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國文槪要 ........ 2머 리 말 ........ 4Ⅰ. 광평성체제의 성립과 그 성격 ... 41. 광평성체제의 성립 ............. 42. 광평성체제와 신라관제의 비교 ... 6Ⅱ.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왕권의 전제화 .............. 91. 광평성체제의 변화 ............ 92. 광평성 시중의 정치적 지위 격하 123. 내봉성의 격상 ................ 134. 순군부와 내군의 설치 ......... 15맺 음 말 ........ 17參考文獻 ........ 18國文槪要궁예가 중앙 정치조직을 처음으로 마련했던 것은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던 896년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계속적으로 제도를 정비하였고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한 이후 보다 짜임새가 있어지게 되었다. 904년에 백관을 설치하고 광평성과 병부를 비롯한 여러 관부를 설치하게 된다. 당시 설치된 관부 중에서 최고의 관부는 광평성이고 이는 한동안 정치적 권력의 핵심에 해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중앙정치조직의 정비를 광평성체제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궁예 관제는 그 전의 전통으로부터 이탈하려고한 독자성을 지니고 있고, 신라관제에 비해 더 확대 운용되었으며, 실질적 기능을 담당하는 하부구조까지 구비하여 방대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궁예정권은 901년에 후고구려건국과 함께 성립되었는데, 이는 '호족연합정권'의 성격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궁예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하였을과 그 성격1. 광평성체제의 성립궁예가 중앙 정치조직을 처음으로 마련했던 것은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던 896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궁예가 철원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무렵의 사정을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삼국사기》50 궁예전)즉, 철원을 근거지로 삼은 궁예가 중앙 정치조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였음을 알려준다. 이후 계속적인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 졌을 것이고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이후 중앙의 정치조직은 보다 짜임새 있게 만들어졌을 것이다.궁예는 904년에 百官을 설치하고 국호를 摩震, 연호를 武泰로 하였으며) 廣評省과 兵部를 비롯한 여러 관부를 설치하였다.) 다음의 사료를 보면,ㄱ. 天祐元年甲子 立國號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ㆍ徐事(今侍郞)ㆍ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ㆍ大龍部(謂倉部)ㆍ壽春部(今禮部)ㆍ奉賓部(今禮賓省)ㆍ義刑臺(今刑部)ㆍ納貨府(今大府寺)ㆍ調位府(今三司)ㆍ內奉省(今都省)ㆍ禁書省(今秘書省)ㆍ南廂壇(今將作監)ㆍ水壇(今水部)ㆍ元鳳省(今翰林院)ㆍ飛龍省(今太僕寺)ㆍ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ㆍ植貨府(掌栽植菓樹)ㆍ障線府(掌修理城隍)ㆍ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ㆍ元輔ㆍ大相ㆍ元尹ㆍ佐尹ㆍ正朝ㆍ甫尹ㆍ軍尹ㆍ中尹等品職 (《삼국사기》50 궁예전)이 때 광평성의 장관인 匡治奈는 물론 최하위 관직으로 여겨지는 외서까지 관원을 채웠다고 했으므로 병부 이하 다른 간부들의 관직체계와 관원도 충원하였을 것이다. 이는 궁예가 904년에 중앙정치조직의 정비를 일단락 지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위 사료(ㄱ)에 나오는 여러 관부들 중에서 최고 관부는 이 당시 설치된 광평성이다. 그리고 적어도 한동안은 정치적 권력의 핵심에 해당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904년에 이루어진 중앙정치조직의 정비를 광평성체제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궁예 관제의 특징을 보면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궁예정권의 관부 명칭은 신라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병부와 조위부를 제외하면 신라의 관부와 여러 관부에 각각 해당한다. 그러므로 내봉성을 어사도성에 비겼던 것은 내봉성이 人事를 담당하는 기구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내봉성은 신라의 位和府에 해당하는 관부였던 것이 된다.) 또한 내봉성의 이름이 국왕의 측근에서 명령을 받드는 관부였음을 주목하여 본다면 인사를 담당하였던 내봉성이 궁예의 近侍機構로서 인사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던 궁예의 의도가 반영되었던 결과가 아닐까 한다. 광평성의 설치로 지방 세력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하였던 궁예가 그 반대급부로서 인사권을 차지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왕권이 지방 세력을 압도할 수는 없었고, 그들과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왕권 강화를 위한 궁예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가령 내봉성이 궁예의 근시기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열이 겨우 9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내봉성을 통해 인사권을 장악하려고 했지만 이에 대한 지방 세력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고, 그 결과 내봉성의 서열이 9위에 그쳤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궁예의 의도가 광평성체제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호족연합정권’을 뒷받침하는 중앙정치조직이었다고 파악된다.)Ⅱ.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왕권 강화1. 광평성체제의 변화904년 성립된 광평성체제는 그 후 재정비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그 전모를 알려주는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고려사》권1. 세가1, 태조 원년(918)6월 신유조에 나오는 인사발령을 통해 어느 정도 그 변화의 양상을 볼 수 있다. 이 인사발령은 왕건이 즉위한 지 6일 만에 나온 것으로, 거기에는 904년 이후로부터 태봉이 몰락한 918년까지의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다음 표에 정리하였다.이를 904년 성립 당시의 광평성체제와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먼저, 에 나오지 않는 관부들을 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904년 이후성은 예궁전을 개명한 관부였다. 위의 두 사료를 보면 진각성은 이른바 한화정책이 추진되었던 경덕왕 대와 9세기 중엽에 사용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대룡부에서 창부로 수단에서 도항사로의 이름 변경을 한식개명이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시대의 한화정책이 왕권강화를 촉진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광평성체제의 변화도 태봉 대 왕권의 강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2. 광평성 시중의 지위 격하태봉 대 광평성 시중의 정치적 지위를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다음의 사료를 들 수 있다.ㅂ. 以前侍中具鎭爲羅州道大行臺侍中 鎭辭以久勞前王 不?行 王不悅 謂劉權說曰 昔子歷試險阻 以未嘗告勞者 實懼嚴威也 今鎭固辭不行 可乎 權說對曰 賞以勸善 罰以懲惡 宜加嚴刑 以戒群下 王然之 鎭懼謝罪 遂行 (《고려사》1 태조 원년(918) 9월 계사)위의 사료(ㅂ)에 따르면 구진은 918년 9월 당시 전 시중이었다. 왕건이 즉위한 것이 그 해 6월이었으므로 그는 궁예 밑에서 시중을 역임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구진은 태조가 자신을 나주도대행대시중에 임명하자 그를 사양하면서, 오랫동안 전 임금인 궁예에게 노고를 바쳤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가 바쳤다는 노고란 자신이 궁예 하에서 시중을 비롯한 여러 가지 관직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궁예에게 충성을 바친 시중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 지방 세력의 대표자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즉 구진이 광평성 시중으로서 지방 세력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구진이 나주도대행대시중의 직을 사양하자 태조가 그를 불쾌히 여기면서, ‘예전에 내가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일찍이 노고를 아뢰지 않은 것은 실로 무서운 위엄을 두려워서였다.’고 유권열에게 말하였음이 주목되는데 그가 두루 겪었다는 어려운 일들은 주로 그가 군사 지휘관으로서 치렀던 여러 전투들을 지칭할 것이다. 그런데 태조도 구진과 마찬가지로 시중을 지냈고 이를 고려한다면 태조가 말한 노고에화를 가져 올 것으로 믿어진다. 이 점에서 순군부는 최고지휘관으로서의 궁예의 지휘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진 대에도 출전 명령권 등 군의 최고 지휘권이 궁예에게 속하여 있었지만) ‘호족연합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궁예의 지휘권 강화라는 것은 결국 왕권의 강화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하여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순군부를 통해 궁예는 군부에 대한 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통제권을 행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한편 순군부 설치를 왕권강화와 관련지어 볼 때 병부의 권한을 나누어 순군부를 설치하였다는 점은 병부가 병권을 독점하였던 것을 우려하여 권한을 축소시키는 한편 순군부를 새로이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순군부의 설치는 병부가 군사 업무를 독점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왕권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도 짐작되는 것이다.내군은 그 명칭으로 미루어 보면 친위군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임무는 바로 궁예의 신변 경호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군에는 또 다른 임무가 주어 졌던 것은 아닌가 한다.ㅇ. 伊昕巖 業弓馬 無他才識 見利躁求 事弓裔 以鉤距得見任用. (《고려사》127 이흔암전)ㅈ. 王謂韓粲聰逸曰 前王信讒好殺 以卿貫鄕靑州土地沃饒 人多豪傑 恐其爲變 將欲?之 乃召軍人尹全ㆍ愛堅等八十餘人 俱以非辜 械擊在途 卿其?往 放還田里. (《고려사》태조 원년6월 무오)위의 (ㅇ)에 의하면 이흔암은 활 쏘고 말 달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였다는데 여기서 그는 전문적인 군인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궁예를 섬기면서 남의 비밀을 탐지하는 것으로써 출세를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군 내부의 여러 가지 동향, 가령 반 궁예적인 움직임 등을 탐지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궁예가 이흔암처럼 군 내부의 움직임을 감시할 인물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런 임무를 수행할 관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또한 (ㅈ)을 보면 군인 윤전 등 80여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