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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중국문명의 발생과 전개 평가A+최고예요
    Ⅰ. 序言문명을 문화의 가치체계를 떠받치는 물질적·기술적 기초라고 정의할 경우 중국(황하) 문명의 연대 범위는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가 나타난 상나라를 거쳐, 철기가 거의 완전히 보급된 전한시대(前漢時代)까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래는 문명을 미개의 상대적인 말로 이해하고, 문자의 발명과 도시의 성립 등에 중점을 두어, 황하 문명의 연대도 청동기시대 이후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본 레포트의 시대 범위는 중국문명이 발생하기 전인 신석기 시대부터 문명이 구체화되어 고대국가 형태를 띠는 상나라 시대까지로 설정한다. 또한 중국문명의 기원은 황하에서 시작된 바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내용 전개를 해 나갈 것이다.Ⅱ. 本論1. 신석기시대중국 신석기시대의 문화는 크게 황하 중류의 앙소문화와 산동의 용산문화로 나뉜다.1) 앙소문화앙소문화는 1921년 하남성 승지현에서 발견되었다. 주요 분포 지역은 하남성(河南省), 섬서성(陝西省), 하북성(河北省) 남부와 감숙성(甘肅省) 동부에 위치하며 대표유적으로는 섬서성 서안시 반파(陝西省西安市半坡), 임동현 강채(臨潼縣姜寨), 보계시 북수령(寶谿市北首嶺), 서향현 이가촌(西鄕縣李家村) 등이 해당된다.앙소문화의 토기는 태토, 색조에서 본다면 정질홍도(精質紅陶)와 사질홍도(砂質紅陶)가 주를 이 루며 회도(灰陶)는 적고, 흑도(黑陶)는 극히 드물다. 그림 1. 황하와 앙소촌의 위치문양은 주로 식물도안과 기하문양이지만 동물문양도 드물게 볼 수 있다.앙소문화는 황토 고원을 중심으로 하여 황하 중?유역으로 확대되는데, C-14 연대측정에 의하면 그 연대는 대략 B.C. 4,500~2,500년으로 2,000년간이나 지속되며 이 문화가 후기 신석기시대 전반단계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당시 집락에서의 생활은 상당히 안정된 것이었다. 유적의 면적은 수만~수십만 ㎡ 혹은 그 이상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섬서성에 있는 서안 반파 유적과 임동현 강채 유적의 발굴에 의해 촌락의 배치가 분명해졌다. 주거는 밀집해 있지만 규칙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고 있다. 하남성 정주시 대하촌 유적에서 발견된 장방형 주거는 연접하는 3개의 부속 가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큰 부속 가옥은 칸막이 벽이 붙어 있고 전체면적이 70제곱미터인 완전한 건축물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앙소문화의 주거 건축 기술이 높은 수준에 달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농경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였었는데, 밤 외에 야채류도 재배되고 있었으며 밭갈이에 이용된 돌삽과 수확용 석제나 토제, 낫 등의 간단한 농구도 존재하고 있었다. 전 시대에 성행했던 말안장형 갈판은 모습을 감추고 가축은 주로 돼지, 개뿐이며 그 외의 종류도 가축화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그리고 연대와 지역에 따라 토기의 형태, 양식, 문양에 차이점이 보이고 있다. 평저 혹은 고대부석완, 분, 광구호, 정 그리고 소구첨저병(小口尖底甁)등이 통상의 기종에 포함된다. 문양의 경우는 승석문을 제외하면 마연 토기에 그려진 적색과 흑색의 채문을 그리기 전에 백색 슬립을 입힌 토기도 존재하고 있다. 채도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수량은 물론 문양상으로도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예를 들면 황토 고원지대의 조기에 해당하는 북수령 유적에서는 구연부에 채문(彩文)이 그려진 환저발 이외에 채도가 드물어지는 점 등이 있다.2) 용산문화1928년 산동성 장구(章丘)현에서 발견되었다. 용산문화는 앙소문화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그 지리적 분포 범위는 그보다 더 광대하여 황하유역의 전역에 확산되었고, 독특한 지역성을 가지고 있다.용산문화의 취락은 앙소문화의 것보다도 일반적으로 보다 광대하지만 그 배치상황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명치 않다. 주거는 수혈식에서 평지식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그 대부분은 짚풀을 섞은 점토나 햇볕에 말린 벽돌로 만든 벽으로 지어진 원형 건조물이다. 사람들은 습기를 막기 위해 집자리 바닥에 석회를 발랐는데 이는 특이할만한 현상이다. 집락주위에 있는 얼마 안되지만 부장품을 가진 씨족묘지 몇 개를 제외하면 이 그림 3. 용산문화의 3대문화권지역에서 발견된 묘지는 그다지 많지 마연되어 있고 장식으로서 승석문, 람문, 격자문이 있고, 그것은 각각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지역색을 보이고 있다. 조기용산문화의 채도편도 발견되고 있다. 특히 후기에는 녹로가 널리 사용되고 상당히 두께가 얇아져 두께 1~2㎜의 난각도(卵殼陶)가 출현하게 되며 이는 토기제작기술이 새로운 도달점에 이 그림 4. 물주전자르렀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용산문화토기는 무문이며, 소박하고 우아하다. 취사용기 중에서는 규(?)와 정(鼎)이 많고 식기 중에는 태토가 아주 얇은 흑도고병배(黑陶高柄杯)가 사용된 점, 발치(拔齒) 등의 풍습은 용산문화가 대문구문화의 계승자임을 말해 준다.C-14연대측정에 의한 용산문화는 B.C. 2,600년에서 B.C. 2,000년까지 약 600년간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하한은 B.C. 1,500년까지 내려올 가능성도 있다. 중원의 용산문화는 앙소문화를 계승해서 발전해 왔고 그 기초위에 하(夏)와 결부되는 이리두문화가 대두한다.2. 이리두 ? 이리강 문화1) 이리두 문화(二里頭 文化)이리두 문화는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 등에서 발견된 용산문화와 상대 전기문화 사이에 위치하는 하나의 고대문화이다. 이리두 문화분포 중심지역은 하남성 서부에 있다. 정주상성(鄭州商城), 욱묘왕(旭廟王), 동채(童砦) 그리고 임여현매산(臨汝縣煤山) 등지의 유적 층위 관계에 의해서 이리두 문화층은 하남 그림 5. 이리두 문화의 분포 범위 성의 용산문화층 위에 퇴적되고, 또 이리강 상대 전기 에 상당하는 문화층 밑에 위치한다.용산시대에 후속하는 이리두 문화기(전 1900년~전 1500년)는 중국의 초기 청동기 문화에 해당하며 사서에 기록된 하(夏)대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이리두 문화는 거의 동시기에 분포하는 산동, 서북(西北) 연안 지역에 악석(岳石)문화, 연산산맥 남북에 하가점(夏家店) 하층 문화, 장강 하유역 태호(太湖) 지역에서는 마교(馬橋) 문화 중에서 그 발전 정도가 가장 진전된 문화이다. 이리두 유적은 하남성 언사(偃師)현성의 남서 9Km 商代二里崗期)’라 명명하였다. 이리강 시기에는 한쪽 벽의 길이가 16,90~ 1870m, 높이 10m, 폭 30m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이 전후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체길이 6960m로 그 범위는 정주 옛 성보다 3분의 1이나 더 컸다. 정주상성이 많은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끈 것은 당시 중국고고학 탐사에서 발견된 최초의 상나라 시기 성벽지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나라 시기 후기 도성 유적지인 안양 은허에서는 달굴질식의 성벽 유적지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안양 은허보다 더 이른 시기의 정주 상나라 시기 전기 유적지에서 규모가 거대한 달구질식 성벽 유적지의 발견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가져다 그림 6. 鼎주었다. 정주산성은 8~10cm 간격으로 판축되어 있었고, 성벽의 둘레는 6960m, 높이가 9.1m, 기저의 두께는 36m로 평균 20m에 달하였다. 청동기와 돌로 된 연장으로 성벽을 제작하고, 흙을 파고 운반하고 압축하는 등의 전 과정을 통해 1년 330일, 1일 1만 명이 작업한다고 가정할 때 성벽을 쌓는데 걸리는 시간 18년이 소요되었다. 거대한 성 내부의 도시의 기능은 행정과 제사의 중심이었고, 성벽의 외부는 수공업자의 거주지로 도예, 청동주조, 골 가공의 작업장을 갖추었다. 정주의 유적에서 청동기나 골기를 만드는 전문의 공방이 중앙의 성벽의 바깥에 설치되었다. 중앙의 성벽 중에는 지배자 층의 궁전이나 거주구가 있고 노동자는 그 외측에 거주하였다. 궁전 가까이에는 두개골의 산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100명 정도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이 두개골의 대부분은 청장년 포로를 희생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리강 문화의 성벽의 동북 모퉁이에 성벽에 접해서 개를 다수 묻은 혈(穴)이 발견되었는데, 개와 사람이 함께 매장되었다. 보통은 가축은 가축끼리 매장되는데 이 개는 번견(番犬)의 의미를 지녔다. 또 유약이 칠해진 도기가 발견되었는데 1200도 보다 조금 낮은 온도에서 구워 완전한 자기라 할 수 없지만 중국인은 원시자기라 부른다. 년대 초의 하남 정주 이리강의 상 중기의 유적지 발굴은 용산문화와 상왕조 후기문화에 속하는 은허문화의 공백을 보강할 수 있는 대발견이었다. 현재 중국의 고고학계에서는 정주 상성이 탕왕이 처음 거주한 동박이라는 설을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아울러 언사상성이 탕의 도읍지일 서박일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고 보고 있다.3. 상왕조1) 상왕조의 변천과 신정통치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상족의 시조는 설인데 그 어머니인 간적이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고 한다. 일종의 이상감생설화이다. 설은 요순시대에 백성을 교화하고 후에 우를 도와 치수에 공을 세워 상 땅에 봉건되었기 때문에 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설에서 14대째에 탕왕이 등장해 하왕조의 폭군 걸왕을 물리치고 상왕조를 개국했다. 이후 수차례 도읍을 옮겼다가 19대째인 반경 때에 은으로 옮겨 마지막 주왕까지 273년 간 유지되었다. 그림 7. 상나라 시대의 유적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상왕조의 문화는 전기(기원전 1700년경)?중기(기원전 1600년경)? 후기(기원전 1300년경)의 세 시기로 구분되고 있다.하남의 안양은 상 후기의 도읍지로 200여년이 넘었다. 안양은 발굴결과 대규모의 야금?제골?요업 등의 작업장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갑골 각사에서 정치에 관하여 점을 친 기록과 후세에 전해진 문헌들도 모두 안양이 정치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견고한 성벽이 없어 상나라 멸망의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하남성 안양(安陽)소둔(小屯)은 갑, 을, 병으로 이뤄진 의례구역으로 이뤄졌는데 갑은 왕궁과 귀족의 주거지이고 을은 신전 병은 의례장으로 되어 있다. 주변의 서비스지역은 반지하식수혈주거지, 수공업제작소(공장)로 되어 있다. 또한 도로망과 역이 설치되었다.상대 후기의 청동기는 전기 중기에 비하여 매우 정교한 주조기술과 형태를 갖춘 것이 많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청동제 무기로 무장된 전문적인 전사 집단이 출현하게 되었다. 물론 제사용의 정교한 제기도 다량 출토되었
    인문/어학| 2007.06.17| 8페이지| 1,000원| 조회(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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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부여의 묘제
    「부여?고구려고고학」부여의 묘제- 목 차 -Ⅰ. 머리말Ⅱ. 부여의 考古文化Ⅲ. 부여의 무덤유적1. 吉林省 吉林市 帽兒山墓地2. 吉林省 楡樹縣 老河深墓地3. 吉林省 永吉縣 學古무덤Ⅳ. 부여 묘제의 특징Ⅴ. 부여 묘제를 통한 사회상 고찰-부여 지배집단의 성격에 관하여Ⅵ. 맺음말Ⅰ. 머리말고대의 무덤은 당시의 생활상을 축소해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어느 한 무덤의 묘제에서 보이는 제요소는 지역성, 민족성, 시기성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무덤에서 확인되는 여러 가지 자료를 고고학적인 방법으로 그 사회상 복원에 노력을 다하고 있다.최근 부여의 영역 내에서 많은 생활 및 무덤 유적이 보고되고 있다. 현재 부여 王城으로 이야기되는 東團山 ? 帽兒山 유적에 대한 기초 조사가 이루어진 상태이고, 西團山文化를 포함하여 老河深유적과 學古유적 등 夫餘 시기 고고유적에 대한 조사가 행해졌다. 부여문화의 전반적 내용을 인식하기에는 아직도 자료가 매우 부족하지만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부여의 무덤, 특히 묘제에 관하여 논해보고자 한다.Ⅱ. 부여의 고고문화고고문화를 논하는 데 있어서 무덤유적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만큼 고고문화 형성에 있어 무덤유적의 비중은 크다. 본고에서는 먼저 무덤유적을 주로 하는 부여의 고고문화를 통해 부여의 원류문화와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우리 학계 일각에서는 최근 중국 고고학계의 연구성과를 수용하여 ?離國의 문화와 부여의 선행문화 및 부여 자체 문화의 흐름을 구명하는 데 관심을 할애하고 있다.먼저 부여건국 주도집단의 출자인 ‘탁리국 문화=白金寶 文化’론이 제기되면서(노태돈, 1989) 이 방면 논의 전개의 물꼬가 트이게 되었다. 한편 동일한 관점에서, 중국학계의 연구성과를(董學增?李澍田, 1984) 참작하여, 예맥계에 의한 ‘백금보문화’?‘漢書文化’혹은 ‘望海屯文化’를 탁리국의 문화로, 그리고 이들 문화와 상당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예족의 ‘西團山文化’를 부여의 기저문화로 이해하는 견해가(박경철, 1992, 1994)론에 대해서는 회의적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송기호, 2004) 특히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적 계층화 등 탁리국의 사회발전단계 구명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박양진, 2005)한편 종래 우리 학계는 청동기시대 대표적 묘제인 支石墓가 遼東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널리 분포한 반면, 송화강 유역 일대에서는 흔치 않은 것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최근 우리 학계에서는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서단산문화가 발전하던 기원전 5세기경 그 주변인 東遼河~輝發河 상류 일대를 중심으로 한 길림성 남부지역에 蓋石式 고인돌을 기반으로 한 寶山文化가 형성?발전함에 주목하고 있다.(이종수, 2005) 이런 보산문화의 존재는 부여 선행문화의 중층성을 시사해 주는 방증으로서, 또 훗날 부여문화의 다원성과 부여국가 경영에 나타나는 遠心性에 대한 조짐으로서 예시될 수 있는만큼 주목에 값한다.아울러 시기는 다소 떨어지지만, 老河深/西?溝유적의 성격에 관한 제 논의 진전의 향방 또한 같은 맥락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또 이미 중국학계 일각에서(朱向永, 1994) 부여의 주요세력 집단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는 遼源과 동요하 상류 일대의 ?泉文化 역시 같은 이유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없지 않다.(이종수, 2004)무엇보다도 최근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종래 ‘부여의 선행문화=서단산문화’론에 갈음한 눈강 하류역 黑龍江省 서남부지역의 고고문화에 기원한 泡子沿式文化를 탁리국 문화 및 부여의 선행문화로 파악하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오강원, 2000) 이를 계기로 우리 학계는 서단산문화를 부여의 선행문화로, 포자연식문화를 부여의 중심문화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이종수, 2005;송호정, 2005) 물론 이 경우에도 서단산문화와 포자연식문화의 계속성에 주목하는 견해와(송호정, 1999;오영찬, 1999, 송기호, 2004, 송호정, 2005) 두 고고문화 사이의 단절성에 주목하는 견해가 (오강원, 2000) 양립하는 등 그 구체적 인식 내용에서 다소 편차 南城子(武國勛, 1984) 혹은 龍潭山城(李健才, 1982, 1995)과 인접하고 있어서 부여의 왕족 혹은 지배층의 무덤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 연대1980년에 조사된 3기의 木槨墓에 대한 약보고문만이 발표되어 있는 상태라 구체적인 편년을 가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고분간의 타파관계와 다른 유적과의 비교 등을 통해서 대략적인 연대의 추정이 가능할 것 같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帽兒山墓地群 전반에 걸쳐 최하 2층, 최고 3층에 걸친 고분간의 타파관계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대체로 보아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單槨,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兩槨 또는 3槨墓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서 볼 때 帽兒山墓地群이 처음 조영될 때로부터 마지막으로 사용될 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적인 편차가 적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는 楡樹 老河深의 경우 異姓을 함께 매장할 경우 절대가수가 異穴의 방식을 채택한 반면 帽兒山의 경우 거의 예외없이 동혈합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남녀를 합장하는데에 있어 두 고분군간에 이와 같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帽兒山墓地群이 楡樹 老河深보다 늦은 시기에 해당함을 시사한다. 상기의 사항들을 고려하여 볼 때, 帽兒山墓地群의 연대는 기원후 1~2세기대가 아닐까 한다.))(3) 묘제帽兒山墓地는 1980년 3기의 무덤을 발굴하여 그 자료를 공개하였으며, 1991년 10여 기의 무덤을 발굴하였고, 1993년 4기를 발굴하였으며, 1997년에는 28기의 무덤을 발굴 조사하였다. 帽兒山에서 조사된 무덤은 대부분 膏泥를 바른 ㅍ자형의 목곽을 사용한 單槨, 雙槨, 혹은 三槨의 수혈식 토광목곽묘이다. 대형 무덤 가운데는 “頭箱”과 “棺床”이 설치되었으며, 일부 木槨에서는 彩繪의 흔적도 확인된다. 무덤은 돌과 흙을 섞어 封하였고, 일부 무덤에서는 대형의 강돌을 무덤 위에 배치하여 그 標識로 삼았다.(4) 출토유물帽兒山墓地에서 출토된 유물은 매우 풍부하고 다양하다. 토기로는 素面來砂의 雙橋耳罐과橫橋耳斜頸壺가 가장 특징적이다.위치하고 있다.(2) 연대전체 발굴면적은 약 5800 평방미터에 달하는데, 세 시기로 구별되는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下層에서는 청동기시대인 西團山文化 시기의 집자리 2기, 中層에서는 시기적으로 紀元前後에 속하는 무덤 129기, 上層에서는 隋唐시기의 靺鞨族의 무덤 37기 등이 발굴되었다. 老河深墓地의 무덤들은 대체로 서력기후 전후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1987)(3) 묘제본고의 고찰 대상이 되는 중층의 무덤은 모두 129기인데 24호묘가 9호묘 및 28호묘의 상층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서로 중복 혹은 파괴 관계에 있는 것은 없다. 무덤들은 장방형의 수혈토광묘인데 대체로 지표 하 50cm, 깊은 것에 2m에 달한다. 묘광의 크기는 대개 길이 2.8m, 너비 1.2m 전후이며 가장 큰 것이 길이 4m, 너비 2.5m 가량, 가장 작은 것이 길이 1.4m, 너비 50cm정도이다. 墓壙은 대체로 동서 방향을 하고 있으며 頭向은 동쪽을 향한 것이 23기(18%), 서쪽을 향한 것이 106기(82%)이다.老河深墓地에서는 79기의 무덤에서 목판을 이용한 葬具가 확인되었는데, 관못은 발견되지 않아서 장부연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량의 홍색 漆껍질도 발견되어 일부 棺材는 紅漆을 한 것으로 보인다. 관 바닥에는 때로 삿자리, 짐승 가죽, 자작나무껍질 등을 깔았다.(4) 출토유물주요 출토유물로는 각종 토기, 철기, 청동기, 금?은?석제 장식품 등이 있는데, 크게 무기, 생산도구, 생활용구, 거마구와 장식품으로 구분할 수 있다. 토기는 모두 114기의 무덤에서 발견되는데 절대다수가 壺形 과 罐形의 토기이다. 劍, 矛. 環首刀, 鏃, 투구 등의 무기는 모두 43기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도끼, 낫, 삽, 끌 등의 생산도구는 모두 28기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거마구로는 말재갈, 재갈멈추개, 굴대, 말 장식 등이 있는데 말재갈이 24기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그밖에 개인용 장식품이 모두 97기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금?은?마노 등으로 만든 귀걸 老河深과 유사하면서 고분의 구조형식이 노하심보다 이른 시기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하여 일단 기원전 1세기대로 보고자 한다.)(3) 묘제이 무덤은 1983년 조사되었으며, 장방형수혈토광묘에 남녀를 合葬한 무덤으로 특별히 葬具는 보이지 않는다.(尹玉山, 1985)(4) 출토유물26덤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는데, 銅? 1, 銅帶鉤 2, 昭明鏡 10점, 鐵鎌1, 鐵刀 4, 鐵矛 1등과 금반지 1, 마노 구슬 2점 등이 출토되었다.)Ⅳ. 부여 묘제의 특징부여 묘제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부여 무덤의 기본적인 묘제는 토광목곽묘로서 “有棺無槨”이라는 역사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무덤은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른 시기에는 單純土壙墓 또는 單槨土壙墓(單葬 또는 合葬)의 특징을 보이다가 늦은 시기에는 兩槨土壙墓 또는 三槨土壙墓(同穴合葬)의 특징을 보인다. 토광묘는 토광 내에 목곽을 시설하고 목관은 안치하지 않는 대신 목곽의 바닥에 갈대로 짠 자리 또는 자작나무껍질을 깔아두어 屍面과 그 외의 공간을 구별해 놓았다. 고분의 규모는 보통 길이 2~2.5m, 너비 1m 가량인데, 대형묘의 경우 길이가 4m, 너비가 2m 여에 달하는 것도 있다. 葬法의 경우 부여의 전 기간 동안 대체로 앙신직지장에 1차장이 유행하였는데,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1次火葬도 존재하였다. 두향은 대부분 서향으로 되어 있으나, 일부 서북향과 동향의 것도 있다. 이외에 장속으로는 고분 내 또는 고분군의 한 지점에 말이빨 또는 말머리를 매납하는 경향이 있었다.Ⅴ. 묘제를 통한 부여의 사회상 考察-부여 지배집단의 성격에 관하여부여 성립기의 지배집단은 軍事集團的인 성격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초기로 갈수록 분명한데, 西?溝 등을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西?溝의 경우 근 500여기의 고분이 동일 구릉상에 밀집분포되어 있으면서도 합장으로 되어 있는 것이 단 한기도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이들 집단의 성원이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는 요원들로서 가족을 대하다.
    사회과학| 2007.06.17| 6페이지| 1,000원| 조회(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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