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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0년대경의 동양과 이후 200년
    1800년경의 동양과 그후200년【 목 차 】Ⅰ. 서론1. 중국2. 한국3. 일본Ⅱ. 본론Ⅲ. 결론Ⅰ. 서론1800년경의 동양과 그후 200년 간의 역사들은 근대사라기보다 현대사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번 과제 역시 중국과 한국, 일본 삼국의 영향관계에서 이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인데, 이 시기 세 나라의 공통점이라면 서양 열강의 개방요구에 따라 일대 격변기를 겪었으며 그로 인한 각 국의 대응 양상과 발전 과정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근대를 시작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그 전개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Ⅱ. 본론1. 중국1) 중국 전통사회의 동요와 아편전쟁1800년경의 청조는 토지소유의 불균형이라는 사회적 모순이 점차 심화되고 있는 시기였으며 백련교도의 반란(1796~1804)과 인구의 급증?유동의 심화, 관료사회의 부패, 군사력의 약화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유럽 열강의 개방 요구가 더해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는데, 이는 상품시장을 확대하려는 자본주의의 속성이 반영된 것으로 공행체제와 편무역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중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비단?차(茶)?도자기 등이었고, 영국은 약간의 모직물과 향료 정도여서 비단과 차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은(銀)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8세기 말 영국 정부가 차에 대한 수입관세를 인하하고부터 일반 국민 사이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보급되어 홍차의 수입이 급증하였다.1832년까지 중국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의 목화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함으로써 차의 구매자금을 조달하려고 하였다. 특히, 그들이 전매제도 아래에서 중국인의 기호에 맞도록 정제하여 모험적인 민간상인에게 팔아넘김으로써 중국에 밀수된 아편의 양은 해마다 격증하였다.1830년대가 되자 중국의 은 값이 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은화의 등귀(騰貴)는 재정과 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상 동전을 사용하면서, 이것을 은으로 환산하여 납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민에게 있어 동전에 대한였다. 1864년 국내외 연합세력의 협공 속에서 14년간에 걸친 태평천국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중국의 봉건 통치계급과 서양 열강 세력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민족운동이었다.‘양무'란 말은 청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와의 관계?교섭 사무 일체를 지칭하는 말로 아편전쟁 이후 위원, 임칙서 등에 의해 주창되었으며, 지방의 유력한 관리인 증국번, 이홍장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초기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변경방비 등 군사력 증강에 역점을 두었으나, 점차 교육?실업 등 각 방면에 걸친 개혁운동이 되었다.이 운동의 추진은 청나라 정부가 1861년 북경에 총리아문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교육분야는 인재양성을 위한 학교설립으로 두드러진 성과를 나타냈다. 양무운동은 중화사상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양무론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서 절충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불가피했다. 거기에 청?프전쟁(1884~1885)의 패배로 군사개혁에 의한 부국의 달성이 좌절되자, 1880년대 후반에는 양무비판론과 함께 정치개혁이 주장됨으로써 점차 쇠퇴했다.변법자강운동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은 무력하게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되어야만 했다. 심각한 민족적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강유위, 양계초 등을 대표로 하는 유신파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변법유신운동을 일으켜 국가를 부흥시키고 중국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였다.유신파들은 전통적인 군주전제체제 대신에 입헌군주제를 실시할 것과, 유가경전(儒家經典)의 반복을 내용으로 하는 팔고문 시험 제도를 폐지하고 서방의 정치사회학설과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 학교 공장 철도 광산 상업을 부흥시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것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여러 차례의 상소를 올려 자신들의 주장을 조정에 진술하였다.유신파의 주장은 청 정부내에서 광서황제를 필두로 하는 일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명정국시(明定國是) 조서를 반포하여 변법의 결심을 표명하였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9월 2국주의의 중국 분할 야욕에 대하여 심각한 타격을 가한 민족운동이었다.20세기에 들어선 이후에 중국의 민족자본주의 경제는 비교적 크게 발전하여 중국사회에는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였다. 끊임없이 고조되는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 투쟁 속에서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자산계급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1911년 쑨원이 영도한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쑨원은 중국의 위대한 자산계급 혁명가이다. 1905년 그는 일본에서 중국 최초의 자산계급 정당인 동맹회를 창설하여 민주주의 혁명 강령을 제기하였다. 후에 쑨원은 이상의 16자로 된 동맹회의 강령을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 즉 삼민주의(三民主義)로 개괄하여 중국에 자산계급 공화국을 건립하려고 하였다.동맹회가 성립된 이후, 중국 각지에서 수 차례의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1911년 10월 10일, 호북 무창에서 일어난 군사봉기가 성공하자 혁명의 열기가 급속도로 발전하여 전국을 휩쓸었다. 1912년 설날,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남경에 성립되고 쑨원은 임시 대통령을 맡음으로써 마침내 신해혁명은 성공을 거두었다.신해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이민족에 의해 건립된 청왕조의 160여년 통치를 무너뜨려 2천여년에 걸친 중국의 봉건군주제를 종결시키고 중화민국을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중국의 민족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였고 자산계급의 역량이 미약하였기 때문에 자산계급 혁명 정당은 원천적인 연약성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광대한 민중들을 충분히 움직여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하도록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수세력과 타협을 하였다. 1912년 2월, 입헌 군주파와 북양군벌(北洋軍閥) 위안스카이의 협공으로 쑨원은 임시 대통령직을 물러나야만 했다. 결국 신해혁명의 성과는 위안스카이에게 넘어감으로써 중국은 독립된 자산계급 민주국가를 이룩할 수 없었다.3) 민족운동과 국민혁명새로운 정세와 혁명사상의 영향으로 1919년 현대사에서는 이 시기를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라 일컫는다.1927년 장개석의 공산당에 대한 무력탄압으로 인해 중국공산당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에 붕괴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1927년공산당원 주은래 등은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국민당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부터 중국공산당은 독자적인 무장 능력을 갖게 되었다. 8월, 중앙에서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심각한 과오를 범한 지도자 진독수의 직무를 해제시키고, 토지혁명과 무장투쟁을 통하여 국민당에 항거한다는 방침을 확립하였다.장개석은 4?12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에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무장혁명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군사토벌을 개시하였다. 1934년 장개석의 군사토벌을 벗어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의 동북을 점거한 후 심각해진 민족적 위기를 구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공농홍군은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를 철수하기로 결정, 북방으로 이동하는 전략의 대전환을 시작하였다. 장정 도중 1935년 중국공산당과 홍군 속에서 모택동의 지도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로부터 새로운 지도자를 찾게 된 중국공산당은 혁명의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1937년 7월 7일, 중국의 동북을 점령하고 다시 화북으로 진격한 일본 침략군은 북경 부근에서 노구교사변을 일으켜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중국의 군대도 강력한 저항을 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하였다.항일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1936년 서안사변이 발생하였는데, 그 결과 장개석은 강제적으로 공산당과 항일 공조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을 실현하게 되었다.그러나 장개석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중화민족이 망국의 위험에 직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당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결과적으로 항일의 주요 책임은 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八路軍)과 민중에게로 부여되었으며, 항일전쟁의 마지막 1년 동안에 공산당이 이끄는 군대와 민중들은 일본 침략大臣) 일행을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의 포격에 대하여 힐문함과 아울러 개항을 강요하였다. 2월에는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2척, 운송선 3척에 약 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 갑곶에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통상의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고 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와 협상하게 한 결과, 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2) 근대의식의 성장과 민족운동의 전개위정척사운동은 개항이전 이항로와 기정진 등의 척사위정론을 필두로 시작되어, 개항앞뒤의 개항반대 상소운동과 1895년 을미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봉건체제를 유지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면서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반 침략적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녔다.개화운동은 개항을 불기피한 시대적 흐름으로 알고 봉건체제를 개혁하려 한 사회개혁운동으로 갑신개혁(1884), 갑오개혁(1894)으로 이어졌으며, 그 뒤 광무개혁, 독립협회운동과 문화계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초기에는 일부 중인층이 참여하여 개화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주로 양반 관료층에 속하는 신 지식층이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근대화운동이었다. 개항 뒤 반봉건 농민항쟁은 1894년 농민전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 뒤 영학당운동, 활빈당운동, 한말 의병전쟁으로 계승된 이 흐름은 농민층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사회변혁운동이자 민중중심의 반 침략 민족운동이었다1894년 농민전쟁이 좌절된 뒤 제국주의열강이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광산 채굴권, 철도부설권 등을 둘러싼 구미열강과 일본의 경제이권 침탈은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또 정치, 군사적으로 청을 대신한 러시아와 일본이 각축하면서 우리 나라를 반(半)식민지사회로 몰아갔다.식민지화의 위기 앞에서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봉건유생들은 의병봉기를 통해 난국을 벗어나고자 하였다. 광무정권과 독립협회는 삼국간섭 뒤에 일시 형성된 제국주의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위로부터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여 그 위기를었다.
    인문/어학| 2008.02.09| 9페이지| 1,500원| 조회(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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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0년경의 동양과 이후 200년
    1600년경의 동양과 그후 200년【 목차 】Ⅰ. 서론Ⅱ. 본론1) 조선2) 중국3) 일본Ⅲ. 결론Ⅰ. 서론아시아는 1600년대에 중요한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의 결정적 계기는 1592년과 1597년의 일본의 조선침략이 계기가 되겠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으며 중국은 정통 한족 왕조인 명(明)이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淸)이 1644년 대륙을 지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의 경우, 1603년 3번째 무사정권인 도쿠가와 막부를 성립하게 되면서 1600년경 이후의 조선, 중국, 일본의 삼국은 일대 격변을 겪게 되는 것이다.본 과제에서는 수많은 동양의 국가들 중 조선과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1600년경과 그 이후의 200년의 시대적 흐름과 특성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Ⅱ. 본론1) 조선조선은 이 시기에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게 된다. 양난(兩亂) 이후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데, 인구의 격감으로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그로 인한 민란이 빈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조세와 요역, 신분제도가 동요하게 되면서 지배체제의 모순이 폭로되기 시작하였다. 통치체제 역시 개편되었는데 이는 생산력의 증대와 시장권의 확대와 더불어 사회구조의 변동을 초래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붕당 정치가 극심해지면서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시행, 안정을 꾀하고자 노력하였다.사회, 문화적 측면을 살펴보자. 초기에 유교적 민본주의를 지향했던 조선사회는 철저한 신분사회이자 가부장적 부계사회였다. 장자상속, 남존여비, 재가금지, 서얼차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법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기본으로 대명률(大明律)을 본따 만들었으며 관습법을 지향하였다. 또한 초기의 향촌조직은 면리제(面里制)를 시행하였으며, 향약과 친족 중심의 동족 부락을 구성하였다.과전법, 직전법의 초기 토지제도는 16세기 중엽 녹봉제로 전환되어 지주-전호제로 발전되었다. 조세제도의 경우 조, 용, 조 제도로 1500년대 초 농민의 부담이 가중 확대와 농업기술의 발전, 시비법, 목화재배, 약초와 과수 재배, 이앙법, 수리시설, 농기구 개량, 광작(廣作)등의 실시는 농업생산성을 향상시키게 되고 농민의 계층분화가 이루어졌다.양란의 발발 이후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음은 물론, 광산개발과 화폐사용이 증가되었다. 또한 양반의 계층분화와 신분상승, 중간계층의 성장 역시 초래하게 되었다. 문화적으로는 한글이 창제되고 역사서와 지리서, 윤리서를 편찬하였다. 또한 경국대전의 완성은 법 제도를 정비하게 만들었고 과학기술 또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민족 문화의 발달은 문학에서도 나타나는데 시조, 가사, 패설, 소설 등에서 산천의 아름다움과 자연 속의 은둔적 생활의 아름다움 노래하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였다.유학의 사상적 발달은 송대에 성리학을 낳았으며 조선에 들어와 정치 지도 이념이자 사회의 개혁과 국가운영의 기초가 되면서 더욱 발달하였다. 이언적 - 이황 - 김성일은 유성룡의 주리론을 계승한 영남학파였고 서경덕 - 이이 - 조헌 등은 김장생의 주기론을 계승,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또한 예학(禮學)과 보학(譜學)이 발달하였다.그러나 성리학에 대한 반발은 양명학을 나았으며 비교적 중국에서는 성행한 양명학이 조선에서는 크게 위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극히 일부지역 - 강화도-에서 양명학이 수용되었는데 정제두를 중심으로 한 이들을 강화학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淸)나라가 들어서면서 중국학자들에게 그간 학문연구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세치용적 학풍을 띤 실학이 대두되었으며 실리 중심의 학문을 뒷받침할 근거를 고문에서 찾아내는 고증학 또한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성향을 본받아 실학과 고증학, 국학 연구가 일어났던 것이다.종교적 측면을 살펴보면 이 시기에 이르러 천주교와 서학이 전래되었으나 유교적 지배원리에 어긋난다하여 많은 탄압을 받게되었고 불교는 국가의 간섭과 통제 속에서도 궁중과 민간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도교와 풍수지리설, 어지러다.명(明) 희종은 즉위 7년 만에 죽었는데 그 뒤를 이어 17세의 동생인 16대 의종 숭정제가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의 황제였지만 그는 파국으로 치닫는 명 황실을 구해내고자 노력했다. 즉위 후 숭정제는 권세를 쥐고 있던 환관 위충현을 제거하였으며 내각을 여러 번 교체하는 등 나라를 일으키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으나 능력 있는 인재를 구하지 못하여 국력은 점점 더 약해져만 갔다.그 무렵 명의 이곳저곳에서는 도적세력이 계속해서 나타났는데 이중 이자성의 무리가 가장 세력이 컸다. 이자성은 역졸 출신으로서 도적의 무리를 몰아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부호들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의적 행세를 했다. 그의 인기는 계속 치솟아 1644년 국호를 대순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된 그는 곧바로 군대를 몰아 북경을 쳤는데 그때 명의 정예부대는 모두 청나라(여진족이 세운 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에 전진 배치되어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맞설 군대도 없이 황궁은 포위되었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황태자와 황자들을 외가로 피신시키고 황후는 스스로 자결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두 공주를 죽였다. 그리고는 자금성의 뒷산 만세산에 올라 옷깃에 "나는 죽어 지하에 가도 선왕들을 뵐 면목이 없어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짐의 유해가 도적의 손에 찢기는 것은 상관하지 않으나 단 한명의 백성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이로써 1644년, 명의 276년에 걸친 역사는 끝을 내리게 되고, 한족에 의해 성립된 마지막 통일왕조는 막을 내렸다명 말기 임진왜란 출병 등으로 만주족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자 여진족의 추장이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국호를 후금이라 하여 스스로 한의 위에 올랐다. 태조는 명을 계속 공격하는 등 청나라의 기반을 닦은 후 2대 태종에게 후금제국을 넘겨주었다. 이후 그는 조선을 두 차례에 걸쳐 침략하여 강화를 성사시켰으며(병자호란)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제위에 올렸다.청나라원에 이어 전 중국을 지배한 두 번째 정복왕조였던 것이다. 청은 특히 ‘강희 - 옹정 - 건륭’ 의 3대에 이르러 130여년간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당시 청은 번이라는 것을 설치하여 변방의 방비를 맡기고 있었다. 유력한 군벌을 왕에 봉하여 번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번 세력들이 점점 강해져 막대한 부와 강한 군대까지 거느리며 황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강희제는 번 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는데 가장 큰 번 세력이었던 오삼계가 이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오삼계는 다른 세 개의 번 세력을 모두 모아 막강한 군대를 조직하여 청 왕조를 위협하였는데, 이에 강희제는 팔기군을 소집하고 선교사로 북경에 머물던 베르비스트에게 명해 경량 대포를 각 전선에 조달하도록 하였다. 강희제는 각 전황을 모두 조사하여 친히 전투를 지휘하였는데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장기전을 펼쳤다.명 황실을 스스로 배신했던 오삼계는 명을 다시 재건한다는 모순된 명분으로 반란군을 일으켰는데 이런 명분으로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불리했다. 게다가 나이가 70을 바라보게 되면서 다급해진 오삼계는 국호를 주(周)라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만 같은 해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이후 반란군은 힘없이 모두 무너졌으며 8년 여에 걸친 '3번의 난'이 평정되었다.강희제는 또한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였고 조선과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 경계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그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사서삼경은 물론이며 서양의 선교사들에게 서양의 학문도 배워나갔다. 또한 궁중의 화장품과 향응비를 모두 없애고 환관, 궁녀의 수를 대폭 줄였으며 자신의 옷 치장도 매우 검소하게 하였다. 치국에도 힘써 황하 치수 공사를 완성하였으며 흉년이 들었을 때 토지세와 소작료를 감면하게 하는 등 사회 안정에 힘썼다.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5대 옹정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건륭제는 선대 2대에 걸친 선정 덕에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건륭제 융합, 효과적으로 대륙을 지배함은 물론, 주요 관직에 만주인과 한족을 동수(同數)로 임명하고 유교적 통치이념을 앞세우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문화사업을 시행하는 등의 만주족과 한족의 효과적 통치를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명대(明代) 초기부터 청대(淸代) 중기까지 약 470년간 중국은 줄곧 통일된 다민족 국가였다. 청왕조의 국경은 서로는 파미르고원, 북으로는 시베리아, 동북으로는 외흥안령(外興安嶺)을 따라서 대해(大海)에 이르고, 동으로는 태평양의 대만과 거기에 소속된 섬들에까지 이르며, 남으로는 남사군도(南沙群島), 서남으로는 티베트(西藏) 운남(雲南)에 이르렀는데, 청왕조의 면적은 지금보다도 더 광대하였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은 광대한 영토를 가진 통일된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각 민족의 관계는 더욱 긴밀하였으며, 사회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도 계속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에는 사치와 부패가 만연하면서 1796년 백련교도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청의 세력이 약화되기에 이른다.명대 후기에는 사상계의 주류가 형성되었는데 명나라 말기에 이지(李贄) 등의 급진적 성격의 양명좌파에서 극단적 유심주의, 즉 수양과 경서를 경시하고 명교의 윤리에 대한 반항을 주창하는 학파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청(靑)의 건국과 명 멸망에 대한 반성은 성리학과 양명학에 대한 반발을 나았음은 물론 경세치용의 성격을 가진 실학 대두되었으며 실리 중심의 학문을 뒷받침할 근거를 고문에서 찾아내는 고증학 또한 발달하게 되었다.이 시기(명나라 말), 서양의 대항해와 종교개혁으로 서양문화가 점차 대륙에 전래되기 시작하였다.3) 일본일본은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 지배권을 확립하면서 1603년 세이다이 쇼군에 임명된다. 그러면서 에도, 지금의 동경에 에도 막부(혹은 도쿠카와 막부)를 세우고 1615년 오사카 성을 공격해 토요토미씨를 멸망시키면서 일본의 세 번째 막부가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에도 막부는 쇼군과 다이묘(大名)가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다.
    인문/어학| 2008.02.09| 5페이지| 1,000원| 조회(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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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00년경 중국과 이후 400년
    - 1200년경의 동양과 그후 400년 -【 목 차 】Ⅰ. 서론Ⅱ. 본론1. 동아시아1) 한 국 - ① 고려 ② 조선2) 중 국 - ① 원 ② 명3) 일 본 - ① 가마쿠라 막부 ② 무로마치 막부2. 중앙아시아1) 인 도 - 델리 술탄조3. 서아시아1) 터 키 - ① 셀주크 투르크 ② 오스만 투르크 제국Ⅲ. 결론Ⅰ. 서론‘동양’은 동아시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까지 지리적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국가만큼이나 역사 또한 폭 넓다. 동양 모든 국가의 400년간 역사를 다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나 그것이 사실상 힘든 일이기에 본 과제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과 함께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 그리고 한 제국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지금의 터키에 해당되는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수업 내용에 따르면 1200년경은 역사상의 또 다른 전환기이다. 한국은 무신의 난이라는 혼란기가 진행되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몽고의 징기스칸이 일어나 동양만이 아니라 서아시아와 서양에도 일대 충격을 주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첫 번째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고 서아시아에서는 셀주크 투르크와 압바스조가 붕괴된 시기였다.그러면 지금부터 1200년경의 동양과 그 후 400년의 세계를 살펴보도록 하자.Ⅱ. 본론1. 동아시아1) 한국① 고려(高麗, 918~1392)이 시기의 고려는 무신의 난 이후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해 그후 4대 60년간 최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나 1231년 몽고의 침입으로 개경이 포위되어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그 후 몽고는 여러 차례 침입을 하였으며 우리 민족은 삼별초 등 끈질긴 항쟁을 거듭하게 된다. 최씨 정권의 붕괴 이후 원종(元宗)은 몽고와 화의하여 1270년에 개경으로 환도하게 된다.그 후 원의 일본원정에 동원되고, 군수물자를 징발하게 되었으며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제주)가 설치되어 내정간섭과 경제적 수탈 등이 자행되었다. 공민왕(恭愍王)때에는 신돈이 등용, 반원개혁 정치를 실시하기도 하였다.신진 사왕조를 전복, 1392년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② 조선(朝鮮, 1392 ~ 1910)이성계는 한양(漢陽)을 수도로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데 국제적으로 명과 일본에 대한 실리 추구의 능동적 외교를 실시하였다. 태종(太宗) 때에는 공신세력을 견제하였으며 사병제도를 혁파하고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사원전과 사원 노비 제한, 양전 사업과 호패법, 신문고 등을 설치함으로써 국가기반을 강화하였다.세종(世宗) 때에는 황희. 맹사성 등 청렴한 재상 등용하고 집현전을 설치하였으며, 유학자 우대하여 유교정치를 실현하려 노력하였다. 세종은 왕조와 민생을 안정시키고 한글의 창제와 더불어 4군과 6진 설치로 현재까지의 국경선을 확정짓게 된다. 또한 왜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를 정벌하게 된다.세조(世祖) 때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었는데 권신과 지방 세력이 억제되는 등 중앙집권정책과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였다. 성종(成宗)은 경국대전을 완성해 집권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유교적 법치국가의 면모를 이룩하게되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여진족을 토벌한다. 성종 년간 전후 사림 세력의 대두는 훈구 세력과 대립하기에 이르고, 연산군(燕山君) 때 사림과 훈구 세력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가 일어나게 된다.중종 반정 후 사림 세력이 등용되었으나 조광조 등의 급격한 개혁 추진은 훈구 세력의 반발을 야기했으며 이는 기묘사화(1519)와 을사사화(1545)를 야기시킨다. 그 후 사림 세력의 성장은 16세기 후반 정계 주도권 장악하게 되고 붕당정치의 전개에 영향을 미친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1597)은 1600년 이후의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건이다.2) 중국① 원(元 - 1271~1368)12세기 중엽에는 몽고와 타타르를 비롯한 다양한 부족국가들이 존재하였다. 이를 몽고족의 태무진이 통일하였고 부족회의를 통해 그는 대칸(大汗)에 선출되게 된다. 그가 바로 징기스칸이다. 그 후 몽고의 부족은 해체되어 호(戶) 단위로 재편성되고 사크바, 블라디미르 공국, 남서 러시아의 키에프 공국까지 차례로 정복하기에 이른다.키에프에서 2군으로 재편성, 1군은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본군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점령, 이탈리아 진공 계획 중 태종 오고타이의 사망으로 회군하게 된다. 회군 중 바투는 볼가강 유역에 1243년 킵차크 칸국을 수립한다.3대 정종(定宗) 이후 10여년간 칸위를 두고 계승 싸움을 벌이다가 4대 헌종(憲宗)은 체제를 정비해 3차 원정을 감행하게 된다. 동생 홀라구는 페르시아를 원정해 압바스조를 멸망시키고 일 칸국 수립한다. 쿠빌라이는 티벳과 운남의 대리국(大理國)을 병합해 월남을 정벌하고 남송 압박하였으며 5대 세조(世祖, 쿠빌라이칸)때 북경으로 천도, 국호를 원(元)으로 짓고 4차 정복을 단행한다. 그후 1279년 남송이 멸망하였으며 참파, 진랍, 버마, 자바 정복 후 속국화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원의 침략을 받아 고려 정복 후 쌍성총관부와 동녕부(東寧府) 설치하였으나 해전에 약한 원은 일본 원정에는 실패하게 된다.이들의 정복은 약탈에서 지배 위주로 전환하게 되면서 살상 규모도 감소되게 된다. 지배가 아닌 약탈 목적, 농경 민족에 대한 멸시는 정복 초기 대량살상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중국 본토와 만주, 몽고, 티벳, 안남은 직접 지배하였으며 고려 등은 본국과 속국관계였다.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서북부에 차가타이 칸국, 외몽고 남부에 오고타이 칸국을 세워 4칸국 성립시켰고 이 4칸국은 세조 이래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오고타이 칸국은 쿠빌라이칸에 도전하였다가 차가타이 칸국에 병합된다. 차가타이 칸국은 1397년 이후 티무르 제국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일 칸국은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이슬람 문화를 옹호하게 된다. 한편 킵차크 칸국은 티무르에 패배 후 약화, 16세기 초 러시아 공국에게 멸망당한다.몽고제국은 전 중국을 완전 지배한 최초의 정복 왕조요, 금의 이중지배체제와 달리 몽고 제일주의에 입각한 민족적 차별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몽고문자, 몽고병제를 적 반란과 반발이 일어나게 되면서 이들은 1368년 몽고로 철수하게 된다.② 명(明, 1368 ~ 1644)홍건(紅巾)적의 지도자이던 주원장이 남경에 도읍을 두고 명을 건국하게 되는데 명의 북벌군에 의해 원은 몽고로 철수, 그후 북원(北元)이 된다. 명은 한족의 전통 부흥을 지향해 몽고의 제도와 풍속을 제거하고 당, 송대의 제도에 기초한 복고적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이 때는 황제 독재체제가 강화되는데 중서성을 폐지하고 6부, 5도독부, 도찰원을 황제에 직속으로 두었고 지방은 성(省) - 주현(州縣) - 이갑제(里甲制)로 두었다. 또한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고, 사원의 토지 소유와 면세권을 제한, 과세의 공평과 인구 파악 위해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을 작성하기도 하였다.환관의 정치개입과 문자의 습득을 금지시켰음은 물론, 재위기간 중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제를 실시하였고 이와 더불어 몽고를 막기 위해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명나라는 성조(成祖) 때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정난의 변으로 권력이 탈취되자 북경으로 1420년에 천도하였다. 타타르와 오이라트의 5차에 걸친 정벌, 만주의 여진을 복속, 남해 각국과의 조공관계 재확인 등은 명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정화(鄭和)의 남해원정은 당시 세계최대 규모의 대항해였는데 그 이후의 중국은 제한적 쇄국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성조의 사후에는 왜구와 북방 민족의 침입하는 등 남왜북로의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였다.1500년경의 명은 중기로 왜구와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장거정은 이를 바꾸기 위해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는데 토지의 측량과 쓸데없는 관직을 도태시키고, 재정을 절감하였으며 기강을 확립, 조세공평과 효율화를 위한 일조편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환관의 전횡과 조선 출병으로 인한 경제적?군사적 부담, 청의파와 환관파 관료의 당쟁으로 명은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에 대한 조선 출병으로 만주에 대한 경계 소홀해진 틈을 타 여진족(만주족) 대두되게 되고 이자성의 반란한 장군과 이들 가신간의 주종관계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 가마쿠라 막부는 봉건제에 기초한 일본 최초의 정권으로 초기에는 천황조정의 지방관과 장원영주들이 존재하나 지방을 이원적으로 지배하여 봉건제는 미성숙했다고 하겠다. 또한 조정귀족과 무사 양 정권의 이원적 지배를 특징으로 한다.중앙에는 만도코로 등이 조직되었으며 지방에는 쇼군의 가신을 슈고, 지토로 파견해 치안유지와 년공(年貢)을 징수하였다.1대 쇼군 요리토모 사망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들이 2,3대 쇼군을 세습하다가 3대 쇼군의 암살로 미나모토의 쇼군 시대가 종말, 호조씨의 싯겐정치가 실시된다. 1221년 죠큐의 난 이후 상왕 측의 영지가 몰수되고 전국의 지배가 확대되면서 천황에 대한 막부의 우위는 점차 확립되게 된다. 무사는 지토로서 년공(年貢)의 징수를 담당하며 장원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게 된다.몽고의 침입과 도쿠쇼 집안의 전제에 대한 반감이 증대되면서 1324년과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막부 타도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에 무사들의 호응이 이어지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게 된다. 그러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의 고다이고 천황을 공격하게 되고, 천황은 나라로 도망, 1392년까지 아시카가가 세운 교토의 천황과 요시노의 천황이 병존해 전국의 무사들도 둘로 나뉘어 싸우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후 50년간 남북조 시대가 나타나는 것이다.② 무로마치 막부(1338 ~ 1573)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북조의 천황으로부터 1338년 세이다이쇼군에 임명되고 그후 교토부근에 무로마치 막부를 세우게 된다. 무로마치 막부는 슈고에게 군사권과 치안권 외에 판결권과 연공의 반을 거둘 수 있는 권리 수여해 장원 지배, 무사들을 가신으로 삼아 영주화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슈고다이묘이다.무로마치 초기에는 쇼균과 유력 다이묘의 세력 균형으로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으나 6대 쇼군의 만인공포 정치로 슈고 다이묘가 반발하게 되고 그로 인해 쇼군이 피살되면서 쇼군의 지위가 불안정하게 된다.1467년의 오 된다.
    인문/어학| 2008.02.09| 6페이지| 1,000원| 조회(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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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00년경의 동양과 이후 400년
    900년 경의 동양과 그 후 400년? 목 차 ?- 들어가는 말1. 중국1) 오대십국 시대2) 송2. 우리나라1) 정치적 발전 - ① 후 삼국 시대 ② 고려시대2) 대외관계의 변천3. 일본1) 헤이안 시대의 몰락 2) 가마쿠라 바쿠후-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900년경은 역사적으로 전환기에 해당한다. 중국에서는 당 왕조가 멸망 한 후 대분열이 일어나 북방에서 거란족의 요가 발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가 멸망하면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가 건국, 다시 분열기로 접어드는 양상을 보였으며 일본에서는 다이카 개신 이후 고대 천황제 국가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본 과제에서는 300년, 600년에 이어 역사의 또 다른 전환기라 할 수 있는 900년대를 시작으로 이후 400년경의 중국, 우리나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1. 중국1)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이 시기는 중국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에 나라를 세운 송(宋)이 전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979년까지의 약 70년에 걸쳐 흥망한 여러 나라와 그 시대를 말한다.그 중 5대는 화북의 중심지대를 지배하고 정통왕조의 계열로 볼 수 있는 양(梁) ·당(唐) ·진(晉) ·한(漢) ·주(周)의 5왕조인데, 역사가들이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같은 이름의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 앞에 후(後)자를 붙였다.10국은 화남과 기타 주변 각 지방에서 흥망한 지방 정권으로,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민 ·형남(荊南) ·초(楚) ·남한(南漢) ·전촉(前蜀) ·후촉(後蜀) ·북한(北漢)을 말한다. 이 밖에도 단기간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연(燕) ·기(岐) ·주행봉(周行逢) 정권 등이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지방의 절도사들은 군사 ·민사 ·재정 등 3권을 장악하여 군벌화하고, 특히 875년의 황소의 난에 활약한 유적(流賊)이나 이민족 용병 출신자들은 자립해서 절도사를 칭하여 11개 세력으로 갈라져, 후량이 당의 제위(帝位)를 의 재통일 아래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할 바탕이 되었다. 그 사이 북방에서 발해를 멸망시키고(923) 급격하게 강대해진 거란은 후당에 반역한 후진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후진까지 멸망시켜 하북을 점령해서 폭정을 하였다. 거란에 대한 민족적 단결의 필요성과 함께 군사력 ·재정규모 ·영토 등 모든 면에서 분할되어 소규모화한 절도사는 중앙 의존적인 존재가 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 및 군대가 점차 지방에 침투하게 되어 중앙집권적인 문신관료제도가 완성되어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이럴 즈음 후주의 세종에 의해 통일의 기초가 거의 굳혀졌고, 마지막으로 조광윤이 일어나 송을 세우고 여러 나라를 병합해서 통일을 완성하였다. 문화적으로 이 시대에는 촉의 인쇄술, 문학에서의 사(詞), 회화에서의 수묵화 등 송문화의 기초가 이루어졌다.2) 송(宋)황제가 된 조광윤은 제일 먼저 군인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문치주의를 근본 방침으로 삼아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문신을 우대하였으며 절도사의 권한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치주의는 국방력의 약화를 하져와 수많은 북방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하였다. 그것을 스스로 지킬 힘이 없던 송나라는 재물을 바쳐 비위를 맞추는 식으로 외적의 침입을 피해야 했다. 게다가 방대한 관리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는 생활을 해야 했다.왕안석의 변법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주장되었다. 변법은 대상인과 지주를 누르고 상공인과 소농민을 보호하여 생산력을 증가시킴으로써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광을 비롯한 대지주, 고리 대금업자, 대상인을 대표한 세력들의 반대로 인해 중지 되고 말았다. 한편 송나라는 건국과 함께 이미 북방 쪽에 강력한 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세력을 가진 족속은 몽골 계통의 거란족으로 '야율아보기'가 주변의 부족을 통일시키고 나라를 세워 요나라라고 불렀다. 요나라는 여진족인 금에 멸망되기 전까지 200 억압한 결과 군대가 약화되었으므로 그 수를 늘려 독재권을 지속시키려 하였다. 군사비가 재정의 80 %를 차지하게 되어 종래의 양세(兩稅)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차(茶)·소금·술·백반 등 일용필수품의 전매수입으로 방대한 군사비를 염출하려 하였다. 이 신경제정책이 안으로는 밀매자를 자극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반란의 온상을 형성케 하였다. 밖으로는 외부민족을 자극하여 민족의식에 눈뜨게 하고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여 송나라에 대항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송나라 300년의 역사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태조시대에 강남,사천에 할거하던 여러 나라는 멸망하여 천하가 거의 평정되었으나 산서의 북한(北漢)은 거란의 원조가 있어 그의 평정은 태종시대로 승계되었다. 때마침 거란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냉각된 것을 안 태종은 일거에 북한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후진(後晉) 때 거란에 넘겨준 연운 16주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다음 진종(眞宗) 때, 거란이 대거 침입해 왔으나, 전연(淵)에서 맹약을 맺고 은(銀)·비단 등의 세폐를 주어 화목하였으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화가 계속되어 경제계는 호경기를 맞이했고, 국가 재정은 호전하였다. 진종은 전연에서의 굴욕적인 외교를 거짓 꾸미고, 한편으로는 천자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풍부한 재정을 이용하여 일찍이 시황제나 한나라 무제가 행한 산둥의 명산인 태산에 제례를 지내 막대한 경비를 소모하였으나 그래도 재력은 아직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인종(仁宗) 때는 서하(西夏)와 수년간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서하는 송나라의 소금 전매제의 확립으로 자국산 청백염의 수출이 금지되어 이미 태종 때부터 송나라에 반항하다가 인종 때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이 전쟁으로 서하도 큰 타격을 입었으나 송도 전쟁 뒤 경제공황에 빠져 재정은 적자에 허덕이고 실업자가 속출하여, 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동남지방에도 반란이 일어 바야흐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인종의 뒤함께 등용한 일도 있으나 결국 북송 말기까지 신법당이 정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북송 말의 신법당 관리는 구법당 관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당쟁이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 만주에서 일어난 금나라(여진족)에 의하여 1127년 멸망하였다(靖康의 變). 남송시대에는 신법당에 의하여 폐출되었던 철종의 후비(后妃) 맹씨(孟氏)가 고종(高宗)의 즉위를 인정하였던 관계로 구법당계의 관리가 많이 등용되었다. 남송이 강남 땅으로 쫓기자 정치가·군인·학자 사이에는 주전론(主戰論)이 강하였으나 문약한 송인(宋人)은 도저히 여진족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싸울 때마다 패하고 군사비는 늘어나 백성은 중세(重稅)에 허덕이고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종 때, 재상(宰相) 진회(秦檜)는 악비(岳飛) 등 군벌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의하였으나 금나라에 정변이 일어나 화평은 영속되지 못하였다. 두 나라의 화평은 자주 깨져, 몇 번이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남송 사회는 항상 전시상태에 놓여 있어 군비를 마련하기 위한 지폐가 남발되었다. 이 때문에 물가는 앙등하고 무거운 세금과 함께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더구나 북송시대에는 서방에서 유입되던 은(銀)이 남송시대에는 거꾸로 서방으로 유출되어 자금의 결핍으로 산업은 위축·침체되고 실업자가 증대하여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원풍(元豊)의 관제개혁(官制改革:1078∼85)으로 재상의 권한이 강화되어 남송시대에는 진회·한탁주(韓5胄)·사미원(史彌遠)·가사도(賈似道) 등이 전권(專權)을 휘둘렀고, 이에 반하여 천자의 독재권은 형식화되어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관기(官紀)는 문란해졌다.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것이 붕괴하려고 할 때 몽골군이 침입하였으므로 송나라는 마침내 그 무력 앞에 멸망하였다.② 문화송나라의 문화는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 문화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복고적인 성격이 송대 문화의 한 특징을 이루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문학, 특히 산문에 있어서 송나라는 하나의 뚜렷한 시대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당나라 말기부터 한나라의 고문으로을 받았으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원시적인 자연경관을 살린 정원을 매력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와 같은 풍조와 아울러 사대부의 생활 주변에도 고품(古品)을 아끼고 사랑하는 복고취미가 크게 유행하였다. 고동기 같은 것이 발굴되면 사대부들은 그것을 서재에 장식하고 감상하는 것을 하나의 취미로 삼았다. 송나라 때 편찬된 《고고도》 《박고도》 등은 모두 고동기 발굴품을 수록한 책들로서, 학문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당초의 편찬 동기는 취미생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취미생활뿐만 아니라 의학분야에도 복고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풍조가 파급되고 있었다. 당나라 때까지의 양생법은 신체에 이상이 생기면 밖으로부터 약을 투입하여 치료하는 대증요법이 채택되고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온보의 방법이 등장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환자의 체내에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줌으로써 질병을 자연 치유케 하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옛날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꾸밈이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이다. 송나라 이전의 문화를 그 원인이야 어디 있건 인간 본래의 개성이 몰각됨으로써 어떤 한계점에 부닥친 문화라 특징짓는다면, 송나라 문화는 인간의 자각과 더불어 그 개성이 발굴되고 존중되는 풍토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송나라 문화의 또 하나의 특색은 서민문화의 발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가 모든 백성에게 골고루 향유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정된 계층, 곧 큰 도시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 향상에 따라 발생한 현상이었다. 송대에는 산업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상인들의 세력이 커지고 도시도 발달하였다. 도읍지인 카이펑은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와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사대부들의 귀족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 문화는 서민들의 생활이 향상되면서 자연히 서민층에도 확산되었다. 예컨대지닌다.
    인문/어학| 2008.02.09| 7페이지| 1,000원| 조회(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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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년경의 동양과 이후 300년
    300년경의 동양과 그 후 300년? 목 차 ?- 들어가는 말1.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1) 개관2) 위, 진3) 남북조 시대2. 한국의 삼국시대1) 삼국의 정치적 발전 4)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2) 삼국간의 항쟁 5)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3) 삼국의 통치체제 6) 신라의 삼국 통일3. 일본-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300년경은 전 세계적으로 전환기적 시기이다. 중국에서는 5호(胡)로 불리는 이민족들에 의해 중국 정통왕조가 멸망하는 사건이(311) 발생하게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가 한(漢) 4군 중 400여년간 존속한 낙랑군을 최종적으로 몰아내면서 고대국가의 본격적 발전이 시작되는 때이며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야마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점차 고대 국가의 모습이 형성되어 나가는 시기이다.본 과제에서는 동아시아 주요국인 중국, 한국, 일본의 300년경의 세계와 그 후 300년의 모습을 통해 각 국가가 시기별로 어떤 면모를 거쳐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1. 중국의 위진남북조(南北朝) 시대1) 개관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후한이 멸망한 다음 해부터 수의 문제가 진(陳)을 멸망시키기까지(221∼589)의 시대를 말한다. 진(秦), 한, 수, 당의 두 통일기를 잇는 정치적 분열시기이고, 문화적으로는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이 있는 특유한 성격을 지닌 시대이다.위는 촉·오와 더불어 삼국이라 하며, 진(晉)은 낙양에 도읍을 한 서진(西晉)과, 오호십육국의 난으로 중원을 잃고 남경에 도읍을 한 동진(東晉)으로 나뉜다. 그 뒤 송(宋)·남제, 양, 진(陳) 등 4국의 남조(南朝)가 건강에 도읍했으며, 이들 남조와 오(吳)·동진(東晉)을 합하여 육조(六朝)라 하는데, 이 시대 전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강북의 분열을 수습한 선비탁발부가 439년 태무제 때 강북을 통일하였다. 6세기 중반 북위는 동위, 서위로 갈리고, 이어 동위는 북제, 서위는 북주가 되었으며, 후량, 진(晉)과 더불어 잠시 이들 4국의 대립이 전개되었다.그 뒤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켜 북조를 통일하였고 북주를 찬탈한경에 주둔, 왕도 등 중원의 호족과 토착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317년 동진을 세움으로써 중국 북부의 오호 십육국과 남북으로 대치하는 남북 분열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진나라는 280년에 오(吳)나라를 평정하여 3국을 통일하고, 점전법, 과전법 등의 토지제도와 세법인 호조식을 공포하였다. 2대의 혜제에 이르러 귀족관료는 문벌주의에 안주하고 소외된 하급 사인(士人)의 일부는 황제의 일족인 여러 왕의 심복이 되어, 290년 8왕의 난을 일으킨다. 또 이 반란에 종군한 흉노 등 변방의 여러 민족들도 자각하기에 이르러,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궐기하여 영가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써 낙양과 서안은 외방 민족에게 파괴되어 316년에 멸망하였다.이에 앞서 오(吳)나라의 옛 도읍지 남경에 있던 서진 왕족의 사마 예는 낙양과 장안이 함락되자 남경을 도읍으로 삼아 동진을 세웠다. 황하 유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귀족은 강남의 토착 귀족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면서 이들과 화합하여 귀족제의 국가를 이루어갔다. 또한 북방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따라 양자강 중 ·하류 유역의 개발이 진전되어 장원이 형성되었다. 문화면에서도 왕희지의 글씨, 고개지의 그림, 도연명의 시 등 훌륭한 명사들이 나와 좋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동진의 제권(帝權)은 그 세력의 미약함으로 인해 장군들의 정권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419년 유유가 송(宋)나라를 일으켰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멸망하였다.2) 남북조 시대이 시기는 진(晉)과 수(隋)나라 중간시대에 해당하며, 이 동안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각각 왕조가 교체되었던 시기이다. 남조는, 한족 왕조인 송(宋)나라의 문제(文帝)에서 시작되어 제 - 양 - 진 의 4왕조가 교체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589년 진이 수의 문제에게 멸망될 때까지를 가리킨다.북조는 오호십육국의 혼란을 수습한 북위의 태무제 때부터 시작되어, 이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고 동위는 북제에게, 서위는 북주에게 교체되었다가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화북지역을 통일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양견이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아직 부족별로 홑어져 있던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전연과 백제의 침략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소수림왕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국가 체제를 개혁하여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태학의 설립 등은 지방에 산재한 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 충청 전라도와 낙동강중류 지역, 강원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등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침류왕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한편, 신라는 내물왕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룽도)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다. 다음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역하였다. 또한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신라는 6세기 진흥왕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의 장악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남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에 그 동안 후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는 강력하게 미치지 못하였고, 원래 성이나 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삼국은 뒤에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 아래의 성이나 군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말단 행정 단위인 촌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 세력을 촌주로 삼았다. 촌주는 지방관을 보좌하면서 촌락 내의 행정과 군사 실무의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방령은 각각 700~1,200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신라의 군주는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정을 거느렸다. 신라에는 정외에도 서당이라 불리는 군대가 있었다.4)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6세기 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수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시 한반도에서 신라의 위협을 받던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연결하고, 남으로 백제.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여 이에 대응하였다.돌궐이 수에 의하여 멸망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고구려는 먼저 중국의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수의 문제와 양제는 잇따라 백만 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략해 왔다. 고구려는 병력 규모는 작았으나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 냈고, 양제의 침입 때에는 을지문덕이 적을 유인한 뒤 살수에서 크게 격파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12). 이를 살수 대첩이라 한다.수의 뒤를 이은 당은 건국 초에는 유화 정책을 취했으나 곧이어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 왔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 지방에 천리 장성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특히, 연개소문은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내적으로 독자 풍
    인문/어학| 2008.02.09| 8페이지| 1,000원| 조회(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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