한 시기로 보고, 무신란 이후 몽골 간섭기에 들어서는 제도가 문란하여 나라가 쇠망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어 본문에서는 먼저 연월일이 없는 일반 기사를 쓰고 그 뒤에 연대가 있는 구체적 사실을 열거하였다. 세가·지 다음으로 표가 들어 있는데, 실제 본문에서는 연표라 하여 하나의 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를 따랐다. 제일 위에 간지를 쓰고 그 아래 중국과 고려의 연호를 썼으며, 고려 난에는 왕의 사망과 즉위 및 중국과의 관계 등 중요한 일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표에 이어 마지막으로 열전을 두었는데, 후비전(后妃傳)·종실전(宗室傳)·제신전(諸臣傳)·양리전(良吏傳)·충의전·효우전·열녀전·방기전(方技傳)·환자전(宦者傳)·혹리전(酷吏傳)·폐행전(嬖幸傳)·간신전·반역전(叛逆傳) 등 총 50권, 1,009명으로 되어 있다. 열전의 구성은 역시 『원사』를 모방하였지만, 그 서문은 이제현이 쓴 제비전(諸妃傳)이나 종실전의 서문처럼 이미 있던 자료를 이용하였다. 그 내용 중 반역전에 우왕 부자를 넣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있고, 문신 위주, 과거 위주로 인물을 선정하여 조선 유학자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으며, 흥망사관에 입각하여 개국공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별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전부터 있던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쓰려고 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여러 차례의 개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고려사』는 종래의 편년체의 역사서술에서 기전체로 변화하여 편찬되었다.고려시대를 이해하는 큰 원칙으로 하는 이러한 역사관의 장점은 첫째, 동양의 전통적인 왕조사 편찬방식과 같이 기본적으로 이전부터 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그 나름으로 재구성하였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둘째, 이렇게 사실을 있는 대로 쓰려고 애썼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러면서도 한편 편찬자인 유학자의 사대적인 명분론이 반영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첫째, 흥망사관에 의해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둘째, 무인(武人)을 천하게 보는 관념과 왕실의 권리를 도둑질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한 데 대한 정통론의 입장에서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다. 셋째, 원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하여 대명관계가 확립된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사 편찬자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 이전 시기에 기록된 고려사 속 사신(史臣)의 견해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여 있다. 넷째, 고려 말 개혁론자의 견해를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에서 고려 당시의 사실과 다른 점이 생기게 되었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3.조선전기의 역사서술
지식의 보급과 송대의 문화1.학문연구의 새로운 움직임2.송대의 문화1)사상2)종교3)역사학의 발달4)가사 문학 - 송사5)민간 예능6)미술공예7)건축?조각?칠기?도자기8)과학 기술3.송나라 문화의 특성동양근세사1. 학문연구의 새로운 움직임당말?오대의 사회적 혼란과 무인체제는 학문연구에 타격을 주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송대의 새로운 학문발달에 영향을 끼친 것은 당대에서 발전한 불교와 도교이다. 송대의 성리학은 당말의 유?불?도 3교가 조화를 이루려는 움직임 속에서 태동하였고, 특히 불교 가운데 선종의 영향을 깊게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송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는 대부분이 불교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그러나 송대에는 당대까지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불교로부터 사상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철저히 이를 비판하여 불교와 결별하였고 유학의 사상성을 회복하였다. 이는 국수주의적인 송문화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특히 송대는 서민사회의 대두와 함께 지주계층의 형성, 그리고 문신관료에 의한 황제전제체제의 확립 등 사회?경제?정치면에서 그 이전 시대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반영하여 사상과 학문면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송대 사대부의 이식가운데는 육조?수당시대와 같은 정치 사회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부정적 생각과는 다른 사대부의 책임의식이 깊이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현실적인 정치와 사회면에서만이 아니고 학문과 문화면에서도 깊게 강조되었다. 이리하여 도교와 불교에 의한 신비주의와 내세관이 사상과 학문을 지배하던 당대까지의 문화성격을 청산하고 정치 경제적 실용주의와 사회질서의 윤리성 문제가 학문연구의 주요과제로 부각되어 학문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송초의 학문과 사상계의 발전은 진단(陳?)등에 의한 은둔주의적 사학강학자(私學講學者)를 선구로 하여 시작되었다. 그 후 호원(胡瑗)?손복(孫復)?석개(石介)등의 석학들이 나와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와 아성하여 체계화된 송학, 즉 성리학으로 발전시켰다.인쇄술은 송대의 문화 및 사회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목판인쇄술은 수?당시대에 시작되었지만 그 광범한 보급은 송대에 이루어 졌다. 특히 국자감이나 전운사와 같은 중앙과 지방의 국가기관이 각종 서적을 대량으로 출판했으며, 이것을 이용해 효율적인 지식의 전달이 이루어 졌다. 이에 따라 서적의 휴대와 보관이 용이하게 되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지술과 인쇄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과거제의 발전이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된다.2.송대의 문화오대분열의 시대를 거쳐, 송조는 중국의 통일을 이루어냈다. 북방에 강적을 가까이 두고 끊임없이 그 중압에 괴로움을 당했다고는 하더라도, 국내는 대체적으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때로는 농민반란의 발발을 볼 수는 있었어도 국지적인 한 때의 사건으로서 진정되어 전국의 안녕은 계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수도 개봉부는 정치의 중심으로서 또 상업의 생생한 무대로써 번영했다.정강의 변)은 송조국가에 있어서는 사활을 제어하는 대파란이었는데, 남송의 부흥을 이루어 국가의 경제력발전은 북송을 초월했으며 수도 임안의 번영은 북송의 수도 개봉을 능가하고 인구 백오십만을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것은 관료?군인을 주로하고, 상인을 포함한 일대 소비도시였다. 송의 문화는 이와 같은 평화변영의 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개화하였다.송대 문화의 전개는 학술?사상?종교?미술공예?산업기술 그 밖의 각 방면에 걸쳐서 나타났다. 그것은 전통의 귀족적 문화에 대비하여 새 시대를 짊어지는 관료와 사인 층 및 상업의 번영을 배경으로 하는 상인서민층의 문화이다. 농업과 수공업 및 상업에서의 발전은 송대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1)사상송대에 있어서는 유불도 3교가 함께 혁신기운이 높았다. 특히 유교는 송학이라고 불리는 신유학이 사변적 우주관에 의거하는 철학으로서 구축되었다. 이러한 신유학의 전개는 송의 새로운 정치지배체제와 조응하는 것이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당대의 귀족정치체제는 끝나고 대신하여 황제의 독재 권력을 잃은 상태였다. 대신 남북조와 수?당에 걸쳐 불교가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성리학은 불교, 특히 선종(禪宗)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에도 오히려 불교를 비판함으로써 유학의 사상성을 회복하려했다. 그래서 이를 신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성리학은 당시 송대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사대부층의 통치이념이기도 했으며, 송조에서 건립된 전제적 황제권의 지배질서를 지탱해 주는 체제교학이기도 했다. 송조의 적극적인 문화정책으로 인해 유교적 소양을 지닌 독서인층이 등장했는데, 이들 사대부는 관료의 예비군 역할을 담당하면서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각을 통해 천하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게 되었다.도덕과 정치를 동일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현실정치에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주의 적인 측면과 엄격한 도학적 윤리성으로 인해, 남송대 정쟁의 와중에서는 위학(僞學)으로 탄압받기도 했다. 그러나 명?청 시대에 이르기까지 체제교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도 전파되어 공인된 교학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2)종교당나라 세종의 배불(排佛)로 인하여 타격을 받은 불교는 송조가 되어 제실의 보호아래 부흥했다. 많은 종파가 있었으나 당시의 종교계의 일반경향으로서 여러 종파가 융합?조화하는 기운이 강했다. 여러 종파 가운데에 선종이 가장 성행해 명승(名僧)도 배출하였다. 천태선?염불선이 성행하였고, 선 본래의 모습으로서의 수련을 중요시하여, 사인(士人)의 교양형성에 이바지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민(民)의 사이에는 정토종이 보급되어 아미타(阿彌陀)신앙에 의한 염불결사가 일어났다. 선종과 정토종의 성행은 중국불교의 형성에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었다.3) 역사학의 발달송대는 역사학분야에서도 괄목할 진전을 이룩하였다. 서민사회와 문신 관료체제의 확립으로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그 위에 유학의 발전과 함께 황제 독재체제에 대한 정통성과 군신의 명분과 의리를 강조한 춘추학이 역사학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에 따라 구양수는 《신당서(新唐書)》와 《신오대사(新五代史)》를 고문으 철학과 역사의식이 잘 담겨져 있다.《자치통감》의 출현은 다른 역사서가 필요 없다고 할 정도의 명저로서 널리 읽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통감에 자극을 받아 주희는《통감강목》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자치통감》의 방대한 내용에서 도덕적 가치가 있는 내용만을 선별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잘 선별하였으므로 사실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또 원추(袁樞)는《통감기자본말》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기전체나 편년체와는 달리 역사를 사건중심으로 서술한 새로운 사체로 주목된다. 남송의 이도(李燾)는《속자치통감장편》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자치통감》이 오대까지 기술하고 있는 것을 계속하여 북송일대의 역사를 객관적이며 사실적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사료의 가치가 매우 높다.4)가창문학 - 송사(宋詞)한의 문, 당의 시, 원의 곡과 나란히 송대의 대표적 문학은 사(詞)이다. 사는 당 중기에 일어나 오대에 번영했고, 송대에 있어서 유행하였다. 사는 절구에 발원하는 노래하는 문학이다. 사는 송대와 같은 서민문화 발전의 시운에 조응하여 번영한 가창문학으로 민간예능으로서의 색채가 짙은 것이었다. 따라서 사녀가 애호하는 바, 가기가 노래하게 된 것은 당연하였고, 술자리의 사이에 속어를 구사하여 인정의 기미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점 음율미사로 기울어 생기를 잃고 쇠퇴하여 , 원대가 되자 문학의 주좌를 희곡(원곡)에 물려주게 된다.5)민간 예능송대가 되어 도시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민계층의 문화적 향상은 민간예능의 발전을 촉진하여 새로운 서민문화의 기운이 일어났다. 특히 송대가 되어 도시에서의 규제와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기 때문에 도시를 중심으로 한 서민문화가 성장했고, 성 내의 각처에는 종합연예시설인 와자(瓦子) 혹은 와사(瓦舍)가 생겨났고, 구란(句欄)이라는 연예공연장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수천 명을 수용하는 것도 있었는데, 구란에서는 가창에 대사를 섞은 잡극(雜劇)과 각종 설화와 잡기가 연출되었다. 이것들은 후대까지 이어져 한층 세련된 고전연극으로 발전한 보였다.이와 같은 보호 장려에 의하여 화원은 융성해졌고, 다수의 뛰어난 화가를 배출하였고, 원체화(院體畵))가 형성되었다. 이를 계승해 남송의 화원도 번영을 계속하였고, 천하의 명화가는 대부분 화원으로부터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7)건축?조각?칠기?도자기건축에 대하여 말하자면 철종의 칙령을 받들어 이성(李誠, 明仲)이 편수한 《영조법식(營造法式)》은 현존하는 최고의 건축서이다. 이것은 고전 가운데에서 건축 관계의 문헌기사를 수집하여 총례적 사항의 설명, 여러 공사의 시방서, 그 품, 재료의 견적을 기술하고 회도를 덧붙인 것이다.불상조각은 선종이 번영한 송에서는 그다지 열심이지 않았고 관음?나한?조사의 여러 상을 만드는 정도였으며, 북위부터 당대에 이르는 조상의 성황과 정수에는 미치지 않는다.칠기제작에는 조각이 중요시되는 척홍(剔紅)이 송대에 있어서 진보하였다. 척홍은 목대의 위에 주칠을 수십 층 덧칠하고, 그것에 인물?누대?화조 등을 조각하는 것으로 금대?은대?석대의 고급품도 있고, 칠은 붉은색뿐만이 아니라 황칠의 바탕에 주칠을 겹칠하는 것이 있고, 오색의 칠을 겹하여 조각의 심천에 의하여 여러 색채와 문양을 표현하고, 그 기술은 정교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또 나전에도 명품이 만들어졌다. 절강의 온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은 칠기의 주산지였다.도자기는 송대 공예 가운데 역대 최고였다. 송대에 보이는 자기의 성황은 차를 마시는 유행에 의해 다기의 수요가 증대함으로서 촉진되었다고 생각되는데 또 동금(銅禁)에 의하여 동기의 제조가 금지된 결과, 종래의 동기를 대신하여 도자기가 필요로 해진 것도 그 원인의 하나로 들 수 있을 것이다.8)과학기술생산의 발달은 과학 발전을 촉진하였고, 송대의 3대 발명품인 화약, 나침반, 활판 인쇄술의 발명이 이었다. 이들 발명품들은 이슬람 세력을 통해 서양에 전해져 그들의 근대 사회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화약은 초석, 유황, 목탄 등을 혼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당나라 초기의 어떤 도사가 연금술의 과정에서 만들기 시작했다는 기록도 다.
종교전쟁과 루이 14세종교전쟁과 루이 14세 시대 노트필기 ^.^근대시대(Modern Age)1400-1870 ;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근대 - 르네상스부터 제국주의 전까지○근대의 시작은 르네상스(Renaissance)1.연구사(1)미슐레 : 1840 전 유럽적인 현상이 아닌 프랑스만의 현상으로 파악.프랑스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의 르네상스를 처음 만듦.「프랑스史」(르네상스에 대한 첫 저서)(2)부르크할트 : 「이태리 르네상스의 문화」르네상스 저서 중 가장 일반적.고전적 르네상스의 의미를 교과적으로 확립.르네상스는 근대의 여명기(중세를 무시한 역사)고대와 바로 연결되는 시기로 파악.(3)중세주의자들(20c 초반) : 중세학자들 ‘중세와 계속’ 되는 시기부르크 할트와 반대되는 의견 등장하스컨스(Haskins) :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시초가 아니 라 12c에도 르네상스가 존재했다고 주장(14세기와 같은 르네상스가 있었다.)호이징가(Huizinga) : 르네상스는 ‘중세의 황혼기’ (중세를 부각)(4)근대사가(20c중반) : 르네상스는 근대의 시작. 중요한 의미를 가짐.근대사가들의 중세학자들과 반대되는 의견 제시, 등장(5)1960년대~ : 중세와 근대의 혼합.중세적인 동시에 근대적인, 중세와 근대의 성격을 모두 가진 중세에서 근 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연속적인 입장)2.어휘(1)Renaitre : 재생, 소생(2)Renascita : 재생, 소생 ; Vassar 「화가열전」- 르네상스의 그림이 고대로부터 부활 했다고 하여 ‘Renascita(재생,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3)Renaissance : 1727년 영국 M.Arnold이 처음 사용함.(4)14~15c변화 - 중세의 신적(종교적)인 세계→세속적인 세계 ↘개인에 대한 관심과 개인 의 경험 중시(개인주의) →르네상스 정신충성의 대상이 변화(기독교 이념→민족주의 군주) ↗3.의의(1)유럽의 근대화를 이루게 한 근대정신운동의 하나(2)내적 발견(인간의 내면에 있는 새로운 것을 발견)(3)문화적 요소에서 발생되기독교로 돌아가자고 주장㉢「우신예찬」㉣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저술할 수 있게 도와줌(2)내용㉠인문주의자-독일-프랑스 : 데타블, 비제, 라볼레, 콩떼인뉴-영국 : 리나카, 콜렛, 토마스 모어, 세익스피어, 베이컨-스페인 : 쉐르반테스, 돈키호테㉡화가-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가 알을 품고 루터가 부화※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로부터 출발※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의 차이점이탈리아의 르네상스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위치지중해(로마인)알프스 이북지역(게르만족)성격로마적 성격게르만적 성격고전매우 친근, 모방적학구적이고 비판적사회개혁기존 카톨릭과 타협교회, 교황 적극적 비판 및 사회개혁 주장인문주의예술적, 심미적, 향락적, 문예 지향적철학적, 사색적, 사회비판적, 종교 지향적바탕도시적, 시민적, 선진적궁정 중심적, 내면적, 후진적9.신항로의 발견 : the Age of Great Voyage(1)원인(동기) - 종래학설 : 오스만 터키가 장악했던 동로마가 육로에 있어서 장애를 받았 기 때문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필요성을 깨달았다.1)콘스탄티노플이 동방무역의 중심이 아니었다.2)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한 후에도 동방산물이 계속 유입되고 있었다.3)동방산물이 계속 들어왔기 때문에 가격변동이 크게 없었다.㉠정치적 측면 : 민족적으로 통일된 왕권이 강화된 국가가 성립. 스페인, 포르투갈이 새로 운 국가로 등장. 기존에 성립된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이미 항로를 개척.㉡경제적 측면 : ①동방산물이 당시에 값비싼 것이었기 때문에 ②동방무역을 독일이 장악㉢종교적 측면 : 기독교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포교와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저항의식이 컸다. (항쟁의식↑)Presten John - Chistian Kingdom : 동방어딘가에 이런 왕국이 존재한 다고 말함.㉣동방에 대한 호기심 : 알렉산더 때 관심이 있었고 로마 때 길이 열림 → 중세시대에는 ?동양(중국) 이런 교류가 단절되게 됨→몽고족(원나라)이 중국을 지배했을 때 다시 열림 〓〉마르코폴되지 않은 분열국가였기 때문에 교황의 권위가 살아 있어서 ‘교황의 젖소’ 라고 불림(착취가 심했음.)- 독일인의 경건한 신앙심 : 중세 교회의 부패에 대한 반발(3)결과 - ①종교개혁의 정당한 평가나 태도가 어렵다. - 카톨릭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반 란이지만 신교에서는 진정한 개혁이었다.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 가 다름.②종교적인 관용이 이루어지고 종교에 대한 신앙심이 높아지고, 자유롭게 된다.③기독교 세계의 통일이 파괴된다.(분열)④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되었다.⑤근대 자본주의 발달에 윤리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칼빈교)(4)여러 나라의 종교개혁*마틴 루터(M.Luther)의 종교개혁(독일, 1517년)- 루터는 중산층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돈이 없는 어려움을 머리로는 이해 하지만 진정 가 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하였다.㉠발단 : 「95개조 반박문」-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교회의 건축을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으로 등장㉡사상 : ?성서지상?신앙지상?직업에 대한 소명의식 - 직업이란 것을 하나님이 주신 업으로 여김. 비활동적 인 금욕주의 배격. 노동중시?만인사제주의 -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고, 성직자가 될 수 있다’㉢전개 - 반박문이 개제 후, John Eck 교수와 공개토론 개최 - Leibzeg 토론회 실패- 3개의 책자 발간「기독교 국가의 개선에 관해서 독일 민족의 귀족 국가에게 보내는 글」「교회의 바빌론 부패」, 「기독교 신도의 자유」- 루터가 파문을 당함.- 보릉스 국회 (karl5세) : 루터에게 반박문을 취소하라고 권유 - 루터의 거부- 보릉스 국회 : 루터의 법률 보호권 박탈-신변에 불안을 느낀 루터는 은거하게 됨(바르크부르크 ))?성서번역, 번역된 성경이 독일에 퍼짐-제후, 농민, 기사 등이 루터에게 호응→많은 반란이 일어남*제세례화 운동 - 토마스 뮌쩌(‘어릴때 받은 세례는 올바르지 않다. 다시 후에 받아야 한다’- 공평, 평등. 완전 평등 주장) - 실패*기사반란(1522) - 지킹켄, 흇텐(하급기사). 당시 하1539). 귀족출신. 스페인에서 창설.1540년에 교황의 인가를 받음②목적 : 카톨릭의 신앙을 전파하고 방어하는 것이 목적③활동 : 교육사업 , 청소년 교육, 신앙심의 확립, 선교활동(군대조직과 같이 엄격)④결과 : ⅰ)카톨릭의 교세 회복에 큰 기여(폴란드, 벨기에, 아일랜드 등)ⅱ)새로운 지역에 카톨릭교 전파(아시아-중국, 일본, 아메리카 등)㉢Trient 종교회의 (1545-1563) - 18년간, 3차례에 걸려 열려진 카톨릭 회의①교황의 권위와 그 우위성이 강조②선생, 선사, 화채설, 연옥에 대한 믿음재확인③카톨릭 교회의 자체개혁ⅰ)성직자에 대한 교육강화와 기강확립ⅱ)성직자 인정ⅲ)교리문답설 작성ⅳ)금서목록, 종교재판소 재설치ⅴ)성직자 언도 정화㉣교황의 개혁①5명②내용 : 성직매매금지, 성직자 족벌주의 배격, 성직자 질 향상, 매물수수금지 =>카톨릭 의 권위 향상③결과 : 카톨릭의 많은 세력 회복, 구교vs신교, 유럽 종교전쟁 발생11.종교전쟁 (Religion Wars)(1)위그노 전쟁)(1502-98) - 프랑스에서 일어난 종교전쟁①원인 : 신교파(콜리그니家) vs 구교파(기즈家)기즈家가 신교도를 학살하면서 전쟁이 시작.발로아 왕조가 단절되고 앙리4세가 새로운 국왕이 됨.②결과 : 앙리4세 즉위 - 브르봉가의 새로운 시작?원래는 신고였는데 구교로 개종낭트칙령발표 : 1598신앙의 자유 확립, 신교와 구교가 대등한 입장 확립※17-18c -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는데 루이 13세 때부터 신교도 탄압, 루이 14세 때 낭트 칙령을 철회, 신앙의 자유에서 다시 카톨릭으로 돌아옴.(2)네덜란드의 독립전쟁(1568-1648)①원인 : -경제적 측면 :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아래에서 많은 세금을 강요당했고, 산업도 스페인을 위해 억제 되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음.-정치 : 스페인-전제주의 국가, 네덜란드도 전제주의 국가각주의 특권이 분리, 인정되지 않음.-종교 : 캘빈파의 신교도(고이센)가 확장되고 있었다.스페인은 카톨릭국가 - 카톨릭 강요정책 실시(스페인c) - 가장 고전적 전형적인 절대주의중?동부 유럽(18c) - 계몽적인 절대주의(2)위치위치특징고대국가중세봉건제근대초(신분제국가)근대의 절대주의 국가근대 시민 국가현대의 대중(민중)국가지리적 특징군주가 모든 세력을 억압군주가 사라지고 귀족, 호족이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농노를 지배왕이나 귀족의 세력이 비슷(왕은 상공시민층의 지지를 받음)몰락귀족, 상공시민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그 위에서 왕이 절대권력행사귀족, 왕의 몰락. 상공시민이 주권자. 귀족과 왕을 타도(시민혁명)상공시민>귀족평민, 일반인이 주권자이중적 성격근대적 성격과 중세 봉건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근대의 절대주의 국가는 근대초 신분제 국가에서 근대 시민 국가로 나아가는 과도기(3)성립 - 봉건귀족 세력의 약화, 상공시민계급이 성장하게 되면서 양세력의 힘이 비슷해짐. 기사들이 몰락(화약, 총, 대포의 발명으로 인해)하고 보병이 등장, 로마법의 부활?마키아벨리 정치론의 영향(군주는 초인적인 역할)배경 - ①중세적인 사회 경제 구조의 변화자급자복의 봉건사회구조가 무너지게 되고 시장경제(화폐경제)가 나타남.농민의 지위↑, 상공업인의 지위↑, 귀족세력 쇠퇴②전술의 변화로 인해 기사에서 보병의 상비군으로 변함.③로마법의 부활 - 마키아벨리)의 사상의 영향(4)특징 - 중앙집권적인 통일왕국봉건귀족 : 관료, 궁정 귀족상공시민 : 경제적 특권?정치적 참여를 위해 왕에게 돈을 지불→왕의 예속(B계급)농민(5)2대지주①관료제 - 절대왕정의 집행기관왕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자(봉건귀족과 상공 시민층으로부터 수급)②상비군 : 절대왕권의 유지기관(질서유지, 왜적방어, 대외원정, 식민지 획등 등)늘 준비되어 있는 군대(용병 : 귀족&일반인)(6)이론적 기반 - 왕권신수설 : 왕의 권리는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①이론가 : 프랑스 - 보쉬에, 보댕영국 - 필머, 제임스1세, 홉스②내용 : ㉠군주는 대관식 때 교회의 수장에 의해 도유식을 했기 때문에 몸 자체가 신성 한 것이다. 신체에 해를 가하거나배
1)배경 : 식민지 시대의 America①이주 : 17c초(1630년) 청교도들이 종교적 자유를 얻기 위해 May Flower호를 타고 메사추세츠 주(州) 에 도착. 첫 이주. “Pilgrim Fathers”)(필그림 파더스) - 순례의 시조㉠이주자 : 모험가, 식민지 경영자, 청교도 (자유 혁명자) 등㉡이주 결과 : 18c초 동부의 13개주(州)가 형성②13개주(州)의 사회구조 및 산업㉠빈부격차가 적고 사회, 지위의 불평등은 조금 있으나 신분의 불평등은 없다.㉡경제적 기회도 많고, 사회적 유동성도 높았다.㉢계급의 구조도 매우 유연하고, 부의 집중으로 인한 대립과 갈등도 적었다.㉣남부는 노예를 이용한 대농장 경영, 북부는 자영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소농과 상공업으로 남북의 격차㉤1636년 하버드 대학 건립, 1704년 보스턴에서 최초의 신문 발간(지적 수준 발달)③통치기구㉠총독㉡식민지 의회(당시 어떤 의회 보다도 가장 민주적이고 큰 권한을 가짐)2)혁명의 원인①7년 전쟁(1756~1763))의 결과로 영국의 식민정책의 변화이전 - 미국 식민정책에 대해 건전한 방임이후 - 철저한 중상주의 정책 ⇒ 식민지의 각종 산업을 국제화?식민지로부터 7년 전쟁에 사용했던 경비를 벌기위해-프랑스와의 전쟁에서 7년 전쟁을 끝으로 승리②GeorgeⅢ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 많은 억압과 간섭3)혁명의 경과①일련의 징세법㉠Sugar Act(1674) - 사탕법. 수입 사탕에 대한 과세 부과㉡Stamp Act(1675)) - 인지법. 신문, 책, 법적 문서 등에 인지를 첨부하여 식민지로부터 세금을 걷어가기 위한 법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 대표없이는 과세도 없다)㉢Declaratory Act(1766) - 선언법. 영국 국왕과 의회가 식민지에서도 입법권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령. 식민지 통제를 위해 제정.㉣Townshend Act(1767) - 타운센트 법. 수입되는 모든 차(茶), 납, 종이, 페인트, 유리 등에 세금을회 법률혁명(농민혁명을 더 강조).⑤루(드)데 : 민중혁명으로 파악.⑥소불 : 프랑스 혁명을 계급투쟁에 의한 전형적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파악.⑦코반 : 프랑스 혁명으로 부르주아가 덕을 본 것은 없다.⑧테일러 : 부르주아 혁명이 아닌 귀족혁명.⑨탈머, 아이젠스타인 : 1,2,3계급의 엉성한 집합체에 의한 혁명.2.원인(=프랑스 혁명의 배경)①정치적 측면 : 절대주의의 지배질서 붕괴, 통치능력 상실(왕권의 무력화와 영주권의 약화로 농민에 대한 지배가 약화되고 지배계급간의 세력균형이 깨어짐.)②경제 : 프랑스 경제 구조의 일대 大 전환기(구조적 大 전환). 영주적 농업경제에서 근대적인 자본주의적인 산업경제로 넘어가는 과정.③사회?신분 : 앙시앵레짐의 모순㉠1신분 - 성직자(2700만명중 10만명), 성직자 간의 계급 존재(상급-주교, 수도원장, 하급-수도사, 목사), 계 급의 격차가 큼. 독자적 성직자회의와 특수법정, 봉건지대와 10/1세를 받음. 명세특권, 전국토 의 10/1을 소유.㉡2신분 - 귀족(40만명), 전국토의 5/1을 소유. 봉건적 권리와 여러 가지 특권, 면세특권.┍대검귀족 - 칼을 찰 특권을 소유.(혈통귀족, 세습적) 궁정귀족-왕의 특혜 : 차이가 큼│ 지방귀족-이름만 귀족┖법복귀족 - 신흥 귀족, 주로 법관.㉢3신분 - 전체인구의 96%. 시민계급(부르주아-금융업, 상공업, 전문직), 임금노동자, 농민 : 가장 숫자가?계몽사상에 깊이 심취, 부유, 지배계급에 혐오감 가짐, 비교적 풍요많음. 10/1세, 간접세, 부역, 공납, 영주 착취 등 각종 악재에 시달림. 귀족에 가장 불만이 많음.3.근인(近因)1)적자 재정 : 루이 14세의 4번의 침략전쟁부터 적자재정 시작①원인 - ㉠국왕의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이 주 재정이나 면세 등으로 수입 감소.㉡무모한 대외전쟁(루이14세~16세)㉢왕실의 과도한 사치2)미국의 독립혁명㉠프랑스 재정의 궁핍㉡사상적 : 계몽사상을 널리 퍼트림.3)계몽 사상의 영향4.경과①재정문제 타개 노력 -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Turg프랑스가 처음으로 프로이센을 이김. 첫 승리㉡1792.9.22 : 제1공화국 선포(공화정 달력의 1년 1월 1일)※왕정→혁명→왕 감금→공식적인 공화정㉢구성 : 자코뱅파를 물리치고 지롱드 파가 주도권 장악㉣국왕 루이 16세 공개 처형결과 - 유럽에 엄청난 충격, 유럽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대불 동맹 결성1차(1793~97) - 참가국 :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 캄포 포르미오 조약2차(1799~1802) - 참가국 : 영, 오, 러시아 - 아미앵 조약3차(1805) - 참가국 : 영, 오, 러 - 트라팔가르 해전4차(1813) - 참가국 : 영, 오, 러, 프 - 나폴레옹 세인트 헬레나 귀향-라이프지히 전투로 끝이 남.5차(1815) - 참가국 : 영, 오, 러, 프 - 워털루 전투(나폴레옹 패배)㉤국내의 위기 : ┍국내 - 혁명 후 발행한 ‘앗씨냐’로 인해 악성인플레이션 발생으로 물가 앙등│ 앙라제)라고 부르는 과격파들의 준동(소동)│ 지롱드파와 자코뱅파의 대립 심화│ 보수파들의 반혁명 반란┖국외 - 대불동맹 결성㉥자코뱅파의 파리 민중 선동 → 지롱드 당 숙청 ⇒ 자코뱅파의 독재 천하㉦공포정치(93-94)ⓐ토지 농민 무상 분배(농민의 보수화) 자코뱅파의 공포 정치 실패의 주된 원인.ⓑ쟈코뱅 헌법 제정(진보적 민주적)ⓒ위기 대응책 마련 : 공안 위원회 구성, 국민 총동원령, 최고가격제(물가를 낮추기 위해), 반혁명 세력 과 불온 세력 대거 숙청 ⇒ 공포정치 시작ⓓ미터법 제정, 혁명 달력 제정(나폴레옹 때 폐지)ⓔ대내외 위기 극복(전세가 프랑스에 유리하도록 호전, 경제 안정, 반혁명 세력 진압)ⓕ자코뱅당 분열 - 당통중심의 온건파 vs 에베르 중심의 과격파ⓖ로베스 피엘(중도파)집권 (공포정치의 대명사)-온건파, 과격파 모두 숙청-방토즈 법 제정(반 혁명 분자의 재산 몰수, 혁명 정부에 충성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줌- 제대로 실 시 하지 못함.)-과격파 숙청은 프랑스 무산 계급 세력을 잃게 되었고, 온건파 숙청은 자코뱅 세력의 약화를 가져옴ⓗ이성 숭배 재전 실시 관리 선발㉧언론 정책 - 파리신문 5/6는 없앰. 학교, 학회, 각종 연극 등은 감시대상. 언론의 자유 탄압3)제1제정 시대(1804~14)?황제가 다스리는 정치 체제 2월혁명?왕정(혁명 전 ~1792)→제1공화정(1792~1804)→제1제정(1804~14)→왕정복고(1814~48)→제2공화정(1848~52)→제2제정(1852~1870)→제3공화정(1871~1946)→제4공화정(1946~1953)→제5공화정(1958~)보불전쟁 2차대전 드골시대?비시정부(1940~40, 임시정부(1944)①황제가 된 나폴레옹 제3차 대불동맹 와해②트라팔가르 해전(1805) - 영국정복을 위해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 함대로 영국 침공, 해군제독 넬슨에 참패③아우스터리츠 전투(1805) - 오스트리아 군 물리침. 신성로마제국 해체(1806)④예나전투 - 틸지트 조약(1807) : 프로이센 군대 무너짐.?프로이센은 치욕, 충격, 자극제? 이 전투와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대 개혁, 국민의식 각성, 경제, 행정, 군대, 교육 모두 개혁나폴레옹 몰락의 가장 큰 역할⑤대륙 봉쇄령(1806 : 베를린 칙령)목적 : 영국을 경제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함. 프랑스 경제 확충방법 : 유럽의 모든 국가 영국과의 교역 금지영국이외의 다른 유럽 국가들이 더 힘듦. (특히 러시아) ⇒ 반항의 기운이 강해지기 시작⑥이 무렵 전후 왕비 조세핀과 이혼. 오스트리아 왕녀와 재혼(1810)⑦반항은 스페인부터 시작. 점점 심해짐 ⇒ 러시아 원정(1812) - 반란 진압의 방법70만 대군 → 모스크바 점령 → 텅 빈 모스크바 → 빈 모스크바 점령 5주후 퇴각 → 게릴라전에 참패 약 40만 명 사망 포로 10만 명 → 나폴레옹 군대 힘 약화⑧라이프치히 전투(1813)) - 처음으로 패배. 제민족의 해방전쟁⑨엘바 섬 귀향(1814) - 제1제정이 끝남.빈회의 개최 →진행이 잘 되지 않는 틈을 타 엘바 섬 탈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1815)㉠빈 회의 지지 부진이 원인㉡프랑스 국민의 환호로 파리 입성㉢워털루 전투(1815) → 민족대립이 심화되었는데 이것이 경 쟁력을 높였다.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됨. 다른 지역보다 발전이 더 나았다.②사회 ? 경제적 측면 : 광대한 해외 식민지 소유하여 초기 형태지만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발전함에 따라 기 업가들의 영향력이 강했다.③사상적 측면 : 르네상스 이후에 사물에 대한 합리적 태도 출현→자연 ? 사회 환경에 대한 지배와 통제의 욕 구를 불러일으킴.3. 英國에서 먼저 일어난 이유①내적 요인㉠요오먼(자영농), 젠트리(중소지주)층이 발달→자본축척, 중상주의에 의한 산업자본 축척㉡농업혁명의 결과 발생한 값싼 노동력㉢풍부한 지하자원(철, 석탄)㉣자연과학과 응용과학이 발달(기계 발명의 토대)㉤광범위한 국내 시장 형성(유럽에서 제일 먼저 내국관세나 봉건적 통행세 폐지, 도로망정비, 운하 개통 등.) : 유럽에서 1인 구매력이 가장 컸다.(내수소비 多→시장 활성화)㉥근대적인 금융구조(Bank of England : 1694)와 재정구조(Public credit : 공공신용제도 )가 발달(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것.)㉦부유한 상인층의 정치적 발언권이 증가, 정부의 무간섭이 이루어짐.②외적 요인㉠수출 공업이 성장하고 면공업이 발달함.(산업혁명으로 면방직이 제일 먼저 발달)㉡프랑스와의 오랜 식민전쟁을 7년 전쟁을 끝으로 영국이 최종 승리하면서 방대한 식민지를 소유하게 됨. (식민지는 원료공급지이자 상품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4. 경과(내용) : 면방직 공업 → 제철업 →교통과 통신(1)면직물 공업 : 존케이(비사), 하그리부스(제니 방적기), 아크 라이트(수력방적기), 크롬프턴(물방적기), 휘트 니(조면기), 카트 라이트(역적기)(2)증기기관 Newcomen→James Watt가 개량증기를 기계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됨.(3)제철업, 석탄 : 1730년대에 용광로가 발명(석탄의 코크스를 이용해 열을 높임), 코크스를 이용한 새로운 제련법 발달, 석탄법 발달(연료와 난방을 석탄으로 사용→석탄사용량이 증가 : 스모그-London Fog 급증)(4)교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